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군이 되어보세!/등장인물/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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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조선
2.1. 왕실
2.2. 조정
2.2.3. 기타 대신
2.2.4. 외교관
2.2.5. 지방관
2.2.6. 경성군파
2.3. 군부
2.3.1. 육군
2.3.2. 수군
2.3.3. 군기시
2.3.4. 향군장
2.4. 종친
2.4.1. 왕실 일가
2.4.2. 하성군 일가
2.4.3. 기타
2.5. 소수민족
2.5.1. 귀순 왜장(도왜, 항왜)
2.5.2. 조선측 여진족
2.5.3. 조선측 유럽인
2.5.5. 대남도
2.5.6. 미주야인
2.6. 승려
2.7. 상인
2.8. 의원
2.9. 기타 조선 인물
2.9.1. 작중작 <홍희동전>
3. 일본
3.1. 오다 가
3.1.1. 오다 본가
3.1.2. 구 아자이 가
3.1.3. 가신
3.2. 하시바 가 → 도요토미 가 → 하시바 가[1]
3.2.1. 본가
3.2.2. 가신
3.3.1. 본가
3.3.2. 마츠다이라가
3.3.3. 가신
3.4.1. 아시카가 본가
3.4.2. 사나다 가
3.4.3. 호소카와 가
3.4.4. 타치바나 가
3.4.5. 기타
3.5. 친 조선파 세력
3.6. 반 조선파 세력
3.7. 기타 왜장
3.9. 기타 명사/상인
3.10. 조선 순왜
3.11. 일본측 유럽인
4. 명
4.1. 황실
4.2. 조정
4.3. 군부
4.4. 기타
5. 여진
5.1.1. 역대 추장
5.1.2. 아이신기오로 가
5.1.3. 신하
5.2. 야인여진
5.3. 해서부
6.2.1. 역대 교황
6.2.2. 추기경
6.2.3. 예수회
6.2.4. 기타
6.7. 기타 유럽 인물
7. 대아주 각국



1. 개요[편집]


슈타인호프 작가의 웹소설 명군이 되어보세!의 2부의 등장인물들.
실존 인물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한 가상인물



2. 조선[편집]



2.1. 왕실[편집]



대한 추존 황후
懿仁皇后 의인황후


조선 제15대 왕비
懿仁王后 의인왕후

선렬의성[A]의인왕후
宣烈懿聖懿仁王后

선렬의성[A]의인황후
宣烈懿聖懿仁皇后

존호
선렬의성(宣烈懿聖)[A]
시호
의인(懿仁)[2]
출생
1554년(명종 원년)
조선 한성부
사망
1619년(경종 11년)
조선 한성부 경복궁[3]
능묘
장릉(莊陵)
재위
조선 왕비
1567년 ~ 1608년 12월 22일
(음력 1567년 ~ 1608년 11월 16일)
조선 왕대비
1608년 12월 22일 ~ 1619년
(음력 1608년 11월 16일 ~ 16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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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전호
□□전(□□殿)
부모
□□부원군 김□□, □□부부인 이씨
부군
조선 장조
자녀
2남 2녀

  • 중전 → 의성왕대비(의인왕후 → 의인황후) 김씨
경성군의 중전으로 이장곤과 다지의 외손녀, 1554년생. 종친이던 경성군과 혼인해 경성군부인이 되었다가, 경성군이 명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중전이 되었다. 다지처럼 현대적인 외모의 미녀에 당돌한 성격으로 주인공은 다지가 백정이 아닌 양반가에서 태어났다면 이런 성격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어릴 적에는 몰래 마구간에 들어가 말을 타고 놀거나 남편감은 자기가 직접 고르겠다고 생떼를 쓰는 등 천방지축이었고, 지금도 겉으로만 얌전하지 본래 성격이 그대로 남아있다. 궁녀들에게 불같이 화낼 때가 많은데, 이를 두고 백정 혈통 때문이라며 뒷담하는 궁녀들이 있는 모양. 그래도 사람 보는 눈이나 대우는 괜찮아, 주인공도 "중전이 치하하라고 하는 사람을 치하하면 문제가 생긴 적이 없다"고 한다.
감이 좋아서 주인공이 경성군에 빙의한 후 영혼이 바뀌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눈치챘으나, 주인공이 임금으로서의 능력이 괜찮은 걸 보고 자신과 세자만 내치지 않는다면 문제 삼지 않기로 한다. 사실 중전은 간섭을 안 했다 뿐이지 현상유지를 중시하고 철저하게 절약 위주로만 흘러가는 원래 경성군의 성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성격은 오히려 주인공과 잘 맞는 편. 주인공과 상희 사이의 묘한 기류를 눈치채고[4] 주인공이 중인 출신이라 뒷배경이 없는 상희를 후궁으로 삼게 해 다른 후궁들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등 눈치와 처세술이 모두 뛰어나다.[5] 또한 매우 실리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어 고름의 분말을 주사하는 우두법도 거부감 없이 세자와 왕자, 공주들에게 시행해달라고 해 주인공의 우두 사업에 힘을 실어주고, 사림파들을 축출하기 위해 역모혐의를 조장하는 과정에서 명분을 제시할 실마리를 귀띔해주고, 주인공이 일본의 반 노부나가 세력을 회유하기 위한 메시지로 첫째 옹주를 사나다 노부시게의 아내로 주겠다고 한 것에도 찬성하는 등[6] 큰 도움을 준다.
왜란 발발 시에도 친정을 나가는 주인공을 믿고 국모로서 의연하게 자리를 지킨다. 40대가 되었지만 20대로 보일 만큼 미모를 유지하고 있으며 여전히 승마가 능숙하다. 외조모 다지의 일대기를 연극으로 만든 고다지전의 극본을 직접 집필했는데 주인공도 놀랄 정도로 뛰어난 작품을 내놓았다. 주인공이 폐렴에 걸려 임종하는 순간을 지키며, 주인공은 그동안 자신의 개혁정책을 든든히 뒷받침해 준 고마움에 임종하기 직전 자신이 무종이라는 것을 알려주려 하지만 당신이 누구든 그동안 서로 사랑하며 살던 내 남편이라며 듣지 않으려 한다.[7] 장조 승하 2년 후인 외전 6부에서 의성왕대비라는 존호를 받고 대비가 되어 장조를 그리워하며 잘 지내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이후 의인왕후의 시호를 받았다. 후일 장손 선조가 칭제건원하면서 황후로 추존되었다.
3부에서 저승의 상황을 다룬 외전에 따르면 저승에 오자마자 사랑하던 남편을 찾았으나 저승에 올라온 경성군의 영혼은 재석이 아니라 성질 고약한 원래 경성군임을 알고 크게 상심했으며, 재석이 임종 때 한 말이 사실이었음을 그제야 깨닫는다. 같은 처지인 무종 비 성렬대비 신씨와 자주 만나 서로를 위로하면서 진짜 재석의 영혼을 찾고 있다.[8]
  • 영창대군 → 영친왕 이의[9]
재석 빙의 이전 경성군과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로 빙의 시점 5살. 천연두에 걸렸을 때 개방적인 중전 김씨가 종두 접종을 허용해 살아남을 수 있었고 이는 종두법이 인정받는 계기가 된다. 신립의 딸과 결혼하게 되는데, 좋은 가문이긴 하나 이미 신립이 죽어서 세자의 권위를 위협할 일도 없기 때문. 형 이성과 다르게 아버지 유전자를 많이 받았는지 키가 작다고 한다. 칭제건원으로 영친왕으로 승격한다.
  • 정숙공주
재석 빙의 이전의 경성군과 김씨 사이에서 딸로 1581년생. 16세 나이에 최윤성과 결혼한다.
  • 정혜공주
재석과 중전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딸. 중전이 정혜공주를 임신했을 때 중전의 트릭에 속아 넘어가 원래의 경성군이 아님이 들통 나기도 한다. 1600년 송정선의 아들 송희원과 결혼하는데, 희정옹주와 같은 날 결혼한다.

  • 세자 → 경종 → 경조 이성
경성군과 중전 김씨 사이에서 낳은 세자. 주인공이 빙의한 시점에 11세. 주인공은 "아직 세자가 완전히 성리학적으로 머리가 굳어버리기 전에 빙의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매일 아침 세자와 대화하며 실리주의적 사고방식을 심어주려 노력하고 있다. 무자호란 때 친정을 나선 주인공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며 역모를 부추기는 대간들을 모조리 잡아넣는다. 주인공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 부왕의 별다른 지시 없이도 공납의 폐해를 정확히 인지하고 대동법을 유지하도록 하는 등 실리주의적 사고방식과 유능한 통치력을 보여주었다. 세자가 요절하지 않는 한 이 세계관에서 조선의 미래는 희망찰 것으로 보인다.[10]
무자호란이 끝난 뒤 대리청정을 끝내고 다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상희에게 수학을, 로카넬라 신부에게 그리스어·라틴어·서양 고전을 배우고 있다. 전부 잘 배우고 있다는 걸 보면 상당한 천재인 듯하다. 다만, 당시 조선인의 한계로 명나라를 진심으로 섬기고[11] 서양인들을 오랑캐로 생각하는 모습도 보인다. 왜란이 난 뒤 주인공이 친정을 가면 다시 대리청정을 맡을 예정. 아버지가 바뀐 게 천만다행으로 경성군 밑에서 자랐다면 능력도 못 피우고 유교 탈레반이나 성격파탄자로 자랐거나, 일본에 볼모로 끌려갔을 가능성이 높다. 주인공도 처음에는 세자를 자신의 후계자로만 생각했지만 세자가 자신의 교육을 잘 따라와 주자 친자식처럼 정이 많이 든 듯하다. 명나라 사신 이지충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물자원조를 해주겠다"고 하자 "전쟁이 언제 끝날지는 우리 조선 맘이지"라고 하며 명나라를 최대한 뜯어먹을 생각을 하는 등 잔머리는 이미 주인공 수준에 이르렀다. 유럽 선교사들이 평하기를 '무척 영특하고 과감하며 정치적으로 이득이 된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젊은이'라며 네로 황제를 떠올린다. 다만 이후 주인공과 상의 없이 우에스기군과 인질 교환 교섭을 시도하고 실패, 강릉 백성들이 왜적 치하에서 만족한다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인증해버리고 국왕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실책을 저지른다. 상당히 유능하지만 아직 어리다는 한계를 벗어나진 못한 듯. 그래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태도를 보이고 즉각 주인공에게 보고해서 주인공도 넘어가기로 한다. 이후 주인공이 복귀하여 다시 정치에 간섭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주인공과 대화에서 이것에 대한 서운함을 대놓고 말하며 대화를 나눌 정도의 신뢰를 확보했음을 보여준다.[12]
결혼 후 8년간 세자빈과 첩에게서 딸을 둘 보았으나 아직 아들은 없다. 어머니 유전자를 많이 받은 듯 하고, 주인공이 운동도 많이 시켜서, 아버지 경성군보다 키도 커졌고 건장해져서 옛날 이장곤이 떠오를 정도라고 한다. 을미동정이 조선의 승리로 끝난 직후에 드디어 결혼 10년 만에 첫 아들을 낳는다. 처음엔 미숙한 면이 있는 왕세자였지만 이런 저런 일들을 겪다보니 이 시점에서 주인공이 '이방원 Mk-2'라고 할 정도로 숙련된 정치가가 되고 있다. 아버지 몰래 다이샨과 밀약을 맺는다. 그 내용은 건주위가 화북을 차지하는 것을 돕는 대가로 만주를 할양받겠다는 것. 이후 나온 것에 따르면 사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경성군의 꼴통 성향을 싫어했으며 아버지가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걸 알지만 오히려 이쪽이 더 좋다면서 기뻐했다. 주인공이 사망한 후 37세 나이에 즉위한다. 즉위 직후 선왕의 묘호를 종을 붙이냐 조를 붙이냐는 논쟁에 조를 붙이도록 하여 장조라는 묘호를 올린다.[13] 즉위한 후 싫어해도 간언을 듣기는 하던 주인공과 달리 대들면 삼족을 멸해버리겠다는 태도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14] 매제인 다이샨과 밀약을 유지하며 만력제가 죽고 인간쓰레기 주상순이 황위에 올라 명나라에 농민반란이 일어나면 약속대로 건주가 화북을, 조선이 요서와 요동을 차지하자는 계획을 지속하고, 만약 건주가 배신하면 산동반도를 점령하고 건주도 쳐 없애겠다고 준비하고 있다.
3부에서 언급되기로는 1626년에 54세로 승하하여 경조(景祖)라는 묘호를 받았으며, 명나라가 생각보다 오래 버티는 바람에 그의 생전에는 청나라가 중원 입관을 못하여 칭제건원과 요동진출이라는 장조의 유훈은 경조의 아들 선조 대에 가서야 이뤄진다. 그 대신 평화를 누리며 장조가 크게 확장시킨 조선의 국력 배양에 전념했다고.[15]

  • 왕세손 → 선조 건원제 이연
세자 이성의 장남이자 원손. 8살에 천자문을 떼고 산학과 라틴어를 배우는 등 조기교육을 받는다. 주인공이 이뻐해 주고 있다. 주인공은 단종 신원 문제는 자신은 물론 세자도 건드리기 어려울 테니 세손부터 밑작업을 해야 한다고 판단, 수시로 언질을 주고 있다.[16]

3부에서 언급되기로는 1626년 부왕 이성(경조)이 승하하여 즉위한 후 청나라의 중원 입관으로 명나라가 원군을 청할때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유훈을 따라 가뭄을 핑계로 무시했고, 명나라가 망하고 중국이 청, 후송, 서 3국으로 갈라지자 1632년 칭제건원한다. 1650년 50세의 나이로 승하하여 선조 건원제라는 시호를 받는다.

  • 진안군 → 진왕 이욱
재석과 상희의 아들로, 2부 기준으로 경성군이 아닌 재석의 첫째 자식. 자식들에게 냉담했던 원래 경성군과 달리 주인공이 이뻐해주고 있으며 주변에서는 이런 변화를 상희에 대한 총애로 여긴다. 현대적 사고의 재석은 진안군이 어릴 때 무의식적으로 꿈을 마음껏 가지라고 말하며 키웠으나, 왕위는 세자에게 물려줘야만 한다는 것을 상기하고 진안군에게 그런 말을 어느새 하지 않게 된다. 진안군 본인도 15살에 그런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중2병에 걸려 어차피 어떤 관직도 나설 수 없으니 다 부질없다면서 학문 등 매사에 흥미를 잃고 무기력해진다. 이걸 본 주인공은 게으른 천재 타입인줄 알았는데 그냥 게으른 놈이었다며 탄식한다(...). 후에 이어지는 일화들을 보면 머리가 아예 안 돌아가진 않아도 좀 어리숙한 타입이긴 한듯. 하여간 "차라리 승려신부가 되어 출가하고 싶다"고 말하자 주인공은 정신 좀 차리라는 생각에 양응룡의 난 진압군에 이항복의 종사관으로 참가시킨다. 이항복에게 감화되어 그를 스승으로 깍듯이 모시며, 출세하기 힘들다면 문필가로써 이름을 남겨보라는 조언을 세겨 듣기도 한다. 이때 이항복이 추천한건 서양식 소설인 로망스 형식. 원정 귀환 때 만력제를 알현하는데, 만력제가 칙령을 내려 적서의 차별을 폐지하게 할테니 왕 해보지 않겠냐고 발언하는 바람에[17] 처지가 곤란해져서 평생 한량으로 살 수밖에 없게 되었다[18]. 명 원정에서 상희가 비상금으로 준 은자 천냥[19]짜리 어음으로 장팔사모를 구입해 주인공에게 바쳤는데, 주인공은 짝퉁인 걸 대번에 알아보고[20][21] 진성군을 나무란다. 형인 세자도 그 이야기를 듣고 빵터져서는 "내 선물로는 청룡언월도를 사왔으면 좋았겠다"는 농담도 한다. 덕분에 세자에게는 "어리숙하고 귀여운 동생"이라는 이미지가 박힌 듯. 주인공도 세자를 이방원에 비유할 정도라서 진안군이 세자와 사이가 틀어지지 않기 바랐는데 그건 이뤄진 셈. 한편 친모인 상희는 진안군과 그 자손들이 대대손손 먹고 살 걱정이 없도록 반촌다점, 반촌극장, 반촌주점의 프랜차이즈를 물려줄 계획이며 이와 별개로 의시를 봐서 의원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진안군은 스스로 "의술에는 관심이 없다"고 하며 양응룡의 난 토벌 경험을 토대로 소설을 써서 주인공에게 바치는데, 대단하진 않아도 그럭저럭 재밌는 이야기가 나와서 재능이 보인다고 한다. 덕분에 허균에 이어 조선사 2번째로 서양식 소설을 쓴 사람이 되었다. 이후 전국 각지의 상희가 사준 별장을 떠돌며 임진록[22] 등 많은 소설을 썼지만 주인공이 사망하여 미처 보여주지 못한 것을 슬퍼한다. 본부인이 못생겼다는 이유로 대신 양응룡의 난 토벌 중 데려온 중국인 첩을 총애하며 살았다고 한다. 조카 선조가 칭제건원하면서 진왕으로 작호가 승격되었다.[23]

  • 희정옹주 → 효단장황후(孝端莊皇后) 이혜원
주인공과 상희의 둘째 자식. 경성군을 닮아 눈과 키가 작고 유순한 성격. 정혜공주가 결혼하는 날 누르하치의 차남 다이샨과 결혼해 만주로 떠난다. 다이샨이 즉시 만주인 첩을 셋이나 들인데다 그녀들과 달리 아이를 낳지 못해 마음고생을 크게 한다. 이후 결혼 6년만에 첫 아들을 낳는다. 다이샨이 군사를 풀어 다른 아내들이 질투할수 없도록 하고, 가장 사랑하는 아내라고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금슬은 좋은 듯하다.

  • 희연옹주 → 효단문황후(孝端文皇后) 이혜연
주인공과 상희의 막내딸. 상희를 닮아 눈과 키가 크고, 한 성깔 하는 성격. 홍타이지의 청혼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중전과 면담한 뒤, 재석에게 "언니가 외로울테니 홍타이지에게 시집가도 좋다"는 의사를 밝힌다. 이때 잠깐이나마 '조선의 왕비가 되려던 차차의 눈빛'과 같은 눈빛을 드러냈다고. 처음에는 차차 같은 야심 때문이었지만 점차 홍타이지를 진짜로 좋아하게 되어 비밀 서신도 주고받을 만큼 깊은 연애를 하다 조선왕실 최초로 천주교 신자가 되어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왕실의 공식 행사를 넘어갈 순 없으니 먼저 전통 혼례 후 성당에서 다시 식을 올려 결혼식을 2번 했다.

  • 인빈 조씨
경성군의 후궁. 빙의 전의 경성군이 가장 총애하던 후궁이다.[24] 아들 하나(덕천군)와 딸 둘(정신옹주, 혜신옹주)을 낳았다. 자기 딸이 왜인 사노부와 혼인한다는 사실에 크게 슬퍼하여 상희가 위로해준다. 자기가 받던 총애를 뺏어간 상희에게 딱히 원망은 없는 듯. 인빈 조씨 소생 아들인 덕천군은 건강이 나쁘다가 결국 1594년 사망한다. 혜신옹주는 권율의 양자 권익경과 결혼한다.

  • 혜빈 강씨
경성군의 후궁. 아들 둘과 딸 하나(영선옹주)를 낳았다. 큰아들은 13살에 사망한다. 둘째 아들 혜산군은 평범한 양반집 딸과 결혼한다. 영선옹주는 이순신의 삼남 이면과 결혼한다.

  • 순빈 박씨
경성군의 후궁. 딸 셋을 낳았다. 후궁이 되기 전에는 장악원 출신의 가희였다고 한다.

  • 귀인 김씨
경성군의 후궁. 한동안 낳은 자식이 없었으나 경인왜란 뒤 옹주를 낳는다.

  • 숙의 홍씨
경성군의 후궁. 한동안 낳은 자식이 없다가 경인왜란 뒤 왕자를 낳았으나 돌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한다.

  • 숙원 정씨, 김씨
주인공이 궁궐의 제모 유행을 확인하기 위해 지나가던 궁녀의 옷을 벗겨봤는데, 막상 벗겨 놓고 관계를 안 가지는 건 모양새가 이상하고 싱싱한 처녀의 몸을 보고 군침이 돌아 덮친다. 이후 맛이 들려서 털 확인 명목으로 한 명 더 덮쳤다. 그러나 이미 후궁과 승은상궁의 숫자가 너무 많아 더 늘릴 생각은 없다고. 한동안 승은상궁으로 지내다가 둘 다 1598년 숙원으로 오른다.


2.2. 조정[편집]



2.2.1. 역대 영의정[편집]


부임 순 정렬.

각성 초기 영의정.

  • 이영송
박순의 후임. 1부에 나온 이장곤과 다지의 막내아들. 대체로 주인공을 편들어 주지만 유학자의 면모를 버리진 못했는지, 이런저런 잔소리를 하기도. 정철 일파와도 친분이 있어 '정철의 난' 때 쓸려 나갈 뻔 하지만, 주인공이 이장곤 아들이라고 봐줬다. 하지만 고구마 게이트[25]를 계기로 결국 조정에서 자진 하차한다.

이영송의 후임 영의정. 별 특징 없이 술에 술탄 듯 물에 물탄 듯 하지만 이영송이 고구마 게이트로 물러나자 출석 안한 것이 어부지리가 되어 영의정이 되었다. 실제로는 1589년에 영의정이 되었지만 곧 사망한다.[26]

류전의 후임 영의정. 주인공이 무자호란으로 친정을 간 사이 대리청정하던 세자 이성을 보필하여 국정을 잘 이끈다. 사림파가 세자를 부추겨 역모를 시도하자 이를 절대 듣지 말라고 간언한다. 경인왜란 발발 직후 1590년 4월 13일 왜군의 공격 시기와 상륙 장소 예측에 실패한 책임을 지고 비변사를 대표하여 영의정에서 해임되고 며칠 후 사망한다.[27]

2부에서 부활한 주인공이 제일 먼저 만난 인물로 당시 도승지. 주인공의 오른팔과도 같은 인물. 당연히 원역사처럼 엄청나게 유능한 천재다. 충성심이 강하고 일도 잘하기에 주인공이 열심히 부려먹는다. 처음에는 갑자기 바뀐 주인공에게 적응하지 못해 어쩌면 주인공에게 무종대왕의 혼이 강림하기라도 한 것 아닌가 의심하기도 한다. 초반에는 일본과 명나라에 연이어 사신으로 파견을 나가지만 다행히 견서사에는 가지 않는다. 무자호란 중에는 주인공의 옆에서 주인공을 보좌한다. 경인왜란이 일어나자 영의정으로 승진한다. 문관계열 중에서는 이항복, 이덕형, 이원익과 함께 주인공이 가장 아끼는 인물. 주인공의 말에 의하면 유능함으로는 이항복도 능가한다고 한다. 단지 조금 딱딱해서 재미는 없다고. 장기간 영의정으로 재임하다가 을미동정 이후 휴가를 줄 겸 윤두수에게 영의정 자리를 넘기고 정철의 뒤를 이어 사전청 도제조가 된다. 봉작은 역사대로 풍원부원군.

주인공이 중전의 힌트[28]에 조언을 얻어, 기획으로 터뜨린 '정철의 역모'(현실 역사의 기축옥사에 해당)를 더욱 크게 확대하는 과정에서 당시 전라도 관찰사로 나가있던 윤두수 또한 정철과 내통하여 군사를 일으키려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된다. 실제 역사에서는 1589년 호조판서를 거쳐 평안감사가 되고, 1589년 정여립의 대동계 사건이 확대되어 기축옥사가 터지고 서인동인을 제거하고 집권하자 다시 대사헌으로 발탁되어 내직에 돌아온 뒤 호조판서가 되었다가 홍순언, 황정욱 등과 더불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종계를 변무하고 돌아왔는데, 소설 속에서는 '종계변무'가 스승 장거정의 부정부패에 대해 주인공이 친서에서 언급하자 이를 계기로 만력제가 장거정 일족을 탈탈 털고 조선국왕은 번국의 의무를 다했다며 주인공이 요청했던 각 분야 산업의 기술자를 보내주고 종계변무 문제도 만력제가 같이 해결해주는 식으로 해결되었기 때문에 원래 역사에서처럼 종계변무에 성공한 공으로 광국공신 2등관에 서훈되고 해원군에 봉하여지지는 않았다. 이쪽은 대체역사의 피해자.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전라도 관찰사로 지내며 불만은 있었어도 충성심을 가지고 성실히 근무하던 사람을 잡아다 북쪽으로 보내버린 거다. 주인공도 이 점은 미안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자호란 때 삼성부에서 향군장으로 참전, 부사 권율을 도와 삼성부를 성공적으로 방어한 공로로 주인공에게 사면을 받아 호조판서로 복직된다. 그리고 삼성부 전투 때 호감을 가진 도왜 김충선에게 서녀를 시집보내 사위로 삼기로 한다. 이후에도 유능하고 개혁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어 이순신을 모함해 까이는 원래 세계와는 달리[29] 훌륭한 재상으로 역사에 남을 듯하다. 경인왜란이 끝난 후 피해를 입은 남부지역 복구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으며, 왜병 포로들을 섬라에 쌀을 받고 노예로 판다는 주인공의 계획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한다. 류성룡의 후임 영의정. 3차 견서사와 함께 입국한 월터 롤리가 조선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격렬하게 주장하다가 객혈하며 쓰러져 실려 나가고, 건강 악화로 은퇴했다. 중간에 억울한 유배를 다녀오기도 했지만, 류성룡의 뒤를 이어서 영의정에도 오르는 등 중간에는 대체역사의 피해자였지만, 말년이나 사후에는 오히려 수혜자라 볼 수 있다.

실제 역사처럼 재치가 뛰어나고 지혜로운 신하. 심지어 미래인인 주인공도 경탄할 정도. 사실상 1, 2부 통틀어 조선 최고의 천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30] 지적 호기심이 뛰어나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에게서 라틴어와 서양의 정세에 대해 배우고 갈리아 전기 원서를 라틴어를 배워 읽어낼 정도가 된다.[31] 원역사에서는 서인이었으나 이쪽 세계선에선 그냥 자유로운 영혼(...)이다. 신하들 중 가장 진보적이고 유쾌한 성격. 항상 유머감각이 풍부하고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주나 가끔 진지할 경우는 한없이 진지해진다. 주인공의 총신 중 한명이자 친구 같은 존재로, 건주위를 키워서 중원을 갈라놓으려는 계획을 유일하게 알려줬다. 왜란이 터지자 병조판서 직을 맡으며 군권을 몰아주기도 하고, 금위사장의 직위를 주기도 한다.
5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 서반아어와 라틴어는 견서사 가기 전에 배웠고 돌아오는 뱃길에 15개월 만에 영어와 불어와 네덜란드어를 배웠다고 한다. 견서사에서 돌아온 후 1595년 일본 보복원정인 을미동정 때는 체찰사를 맡아 일본의 반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을 포섭하는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한다. 을미동정이 끝난 후 우의정으로 승진한다. 역시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친구 이덕형, 장인 권율과 달리 상당한 호색한으로 견서사로 파견되면서 유럽의 여인과 관계를 가지는 꿈을 이루나 데려오지는 못한다.[32]
동정 이후로는 상희의 다점에서 롤리타의 시녀인 도로테아에게 찝쩍대고 있으며, 덕분에 부인에게는 꼼짝을 못한다. 명나라에서 양응룡 반란 토벌군을 요청하자 토벌군의 총책임자인 토적사를 맡아 다시 원정을 나간다. 원정을 성공하고 이순신처럼 명에서 정1품 도독 벼슬을 받고 돌아온 후 윤두수 후임 영의정이 된다. 사르후 전투의 전후처리를 맡아 동지사가 되어 명에 사신으로 떠나고, 명과 건주 사이를 중재하는데 성공한다. 주인공도 죽을 때 고명대신으로 이순신과 함께 불러들일 정도로 최고의 신뢰를 보여주었다.

원역사에서처럼 말 그대로 돌부처같은 성격,[33] 이항복과 절친한 사이이다. 주인공이 고구마를 가져가서 심어보라고 할 때도 "농사꾼도 아닌 내가 가져가 키우다 자칫 죽이느니, 농사에 익숙한 백성들이 한 포기라도 더 심는 것이 결과가 나을 것"이라며 가져가지도 않았고 "우리는 유능하니 괜찮다"는 이항복과 다르게 "지방관 경력이 없는 우리들의 출세는 나쁜 선례가 될 것"이라 우려한다. 원역사에서의 외교적 수완 때문에 유럽행 사신단 견서사에 서장관 역으로 참가해서 갈레온을 타고 유럽으로 향한다.
유럽에서도 스페인과 조선의 외교적 예법 차이를 고려하여 능숙하게 대처하는 등 외교관으로서의 면모를 발휘하고 있다. 마닐라에서 왜란 소식을 접한 뒤 다스마리나스 총독에게 은을 빌려 염초와 구리를 구매하기 위해 조선으로 가지 않고 마닐라에 남기로 한다. 그리고 군수물자를 구매해 논산대첩 직후 귀국, 주인공은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고 예조참판 겸 외수사 제조로 임명한다. 그뒤에 이항복과 사노부와 함께 노부나가의 사신으로 다녀오고, 사노부와 함께 스스로 신기리를 자처하여 철수하는 왜군을 보호하던 타치바나 무네시게를 회유하고자 찾아간다. 지방관 경험이 없다는 약점이 있었는데, 경인왜란 종결 후 지방관직을 잠시 맡은 후 제2차 견서사에 다시 뽑혀 또 유럽에 가게 된다. 그리고 에스파냐에 도착한 뒤에도 이항복과 농짓거리 하는 건 여전한 걸 보여준 뒤[34] 만난 카디스 시장의 아내가 딸을 부르자 당혹해한다.[35] 당시 아직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여서 그랬는지, 이국에 호기심을 가진 롤리타에게 조선에 대해 이야기 해준 것이 전부였는데 롤리타가 단단히 플래그가 꽂힌 거 같다고.[36] 롤리타가 조선까지 따라가겠다고 한 덕분에 이항복에게 놀림당한다. 그 후 펠리페 2세를 알현하고 올리바레스 백작, 이항복과 프랑스의 정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 뒤 헝가리로 가서 동유럽 기병을 알선하던 중 윙드 후사르 20기를 데려오는데 성공한다.[37] 그 뒤 세르반테스를 만나 책을 판 수익을 얻어오고 귀국길에 기어이 배에 오른 롤리타 히메네스를 보며 골치를 썩이게 된다. 귀국길 내내 롤리타에게 냉담하게 대했지만 롤리타의 일편단심은 식지 않았고, 이를 본 주인공이 명령하여 롤리타를 첩으로 들여서, 정실은 아니지만 조선 최초로 유럽인 여성을 아내로 맞이한 인물이 되었다.
을미동정 때는 이항복과 함께 일본 측과의 외교교섭을 맡는다. 을미동정이 끝난 뒤 첩 롤리타 히메네스와 함께 3차 견서사로 또다시 떠났다 돌아와 우의정이 되었다. 3차례 견서사로 다녀오면서 트럼프 카드포커를 현시화시켜 사패 놀이를 개발했고, 이항복이 동지사가 되어 사신으로 떠나자 후임 영의정이 된다. 유정을 귀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주인공 사망 시 고명대신이 된다.


2.2.2. 역대 병조판서[편집]


부임 순 정렬.

