왕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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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십리
往十里 | Wangsimni[1]
왕십리의 행정구역 번화
(1894~현재)
왕십리 생활권
법정동 경계
행정동 경계

파일:external/weekly.chosun.com/2226_58.jpg
왕십리오거리와 왕십리역
1. 개요
2. 역사
2.1. 지명의 유래
2.2. 전근대
2.3. 일제강점기
2.4. 현대
3. 상세
4. 행정구역
4.1. 법정동
4.1.1. 상왕십리동
4.1.2. 하왕십리동
4.1.3. 홍익동
4.1.4. 도선동
4.2. 행정동
4.2.1. 왕십리도선동
4.2.2. 왕십리2동
5. 지리
6. 교통
6.1. 도로
6.2. 철도
6.3. 버스
7. 주거
7.1. 공동주택
8. 상권
9. 교육
10. 왕십리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
11. 출신 인물
12. 여담
13.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서울특별시 성동구의 한 지역으로, 서울의 부도심 중 하나이자, 서울 동북부 일대의 중심지이다. 좁게는 상왕십리동, 하왕십리동, 홍익동, 도선동 일대(행정동 왕십리도선동왕십리2동 관할 구역)를 이르고, 넓게는 왕십리역을 중심으로 행당동, 마장동, 사근동의 각 일부 지역과 중구 황학동, 흥인동, 신당동의 북쪽 일부 지역을 포함한다. 이는 역사적으로 행정구역 왕십리에 포함되었던 지역과 근대 이후 왕십리 상권이 확장된 지역이다. 행정구역 자체의 위치는 성동구 서북부에 치우쳐 있지만, 넓게 왕십리라고 일컫는 지역은 성동구 서북부에서 중앙부에 이른다.

넓은 의미의 왕십리 안에서도 두 지역으로 구분되는데, 경원선 선로를 기준으로 서북쪽은 왕십리, 경원선 선로 동쪽은 한양대 혹은 한대앞이라고 부른다. 다만, 마장동은 두 지역 중 왕십리라고 부르는 쪽이다. 현재 대개 외지인들이 인식하는 왕십리는 왕십리역과 왕십리오거리 일대인데, 행정구역상 이 지역은 행당동이다. 행정구역상 왕십리는 상왕십리역 일대로, 대개 그 일대를 상왕십리라고 부르나, 상왕십리역 자체는 하왕십리동에 속해 있고, 역사적으로도 그 일대는 하왕십리에 속한 지역이었다.

행정구역상으로 왕십리동이라는 명칭으로 존재하지는 않으나, 법정동 상왕십리동과 하왕십리동이 존재하며, 행정동은 2008년 8월 11일에 왕십리1동과 도선동이 합쳐진 왕십리도선동과 왕십리2동이 있다. 왕십리도선동은 왕십리로 이북 지역을, 왕십리2동은 왕십리로 이남 지역을 관할하고 있다.

2. 역사[편집]



삼국시대 ~ 후삼국시대
475
고구려
북한산군(北漢山郡)
553
신라
신주(新州)
557
북한산주(北漢山州)
568
남천주(南川州)
604
한산정(漢山停)
660
한산주(漢山州)
757
한주 한양군(漢州 漢陽郡)


고려시대
995
관내도 양주목(關內道 楊州牧)
1018
양광도 양주목(楊廣道 楊州牧)
1067
남경(南京)
?
양광도 양주목
1104
남경(南京)
1308
한양부(漢陽府)


조선시대
1395
경기좌도 양주군(京畿左道 楊州郡)
1397
경기좌도 양주부(京畿左道 楊州府)
1413
경기도 양주부(京畿道 楊州府)
1424
한성부(漢城府)
남부 두모방
(南部 豆毛坊)
동부 인창방
(東部 仁昌坊)
1751
신당리계
(神堂里契)
신촌리계
(神村里契)
왕십리계
(往十里契)
?
왕십리1계
(往十里一契)
왕십리2계
(往十里二契)
1895
남서(南署) 두모방 왕십리계
신당리동
(神堂里洞)
무학동
(舞鶴洞)
여계동
(余溪洞)
단지동
(端池洞)








1910년 ~ 1975년
법정동은 파란색, 행정동은 분홍색
1910. 10. 1.
경기도 경성부 남서 두모방 왕십리계
(京畿道 京城府 南署 豆毛坊 往十里契)
신당리동
(神堂里洞)
무학동
(舞鶴洞)
여계동
(余溪洞)
단지동
(端池洞)
1911. 4. 1.
두모면
인창면(仁昌面)
두모면(豆毛面)
신당리
(新堂里)
무학리
(舞鶴里)
왕십상리
(往十上里)
왕십하리
(往十下里)
단지리
(端池里)
1914. 4. 1.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京畿道 高陽郡 漢芝面)
신당리
하왕십리
상왕십리
(上往十里)
하왕십리
(下往十里)
1936. 4. 1.
경기도 경성부
신당정
(新堂町)
상왕십리정
(上往十里町)
하왕십리정
(上往十里町)
1943. 6. 10.
경기도 경성부 성동구(京畿道 京城府 城東區)
신당정
상왕십리정
하왕십리정
1946. 10. 9.
서울특별자유시 성동구
(서울特別自由市 城東區)
신당동
(新堂洞)
상왕십리동
(上往十里洞)

하왕십리동
(下往十里洞)

1947. 6.
황학동
(黃鶴洞)
동무학동
(東舞鶴洞)
서무학동
(西舞鶴洞)
북무학동
(北舞鶴洞)
중무학동
(中舞鶴洞)
남무학동
(南舞鶴洞)
용곡동
(龍谷洞)
앵구남동
(櫻丘南洞)
앵구중동
(櫻丘中洞)
앵구문화동
(櫻丘文化洞)
앵구생구동
(櫻丘生驅洞)
앵구유락동
(櫻丘有樂洞)
앵구행동
(櫻丘幸洞)
상왕십리서부동
(上往十里西部洞)

상왕십리동부동
(上往十里東部洞)

하왕십리서부동
(下往十里西部洞)

하왕십리중부동
(下往十里中部洞)

하왕십리동부동
(下往十里東部洞)

1949. 6.
동학동
(東鶴洞)
서학동
(西鶴洞)
북학동
(北鶴洞)
흥인동
(興仁洞)
충현동
(忠峴洞)
약수동
(藥水洞)
청구동
(靑丘洞)
동화동
(東化洞)
유락동
(有樂洞)
문화동
(文化洞)
1949. 8. 15.
서울특별시 성동구
(서울特別市 城東區)
1955. 4. 18.
황학동
무학1동
(舞鶴一洞)
무학2동
(舞鶴二洞)
흥인동
충현동
약수동
청구동
동화동
유락동
문화동
율원동
(栗苑洞)
무학봉동
(舞鶴峰洞)

상왕십리2동
(上往十里二洞)

상왕십리1동
(上往十里一洞)

하왕십리3동
(下往十里三洞)

하왕십리2동
(下往十里二洞)

하왕십리1동
(下往十里一洞)

1959. 10. 31.
현인동
(賢仁洞)

인창동
(仁昌洞)

당현동
(堂峴洞)

홍익동
(弘益洞)

도선동
(道詵洞)

1964. 9. 28.
신당동
상왕십리동
하왕십리동
홍익동
도선동
황학동
무학1동
무학2동
흥인동
충현동
약수동
청구동
동화동
유락동
문화동
율원동
무학봉동
현인동
인창동
하왕십리1동
홍익동
도선동
하왕십리2동
1966. 1. 6.
황학동
무학동
(舞鶴洞)
흥인동
신당동
상왕십리동
하왕십리동
홍익동
도선동
황학동
무학동
흥인동
충현동
약수동
청구동
동화동
유락동
문화동
율원동
무학봉동
현인동
인창동
하왕십리1동
홍익동
도선동
하왕십리2동
1970. 5. 5.
신당8동
(新堂八洞)
신당1동
(新堂一洞)
신당2동
(新堂二洞)
신당3동
(新堂三洞)
신당4동
(新堂四洞)
신당6동
(新堂六洞)
신당7동
(新堂七洞)
신당5동
(新堂五洞)
하왕십리1동
도선동
하왕십리2동
1975. 10. 1.
중구(中區)
성동구
황학동
무학동
흥인동
신당동
황학동
상왕십리동
하왕십리동
홍익동
도선동
신당8동
신당1동
신당2동
신당3동
신당4동
신당6동
신당7동
신당5동
신당8동
하왕십리1동
도선동
하왕십리2동