주인공이 막 경성군으로 빙의했을 때 실제 역사대로 병조판서로 재직 중이었다. 초반에는 평범하게 나왔지만 실제로는 주인공 이상의 주전파로 일본 쪽 외교에서 노부나가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친 명리에 어긋난 놈이란 것을 알고는 당장 치자고 적극 건의할 정도. 아쉽게도 예조판서로 재직중 실제 역사대로 1584년에 죽는다.

  • 박흥선
이이의 후임 병조판서. 어느 정도는 실무를 아는 듯 했지만 니탕개의 급습을 예측하지 못한 책임으로 파직 당한다. 후임은 김명원.

원역사에는 신각의 죽음의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지만, 지휘는 못해도 군사행정엔 뛰어난 그의 능력을 주인공이 알고 있어서 적성에 맞는 자리에 써먹는다. 병조판서로 임명되고는 기대대로 국방 행정에 두각을 나타내어 주인공은 이에 만족하고, 정철 등의 서인을 정계에서 제거할 때도 김명원은 건드리지 말라고 언질을 주었다. 주인공이 부여주로 친정 간 후에는 한양에 남아 세자 성을 보좌하며 보급 등 후방에서의 지원 업무를 맡았다. 경인왜란이 터지자 이항복에게 병조판서 직을 넘겨주고 주인공이 우참찬으로 임명한다. 이항복이 견서사로 떠난 후 다시 병조판서로 복귀한다. 능력도 좋아 신임 받지만 더 위에 있는 사람들도 유성룡, 이산해, 이원익, 윤두수 같은 능력자들이라 승진을 못하고 있어서 최장수 병조판서가 될 판이다. 대신 주인공이 수시로 보너스를 내려주고 있다. 그래도 적성에 안 맞는 군사 지휘가 아닌 적성에 맞는 국방행정 업무를 맡고 이를 충실하게 잘하여서 원 역사 같은 오명을 쓰지 않고 명신 중 한 명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은 수혜자다. 을미동정 때 주인공이 도원수를 맡기려 했지만 김명원이 스스로 사양하여 이순신이 도원수를 맡고, 김명원은 동래에서 김성일의 도움을 받으며 병참을 맡는다. 자신의 적성에 잘 맞는 병참능력으로 일본원정군이 한 번도 보급에 문제없이 승리할 수 있게 돕는다. 원정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병조판서지만, 품계는 정1품으로 대우와 녹봉은 정승과 동급이다. 서방과의 교류가 늘어나자 라틴어를 익려고 할 정도로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려고 노력하며, 잘 안되자 임금이 외국어 잘 하는 신하를 원한다면 나이도 많겠다 벼슬을 내려놓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충성심도 깊다.

김명원이 노환으로 은퇴한 후임으로 앉은 병조판서. 아메리카 탐험대와 북극 탐험대를 조직하는 임무를 맡는다. 명나라와 건주위의 전쟁에서 조선군이 대승하자 기왕 이렇게 된 거 좀 더 공략하자는 중신들의 의견에 명나라는 전부 패퇴했고 건주위는 아직 건재한 마당에 소수 조선군 병력으로 전장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의견으로 철수를 주장한다.


2.2.3. 기타 대신[편집]



동인의 영수로 평소 사이가 나쁜 서인을 쳐내기 위해 정철 역모사건에 대한 정보를 정여립에게 흘린다.[38] 실제 역사에서 정철의 포지션을 맡게 되지만, 기축옥사와는 달리 서인들은 죽지 않고 전가사변으로 끝나고, 핵심인 정철, 윤두수 등이 공을 세우고 복귀했으니, 정철이 그랬던 것처럼 서인의 원한을 살 일은 없게 됐다. 무자호란 발발 후에는 명나라로부터 해서부 땅인 송화강 동쪽 지역을 조선이 얻어내기 위한 사신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10개월간의 어려운 협상을 잘 이끌어내어 송화강 동쪽 지역의 조선 영유를 승인받고 돌아오는 길에도 겨울 바다를 핑계 삼아 요동부 육로로 오면서 이여송을 정탐하는 공로를 세워 우의정에 임명된다. 경인왜란이 터지자 다시 명나라에 군자금 원조를 청하는 사신으로 파견되어 파병은 필요 없지만 식량 지원은 필요하다고 요청하고 후방(건주위)의 불상사를 막아줄 것을 부탁하였고 명나라의 지원을 얻어내는데 성공한다. 2차 견서사 귀환 후 주인공에게 사위 이덕형에 연정을 품어 따라온 롤리타 이야기를 듣고 당황해서 사위가 원래 착실한데 친구를 잘못 만나 그랬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한다.[39] 원역사의 인물이 능력은 뛰어났을지언정 당쟁을 일삼은 간신으로 기억된 것에 비해 이 세계에서는 명신으로 남게되었으니 이쪽도 대체역사의 수혜자인듯.

  • 문청공 정철(文靑公 鄭澈)
전형적인 조선 사대부로 주인공의 실용주의, 부국강병 정책을 성리학적인 관점으로만 잣대질하며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 주인공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다가[40] 사적인 자리에서 불경한 말을 내뱉은 것을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 정여립에게 들켜 역적으로 엮여 들어가 부여주로 전가사변 당한다. 그런데 여진족의 침략 와중에도 같이 전가사변 온 윤두수는 향군장을 맡아 권율을 돕는 것과는 달리 술이나 마시면서 글이나 짓고 있어 주변에서는 그냥 없는 사람 취급당한다. 허나 그 와중에 5권 분량의 삼성부 방어전을 다룬 서사시를 펴냈고 이 공으로 서울로 복귀되어 '사전청 도제조'로 주인공이 편찬을 결심한 표준국어대사전 편찬 및 서양 실용서적 번역 책임을 맡긴다.[41] 라틴어는 기초적인 수준으로 익혔다고 하며 견서사가 가져온 5,000여권의 서양 서적을 번역하기 시작한다. 2000년이나 지속된 로마 제국에 매력을 느껴 로마사를 깊이 파고든다. 주인공의 말에 의하면 최근 그야말로 영혼을 불태워가며 책을 쓰고 있다고 한다 서양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재미에 빠진 덕분에 술도 끊게 되었고 덕분에 원래 죽었을 나이인데도 정정하게 살아 있다. 바뀐 역사의 수혜자가 된 셈. 3차 견서사에 자원했으나 고령으로 원역사의 수명을 이미 넘겼기에 여행 중 객사할 가능성이 높고 증보경인란록과 을미동정록의 편찬을 해야 하기에 허락받지 못했다. 그야말로 김지의 뒤를 이은 중증 워커홀릭2로써 사전청 관리들은 제사 아니면 무조건 출근, 본인은 집안 제삿날에도 출근할 정도. 3차 견서사에 발탁된 허균조차도 번역해야한다며 붙들려 못나올 뻔했다. 그러나 건강 악화로 퇴직하고 유성룡에게 자리를 넘겨준다. 결국 죽어서 인성부원군에 봉해졌다고. 이후에도 그가 쓴 「로마제국 낙성기」가 조정 대신들 사이에서 오스만 혐오를 조장하며 여러 나비효과를 일으키기도 한다.
진지하게 보자면 본의 아니게 조선을 개방되고 부강한 나라로 만들겠다는 주인공의 계획을 가장 크게 도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개혁과 개방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기득권의 저항인데, 그가 로마사를 번역해서 조선에 소개하면서 조선의 기득권층이라고 할 수 있는 사대부들은 조선 밖에도 그들이 숭상하는 중화세계 못지 않는 문명국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개방에 대한 저항을 누그러뜨리는데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이 사망하고 거의 한세기만에 깨어난 3부에서는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유학자들은 없으며, 심지어 송시열 조차도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라는 현실을 고려해서 성리학적 명분론을 주장하고, 태황도 로마사를 거진 꿰고 있을 정도로 조선 밖 세계에 대한 지식은 사대부들의 기본 교양이 되었다. 이후 문청공 시호를 받는다.

  • 정효신
가상인물. 예조참의로 있던 중 오다가 볼모 교환을 제안하자 모든 신하들이 "당장 왜사를 쳐 죽이라"며 난리가 났을 때 조정에서 유일하게 이를 받아들이되 "죽어도 아깝지 않을 종친을 보내면 된다"고 하여 주인공조차 너무 급진적이라 놀라고 키워주기로 한다. 이후 연해주 관찰사가 되어 왜적 침입 소식을 듣고 "설마 왜적이 연해주로 오지는 않겠지만 혹시 모르니 대비는 해두자"고 생각하고 있다. 휘하에 3,000명의 병력이 있다고 한다.[42] 다테 마사무네가 접촉해오자 이를 조정에 알리고 다테군을 무장해제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다테에게 정보가 들어갈 길을 전부 차단하고 능수능란하게 다테를 제어하고 있다. 을미동정이 끝난 후 중앙으로 복귀한다. 후임은 송언신.

류성룡, 이항복, 이덕형과 함께 주인공이 자신의 F4[43]라고 칭하지만 상당히 존재감이 없다. 도승지 등의 관직에 있다가 왜란발발 후 전라도에 체찰사로 파견을 가 이일, 선거이와 함께 작전을 논의하면서 두 사람의 갈등을 조정하느라 진땀을 흘린다. 경인왜란 종결 후 양전 사업을 성공적으로 마친 공로로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된다. 존재감은 별로 없을 지 몰라도 그 뛰어난 능력은 언급되는데, 왜란 이후 토지 문제로 송사가 많은 전라도경상도 지방을 돌아다니며 송사를 해결했다. 총 해결 건수는 3,157건, 거의 하루 15건을 처리했다.[44] 주인공은 자신의 F4 중에서 유독 반대 의견을 많이 낸다며 무종 때 신수근이 생각난다고 말한다.

  • 박희성
가상인물. 이항복이 견서사로 떠나면서 후임으로 추천하여 이항복의 후임 금위사장이 되었다. 1부에서 정호찬과 함께 활약했던 수사관 박헌의 증손자다. 중인 출신인데 금위사장이라는 중책을 맡을 만큼 실력파인 인물.

  • 김홍석
경인왜란 종결 이후 시점의 도승지. 가상인물.

각성초기 예조판서.

  • 윤승현
각성초기 호조판서.

  • 정일한
1부에서 주인공과 상희 사이에서 난 아들의 자식, 즉 무종의 손자. 1540년생. 정호찬이 그 아이를 자신의 얼자로 키웠기에 정호찬의 손자로 알려져 있다.[45] 주인공은 여러 정황으로 정일한이 자기 자손이라는 것을 확신했지만 감성적인 상희가 알게 될 경우 멘탈이 버티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당분간 상희에게는 숨기기로 한다.[46] 무과로 입관했고 매우 유능한 인물이지만 빽이 없어서인지 변방 고을 사또만 돌고 있다가 해서부 침공 때 공을 세운다.[47] 이후 삼성부에서 권율의 부장으로 활동. 주인공이 아직 만나본 적은 없지만 권율 옆에 꽂아주는 등 은근히 신경 써 주고 있으며 북방이 정리된 후 참전자들을 포상할 때 정일한을 만나보고, "내가 무종으로 오래 살았으면 이런 얼굴이었겠구나"하고 속으로 생각하나 아무래도 오랜 세월이 흐른 후손이다 보니 가족이라는 느낌보다는 그저 충신을 대하는 고마움 정도로만 느낀다. 이후 다시 북방으로 발령되어 올라갔으며 경인왜란 중에는 등장하지 않았다. 경인왜란 종결 후 대남도 개척이 결정되면서 초대 대남개척어사로 임명되어 남쪽으로 떠났다. 평생을 북방과 남방의 오지만을 떠돌았음에도 주인공에 대한 절대적 충성은 변함이 없다. 을미동정까지 마무리 된 후 대남도가 정씨왕국이 되는 것을 두려워한 주인공이 중추원 판사직을 주어 조정으로 불러들인다.

원 역사에서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부정해 조선이 대일 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한 원흉 중 한 사람으로 욕을 먹었지만, 전쟁이 터진 후에는 그 죄를 갚기 위해 자기 몸 돌보지도 않고 조선을 위해 헌신한 인물임을 주인공이 알기에, 적성에 맞는 자리에 두고 계속 기용한다.[48] 덕분에 이쪽도 수혜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경인왜란 당시 경상도관찰사로 임명되어 대구 부사 조경과 류성룡과 함께 대구성에 있으면서 우에스기 카게카츠 휘하의 일본군이 강원도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류성룡과 함께 길을 잘못 들었거나 북쪽에 대기하고 있다가 남침으로 기습하려는 계략으로 오판한다. 이후 동래성 함락과 경상좌병영군 패배 소식을 명분삼아 오위군을 이끌고 가려는 신립에게 불안해하며 류성룡과 대구도호부사 조경과 함께 왜별기만이라도 대구성에 남겨 만약을 대비하자고 한다. 그러나 이에 앙심을 품은 신립이 왜별기의 대표적 인물인 사노부를 족친위로 전속시켜서 데리고 간다. 그래도 청도까지 따라가서 류성룡과 청도군수 조승일, 속오군 지휘관(김면, 정인홍, 곽재우)들과 함께 계속 신립을 설득한다. 하남벌 전투에서는 오위군이 붕괴하자 사노부의 호위를 받으며 류성룡과 함께 탈출에 성공하고는 현지 속오군과 만나 대구성으로 향한다. 대구성 전투 중 남하하는 주인공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시마즈 군의 묵인 하에 성을 나온다. 그리고 방어사 이경록과 함께 속오군을 이끌며 상주감영에 있던 군량을 싣고 주인공을 만난다. 그 후에는 상주 지역의 안정에 노력한다. 원래 역사대로면 죽었어야할 시기를 지나 일본 원정 때도 병참 업무를 맡은 김명원을 돕는다. 침략을 막지 못한 원흉으로 지탄받지도, 죄책감을 느낄 일도 없고, 전시에도 실제 역사에 비하면 좋은 여건에서 근무해서 건강에 악영향을 주는 일도 줄어든 결과 같다. 을미동정 이후 이조판서가 되었다.

주인공이 빙의한 당시 금위사장으로 대동계라는 정보조직을 운영하여 정철 일파를 역모를 적발하여 몰아내는 데에 큰 공을 세우지만 주인공이 실제 정여립의 행보 때문에 못 마땅 해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정여립이 역모와 무관한 권징을 사적인 원한으로 역적으로 몰았다는 것이 밝혀져 부여주로 유배를 간다. 하지만 임금의 신임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부여주에서 정일한을 도와 향군장으로 일하다가 무자호란으로 친정을 온 주인공과 재회하였고, 충성심을 확인한 주인공은 여립을 한양으로 다시 불러들일 마음을 갖는다. 자신이 이끄는 속오군을 대동군이라 이름하고 강병으로 조련하는데 주인공은 혹시 사림파에게 오해 받을 수 있으니 대동군이라는 이름은 쓰지 말라고 충고하여 정여립은 아쉬워하면서도 이를 따른다. 전쟁에서 죽지만 않고 공을 세워 재기한다면 그의 실용주의 성향 상 조선개혁의 강력한 조력자가 될 수 있을 듯하다. 그래선지 무종을 매우 존경하고 있었다. 심지어 손톱 뽑기 고문 발명을 찬양하고 실행하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경인왜란이 터지자 귀양에서 풀리고 부잔타이의 울라 부 기병을 감시하는 감관으로 임명되어 유극량의 도감군에 합류하여 남쪽으로 이동한다. 논산대첩에서 부잔타이 대신 울라 기병대를 지휘하여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 부대를 섬멸하는 대공을 세운다. 사실상 울라부의 총독 역할을 수행 중. 논산대첩 후에는 울라 기병대를 이끌고 추풍령을 장악하고 대구까지의 진군로를 점령하여 주인공의 친정군이 무사히 대구에 도착하게 한다.
어떻게든 이 전쟁에서 공을 세워 다시 금위사장에 복직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으나 주인공은 정여립을 금위사장으로 다시 두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 장군직을 내려 변경 방어를 시킬 생각이다.
이후 기병대대장직을 받고 불만은 있으나 군무를 성실히 수행, 이후 선전관이 되어 일본으로 가서 도쿠가와와 접촉하여 협상을 진행하며 그 이후에는 양응룡의 난 진압이 끝난 뒤 명나라 조선관 주재관원이라는 위장 신분으로 침투한 익문사 총관으로써 금위사 시절의 짬밥을 살려 해외 정보 수집 활동을 하는 중. 건주위에도 그의 끄나풀이 있으며, 명-건주위 전쟁이 발발하자 건주위에 특사로 파견되어 물밑 교섭에 성공하고 돌아온다. 환갑 가까운 나이까지 외국에서만 떠돌아도 재석에 대한 충성심은 굳건하며, 정씨에 주인공의 측근으로 정보 공작을 주로 맡는 책략가라는 점이 1부의 정호찬과 비슷하고, 1부 박원종에 이어 원역사에서 나쁜 평가를 받았으나 재석의 최측근이 되어서 운명이 바뀐 인물 포지션이 되었다.

전사한 김여물의 집에 문상객들이 몰려드는데 상주인 김류의 친구들인 선비들이 김여물의 장렬한 최후에 감명받고 그 중 김상헌이 나서 "저 도리를 저버린 금수 같은 왜놈들을 벌하러 주상께서 친정을 나서시고 남만교도까지 충성을 바치겠다며 전장에 나서는데 유생인 우리가 이렇게 있을 순 없다!"며 자원입대를 선동한다. 나중에 한강변에 집결한 군대 앞에서 이번 전쟁의 당위성을 열변하며 왜군을 성토한다. 가히 괴벨스급 선동가의 기질이 보인다. 참고로 이 때 김상헌의 나이는 고작 21세다. 이게 단순히 나가서 싸우겠다는 의미를 넘어선 게 성균관의 출석 일수를 못 채우면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데 그런 리스크를 감내하고서라도 나서겠다는 것. 이후 나가마스가 신립의 유해를 가지고 오자 저 왜놈의 목을 쳐서 사기를 높이자고 한다.[49] 도감군 서기관의 임무 중 하나인 군졸들의 편지 대필을 해주면서 그동안 몰랐던 백성들의 삶에 대해 눈을 뜨게 되어, 전쟁이 끝난 후에도 백성들의 삶을 더 알아야겠다고 훈련도감 서기직에 머무른다. 후일 벼슬길에 나가서도 실제 역사와 달리 개혁적인 관료로 활동할 것으로 보인다. 전후 2차 견서사에 합류하게 되었다. 김류와는 원래 절친 이었으나 김류가 천주교에 마음을 기울이는 걸 영 마뜩찮게 보던 판이라 아예 천주교도가 된 이후로는 사이가 틀어졌으나 2차 견서사를 함께 다녀오면서 관계를 다시 회복했다. 다만 아직 천주교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하다. 견서사에 다녀온 후 강원도 순회판관을 맡아 지역 토호들을 벌주고 백성들을 돕는다.

김여물의 아들로 친구인 김상헌과 함께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도감군 서기에 들어간다. 그러다 알고 지내던 병사들을 통해 백성들과 공감을 쌓던 중 그들의 죽음에 충격을 먹는다. 정신적 갈등이 심했을 땐 자신도 모르게 천주를 찾을 뻔했다고 하는 등, 천주교에 호감을 보인다. 3년 상을 지내지 않고 전후 견서사에 합류했다. 여행길 내내 신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등 천주교 신앙에 호의를 보이더니 유럽에 도착한 후 제사 문제가 임시방편으로나마 해결되자 클레멘스 8세에게 세례성사를 요청, 조선 조정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세례명베드로. 보헤미아로 가서 조선으로 갈 광산기술자를 섭외하는 임무를 맡지만 가톨릭에 귀의했다는 점 때문에 오히려 후스파의 반감을 사기도 한다.[50] 유럽에 가 보고 시야가 넓어져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사대부적 가치관을 탈피하게 되었으며, 언젠가는 조선이 세계의 중심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게 된다. 귀국 후에는 조선인 천주교 신자의 대표자 같은 역할을 맡게 되며, 조선처럼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천주교를 이용할 마음을 먹은 홍타이지가 김류의 집에 자주 들러 김류의 아들 김경징과 친하게 지내면서 천주교에 거짓으로 귀의하게 된다.
  • 박윤성
1599년 시점 호조판서. 주인공이 제안한 조면기에 대한 특허 제도에 찬성하면서 그 대신 조면기를 생산할 때마다 조정에 세금을 지불할 것을 제안한다.

  • 송정선
빙의 전 경성군 시절 공조판서, 호조판서를 지낸 인물. 2부 시점에서는 은퇴했으며 아들 송희원이 부마가 된다. 사돈을 맺은 것을 보면 꼴통 사림은 아니었던 듯.

  • 임대광
임꺽정의 둘째 아들의 장남. 비록 일개 서리에 불과하지만 임꺽정 일가의 유일한 문관이다. 임꺽정 일가에서 유일하게 글을 제대로 읽고 쓸 줄 알기에 임꺽정의 자서전을 대필해주게 되는데, 할아버지 임꺽정의 말이 워낙 중언부언해서 고생하는 듯 하다.

  • 김후원
4차 견서사가 돌아올 때 우의정. 4차 견서사 정사였던 이수광이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하고 제임스 1세가 즉위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자, 스코틀랜드 국왕인 그가 왜 에든버러가 아닌 잉글랜드의 수도 런던에서 통치하고 있느냐고 물었는데, 설명을 듣고 이치에 맞긴 하나 본향을 버리고 중원으로 거점을 옮긴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의 사례를 들어서 본향을 버린 군주가 안정적인 나라를 이룰 수 있을 리가 없다는 신들린 예언을 했다.


2.2.4. 외교관[편집]


스페인행 사신단의 일원. 원래 세계와 달리 주인공이 1부에서 무종일 때 서얼들의 등용 제한을 상당 부분 없앴으므로 서얼들이 받는 차별은 실제보다 훨씬 덜했고. 그래서 허균은 서얼의 서러움을 다룬 홍길동전을 쓰는 게 아니라, 스페인으로 가면서 세계를 둘러본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인과 스페인인 혼혈아 홍희동의 활극을 다룬 홍희동전을 한국어스페인어로 동시에 집필한다. 아시아와 유럽과 아프리카를 넘나드는 상당한 대작이다. 심지어 소설 속 홍희동도 어머니를 누나인 줄, 외할아버지를 아버지인 줄 알고 자랐으니,[51] 호부호형 못하고 살았던 홍길동이 연상되기도 한다. 스페인에 도착한 후에 우연히 세르반테스를 만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허균의 형 허성은 실리적인 사고방식으로 주인공이 중용하고 있고, 누이 허난설헌도 이 세계에서는 좋은 남편을 만나 잘 산다고 한다. 그야말로 집안 전체가 주인공의 은혜를 입은 셈. 다만, 허균의 서양견문록과 홍희동전, 허난설헌의 시집 등등으로 이세계 수험생들은 피를 토할 듯... 세르반테스를 다시 만나 홍희동전에 대한 상의를 하려고 2차 견서사로 다시 유럽에 가기를 신청했으나 정철이 "여기에 할일이 많은데 어딜 가려 하느냐"고 붙잡는 바람에 유럽에 못 가게 되자, 이덕형에게 홍희동전 스페인어본 원고를 맡겨 "세르반테스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다행히 소원대로 3차 견서사에는 부사로 참가했다. 주인공은 허균이 몰래 서반아어로 근친소설을 쓴 것을 알고 있으나 조선에서 공론화되었다간 최소 좌천이라 트집잡지 않았다. 유럽에서 셰익스피어를 만나 조선에서도 연극 극장을 세울 생각을 하며, 실제 역사처럼 유럽에서 미식을 즐기고 조선에서 가져온 무역상품 처분 이권을 이용해 현지 상인에게 향응을 받는 등(무려 6:1 난교(...)를 암시하는 내용이 있다)의 부정적인 모습도 보이고 있다. 유럽에서 타로 카드로 점 치는 법을 배워왔다.

  • 정곤수[52]
유럽행 사신단 견서사의 정사. 외교 경험은 없지만 그럭저럭 유능한 인물[53]이고 이항복이나 류성룡처럼 너무 중요한 인물을 4년이나 외국에 보내 놓을 수 없기에 사신단의 정사로 선택된다. 외교 임무는 무난하게 수행하지만 여러모로 이덕형보다 판단력이 떨어지는 면을 보인다. 그리고 3년 3개월 만에 조선 최초의 세계 일주를 마치고 벽란도에 귀국한다.

유럽행 사신단 견서사의 부사. 유럽식의 왕실외교를 하기 위해 종친 1명을 보낼까 고민하던 중 종친까진 아니지만 나름대로 태종의 자손이라 유럽인들 앞에서 왕가의 일원이라 칭할 만하기에 부사로 선택된다. 왕족으로 칭하기 위해 종친은 아니지만 출발 직전 영풍군이라는 군호를 받았다. 유럽에서는 왕가의 피가 섞인 백작 정도 위치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귀족들과 유럽과 조선의 공통점을 찾으며 친해지는 모습을 보이며 외교관으로 상당히 유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교황이 명나라 치라고 빌려준 몰타 기사단을 다른 조선인들에게 왜구 잡으라고 빌려준 거라며 적절히 사기를 친다. 마닐라에서 왜란 소식을 접한 뒤 다스마리나스 총독에게 은을 빌려 염초와 구리를 구매하기 위해 조선으로 가지 않고 마닐라에 남기로 한다. 그리고 구리를 얻는 과정에서 서반아 상인이 짜게 굴자 유대인 드립을 치는 것은 덤. 이덕형과 함께 군수물자를 싣고 귀국해 예조정랑으로 임명된다. 주인공이 해외 외교 전문가로 키우려고 하며, 왜란이 끝난 후 명에 방문하여 만력제를 알현한 뒤, 귀국하지 않고 남만으로 가서 신호영과 합류하여 막씨와 완씨가 내전 중인 안남의 정세를 조사해오고 섬라에서 나레쑤언 국왕을 알현한다. 3차 견서사로 또 스페인에 다녀온 후로 예조참판에 임명된다.

경인왜란 때는 연해주 관찰사 정효신의 명을 받고 연해주에 진을 친 다테 마사무네와 서로 평화롭게 지내기로 담판을 짓는다. 이 때문에 을미동정 때도 다테군과의 원활한 교섭을 위해 연해주에서부터 일본까지 파견된다. 전쟁 후에 삼성부사가 되었다가 이민족과 교류하는 능력을 평가받아 아메리카 탐험대인 탐동사 대장을 맡아 덕진성, 지선성을 개척한다. 지선성 인근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휘하 장졸들은 금광에 눈이 멀어가나 정문부는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비옥한 토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유럽으로 가는 배 안에서 이항복이 던진 말로 광해군과 문성군부인 사이에 불화가 일 뻔하자 황진이 이항복을 때릴 기세라 이를 만류하는 것으로 첫 등장한다. 을미동정과 양응룡의 난 진압까지 모두 끝난 이후에는 아이누의 독립국가가 된 아모국에 비공식 고문관으로 파견되었는데, 독립 이후에도 좀처럼 잘 뭉치지 못하는 아이누 부족들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석탈왜(아푸카스카무이)에게 조언을 해 준다. 군사력을 키워 무력을 통해 제패할 것을 조언한 무관 출신의 전임 고문관들과는 다르게, 군주를 선출하는 유럽 국가들의 사례(고대 로마 제국, 독일과 폴란드 왕국)를 예시로 들면서 연맹제를 통한 선거 군주정 국가 체제를 모델로 제시해 주고 있다.

한석봉. 1차 견서사에서는 별로 눈에 띄는 활약이 없었다. 3차 견서사에서는 다른 사전청 관료들과 함께 베네치아에 5년간 남아 조선 서적을 번역하며 한문, 한학 학교를 운영하게 된다. 4차 견서사가 왔을때 귀국할 수 있었지만 계속 베네치아에 남아 번역 일을 계속하고 있다. 광해군에게 장조 승하 소식을 전하고 함께 위령미사를 드린다.

1차 견서사로 유럽에 다녀왔다.


2.2.5. 지방관[편집]


현실 역사의 기축옥사에 해당하는 '기축옥사 축소판'이 발생했을 때 정여립이 개인적으로 원한을 가지고 있던 탓에 충청도 관찰사로 있던 도중 윤두수와 같은 혐의로 체포 된다. 정여립의 모함으로 전가사변에 처해져 귀양을 가던 도중 주인공에 의해 도호부사를 제수 받아 부여주에 새로 설치하는 삼성도호부에 부임하게 되는데, 결국 죄인의 신분만 아닐 뿐이지, 부여주로 가게 되는 건 똑같은 결말. 심지어 귀양을 가서도 도시를 건설할 책임자 역할을 맡게 될 것이었으니 하는 일은 같다. 삼성부 건설을 마친 후 권율에게 부사 자리를 넘겨주고 함경도 관찰사로 가게 된다. 타이밍 좋게 무자호란이 터지기 전에 빠져나왔다.

  • 이응현
경인왜란 당시 강릉부사. 강원도에서 왜군 선단이 목격되자 멘붕에 빠져 저건 강릉으로 오는 것이 아닌 함흥으로 가는 것이라고 믿으며 별 대책 없이 천지신명께 기도를 드린다. 정군은 이미 다 전선으로 뽑아 보내고, 남은 병력은 빈약한 무장의 속오군 수백 명밖에 없기 때문에 대책을 세우려야 세울 수도 없기 때문. 우에스기군이 도착하자 화살 한 발 쏘지 않고 바로 항복했다고 한다. 우에스기군이 강릉 백성들에게 전혀 손을 대지 않고 있다고 하니 목숨은 부지했을 듯. 천하의 졸장부로 후일 강항에게 허성이 토로한 바에 따르면 우에스기가 떠나고 싶은 자는 떠나도 좋다고 하자 목민관의 직무를 방기하고 양반들과 함께 떠나버렸다고 한다. 싸움도 없이 항복한 것도 모자라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치기까지 한 죄로 참수당한 뒤 효수되었다.

을미동정 후 조선령이 된 북규슈 3개주를 다스리는 구주총관부 대총관이 된다.

  • 이청
경인왜란 당시 전라도 관찰사. 주상이 왜 변했는가를 알지 못하지만 왜적이 쳐들어오자 주상을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성품이 온후해 이일을 억누르지 못한다.

  • 이순정
경인왜란 당시 구례 현감. 가토가 보낸 순왜들의 기습에 사망.

  • 조승일
경인왜란 당시 청도 군수.

  • 이승훈
무자호란 당시 평안도 관찰사. 누르하치를 "백성을 빼가는 놈들"이라고 하며 매우 싫어한다.

  • 정준현
정일한의 첫째 아들. 지방관으로 있던 중 경인왜란이 발발하자 문관 출신임에도 고을 주민들을 이끌고 동래성 전투에 참가했다가 전사한다.

  • 패드립 친 부여주 감목관들
부여주의 우마시에서 소를 파는 울라부 상인들에게 그들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소재로 저급한 성적인 패드립을 친 감목관들. 결국 이 모욕적인 언사가 안 그래도 불만이 가득하던 해서여진들에게 기폭제가 되어 무자호란이 벌어졌다. 일개 감목관 주제에 대형 사고를 쳐버렸지만 무자호란 도중 위험한 전투에 내몰렸다가 전부 사망해버려 처벌은 받지 않았다.

정효신의 후임 연해주 관찰사. 탐욕스러운 성격으로 경인왜란, 을미동정 중에 공을 세우지 못했기에 왜택의 다테 가 왜인들에게 트집을 잡아서 왜구로 몰아 토벌해서 공적을 올릴 속셈을 가지고 있다. 아랫사람들에게도 막 대하는 성격. 실제 인물도 권력형 성폭력을 즐겼다는 악명이 남아있어 참조 조만간 다테 가 왜인들이나 연해주 원주민들에게 큰 사고를 저지르려는 복선으로 보였으나 맥거핀으로 끝났다.

  • 최일규
정준석의 수족같은 부하로 정준석의 밀명을 받고 대남도 토병들을 전리품을 내걸고 모집하여 이기빈의 천회사 함대에 전투병력으로 승선, 이기빈이 모카 항을 공격할때 선봉장으로 참가한다.

  • 강연성
외수사 별좌로 해외 무역 경험이 많아 이기빈의 천회사 함대에 교섭 담당으로 승선한다. 상대편의 높은 사람들을 구워삶는 재주가 좋은 편이나 모카 태수는 해시시에 쩔은 상또라이인지라 채찍으로 얻어맞는 봉변을 당한다. 이기빈이 모카 뿐만 아니라 아덴과 소코트라까지 약탈을 벌이자 이렇게 하면 회회청 등 아랍에서 수입해야 하는 물품들의 교역이 끊겨버릴 수 있다고 걱정한다.

  • 홍윤범
재석이 사망한 시점에 대남도 관찰사로 외전에서 등장, 소식을 듣고 본국의 중신들이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고 탄식한다. 고지식한 성격으로 아전들이 본국에 대관을 보내야 한다는 말에 자신만 보내면 아부꾼이라고 하지 않겠냐며 걱정하는데, 5주에 분배받을 물자와 인력에서 우대가 절실한 아전들이 밀어붙여서 결국 대중성주 정준석을 대관으로 파견하기로 보내기로 결정한다.[54]

2.2.6. 경성군파[편집]


주인공이 빙의하기 전의 경성군이 뽑은 신하들. 무능하고 시대착오적인 성향의 경성군이 직접 가려 뽑은 신하들 아니랄까 성리학적인 사고방식에만 사로잡혀 시대를 보는 안목이 형편없는 우물 안 개구리들이다. '삼사의 역모' 이후 극단주의 성향의 인물들 대부분이 숙청된다. 다른 신하들에 비해 가상인물들의 비중이 높다.

  • 이형종
각성 초기 이조판서. 선교사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의 존재를 마땅찮게 생각하며 자신에게 천주교가 어떤 종교인지 설명하고자 집까지 찾아온 세스페데스의 선교 시도에 더더욱 반감을 품는다. 천주교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않고 불교와 똑같은 부류로 취급하며 극도의 반감을 품고 조선을 혼란하게 만들 것이라며 선교 허용을 반대하나 주인공의 “장래 반역할 가능성이 있다 하여서 모조리 쳐낸다면, 지금 내 앞에 있는 그대들이 끝까지 내 밑에서 충성하리라고 보장하는 근거는 있는가?”라는 말에 데꿀멍한다.

  • 오정운
각성초기 대제학. 서양과의 교역을 준비하는 주인공의 정책에 자신들은 이미 명나라와의 사대를 유지하고 있는데 다른 나라와 교역할 수는 없다며 반대하나 주인공이 과거 태종태국과 교류했던 선례를 언급하자 더는 반대하지 못한다.

각성초기 좌의정. 남만인 초대를 반대하나 주인공에게 타박을 받는다. 이후 서양과의 교역문제를 언급하는 주인공에게 "바다 바깥에서 신기한 물화가 들어와 백성들을 현혹하면 너나 할 것 없이 농사는 안 짓고 장사만 하려 들 것이고, 생활에 필요한 쌀과 베를 가져다 그런 물건들과 바꾸려 할 테니 기본적인 나라 살림이 어려워질 것입니다."는 농본억상과 사농공상의 논리로 반대하다가 주인공에게 지금 입고 있는 비단옷도 중국에서 수입한 거 아니냐는 팩트폭력에 말문이 막히고 만다. 연배로 따져봤을 때 손녀가 세자빈이 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주인공은 이름도 까먹는다.

  • 자살한 사간원 대간
경성군의 총신으로 함께 학문을 논하던 최측근. 하지만 주인공이 빙의한 이래 개털이 된 이후 세자를 옹립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자살하며 주인공에게 유서를 남긴다. 하지만 그 유서는 주인공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이후 주인공은 경성군 세력을 숙청하기에 이른다. 유서에서 성현의 가르침 운운하지만 정작 경성군이 자신의 법적 증조부인 무종을 욕할 때 이에 동조했다는 것에서부터 이 인간도 성리학자로서 제대로 된 사람은 아니었다.

  • 이정봉
정철의 난 당시 우의정. 경성군이 재위중반에 발탁한 인물로 무종때의 일을 부모세대로부터 들어서 불만을 토로한것에 대해 주인공이 추궁하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만 한다.

  • 김조영
일본행 주화사의 정사. 노인을 보내야 공경 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보낸 얼굴마담으로 사실상의 업무는 유성룡과 이순신이 전부 처리했다. 그러나 심약한 모습과 달리 외교관이자 관리로서의 본분은 잊지 않아서, 반말로 위압하려는 오다에 맞서서 반말로 대응한다. 술은 제사 때에나 한 모금 마시고 승마도 시종이 끌어주면 말 위에 앉아있는 수준으로밖에 할 줄 모르는 검소한 성리학적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어서 일본식 화려한 문화에 적응하지 못한다. 오다의 환영 행사에서 남만주를 마시다가 뻗어버렸고 이후 방문 기간 내내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누워있었다. 주화사 편 이후로는 등장이 없는데 원래도 고령이었으므로 사망하거나 퇴직한 것으로 추정.

  • 김철신
대사헌. 주인공의 서원특혜 폐지를 반대하나 주인공에게 논박 당한다. 하지만 계속 고집을 피우자 주인공은 그를 파직한다.

  • 김민도
세스페데스의 접촉당시 예조판서. 주인공과 이형종 사이에서 서양 상인 문제로 줄타기를 한다.

  • 최관일
1599년 시점 대사간. 경성군 라인 대부분이 쓸려나간 뒤에도 자리를 지킨다. 특허 제도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을 낸다.


2.3. 군부[편집]



2.3.1. 육군[편집]


여진족들 사이에서 호랑이 병마사라고 불리고 있다. 그만큼 여진족 전문가로 여진족과의 싸움에서는 항상 대단한 전과를 올린다. 충성심 강하고 용맹하며, 30명의 여진족들한테 습격받았을때 단신으로 절반 넘게 죽일 정도로 일신의 무예도 뛰어나 병사들에게도 신뢰 받는다. 또한 명나라에게도 기죽지 않는 몇 안 되는 상남자.[55] 하지만 자만심이 강해 다른 이를 잘 인정하지 않고, 질투심이 많아 다른 장수들을 경계하며, 성격이 급하고 공적에 대한 욕심이 많아 부하들에게도 성공이든 실패든 빠른 결과만을 원하는 등 성격에 문제가 많다.[56] 대신 기마대를 다루는 솜씨 하나만큼은 조선 전체를 통틀어 최고이며 덕분에 평지에서의 회전을 선호한다. 물론 마냥 무식한 맹장은 아니라, 병법의 기본에 충실하고 지형지물을 철저히 파악해서 함정을 파서 대승을 거두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조련과 야전 지휘는 전문가지만 그 외의 행정업무엔 전혀 관심이 없는 전형적인 맹장형 군인으로, 한 마디로 야전사령관으로는 흠잡을데 없지만 지휘관으로서 중요한 소양인 차분함과 신중함과는 거리가 먼 조선의 조지 S. 패튼. 원 역사의 행적을 떠나서 주인공이 별로 선호하지 않는 부류의 장군이지만[57] 북방에서 계속 승승장구하고 그 와중에 북원 원정까지 성공시키며 군호까지 하사받는 등[58] 주가를 올려서 결국 경인왜란에서도 기용할 수 밖에 없게 된다. 하남벌 전투(삼랑진 전투)에서 오만함으로 인한 방심과 조급한 성격이 겹쳐 지리멸렬한 지휘로[59] 왜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본인도 포로가 된다. 이 전투로 본인이 그렇게 아끼던 오위군은 회복 불가능한 큰 피해를 입고 해체되었다. 비록 패배했지만 불리한 전황에서 철기를 이끌고 오다의 코앞까지 돌입하고 편전으로 오다의 어깨를 맞춰 부상을 입힌다. 그 용맹에 감탄한 오다가 포섭하려 하나 당연히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을 설득하러 온 임해군의 귀를 물어뜯어 짝귀로 만들어버린다. 결국 그의 조선 왕에 대한 충심을 인정한 오다는 소원대로 처형한 뒤 시신을 깨끗이 수습해 동생 나가마스 편으로 조선 왕에게 전달한다. 주인공은 그 충성심을 기려 신립의 딸을 차남 영창대군과 결혼시키고 무묘에 배향해준다.[60] 경인왜란 초기 전황 악화의 장본인이지만 그 전에 세운 공도 엄청나고 최후까지 간지폭풍을 선보여서 미래에도 평이 크게 갈리는 인물이 될 듯하다. 죽은 뒤에도 그 이름은 여전히 여진인들 사이에서 전설로 남아서, 누르하치의 명령을 왜곡해서 전혀 엉뚱한 평안도까지 치고 들어가는 뻘짓을 하려던 추옌을 말릴 때 야르하치는 네가 어렸을 때 들었던 '호랑이 병마사' 이야기를 생각해 보라면서 압박해 이 뻘짓을 막았고, 노역은 죽어도 하기 싫어하던 왜인여진 부대 병사들이 자신들과 함께하는 비호군 중대장 신경진이 그 신립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자발적으로 노역에 나서기도 했다. 조선이 세계에 많이 알려진지라 4부에서는 나폴레옹이 조아킴 뮈라에 비견되는 기병 전문가라고 언급하기까지 한다.

원 역사에서처럼 어머니가 노비 출신이나 본인의 노력으로 무관으로 출세하였고,[61] 그 성실함을 안 주인공이 훈련도감 대장으로 앉혀 훈련도감을 스페인식 강군으로 조련하게 한다. 하지만 사대부들에게는 "쯧쯧 저 노비자식"이라는 비웃음을 여전히 받는 모양으로 스페인 사절단으로 간 이수광이 "지금 근위대장이 노예의 자식이오."하자 스페인 귀족들도 놀라는 묘사가 나온다. 이순신이나 권율만큼의 존재감은 없지만 주인공이 무척 신뢰하는 장수다. 작중 정확한 나이는 나오지 않지만 무자호란(해서부 정벌) 중에 백전노장이라고 묘사되는 걸 봐서는 나이가 무척 많은 모양이다. 일본 보복원정인 을미동정에 도원수 후보로 추천될 만큼 그 능력을 신뢰받고 있다.[62] 이순신이 모친상으로 사직하여 권율이 도원수로 승진하자 부원수 직에 임명된다.

이 세계선에서도 벼슬에 뜻이 없어 사위 이항복보다 늦게 과거에 급제했으나 주인공이 부여주로 보내 지방관을 맡기고 조총 수십 정을 쥐어주는 파격 인사를 하자 다들 심지어 사위조차도 놀란다. 주인공은 "나라에 환란이 닥친 후에야 이 자가 어떤 자인지 다들 알게 되리라."라는 간지폭풍의 대사를 날리며 반발을 잠재운다. 이후 주인공의 기대대로 북방에서 벌어지는 난에 계속 승승장구 하여 고속출세의 발판을 마련, 경인왜란에서 그야말로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전쟁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이순신 다음가는 최강의 2인자급 포스를 보여준다. 비록 이순신만큼 적을 완전하게 박살내는 모습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충분히 큰 활약을 보여준다. 같이 다니는 황진과의 콤비가 무척 좋다. 사위인 이항복이 보내준 갈리아전기를 읽고 로마사에 빠져 과거 서양 전투사를 전쟁 중에 언급하기도 한다. 1595년 일본 보복원정인 을미동정 때는 지상군을 지휘하는 부원수가 되어 주인공이 내려준 코끼리 '수루사'(한니발 바르카코끼리 이름을 따온 이름)를 타고 전장을 누빈다. 전쟁 후 이순신이 모친상으로 사직하여 도원수로 승진한다. 나이가 60대 후반에 들어서자 노환으로 은퇴. 경조 재위 중 사망했고 무묘에 배향된다.

1540년생.[63] 엄청난 장사로 주인공이 일본에 통신사 수행무관으로 보냈을 때 노부나가의 흑인 경호원 야스케와 겨뤄 씨름으로 1승 1패, 주량으로 무승부를 기록할 정도이고, 후일 도감군 창설요원으로 스페인 교관에게 로델레로 전법을 배울 때는 투핸디드 소드를 한손으로 자유자재로 휘둘러서 스페인 교관도 혀를 내두를 정도. 무자호란 때 이순신 부대의 기병 돌격장으로 참전해 스페인제 흉갑을 입고 한 칼에 사람과 말을 함께 베어 넘기며 적의 공세를 저지하는 등 척준경의 재림 같은 모습을 보인다.[64] 이 전투에서 부잔타이를 생포하는 큰 공을 세운다. 그 후 해서부 정벌전 때는 오도리 기병들로 편성된 퀴레시어 부대의 지휘관이 되는데 그 엄청난 힘과 용기, 통솔력을 본 오도리 기병들이 '추장님'이라 부르며 떠받들 정도. 해서부를 돕기 위해 온 몽골족 철기병들도 박살내 버린다. 왜란 발발 시점에서는 도감군을 떠나 이순신을 따라 수군으로 왔으며 등선군의 훈련을 맡고 있다. 인간백정이라는 칭호까지 있으며 백정 출신임에도 세운 공과 명성이 자자해 무관들의 존경과 신뢰를 얻고 있다. 부산 탈환전에서 등선군을 이끌고 왜군 패잔병 소탕을 하다 임꺽정은 노부나가의 유언을 갖고 일본으로 가던 야스케를 만나 결투 끝에 야스케를 죽인다. 55세에 을미동정에도 참전, 노익장을 과시하며 큰 활약을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적의 수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직접 생포하는 큰 공을 세운다. 그 공로로 내금위장에 임명된다. 오이라트 부 사신들이나 건주위 공자 아민도 임꺽정을 만나 대영웅을 뵙게 되어 기쁘다고 받들어 모시는 등 주변 여러나라에 천하영웅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이로 인해 생긴 문제로, 재석이 미행을 나갈 때 임꺽정을 데려가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고 한다. 임꺽정은 시켜만 준다면 바로 나가겠다고 하지만 워낙 눈에 띄는 거구이고 임꺽정의 얼굴을 도성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탓에 재석의 정체가 바로 들킬 확률 100%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정2품 상장까지 오르는 출세를 하여 대감마님으로 불리게 되었고, 70살이 되어 퇴직한 뒤 임꺽정은 그간 세운 공의 포상으로 금군에 대한 소고기 독점 공급권을 얻어 다시 소잡는 일을 하며, 손자 임대광에게 자신의 자서전을 대필하도록 하고 있다. 경조 재위 중 사망했고 무묘에 배향된다. 17세기인 3부 시점에서도 내금위, 훈련도감, 등선군에서 저마다 임꺽정의 후예라고 다툴 정도의 존경을 받고 있다.

1540년생. 2부 시작 시점에 내금위 군사로 임꺽정과 절친. 엄청난 명사수로 날아가는 새의 눈을 활강조총으로 맞출 정도의 뛰어난 스나이퍼로 역시 맹활약 중. 임꺽정과 달리 천한 출신임에도 주변 정세를 읽을 정도로 영리하고 눈치가 좋으며 말솜씨도 뛰어난, 능글맞은 참모형 캐릭. 왜란 발발 시점에서는 도감군을 떠나 이순신을 따라 수군으로 왔으며 지정사수의 훈련을 맡고 있다. 조선의 라는 칭호까지 있으며 백정 출신임에도 세운 공과 명성이 자자해 무관들의 존경과 신뢰를 얻고 있다. 한산도 대첩 당시 서림은 330m 거리에서 구루지마 미치후사를 저격 사살하는 공로를 세웠다. 55세에 을미동정에도 참전, 노익장을 과시하며 큰 활약을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적의 수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직접 생포하는 큰 공을 세운다. 그 공로로 강무관 교관에 임명된다. 종2품 부장까지 오르는 출세를 했고, 70살이 되어 퇴직한 뒤 한가로운 은퇴 후 생활을 즐기고 있다. 동명성왕의 이름 추모에서 따온 추모공이라는 봉작도 얻었다. 안타깝게도 무묘에는 배향되지 못했지만 3부 시점에서는 사격의 신으로 후대 군인들에게 추앙받아 군인들이 총, 활 등의 사격 측정을 하는 날은 추모공에게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부여주 삼성부 판관으로 부임하고 있으며 해서부가 삼성부를 포위할 때 앞장서서 적을 칼로 베고 화살을 쏘아 삼성부를 지키며 병사들을 격려하고 무기 점검과 화약 재고 검사를 꼼꼼히 살피는 참된 무인의 모습을 보인다. 북방의 난리 속에서도 나름 활약을 했고 이어지는 왜란 중에서도 원역사대로 진주성에서 활약하지만... 사실상 이순신, 권율과 함께 왜란 3대첩의 주인공 중 한명임에도[65] 이쪽 세계에선 그렇게까지 엄청난 활약은 아니다. 경인왜란 중에 조선군의 커다란 전과는 이순신의 수전과 권율의 단밀현 전투 그리고 주인공이 친정한 논산전투를 제외하면 대구성의 우주방어와 전주성의 방어전 정도고 대체로 이순신과 권율을 제외하면 사마유와 이일 정도가 눈에 확 들어오는 큰 공을 세웠고 김시민의 존재감은 상당히 옅어졌다.[66] 사실 전쟁 중에 큰 활약이란 회전에서 적을 격파하거나 적의 진로를 완벽하게 틀어막는 우주방어인데 이쪽세계의 김시민은 양쪽 모두 크게 이름을 남길 정도가 아니었다.[67] 을미동정 때는 권율의 부장으로, 양응룡의 난 정벌 원정군에는 좌군장으로 참전하는 등 군부에서 꾸준히 커리어를 쌓고 있다. 경조 재위 중 사망했고 무묘에 배향된다.

원균과 함께 공적을 뻥튀기하다 함께 걸려 북방에서 잠시 백의종군하게 된다. 이때 참교육을 당한 뒤로 개념차고 유능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다만 욕심이 많은 건 여전해 공의 알맹이를 빼먹는 얄미운 짓을 하기도 한다. 주 피해자는 신립. 신립이 맹장형 장수로서 부각된다면 이일은 참모형 장수로서의 면모가 부각된다. 성격 차이 때문인지 맹장인 신립, 선거이와 사이 안 좋은 모습을 많이 보인다. 물론 아주 인성이 썩은 건 아니라서 어느 정도 현실에 근거한 판단을 하지만 자신의 공적을 위해 아군을 구하러 가지 않는다든가 [68] 한창 잘 싸우던 장수를 혹시 모른다고 불러들인다던가, 적군을 일부러 자신이 구축한 요새에서 섬멸하기 위해 끌어들인다던가 하는 행동을 한다. 물론 다 나름 판단의 근거는 있지만. 참고로 공적을 욕심내는 이유는 무묘에 배향되기를 원해서. [69] 을미동정에는 참전하지 않은 대신 군사제도 개편 업무에 종사한다. 무묘에 그렇게 배향되고 싶어했으나 무려 왕이 되어버린 이순신과의 트러블이 끝내 발목을 잡아 무묘에 배향될 수 없었다.

훈련도감 우별장. 전주성에서 이일과 의견대립을 한다. 가토가 일기토를 청하자 이를 받아들여 휘하의 정무수를 보낸다. 이후 히데요시군이 후퇴하자 남원까지 추격. 가토에 의해 조헌이 쓰러지고 고경명이 전사하는 등 불리함에 처한 속오군을 구원하며 가토를 몰아낸다. 그 후 권율과 합류, 주인공이 친정한 논산대첩에서 1만을 맡아 좌군(左軍)이 되어 왜군 8만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둔다. 그 후 도감군 1만을 거느리고 경상우병사 이빈의 부대와 합류, 낙동강 하류를 도하하여 고니시군을 서쪽에서 기습한다. '전주군'을 본 고니시의 모랄빵은 덤.

  • 박홍섭
발포 만호. 정발이 유럽으로 떠났기에 원역사에서 정발이 맡았던 역할을 맡는다. 왜란 첫 날 발포진성이 포위되자 파발을 보낸 뒤 항복을 거부하고 끝까지 항전한다. 성이 함락되자 마지막 살아남은 병사 8명과 함께 화약고로 도망친 뒤 불을 붙여 자폭해서 왜군 300명을 저승길 길동무로 삼고 사망한다. 고니시는 이 분투를 보고 전쟁의 조짐이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원역사에서 정발이 8시간이나 버틴 반면 박홍섭은 1시간 정도 버티는 데 그쳤지만, 부산진보다 더 빈약한 방어시설+더 적은 병력으로 정발보다 100명은 더 죽였으니 일본군에게 침공 시작부터 한 방 먹였다는 점은 비슷하다.

원균의 동생. 삭탈관직된 형을 선처해달라는 상소문으로 처음 등장한다. 주인공은 원연은 원균과 달리 개념인인 걸 알았기에 관직을 내리려 하나 지방 향리인 원연에게 바로 관직을 내리기는 그래서 직접 출사해 공을 세워 형의 죄를 씻으라는 교지를 내린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미 출사해서 북한산성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것을 주인공이 나중에 깨닫고 남도 지역에 현감으로 보내기로 한다. 을미동정에서 복수군 중대장으로 재등장한다. 원균 때문에 집안이 몰락한 것에 대한 복수심으로 참전한 것. 슌스케의 시신을 보고 형이 아님을 알았으나 차라리 죽은 것으로 치고 마음속에서 지워버리려고 형의 시신이 맞다 인정한다. 대남도에 노비로 끌려가기 위해 대기 중이던 원균을 발견하지만 그래도 죽이거나 신고하지는 않았고, 가서 한 번 죽도록 고생해보라며 저주를 퍼붓는다. 집안을 몰락시킨 비겁자 형에 대한 증오와 형제간의 우애로 갈등하다가 차마 죽이진 못한 듯.

  • 원전(元㙉)
원균의 동생. 전라도 흥양현령으로 있던 중 경인왜란을 당해 용감하게 싸워 직접 돌격해 왜군 7명을 죽인 뒤 난자당해 전사한다. 슬프게도 자기 큰형이 역적이 된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주인공에게 일본에 잡혀있을 큰형의 몫까지 공을 못 세워 죄송하다는 충언을 유언으로 남긴다. 고니시와 노부나가도 적임에도 원전의 충심과 용맹을 인정한다. 고니시가 원전의 수급을 소금에 절여서 노부나가에게 보낸다. 동생의 수급을 본 원균은 고니시를 원수로 여기고 증오하게 된다. 이후 용맹했던 적장을 기려야 한다며 원전의 수급을 가라쓰의 절에 맡기고 넉넉히 시주했다고 한다. 형 원균이 왜적의 향도가 된 사실이 밝혀져 전국에 수배령이 내렸으나 원전의 용감한 전사가 알려져서 원씨 집안에 처벌이 연좌되지는 않았다.

정여립이 사적인 원한으로 권징을 역적으로 몰았다는 사실을 지부상소로 고발한다. 당시 공주목사. 다른 선비들의 상소는 모두 무시하던 주인공은 조헌이라는 이름을 듣자 직접 나가서 상소를 받아본다. 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키며 싸웠던 의기를 이미 알고 있었기에, 허튼 소리를 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 왜란 발발 시점에서는 남원도호부사. 왜군이 전라도로 침입하자 휘하 고을들의 병력 3,000명을 남원으로 모아 우주방어를 펼치며 왜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고 백성들을 교룡산성으로 대피시킨다. 직접 조헌의 상징과도 같은 도끼를 들고 병사들을 고무시키는 모습은 간지폭풍. 그 후 성에 올라오던 왜장 하라다 노부타네[70]의 뚝배기를 직접 도끼로 까버리고 교룡산성으로 아군을 철수시키며 자신은 아군의 퇴각을 위해 후미에 서는 폭풍 간지를 보인다.[71] 아군의 퇴각을 엄호하다 왜병의 창에 어깨를 다쳤지만 부하들의 만류에도 새 도끼를 만들게 하며, 철수하는 히데요시 군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게릴라전을 하며 교란을 한다. 히데요시군이 폭우를 틈타 함양으로 이동하려하자 비가 와서 활 공격에 불리한 날씨에서도 적을 저지하기 위해 출진하고 하라다 노부타네를 죽인 자라는 걸 알아본 가토에게 공격받으나 낙마했을 뿐 곧바로 고경명의 광주 속오군이 지원 오는 덕분에 죽지는 않는다. 고경명의 전사를 알고 나를 살리려고 고 공이 돌아가셨다고 비통해한다. 1602년 시점에 중추원 지사로 다시 등장한다. 하라타 노부타네의 머리에 꽂힌 채 잃어버렸던 도끼는 하라다 가에서 보관하다가 을미동정 중 다시 조선군이 강탈해서 조헌에게 돌려줬고, 조헌은 이 도끼를 가보로 여기며 지부상소를 할 때마다 애용하고 있다.

정기룡이라는 이름은 원역사에서 선조에게 하사받은 이름이고 본명은 정무수인데, 이걸 모르는 주인공은 역사의 변동으로 정기룡이 사라졌다고만 생각하고 정무수를 별개의 인물로 생각했다. 그래서 원역사 왜란에서 대활약했던 다른 장수들과 달리 주인공의 전폭적 지원은 받지 못하고 그저 유능한 장수로만 여겨진다. 훈련도감 소속으로 무자호란에서 큰 공을 세우고, 경인왜란에도 선거이 휘하 장수로 전주에 파견된다. 전주성 전투에서 가토 기요마사가 일기토를 청하자 이에 응해 가토와 일기토를 벌인다. 하지만 도감군이 공을 세우는 것이 싫은 이일이 중간에 징을 쳐 정무수를 불러들이는 바람에 결투는 무승부로 끝난다. 이로 보아 실력은 정무수가 근소하게 우위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은 이후 뒤늦게 상희에게 정기룡의 본명이 정무수였다는 것을 듣게 되고[72] 정무수에게 정기룡이란 이름과 안달루시아산 명마 1필을 내린다. 일본 보복원정 때도 참전해 체찰사 이항복의 경호를 맡는다. 아즈치 성에서 가토 기요마사와 2번째 일기토를 벌이는데 가토가 도망쳐서 죽이는 것은 실패하나 가토에게 부상을 입혀 창을 떨어트리게 만들어 조선군의 사기가 크게 고조된다. 양응룡의 난 토벌군에도 참전, 대승을 거두어 3품 참장으로 승진한다.

부여주 판관을 지내다가 무자호란 때 권율의 부장으로 크게 활약하고, 경인왜란 때는 도순찰사가 된 권율의 조방장이 되어 북방군 기병을 지휘한다. 상주 단밀현 전투에서 권율의 보병대가 화력 집중으로 왜군을 저지한 사이에 북방군+왜인여진 기병대를 이끌고 우회하여 기병 돌격, 적의 후방을 맹렬하게 타격하여 완전히 섬멸하고 직접 적장 토다 카츠다카의 목을 벤다. 실제 역사에서 임진왜란 전에 구입한 일본도를 애용했던 것을 반영해서인지, 여기서는 도감군의 스페인 대장장이에게 특별히 주문한 인도산 물결무늬 강철남만도에 번쩍이는 남만갑[73]을 입어 전장에서 돋보이는 존재라고 한다. 기병 돌격으로 왜군을 짓밟는 황진을 보고 권율은 안토니우스 같다고 감탄한다. 주인공이 친정한 논산대첩에서도 기병대장을 맡아 모루와 망치 전법으로 권율, 유극량, 선거이가 모루가 되고 황진이 망치가 되어 왜군 8만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둔다. 전후 2차 견서사에 합류하는데 유럽으로 가는 배 안에서 이항복이 광해군에게 한 말로 광해군과 문성군부인과의 사이에 불화가 일 뻔하자 이항복을 한 대 칠 뻔했다. 유럽에 도달한 후 이덕형과 함께 신성로마제국으로 향하는데 마침 오스만과의 15년 전쟁이 발발한 참이라 관전무관으로 전장에 동행한다. 귀국 뒤에는 을미동정에 참전하여 기병들을 지휘하며 맹활약한다. 경인왜란과 을미동정 2번 모두에서 1등 공신을 받은 것은 이순신, 권율, 황진 셋뿐이라 하는데, 이순신과 권율은 각각 수군과 육군의 총 책임자였음을 감안하면 일선 지휘관 중에서는 최고로 평가받은 셈. 경조 재위 중 사망했고 무묘에 배향된다.

1부에서 노비종모법이 노비종부법으로 대체된 것에 의해 양인으로 태어났다. 이항복을 따라온 수행군관으로 첫 등장한다. 이항복이 매우 신임하여 2차 견서사로 유럽에 갈 때도 데려갔고, 유럽의 전쟁을 보고 배우라며 유럽에 놔두고 온다. 3차 견서사가 도착했을 때는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경험을 쌓은 상태였고 네덜란드인 아내도 맞았다. 조선으로 귀국한 이후 명나라와 건주여진과의 전쟁이 발발하자 형식상의 토벌군을 이끌고 참전, 4천의 병력으로 추옌군 2만을 격퇴하는 대승을 거둔다. 선조 재위 중 사망했고 무묘에 배향된다.

  • 홍선욱
부산진첨사. 노부나가의 대군과 맞서 용감히 싸우지만 800밖에 안 되는(그마저도 200명만 관군이고 나머지는 속오군이었다.) 적은 병력에, 노부나가가 고용한 서양 용병과 대포라는 불리한 조건에 인해 결국 본인과 군사들은 장렬히 몰살당하고 부산진은 함락당한다.[74] 그래도 그 불리한 조건에서 2만의 왜군을 상대로 500명의 피해를 주면서 8시간 정도를 버텨냈다. 원역사의 부산진 첨사 정발 이상으로 잘 싸운 것. 거기다 민간인들은 모두 산성에 대피시켜 무사했다.

동래부사. 동래성에서 2,000명의 병력으로 노부나가가 이끄는 왜군 본진의 공격에 맞서 수 일간 우주방어를 펼친다. 노부나가는 송상현의 능력을 높게 평가하여 일본의 관례와 달리 4번이나 항복 기회를 주나 끝까지 거부한다. 동래성이 완전히 함락되자 북쪽을 향해 4번 절을 올린 후[75] 마지막 항복을 권하는 적을 향해 조선의 어떤 장수도 항복하지 않을 거라는 유언과 함께 돌격하여 적 하나를 베고 사망한다. 그의 행동에 감격한 노부나가에 의해 시신은 조선식으로 장례가 치뤄졌다.

  • 서득운(徐得運)
경상좌병사. 울산에서 강원도를 기습하기 위해 북상하는 왜군 선단을 목격하나 수적 차이가 압도적이라 공격하지 못한다. 이 병력이 함흥을 치러 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을 낸다. 이후 배설과 함께 포위된 동래성을 구하기 위해 경상좌병영군 15,000명을 이끌고 동래로 향하지만 왜군 5,000명을 만나 병력의 질적 차이와 지리멸렬한 지휘로 참패, 동래에 도달하지 못하고 본인도 전사한다.

병마우후. 서득운 휘하에서 강원도행 왜군 선단을 목격하고 강원도로 가는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서득운과 함께 동래를 구하러 가던 중 전황이 불리하자 퇴각할 것을 제안한다. 이후 서득운이 사망한 뒤 경상좌병영군을 수습해서 퇴각, 경주를 방어한다. 경주 속오군들이 옛 신라의 후예라는 자부심을 자극하여 사기를 높이고 이운룡과 함께 경주에 접근하는 사타케 요시시게 휘하 왜군들을 저지한다. 이운룡이 판옥선들을 불태우고 육전에 참가할 의향을 드러내자 "판옥선은 싸울 수 없어도 그 존재 자체로 왜군의 상륙을 막는 역할을 한다"며 만류한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경주를 지켜낸 공을 인정받아 죽은 서득운 후임으로 경상좌병사에 임명된다. 이후 왜군이 철수하려 하자, 이운룡과 함께 그동안의 경상좌도 군대가 보여준 패전을 만회하고자 반격을 계획하고는 이운룡에게 육군 병력을 지원한다.