1975년 ~ 현재
법정동은 파란색, 행정동은 분홍색
1975. 10. 1.
상왕십리동
하왕십리동
홍익동
도선동
하왕십리1동
도선동
하왕십리2동
1977. 9. 1.
상왕십리동
하왕십리동
홍익동
도선동
하왕십리동
하왕십리1동
도선동
하왕십리2동
1985. 9. 1.
왕십리1동
(往十里一洞)
왕십리2동
(往十里二洞)
2008. 8. 11.
왕십리도선동
(往十里道詵洞)


현대의 왕십리라고 이르는 지역은 본래 하왕십리(下往十里)라고 부르던 지역이고, 본래의 왕십리는 왕십리로를 따라 광희문에서 왕십리오거리까지를 아우르던 꽤 큰 지역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당동이 분리되었고[2], 1975년에는 난계로 이서 지역이 중구 황학동과 신당동에 편입되면서 영역이 상당히 많이 축소되었다. 이때문에 과거 상왕십리라고 부르던 지역은 현재로서는 대부분 황학동으로 넘어갔고, 과거 상왕십리의 일부만이 성동구 관내에 남아 있을 뿐이다.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현재의 왕십리는 대부분 과거 하왕십리에 속하던 지역에 국한하게 되었다. 또, 본래 지금의 성동고등학교 인근이 왕십리의 중심지였던 데에 반해, 근대 이후에는 왕십리역 일대가 개발됨에 따라 차츰 왕십리의 중심지는 현재의 도선동 일대로 옮겨 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넓은 의미의 왕십리에 포함되는 지역도 신당동과 황학동 일대에서 행당동, 사근동, 마장동까지 넓어졌다. 그러나 되려 왕십리의 중심지가 점점 동쪽으로 이동하다가 급기야는 왕십리의 행정구역 밖으로 벗어났고, 현재는 행당동이 왕십리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2.1. 지명의 유래[편집]


조선 초, 무학대사태조 이성계의 명을 받아 새로운 도읍지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던 중에 지금의 왕십리 일대를 지나고 있었는데, 이곳을 명당이라 생각하여 도읍으로 정하자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 순간 한 노인이 소를 끌고 지나가면서 소에게 "야 이 무학같이 미련한 소야"라고 하자, 무학이 깜짝 놀라 그 노인에게 가서 "혹시 도읍이 될 만한 곳을 아십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노인은 "북서쪽으로 십리를 더 가보시오. 도읍이 될만한 터가 있을 것이오"라고 말하고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고 한다.[3] 무학대사가 그 말을 따라 십리를 더 걸어 나온 곳이 지금의 경복궁이다. 갈 왕() + 열 십() + 거리 단위 리() = "왕십리"가 된 것이다. 바로 옆의 청량리와는 달리 왕십리의 리는 "마을 리(里)"가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해당 지역의 동(洞)이름도 (상/하)왕십동이 아닌 (상/하)왕십리동이다.

노인이 사실은 도선대사의 혼백이었다는 전승도 있다. 무학대사경복궁 터를 보고 나서 '그런 곳을 점지할 사람은 도선대사밖에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으나, 이미 다시 찾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 동명 중에도 도선동이 있다. 무학대사의 이름도 인근 무학초등학교, 무학중학교, 무학여자고등학교, 하왕십리동 무학봉 등에 쓰이는 등, 도선대사와 무학대사에 관한 지명과 교명이 많다. 사극 용의 눈물 23화에서도 이에 관해 야사로서 소개한 에피소드가 나왔다.

그러나 명칭에 대한 위 이야기는 신빙성이 좀 떨어지는데, 고려시대에 이미 인근 지역을 '왕심(旺心)' 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표기가 변화하여 현재의 왕십리가 됐다는 설이 좀더 설득력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4] 한자표기 또한 현용 중인 往十里만 있었던 게 아니라 王十里[5], 王尋里 등이 섞여 쓰이는 등 이미 당대에도 중구난방이었다. 이 때문인지 왕리는 현대 기준에서는 분명 오타인데도 오타로 취급되지 않는다.[6]

2.2. 전근대[편집]


995년(고려 성종 14년), 전국에 12(牧) 양주목(楊州牧)에 속했다가, 1067년(문종 21년)에 남경(南京)이 설치될 때 이에 속했다. 그 이후 쭉 남경에 속해 있다가 조선이 개국한 이후인 1395년, 한양으로 천도를 단행하면서 사대문안한성부로 정하고 그 외 지역은 경기좌도 양주군에 속하게 했는데, 왕십리도 이때 양주군에 속했다.

그러나 1424년(세종 6년), 한성부의 인구가 점차 늘어나고, 공신들에게 지급할 땅을 나누어 주기 위해 흥인지문광희문 바깥 지역을 한성부 동부와 남부에 편입하게 되었다. 이때 동부 성외 지역은 인창방(仁昌坊)과 숭신방(崇信坊)으로 나누어 관할하게 하였는데, 왕십리는 지금의 마장동, 사근동과 함께 동부 인창방에 속하게 되었고, 현재 성동구의 나머지 지역들은 남부 두모방(豆毛坊)에 속했다.

1751년(영조 27년)에는 동부 인창방 왕십리계(往十里契)에 속하였고, 고종 초에 잠시 왕십리1계와 왕십리2계로 나누어졌다가, 1894년 갑오개혁을 단행하며 다시 왕십리계가 되었다. 이때, 지금의 황학동, 무학동, 흥인동, 신당동 일대가 모두 왕십리계에 편입되었고, 왕십리계는 동부 인창방에서 남부 두모방으로 잠시 옮겨진 듯하다.

조선시대의 왕십리는 광희문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지나가는 곳이었으므로 시전이 발달하게 되었고, 따라서 상인 계층이 주로 살았다. 서울 사투리 중에 '~걸랑' 하는 것이 왕십리 일대에서 생겨난 특유의 방언인데, 이 당시 이 일대에 거주하던 중인(中人) 계층에서 쓰던 말이라고 한다. 조선 말엽에 이르면 군인들도 이 일대에 많이 거주한 모양인데, 임오군란 당시 구식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킨 중심지 역시 왕십리였고, 청군이 진압할 당시에 왕십리 일대가 쑥대밭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2.3. 일제강점기[편집]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 10월 1일한성부경기도 경성부로 개편될 때 이에 속했고, 이듬해인 1911년 4월 1일에는 기존 행정구역이었던 계(契)가 폐지됨에 따라 왕십리계도 폐지되었고, 왕십상리(往十上里), 왕십하리(往十下里), 무학리(舞鶴里), 단지리(端池里), 신당리(新堂里)로 나누어졌다. 이와 동시에 경성부 성외의 지역은 방(坊)에서 으로 개편하게 되면서 행정구역 경계가 조정되어, 왕십상리는 인창면에, 나머지 지역은 모두 두모면에 속하게 되었다.

1914년 4월 1일에는 부군면 통폐합으로 인해 경성부에서 고양군으로 이관됨과 동시에 두모면이 폐지되었고, 왕십리 전역이 마장동, 사근동, 행당동, 금호동, 옥수동과 함께 기존에 용산구 한남동, 이태원동, 서빙고동, 보광동 일대를 관할하던 한지면(漢芝面)에 편입되었다. 또한 왕십상리와 왕십하리는 각각 상왕십리와 하왕십리로 개칭되었고, 무학리와 단지리가 하왕십리에 통합되었다.

1936년 4월 1일에는 다시 경성부에 편입되어 상왕십리정(上往十里町), 하왕십리정(下往十里町)이 되었다. 기존에 하왕십리에 속하던 옛 무학리 일대가 이 무렵에 상왕십리정에 포함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현재 신당파인힐하나유보라아파트 자리에 있던 배명고등학교1940년에 옛 무학리 자리에 개교할 때에 상왕십리 783번지라는 주소를 썼던 것으로 확인된다. 1943년 6월 10일 부로 구제(區制)가 실시될 때 성동구에 속하게 되었다.

2.4. 현대[편집]


해방 이후인 1947년 6월에는 지금의 행정동 제도의 전신인 동회(洞會) 제도를 실시하였는데, 상왕십리동에는 상왕십리서부동회(上往十里西部洞會)와 상왕십리동부동회(上往十里東部洞會)의 2개 동회가, 하왕십리동에는 하왕십리서부동회(下往十里西部洞會), 하왕십리중부동회(下往十里中部洞會), 하왕십리동부동회(下往十里東部洞會), 3개 동회가 설치되었다.