주인공이 능력을 알고 신립에게 보낸다. 처음에는 신립과 관계가 좋지 않았으나 어느새 그럭저럭 의기투합하는 사이가 되었다. 사실 신립이 원역사만큼 경험이 적고 무식한 돌격형 장수가 아니라서, 그렇게 의견충돌이 많지도 않다. 하지만 결국 원 역사의 비극을 막지는 못했다.

  • 박경운
니탕개의 난 당시 부여주 조방장. 파직된 이순신을 안타깝게 여기다 이순신의 보고를 보고 원균과 이일이 공을 도둑질했음을 알게 된다.

  • 정만기
니탕개의 난 당시 부여주 부병마사. 신립대신 행정업무를 수행했다.

무릉도 출신의 이순신의 사돈.

  • 한주동
본명은 막동. 공세청 앞에서 술집을 하는 주모의 차남이며 천주교 신자이다. 형과 아버지가 경인왜란에서 전사했고 본인은 천주교 의용군으로 참전했다.[76] 사냥대회에서 큰 멧돼지를 잡고 주인공의 눈에 띄어 내금위 군사로 뽑히고 한씨 성과 주동이라는 이름을 받는다. 내금위에서 편하게 살 수도 있었으나 가족들의 원수를 갚고 천주교 신앙을 인정받기 위해 원연 아래에서 복수군에 종군한다. 원연이 대남도 노예로 끌려가던 원균을 발견할 때 곁에 있었으나 원연이 이 일을 덮어달라고 부탁하여 침묵한다. 일본에서 돌아온 뒤 주인공이 미행을 나갈 때 호위로 데려갈 만큼 신임을 받고, 장조 승하 후 왕위에 오른 이성도 한주동을 선전관으로 임명해서 다이샨과 연락하는 밀사 역할을 맡길 만큼 대를 이어 신임을 받고 있다.

무자호란 당시 순천부사. 가토의 협상을 거부한다. 을미동정에도 참전했으며, 그 후 경상우수사를 지내다가 대남도에서 정준석의 횡포가 심해짐을 금위사를 통해 보고받은 주인공이 정일한을 조정으로 불러들이고 권준을 신임 대남도 관찰사로 임명하고 병력 3천을 딸려 보낸다.

경인왜란 당시 경상우병사.

  • 김응서[77]
부원수. 정충신의 상관으로 양응룡의 난 정벌 원정군에 우군장으로 참전한다. 그 외 을미동정, 니탕개의 난, 사르후 전투 등 젊었을때부터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운 베테랑. 경조 재위 중 사망했고 무묘에 배향된다.


이순신의 장남. 어영청에서 대대장으로 복무했다. 명에서 도독으로 임명된 아버지 이순신을 대신해 양응룡 정벌 원정군에 참가한다. 만력제에게 과연 이순신만큼이나 명장이라며 호평받는다.

신립의 장남. 건주위 토벌전에서 정충신 휘하에서 비호군 중대장을 맡는다. 일개 장교이지만 신립의 아들이라는 후광 덕분에 왜인여진들은 신경진의 말을 잘 따른다. 사르후 전투에서는 신립의 아들이라는 말만 듣고도 건주위 여진족들이 지레 겁을 먹으며, 수많은 여진족을 닥치는대로 베어내는 신립의 아들다운 용력을 보인다.

을미동정에 참전했다. 젊다는 것으로 보아 나이 많은 편은 아닌듯.

  • 김수길
1부에서 고다지와 함께 활약한 백정 김병천의 증손자. 호랑이를 30마리나 잡은 유명한 백두산 포수라고 한다. 건주위 토벌전에서 야르하치를 저격하는 공을 세운다.


2.3.2. 수군[편집]


주인공이 각성하고 정신 차리자마자 소식을 알아내서[78] 여러모로 신경 써서 키워준다. 연인인 상희 정도를 제외하면 주인공이 제일 아끼는 인물로[79] 성격은 원역사처럼 침착하고 차분하며, 용맹하고 지혜롭다. 또한 신중하면서도 과감한 모습까지 두루 갖추고 있으며 부하들에게는 엄격하면서도 공정하고 특기나 능력을 잘 살릴 수 있도록 배려해준다. 또한 충성심이 가히 엄청나서 사욕을 챙기려고 임금이나 나라를 배신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원역사에서 그렇듯 맹장의 면모도 있어서, 한산도대첩 전 수적으로 우세한 왜군에 포위되면 어떡하냐는 부하들의 걱정에 포위되면 어딜 쏘든 적이 맞을테니 좋지 아니한가라는 간지폭풍 명언을 했다.

주인공은 이런 이순신이 고생하지 않고 마음껏 능력을 펼칠 수 있게 해주고자 풍족한 물질적 지원은 기본에, 이순신의 아들을 부마로 삼아 왕의 사돈이라는 막강한 정치적 권위까지 주어 하고자 하는 일에 누구도 트집을 잡을 수 없게 한다. 이렇게 주인공에게 어마어마한 버프를 받다 보니 역으로 후대에는 존경 받는 영웅(충무공)은 충분히 될 수 있어도 '성웅'이 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그보다는 능력과 제반 조건 모두 훌륭하게 갖춘 명장인 김유신이나 곽자의 등과 같은 인생승리자란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커졌다. 주인공도 이순신이 성웅으로 추앙받지 못하게 될 가능성에 대해 고민했지만, 성웅으로 만들려고 존경하는 위인을 억지로 고생시킬 이유도 없다고 생각해 그냥 팍팍 밀어주기로 했다.
원역사에서도 최악의 상황 속에서 세계사에 남을 전공을 세운 명장이 작중에서 더 강력해진 조선의 무기체계를 들고, 원역사보다 전황이 훨씬 나은 작중의 조선에서 임금의 전폭적인 지지까지 받으니 경인왜란 때 실제 역사보다도 훨씬 큰 공을 잇달아 세운다.[80] 여기에다 실제 역사처럼 총 맞아 전사하는 일이 없도록 주인공이 준비한 특제 서양식 갑주까지 어갑으로 하사받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무사히 살아남는다. 작중에서는 명나라가 참전을 안 한 대신 '경인왜란록'을 진상해서 이순신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일본에서도 패전 후 이순신에 대해서 알게 되자 무신을 상대했다며 경외하게 될 정도로 동아시아 전체에 명성을 떨쳤다. 을미동정 때는 원역사처럼 명에서 '유명수군도독'으로 봉해지고, 원정군의 총사령관인 도원수가 되어 왜 수군을 전부 격파하고 규슈 제압 후 일본 본토공격을 지휘, 오사카교토까지 점령한다. 후에도 도원수 자리를 유지하다가 모친상을 당해 3년 상을 위해 사직한다. 모친상이 끝난 후 복직하여 훈련도감 도제조가 된다. 주인공은 김유신이 받은 태대각간의 고사를 들어 이순신에게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보다 높은 특품 태광보국숭록대부를 내린다. 봉작은 역사대로 덕풍부원군. 초대 해군 제조로, 군무에 관련해서 권율과 함께 주인공의 뜻을 꺾을 수 있는 둘뿐인 인물이라고 평가받는 중이다. 별외로 조선군이 실제 역사보다 훨씬 강하고 전세나 물자 등도 여유롭다 보니 엄격함도 덜한 편이다.[81] 그래도 인간은 인간이신지 단점이라면 단점인 것이 하나 있는데, 일단 전투에 임하면 정치적 고려 따윈 조금도 하지 않고 상대를 완전히 때려 부셔야 직성이 풀리는 면이다.[82] 그래서 건주위 정벌전에는 참전시키지 않았다. 원칙과 기본을 매우 중시하는데 이 점은 축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 이순신이 맡은 훈련도감은 기본기가 다른 군영들보다 훨씬 출중하다고 한다. 주인공이 사망할때 이항복과 함께 고명대신이 되었다.
3부에 언급된 바로는 1621년 76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무묘에 배향되고,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칭제건원할 때 충무대왕에 봉해지고 증손녀가 황후가 되는 등 신하로써 최고의 영광을 누렸다.

강무관에서 교육받다 니탕개의 난 때 정무수, 김응서 등과 함께 참전해 공을 세우고, 이후 실제 역사처럼 전라우수사에 임명된다. 왜란이 발발하고 왜군의 1진이 부산이 아닌 고흥 발포진으로 상륙하는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자 전라좌수영도 둘로 나뉘어서 정운의 녹도진 병력은 이억기의 전라우수영으로, 괴멸한 발포진을 제외한 사도, 방답 등의 병력들은 전라좌수사 정걸이 이끌고 통제사 이순신에게 합류한다. 고흥 지역이 왜군의 교두보가 된 만큼 당장 이순신과 합류할 수 없어서 일단 전라우도에 남아 왜군 함대의 서진을 막는 역할을 수행한다. 왜 수군을 상대로 전투 한 번에 100척씩 격침시키는 대단한 전과를 올리고 있다. 전과의 규모만 놓고 보면 이미 실제 역사에서 이순신이 임진년 때 세운 전과를 넘어섰다. 결국 노부나가는 고흥에서 고니시와 종의지의 직속 함대를 제외한 고토열도 해적 출신의 수군 함대를 일본 본토로 귀환시켜 재편성하도록 한다.
전라도 해안지대를 탈환한 후 이순신 함대와 합류, 부산 앞바다 제해권을 탈환한다. 이후 이순신이 괴상한 을 이야기하자 위로해준다. 이후 이순신이 대마도를 공격하는 동안 교란작전으로 부산포 공격을 담당했고, 썰물 시간이 되어 철수를 명령하지만 이를 무시한 10척의 판옥선이 계속 공격하다가 자침되면서 10척의 전력을 잃고 만다. 다행히 이순신과 주인공이 이억기는 잘못이 없고 각 전선의 선장들이 명령을 무시하여 벌어진 일이라는 걸 알고 이억기를 변호하지만 삼사에서 계속 이억기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헛소리가 쏟아지자 전후 주인공의 배려로 도피차원에서 2차 견서사에 합류, 이억기도 이를 감사히 여긴다.[83] 이항복과 함께 스페인령 저지대로 향하던 중 바르바리 해적을 만나자 다른 조선 무관들과 함께 조선제 흑각궁으로 총기 사거리 밖에서 해적 여럿을 저격하여 조선 활의 우수성을 알리기도 한다. 그 후 대미주 이민이 결정되자 대미주의 총독인 대미주수사에 임명되어 이민단을 이끌고 떠난다.

인종 때부터 군문에 몸담은 노장으로 경인왜란 당시 전라좌수사로 있었으며, 전후에 2대 남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다.

여기서는 전사하지 않고 큰 공을 세웠다.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의 수군을 총지휘하는 서도수군통제사 겸 경기수사. 오다가 고용한 포르투갈 용병 갈레온 함대를 대전선, 거북선 등의 신무기들을 이용해 저지하는 공을 세운다. 갈레온 3척을 격침하고 3척을 나포하면서 8명 전사, 34명 부상이라는 미미한 피해밖에 입지 않았고 이에 큰 포상을 받았다고 한다.

경상좌수영 소속 부호군. 경상좌수사 박홍식이 왜군을 보고 겁에 질려 앓아누운 뒤 사실상 좌수영을 지휘하게 된다. 수졸 대다수가 탈영하면서 수영의 기능이 불가능해지자 좌수영 건물을 버리고 철수한다. 그러면서 '세부득이하여 어쩔 수 없이 놓아두고 가노라. 지금 너희가 여기 들어오지 못하게 할 수는 없으나, 본래 주인이 누구인지 기억한다면 곱게 사용하고 훗날 상처 없이 비워야 할 것이다. -이운룡-'이라는 글귀를 남기는데 이를 본 사타케 요시시게는 누군지 모르겠지만 기개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경주 방어군에 합류, 배설이 화포를 빌려달라고 요청하자 판옥선의 화포들을 모두 빌려준다. 어차피 싸울 수 없는 전선들이니 모두 불태우고 육전에 참가할까 하지만 배설의 만류를 듣고 그만둔다. 그리고 그 덕분에 감포쪽 해안으로 접근하던 도도 다카토라의 왜 수군은 빈 판옥선인줄도 모르고 겁먹고 지레 내빼는 덕분에 바다로부터의 공격을 막을 수 있게 되었다. 그 공을 인정받아 파직된 박홍식 후임으로 경상좌수사에 임명된다. 이후에는 함선들을 후방 진포에 정박시킨 후 수졸들을 육상전에 투입하는 등 육전 위주로 전투를 치른다. 그러다 노부나가가 자결하고 왜군이 전면 철수를 시작하자 배설과 함께 그동안 보여준 경상좌도 군대의 패전을 만회하고자 반격을 결정한다. 이에 따라 배설이 빌려준 육군 병사들로 병력을 보강하여 새벽에 17척의 함선을 이끌고 오랜만에 바다에 나가서 개운포에 정박 중이던 150척의 왜군 함대를 공격한다. 몇 달간 전투를 치루지 않아 왜군의 경계가 소홀한 상태였기에 총통과 불화살 등의 원거리 공격을 가하여 철수하는 왜군 함대 일부를 격멸한다.
을미동정에도 참전, 보급에 대한 현지보급으로 주민에 대한 약탈등, 복수심에 불타는 주장을 폈으나 이순신은 들어주지 않았다

유럽행 사신단에 수행무관으로 참가했다. 주인공의 어명에 따라 유럽식 선박을 다루는 법을 익히는 중. 배가 바르바리 해적의 습격을 받자 직접 검을 들고 싸워 한 명을 베고 한 명을 사로잡아 조선 무관들과 함께 펠리페 2세에게서 검을 하사받는다. 유럽 왕실의 개족보 이야기에 다른 조선인들과 함께 경악한다. 다만 병서를 자유롭게 제작, 구입할 수 있는 문화는 상당히 마음에 든 듯. 더불어 잉글랜드에도 가고 싶어했으나 잉글랜드는 스페인, 교황청과 적대관계라서 못 갔다.
조선에 돌아온 후 전향한 남만 해적들과 함께 남만선을 타고 이순신 휘하에 합류한다. 원양항해가 가능한 남만선의 이점을 살려 정찰임무를 맡는다. 한산도 대첩에서 구루지마 휘하 별군을 남만선으로 배후에서 공격, 도주하는 패잔병들을 소선 3척만 남기고 몰살시킨다. 소선 3척도 조선 수군의 위력을 왜군에게 알려 모랄빵이 나게 할 목적으로 일부러 보내준 것. 더불어 참관을 위해 온 요한 기사단과 이순신 사이에서 통역도 맡고 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조선 수군 남만선 훈련전대의 책임자가 된다. 을미동정 때는 먼바다 항해가 가능한 남만선의 장점을 살려 왜군의 해상보급로를 차단하고, 종전 직전에는 구키 요시타카의 해적함대 본거지를 습격 괴멸시킨다. 스페인 해군에서 배운 대로 붙잡은 왜군들을 갈레온 돛대에 매달아 교수형시키는 버릇이 있다. 경조 재위 중 사망했고 무묘에 배향된다.

원래 정발 등과 함께 스페인으로 가는 1차 견서사에 동행할 예정이었으나 토사곽란이 심해서 조선에 남았다.[84] 무자호란 때 족친위와 동행하고 족친위가 궤멸될 때 정신을 잃고 쓰러졌지만 불타는 수레 옆에서 쓰러져서 기적적으로 동사를 면했다. 경인왜란 시점에서는 거제현령으로 거제도 해전 등에 참전한다. 실제 역사에선 정여립의 5촌 조카라서 연좌제에 걸려 상당한 냉대를 받았었는데, 이 작품에서도 정여립 때문에 연좌제에 걸릴 위기에 처했으나 마침 주인공이 연좌제의 범위를 대폭 줄여서 처벌 없이 풀려났다. 을미동정 때도 수군 지휘관으로 참전, 승리한다. 이후 3차 견서사에 무관 대표로 합류한다. 내심 해적과 한 번 붙어서 정발처럼 검을 하사받고 싶어했으나 해적을 만나지 않아 실망한다. 견서사를 다녀온 후에 아메리카 탐험대 선단장에 임명되어 정문부를 모시고 아메리카에 가게 된다. 도착 후에는 선단이 딱히 할 일이 없으니 금광 개발 책임을 맡게 되며, 정문부 몰래 현지 원주민들과 술과 여자를 매개로 지나치게 친밀해져 있다. 별외로 도박엔 소질이 없다.

1차 견서사에 정발과 함께 유럽식 선박을 다루는 법을 익혀 오라며 원역사에서 수군에서 활약했던 장수들을 파견했다. 모두 조선에 돌아온 후 전향한 남만 해적들과 함께 남만선을 타고 이순신 휘하에 합류한다. 전쟁이 끝난 후 남만선 훈련전대의 교관으로 활동.

경인왜란에서는 이순신 휘하에서 수군만호로 참전한다. 을미동정을 거쳐 양응룡 난 토벌군 출전 시 출전의 대가로 명나라에서 영유권을 받은 주산군도 해적 토벌군을 총지휘하는 조명수군장에 임명되어 해적들을 토벌하고 주산군도를 장악한다.




인도와 아라비아 교역항로를 뚫는 임무를 받은 천회사 함대 수사. 갈레온선 '도척' 함을 기함으로 삼았다. 효령대군의 후손으로 나이는 31세밖에 안 됐지만 강무관에서 교육받은 엘리트에, 동남아 항로 경험이 많고 판단력이 빠르며, 전투에서는 용맹하고 부하들에게는 공정해 부하들이 잘 따르는 명장. 하지만 싸움과 약탈물을 원해서 일부러 해적선을 만나길 바라거나, 자존심이 상하는 걸 도저히 못 참고 보복을 다짐하는 등 탐욕스럽고 난폭한 성향으로 묘사된다.[85] 실제 역사에서 제주목사를 지낼 때인 1611년 류큐 왕국 상선을 습격하여 약탈하고 승선했던 류큐 왕자를 살해한 다음 왜구를 토벌했다고 거짓 보고를 했던 악행#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86]
모카에서 커피 씨앗을 밀수하려다가 실패하고 모카 베이에게 국왕의 친서를 찢기고 부하들이 폭행 당하는 모욕을 겪자 분노에 눈이 뒤집혀 자기 함대로 모카를 공격한다. 모카 항을 털어 원래 목표인 커피를 얻고,[87] 추격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아덴 항도 턴 것까진 좋았으나 배를 바가지로 팔았다고 소코트라 섬을 털고 용혈수를 뺏는 등 해적이나 다름없는 짓을 했다.[88][89] 하지만 실제 소망은 어디까지나 공신으로 무묘에 배향되는 것이지 절대 해적이 될 생각은 없다고 한다. 메카 순례를 가다가 해적에게 잡힌 무굴 귀족들을 구원한 공로 등으로 무굴 제국 황태자인 미르자 살림과 술 마시면서 호형호제하는 관계가 되어 인도에 조선 상관을 두고 우호관계를 수립하는 공로를 세운데다, 아랍에서 벌인 해적질이 스페인에 메카까지 불태웠다고 와전되면서 펠리페 3세가 조선에 대한 악감정을 털고 우호관계를 계속 유지하기로 결심, 귀국 후 주인공이 아랍에서 벌인 짓에 대해서는 추후 다른 조선 수군 장수들이 해적질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한 처벌로 백의종군을 명하되, 공로를 인정하여[90] 애첩 셀린과 약탈물의 소유를 허락한다. 그 후 사르후 전투 때 압록강 함대를 지휘해 명예회복을 하고, 초대 인도 주재 대사인 주천사로 임명되어 셀린과 함께 인도로 떠난다. 여기서도 심심하면 자기 갈레온을 끌고가 해적 소탕을 빙자한 약탈을 벌인다. 3부의 언급을 보면 해성공으로 봉해졌고, 은퇴할 때 인도에서 가지고 돌아온 재산이 은 천만냥이었다. 70여년이 지난 후에도 그의 후손이 대한 제일의 갑부이고, 그의 모험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고 한다. 하지만 근본이 해적질로 시작한 거라 소원이던 무묘배향은 결국 이루지 못했고 3부에서 그의 증손자가 수사 재임 중 무모한 해전을 벌여 전쟁을 확전시킨 벌로 북방에 귀양가는 벌을 받는다. 디씨 대역갤에서 팬이 박시백 스타일로 그린 이기빈 만화

경상좌수군 조방장으로 있다가 탐동사 분견대인 북극해 탐험대의 대장으로 임명된다. 베링 해협을 지나 알래스카 연안을 따라 내려와 탐동사 본대인 정문부와 합류하는 항로로 이동한다. 원주민 이누이트들에게 조선의 대형 함선, 화약무기 등을 보여주고 복속의 징표로 정계비를 곳곳에 세우고 많은 모피를 얻는다. 출발한지 20개월만에 지선성에서 정문부와 재회한다.

  • 박두성
수군 정령으로 2차 탐동사 차선임 지휘관, 귀환길에 필리핀에서 수사가 탄 좌선이 좌초해 수사 윤형욱이 사망하자, 좌선에 실린 보물들을 탐내 직속 부하들과 짜고 생존자 수색 명목으로 다른 배들을 멀리 보낸 후 좌선의 금과 모피를 빼돌린다. 이 과정에서 마주친 좌선의 생존자들을 입막음으로 살해하는 짓까지 저질렀다가 결국 발각되어 직속 부하들과 함께 히데요시가 당한 인간 육포형을 당해 죽는다.


2.3.3. 군기시[편집]


  • 김지(金墀)
실제 역사의 승자총통 개발자. 이 역사에서도 무기 개발을 맡은 군기시 책임자였으나 비용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최고의 무기를 만들려는 매드 사이언티스트스러운 태도 때문에 주인공 빙의 전 경성군이 파직시켰다.[91] 주인공이 빙의한 후 다시 등용하고 많은 지원을 해 주었는데, 결과물이 '귀차'[92] 등 당시 기술로는 대량생산은 커녕 가볍게 운용하기도 어려운 것들도 많아 주인공이 뒷목을 잡기도 한다. 중증 워커홀릭, 덕업일치의 인물. 재임명된 후 미친 듯이 연구에 힘쓰는데 주인공의 명령 때문이기도 하지만 본인의 덕업일치 성향이 상당 부분 작용한 듯. 묘사를 보면 몸이 상하는 와중에도 연구에 매진한 듯하다. 늙고 병들자 나대용, 이장손, 변이중을 발탁해 뒤를 맡기고, 마지막 작품인 플린트락 마상권총을 개발한 직후 사무실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사인은 노환+과로사. 주인공은 매우 슬퍼하며 김지를 무묘에 배향한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무기 개발하는 부서 리더로 발명가를 올리면 안된다는 사실을 주인공이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주인공 왈 "자기 마음대로 발명할 수 있는 발명가는 필요한 게 아니라 자기가 만들고 싶은 걸 만든다." 사후 무묘에 배향되면서 주인공이 신묘한 무기를 잘 만들어낸다는 뜻으로 현제공(賢製公)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김지가 뽑은 후계자 3인방 중 하나. 강무관에 들어갔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중도에 그만뒀고 김지 아래에 들어가 제자가 된다. 이순신이 3년 상을 지내는 사이 주인공의 지시로 거북선을 개발한다. 김지의 돈지랄하는 습관이 옮았는지 거북선 전체에 옻칠을 해서 주인공이 뒷목을 잡게 만들기도 한다. 무종 시절 연구되다가 중지된 증기선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다. 이후 거북선이 실전 배치되자 이순신 휘하에서 거북선을 지휘하며 거제도 해전, 한산도 해전 등에 참전한다. 전투 도중에 술을 마시는 습관이 있지만[93] 지휘는 확실하게 해서 이순신이 문제 삼지는 않는다.

김지가 뽑은 후계자 3인방 중 하나. 원역사에서는 문관이었다가 전란이 일어난 후 병기 개발을 시작했으나 이쪽에선 처음부터 군기시로 왔다.

실제 역사의 비격진친뢰 개발자. 김지가 뽑은 후계자 3인방 중 하나로, 면천된 노비다. 왜란 발발 후 귀차를 이용해 조령을 요새화한다. 그런데 막상 왜군이 조령으로 오기도 전에 격파되어 귀차는 별 활약을 하지 못했다.

  • 박갑식
김지의 뒤를 이어 군기시 제조가 된 인물. 발명가가 아닌 행정가라서 새로 제조로 앉게 되었다.

  • 이점동
열기구를 개발한 장인. 몽골피에식 열기구로 비승군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경인왜란 때 큰 활약을 하게 되었다.


2.3.4. 향군장[편집]


의령 향군장. 왜적이 침략했다는 소식을 듣자 의령 현감의 명령이 오기도 전에 휘하 속오군을 소집하고 사격훈련을 시켜 싸울 준비를 한다. 사재를 털어 조총 300정과 화약을 준비해 휘하 속오군을 관군 수준으로 중무장시킨다. 곽재우 문서에 나오듯이 그의 집안은 상당한 재력을 가진 지역 토호인데 이 사재를 탈탈 털어낸 것. 하인은 혹시 반란으로 오해를 받을까 염려하지만 곽재우는 실제 역사와 다름없는 의기를 보인다. 게다가 여기서는 임금이 곽재우가 어떤 인물인지 이미 알고 있으므로 조정의 오해 없이 충분한 지원을 받아 큰 전공을 세울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이 향군장들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 보낸 금위사 관원도 충성스럽고 개념 있는 인물이라는 보고를 보낸다. 이후 속오군 우대장으로서 속오군 도대장인 고령 향군장 김면과, 속오군 좌대장인 합천 향군장 정인홍의 속오군과 함께 대구에서 청도까지 내려온 신립의 오위군에 합류, 영의정 류성룡과 경상도 관찰사 김성일, 청도군수 조승일과 같이 신립을 설득하며 후방교란을 제시한다. 이후 자신 휘하의 속오군을 이끌고 낙동강으로 진출하던 니와 나가시게의 부대를 물리친다. 향군장 중 유일하게 을미동정 때 일본 원정군에 편성되어 일본에서도 전공을 세우고 돌아온다. 전란 때마다 참전해 공을 세우고는 있지만 벼슬을 내리면 항상 거절한다고 한다. 곽재우는 대일무역으로 큰돈을 벌고 있는데 관직에 오르면 장사를 못 해서 오히려 수입에서 손해이기 때문. 양응룡의 난 정벌 원정군에도 역시 참모장으로 참전, 본인의 게릴라전 경험을 역으로 살려 효율적인 대 게릴라전 교리를 세워 대승을 거둔다. 정벌이 끝난 뒤 주인공이 높은 관직을 내렸지만 다 거절하고 자문기구인 중추원 동지사 직만 받았는데, 만력제의 암군짓과 명나라 관료, 신사층의 부패에 치를 떨며 반명파의 선두주자로 나선다.

합천 향군장. 창녕 향군장이 사망하자 창녕 속오군까지 지휘한다. 전쟁이 끝난 뒤 곽재우처럼 중추원 동지사 직에 있는데, 대미주에서 캐온 금을 명나라가 내놓으라고 하면 어떡하냐는 유성룡의 우려에 대해 "만력제는 아비는 아비이되 노망이 들고 주색잡기에 골몰한 무도한 아비이니 관습대로 조공만 바치되 요구는 거절하는 것이 오히려 도리에 맞다."며 명나라를 비판한다. 주인공이 사망할 때 형조판서였다.

고령 향군장. 영남으로 탈출하는 히데요시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여 천명 이상의 왜군을 처치하는 큰 전과를 올린다.

호남 지역 향군장. 남원 교룡산성 전투에서 조헌이 위기에 빠진 것을 보고 구하기 위해 돌격, 조헌을 위기에서 구하고 본인은 가토 기요마사에 의해 전사한다. 그러나 원역사와 달리 본인만 사망하고 고종후, 고인후 등 아들들은 살았다.

나주 향군장. 전 수원부사.

  • 아여문[94]
대마도 향군장. 종씨 일가가 대마도를 정복하기 이전 대마도를 지배하던 아비루 가문의 후예이다. 대마도에 남아 속오군을 이끌던 중 섬 남쪽으로 잠입을 시도하다가 왜군에게 생포되었다. 운 좋게도 비가 내려 처형이 미뤄지던 중에 조선군이 대마도를 탈환하며 구출되었다.

허균의 형. 실리적인 사고방식을 보여 주인공이 중용하고 실제 역사에서도 통신사 서장관이었던 것을 주인공이 기억해 류성룡과 함께 통신사로 노부나가에게 다녀온다. 그 후 성균관 전적 벼슬에 있다가 강원도 출장길에 전쟁이 터져 강릉에 머무르게 된다. 우에스기가 떠나고 싶은 사람을 석방할 때 강릉부사 이응현과 강릉 향군장이 도망쳐버리자 임시로 향군장이 되어 강릉 백성들을 통솔하고, 전쟁이 끝난 후 강릉 백성들이 적에게 저항하지 않았다고 처벌받게 되면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기로 결심하는 진정한 사대부의 의기를 보인다. 그리고 주인공도 이응현은 참형, 그외 도망친 양반들은 연해주 전가사변형을 내렸지만 허성과 강릉 백성들은 전혀 벌하지 않았다. 일본 원정 이후엔 도승지를 하고 있다.

경인왜란 중에 향군장을 하다가 과거에 붙어 3차 견서사로 오게 되었다.


2.4. 종친[편집]



2.4.1. 왕실 일가[편집]


아버지 사나다 마사유키를 따라서 조선의 귀순장 '사노부'가 되었다. 사나다 가문의 측근 무사들과 함께 훈련도감에 복무하며 교관직을 수행하였으며, 아버지와 함께 일본 귀순장들을 이끌고 부여주 삼성부로 이동, 삼성부 방어를 성공적으로 해냈다. 아버지와 함께 삼성부 방어 및 해서부 정벌에서 공을 세우고 한양으로 귀환하며, 아버지를 도와 대구성을 축성할 준비를 한다. 그 와중에 약관의 나이가 되어 혼인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기도 한다.[95] 자신을 포함 부하들이 조선에 뿌리를 박기 위해서는 조선인 아내를 맞이해야 하는데, 병졸들이야 평민처자에게 장가들면 되니 어떻게 되겠지만 대장인 자신은 아주 지체 없는 집안에 장가갈 수도 없기 때문에 고민이 컸다고. 그리고 주인공은 윤두수가 김충선을 사위 삼는 분위기를 타서 노부시게를 첫째 옹주의 부마로 삼으려 한다!
2부 20장에서 인빈 조씨(실제 역사의 인빈 김씨와는 다른 인물)의 딸 정신옹주와 결혼했다고 나오는데, 이면을 부마로 삼는 건 아버지 이순신의 공이 큰데다가 덕수 이씨도 명문가라 반대가 없었지만, 노부시게는 인빈이 서러워하고 조정의 80%가 반대한 가운데 주인공이 집안일이라고 그냥 밀어붙였다고 한다. 그나마 조정 대신들은 주인공의 의지가 확고함을 확인하고는 반대하는 사람들도 물러섰지만, 지방 유생들은 이후로도 상소를 많이 올렸다. 애초에 도왜라는 신분 자체가 사대부들에게는 어그로. 실제 역사에선 오사카 성에서 엄청난 분전을 했는데, 소설에서는 대구성에서 연출될 듯하다. 그런데, 대구성에 머무르던 신립이 동래성 함락과 경상좌병영군 패배 소식을 명분삼아 출전하려는 것을 류성룡과 김성일 그리고 조경이 왜별기를 남기려 하자 신립이 앙심을 품고는 부마라는 이유로 우겨서 자기 휘하 족친위에 데리고 가는 바람에 사망플래그를 세운다. 하남벌 전투 전초전에서 족친위 선봉으로 돌격, 호소카와 타다오키 군을 쳐부수는데 공을 세운다. 이후 신립의 명에 따라 류성룡과 김성일을 호위하던 중 매복했던 타치바나군, 초소카베군에 의해 오위군 본진이 붕괴하자 류성룡과 김성일을 탈출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한 줌의 병력밖에 안 남은 상황에서 타치바나의 대군을 만나 죽을 각오를 하지만 그의 용맹에 감탄한 다치바나 무네시게가 추격하지 않고 풀어주며 플래그를 벗어났다. 조선 입장에서 재앙이라고 할 수 있을 하남벌 전투에서 그나마 대참사를 면하게 만든 일등공신.
대구성에 다시 복귀한 후에도 장마가 쏟아져 열기구를 띄울 수 없는 상황에서 야간 정찰을 통해 적의 배치를 탐지하는 등 맹활약했다. 그 후 조선군의 반격 작전에서도 권율 군의 선봉에서 용감히 싸워 큰 전공을 올리나, 아직 젊은 탓인지 자신의 목숨을 한번 구해준 타치바나 무네시게에 대해서 마음의 빚을 털지 못하여 무네시게를 되도록 생포해 달라고 주인공에게 청한 것 때문에 권율 군이 무네시게의 지연전에 큰 피해를 입는 원인을 제공했다. 이후 이덕형과 함께 무네시게에게 항복을 권유하여 전향시키는 공을 세운다.
조선에서는 일본에서와 달리 왕의 군대만 깃발을 내걸 수 있는 지라, 그 대신으로 사나다 가문의 가몬인 육문전을 투구에 붙인 채 전투에 참전한다. 1595년 일본 보복원정에도 족친위를 이끌고 참전한다. 전쟁 이후 아버지가 분고 영주가 되지만 사노부 본인은 이미 종친의 신분이 되었기에 후계자는 되지 못하고 분고 영지는 형 노부유키가 물려받는다. 선조 재위 중 사망했고 무묘에 배향된다.