1955년 4월 18일에는 동회 제도가 폐지되고 지금의 행정동 제도로 전환되며 상왕십리동부동은 상왕십리1동, 상왕십리서부동은 상왕십리2동, 하왕십리서부동은 하왕십리1동, 하왕십리중부동은 하왕십리2동, 하왕십리동부동은 하왕십리3동으로 개편되었으며, 정확한 기록은 불명이지만, 1958년에 작성된 지번입서울특별시가지도에 따르면 옛 무학리 일대에 무학봉동이라는 행정동이 이 무렵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필이면 무학봉동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현 신당역 사거리 일대에 무학동이라는 행정동이 또 존재해서 같은 지역이 아닌가 싶지만, 지번입서울특별시가지도에서는 무학봉 북쪽에 무학봉동(舞鶴峰洞)으로 기재되어 있다. 서울지명사전에서도 두 지역을 혼동해서 같은 지역으로 적어 두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하왕십리동의 월경지로 오해하게 되어 있지만, 무학동은 신당역 일대, 무학봉동은 성동고교 사거리 동남쪽으로 따로 떨어져 있는 별개의 행정구역이었다.

1959년 10월 31일에는 상왕십리1동이 인창동(仁昌洞)으로, 상왕십리2동이 현인동(賢仁洞)으로, 하왕십리1동이 도선동(道詵洞)으로, 하왕십리2동이 홍익동(弘益洞)으로, 하왕십리3동이 당현동(堂峴洞)으로 변경되었다. 인창동은 옛 인창방에서 따온 것이고, 현인동 또한 거기서 따온 지명이다. 도선동은 왕십리 전설에서 나오는 도선대사의 법명에서 따온 것이고, 홍익동은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에서 따왔다고 한다. 유일하게 당현동만 자연지명을 따왔는데, 지금의 청계벽산아파트에 있던 고개에 무당집이 많이 있어서 예로부터 당고개라 부르던 것을 동명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옛날 도성에서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광희문으로 빼냈는데, 이로 인해 광희문은 시구문(시체가 나오는 문)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광희문 밖으로 나오면 금호동 공동묘지로 가게 되어 있는데, 그 전에 왕십리 일대에서 넋을 달래는 굿을 먼저 하고 망자를 떠나 보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예로부터 이 일대이 무당집이나 신당이 많았고, 인근의 신당동[7]이나, 행당동[8]도 이런 이유로 지명이 생겼다.

1964년 9월 28일에는 법정동 도선동과 홍익동이 하왕십리동에서 분리되었다. 이로써 하왕십리동을 관할하는 법정동이 당현동 밖에 남지 않게 되어 당현동을 하왕십리1동으로 개칭하고, 법정동 도선동의 일부 지역을 행정동 도선동에서 분리시켜 하왕십리2동을 설치했다. 1959년 이전의 하왕십리1, 2동과는 명칭만 같을 뿐 전혀 다른 구역이다. 1970년 5월 5일에는 행정동 도선동과 홍익동이 도선동으로 통폐합되어 행정동 도선동이 법정동 도선동과 홍익동을 모두 관할하게 되었다.

1975년 10월 1일 자로 중구와 성동구가 난계로무학봉을 기준으로 행정구역 경계를 조정하면서 황학동, 흥인동, 무학동, 신당동으로 편입됨과 동시에, 무학봉동 일대는 신당동 동북쪽 일부를 관할하던 행정동 율원동(栗苑洞)에 편입되었고, 현인동은 전역이 황학동으로, 인창동은 난계로 이서 지역이 황학동에 편입되며 현인동사무소와 인창동사무소가 폐지되었다. 난계로 이동 지역의 인창동 잔여 지역은 하왕십리1동에 편입되었다.

1977년 9월 1일에는 법정동 도선동에서 왕십리로 이남 지역이 하왕십리동으로 편입되었고, 1985년 9월 1일에 하왕십리1동, 하왕십리2동이 각각 왕십리1동과 왕십리2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이 지역도 도심공동화가 진행됨에 따라 인구가 많이 줄어서 행정동 통합의 필요성이 거론되어 2008년 8월 11일에는 왕십리1동과 도선동이 통합되어 왕십리도선동이 되었다. 최종적으로 왕십리도선동은 왕십리로 이북 전역을, 왕십리2동은 왕십리로 이남 지역을 관할하는 형태가 되었다.

이명박 서울시장 재임 당시 길음동, 미아동과 함께 뉴타운 시범사업 지구로 선정되어 가장 먼저 삽을 뜬 뉴타운 지구의 한 곳이다. 특히 왕십리뉴타운은 시범사업이었기 때문에 다른 뉴타운들에 비해 규모가 그렇게 크지는 않은 편이다. 2011년에 착공하여 2014년부터 입주를 시작했고, 현재는 왕십리 텐즈힐로 모두 완공되어 구역해제가 된 상태이다.

3. 상세[편집]


왕십리의 범위는 왕십리로를 따라 꽤나 방대한 지역이다. 왕십리 안에 여러 동네가 들어 있으며, 대략 신당역에서 한양대역까지 전철 세 정거장 정도 되는 거리가 연담화되어 있다. 대략 2.5km 정도 되는 거리이며, 걸어서 한 번에 가기에는 사람에 따라 무리가 되는 거리이기도 하기 때문에 같은 왕십리라도 대개 위치에 따라 다른 동네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 일대의 거의 중간 지점이 왕십리역 부근이라 보면 되겠다.

본래 왕십리의 중심지는 왕십리역 일대가 아니라 지금의 신당역이 있는 황학동 서울중앙시장과 현재는 재개발이 된 왕십리뉴타운 일대였다. 1975년 중구와 성동구의 경계 조정 이전까지는 그 일대 역시 왕십리에 포함되던 지역이었고, 오랫동안 생활권을 공유한 탓에 지금도 황학동과 신당5동 일대는 상왕십리역 생활권으로 묶이는 편이다. 황학동 가구거리가 왕십리 가구거리로 불리기도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1911년경원선이 놓이고 왕십리역(당시에는 독도역)이 개통하면서 1940년대에 이르면 지금의 왕십리오거리를 중심으로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행되고 새로운 시가지가 들어선다.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왕십리로 연선으로 피난민들이 몰려들었고, 중앙시장부터 왕십리오거리까지 상권이 확장되었다. 1954년에는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가 왕십리역에서 머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음에 따라 1960년대부터는 왕십리의 상권은 한양대 앞으로 더욱 확장되었으며, 이미 이 시기에 이르러 왕십리의 중심지는 왕십리역 쪽으로 많이 옮겨 간 상태였다.

왕십리는 성동구의 서북쪽 한 구석에 치우쳐져 있지만, 왕십리의 동남쪽 끝자락에 있는 왕십리역과 왕십리오거리 일대는 성동구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어 성동구 어디서나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다. 왕십리를 중심으로 하는 생활권은 가까운 행당동, 사근동, 마장동은 물론이고, 멀리 옥수동, 금호동, 응봉동까지 포함하고 있다. 성동구에서 청계천중랑천으로 떨어져 있는 성수동, 용답동, 송정동을 제외하고, 성동구 본토는 모두 왕십리 생활권에 속하는 것이다.

원래 인근 성동구청한양대학교의 배후 상권으로 입지가 탄탄하긴 했지만 과거에는 상습 침수지였고, 신당동과 같이 서민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었기 때문에 낙후되어 있다는 이미지가 강했다. 서울 동부 지역의 교통 중심지이긴 하지만, 왕십리오거리 인근 상권이 부실했던 탓으로 환승 수요에 비해 승하차 수요가 현저히 떨어지는 현상을 보이기도 했다. 2호선, 5호선 환승역이기도 했으나 주민과 주변 직장인 및 한양대 학생 외에는 외부 유동 인구 유입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1995년, 성동구광진구가 분구하고 구의동에 있던 성동구청광진구청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쫓겨나 왕십리역 앞에 자리잡게 되었고, 2008년에는 내부에 쇼핑몰과 영화관을 갖춘 왕십리민자역사가 완공되면서[9] 점차 위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왕십리민자역사가 이 일대를 지나는 대부분의 유동인구를 흡수하는 바람에 주변 상권이 침체를 겪기도 했다.

2000년대 이후로 왕십리 일대에 재개발이 활발히 진행되었고, 왕십리역 6번 출구 쪽으로 한양대와 연담화된 상권이 커짐에 따라 왕십리를 찾는 사람들도 많아지면서 서울 동북부의 중심지로 거듭나게 되었다. 2012년에는 분당선의 개통으로 강남에서 왕십리로 갈 때 2호선을 타고 잠실까지 돌아서 갈 필요가 없어지면서 강남과의 접근성이 크게 개선되었다. 왕십리역에서 수인분당선을 타면, 강남구청역까지 단 7분, 선정릉역까지 9분에 주파할 수 있다. 또한, 서울 경전철 동북선의 종점이 왕십리역으로 결정되었고, 동북선이 개통하고 난 뒤에는 동대문구, 성북구, 도봉구, 강북구, 노원구와의 접근성이 개선될 것이다.

오늘날에는 왕십리뉴타운의 재개발에 이어 경원선 선로 주변의 판자촌이 있던 자리를 재개발하여 서울숲더샾이 들어섰고, 더불어 인근의 성수동옥수동2010년대 이후 신 부촌을 형성하면서 나날이 면모를 달리하고 있다. 나머지 지역은 아직도 서민 주택가들이 제법 있으나, 이런 곳들도 다수의 경우 재개발에 들어갔거나 재개발을 준비 중이다. 현재까지의 왕십리는 상권이나 주택가는 있지만, 업무지구가 부실하다는 것이 단점이었지만, 장기적으로는 2030년대에 성동구청과 성동경찰서가 지금의 소월아트홀 자리로 이전하고, 지금의 행정타운 부지를 업무지구로 재개발하겠다는 계획이 있다.

4. 행정구역[편집]



4.1. 법정동[편집]



4.1.1. 상왕십리동[편집]


성동구법정동
상왕십리동

上往十里洞 | Sangwangsimni-dong





광역자치단체
서울특별시
기초자치단체
성동구
법정동코드
1120010100
소속 행정동
왕십리도선동
면적
0.15㎢
인구
3,620명[A]
인구밀도
24,133.33명/㎢
성동구의 최서북단에 위치한 법정동으로, 행정동 왕십리도선동에서 관할하고 있다. 줄여서 상왕이라고도 한다. 동쪽은 하왕십리동, 난계로를 경계로 하여 서쪽은 중구 황학동, 왕십리로를 경계로 하여 남쪽은 중구 신당동, 북쪽은 청계천을 경계로 하여 동대문구 신설동에 접한다. 특히, 상왕십리동의 서북쪽 경계점인 황학교종로구, 중구, 성동구, 동대문구의 사합점(四合点)이기도 해서 종로구 숭인동과도 인접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래 전부터 수도를 위, 지방을 아래로 부르는 관습이 있는데, 요즈음에도 서울에 갈 때는 서울에 올라간다, 혹은 상경(上京)이라는 표현을 쓰고, 지방으로 갈 때는 지방으로 내려간다, 혹은 하방(下方)이라는 표현을 쓴다. 상왕십리와 하왕십리의 구분도 왕십리 중에서도 사대문안으로부터 더 가까운 지역과 먼 지역을 나누면서 가까운 지역을 상왕십리라 부르고 그에 비교해서 그 바깥에 있는 지역을 하왕십리라고 부른 것이다.

조선 말엽에 행정구역 변동으로 잠시 왕십리1계와 왕십리2계로 나뉜 적은 있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왕십리계로 통합되었고, 그 외에는 왕십리를 따로 두 지역으로 구분한 적은 조선시대 내내 없었다. 왕십리가 상하왕십리로 나뉜 것은 경술국치 이후인 1911년 4월 11일의 일로, 왕십상리라는 이름이 처음 붙었다가, 1914년 4월 11일경기도 경성부 인창면(仁昌面)에서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漢芝面)으로 이관되면서 상왕십리가 되었다.

본래 상왕십리동의 서쪽 경계는 서울중앙시장 일대, 남쪽 경계는 무학봉에 이르렀고, 행정동은 인창동(仁昌洞)과 현인동(賢仁洞), 그리고 기존에 하왕십리에 포함되었던 무학리 지역을 편입하여 관할하던 무학봉동(舞鶴峰洞)까지 총 3개의 행정동이 있었으나, 1975년 10월 1일 부로 난계로, 왕십리로, 무학봉을 잇는 선의 이서 지역이 모두 중구로 편입되면서 동역(洞域)의 대부분이 황학동과 신당동으로 편입되었고, 기존 인창동의 일부 지역만 성동구 관내에 남았다. 그 후로 인창동 잔여 지역은 행정동 하왕십리1동에 흡수되었다가, 1985년 9월 1일에 하왕십리1동이 왕십리1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 일대 역시 2000년대 들어 도심공동화 현상을 겪으며 인구가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2008년 8월 11일 부로 왕십리1동과 도선동이 통합되어 왕십리도선동이 되었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왕십리도선동으로 행정동이 통폐합될 당시까지만 해도 이 일대는 노후된 다세대 주택들이 많은 곳이었으나, 왕십리뉴타운으로 지정되어 재개발에 착수하게 되었다. 왕십리뉴타운은 2011년에 공사에 착수하여 2017년에 모든 구역의 입주가 끝났고, 현재 상왕십리동은 왕십리뉴타운의 일부 지역으로서, 동역 전체가 아파트단지에 속하고 있다.

왕십리뉴타운 중에서도 텐즈힐2단지는 모두 상왕십리동에 속하지만, 3구역인 센트라스 아파트는 단지의 서쪽 일부가 상왕십리동에 속한다. 하왕십리동과의 경계가 도로를 따라 나뉜 게 아니라 과거 경계 그대로 구불구불하게 남았기 때문에 상가동은 하왕십리동에 속하거나 경계에 걸쳐 있으며, 아파트 동마저도 104, 108, 109동은 경계 위에 어정쩡하게 놓여 있다. 다만 센트라스 아파트 단지는 모두 하왕십리동 1070으로 주소를 쓰고 있으므로 경계가 구불구불한 문제는 딱히 큰 문제는 아니다. 이로써 실질적으로 상왕십리동 지번을 쓰는 아파트 단지는 왕십리뉴타운 내에서도 텐즈힐2단지만 있는 것이 된다.

이 지역은 대체로 교통편은 상왕십리역을 이용하는 편이지만, 신당역도 멀지 않은 편이고, 텐즈힐 2단지 쪽은 신설동역도 도보로 15분 내외의 거리에 있다. 2호선이 아니라 1호선이나 우이신설선을 이용하려면 2호선을 타고 시청역에 가서 갈아타는 것보다는 걸어가서 신설동역에서 타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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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 하왕십리동[편집]


성동구법정동
하왕십리동

下往十里洞 | Hawangsimni-dong





광역자치단체
서울특별시
기초자치단체
성동구
법정동코드
1120010200
소속 행정동
왕십리도선동, 왕십리2동
면적
0.62㎢
인구
31,059명[A]
인구밀도
50,095.16명/㎢
성동구 서북단에 위치한 법정동으로, 왕십리로 이북은 행정동 왕십리도선동이, 왕십리로 이남은 행정동 왕십리2동이 관할하고 있다. 줄여서 하왕이라고도 한다. 동쪽으로 홍익동과 도선동, 서쪽으로 상왕십리동과 중구 신당동, 남쪽으로 행당동, 북쪽으로 동대문구 용두동에 접한다.

동명의 유래는 사대문안을 기준으로 상왕십리에 대비하여 더 먼 바깥쪽의 왕십리 지역이라는 의미로 하왕십리가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왕십리를 상하왕십리로 구분하지 않다가, 1911년 4월 11일에 왕십하리가 되었다. 그 3년 후인 1914년 4월 11일경기도 경성부 두모면(豆毛面)에서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漢芝面)으로 이관될 때에 하왕십리가 되었고, 인근 무학리, 단지리 등의 마을을 편입하였다. 1936년, 경성부에 다시 편입되면서 옛 무학리 일대는 상왕십리정으로 편입되었고, 1964년에는 홍익동과 도선동이 하왕십리동에서 분리되었으며, 1977년에는 도선동의 일부를 편입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왕십리를 이루는 4개의 법정동 중에서 가장 면적이 크고 인구가 많다. 그러나 중앙에 무학봉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고, 상왕십리역 일대와 무학봉 이남 지역이 고지대를 넘어가는 골목으로만 이어져 있을 뿐이라서 북쪽과 남쪽의 생활권이 별개로 형성되어 있다. 무학봉 이북 지역은 왕십리로와 상왕십리역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권이고, 무학봉 이남 지역은 인근 행당동이나 금호동1가와 하나로 묶이는 생활권이다. 서울무학초등학교 동쪽 일대는 왕십리역 생활권과도 일부 중첩되기도 한다.

과거에는 경사지에 다세대주택이 많은 곳이었으나, 2000년대 이후로 왕십리뉴타운이 개발됨과 더불어 관내 왕십리뉴타운을 제외한 지역들도 구역을 지정하여 재개발에 들어갔고, 현재는 아파트 단지가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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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홍익동[편집]


성동구법정동
홍익동

弘益洞 | Hongik-dong





광역자치단체
서울특별시
기초자치단체
성동구
법정동코드
1120010300
소속 행정동
왕십리도선동
면적
0.17㎢
인구
3,283명[A]
인구밀도
19,311.76명/㎢
성동구 서북부에 있는 법정동으로, 행정동 왕십리도선동이 관할하고 있다. 동쪽은 마장동행당동, 서쪽 하왕십리동, 무학로6길과 8길을 경계로 남쪽은 도선동과 접하며, 하왕십리동 청계벽산아파트 단지 위쪽으로 형성된 땅거스러미동대문구 용두동과 접한다. 왕십리뉴타운 완공 이후에도 하왕십리동과의 경계가 아직 직선으로 조정되지 않아서 텐즈힐1단지와 센트라스 아파트의 일부 동은 홍익동에 걸쳐 있다. 다만 아파트 단지는 단일 주소를 사용하기 때문에 경계가 걸쳐 있다고 하더라도 홍익동으로 주소를 쓰지는 않는다.