  • 덕수위(德水尉) 이면
이순신3남. 작중에서 이순신의 자녀 중 유일하게 비중있게 등장한다. 실제 역사에선 이순신의 아들이란 점 외에는 주목을 받지 못했고, 어차피 나이도 어려서(1577년생, 사망 당시 20세) 혼인도 벼슬도 아직 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이순신의 본가를 지키다가 전사한 점 외엔 가시적인 행적이 없다. 하지만 소설에선 주인공이 일찌감치 주목해서 이순신과 인척 관계를 맺기 위해 둘째 딸 영선공주와 결혼시켜 부마가 되었다. 이순신과 사돈지간이 된다는 주인공의 개인적인 욕심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이순신에게 '왕실의 사돈'이라는 막강한 버프를 주기 위함이 더 컸다. 경인왜란 때는 부마지만 아직 나이가 어려 족친위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주인공이 다이샨 환영 행사 등 중요한 자리에 동행시키며 경험을 쌓아주고 있다. 나이가 어림에도 이순신의 아들다운 기개가 있다고 한다. 5년 후 일본에 대한 보복원정에서는 윙드 후사르로 개편된 족친위의 선봉장으로 참전하여 이순신의 아들다운 용맹을 보인다.

권율의 친조카. 실제 역사와 같이 아들을 보지 못한 권율에게 입양된다. 혹시나 친아들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던 권율에게 주인공이 권유해서 입양됐으며, 주인공은 사노부와 이면에 이어 혜신옹주와 결혼시켜 3번째 부마로 삼는다. 권율은 권익경이 사노부, 이면과 달리 백면서생이라서 일본 원정에서 제 몫을 하기 어렵지 않을까 우려하며 그가 무예를 익히기를 원하고 있다.[96] 무예 수련을 열심히 한 덕에 5년 후 을미동정에서 이면과 함께 족친위 선봉장으로 참전, 그럭저럭 활약한다. 이후 출발하는 3차 견서사에 참가한다. 1차의 이수광, 2차의 광해군과 마찬가지로 격을 높이기 위해 참가한 왕족인데 순수 무장인 사노부, 이면과 달리 문재도 뛰어나서 보낸 것. 실무자인 이덕형, 허균 등이 네덜란드와 잉글랜드를 방문하는 동안 펠리페 2세의 장례식에 조문한다.

  • 최윤성
중전 소생의 정숙공주와 결혼한 4번째 부마. 무장인 사노부, 이면, 권익경과 다르게 글만 읽는 순수 문사. 기존 부마들이 전란 때마다 전장에서 선봉에 서자 옹주들과 후궁들이 걱정을 많이 했고 그래서 정숙공주는 남편 걱정을 할 일이 없도록 족친위 복무가 불가할만큼 몸이 약한 최윤성과 혼인시킨다. 족친위 복무는 사무직 복무로 대체할 계획.

  • 사동현
부마 사노부와 정신옹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어린 나이지만 아버지를 닮아 용장의 자질이 엿보인다고 한다.

  • 송희원[97]
중전 소생의 정혜공주와 결혼한 부마. 빙의전 경성군 시기 공조판서와 호조판서를 지낸 송정선의 아들이다.


2.4.2. 하성군 일가[편집]


실제 역사에선 왕이 되었지만 주인공이 1부에서 역사를 바꾸는 바람에 종친으로 놀고먹고 지내고 있으며, 주색잡기로 악명이 자자하지만 아랫 사람들에게는 관대하게 대해서 노비들의 존경과 신뢰를 얻고 있다. 이 세계에서도 덕흥군의 성격은 개차반이라 진성대군과 자손들을 우대하던 인종과 명종도 덕흥군만은 싫어했고, 덕흥군 가계도 왕위계승에서 배제되었다. 주인공이 빙의하기 전의 경성군과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 형제처럼 절친한 사이였으나 주인공이 빙의한 뒤 사이가 소원해진다. 그래도 주인공은 일개 종친이 된 그를 건드릴 생각까진 없었지만, 망나니 아들놈이 사고를 치자 원 역사에서 가진 불편한 감정이 폭발해서 일본에 사실상 볼모로 보내버렸고, 광해군에게 보내는 편지로 위장해서 일본의 사정을 알리는 화이트 요원 노릇을 충실히 한다. 전형적인 조선 사대부의 세계관을 갖고 있었지만, 일본에 오래 있으면서 일본을 천하라고 칭하는 이들을 많이 만나면서 그 생각이 조금은 옅어져서 조선과 일본이 각자 모습대로 잘 지냈으면 한다는 생각도 품는다. 승려나 공경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치고, 노부나가의 야망을 짐작하고 중원의 광대함을 노부나가에게 수시로 얘기해서 일본을 중화세계에 편입시키려고 노력하는 등 자신의 자리에서 종친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이렇게 주인공의 신뢰도 일부 회복하고 귀국 후에는 일본의 침공 음모를 알리기 위한 성절사로 중국에 가기도 하지만...
임해군이 순왜가 되며 칭왕을 하면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궁으로 달려와서 이마가 깨지도록 머리를 찧으며 무고함을 호소했고 주인공도 그의 노력을 알았지만 사안이 너무나 큰지라 재산도 모두 잃고 역적 집안이라는 꼬리표를 얻으며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다. 임해군이 능지형으로 처형된 뒤에는 서자 둘과 함께 연해주로 전가사변 당했으며, 서자들과 부인들은 모두 고된 강제노역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해버렸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인 광해군은 성직자가 되었기에 하성군의 후손은 멸족, 즉 원역사의 인조 이후의 왕 전체가 소멸했다. 이 세계관에서도 일본에서 스파이 노릇을 해 전쟁대비를 잘할 수 있게 한 인물 vs 아들 교육, 노비 관리를 똑바로 못해 초반 전쟁피해를 키운 인물이냐로 호불호 갈리는 평가를 받을 듯하다.

하성군의 정실부인. 자식이 없으며 평소 품행 바른 광해군을 예뻐하여 천연두에 걸린 광해군을 손수 간호했다. 무자호란 이후 일본 사신들이 방문하자 남편 하성군의 소식이 너무 궁금해서 내외도 하지 않고 직접 나가 만나보고 하성군의 소식을 듣는다. 경인왜란 이후 하성군과 함께 연해주로 떠났고, 고된 강제노역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한다.

임해군광해군의 친어머니. 천연두에 걸린 광해군을 직접 간호하려는 정실부인을 만류한다. 경인왜란 이후 하성군과 함께 연해주로 떠났고 고된 강제노역을 견디지 못해 사망한다.

하성군의 어머니. 광해군의 결혼식을 보고 사망.

정철의 셋째 형의 딸로 하성군의 또다른 첩. 역시 경인왜란 이후 하성군과 함께 연해주로 떠났고 고된 강제노역을 견디지 못해 사망했다.


2.4.3. 기타[편집]


  • 홍산군(洪山君) 이득(李得)
종친에게 관직이 허용되자 스스로 무과를 보아 관직에 올랐다. 무자호란에서 임해군의 직속상관이 되어 차차에게 쥐어짜이던 임해군을 보고 진짜로 결혼하고 망나니가 사람 된 줄 알고 자신의 아들들도 일본 규수들에게 장가보낼 생각을 한다. 이후 야인들의 공격으로 부상당해 쓰러지는데 임해군이 화살에 맞기 싫어 홍산군을 인간방패로 쓰려고 업고 도망쳐서 화살을 맞긴 했지만 아무튼 목숨은 건졌다. 그 후 경인왜란 때는 등장이 없고, 일본에 대한 보복원정에서 윙드 후사르로 개편된 족친위의 대장으로 승진하여 등장한다.

덕흥군의 장남 하원군의 장남. 평소 사이 안 좋던 사촌동생 임해군이 차차에게 작업을 걸려하자 그를 훈계한다. 물론 임해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명종 이환의 공주와 결혼한 임금의 부마. 주인공, 즉 무종에게는 증손녀 사위.

  • 현산군 이흥
월산대군의 손자 계림군(桂林君) 이유(李瑠)의 아들. 정철의 난에 연루되었다.


2.5. 소수민족[편집]



2.5.1. 귀순 왜장(도왜, 항왜)[편집]


실제 역사처럼 히데요시를 노리고 화살을 쐈으나 화살은 하성군을 경호하던 원균이 맞았다. 귀한 외국 손님에게 활을 쏜 죄로 멸문과 토시히사의 신병 인도를 택일하라는 오다의 협박에 시마즈 가에서는 토시히사가 탈출하다가 자살한 것으로 위장한 다음 조선으로 망명시킨다. 주인공에게 남도사라는 조선 이름을 받고 사나다 마사유키의 차석 왜별기의 지휘관이 된다. 규슈 지역에서 시마즈가의 인망이 높았기 때문에 토시히사의 조선 망명 이후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에게 정복당해 영지를 잃은 규슈 무사들이 조선으로 잇달아 망명했고 토시히사는 그 구심점이 된다.

해서부 정벌에도 참전해 공을 세웠으며, 경인왜란이 일어나자 시마즈가 형제들과 싸워야 할 가능성이 높아진 것에 착잡해하면서도 조선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다. 대구성 전투에서는 대구성의 서문을 밖에서 지키는 보조성인 달성의 책임자가 되어 싸우고 있다. 남만갑을 받을만한 위치이나 그가 살아서 조선군이 되있는것을 노부나가가 알게 되면 시마즈가에 큰 보복이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신분을 숨기느라 남만갑을 받지 못했다. 노부나가가 있지도 않은 배신자를 찾아내라며 발광한 이후 히데요시가 호소카와 후지타카와 향후 대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때 "할복했던 토시히사 공이 사실은 살아서 조선으로 도망쳐 조선 왕의 신하가 되었고 요시히로 공은 그 살아있었던 토시히사 공하고 내통했다고 보고하기라도 할까요?" 라고 비꼬며 그걸 듣는 후지타카도 그건 좀 억지라고 받아들인 걸 보면, 위장 공작이 확실하게 효과를 본 모양. 일본 역공 준비 도중 중풍에 걸려 의사소통은 가능하지만 거동이 불편하게 되어 현역에서 은퇴하고 을미동정에 참가하지는 못한다. 이후 금의환향한다.

본명은 스즈키 요시유키. 김충선 문서에 나오듯이 그의 출신은 해석이 분분한데, 소설에서는 사이카슈의 일원이었다가 아소씨의 가신이 된 것으로 설정되었다. 자기가 모시던 아소 가는 망해서 조선으로 망명 왔는데 그렇다고 노부나가 밑에 남기는 또 싫어 아소 가 당주를 따라 조선으로 망명했다. 역사에 해박한 주인공이 이름을 듣고 단번에 정체를 알아내고 그 자리에서 원래 받을 성씨와 이름을 주었다. 그 때문에 김충선도 사나다처럼 한양에 머무르며 출세 잘 할 줄 알았지만 현실은 추운 부여주에서 개고생 중. 이럴 줄 알았으면 안 올 걸 그랬다며 투덜대지만, 한편으로 출세할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마음을 갖고 있다. 삼성부 방어전에서 활약했고, 이후 도감군 소속으로 정찰을 하다 시버족과 몽골군을 찾아내는 공을 세웠다. 나름대로 인간성도 괜찮고 능력도 있었는지, 삼성부에 있는 동안 친해진 윤두수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아[98] 윤두수가 복직한 후 사위로 삼는다. 경인왜란 때 등장은 없으나 전후 장인인 윤두수를 통해 전란동안 왜별기에 소속되어 대구성 전투에 참전했다고 간략히 언급된다. 그 후 을미동정에도 참전하여 10년 만에 고향 땅을 밟는다. 양응룡의 난 정벌 원정에서 왜노병 7,000명을 지휘하는 역할을 맡는다. 귀국해서는 새로 편성되는 라이플맨 부대 부대장으로 임명되고 그의 휘하 사이카슈들이 창설기간요원을 맡게 된다.

등선군 소속 도왜병. 대마도 상륙작전 도중 유녀랑 술 처먹고 자다가 나체로 뛰쳐나오는 나카가와 히데마사를 베어 죽인다. 처음에는 항복하려던 나카가와를 죽였다고 문책받을 것을 우려했으나 주인공은 큰 상을 내린다. 일본 역공에도 참전하여 임꺽정 휘하에서 종군한다. 주인공 사망 시점에는 정 4품 정령으로 승진, 훈련도감 검술교관으로 복무하고 있다.


2.5.2. 조선측 여진족[편집]


  • 이순원
예허부의 장수로 도적질하다 망명한 조선인의 손자. 조선인 혼혈이라는 이유로 해서부 추장들에게 차별받는 중, 2차 니탕개의 난 때 참여했지만, 자기네 부족은 전리품을 거의 얻지 못했는데 해서부 추장들이 조선과의 교섭을 위해 그 전리품을 다 반환하라고 갑질을 하고, 정작 해서부 추장들은 조선인 포로들을 여진인으로 위장시켜 데려가려는 수작임을 알고 분노, 조선 측에 귀순했다. 추장들의 꼼수를 알려 조선군이 여진인들을 섬멸시킬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 뒤로도 삼성부가 버티고 있다는 소식을 이순신에게 알리는 등 소소히 활약했다. 무관직을 받고 경인왜란 중엔 다테를 감시했다. 경인왜란 종결 후 미탐사 지대인 연해주 북부를 탐사하는 임무를 받고 반차원, 원사웅 등과 함께 황량한 연해주 북부로 떠난다. 이 때문에 그냥 도망갈 생각도 해봤지만 조선에서 얻은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해서 남기로 한다. 시베리아에서 만난 원주민들에게 총으로 맹수를 잡아주어 번개신으로 불리자[99] 조선 왕을 신들의 왕이라고 하며 복종하라고 유도한다. 이후 조난당한 빌럼 바렌츠 탐험대와 우연히 조우하여 구출해서 돌아온다. 이 탐험에서 수많은 사금과 모피 등 자원을 찾아 돌아온 공로로 상을 받는다. 북방탐사의 공으로 종3품 정령이 된다. 주인공이 그 후 북극해 탐사대에도 대장으로 보낼까 했으나 이순원이 배멀미가 심한 점 때문에 보내지 않기로 했다. 이후에도 큰 굴곡 없이 순탄하게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3부 시점에서도 일가가 연해주의 유지로 살고 있다고 한다.

  • 판차(반차원)
이순원의 부장. 두목과 귀부 후에는 반차원이라는 이름을 받고 같이 벼슬살이 중. 이순원과 함께 연해주 탐사대에 참가한다. 북방탐사의 공으로 정5품 참령이 된다.

  • 동호수
니탕개의 난 당시 오도리 족 추장.

  • 동아로
오도리 족 군관. 무자호란 당시 조선측에 종군했다.

  • 공개(교스케)공개선
왜인여진인. 조상의 뿌리를 잊으면 안 된다며 일본어를 배워 숙지하고 있었다. 이 덕에 도왜병인 척 하고 왜군에 거짓 투항해 함정으로 끌어들이는 임무를 맡았고, 토다 카츠타카를 홀라당 속여 넘겨 단밀현 전투 대승리에 일조한다. 이후 그 공로로 큰 상과 함께 공개선이라는 이름을 새로 받았다. 4부에서 그의 후손인 왜인여진 장교 공승일이 나오는데 공개의 갑주를 가보로 200년 넘게 모시고 있다고 한다.

  • 김파리속
일본 원정 중 모리 령에서 노략질을 하며 부족 재건을 꿈꾼다.


2.5.3. 조선측 유럽인[편집]


  • 로드리고 로페스 데 알바레스
주인공이 세스페데스에게 요청해 마닐라에서 초빙한 스페인 용병대의 대장. 계급은 대위.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차남이라고 하며 젊은 나이지만 레판토 해전에도 참가한 베테랑이다. 사나다 마사유키가 이끄는 왜별기의 라이벌격인 남만별기를 이끌며 조선군에게 테르시오 전술을 가르치게 된다. 해서부 정벌에도 동행해 이순신에게 파비아 전투의 전훈이나 유럽의 전쟁 역사 등을 알려주며 도움을 주고 있다. 조선에서 가장 이름이 알려진 유럽인이기 때문인지 허균이 집필하는 홍희동전에 주인공 아버지로 등장하기도 한다. 경인왜란 중 코르나로 추기경에게 로카 중위가 언급한 바로는, 조선 양반집 딸과 결혼해 조선에 정착하기로 했다고 한다. 펠리페 3세가 보낸 사자 가르시아 수사가 의도적으로 무례를 저질렀을때, 주인공은 이들이 아무리 10년 넘게 조선에 정착했어도 혹시나 그들을 구하려고 해서 불행한 사태가 발생할까봐 가르시아 이하 스페인 교관들을 엄중히 감시할 것을 명하나, 그는 "가르시아 수사는 용납할 수 없는 망발이며, 그런 자를 사신으로 보내다니 조정이 간신배로 가득 차있는 것 같다."고 일갈하는 상남자의 면모를 보이며[100], 주인공을 감동시켜서 이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다.[101]

  • 세바스티안 데 라 로카
스페인 용병대의 기록관. 살라망카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엘리트였지만 가문이 콘베르소(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라는 이유로 박해받은 끝에 풍비박산나고 홀로 군대로 도피해 조선까지 오게 되었다. 조선에 대해 상세히 기록해 스페인에 보고하는 임무를 맡는다. 처음 파병되었을 때는 사병이었지만, 파견 기간이 길어지자 로드리고 대위가 마닐라 총독부에 요청하여 중위로 진급한다. 어차피 가문도 박살나서 스페인으로 돌아갈 수도 없으니 조선에서 양반가 딸과 결혼하고 눌러앉기로 했다. 스페인인들 중 양반가 여인과 결혼한 것은 로드리고 대위와 세바스티안 중위 둘뿐이라고. 자기 후손들이 기독교인이기만 하면 된다며, 조선인으로 자라는 것에도 별 불만은 없는 듯. 게다가 펠리페 3세의 모리스코 추방 이후에는 아예 스페인에게서 마음을 돌리고 조선측으로 전향한 듯하다.

  • 산체스
요리사 출신의 스페인 용병. 군사고문으로 활동하면서 행사 때마다 스페인 요리를 제공하는 일을 틈틈히 해왔고 경인왜란 종결 이후 공식적으로 사옹원 소속 종7품 별선부가 되어 숙수들에게 유럽 요리를 전수하고 있다. 태국인, 중국인, 왜인 등 많은 다국적 숙수들이 들어온 뒤에는 최선임 외국인 숙수가 되어 상당히 거들먹거리고 다닌다고 한다.

  • 곤잘레스, 미구엘
기타 스페인 용병대원들 중 이름이 언급된 2명. 목수 곤잘레스, 대장장이 미구엘 등의 인물들이 언급되며 미구엘은 대장장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군기시로 배속 전환되어 서양식 무기와 갑옷을 만드는 일에 투입된다. 조선에 와있는 기간이 길어지자 로드리고 대위가 필리핀 총독부에 건의하여 계급도 대부분 장교나 부사관으로 진급했다고 하며 용병들 대부분은 주인공이 중매해준 중인 여성과 결혼하거나 직접 천민 여성을 꼬셔서 결혼한 듯하다. 무자호란 중 남만별기에서도 몇 명이 사망했는데 이들이 생존해있는지는 불명.

  • 안토니오 살바네티
견서사가 주인공의 명에 따라 베네치아 정청의 알선을 받아 초빙해온 이탈리아인 화가. 20년 계약에 매년 100두캇 지급, 집과 하인 제공, 모든 재료비 부담의 조건으로 조선행을 택한다. 조선에 도착한다면 어진을 그리도록 할 확률이 높으며 조선 화가들에게 서양식 화풍을 가르쳐줄 수도 있다. 이 서양식 어진들이 소실되지 않는다면 현대에 조선 임금들의 얼굴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귀중한 보물이 될 듯. 이수광은 혹시 베네치아에서 보낸 간자가 아닐까 의심한다. 주인공은 그를 친정 중인 자신에게 내려보내도록 했으나, 바빠서 어진을 그릴 시간을 내지 못해 논산대첩을 언덕 위에서 관전한 뒤 기록화를 그리도록 하여 조선 최초의 서양식 유화는 논산대첩 기록화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을미동정에도 종군화가로 참전한다. 을미동정 이후 개선문에 새겨질 기록화를 담당한다. 조선에서 처자식을 얻은 뒤 계약기간이 끝나도 그냥 조선에 눌러앉기로 결심한다. 가장 큰 이유는 유럽에 돌아가면 다시 수많은 무명 화가 중 하나가 되겠지만 조선에 남으면 유럽풍 미술 창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롤리타 히메네스[102]
카디스의 한 귀족집 딸. 이덕형이 1차 견서사로 방문했을 때 어린 소녀였는데 집에 묵었던 이덕형에게 반했고, 2차 견서사로 이덕형이 다시 방문했을 즈음 금발녹안의 미녀가 되어있었다. 1592년 기준 약 15~16세로 32세인 이덕형과는 약 16~17살 차이. 어린 시절 아들들을 엄격히 키워 후회하던 부모가 조금 자유롭게 키운 영향으로 성격이 자유분방하다. 1차 견서사 때 이덕형에게 조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호기심을 풀어준 그 이덕형이 실제 역사에서도 인증된 공인 미남이기까지 했으니 푹 빠진 모양. 이번에 기필코 조선으로 가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정작 이덕형은 다시 만나기 전까지 롤리타의 존재조차 까먹고 있었다. 이항복은 자기는 선물 공세를 해도 스페인 처녀 하나 못 꼬시는데 이덕형은 가만있어도 처자가 굴러온다며 부러움을 섞어 놀리고 있다. 그리고 이항복에게 귀국 일정을 듣고 곧바로 따라와 견서사 일행에 합류했다. 아버지 왈 어떻게든 말렸지만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고... 이덕형은 이미 이산해의 딸과 혼인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롤리타의 사랑을 거절했지만 결국 첩이라도 괜찮다는 롤리타의 고집을 꺾지 못한다. 롤리타와 친해진 상희의 지원사격까지 받은 주인공은 어명으로 롤리타를 이덕형의 첩으로 맞이하도록 하고, 정실부인이 되지 못한 것을 달래주기 위해 서양식 마차웨딩드레스를 만들게 하여 서양식으로 성대한 결혼식을 치뤄준다. 상희와는 절친이 되어 사나흘에 한번씩 궁에 놀러오고 있으며 롤리타의 시녀들이 서양 드레스를 만들어 파는 등 궁중에 서양 문화를 조금씩 퍼트리고 있다. 을미동정 이후 친정에 다녀오면서 조선에 대해 널리 알리라는 주인공의 배려에 의해 3차 견서사에 이덕형과 함께 참가하게 되었다. 첩이기는 하나 워낙 특수한 경우이므로 숙부인 히씨 칭호를 특례로 받는다. 이덕형과의 사이에서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낳았다.

  • 도로테아 외 롤리타의 시녀들
롤리타가 데려온 시녀들. 서양식 드레스를 만들어서 파는 등 서양 문화 보급에 일조한다. 하급 귀족 혹은 평민 출신들이지만 조선에서는 시녀라 하면 노비로 생각하기에 혼사가 쉽지 않을 듯한데, 롤리타가 스페인으로 돌아간 사이 상희가 개업한 카페 반촌다점에 웨이트리스로 고용하여 눈 맞는 손님이 있으면 혼사 문제도 겸사겸사 해결해줄 계획. 이름이 언급된 것은 도로테아뿐인데, 이항복과 친밀한 사이이고 금위사 끄나풀일 가능성이 높다.

  • 장 미셀
2차 견서사가 고용해온 프랑스 장다르메 용병대의 대장. 황진과 함께 공을 세워 맹서군(猛犀軍)이라는 칭호를 받지만 을미동정 이후 비용을 이유로 호위군에 편입된다.

  • 제임스 앨런비
미들턴 선장과 함께 조선에 방문한 스코틀랜드계 상인, 가톨릭 신자. 그래서인지 잉글랜드계에 대해 적대적이다.[103] 유럽으로 돌아가는 대신 조선에 남아 송상 신호영과 합자회사를 세우고 조선 최초로 은행업을 시작할 계획이다. 1부의 정호찬과 마찬가지로 앨런비라는 이름은 슈타인호프 작가의 소설 설정을 도와주는 역덕후 지인의 닉네임에서 따왔다.

  • 맥클로스키
3차 견서사가 데려온 스코틀랜드 용병대의 대장. 아일랜드어밖에 못하는 부하들과 달리 영어, 라틴어, 프랑스어에 조선어까지 할 줄 안다. 다만 이 용병들의 조선어는 안위가 가르쳐서 말투가 장난스럽다고. 금군에 스코틀랜드 병사들로 이루어진 숙호위를 지휘하고 있으며, 맥구로라는 조선이름까지 얻었다.

  • 리카르도
이기빈이 고아에서 고용한 포르투갈+중국인 혼혈 아랍어 통역사. 천회사와 함께 모카 섬에 도착하여 커피 씨앗을 빼돌리기 위해 강연성과 함께 잠입하다 발각당해 채찍질로 고문당한다. 그 뒤, 이기빈이 보복전을 벌이면서 구출된다.

  • 셀린(말라니야)
모카 베이가 성노예로 데리고 있던 우크라이나인 여자 노예. 금발에 피부가 희고 글래머 타입의 절세미녀라고 한다. 작가의 지인이 그린 셀린 설정화. 이기빈이 쳐들어 왔을 때 모카 베이가 벽장에 숨은 것을 가르쳐주어 붙잡히게 해준 공로도 있는데다 이기빈의 마음에도 쏙 들어 이기빈이 데리고 가 자기 첩으로 삼는다.[104] 우크라이나 지역 출신의 슬라브인이며 본명은 말라니야. 셀린은 모카에 노예로 팔려오며 붙은 이름이지만 이기빈은 셀린이라는 이름이 더 마음에 들어서 계속 셀린이라고 부르고 있다. 조선에 온 뒤에는 이기빈이 양첩을 빼돌렸다며 처벌받는 명분이 되기도 하지만 1년이나 함께 지냈다면 정이 들었을 것이라며 이기빈이 데리고 사는 것을 인정하고 우크라이나인이라고 우씨 성을 내려주었다. 이후 이기빈이 인도 대사로 발령받자 함께 인도 대사관으로 떠났다.


2.5.4. 조선측 중국인[편집]


양응룡의 난 진압에 참여한 뒤, 만주 토벌전에서 사천 장창병을 이끌고 참전한다. 원역사처럼 포위당한 뒤 자신은 여기서 죽을 운명이라며 탈출을 거부하지만, 마천승의 간곡한 부탁에 진양옥을 데리고 조선 방향으로 탈출해서 이항복의 집에 머무른다. 분노한 만력제가 탈출한 병사까지 후퇴한 죄로 처형하려 하자 조선에 남고, 사천병들과 함께 대구 대명동에 정착한다. 정착 후 조선인 후처를 들여서 딸을 보았고 이 딸의 자손이 후일 열조의 후궁 혜비 진씨가 된다.

첫 언급은 이항복의 섹드립 소재로 언급된 것. 만주 토벌전에서 유정 휘하에 남편 마천승과 함께 종군하다가 만주군에게 포위당한 뒤 유정과 함께 조선 방향으로 탈출해 중전 김씨의 친정에 머무른다. 직접 군사를 지휘하는 여자라는 점이 다지와 겹쳐 보여서인지 중전과 친해졌다. 유정과 함께 대구에 정착한다. 유정이 사망한 후에 명나라 유민들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남편과 함께 지키려던 명나라가 망해버리는 꼴을 보고 주유교가 조선으로 망명한 뒤에야 죽었다. 만화가 동사원형이 작업한 진양옥 설정화.

  • 석재금
석성의 차남으로 아버지가 처형당하고 유배당했으나 도주하여 정여립에 의탁한다.


2.5.5. 대남도[편집]


  • 정준석
정일한의 둘째 아들, 무종의 둘째 증손자. 정5품상 과의교위. 1570년 생. 무과를 준비하던 중 경인왜란이 발발하자 오위군 소속으로 하남벌 전투에 참전했으나 살아서 탈출했다. 이후 곽재우 휘하의 속오군에서 싸운다. 아버지 정일한이 대남개척어사로 떠나자 자원하여 아버지를 따라 대남도로 향한다. 임금에 대해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아버지와 달리 아버지를 10년 동안 오지로만 내모는 임금에 대해 원망을 품고 있다. 북변에서 야인들을 많이 상대해본 아버지와 달리 젊고 다혈질이라 대남도 토인들에 대해 강경책을 주장한다.[105] 예지몽을 꾼 주인공이 그 후로 특별히 정일한을 챙겨주는 모습을 보면서부터는 임금에 대한 원망은 어느 정도 사그라들었다. 대남도 개척 후 3년간 46회 전투를 벌여 수급 284급을 취하고 포로 58명을 잡았고 인구 약 1만 여명의 아타얄 부족과 동맹을 맺는 공을 세워 정 4품 진위장군으로 승진한다. 아타얄 족장의 딸과 결혼하고 싶다고 청하는데[106] 다른 신하들은 혹시 정준석이 현지 세력과 힘을 합쳐 대남도를 좌지우지하는 호족이 될 것을 우려해 반대하나 주인공이 특별히 허락한다.
조선에 거짓 신종했다가 이탈하려 한 대남도 토인들을 코끼리 발로 짓밟아 압사시켜 잔혹하게 처형하기도 한다. 대남도가 정일한의 영지와 다름없게 되다보니 대남도의 왕자같은 존재가 되어 성격이 오만하고 포악해졌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금위사를 통해 낱낱이 주인공의 귀에 들어가고, 주인공은 정일한을 소환하고 권준에게 병력 3천을 주어 새 관찰사로 보내 정준석을 제어하려고 한다. 귀국해봤자 일본과 두차례의 전쟁에서 활약한 무장들이 득실거리는데서 더 출세하기 어렵다고 보고 대남도에 남았으며, 권준을 보낸 이유는 충분히 짐작하고 권준 아래에서 그저 그런 무장 하나로 남지 않기 위해 새로운 터전을 개척하기로 하고 다두 왕국을 공략하여 대남도의 2번째 거점인 대중성을 세운다. 양응룡의 난 정벌 원정에 대남도 토인병들을 이끌고 유격장으로 참전한다. 여전히 대남도 토인들 사이에서 큰 세력을 갖고 있으며, 이기빈의 천회사 함대에 자기 수족인 최일규가 지휘하는 대남도 토인병들을 동승시킨다. 재석 사망 직전에 조선 조정에 입조하는 모습을 보면 예전에 재석에게 가졌던 서운함은 다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주인공 사망 후에 대관으로 조문하러 본국에 파견되었고 계속 대남도 호족으로 위세를 부리며 살았으나 선조에게 대중성주 직책을 회수당한다. 그러나 재석이 꾼 악몽과 한때 재석에게 가졌던 원망과 달리 황명에 순순히 따랐고, 재산과 영향력을 보존했으며 후손들은 3부 시점에서도 평화롭게 대남도의 유지로 살고 있다.