동명은 단군왕검이 세운 건국이념안 홍익인간(弘益人間)에서 따서 제정했다고 한다. 본래 이곳은 하왕십리에 속하는 지역이었으나, 1964년에 도선동과 함께 하왕십리동에서 별도의 법정동으로 분리되었다. 본래는 법정동 홍익동만을 따로 관할하는 행정동 홍익동이 존재했지만, 1970년 5월 5일에 행정동 도선동에 통폐합되었고, 2008년 8월 11일에는 왕십리1동과 도선동이 통합되며 행정동 왕십리도선동에서 관할하게 되었다.

큰 도로와 역세권에서는 조금 비껴나 있는 위치이기 때문에 유동인구가 많지 않고, 대부분 빌라나 다세대주택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면적이 작고, 남쪽에 있는 도선동과는 따로 구분될 만한 지리적인 장애물이나 폭이 넓은 도로가 없고, 골목길을 따라 경계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거의 한 동네를 이루고 있다.

관내에는 성동구보건소와 서울특별시립동노인전문요양센터, 서울특별시립동부데이케어센터가 있으며, 한국기원이 이곳에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많은 연예인들을 배출한 한국예술고등학교가 홍익동 150번지에 있었으나, 2019년에 폐교하면서 현재는 폐건물로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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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 도선동[편집]


성동구법정동
도선동

道詵洞 | Doseon-dong





광역자치단체
서울특별시
기초자치단체
성동구
법정동코드
1120010400
소속 행정동
왕십리도선동
면적
0.14㎢
인구
4,349명[A]
인구밀도
31,064.29명/㎢
성동구 서북부에 있는 법정동으로, 행정동 왕십리도선동이 관할하고 있다. 동쪽은 행당동, 서쪽과 북쪽은 홍익동, 남쪽은 하왕십리동에 접한다.

동명의 유래는 통일신라 때 비기도참설(秘記圖讖說)을 주장한 도선대사가 인근의 무학봉에서 수도했다는 전설에 따라 붙여졌다고도 하며, 또 조선 개국 때 무학대사태조의 명으로 도읍지를 물색하던 중, 왕십리에 가서 지세를 살피고 있을 때 소를 타고 지나던 노인이 무학대사에게 서북쪽으로 십리를 더 가라고 지시를 하였는데, 바로 이 노인이 신라말 도선대사의 현령이었다는 전설에서 기인했다고도 한다.

본래 이 지역은 단지동(端池洞), 혹은 끝못골이라고 부르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왕십리계에 속하다가, 1911년 4월 11일경기도 경성부 두모면 단지리가 되었고, 1914년, 경성부에서 고양군 한지면으로 이관될 때, 하왕십리에 속하게 되었다. 1947년 6월, 現 행정동 제도의 전신인 동회 제도가 시행되면서 하왕십리동부동회가 설치되었고, 1955년 4월 18일에 동회 제도가 폐지되며 행정동 하왕십리1동이 설치되었다. 1959년 10월 31일에 하왕십리1동이 도선동으로 바뀌었고, 1964년 9월 28일에는 하왕십리동으로부터 홍익동과 함께 별도의 법정동으로 분리되었다. 동시에 행정동 도선동에서 일부 지역이 하왕십리2동으로 분동되었고, 1977년에는 행정동 하왕십리2동 지역이 법정동 도선동에서 하왕십리동으로 편입되었다. 그 후로는 변동이 없다가 2008년 8월 11일 부로 왕십리1동과 도선동이 통합되어 왕십리도선동이 되었다.

왕십리역과 가까우며, 왕십리로고산자로를 끼고 있다. 큰 도로변으로 상권이 줄지어 있고, 거기서 조금 더 들어 가면 빌라, 다세대주택, 원룸 등이 많은 주택가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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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행정동[편집]



4.2.1. 왕십리도선동[편집]


성동구행정동
왕십리도선동

往十里道詵洞 | Wangsimnidoseon-dong





광역자치단체
서울특별시
기초자치단체
성동구
행정표준코드
3030117
관할 법정동
상왕십리동, 하왕십리동 일부
홍익동, 도선동
하위 행정구역
36통 266반
면적
0.72㎢
인구
26,406명[B]
인구밀도
36,675.00명/㎢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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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 중구·성동구 갑

홍익표 (3선)
서울특별시의원 | 제4선거구

구미경 (초선)
성동구의원 | 나 선거구

남연희 (3선)

전종균 (초선)

정교진 (초선)

주민센터
마장로 141 (상왕십리동 813)
왕십리도선동 주민센터
성동구 서북부에 있는 행정동으로, 법정동 상왕십리동, 홍익동, 도선동과 하왕십리동 중 왕십리로 이북의 일부 지역을 관할하고 있으며, 관할구역은 왕십리에서 왕십리로 이북 지역에 해당한다. 2008년 8월 11일, 행정동 왕십리1동과 도선동을 통합하여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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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 왕십리2동[편집]


성동구행정동
왕십리제2동

往十里第二洞 | Wangsimni 2(i)-dong





광역자치단체
서울특별시
기초자치단체
성동구
행정표준코드
3030041
관할 법정동
하왕십리동 일부
하위 행정구역
24통 189반
면적
0.41㎢
인구
16,284명[B]
인구밀도
39,717.07명/㎢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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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 중구·성동구 갑

홍익표 (3선)
서울특별시의원 | 제4선거구

구미경 (초선)
성동구의원 | 나 선거구

남연희 (3선)

전종균 (초선)

정교진 (초선)

주민센터
무학봉15길 7 (무학봉15길 7)
왕십리2동 주민센터
성동구 서북부에 있는 행정동으로, 법정동 하왕십리동 중 왕십리로 이남 대부분 지역을 관할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하왕십리동에 무학동, 단지동, 당현동 등의 자연부락이 있었는데, 당현동이라는 자연부락은 왕십리로 이북에 있었고, 오늘날 왕십리2동에 해당되던 지역은 무학동과 단지동 일대이다. 여러 행정구역 변동을 거치며 무학동은 상왕십리동으로 편입되었고, 최종적으로는 중구 신당동에 속하게 되었지만, 현재도 왕십리2동의 생활권 안에 놓여 있다.

1947년 6월, 현 행정동 제도의 전신인 동회제도가 시행되며 도선동 지역과 함께 하왕십리동부동회에 속하게 되었고, 1955년 4월 18일 부로 행정동 체제로 전환됨에 따라 하왕십리동부동은 하왕십리1동이 되었다. 1959년 10월 31일에는 하왕십리동부동이 도선동으로 개칭되었고, 1964년 9월 28일, 법정동 하왕십리동에서 도선동이 분리될 때에 이에 속하며 행정동 하왕십리2동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1977년 9월 1일에는 하왕십리2동 지역이 다시 법정동 하왕십리동으로 편입되었고, 1985년 9월 1일에 비로소 왕십리2동으로 개칭되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무학봉을 중심으로 가파른 경사지를 이루고 있다. 본래 무학봉은 왕십리2동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꽤 큰 산지였는데, 현대에 들어와 경사지 위에 주택들이 들어서면서 산동네로 변모하였다. 이 모습은 2000년대까지도 계속되다가, 재개발 사업이 시작되면서 현재는 모두 아파트단지로 바뀌었다. 비교적 아랫쪽에 있는 평지 지역은 아직 다세대주택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무학봉 북쪽 일대, 왕십리로에 면한 지역은 상왕십리역 생활권이지만, 무학봉 이남의 대부분 지역은 행당2동과 금호1가동과 같은 생활권을 공유하고 있으며, 행당역을 이용하는 편이다. 또한 왕십리극동미라주 바로 옆에 서울금북초등학교가 있어 극동미라주와 풍림아이원에 거주하는 학생들은 금북초등학교로 통학하고 있다. 그 외 지역은 금북초등학교와 더 가까울지라도 관내에 있는 서울무학초등학교로 배정되고 있다. 반면, 무학초등학교 동쪽 일대는 행당1동과 함께 왕십리역 생활권에 가깝다. 이 일대에서 행당동과의 경계가 모호하고, 행당시장이 두 지역의 사이로 거의 걸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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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지리[편집]


북쪽으로 청계천이 휘돌아 나가고 남쪽으로는 무학봉이 버티고 서 있다. 무학봉 이북 지역은 과거 왕십리평(往十理坪) 또는 왕심평(往尋坪)이라고 불렸을 만큼 지형은 대체로 평탄한데, 이 일대에서는 6.25전쟁 전까지만 해도 반농반상(半農半商)을 하는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이곳 일대를 일명 진퍼리(진펄)라고 부른 것도 질펀한 들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러나 무학봉 이남 지역은 전형적인 산동네로서 지형이 꽤 험준한 편에 속한다. 이외에도 지금의 청계벽산아파트 일대에도 야트막한 구릉지가 있는데, 이 일대는 예전에 당현동(堂峴洞)이라고 해서, 무당집이 많이 있던 고개라는 이유에서 그런 이름이 붙은 곳인데, 지금은 지명도 사라졌거니와, 옛 흔적을 찾아 보기가 힘들다.

6. 교통[편집]



6.1. 도로[편집]


도로명
주요 경유지
고산자로
성수대교왕십리역 ↔ 도선사거리동대문구청고려대역
난계로
금호동 ↔ 논골사거리 ↔ 성동고교 ↔ 청계8가신설동역
마장로
동대문역사문화공원황학사거리 ↔ 도선사거리마장역
무학로
상왕십리역 ↔ 청계9가 ↔ 용두동사거리 ↔ 안암오거리 ↔ 안암역
무학봉길
전구간 하왕십리동 소속
왕십리로
성동고교왕십리역뚝섬역서울숲역
왕십리는 사대문안강남구, 동북부를 잇는 교차로 역할을 하는 지역이다. 주요 간선 도로들은 왕십리로고산자로가 있는데, 모두 왕십리오거리에서 만나게 된다. 따라서 러시아워에는 왕십리오거리 일대가 상당한 정체를 빚기 일쑤다.

왕십리로가 관내를 동서로 관통하여 지나간다. 왕십리로는 본래 을지로퇴계로가 합류하는 한양공고 앞 사거리가 기점이었으나, 현재는 성동고등학교까지의 구간이 퇴계로에 편입되어 구간이 단축되었다. 왕십리로를 따라서 서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사대문안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을지로를 따라 가면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 나오게 되고, 시청 방면으로 나아가게 되며, 퇴계로를 따라 가면 명동서울역 방면으로 나아가게 된다. 반대로 사대문안에서는 왕십리로를 통해 왕십리오거리로 나와서 강남구, 성수동, 용두동 등지로 분산된다. 왕십리로는 왕십리오거리에서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를 지나 성수동 서울숲까지 이어진다.

왕십리오거리에서 왕십리로와 교차하는 고산자로는 남으로는 응봉교성수대교를 거쳐 언주로에 접속하며 강남으로 이어지는 노선인데, 언주로를 따라 계속 남쪽으로 가다 보면 구룡터널을 지나 분당내곡간도시고속화도로를 타게 된다. 그 도로 끝으로 나오는 곳이 분당이다. 북으로는 동대문구청, 경동시장 등을 지나서 최종적으로는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학교 서울캠퍼스 앞으로 닿게 되며, 그곳에서 종암로와 접속하여 미아사거리역 방면으로 나아가게 된다.

고산자로는 응봉교에 진입하기 전에 응봉사거리(舊 응봉삼거리)에서 독서당로와 분기한다. 독서당로는 옥수동금호동 지역에서 왕십리역으로 갈 때 사용하는 주요 도로이다. 본래 응봉교가 개통하기 전에는 고산자로에서 곧장 독서당로로 이어져 옥수동, 금호동을 지나 한남동 한남오거리로 이어지게 되어 있었다. 고로, 이 도로를 따라서 쭉 가다 보면 한남오거리로 이어진다.

상왕십리동과 중구 황학동과 경계를 이루는 난계로는 북으로는 신설동역, 남으로는 금호동에 이르러 금호로와 접속하게 된다. 금호로를 따라 남쪽으로 쭉 내려가면 뚝섬로와 교차하는데, 거기서 한남동 방면으로 달리면 드라이브 코스로도 유명한 두무개다리터널이 나오고, 반대로 가면 용비교를 지나 성수동으로 이어진다.

북쪽으로는 청계천을 따라 달리는 청계천로가 있고, 관내에서 마장로무학로 같은 소도로들이 교차한다. 마장로는 왕십리도선동을 동서로 관통하는 도로로서, 서쪽으로 황학동을 통과하여 신평화시장 앞에서 끝이 나고, 동쪽으로는 마장역을 지나 신답역교차로에서 사가정로로 이어진다. 무학로는 왕십리도선동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로서, 남쪽으로는 상왕십리역에서 끝이 나고, 북쪽으로는 안암오거리에서 끝이 난다. 거기서 조금 더 직진해서 올라가면 안암역이 나온다.

6.2. 철도[편집]


서울 지하철 2호선왕십리로를 따라 지나간다. 상왕십리역이 하왕십리동 관내에 있고, 신당역, 왕십리역, 한양대역은 행정구역상 왕십리에 속하지는 않지만, 통상적으로 부르는 왕십리의 범위에 속한다.

특히, 인근에 2호선을 비롯하여 5호선, 경의중앙선, 수인분당선이 환승하는 왕십리역은 국내 최초 4개 노선 환승역이다. 또한, 앞으로 서울 경전철 동북선GTX-C가 왕십리역을 거치게 될 예정이다.

6.3. 버스[편집]


노선
주요 경유지
110A/B
국민대길음역고려대역경동시장성동구청(왕십리역)한강진역공덕역홍대입구역서대문구청국민대
121
화계사 ↔ 길음역고려대역청량리역마장역한양대학교성수동서울숲
141
도봉산미아사거리역고려대역동대문구청(용두역) ↔ 성동구청(왕십리역)도산공원염곡동
145
번동신이문역답십리역동대문구청(용두역) ↔ 성동구청(왕십리역)압구정로데오역신사역강남역
148
번동수유역미아사거리역고려대역동대문구청(용두역) ↔ 성동구청(왕십리역)압구정역신사역논현역고속터미널역방배역
241
신내동청량리역 ↔ 용두동사거리 ↔ 상왕십리역행당역한남동논현역
302
상대원동복정역잠실역어린이대공원역왕십리역상왕십리역
421
염곡동강남역한남동이태원역삼각지역서울역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신설동역동대문구청(용두역) ↔ 성동구청(왕십리역)옥수동
463
염곡동역삼역압구정역왕십리역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서울역공덕역국회의사당
N62
신월동목동역등촌역홍대입구역시청종각역동대문왕십리역건대입구역면목동
N73
구산동월드컵경기장홍대입구역시청동대문역사문화공원왕십리역건대입구역잠실역거여역복정역
2012
신내동망우역아차산역군자역왕십리역상왕십리역동대문역사문화공원
2013
면목역신답역왕십리역상왕십리역신당역성동공고청계벽산아파트 → 상왕십리역
2014
성수동왕십리역동대문역사문화공원
2015
신내동사가정역답십리역동대문구청(용두역) ↔ 성동구청(왕십리역)동대문역사문화공원
2016
신내동상봉역건대입구역왕십리역한남동이촌동
2222
자양동건대입구역어린이대공원역왕십리역동대문구청(용두역) ↔ 고려대역
4211
염곡동역삼역압구정역옥수동왕십리역한양여대
성동02
마장동현대아파트 → 마장역왕십리역무학여고 → 대현산체육관입구 → 논골사거리 → 행당역 → 금호벽산아파트 → 신금호역 → 금호벽산아파트 → 논골사거리 → 대현산체육관입구 → 응봉역 → 한신아파트 → 응봉사거리 → 무학여고왕십리역마장역 → 마장동현대아파트
성동03-1
신금호역행당역왕십리역 → 성동구청 → 왕십리도선동주민센터 → 왕십리중앙교회서울시설공단도선사거리 → 왕십리역행당역신금호역
성동03-2
왕십리KCC스위첸아파트행당역왕십리역한양대학교
성동08
금호역응봉역성동구청(왕십리역)서울시설공단청계벽산아파트 → 상왕십리역왕십리역응봉역금호역
성동14
응봉역 → 리버그린동아아파트 ↔ 서울숲리버뷰자이아파트 ↔ 왕십리역
6010
왕십리역응봉동금호동옥수동한남동동부이촌동인천국제공항

1권역에서 출발하여 강남구 방면으로 가는 간선버스와 중랑공영차고지에서 출발하는 지선버스 중 상당수는 왕십리역을 거치며, 성동구의 12개 마을버스 노선 중 무려 절반에 가까운 5개 노선이 왕십리역에서 회차하고 있다. 다만 아쉽게 느껴지는 점은 왕십리역 일대가 서울의 주요 교통 거점임에도 불구하고 광역버스경기도 시내버스가 경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7. 주거[편집]


서울 동북부의 교통 거점으로, 수많은 노선들이 교차하는 왕십리역이 있다는 것이 주거지로서의 큰 장점이며, 서울의 주요 업무지구인 사대문안이나 강남구가 아주 가깝다는 게 또한 장점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성동구 내에서도 한강변에 있는 성수동이나 금호동, 옥수동만큼 주거지로서 각광 받지는 않고 있는데, 이는 왕십리뉴타운와 일부 아파트단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구축 아파트이거나, 다세대주택이기 때문일 것이다.