  • 정영훈
정준석과 아타얄 추장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정일한의 손자이자 무종의 고손자. 대남도에서 태어났으나 본국으로 가는 정일한이 데리고 가 조선에서 기르다가 그 몇년 후 양응룡 난을 토벌하고 개선식을 치르느라 조선에 들린 정준석이 다시 대남도로 데리고 간다. 이후 그의 일가는 조선에 남고 이후의 동생의 일가가 3부에서 조홀국을 장악하게 된다.


2.5.6. 미주야인[편집]


원균의 아들. 아버지 원균의 반역 행위가 알려지자 모친과 함께 금위사에 수감된다. 연좌제를 축소하려는 주인공의 노력과 원전, 원연의 공적으로 처형은 면하고 어머니와 함께 부여주에 전가사변 되어 군졸이 된다. 이순원의 시베리아 탐험대에 배속되어 원균의 아들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침착한 판단을 보이며 성실하게 근무하고 돌아왔다. 주변에서도 훌륭한 젊은이가 아버지를 잘못 둬서 인생이 꼬였다고 다들 안타까워 해주는 등 인망이 좋다. 죄도 사면되고 종7품 참위가 되었지만 대역죄인의 아들이라 혼사는 구하기 어렵고 본인도 결혼 생각이 없다고 한다. 정문부의 아메리카 탐험대인 탐동사에도 배속되어 종 6품 정위로 승진하고, 중간거점인 덕진성의 책임자가 된다. 어차피 조선에서는 혼사가 어려우니 아메리카에 정착할 마음을 품고 현지 쉬눅 족 추장의 딸과 결혼한다. 주인공도 원사웅에게는 유감이 없었던데다 이 결혼이 대남도의 정준석처럼 원주민들과의 동맹을 공고히 하리라는 생각에 결혼 축하 선물도 보내주고 부여주에 있던 원사웅의 어머니도 대미주로 보내준다. 3부에서 그의 후손은 북미주 최대의 명가인 미주 원씨로 번성하였고 4부에서는 원사웅에게 밀열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져 명예회복이 되었으며 그의 후손들은 개신교로 개종한다.

  • 윤씨
원균의 처. 원균이 역모에 가담하자 아들과 함께 전가사변 당한다. 이후 아들이 출세하자 대미주로 떠난다.

  • 황금빛 하얀 고래
치누크족의 추장. 주인공이 사망하자 원사웅에게 애도의 뜻을 표한다.


2.6. 승려[편집]


실제 역사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으로, 권율 휘하에서 독산산성이나 행주산성에서 큰 활약을 했다. 소설에서는 승병을 이끌고 이순신이 속한 도감군을 지원하는데, 이순신은 승병들을 의무병으로만 활용하고, 실전에 투입하지 않았다. 처영도 승려 된 입장에서 불살을 행해야 하기에 이순신의 이런 배려를 고맙게 여긴다.[107] 경인왜란 때는 승병 1천을 이끌고 권율의 북방군에 합류, 전투병으로 투입되어 단밀현 전투 대승에 일조한다.

팔도 승병을 총괄하는 도총섭. 금강산에 머무르다가 우에스기 가게카츠가 교섭을 요청하자 이에 응한다. 우에스기가 "조선과 전쟁할 생각이 없으며, 강릉에서 움직이지 않을 테니 휴전을 맺도록 중재해달라"고 요청하자 이에 응한다.

휴정대사의 직계제자로 충청도 총섭을 맡아 전라도를 침공한 하시바군이 충청도로 넘어오지 못하게 분투하고, 주인공의 친정군이 논산에서 벌일 결정적인 대회전을 위한 정찰임무를 지휘한다. 논산대첩이 끝난 후 왜군 시체들을 화장할 때 아군 적군 모두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불공을 드려주도록 주인공이 명령한다.


2.7. 상인[편집]


  • 신호영
송상들의 좌장 격인 인물. 신립과 같은 평산 신씨이지만 조선 조정에 충성하는 신립과 달리 개성에 남은 파이다. 아직도 조선에 반감이 큰 다른 송상들과 달리 "이제 우리들도 조선의 백성"이라며 "왜적에 맞서 조선 조정에 충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조정에 은 10만 냥을 바치기로 한다. 주인공은 이 돈을 외수사 설립 자금으로 쓰기로 했으며 송상들에게 운영을 위탁하기로 했으니 그만한 대가는 받는 셈. 명나라 오공충과 만나 군수물자 도입에 합의하며 쌀 매입을 위해 고려 이후 교류가 없던 안남, 섬라 등 동남아 지역과의 교류를 재개한다. 수완은 있지만 나레쑤언의 이름을 들리는 대로 국문으로 적어도 될 걸 굳이 한문으로 음차해서 적어 보내 주인공에게 역시 구시대적인 사람인 건 어쩔 수 없다고 평가받는다. 송상이 9개의 대상단으로 재편되었을 때 그 중 신호영의 상단이 가장 큰 상단이 되었다. 스코틀랜드 상인 제임스 앨런비와 협력한다.

  • 장재웅
송방 행수. 건주위의 대신 호호리에게 말을 구입하는 일과 건주위에 몰래 노획 왜조총을 판매하는 일을 맡는다. 이는 주인공이 지시한 것으로 왜조총은 조선제 활강조총보다 성능이 떨어져 활강조총만 10만 정이 넘게 있는 조선에서는 써먹을 곳이 없지만 몽골과의 싸움에 조총이 절실하게 필요한 건주위는 조총을 인삼과 교환하여 비싸게 사들일 의향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넘기는 수량은 월 수백 정 정도로 제한할 계획이며 화약 공급도 통제할 계획이고, 노획 왜조총은 겨우 2천정이므로 이 조총을 받은 건주위가 명이나 몽골을 정벌한다면 모를까 조선을 침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 박희동
강경상인 대행수. 송상들이 상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박희동을 대표로 하는 강경상인만이 유일하게 송상에 대적할 수 있다. 네덜란드 상인들과 협력 중이며 신호영과 담판하여 젓갈 유통 문제에서 양보를 얻어낸다.

  • 권기태
강경상인 도방이자 박희동의 상관. 본래 안동 권씨 사대부 집안이었으나 4대째 급제자가 없자 집안 어른들의 한탄에도 불구하고 장조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고 벼슬길을 포기하고 상인이 되었으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서 사환부터 시작해서 최연소 도방이 되었다. 도쿠가와의 초소카베 토벌 원정군에 수송선을 제공한다. 외전에서 조면기를 이용하여 옷감 사업을 크게 벌이며, 시대를 꿰뚫어보고 진로를 정한 사람답게 인도산 면포인 천축포의 수입에 대항하기 위해 방적기와 조면기 동력으로 증기기관사용할 생각을 한다.

  • 동고로의 후손
경인왜란 초기 전쟁이 난 줄 모르고 다테 마사무네를 만나 자신의 조상 동고로가 동북 출신이라며 해삼위로 향하는 길을 알려준다. 이후 일본에 도착했다가 억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귀국하는 다테 마사무네와 함께 이들을 돌려받기 위해 교섭을 할 인원들도 동행한다.


2.8. 의원[편집]


어의. 상희가 의녀 시절 바람을 넣어서 실제보다 일찍 동의보감 편찬을 시작했다. 한때 자신의 부하였지만 지금은 후궁이 된 상희와는 서로에게 깍듯하게 대한다. 허준은 과거 부하였을지언정 이제는 왕의 후궁이고 윗사람이니 당연히 존대하고, 상희는 과거의 상사인 데다가 허준이니까 여전히 깍듯이 대한다. 허준이 보기에도 상희의 능력이 놀라운지 '대체 소싯적에 어떤 공부를 하셨냐?'고 묻기도 한다. 이후 동의보감이 더 체계화되면서 명성이 높아졌고 이순신의 후손들 만큼이나 허준의 후손들도 의료쪽으로 갈것을 강요받고 있다고 한다.

양반가 자손이지만 무종 시절 적서차별 철폐의 영향으로 대과 경쟁이 심해진데다, 본인도 10대 초반부터 각종 의서를 읽는 등 사람 몸에 관심이 많아 그냥 의시를 봐서 의원으로 지내고 있었다. 경인왜란 도중 외과적 지식 부족의 한계를 실감하지만 신체발부 수지부모 사상 때문에 조선인은커녕 왜군 시신조차 마음대로 해부할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1차 견서사가 들여온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가 저술한 서양 의서에 인체 해부도가 실린 것을 보고 눈이 돌아간 나머지[108] 2차 견서사에 합류하여 서양 의술을 배우기로 한다. 2차 견서사에서 라틴어를 배우며 선의로 복무한 후 유럽에 도착. 원래는 책을 쓴 베살리우스의 제자로 들어가려 했으나 이미 30년 전에 죽은 사람이라 그건 실패했고, 대신 코르나로 추기경의 빽으로 파도바 대학교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한다. 파도바 대학교 의학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3차 견서사와 함께 귀환하여 의학교의 교장이 된다.

  • 이수현의 아버지
중인이며 집안 대대로 동부 연화방에서 이가의원이라는 의원을 하고 있다.. 의원으로서 환자를 치료만 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 안심할 수 있도록 계속 말을 거는 등 진료 태도가 훌륭했다. 본래 딸 이수현이 그냥 시집이나 가기를 원했지만 이수현에 빙의한 상희가 뜻을 거스르고 의녀가 된 후, 재석과 재회하여 후궁이 되는 대박을 맞은 사람. 상희와 좋은 관계를 유지 중이며 상희가 운영하는 반촌다점, 극장, 주점의 형식상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 주변에서 왕실 빽으로 술장사한다고 나쁜 소리를 듣지만 그래도 벼슬은 요구하지 않아서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반촌다점, 극장, 주점으로 벌어들인 돈을 한 푼도 챙기지 않고 전부 외손자 진안군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 1608년 장조가 사망한 뒤 약 10여년쯤 더 산 것으로 추정되며 3부 시점에도 그 후손들은 이가의원을 하고 있다.


2.9. 기타 조선 인물[편집]


성균관 유생. 잠시 도성을 떠났다가 성균관 유생들이 대거 자원입대할 때 시기를 놓치고 도감군에 입대하지 못한다. 이후 세자가 독단으로 강릉 백성들을 구출하려 시도하자 스스로 인질이 되어 강릉을 떠나기를 원하는 강릉 백성들과 자신을 교환한다. 그러나 우에스기군이 강릉 백성들을 딱히 괴롭히지 않았기에 강릉을 떠난 이는 강릉부사 이응현과 사대부 30여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우에스기가 강항의 의기를 마음에 들어해 두달 동안 계속 곁에 두고 성리학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왜란이 끝난 후 명목상의 포로로 우에스기와 함께 일본으로 보내졌다. 주인공은 실제 역사의 간양록처럼 정보원 역할을 잘 해줄 것이라 기대 중. 우에스기는 히데요시에게 강항을 조선 국왕의 조카라고 속인다. 3부에서 그의 학통을 이은 아메노모리 호슈가 등장할때 언급되기로는 을미동정으로 평화가 회복되고 조선과 도쿠가와 막부가 우호관계를 맺은 후에도 일본에 남아 후학을 양성하다가 일본에서 사망했고, 유골은 고국으로 돌아와 묻혔다고 한다.

이순신의 부친. 이순신이 주화사로 일본에 가 있는 동안 사망하였다. 향년 74세로 당시로썬 호상이었다.

  • 이희신(李羲臣)
이순신의 큰형. 벼슬에 뜻이 없어 시골에서 한량으로 지내다 부친이 사망하자 동생과 함께 3년상을 지낸다.

  • 변씨
이순신의 모친. 이순신이 부친상을 당했을 때 주인공이 이순신에게 설고를 내릴까 하다가, '효심 깊은 이순신은 상 중에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이순신의 모친에게 "남편을 잃어 슬플 테니 먹고 기운을 차리라"고 설고를 내린다. 이후로도 2차례나 더 설고를 내려 이순신의 충성심은 더욱 깊어진다. 1596년 82세 나이로 자연사하고, 이순신은 3년 상을 위해 사직한다. 주인공은 변씨가 생전에 좋아했던 설고를 다시 내리고, 이순신이 3년 상 중 병들지 않도록 두부와 나물을 챙겨먹도록 한다.[109]

  • 김 서기
하성군의 서기, 순순히 순왜가 된 다른 하성군의 문객 노비와는 달리 조선에 대한 충성심이 투철한 인물로, 임해군에게 협조를 거부한 하성군의 문객들이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 일단 협조하지만, 배속된 왜군이 전라도에 도착하자마자 바다에 뛰어들어 하루 종일 헤엄쳐 전라좌수군에 투항하여 왜군의 전략에 대해 조선군에게 알려주는 공을 세웠다.

  • 갑동이, 을동이, 병동이, 정동이
임해군 패거리의 부두령들. 이름은 실명을 감추기 위한 가명으로 임해군은 그들과 함께 차차를 덥칠 계획을 꾸미나 계획은 발각되었다. 발각된 이상 그들이 무사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나머지 패거리들은 무자호란 당시 몽골군의 공격에 전사한다.

  • 진옥(眞玉)
정철의 기생출신 첩. 미모뿐만 아니라 교양이 풍부했기에 정철과 가장 가까웠다. 정여립의 고문에 못 이겨 정철이 한 말을 자백한다.

  • 정대성(鄭大成)
합천의 한량으로 원역사에서처럼 전란을 틈타 의병을 사칭하며 도적질을 하다 들통 나서 토벌당해 죽었다.

이항복의 수제자. 이항복의 제자들 중 능력이 가장 뛰어나다고 한다. 이수광의 부관으로 견서사로 보내진다.

이항복의 수제자들. "속오군 훈련을 빼주는 대신 종사관으로 종군하라"는 이항복의 꼬드김에 넘어가 김시민의 종사관이 된다. 이때 김시민에게 "황성평에 있는 큰 비석의 탁본을 뜨라"는 어명을 듣게 된다. 처음에는 의아하지만 나중에 비석이 광개토대왕릉비라는 것을 알게 된다. 탁본 작업을 마치자 "탁본과 홍타이지를 어전에 대령하라"는 김시민의 명령에 복귀한다.

  • 이미나
이덕형과 롤리타 히메네스 사이에서 태어난 서녀. 출생 직후 이덕형과 롤리타가 유럽으로 떠나서 시녀들이 키운다.

  • 이여수
이덕형과 롤리타 히메네스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 3차 견서사가 유럽으로 가던 중 배 안에서 태어났고 견서사가 활동하는 동안은 카디스의 외가에서 맡아 키우기로 한다.

원래 경성군 시절 장악원이 확대된 탓인지 기생이 아닌 장악원 가희가 되어 활동한다. 반촌극장이 생긴 이후 최고 인기작인 고다지전의 주인공 고다지 역으로 캐스팅된다. 그 인기는 이매창이 탄 가마가 지나갈 때 인파를 막기 위해 포도청이 직접 호송해줄 정도. 한동안 상희의 반촌극단에서 활동했으나 중전이 세운 정도극단으로 스카우트되어 반촌극단은 활동이 어려워진다.

우리가 아는 허난설헌. 허균의 누나로 1589년에 죽지 않고 1607년 중전 김씨를 도와 홍희동전 개정판을 내놓는다. 조보에 시가도 몇 편 실렸다는 것으로 보아 꽤 유명한듯 하다. 왜 수명이 연장된지는 불분명하나 바뀐 정치적 상황과 주변 환경이 작용한듯하다. 수명도 늘고 오빠도 잘나가고 본인도 중전과 함께 일하고 조보에 시가도 싣는 등 수혜를 받은 사람 중 하나.


2.9.1. 작중작 <홍희동전>[편집]


허균과 세르반테스의 공저소설 홍희동전의 등장인물.

로드리고 데 알바레스 후작과 홍춘섬 사이에서 원나잇으로 나온 아들. 스페인식 이름은 디에고. 하지만 아버지가 집안을 잇기 위해 떠나면서 외조부에 의해 그 서자로서 자랐다. 1부에서는 진실을 알고 아버지를 찾아 스페인으로 오지만 아버지는 그를 집안 상속문제로 거부한다. 이후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스페인 해군에 입대하여 큰 공을 세우고 대위까지 진급한다. 그럼에도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자 조선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남장여자였던 동료 산도발(조선판), 이복동생 비올레타(스페인판)[110]의 사랑 고백으로 새로운 힘을 얻어, 누에바 에스파냐로 떠난다. 2부에서는 누에바 에스파냐 총독 아래에서 종군하며 인디오 정벌에 힘쓴다. 3부에서는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탈출해 신대륙에 스페인인, 인디오, 무어인, 흑인, 혼혈인들이 평등하게 함께 사는 종교와 인종차별이 없는 이상적인 나라를 세운다.[111]

  • 로드리고 데 알바레스
홍희동의 아버지. 작중 만악의 근원. 후작 가문의 삼남으로 조선에 군사고문으로 들어온 스페인인 용병. 춘섬과 약혼하고 관계도 맺었지만 두 형의 요절로 인해 작위를 잇게 되어 귀국한다. 하지만 다시 찾아온 홍희동을 자식으로 인정할 경우 스페인에서 낳은 자식들보다 형인 홍희동이 계승자가 되고, 외국에서 낳은 혼혈아가 진짜 장남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가문의 명성에 흠이 가기에 홍희동을 인정하지 않고, 전사하기를 바라며 스페인 해군에 추천서를 써준다. 홍희동이 해군에서 대위까지 올라가는 등 출세했음에도 끝내 자식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 홍춘섬
홍 판서의 외동딸. 홍희동의 어머니로 홍희동은 별당에 사는 그녀를 누이인줄 알고 살았다.

  • 비올레타 데 알바레스
홍희동의 이복동생. 상속문제로 그를 거부하는 아버지와 달리 이복오빠 문제를 아버지에게 다그치면서도 그에게 잘해주는 대인배. 허균은 원래 홍희동과 이어주려 하나 아무리 소설이라도 남매간 근친상간은 너무하다 싶어서 조선판에서는 대신 산도발이 홍희동과 이어지게 한다. 스페인판에서는 홍희동과 러브라인이 생기는데 차마 근친상간을 묘사할 수 없던 허균이 질질 끌다가 결국 이어지지 않았다.

  • 산도발
홍희동의 절친으로 법대 출신. 홍희동에게 법적인 문제를 설명해준다. 홍희동과 함께 스페인 해군에 입대하고 소위까지 진급한다. 조선판에서는 남장여자 설정으로 홍희동과 이어진다. 본명은 클라라라고 한다.

  • 말동이, 사스케, 흑손이
홍희동의 동료들. 말동이는 조선인, 사스케는 일본인, 흑손이는 아프리카인이다. 군인으로 인정받은 산도발과 달리 스페인군은 이들을 군인이 아닌 홍희동의 하인으로 본다. 이후 공을 세워 부사관으로 인정받는다.

  • 에스피노사 후작
홍희동이 입대한 부대의 제독.


3. 일본[편집]



3.1. 오다 가[편집]



3.1.1. 오다 본가[편집]


바뀐 조선 역사로 인한 나비효과로 혼노지에서 죽을 위기를 넘긴다.[112] 따라서 통일 일본의 지도자는 하시바 히데요시 대신 오다 노부나가가 되었으며 주인공은 죽도록 노력하여 기껏 조선을 강하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강해진 일본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단 차차하성군이 볼모로 교환되는 등 초반에는 조선에 우호적인 입장으로 행동한다. 그러나 본인의 과대망상적 야망으로 인해 결국 이 우호는 깨진다.
실제 역사에서와 마찬가지로 미남에[113] 상당히 파행적인 성격. 부하를 대머리쥐,[114] 원숭이, 귤대가리 등의 별명으로 부르는 것도 실제 역사 속에서와 똑같으며 빡치면 남들 앞에서 직접 두들겨 패기도 한다.[115] 뛰어난 군사적 식견과 용맹을 가졌으나 후계자인 장남이 죽고 후계구도가 불안해지자 맏손자인 히데노부에게 광활한 대륙 땅을 물려주겠다며 이상할 정도로 정복욕을 불태운다.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무리하게 조선원정을 감행하지만, 근본적으로 전국시대 무장으로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116] 생각보다 강력했던 조선의 힘 앞에 패배를 거듭하다가 망해버린다. 최후에는 총애하던 히데요시에게마저 배신당해 조선에서 탈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할복 자살하여 사망한다.
후대의 평가는 꽤나 엇갈릴 듯.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통일 일본의 발전할 수 있는 역량을 죄다 무모한 전쟁에 꼴아박아 자멸을 자초하고 일본의 몰락에 기여한 희대의 멍청이라고 폄하되거나, 미래의 조선이 대제국으로 성장하게 되면 그런 대제국에 정면으로 승부하여 잠깐이나마 위험하게 만든 용자라는 미화된 평가를 받을 지도 모른다. 노부나가의 시신은 모리 란마루가 화약으로 폭파시켜 조선에게 넘겨주지 않는다. 그러나 개선식에 내세우기 위해 다른 시체를 가져다 오다의 시신이라며 미라화하여 강무관에 전시한다.

니와 나가히데의 아들이자 오다 노부나가의 다섯째 사위. 경인왜란에서 경상도 방면군에 종군하여 의령을 제압하고 낙동강으로 올라가는 임무를 맡았으나 곽재우가 이끄는 속오군에게 당하여 임무를 실패한다. 이후 오다 나가마스가 주인공의 항복 제의를 권하자 화의를 맺을 것을 주장한다.

노부나가의 동생이라는 신분이라 조선에 얼굴마담격 사신으로 온다. 작중에서, 형 노부나가와 조카 차차 때문에 고생하는 인물로 묘사된다.[117] 직접 등장한 일본 측 인물 중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나만 정상인 포지션. 조선에 상당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고니시와는 달리, 조선을 싫어한다. 그에 따르면, 조선은 찻잔 잘 만드는 거만 빼면, 아주 재미없고 따분한 나라라고. 전쟁이 터진 후에도 형에 의해 사신으로 굴려지는데, 신립의 시신을 조선 왕에게 갖다주면서 항복을 권고하는 사신으로 명받아 가게 된다.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사마유의 말에 "이번에는 진짜 죽을 수도 있다고 각오는 했다"고 한다. 주인공을 만난 자리에서 항복을 권했다가 이항복에게 철저하게 논파 당했고 신하들은 "나가마스를 죽이라"고 하지만 주인공은 "나가마스도 형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불쌍한 놈"이라고 생각해서 "그래도 신립의 시신을 가져다주긴 했으니 북한산성에 가둬두라"고만 명한다. 주인공은 "차차와 만나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했으나, 담당자들이 귀찮았는지 딱히 왕래를 막지 않아 차차와 함께 지내며 차차와는 달리 조선의 추위에 적응하질 못한다.[118] 이후 논산대첩에서 일본군이 참패하며 패색이 완연해지자, 주인공은 나가마스를 다시 불러들여 노부나가에게 항복을 권하는 사절로 보냈고, 형의 답을 들고 다시 돌아온다. 그 후 히데요시가 "형이 죽을 판인데 가만히 있는 네가 사람이냐?"며 노부나가의 명령을 사칭해 주인공에게 최후의 정상회담을 요청하게 했으나, 이것은 히데요시가 도망치려고 시간벌이를 하려고 나가마스를 속인 것. 노부나가에게 모든 일을 사실대로 말해 노부나가가 조선 왕의 손을 빌어 히데요시에게 복수하게 영토 양도 문서를 써주게 되고, 나가마스는 이 문서를 가지고 조선 진영에 넘어와 포로가 된다.
개선식에서 종의지와 함께 조리돌림을 당하는데, 주인공은 "나가마스가 직접 잘못한 것도 없고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119] 빼주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노부나가의 동생이란 상징성이 너무 커서 희생양으로 세웠다. 개선식이 끝난 후에는 다시 차차와 함께 북한산성에 연금된다. 이후 남만선을 통해 차차와 함께 도쿠가와에게 향하나 도쿠가와는 나가마스와 차차를 감금해버린다. 분노한 차차를 진정시키려다가 조카에게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을 듣고 공포에 떠는 등 수난은 계속되고 있다. 조선의 일본 보복원정이 개시되고 고요제이 덴노가 히데요시 토벌의 조칙을 내리자 비로소 이에야스가 연금 상태에서 그를 꺼내 천하에 공개한다. 도쿠가와의 천하가 된 이후 본의 아니게 조선에 오래 머물러서 조선 전문가가 된 탓에 이에야스의 조언자가 되었으며, 후루타 시게나리와 함께 조선에 사신으로 자주 온다.

노부나가의 장남. 혼노지의 변에서 원역사와 달리 아버지 노부나가가 살아남고 자신만 사망한다. 총애하던 후계자인 장남을 잃은 노부나가는 이후 차남과 3남이 둘 다 멍청이라서 후계구도가 불안해지자 무리한 대륙원정을 위해 뻘짓을 하는 등 망가지기 시작한다.

노부나가의 차남과 3남. 큰형과는 달리 능력이 떨어져 아버지의 신뢰를 전혀 받지 못했고, 아버지가 조선원정에서 사망한 뒤 맞서볼 전력이 있었음에도 히데요시에게 얼떨결에 오사카성을 내주고 만다.

노부타다의 아들이자 노부나가의 맏손자. 그에게 조선과 명의 광활한 땅을 물려주기 위해 오다는 조선원정을 벌인다. 자신의 몰락을 확신한 오다는 히데요시를 히데노부의 후견인으로 선정하나 히데요시가 그 직후 자신을 미끼로 버리고 튀는 등 밉상 짓을 하자 도쿠가와가 후견인이라고 유서에 적는다. 오다의 첫번째 유언을 이용해 히데노부의 후견인이라는 명목으로 천하인이 된 히데요시는 4년만에 슬그머니 히데노부를 뒷전으로 만들고 자신의 양자 히데토시를 후계자로 선포하여 반발을 산다.

  • 아이히메[120]
오다 노부나가의 7녀. 오다가 임해군을 괴뢰 조선왕으로 삼기로 결정한 후 부인으로 내준다. 드센 차차에게 눌려 살던 임해군은 소극적인 아이히메를 훨씬 좋아했으나 경인왜란으로 임해군과 노부나가가 모두 죽어 입장이 붕 떠서 한동안 조용히 지낸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인이 된 후 차차가 아들을 나가마루 하나밖에 낳지 못하자 히데타다가 측실로 들여서 2남 2녀를 낳는다. 그 중 딸 센히메가 일본국왕 아소 고레미츠의 장남과 결혼한다. 2번 결혼 모두 사촌언니의 밑에 측실로 들어간 기구한 운명...이었는데, 2부 외전 및 3부의 언급에 의하면 차차가 지나치게 막나가는 행보로 이에야스의 눈 밖에 나서 결국 쫓겨나고, 이후 반년만에 화병으로 죽어 그녀가 정실이 되었으며, 그녀가 낳은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3대 쇼군위에 오른다.


3.1.2. 구 아자이 가[편집]


오이치를 위시한 주변인물들.

이 세계에서는 시바타 카츠이에와 재혼하지 않고 오빠와 세 딸들과 아즈치성에 살고 있다. 엄청난 미녀로 히데요시가 반해있으며 일본에 온 류성룡이 얼굴을 보고 넋을 잃고 임해군은 차차말고 오이치에게 장가갔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부하인 유키를 조선에 시집가는 차차에게 붙여준다. 오빠와 사이가 매우 좋아서 세스페데스가 이항복에게 전해주기를 일본에서는 오이치의 세 딸이 노부나가와 근친해서 낳았다는 소문까지 있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오다가 죽은 뒤 오이치를 차지하려 했으나 노부나가가 몰락한 후 힘없이 히데요시에게 복종당한 오다의 자식들과 다르게 잽싸게 막내딸 고우를 도쿠가와에게 정략결혼을 시켜서 세력 유지에 성공한다. 조선의 보복원정 때 히데요시가 아즈치 성으로 피난오자 성 외곽만을 내어주고 본성은 열어주지 않는다. 고요제이 천황의 조칙이 내리자 히데요시를 성 밖으로 쫒아내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군을 불러들인다.

겉으론 예의바른 척하지만 속은 교활하고 음험한 하라구로. 천하인의 아내가 되는 것이 꿈이다. 하지만 일본의 천하인은 외숙부 노부나가라서 이룰 수 없으니 조선으로 가서 중전이 되겠다며 오다 노부나가에게 청해 직접 조선으로 볼모가 되어 들어온다. 170cm 정도의 장신[121]에 엄청난 미모를 가졌다. 잔머리는 잘 굴리는데 깊게 생각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강간 자작극으로 임해군과 결혼한 뒤 꽉 잡고 살았는데 차차의 속셈은 임해군을 무장으로 단련시켜 조선 왕으로 만드는 것.[122] 그러나 임해군이 차차를 임신시키지도 못하고 무자호란에서 한심한 모습만 보인 뒤 일본에 가서 잠적해버리자 이혼한다. 경인왜란 내내 일본과의 내통 우려로 감금당해 있다가 주인공이 일본에 분란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나가마스와 같이 도쿠가와 가에 넘겨버린다. 도쿠가와가 천하인이 되리라 예상하고 이에야스의 삼남인 소년 히데타다를 강간해서 아들 나가마루를 출산한다. 이후 히데타다가 정이대장군에 오르면서 일본으로 돌아와 천하인의 아내가 된다는 꿈을 이루었고 유일한 상급자였던 시아버지 이에야스가 물러나자 남편을 꽉 잡은 뒤 일본 권력의 정점에 올라 미용 비약이나 비술에 엄청난 돈을 쓰는 등 사치에 빠져 살았다.
2부 외전에 의하면 혈통도 아이히메보다 별로고 자식도 덜 낳은 주제에 히데타다를 꽉 잡고 흔들며 사치에 빠져 사는 모습 때문에 열받은[123] 이에야스에 의해 쫓겨나고 나가마루[124]의 계승권도 박탈된다. 오다 계열 다이묘들도 아이히메를 지지해서 정실 자리는 아이히메의 차지가 되고, 히데타다 하나만 믿고 까불던 차차는 비구니가 되어 나가마루와 다른 절에 유폐되었다. 이후 발광하다가 반년만에 화병으로 죽었다.
조선/대한에는 일본으로 귀국한 후의 사치스럽고 문란하고 오만한 행적이 알려지지 않았기에 수백년 후에도 좋은 아내였지만 역적 남편을 잘못 만난 일본 미인 정도로 좋게 기억되고 있다.[125] 조선에서 임해군과 함께 살던 시절 실제로 망나니였던 임해군은 겉보기에는 거의 개과천선한 것처럼 보였으며 차차가 임해군을 왕으로 만들 속셈이었다는 것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 임해군은 역적이 되며 봉작이 취소되었기에 임해군부인이 아닌 아즈치를 한국식으로 독음한 '안토부인'이라고 불린다.
본 작품에서 손꼽히게 입체적인 인물이기에 인기가 많았고 비록 인성은 더럽지만 잘 되기를 바라는 팬들도 많았는데, 일단 한동안은 꿈을 이룬 셈이다. 그러나 아직 이에야스가 살아있는 상황에서 지나치게 날뛰다가 결국 몰락하는 최후를 맞았다.