도선동에는 직장인들을 위한 오피스텔이, 한양대 앞에는 학생들을 위한 원룸이 많다. 왕십리역 6번 출구에서 한대부고 앞까지의 한 블럭이 모두 원룸으로 구성된 지역이다. 그런데 이 일대는 먹자골목을 끼고 있기 때문에 심야시간대에도 매우 시끄러운 편이라 살기에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다. 심지어 대학생들이 그렇게 싸게 들어갈 수 있는 곳들도 아닌데다 시설도 오피스텔에 비하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가깝다는 메리트가 있어서 많이들 찾는 곳이다. 때문에 이 일대의 원룸 임대업자들은 월세 담합과 한양대 기숙사 건립 반대를 일삼고 있으며, 가게 점주들은 가격인상을 통해 대학생들의 자산을 즐겁게 탐닉하고 있다.

7.1. 공동주택[편집]


주택명
건설
입주일자
동수
세대수
홍익한신
파일:한신공영 로고_좌우.svg
1975. 6. 24.
3
95
한신무학
파일:한신공영 로고_좌우.svg
1989. 3. 30.
5
480
무학현대
파일:현대 심볼.svg
1996. 3. 15.
3
277
청계벽산
파일:벽산건설 로고(1991-2006).svg
1996. 06. 07.
7
822
한진해모로[10]
파일:한진 심볼.png
2001. 6. 18.
4
362
왕십리금호베스트빌
파일:금호아시아나 심볼.svg
2001. 10. 05.
6
458
왕십리극동미라주
파일:극동건설 CI.svg
2001. 12. 14.
3
414
왕십리풍림아이원
파일:풍림산업 로고.svg
2004. 11. 30.
15
758
청계대주파크빌
대주건설
2005. 11. 23.
1
101
성동삼성쉐르빌
파일:삼성 로고.svg
2006. 9. 13.
3
342
하왕십리신영지웰
파일:한라 CI.svg
2009. 10. 1.
2
82
왕십리모노퍼스
KT건설
2009. 11. 30.
2
69
텐즈힐2단지
파일:삼성 로고.svg 파일:대림산업 구 심볼.svg파일:GS그룹 아이콘.svg 파일:HDC 로고.svg
2014. 6. 26.
14
1,148
텐즈힐1단지
파일:삼성 로고.svg 파일:대림산업 구 심볼.svg파일:GS그룹 아이콘.svg 파일:HDC 로고.svg
2015. 4. 24.
21
1,702
왕십리KCC스위첸
파일:KCC건설 로고.svg
2016. 4. 28.
3
272
센트라스
파일:현대 심볼.svg파일:SK 로고.svg파일:포스코 CI.svg
2016. 11. 29.
30
2,529
왕십리자이
파일:GS그룹 아이콘.svg
2017. 7. 28.
7
713

8. 상권[편집]


황학동에는 서울중앙시장이라는 제법 큰 규모의 재래시장이 있다. 한때 이곳은 남대문시장이나 동대문시장보다도 규모가 큰 도·소매시장으로서 양곡과 채소 등을 취급했었고, 당시 서울시민의 양곡 소비율 80% 이상이 이곳에서 거래될 정도였다. 6.25 전쟁 이후에 한국의 3대 시장에 꼽힐 정도였고, 현재도 동네 재래시장 치고는 규모가 꽤 큰 편이다. 분식 등의 각종 노포 등을 비롯해서 건어물, 주방용품, 가구 등을 주로 취급하며, 왕십리 주방거리로도 불리는 現 황학동 주방거리도 바로 이곳에 있다. 시장 지하에는 1971년에 생긴 신당지하상가가 있는데, 2000년대 들어 서울중앙시장과 신당지하상가가 여타 백화점이나 쇼핑몰 등에 경쟁력이 밀리자, 2009년에 서울시에서 새롭게 리뉴얼하여 신당창작아케이드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현재 신당지하상가에는 젊은 예술인들의 공방이나 전시실이 입주해 있다.

왕십리하면 곱창이 유명하다. 왕십리가 언제부터 곱창으로 유명해졌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과거 왕십리 근처에는 마장동 뿐만 아니라 행당동, 신당동 등지에도 도축장이 많이 있었고[11], 그곳에서 고기들을 도축하고 나면 그 부속고기나 내장들을 가져 와 서민들에게 파는 가게들이 왕십리 일대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상왕십리동에 곱창집들이 밀집해 있었지만, 2000년대 들어 곱창골목을 포함해 상왕십리동 전역이 왕십리뉴타운으로 지정되었고, 현재는 도선동과 홍익동 등지로 곱창집들이 이전하여 그 명맥을 잇고 있다. 황학동에도 많은 곱창집들이 남아 있다.

왕십리로를 따라서는 공구상들이 밀집하여 자리잡고 있다. 최근에는 왕십리뉴타운의 재개발로 없어진 공구상이 많으며, 상왕십리역에서 왕십리역에 이르는 구간은 오피스텔이나 빌딩 등으로 재개발되면서 자취를 감추고 있다. 왕십리뉴타운이 재개발된 이후에는 왕십리로와 난계로 가변에 스트리트형 상가가 생겼다. 왕십리로를 따라 왕십리역 쪽으로 쭉 내려가다 보면 행당시장이라는 재래시장도 나오는데, 현재는 먹자골목이 조성되어 있다.

왕십리로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왕십리오거리에 이르는데, 왕십리역 위로 민자역사가 건립되어 있다. 1층과 지하에 엔터식스, 2~3층에 이마트 왕십리점, 3층에 영풍문고, 4~5층에 CGV, 5층에 푸드코트, 6~7층에 웨딩홀인 디노체컨벤션과 스크린골프장이 갖추어져 있어, 왕십리에서는 상권이 가장 큰 곳이기도 하다.

엔터식스 왕십리점은 엔터식스가 최초로 개점한 곳이기도 한데, 유럽풍의 고급진 스타일의 쇼핑 거리를 주력 컨셉으로 잡고 있으며, 그만큼 내부 인테리어가 깔끔하고 이국적이며 스타일리쉬한 편으로, 도쿄 오다이바에 위치했던 쇼핑몰 비너스포트를 벤치마킹한 것으로 보인다. 2층은 왕십리역 대합실 맞은편에 이마트가 입점했는데, 본래 성동구에는 이렇다 할 대형마트가 이마트 성수점 밖에 없어서 구민들이 주말마다 차를 끌고 성수동에 가면서 일대 도로가 다 정체될 정도였는데, 2008년에 왕십리에도 이마트가 개점하게 되어 행당동, 금호동, 옥수동, 마장동, 사근동 일대의 수요가 고스란히 왕십리역으로 옮겨 왔다. 4층에 있는 왕십리 CGV는 영화 시사회도 자주 할 정도로 규모가 꽤 큰 영화관으로, IMAX 상영관을 갖추어 서울 동북부에서 여기를 찾는 사람이 꽤 많다. 이외에도 포시즌 워터파크라는 실내 워터파크가 입점했는데, 영등포구 씨랄라에 이은 서울 내 2번째 실내 워터파크였으나, 2013년에 영업을 종료하였으며 그 자리에는 웨딩홀과 헬스장이 영업중이다. 워터파크 부속으로 딸려 있던 찜질방과 목욕탕은 한동안 유지되다가 2017년에 폐점했다.

왕십리민자역사 뒤로 넘어가면 한양대학교 재학생들을 수요층으로 하는 상권이 있다. 본래 원룸촌이었던 곳인데, 그 사이로 주점이나 펍이 많이 들어오며서 일대가 상권으로 변모했다. 바로 옆으로 한양시장이라는 재래시장이 있고 마조로 연선으로 오래된 상가 건물들이 있는데, 일대에서는 꽤 오랫동안 자리잡은 맛집들이 이곳에 모여 있다. 길 건너 한양대학교병원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약국이 많이 있다.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도 한양대 상권이 있는데, 이쪽은 조금 더 한산한 편이다. 바로 옆에 서울숲 더샵에 엔터식스 파크에비뉴가 입점해 있다.

왕십리로를 따라 한양대 방면으로 계속 내려가다 보면 소월아트홀 옆으로 무학여고로 통하는 샛길이 있다. 그 주변으로 레몬프라자와 카페들이 자리잡고 있다. 레몬프라자에는 롯데슈퍼가 입점했고, 지하에 사우나가 있었는데, 규모가 꽤 큰 편이었다. 본래는 사우나 지하 3층에 노래방이나 PC방 같은 위락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언젠가부터 점점 규모를 축소하다가 현재는 최종적으로 폐업한 상태이다.

왕십리 생활권의 서쪽 최대 범위인 다산로를 기준으로 동대문 패션타운 관광특구와 맞붙어 있다. 성동공고에서 도보 약 10분, 서울중앙시장에서는 15분 정도 거리에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 있고, 신당역 7번 출구로 나가서 도보 5분 거리에는 신당동 떡볶이타운이 나온다.

9. 교육[편집]


왕십리도선동에는 서울숭신초등학교, 도선고등학교가 있고 왕십리2동에는 서울무학초등학교가 있다. 과거 이곳에는 배명중고등학교와 청구상업전수학교(일명 청구상고[12]), 한국예술고등학교가 있었지만, 배명중고등학교는 1984년송파구 삼전동으로 이전했고, 청구상업전수학교는 학생 수가 서서히 감소하다가 1997년에는 사실상 폐교 상태에 들어갔고, 2005년에는 완전히 폐교하였다. 건물 자체는 폐교 이후에도 양지사거리 인근에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었는데, 학교 건물이 8층 건물이라 그 기괴함이 더했다. 결국 2010년에 왕십리뉴타운 재개발 사업으로 인해 발파해체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988년에는 동대문구 용두동에 있던 아세아학교가 홍익동 150번지에 터를 잡았고, 1999년한국예술고등학교로 인가를 변경한 이래 수많은 연예인들이 홍익동 교정에서 배출되었다. 그러나, 불명확한 이유로 2016년부터는 신입생 모집을 중단하였고, 2019년에는 완전히 폐교하였다. 2023년 기준으로는 건물을 철거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현재 왕십리에 남아 있는 학교 중에서 서울무학초등학교는 장장 120년의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학교로서, 왕십리의 터줏대감과 같은 곳이다. 본래는 1904년에 상왕십리 783번지[13]에서 사립 왕신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하였고, 1915년에는 왕십리공립보통학교로 승격되었다. 1939년에는 학생 수가 증가하면서 지금의 하왕십리동 950-1에 터를 잡았고, 원래 사용하던 자리는 배명고등학교에 물려주었다. 1945년에는 서울무학국민학교로 개칭하였으며, 그 당시까지만 해도 왕십리를 포함해서 금호동, 행당동 등지의 학생들마저 무학국민학교로 통학하였을만큼 큰 학교였다. 1958년에는 서울금호국민학교가 개교하며 무학국민학교 학생 456명이 그리로 이관되었고, 1962년에는 새로 개교한 서울행당국민학교로 21학급을 이관했으며, 1968년에는 서울금북국민학교가 개교하여 학생 815명을 이관하였다. 또, 2005년에는 서울행현초등학교가 개교하여 11학급이 이관되었으니, 무학초등학교로부터 갈라져 나간 학교만 해도 4개 학교가 된다.

서울숭신초등학교는 본래 1959년 4월 3일종로구 숭인동에서 개교한 학교였으나, 도심공동화로 인해 원래 있던 터를 떠나 2015년, 왕십리뉴타운 안에 터를 잡았다. 바로 길 건너편에 있는 도선고등학교2017년에 개교하였는데, 성동구의 만성적인 학교 부족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신설된 것이다. 성동고등학교가 가까이에 있기는 하지만, 성동고등학교가 이름과는 다르게 성동구가 아니라 중구에 속해 있기 때문에 가까워도 2지망에서는 성동고등학교를 쓸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왕십리뉴타운 내에 고등학교를 하나 더 설치한 것이다.

초등학교의 경우 왕십리뉴타운 안에 있는 단지들은 숭신초로, 왕십리2동 대부분 지역과 도선동 대부분 지역은 무학초로 배정되며, 센트라스아파트는 숭신초와 무학초 공동 통학 구역이다. 홍익동 전역과 도선동 일부 지역은 마장동서울동명초등학교로 배정되며, 왕십리2동에서도 극동미라주와 풍림아이원 단지의 일부는 서울금북초등학교로 배정된다. 중학교의 경우는 관내에 중학교가 없어 인근 무학중학교동마중학교로 배정된다. 고등학교는 관내에 도선고등학교가 있기는 하지만, 왕십리2동에서는 금호고등학교무학여자고등학교를 지망하는 학생들도 있다. 자율형 사립고등학교를 가려면 한양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도 멀지 않아 선택지 중 하나로 나쁘지 않다.

넓은 의미로써의 왕십리로 확장하자면 남서쪽에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가 위치해있다.

10. 왕십리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편집]


왕십리가 오래된 동네이기도 하고, 서민 주택가로서 장년층에게는 추억이 담긴 곳이기도 하니 왕십리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 노래 등이 정말 많다. 다만 2020년대의 왕십리는 마용성으로 불릴 정도로 변모하였는지라 이런 미디어물을 보면 장년층은 격세지감을 느끼고, 청년층은 공감을 못 하는 경우가 많다.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朔望)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 가도 왕십리(往十里)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
울려거든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 다고,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天安)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이 젖어서 늘어졌다데.
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구름도 산마루에 걸려서 운다.


『신천지』, 1923.8.

  • 1976년에 개봉한 임권택 감독의 연출작인 왕십리가 있다. 신성일, 김영애, 전영선, 최불암 등 당대 톱스타들이 출연한 영화이며, 1976년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중에서도 수작으로 꼽히는 편이다. 왕십리 일대를 배경으로 했기 때문에 당시 왕십리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는데, 전풍호텔이나 행당동 굴다리,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 등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풍경들이 보인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살곶이다리 앞에서 찍었는데, 이 장면이 명장면으로 꼽히기도 한다. 1970년대 당시의 왕십리 일대 풍경이 궁금한 사람들은 한 번 보길 추천한다.




이 노래를 듣고 김흥국이 1959년에 왕십리에서 태어난 줄 아는 사람이 많은데, 김흥국이 1959년생인 건 맞지만, 태어난 건 강북구 번동(당시 성북구 번동)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 살아 숨쉬는 왕십리의 분위기를 서울시 홍보대사인 바이올리니스트 여근하가 바이올린 곡으로 연주한 왕십리 아라리이다.



11. 출신 인물[편집]



12. 여담[편집]


2012년 디아블로 3 발매 당시 왕십리 게이트로 유명했다. 왕십리역 일대에 디아블로 3 소장판을 사려는 사람들로 불야성을 이뤘다고 한다.

13.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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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기서 쓰인 '리'는 행정구역 단위로 쓰인 게 아니기 때문에 자음동화를 반영한 로마자 표기를 써야 한다. 로마자 표기법 참고[2] 다만 지금의 신당동, 흥인동, 무학동 일대는 원래 신당리계라는 독립된 계로 조선시대 내내 존재하다가, 1895년 갑오개혁 이후 잠깐 왕십리계에 포함된 것으로, 16년 뒤인 1911년에 행정구역이 개편되며 다시 신당리로 독립한 것이다.[3] 버전에 따라 다르게 나오기도 하는데, 그 일대에 사는 한 노인이 소를 이용해 밭을 가는데, 이 소가 자꾸 엉뚱한 곳으로 가자 "이 무학 같은 놈아! 제대로 된 곳을 두고 왜 자꾸 엉뚱한 곳을 가느냐? 왕십리하란 말이다!"라고 호통을 치고 무학은 그 자리에서 왕십리를 떠올렸다는 버전도 있다.[4] 애초에 무학대사는 천도에 그렇게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하륜이나 정도전 등에 의해 천도가 구체화되었다고. 물론 그런 거 다 떠나서 태조 이성계가 기득권이 꼴 보기 싫어서 천도하자고 떼쓴 게 가장 크다.[5] 이걸 직역하여 왕십리를 '킹스 크로스'라고 일컫는 개드립도 존재한다. 물론 그 역도 성립하여 런던, 시드니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킹스 크로스'를 한자로 직역하여 왕십리라고 부른다.[6] 참고로 정읍에는 진짜 왕리가 있었다고 한다.[7] 여긴 지명부터 神堂里였다. 귀신 신() 자가 마을 이름으로는 쓰기가 영 좋지 않다고 해서 갑오개혁 당시에 발음이 같은 新堂里로 바꾸게 된 것이다.[8] 집 당() 자가 행당동의 아기씨당이라는 신당으로부터 붙은 지명이다.[9] 출처[A] A B C D 2022년 10월 주민등록인구[B] A B 2023년 2월 주민등록인구[10] 舊 한진그랑빌[11] 행당2동의 옛 지명이 도장골이었다고 한다.[12] 실제로는 특성화고등학교가 아니라 전수학교였다.[13]중구 신당동 8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