오이치의 차녀. 히데요시가 일본을 장악하자 오이치는 그녀를 고종사촌에게 시집보내버린다.

  • 유키
차차가 시녀로 위장해 데려온 쿠노이치. 대대로 아자이 가문을 섬겨온 닌자 가문 출신이라고 한다. 아자이 가문이 망한 후 오이치를 섬기다 외국에 시집가는 차차가 걱정된 오이치가 차차에게 보낸다. 임해군에게 차차인 척하고 일부러 강간당해 임해군을 궁지에 몰았다.[126] 이후 표면적으로 임해군의 첩이 되었다. 조선에서 쓰는 이름은 동선. 히데요시가 보낸 닌자들이 차차를 데려가려 하자 1:8의 상황에서 순식간에 다섯을 살해[127]하는 대단한 실력자.[128] 임해군이 차차와 혼동할 정도로 차차처럼 키가 크고 몸매도 좋다고 한다.[129] 나이는 1590년 기준으로 약 30세.
주인공이 차차를 북한산성에 유폐시킬 때 설마 임해군에게 강간당한 시녀가 쿠노이치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북한산성에 함께 보낸다. 만일 차차가 후궁이 되었다면 궁 내에서 방해가 되는 인물들을 하나씩 암살했을 계획이었다고 한다. 북한산성에서도 3일에 한번 몰래 빠져나가 조보를 구해와 차차와 나가마스에게 바쳤고, 차차의 시녀 중 다섯이 차차에게 답이 없다고 보고 패물을 훔쳐 도망가자 추적해서 전부 제거한다. 일본 귀국 후에는 계속 차차의 곁에서 차차를 호위하다가 나이가 든 후 병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평생 차차에게 충성하다 죽었지만 정작 차차는 유키가 죽던 말던 신경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유키의 정체는 영원히 밝혀지지 않았기에 재석은 수백년이 지난 4부 시점에서도 차차의 닌자는 분명 남한산성에서 야반도주한 5명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유키는 그저 차차 못지않게 미모가 대단했던 임해군의 첩으로만 기억한다.
남들이 대체역사물을 찍는 동안 혼자 나루토를 찍고 있는 무력의 소유자라서 사실 세계관 최강자는 임꺽정도 야스케도 아닌 유키라던가, 졸렬잎 마을 출신이라던가 하는 드립도 있다. 천녀만큼은 아니어도 만만치않게 고증을 내다버린 판타지적 캐릭터지만[130] 독자들에게 비판받기는 커녕 인기가 매우 많다.

  • 차차의 시녀들
차차를 따라 조선으로 온 시녀들. 유키를 제외하고 총 19명이 있었으나 3명은 병사, 4명은 유키 건으로 금위사에서 조사받다 사망, 5명은 야반도주를 시도하다 유키에게 살해당했다.[131] 차차의 폭언과 갑질에 시달리면서도 여차하면 처참하게 죽이는 유키 때문에 찍소리 못하며 두려움 속에서 산다. 살아남아 일본으로 돌아온 유키 외의 7명은 모두 실종되었는데, 정황상 차차가 도쿠가와 가의 며느리가 된 후 조선에서의 못되먹은 행실을 숨기기 위해 유키를 시켜 몰살한 모양.

소영주지만 오이치가 딸의 신변보호를 위해 하츠를 시집보냈다.

아자이 나가마사의 동생으로 오이치가 하츠를 시집보내면서 시누이 겸 사돈이 되었다.


3.1.3. 가신[편집]


노부나가가 죽지 않은 세계이니 가장 수혜를 입어야할 듯하지만, 우에스기 정벌 등으로 간간히 언급되다 허무하게도 경인왜란 직전 원역사보다 7년 정도 더 살고 병사한다. 때문에, 이 세계에서도 노부나가를 이은 일본의 2인자는 히데요시와 이에야스다. 임해군은 오다에게 신립은 시바타와 비슷한 성격이라고 설명한다.

시바타와 마찬가지로 경인왜란 발발 이전에 병사한다. 시바타와 니와를 등장도 없이 병사 처리한 것은 오다 사망 이후 일본의 판도를 너무 복잡하지 않게 히데요시 vs 도쿠가와의 구도로 단순화하기 위함인 듯.

오다가의 시동에서 호위무사로 승진했다. 오다가 식음을 전폐하고 칩거할 때에 유일하게 오다를 만날 수 있을 정도의 측근. 오다가 일본으로 피하지 않고 동래성에서 죽기로 결심했을 때에도 야스케와 함께 오다의 곁을 지킨다. 할복하는 오다의 목을 베어주고 오다의 시신을 화약으로 폭파시킨 뒤 자신도 할복한다.

오다가 혼노지에서 사망하지 않았기에 원 역사와 달리 추방당하지 않고 오다의 가신으로 남았다. 임꺽정스모 및 술 먹기 대결을 벌였다. 대결은 결국 무승부. 오다가 조선에 친정한 뒤에도 오다의 호위를 맡고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보내는 오다의 마지막 서신을 들고 오도리 기병을 상대로 무쌍을 펼치며 동래성 포위망을 탈출한다. 탈출 도중 부하도 모두 잃고 낙마한 채 단신으로 좌수영까지 도착해서 홀로 등선군 9명을 베어 죽인 뒤 임꺽정과 다시 한번 결투를 벌이고 결국 임꺽정에게 패해 자신의 고향을 추억하며 사망한다.[132][133] 의외로 일본어는 임꺽정보다도 유창하지 못한 듯하다.[134]

역사의 변동의 영향으로 1583년에 전사하지 않았다. 오다가 임해군에게 나카가와 휘하의 2,000명 병력을 지휘하도록 하며 요리키로 파견한다. 그러나 사실상 지휘권은 나카가와에게 있으며 임해군을 호위 겸 감시하는 역할.

역사의 변동으로 1586년 사망하지 않았다. 대구성 공략 도중 조선군의 18근포에 맞아 중상을 입은 뒤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한다. 이로써 오다 가를 떠받치는 다섯 장수 중 히데요시를 제외한 넷은 모두 사망.

나카가와 키요히데의 아들이자 노부나가의 사위. 대마도 수비를 맡고 있다. 조선군이 절대 나타날 리 없다고 생각하며 와키자카와 함께 매일 술과 기생에 빠져 지낸다. 기생과 동침하던 중 조선군이 대마도를 기습하자 나체로 뛰쳐나오다가 등선군 도왜병 서아지에게 베여 사망한다.[135] 오다는 이 사실을 듣고 분노하여 히데마사의 영지를 모두 몰수한다.

노부나가의 직신이지만 히데요시에게 파견되어 전라도 방면군에 종군한다. 전주성 공략 도중 전사한다.

오다 노부나가의 젖형제[136]로 논산 전투에 참전한 왜군 별동대 8만의 총대장으로 빠른 속도로 진격해서 조선왕을 잡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논산 전투에서 패배한 후 강을 건너 도망치다 전사한다. 젖형제인 그가 죽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군이 그의 장례를 치뤄주지 않고 수급만 벤 뒤 불태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 노부나가는 멘붕하고 광기에 휩싸인다.

안토니우 다 실바가 이끄는 갈레온 용병대에 감관으로 동행했다. 갈레온 용병대가 경기수영군에게 격파되면서 조선 측에 생포되었으나 주인공은 남만선단이 사략선이라는 증거를 숨기고 해적인 것으로 하여 선장들을 처형하기 위해 일부러 그의 생존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다. 남만선 선장들이 그의 생존을 알았다면 자신들이 사략선이라는 증거로 내세웠을 것이기 때문.


3.2. 하시바 가 → 도요토미 가 → 하시바 가[137][편집]



3.2.1. 본가[편집]


혼노지에서 노부나가가 죽을 뻔했을 때 고니시의 조언으로 원군을 이끌고 도착해 노부나가를 구했기 때문에 노부나가 정권의 사실상 2인자가 되어 있다. 노부나가에게 대륙 침략의 준비를 하라는 명을 받고 규슈 전역을 다스리는 대영주가 되어 실제 역사처럼 히젠 나고야에 성을 쌓고 동원 체제를 세우고 있다. 한편 오이치와 차차를 남몰래 사랑하고 있으며, 차차가 조선으로 시집갈 때 속상해하다 노부나가에게 한소리 듣기도 했으며 차차를 구해온답시고 조선 원정 전 조선 정보망을 모두 날리는 뻘짓을 벌인다.

조선원정이 시작되고 전라도에서 개고생하는 것도 모자라 동생과 조카 등 혈육들이 죄다 전사하거나 부상당하게 되자 차라리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을 당할 때 그냥 죽게 내버려뒀으면 이꼴은 안 당했겠다고 노부나가에 대한 불만이 무르익는다. 심지어, 조선과 명나라 원정을 미친 원정이라고 깐다!
가까스로 합류한 자신에게 위로의 말은 고사하고 한심하다 욕하고 충언도 안 듣고 끝까지 아집을 부리는 노부나가에게 실망감과 원한을 품고, 결국 마지막엔 노부나가를 배신, 일본에 돌아가자마자 바로 노부나가가 돌아온 것처럼 속여 오사카 성에 들어가 노부나가의 차남 오다 노부카츠를 제압하고 일본의 정권을 잡는다. 실제 역사처럼 천황에게서 관백의 자리를 얻고 고노에 가의 양자로 들어간 뒤 성을 도요토미로 교체한다. 하지만 정권을 잡은 이후 권력에 집착하여 온갖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결국 조선의 보복원정에서 패배. 조선에 끌려가 처형당한다. 실제 역사와 달리 노부나가 밑에서 계속 2인자로 굴러야 했고, 노부나가 사후 잠깐이나마 1인자가 되었지만 그 후에 벌인 잘못된 판단들로 스스로 몰락을 자초하고 조선에 끌려가 처형당하는 원 역사보다 훨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기껏 일본의 1인자가 되어놓고 권력유지에 혈안이 되어 조선과의 화친을 추진하지 않고 대결구도를 유지하다 내부 분열만 키우고 조선이 원정할 빌미를 제공해 결과적으로 쓰시마와 이키에 이어 규슈까지 조선에게 넘겨주고 홋카이도는 일본의 지배권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일본의 영토마저 줄어들게 되었다. 주인공은 현실 역사에서 히데요시가 벌인 짓 때문에 히데요시를 쳐죽이려는 목표를 굳게 가진다. 경인왜란의 피해를 직접 받은 조선측 인물들은 히데요시를 쳐죽이려는 주인공의 결정에 별 의문을 품지 않지만, 일본측 인물들은 조선이 히데요시의 목에 집착하는 걸 의아해하기도 한다. 협상을 유리하기 위해서 높게 부르는 뻥카라고 생각했을 정도.

히데요시의 동생. 히데요시 휘하에서 전라도 방면군으로 참전한다. 전주성 공략 도중 400m 거리에서 대조총에 저격당해 중상을 입고 의식불명에 빠졌으며,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한다.

히데요시의 양자. 히데요시 휘하에서 전라도 방면군으로 참전한다. 전주성에서 열기구를 목격하고 요괴나 기계장치는 아니고 날짐승인 것 같다는 의견을 낸다. 그 후 군량 수집대를 끌고 나갔다가 사망한다.

히데요시의 양자이자 후계자. 전주성 공략 중 야습을 지휘했으나 조선군 방어에 깨지고 본인도 대포에 맞아 즉사한다.

본래 히데요시의 본처 네네의 오빠 키노시타 이에사다의 5남으로, 원역사에서는 후일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양자로 들어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되는 사람이나 이 세계관에서는 경인왜란 도중 모든 양자를 잃은 히데요시가 새로운 양자로 들이고 후계자로 선포한다. 다만 명백히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인 오다 히데노부의 후견인 명목으로 천하인이 된 히데요시가 몇 년 만에 히데노부는 뒷전으로 만들고 히데토시에게 천하인 자리를 물려주려는 모습을 보이자 모리 가 등 다이묘들이 반발한다. 그러나 조선의 보복원정이 시작되고 히데요시가 구로다 요시타카의 말에 넘어가 도쿠가와 히데야스를 새 양자로 들이는 바람에 끈 떨어진 신세가 되었다.

남편 히데요시가 조선에 잡혀가 처형당하자 역사대로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된다.

히데요시의 어머니. 역사대로 1592년 사망. 이항복의 계책대로 조선군이 죽은 그녀를 모독하자 히데요시는 격분한다.


3.2.2. 가신[편집]


어릴 적에 동래에 살며 무릉도 출신 선비[138]에게 유학을 배우며 자라 한국어에 능통하고 일본인치고 유학에도 꽤 능숙하며 조선인들의 생활과 사고방식을 잘 알고 있다.[139] 바뀐 고니시가 히데요시에게 노부나가 주변 가신들에 간자를 심을 것과 혼노지 발발 때 당장 천하인이 되기보다는 오다에게 충성을 다해 세력을 키우라는 조언을 하여 오다가 혼노지에서 죽을 위기를 넘겼으니 일본 역사가 바뀌게 한 결정적인 인물.[140] 경인왜란, 을미동정 시기 전반에 걸쳐 일본 최고의 조선 전문가로 활약하며 온건파의 목소리를 냈지만 결국 주군 히데요시를 지키는 데에 실패한다.
조선으로 압송된 뒤 주인공은 참수형을 선고하지만, 왜인임에도 조선어, 조선문화, 성리학에 능통하면서 왜란기 일본 정세에 빠삭하다는 점 때문에 정철이 처형을 미룰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을미동정록이 완성될 때까지 참고인이 되어 집행이 연기된다. 결국 7년간 경인란록, 을미동정록, 왜국도지, 신장록, 수길록, 행장기[141] 등 십여 권의 서적 집필에 참여했다. 정철이 사망한 뒤에 주인공은 그동안 고니시가 뉘우치는 모습을 감안하여 사형을 철회하고 마포에 건설 중인 성당 공사장에서 노역할 것을 명령한다. 독실한 천주교도인 고니시 입장에서는 성당 건축에 참가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영광으로 생각하여 눈물을 흘리며 감사를 표한다. 원역사와 달리 고니시의 가족들은 하카타에서 사위 종의지가 잘 보살폈다.[142] 이후 1612년 마포 대성당에서 노역을 하다가 발을 헛디뎌 15m 높이에서 추락사한다. 향년 54세로, 원역사보다 12년이나 더 살았다.

실제 역사대로 고니시 유키나가와 앙숙이며,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온건파 고니시와 달리 강경파의 입장을 대변한다. 경인왜란 중 고니시와 함께 전라도 전역에 종군하던 중 정무수(정기룡)과 일기토를 벌여 무승부한다. 전라도 전역의 보급이 끊겨 히데요시군이 경상도로 철수할 때, 후위를 맡는 바람에 다른 히데요시군 이상으로 기아에 시달렸다는 묘사가 나온다. 아마 소설 세계의 구마모토 성도 기아에 대비한 방책이 철저하게 되어 있을 듯.
을미동정 때는 본거지의 휘하 병력들을 동원하지 않은채로 오사카에 집결해 있는 사이 조선이 침공해오는 바람에, 휘하 병력을 이끌고 나설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구마모토 성이 특별히 공성하기 힘들었다는 묘사조차 없다. 그래도 끝까지 히데요시에게 충성하며, 아즈치 성에서 다시 정기룡과 일기토를 하게 되고 이번에는 자신의 창을 정기룡이 날려버려 겨우 목숨만 건져 도망친다. 그 후 마지막 결전 때 패색이 짙어지자 히데요시를 탈출시키고 신가리가 되나 히데요시가 결국 붙잡혀 헛수고한 셈이 되었다. 단신으로 수십 명의 조선군을 쓰러트리며 날뛰다가 조선군의 일제사격에 화살을 6발이나 맞은 후에야 제압되어 생포되는 등 끝까지 용장다운 모습을 보였다. 본인도 결국 한양으로 끌려와 히데요시와 함께 개선식의 구경거리가 되었으며, 히데요시와 함께 책형을 당한다.

총 500척에 달하는 조선 침공군 제7군의 사령관. 실제 역사에서는 군 사령관은 커녕 거기에 빌붙어가는 중소 다이묘 레벨이었는데 히데요시의 빽으로 크게 출세했다. 그러나 히데요시 빽으로 벼락출세했기에 직위에 비해 대우가 좋지 못하고 본인도 그것을 알아 공을 세우는 데에 혈안이 되어있다. 7군을 이끌고 거제도에 상륙하려던 중 이순신의 함대와 조우, 대패하고 막판에 이순신을 노려 저격을 시도했지만 남만갑을 입은 이순신은 총알을 맞았음에도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 막판에 가덕도로 도망을 치는데, 거제도 쪽에서 접근하는 수군 방선들을 보고 쫄아서 배에 있는 군량이나 화약까지 처분하지 못하고 허겁지겁 도망치는 바람에 결국 미역과 솔잎을 먹으며 연명하게 된다. 생사도 불확실하고 히데요시 빽으로 벼락출세한 놈이라서 다른 일본 장수들에게 멍청하다고 가루가 되도록 까인다. 간신히 일본군 선박을 해안에서 만나 탈출에 성공하지만 모든 왜군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노부나가도 원 주군인 히데요시한테 보내버리라고 한다. 어떻게든 노부나가의 눈에 다시 들기 위해 경상우수영 진포들을 육지에서 공격하는 임무를 맡지만 이미 이순신이 전 함대를 거제도로 옮기고 청야전술을 실시한 덕분에 개미새끼 한마리 남아있지 않아 원하는 공을 못 세우고 있으며, 원균을 아주 싫어하게 되어 열심히 갈구고 있다.
결국 공을 하나도 세우지 못하고 좌천당하듯이 후방인 대마도로 보내져 방어를 맡으며 조선군이 올 리도 없다고 생각하고 나카가와 히데마사와 함께 술잔이나 기울이고 있다. 이 와중에 주방 하인이 눈치 없이 미역 안주를 내놓자 분노해서 술상을 엎는 개그신도 선보인다. 만취해서 기생과 동침하던 중 조선군이 이즈하라에 상륙하여 같이 술 먹던 히데마사는 조선군에게 죽고, 자신은 부하 400명과 함께 간신히 산으로 도망한 뒤 이번에는 미역 대신 더덕으로 연명하며 조선군이 철수할 때까지 버틴다. 대마도인에게 식량을 털어 게릴라전을 하려고 하지만, 가끔 잡는 대마도인들은 식량을 소지하고 있지 않고 조선군 때문에 사냥도 힘들어서 초근목피로 견뎠다. 왜군이 대마도를 재점령한 후 오다는 이 사실을 듣고 분노하여[143] 와키자카의 영지를 모두 몰수하고 추방령을 내린다. 덕분에 조선을 미리 떠나서 죽지는 않았다. 히데요시가 천하인이 된 이후 추방되었던 와키자카를 다시 등용하여 히젠에 2만석의 영지를 내린다. 조선의 일본 원정에서 아와지시마를 방어하다가 이순신에게 격파당한 후 도망갈 수 있었음에도 이순신과의 싸움에 지쳐서 투항한다. 주인공은 와키자카를 놀려먹기 위해 미리 와키자카를 생포하면 미역과 더덕만 먹이라는 명령을 내리는데, 이덕형이 와키자카 한 명에게만 그러는 것은 귀찮다는 이유로 포로가 된 왜장 모두가 미역, 더덕만 먹는 신세가 된다. 고니시와 달리 전쟁기간 내내 패배하기만 해서 전범행위를 저지를 수조차 없었기에 처형당하지 않고, 개선식에서 조리돌림 당하며 모욕만 당한 후 일본으로 석방되었다. 원역사에서는 이순신과 여러번 전투한 덕에 한국에서는 나름 인지도가 있지만, 작중에서는 업적도 없고 이순신에게 깨진 여러 잡장 중 하나가 되었다. 3부에서 나온 바로는 그래도 에도 막부로부터도 석고를 받아 다이묘 중 하나로 남았고, 후손들은 이순신 같은 위대한 영웅에게 패배한 것인 부끄러운 게 아니며 그런 이순신에게 질지언정 계속 대항한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나름대로 칭송하고 있다.

  • 하라다 노부타네[144]
남원성 전투에서 일번창을 노리고 성벽을 오르다가 조헌의 도끼에 맞아 뚝배기가 깨져 사망한다. 남원성은 함락 위기였는데 노부타네가 전사하자 왜군들이 모랄빵이 나서 바로 노부타네의 시체를 들쳐 매고 퇴각하여 남원성이 함락되지 않을 수 있었다. 가토는 유능한 무장이 허무하게 전사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노부타네의 머리에 박혔던 도끼를 가지고 있다가 조선에서 철수한 후 하라다 가에 건네준다. 하라다 가에서 보관하던 이 도끼는 을미동정 중 조선군이 다시 접수했고 조헌에게 돌려준다.

전라도에 상륙한 왜군 선봉장 중 하나. 이후 살아남아 전라도를 탈출한 후 논산 전투에 참전한다. 안코쿠지 에케이와 시마즈 이에히사 등 대다수의 지휘관들과 함께 빠른 속도로 진격하여 조선 왕을 잡으려는 총사령관 이케다 츠네오키의 편을 들면서 신중론을 편 고니시를 비웃는다. 하지만 조선군의 강력한 저항에 충격을 받으며 전투 중 비격진천뢰에 맞아 전사한다. 이 세계관 최대의 피해자 중 한명으로 원역사보다 거의 30년 일찍 죽은데다 칠본장의 필두라는 명예까지 잃게 되었다.

경인왜란 당시의 나이는 18살. 죽은 친구의 아들이지만 히데요시가 친아들처럼 아꼈기에 자신이 두 아들을 데리고 전라도에 종군할 동안 가장 안전해 보이는 오다군에 종군하도록 한다. 그러나 논산전투에 참여했다가 포화로 인해 중상을 입고 고니시에 의해 간신히 구조된다. 5년 후 규슈 방어를 맡으나 조선의 규슈 침공 중 부마 이면에게 생포당한다.

무식한 히데요시 대신 히데요시 휘하의 모든 행정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본국의 마에다 도시이에에게 노부나가의 지시를 전달하는 일을 하고 있었으며 히데요시가 지어낸 노부나가가 철수를 결정했으므로 수송선을 보내라는 거짓 명령을 마에다에게 전달한다. 원래 세계에서의 군사적 삽질 없이 행정업무만 봐서 유능한 행정관으로만 기록될 듯 하며 히데야스의 변호로 목숨을 건지고 영지도 잃지 않으면서 대체역사의 수혜자가 된다.

실제 역사처럼 히데요시의 책사로써 경인왜란 때는 전주성 공략에 실패한 히데요시가 적절한 타이밍에 경상도로 철수할 수 있게 진언한다. 그러나 1595년 조선의 일본 정벌 때에는 이항복과 회담하여 조선의 요구조건을 들은 후 히데요시의 광기를 그대로 두면 모두 공멸뿐이라는 것을 직시하고 호소카와 부자, 후루타 시게나리와 손잡고 일부러 히데요시에게 극단적인 대책을 진언해 민심을 잃게 만들어 망하는 길로 이끌어가고 있다. 히데요시에게 자신이 오사카 방어를 맡을 테니 후퇴하라고 진언하여 히데요시를 보내놓고 바로 조선군에 항복하고 오사카 성을 이순신에게 넘긴다. 또한 아들 구로다 나가마사를 설득해 도망치던 히데요시를 붙잡게 한다. 본래 영지인 히젠은 조선 직할령으로 몰수되었지만 조선군에 협력한 공으로 아소유광이 받은 히고 지역 일부를 분봉받아 영주 지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일본국왕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만력제에게 보내는 사신으로 명에 가게 된다. 아시카가의 권위가 너무 낮아서 공경들 중 아무도 아시카가를 일본국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선택된 것.

도쿠가와와 함께 일본 내부 치안관리를 맏는다. 이후 조선정벌이 실패하고 돌아온 히데요시를 지지한다. 을미동정 최후의 결전인 아즈치 성 전투 때 성에 남아 생사불명이 되었다.


승려 출신으로 종군중이며 논산 전투에 참가한다. 총사령관 이케다 츠네오키의 편을 들어 빠른 진군을 지지하였으며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가 된다. 별로 중요한 왜장이 아니라 살려둘 가치가 없기에[145] 주인공은 어째서 승려가 전쟁에 나서냐며 한 번 비아냥거린 뒤 참수한다.

  • 슌스케
원균의 호위무사. 원균이 일부러 많이 먹여서 자신보다 더 비대한 몸집으로 키웠다. 원균군이 건주위에게 궤멸당할 때 비대한 몸집을 보고 원균으로 오해받은 것인지 원균 대신 집중사격을 받았고 자기 뒤에 엎드린 원균을 구하기 위해 일부러 엎드리지 않고 버티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한다. 원균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한 것을 보면 원균이 나름대로 잘 대해준 듯. 얼굴에만 화살 3발을 맞아 처참한 몰골로 죽은 탓에 신원을 알아보기 어려워 조선군은 슌스케의 시신을 원균의 시신으로 오인했고, 원연이 원균의 시신이 아님을 알아봤음에도 원균의 시신이 맞는 것 같다고 위증한다. 원균은 임해군처럼 인지도가 높거나 국민적 공분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뼈만 발라내서 조선으로 가져오기로 한다. 덕분에 원균은 또다시 살아남았고 슌스케의 해골이 강무관에 전시되게 되었다.


3.3. 도쿠가와 가[편집]



3.3.1. 본가[편집]


실제 역사에서처럼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 그렇다 보니 노부나가 면전에서도 전쟁에 회의적인 의견을 보이지만 구박만 들었다.[146] 일본을 두고 명나라 땅을 노리는 노부나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편으로, 현재 자신이 (실제 역사처럼) 에도 지역으로 전봉되면서 대륙 침공 전쟁에 출정하지 않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현재 마에다 토시이에와 함께 본토에서 병참지원과 치안을 담당하고 있으며 히데요시와 함께 일본의 2인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전쟁이 벌어지자 일본의 잘못을 모두 임해군이 꼬드겼다고 떠넘기고 임해군을 조선에 넘기고 현재 일본이 빼앗은 영토를 돌려줘 조선에 화의를 제안할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노부나가가 죽으면서 자신을 배신한 히데요시에게 복수하기 위해 히데요시에게 남긴 유언과 똑같은 '천하인 자리를 넘길테니 맏손자 히데노부만 보살펴 달라'라는 유언을 이에야스에게도 남겨, 히데요시와 격돌하게 될 줄 알았으나 유언장을 갖고 가던 야스케가 임꺽정에게 패해 죽음으로써 노부나가의 유언장은 주인공 손에 들어갔다. 조선의 여왕이 되기를 포기한 차차가 증오하는 히데요시에게 복수도 할 겸 차라리 이에야스의 며느리가 되어 일본의 여왕이 되리라 결심하며 주인공도 차차에게 노부나가의 유언장을 들려 일본에 보내주어 두 가지 명분을 얻게 되었다.
1595년 조선의 일본 보복원정이 시작되자 하카타 상인들과 사카이 상인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조선 측과 간접적으로 접촉하며 히데요시의 원군 파병 명령에 일부러 시간을 끈다. 히데요시가 이에야스를 회유하기 위해 차남 히데야스를 자신의 양자 및 후계자로 삼겠다고 했으나 그럼 그놈은 내 아들이 아니라며 히데야스와 의절하고 이제 내 장남은 3남 히데타다라고 선포한다. 호소카와 후지타카가 고요제이 덴노에게서 히데요시 토벌의 조칙을 받아내자 이제 와서야 히데요시와 싸우겠다고 입장을 확실히 밝힌다. 하지만 조선군과 직접 접선한 후에도 히데요시군과의 싸움에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그대로 오이치가 있는 아즈치 성으로 직행해 전쟁 이후의 일본을 장악하는데 필요한 전력과 명분을 확보한다. 전쟁이 끝난 후 원역사대로 정이대장군 직을 아시카가에게서 넘겨받지만, 명에서는 여전히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일본 국왕으로 인정하고 있어서 실권은 얻었지만 원역사에서처럼 완벽하게 일본을 장악하지는 못한다. 그래도 조선에게 넘어간 규슈와 중립지역으로 선포된 홋카이도를 제외한 나머지 일본 영토만이라도 완전히 장악할 기회를 엿보는 중이다.
이 세계에서는 시대의 흐름을 잘 읽어 마지막에 웃는 최후의 승자, 또는 외세와의 전쟁 와중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인 자기보신적인 기회주의자로 엇갈린 평가를 받게 될 듯.[147] 조선의 침공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않는데, 조선은 선제공격하지 않고 공격당할 시에 반격만 하는 나라이기에 선제공격만 안하면 문제없다고 생각하며 일본 장악만 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다.[148] 그 대신 진서대장군 아소 고레미츠에게 사돈을 맺자고 제의하여 서서히 규슈에 다시 영향력을 뻗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주인공이 죽기 직전 제의한, 건주에서 망명한 아민과 그 부하들을 받아들이고 그대신 낭인들을 건주와 조선에 팔아넘기는 거래에 응한다. 그리고 포악한 심성을 고치지 못하는 차차를 폐위하라는 명을 내린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3남. 15살 때 막내동생 고우가 히데야스를 먼저 차지하는 바람에 찬밥이 된 10살 연상의 차차에게 강간당하고, 차차가 이 한 번의 관계로 아들 나가마루를 낳게 된다. 이후 아버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여자에게 강간이나 당하는 한심하고 못난 놈이란 소리를 듣는다. 형 히데야스가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어버려서 아버지 이에야스에게 의절 당함에 따라 도쿠가와 가의 후계자로 공인된다. 을미동정 후 초소카베 토벌에서 명목상의 사령관을 맡으나 실제 지휘는 하지 않았다. 10살이나 연상에 덩치도 크고 성격도 드센 차차에게 질려서 아담한 체구와 순한 성격의 시녀와 한 번 동침했으나 투기가 심한 차차가 난리를 친 후 그 시녀를 내보낸다. 하지만 차차가 나가마루 이후로 아이를 더 낳지 못하자 이에야스의 명으로 오다의 딸이자 임해군의 전 측실 아이히메를 측실로 들여서 2남 2녀를 더 낳는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천하인이 된 후에도 차차에게 꽉 잡혀살았다. 아버지의 뜻으로 차차가 쫓겨난 후에야 기를 펴고 살았을 듯. 유폐된 차차가 죽은 후 아이히메를 정실로 올리고, 아이히메가 낳은 도쿠가와 이에미츠에게 쇼군위를 물려준다.

  • 도쿠가와 나가마루
차차가 히데타다를 강간해서 낳은 아들.[149] 아버지 히데타다가 정이대장군에 오른 뒤 계승 서열 1순위가 되었으나, 할아버지 이에야스가 차차의 막나가는 행보에 질려 차차를 내쫓고 나가마루의 계승권도 박탈한다.[150] 이후 차차와 떨어져서 각각 다른 절에 유폐되었다고 한다. 어미 차차가 죽은 후에는 승려가 되어 죽을때까지 조용히 살았다고 한다.


3.3.2. 마츠다이라가[편집]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남. 차차가 일본에 간 후 재기하기 위해 히데야스와 결혼할 계획을 세웠으나 오이치의 3녀이자 차차의 막내동생 고우와 정략 결혼한다. 그러나 동생 히데타다가 처형 차차에게 강간당해서 차차가 아들을 낳아서 입장이 붕 뜨게 되었다. 구로다 요시타카의 계책에 따라 히데요시가 히데야스를 자신의 양자로 삼고 후계자로 하겠다고 공표하지만 아버지 이에야스는 그럼 히데야스는 내 아들이 아니라고 의절해버려 전쟁이 조선과 이에야스의 승리로 끝나면 버려질 신세로 보인다. 오이치 곁에 있다가 조선군에 투항하는 사절로 조선군에 온다. 이후 집에 복귀하지만 도쿠가와 성은 빼앗기고 아버지의 본래 성인 마츠다이라 성을 쓰게 된다.[151]

오이치의 막내딸. 오이치는 그녀를 도쿠가와의 차남에게 시집보냈다. 그런데 큰언니 차차가 시숙 히데타다를 강간해서 임신하고 아들을 낳는 바람에 입장이 붕 뜨게 되었다.

슈르하치의 차남. 슈르하치의 아들 중 가장 유능해 차기 건주 국왕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러나 부친 슈르하치와 일족들이 누르하치에게 숙청당하자 혼자만 살아서 빠져나와 휘하 기병 1천기를 이끌고 조선에 귀순한다. 조선 측에서는 받아들이자니 건주와의 분쟁이 귀찮고 돌려보내자니 죽을 것이 뻔해서 아민의 일족을 기병 전력이 절실한 일본에 용병으로 파는 대신 일본에서 그 대가로 왜노를 받아와서 왜병이 절실한 건주에게 보상으로 주기로 한다. 이에야스는 이를 무척 반가워하며 아민에게 서녀를 시집보내 사위로 삼고 '마츠다이라 이에토시'라는 이름을 내려주고, 사나다령이였던 우에다 영지와 누마타 영지 6만 5천석을 내려 다이묘로 삼아 일본 최초의 여진계 다이묘가 된다.


3.3.3. 가신[편집]








3.4. 무로마치 막부[편집]



3.4.1. 아시카가 본가[편집]


처음에는 조선에게 동맹을 제의하지만 조선이 오다와 사돈을 맺은 것을 알고 조선과의 연락을 끊는다. 원역사의 히데요시와 달리 노부나가가 정이대장군직 자체에는 탐을 내지 않아서 한동안 정이대장군으로 남는다. 노부나가 사후에도 원역사보다 히데요시의 권력이 불안정했기에 정이대장군직을 뺏기진 않고 허수아비가 되어 히데요시와 말벗을 한다. 조선이 침공해오자 호소카와 후지타카와 함께 피신한다. 전후 협상 중 조선의 구상대로면 도쿠가와에게 모든 직책을 뺏길 예정이었으나 양호가 뜬금없이 일본 국왕은 명나라의 책봉을 받은 아시카가라는 것을 강조하는 바람에 무로마치 막부는 껍데기나마 유지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정이대장군 직은 도쿠가와에게 뺏겼지만 대신 진서대장군 직을 받게 되었고 명에서 책봉 받은 일본 국왕 자리도 유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실권을 지난 도쿠가와와 달리 영지도 다자이후 한 곳으로 축소되어 실권은 없게 되었다. 1597년 병사하고 아소 고레미츠에게 자리를 물려준다.

  • 아소유광(아소 코레미츠)→아시카가 코레미츠[152]
아소씨 당주. 히데요시의 규슈 정복 이후 아소씨가 영지를 잃자 가신들과 함께 조선으로 망명한다. 1582년생 꼬맹이라서 본인이 직접 결정한 것은 아니고 가신들이 결정하여 데리고 온 것이며 아소씨가 망하지 않았다는 상징적 의미 정도만 가지고 있다고 한다. 본인이 애 아빠이기도 한 주인공이 꼬맹이가 가족도 다 잃고 도망쳤다는 데에서 측은함을 느껴 망명을 허가한다. 아소유광의 망명을 계기로 규슈에서 아소씨 계열 도왜들이 수천명 규모로 넘어오기 시작한다. 조선으로 망명했으므로 원역사처럼 살해당할 일은 없을 듯. 조선에서 자라며 종친가의 아내를 얻었고 조선 조정에 인맥을 많이 쌓는다. 그리고 을미동정 이후 영지 분배에서 히고 영주가 되어 규슈 중부 1/3을 담당한 대영주가 된다. 단 본인의 직할령은 크지 않고 대부분의 땅은 구로다 요시타카 등 조선에 협조한 영주들에게 분봉된다. 조선은 아소유광을 아시카가 요시아키에게 양자로 들여서 차기 일본 국왕으로 삼도록 압력을 넣는다. 결국 1597년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병사한 뒤 진서대장군이자 일본 국왕에 오른다. 원역사에서는 어린 나이에 사망했지만 여기서는 형식상이나마 일본의 지배자가 되었으니 바뀐 역사의 수혜자인 셈. 조선으로부터 매년 저화 3만석을 원조 받고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수작에 넘어가 6살 된 장남을 이에야스의 손녀 센히메와 결혼시키겠다고 하여 주인공이 잠시 노했으나 차남을 조선 왕실의 여인과 결혼시키고 차남을 후계자로 삼도록 공작을 벌이기로 한다.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아들. 1살 때 아버지와 헤어져 절에서 자랐는데 26살이 되어 갑자기 다시 나타났으며, 정황상 도쿠가와의 조종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 측에서는 아소 코레미츠를 요시아키의 양자로 들여 후계자로 만들 계획이기에 만일 요시아키가 요시히로를 후계자로 지목하면 암살할 계획이다. 결국 조선의 엄중한 경고를 들은 뒤 다시 교토로 돌아갔다고 하며 2대 진서대장군은 아소 고레미츠가 된다.

  • 도쿠가와 센히메
히데타다가 아이히메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진서대장군 아소 고레미츠의 장남과 불과 6살의 나이에 정략 결혼한다. 이런 어린 나이에 결혼시킨 이유는 조선에서 고레미츠의 아이들이 장성하면 당연히 후계구도를 관리할 것이므로 아직 혼사를 생각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에 선수를 쳐버린 것.


3.4.2. 사나다 가[편집]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싸움 때문에 더 이상 일본에 있기는커녕 가문의 존속도 난감해지자, 그냥 자신이 영원히 일본 땅을 뜨는 대신 가문을 장남 사나다 노부유키에게 물려줘 존속시킨다는 약속을 노부나가에게 하고 아들 사나다 노부시게와 함께 차차의 호위병 명목으로 가문의 병사 200명을 거느리고 조선에 온다. 주인공은 수성의 달인[153]인 그가 조선으로 온 것에 기뻐하며 '사마유'라는 조선 이름을 내려주고[154] 정3품 별장직에 일본에서 귀순한 무사들의 부대인 왜별기 지휘관직을 내린다. 그 후 전주, 대구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 축성 계획을 세우다가 해서부 야인들이 불온하다는 소식을 들은 주인공의 명으로 왜별기 전 부대를 이끌고 부여주 삼성부로 이동, 권율과 함께 삼성부 방어를 성공적으로 해내고 있다.[155] 이 양반이 출세했다는 소식이 일본에 퍼지면서 '조선에 가서 공을 세우면 출세할 수 있다더라!' 같은 인식이 생겨 시마즈 토시히사를 필두로 오다 노부나가와 척을 지거나 원수가 된 이들이 바다를 건너 조선에 귀순한다. 무자호란이 끝난 시점에 이런 도왜들의 수가 무려 2천여 명에 달한다고. 이후에는 임금의 사돈이 되고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재차 주인공에게 마음속으로 충성을 맹세한다. 경인왜란 당시에는 정3품, 훈련도감 소속 별장으로 대구성에서 오다군과 전투를 펼치고 있다. 일본군 부대에 이에야스가 참전하지 않은 것에 유감스러워 하는 중. 주인공은 일본 역공시 규슈를 손에 넣으면 사마유를 규슈지역 총독으로 임명할 계획인데 하필 차차를 아내로 줄 생각을 했다. 다행히 차차가 그 전에 일본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고 주인공도 차차가 하라구로인 걸 깨달았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원역사의 도요토미 가문 꼴 날 뻔 했다. 을미동정 이후 사나다 가에게 분고 영지가 분배되게 되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규슈의 대영주가 되게 되었다.

사마유의 장남이자 사노부의 형. 도쿠가와와 원수가 된 아버지와 동생이 조선에 귀순하면서 일본에 남아 집안을 잇게 되었다. 을미동정 이후 아버지 사마유가 규슈에 영지를 분봉받았고 동생 사노부는 조선의 부마라서 영지를 계승할 수 없기에 사마유의 후계자가 된다.


3.4.3. 호소카와 가[편집]


오다에 충성하는 아들과는 달리 스스로를 무로마치 막부에 충성한다고 정체성을 세운다. 1595년 조선의 일본 침공 때 조선에서 보낸 후루타 시게나리, 히데요시를 손절하려는 구로다 요시타카와 손을 잡고 내부에서 히데요시를 무너트리기로 한다. 조선군이 교토로 침공해오자 고요제이 덴노,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모시고 빠져나갔으며, 덴노를 인도하라는 조선 측의 요구는 거부했지만 그 대신 히데요시를 조적(朝敵 : 조정의 적)으로 선포하는 덴노의 조칙을 받아내어 천하에 공개한다. 히데요시 패망 이후에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다시 쇼군으로 받들기 위해 평화협상에 참가, 명나라 양호의 도움을 받아 아시카가를 쇼군(정이대장군)은 아니지만 일본국왕 진서대장군 직에 복귀시키는 데는 성공한다.

부인 가라샤가 반역자 아케치 미쓰히데의 딸인지라 더욱더 노부나가에게 과잉충성하며 선봉을 자청한다. 하남벌 전투에서 선봉대 4,000명을 이끌고 밀양을 향해 진군하던 중 신립의 오위군과 마주쳐 대패한다. 병력 대부분을 잃고 사나다 노부시게에게 생포당할 뻔 했으나 신가리(후위)가 되어 남은 부하들 덕분에 목숨만 건져서 간신히 탈출한다. 여기서 병력 대부분을 잃었으나 오다에게 새로운 병력을 받은 후 토다 카츠타카 휘하에서 종군한다. 단밀현 전투에서 이번에야말로 공을 세우기 위해 자청하여 우익을 맡았으나 권율의 북병과 왜인여진들의 매복에 당해 대패, 이번에도 신가리가 된 부하들 덕에 목숨만 건져 도망간다. 그러나 노부나가에 의해 군의에서 쫓겨난다. 간신히 다시 들어오긴 했지만 제일 말단 자리에서 눈치만 보고 있다. 경인왜란이 끝난 뒤 아내 가라샤를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보낸다. 그러나 가라샤가 히데요시에게 강간당한 뒤 오사카 성에서의 화재로 사망하고 스승인 센 리큐가 억울하게 사형당하면서 히데요시에게 깊은 원한을 품는다. 조선에서 돌아온 후루타 시게나리, 아버지 호소카와 후지타카, 구로다 요시타카와 공모하여 히데요시를 내부에서 무너트리기로 한다. 조선군이 오사카를 점령하자 공개적으로 조선군과 동맹임을 선언하고 아즈치 성에 있는 히데요시와 부하들에게 노부나가의 진짜 유언장과 히데요시를 역적으로 선포하는 덴노의 조칙을 공개한다.

아케치 미츠히데의 딸로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아내.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보내지지만 만취한 히데요시에게 강간당하고 이후 발생한 오사카성의 화재로 사망한다. 명백하게는 나오지 않으니 원역사의 행보를 생각해보면 히데요시에게 강간당한 후 자살하기 위해 불을 지른 것으로 보인다.


3.4.4. 타치바나 가[편집]


동래성 포위전에서 원군으로 온 서득운 휘하 경상좌병영군 15,000명을 5,000명의 병력으로 격파하고 하남벌 전투에서 초소카베군과 함께 복병을 맡아 오위 본진을 쳐 오위군을 붕괴시키는 데에 큰 공을 세운다. 오위군이 패퇴한 후 사나다 노부시게를 잡을 기회를 얻지만 그의 충성과 용맹에 감탄했다며 공격하지 않고 가도록 놔준다. 이에 노부나가는 가볍게 질책하지만 큰 문제를 삼지는 않는다. 명예와 신의를 중시하는 성격으로 노부나가가 조선 백성들을 약탈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도 실행하지 않았다. 그 후 조선의 반격으로 양산성에서 주인공이 이끄는 조선 친정군에게 포위되지만 조선군의 포격은 참호를 파서 피하고 부하 1,500명을 잃었으나 조선군도 300명 죽인 후, 포위망을 돌파하는 등 사흘 동안 조선군의 진군을 저지하며 양산성을 빠져나간다. 주인공과 이항복도 이제 왜군이 상대적으로 유리한 단병접전의 비중이 더 커질 것이라고 우려하는 중.
노부나가가 죽고 왜군이 전면적으로 철수하는 중에도 스스로 철수를 최후까지 엄호하는 신가리 역할을 맡아 권율의 북방군을 지연전으로 괴롭힌다. 주인공은 무네시게에게 목숨을 빚진 사노부가 "무네시게를 되도록 생포해 회유해달라"고 부탁하여 고려해보라고 말했으나 권율은 그 말을 꼭 생포해야지 죽이면 안된다는 어명으로 오해하고 강하게 몰아치지 못해 무네시게의 지연전에 큰 피해를 입고, 주인공은 이를 알고 내리갈굼을 본의 아니게 일으킨 것을 후회하면서 저항이 심하면 그냥 죽이라고 명한다. 그러나 끝까지 살아남아 바닷가까지 밀려났으나 주인공이 사노부와 이덕형을 보내 히데요시가 노부나가를 배반하였으니 조선과 손잡고 히데요시를 쳐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는것이 어떤가 하고 마지막 회유를 하자[156] 결국 회유를 받아들이고 조선에 항복한다. 귀순 후 유씨 성을 받는다. 조선의 일본 침공에 참전하는데 신의의 상징이었던 그가 조선에 귀순했다는 사실에 일본군들은 큰 혼란에 빠진다. 5년 후 일본 보복원정 때 귀국하여 일본에 남겨뒀던 아내 다치바나 긴치요와 재회하고 조선군의 앞장을 서서 히데요시 토벌전을 벌인다. 을미동정 이후 영지 분배에서 치쿠고 영지를 받게 된다. 양응룡의 난 정벌 원정에 500명의 병력과 함께 자원한다.

타치바나 무네시게의 부인으로 실제 역사처럼 어느 남자 못지않은 여걸이다. 남편이 조선에서 실종된 후 영지와 홀로 남은 자신을 노리는 히데요시의 야욕을 잘 막아내고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남편과 사이가 끝까지 안 좋았으나, 여기서는 조선에서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돌아오자 부부간의 정을 다시 회복한다.

무네시게의 동생.


3.4.5. 기타[편집]


히데요시가 보낸 첩자에 의해 반역사실이 들통 나고 혼노지의 변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류조지가를 모시던 중신이었으나 히데요시의 신하가 되어 가토와 함께 전라도를 공격한다. 을미동정 때는 일찌감치 조선군에 항복하여 조선이 병합한 원래 영지 대신 아소유광의 히고 영지 일부를 분봉 받아 영주 지위를 유지했다.


3.5. 친 조선파 세력[편집]


조선과 거래를 한 기타 세력들. 을미동정 때 조선 측에 유리하게 움직여 히데요시 몰락에 기여한다. 일본 입장에서는 배신자지만 대신 저마다 영지와 조선과의 교역권 등의 실리를 얻었기에 어찌 보면 바뀐 역사의 수혜자들이 되었다.


3.5.1. 시마즈 가[편집]


시마즈가 4형제의 큰형으로 당주. 경인왜란 이전부터 오다의 조선 원정 실패를 예상하고 조선에 보낼 원정군 대부분을 자신의 직속 병력이 아닌 임시로 모집한 잡병과 낭인들로 구성해 보내서 전쟁이 끝난 후에도 전력을 온전하게 유지한다. 동생 요시히로가 조선에서의 패배 책임으로 발언권을 잃고 이에히사가 조선에서 포로가 되면서 시마즈 가의 통제권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조선의 일본 보복원정 때 남규슈 3국의 영유권을 조선에게 인정받고 조선군과 동맹하여 시코쿠 방면을 공격한다.

시마즈가 4형제의 둘째. 토시히사를 할복을 위장해 도주시키자고 제안한다. 경인왜란에 종군하여 대구성 포위군에 종군 중 동생 토시히사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대구성에서 사자가 빠져나가는 것을 묵인해달라고 하자 이에 응하여 김성일이 대구를 빠져나가도록 봐준다. 조선 원정에서 패배한 책임으로 발언권이 축소되었다고 한다. 조선의 보복원정 때 조선과 동맹한 시마즈 군을 이끈다.

시마즈가 4형제의 넷째. 형제들 중 유일하게 생모가 달라서 세 이복형과 껄끄러운 사이이다. 오다에게 항전하자는 셋째형과는 달리 항복파로 셋째형과 갈등하지만 그렇다고 형이 죽도록 놔두지는 않은 것을 보면 형제간의 우애는 어느 정도 있는 듯. 경인왜란에 종군하여 논산 전투에 참가한다. 속전속결을 주장하는 총사령관 이케다 츠네오키의 편을 들며 전투에 나서나 전세가 불리하자 조선군에 투항한다. 형이 조선 장수가 되었으니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을 걸어본 듯 하고 주인공도 남도사의 공로를 생각해 살려주기로 한다. 1595년 조선의 일본 침공때 풀려나 형제들과 합류한다.


3.5.2. 우에스기 가[편집]


강원도 방면군 대장. 영지인 에치고가 일본에서도 유명한 산지라서 강원도에서도 적응을 잘 할 것이라는 이유로 강릉에 파병됐다. 오다에게 강제로 복속된 처지여서 아무런 충성심이 없기에 별로 전쟁에 진지하게 임할 생각이 없다. 강릉을 점령한 뒤 길을 모른다는 핑계로 전혀 진격을 하지 않을 생각이다.[157] 일단 강릉을 점령한 후 자신이 독실한 불교 신자임을 내세워 서산대사와 면담을 청한다. 서산대사에게 자신은 전쟁을 할 생각이 없으며 조선이 승리할 경우 무사히 퇴각하도록 허락해줄 것과 조선군과 서로 공격하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강릉의 주민들을 보호해주겠다고 한다. 이후 세자의 명을 받고 자신을 인질로 삼으며 백성들을 구하려는 강항의 의기에 감복하여 제안을 받아들이고 물론 사대부와 어느 못난이를 빼고 안 갔다는 것이 함정이지만 그를 곁에 두면서 성리학을 배우는 중이다. 서로 약속한대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강릉에 조용히 머물러 있다가 무사히 돌아간다. 주인공은 강항을 우에스기에게 딸려 보내 우호관계를 유지하게 했으며, 후일 조선의 일본 역공 시 가능한 한 조선에게 유리하게 행동하겠다는 약조를 맺는다. 1595년 조선의 일본 침공이 벌어지자 히데요시의 파병 명령에 대해 일부러 태업을 하며 조선과의 약속을 지킨다.

우에스기가의 가신.


3.5.3. 다테 가[편집]


그 독안룡이라 불리던 다테 마사무네로, 경인왜란에서 전투병 3,000명과 일꾼 5,000명을 이끌고 연해주에 상륙한다. 북방의 조선군 주력이 내려오지 못하도록 붙잡아두는 것이 목적. 자신이 원정군에 참가할 줄 모르다가 뒤늦게 배를 만들었기 때문에 마르지 않은 생나무로 만든 배가 많아 오는 길에 많은 저질 배가 침몰하고 2,000명을 잃는다. 오는 길에 함대가 표류하여 숲 밖에 없는 오지[158]에 상륙했고[159] 자신들의 위치를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며 배의 상당수가 파손되어 돌아갈 수도 없다. 은을 5만 냥이나 가져왔다고 하고 정치가 뛰어난 다테 마사무네의 성향 상 싸움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빈둥대면서 거래나 좀 하다가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전쟁이 터진 줄 모르고 지나가던 조선 교역상(동고로의 후손)을 우연히 만나 해삼위로 가는 해로를 알게 되었다. 이 해로를 따라 현실의 나홋카까지 남하한 후 그곳에 성채를 건설한다. 성채를 지은 뒤 연해주 관찰사 정효신에게 접촉하여 '우리는 교역을 하기 위해 왔으며 전쟁이 일어난 줄 모르고 있었으니 교역을 해달라'고 한다. 주인공은 전쟁을 몰랐다는 부분은 거짓말이 분명하다고 생각하지만 다테 마사무네의 성격상 전쟁에 진지하게 임할 생각이 없는 것은 사실이라 판단하고 잘 하면 일본 역공 때 동맹으로 쓸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일단 무장해제만 시키도록 지시한다. 정효신이 사절로 보낸 정문부에게도 '조선과 싸울 뜻이 전혀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고, 조선 국왕에게 연공을 바칠 테니 연해주를 개간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다. 전쟁 상황에 대한 정보를 얻을 방법을 정효신이 차단해 버려 어쩔 수 없이 정효신 말을 잘 들으면서 농사도 짓고 호랑이 사냥도 하며 잘 지내고 있는 중이다.
전쟁이 끝났지만 연해주 땅을 버리고 돌아가는 것이 아까워, 본인은 동생의 반란을 염려해 일본으로 가지만 부하들을 남겨두어 연해주 영지를 관리할 예정이다. 추운 연해주에 있으면서 조선 온돌의 효능을 깨닫고 온돌기술자를 데려가고 싶어 하는데 여기엔 잘하면 그 안에 조선 도공을 슬쩍 끼워서 데려갈 속셈이었지만 인력 유출을 우려한 주인공이 그냥 왜인들에게 온돌 기술을 가르쳐 줘서 보내라고 해서 실패한다. 여기에 일본으로 귀환하는 일행에 동생의 반란 진압을 위해 여진 기병 1천기를 딸려 보내는데 후에 일본 본토로 반격할 때 조선의 편에 서기로 약조한다. 혹 일이 틀어지더라도 손해는 안 나도록 친조선 세력인 오도리나 왜인여진이 아니라 부잔타이쪽 병력을 차출했다. 부잔타이가 건주위로 탈출하려다 자멸한 뒤 울라부 포로를 2,000명이나 받는데 일본으로 떠날 것이라는 말을 듣자 이들이 폭동을 일으켜 절반이나 도망쳐버렸고 결국 원래 계획대로 1,000명만 데리고 떠난다. 동생의 반란을 진압한 후에는 일본 유일의 대 조선 무역창구(물론 히데요시 몰래 밀수하는 것이다)로 돈을 긁어모으고 있다. 1595년 조선의 일본 침공 때에도 히데요시의 파병 명령에 대해 일부러 태업을 하며 시간끌기를 한다. 을미동정 후 조선과의 교역 독점이 끝난 데다 조약의 내용상 수군을 전부 도쿠가와에게 몰수당하여 큰 손해를 본다. 이를 메꾸기 위해 인력파견 사업을 하며 다시 돈을 벌고 있다.

연해주 공략당시 파견 무장으로 다테와 함께 했다. 하지만 연해주에 죽치고 장사나 하기로 한 다테의 결정에 별 딴죽을 걸지 않은 것을 보아 다테 편에 선 듯.

연해주의 다테 왜택을 책임지는 관수로 파견되어 있다.


3.5.4. 기타 세력[편집]


오우치 세력을 합하여 친조선파 다이묘로 시마즈가를 억제하고 있었으나 그의 사망 이후 류조지 세력은 몰락한다. 주화사 앞에서 노부나가를 칭찬하며 아는 바를 설명해준다.

고니시군의 군감으로 논산 전투에 참전했고 조선의 포로가 된다. 주인공은 후루타가 특별히 민간인을 해치지 않은데다가 현대에서 재미있게 읽었던 효게모노를 생각하고 살려주기로 한다. 세력도 약하고 군재도 별 볼일 없지만 이쪽 세계에서도 이미 센 리큐의 제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어서 일본 사교계에서의 인맥을 사용하기 위해 남겨둔 것. 일본 역공이 시작된 후 오사카로 잠입하여 반 히데요시 다이묘들을 규합하라는 임무를 받는다. 후루타는 이를 성실히 수행할 계획이지만 조선 왕에게 충성심이 생겨서 그런 것은 아니고 히데요시가 스승 센 리큐를 죽인 원한에다가 히데요시를 이대로 뒀다간 일본 전체가 불바다가 될 것이 뻔하기 때문. 을미동정 후에는 일본으로 돌아갔으나 조선 국왕과 친하다는 점 때문에 오다 나가마스와 함께 조선에 사신으로 자주 오곤 한다.[160]


3.6. 반 조선파 세력[편집]


조선과 대립하는 기타 세력들.


3.6.1. 모가미 가[편집]


노부나가의 명으로 아이누를 토벌한다. 조카인 다테와 대립중이나 울라부 기병들을 데려온 다테에게 밀리고 있다. 하지만 다테의 군재가 깡통이기에 우세는 점하는 중.

다테 마사무네의 동생. 형이 조선에서 돌아오지 않는 틈을 타 반란을 일으키나 야인기병을 데려온 마사무네에게 진압당하고 처형당한다.

장남 다테 마사무네를 원래부터 싫어했는데 다테 마사무네가 조선에서 실종되자 둘째 마사미치를 옹립한다. 마사미치가 마사무네에게 처형당하고 미워하던 장남에게 연금당한 후 친정 모가미가로 돌려보내진다.

  • 가키자키
모가미가의 명령으로 에조치를 관리하는 신하. 을미동정 후 강화협상에서 에조치의 중립지대화가 결정되었지만 가키자키가 관리하던 교역소는 유지를 허락받았다.


3.6.2. 오토모 가[편집]


오토모 소린의 아들로 오토모 가 당주. 동래성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전사한다. 이후 당주 자리는 15살짜리 아들 오토모 요시노리가 물려받았으나 오토모 가는 전쟁 다음 해에도 혼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명종 때의 규슈 원정 때 피해를 크게 입어 반조선파 다이묘가 되었다. 하지만 오다가 살아남아 막부가 궁지에 몰리자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만나게 해준다.

오토모 요시무네 사후의 오토모 가 당주.


3.6.3. 해적[편집]


무라카미 해적을 이끄는 다이묘. 원역사에서는 동원병력 300명의 별볼일 없는 다이묘였으나 여기서는 노부나가 편에 일찍 붙으면서 무라카미 해적 전체의 통솔권을 받아 전선 300척을 이끌 정도로 성장한다.[161] 도도 다카도라 아래에서 종군 중. 자신이 도도 다카도라나 이순신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며 이순신의 수급을 바다에 빠트리지 않기 위해 갈고리와 갈퀴를 준비하는 등 김칫국을 마신다. 이순신의 유인에 속아 300척을 이끌고 한산도 앞바다까지 따라온 후 조선 수군의 포위망에 걸려들고 구루지마 휘하의 전선 300척은 정발이 일부러 보내준 3척을 빼고 전멸한다. 뒤늦게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형님이 현명했다고 후회하던 중 서림에게 330m거리에서 조총으로 저격당해 오른쪽 눈을 관통당해 사망한다. 형 도쿠이 미치유키도 을미동정 때 조선 수군에 패해 사망한다.

일본 최고의 수전 전문가로 와키자카의 패전 소식 직후 해상 보급선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면서 "와키자카의 패인은 적을 얕보면서 아군 진형이 얇아지는 학익진을 선택한 것. 즉, 적을 얕본 것이므로 자신이 나간다면 대군을 이용한 반월진으로 일거에 조선 수군을 격파하겠다."라고 호언장담하며 오다의 명으로 전선 300척을 이끌고 출전한다. 그리하여 재보급을 마치고 서평포 수비병들을 구출하던 50척의 이순신 함대를 발견한다. 니혼마루와 텟코센의 힘으로 조선 수군을 격멸하겠다는 헛꿈에 빠졌지만 거북선에게 니혼마루와 텟코센이 깨져나가는 모습을 보며 대경실색한다. 결국 수송부대인 제9진의 호위를 명목으로 0:64의 교전비를 낸 채, 자연재해로부터 전력을 보존했다. 그 후로는 정면 대결을 피하고 수송선 보호에 주력한다. 그러나 이순신이 이끄는 남도 연합함대가 부산 앞바다의 제해권까지 빼앗아 개전 후 2달 만에 왜군이 잃은 함선이 1천 여척이고 바다에 빠져 죽은 병력이 7만 명에 부산항을 사용하지 못하고 멀리 울산까지 우회해서 물자를 하역하는 등 그나마 보존한 전력도 점차 잃어가고 있다. 그래도 아직 부산에 300여 척의 휘하 함선이 남아 있으며, 부산포 방어에 집중하다가 전쟁이 끝나자 이순신의 추격으로 큰 피해를 입으면서 겨우 귀국한다. 1595년 조선의 일본 보복 원정 때에도 수군 총사령관이 되지만 도쿠이 미치유키가 해전에서 패하고 오사카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 본대와 대결하게 되자 히데요시를 배신하고 자기 함대만 이끌고 도망친다. 그러나 이순신의 명을 받은 정발의 갈레온 함대가 본거지를 급습, 세력을 모두 잃게 되고 조선에서 전범으로 자신을 넘기라고 요구한 것을 알게 되자 잠적해버리고 이후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재석은 나름 유능한 인물이니 신분을 세탁하고 에도 막부에서 일했겠거니 하고 추측하지만 근거는 없다.

크리스찬 다이묘로 고니시와 함께 전라도를 공략하지만 배신(陪臣)인 고니시를 무시한다.

전라도 공략 당시 참가하여 고니시에게 싸움을 재촉한다.

전라도 공략 당시 뱃길을 안내했다.


3.7. 기타 왜장[편집]


조선 침공을 위한 선박 건조 총책임자로 등장한다. 특히 텟코센이나 니혼마루같은 조선 수군과의 결전용 선박 다수도 그의 책임하에 건조되었다. 와키자카의 7군에 이런 결전 선박들을 증원해 주자고 제의했으나 노부나가에 의해 묵살되었다. 실제 역사와 달리 후방 업무에 전념하는지라 이순신은 안 만나게 되었으니 다행인 인물. 대신 이순신이 박살 낸 만큼의 선박들을 다시 건조해야 할 책임이 있으니 엄청난 과로에 시달릴 것이다. 게다가 엄청난 수의 선박을 건조하느라 일본의 산림자원이 거의 결딴난 상황이라 노부나가가 추가 선박 건조를 명하면 그때는 정말로... 게다가 노부나가가 보충 병력을 이끌고 조선으로 오라고 명하여 결국 이순신을 만날 운명이 되었다. 사타케 요시시게의 경주 방면군에서 수군을 맡지만 감포 바닷가에 판옥선 20척이 정박한 것을 보고(사실은 빈 배나 다름없는 상태) 지레 겁을 먹고 주저앉는다.
이후 여러 상황으로 경주 공략이 어려워지며 [162] 울산에 머물다가 오다의 편지를 통해 이순신 함대를 공격할 수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다. 본인은 다시 편지를 보내 고사하려 했으나, 어쩔 수 없이 부산으로 내려가고 부산포 방어를 담당하는 구키의 함대를 제외한 모든 함선들을 점검하며 전투를 준비한다. 그리고는 이순신이 깔아놓은 덫인 줄도 모르고 한산도 앞바다로 700척의 함대를 이끌고 달려오지만 완벽하게 덫에 걸려든다. 격침 800척, 노획 53척, 조선군에게 잡힌 포로 1만, 조선군이 참수한 수급 5천 급이라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고 자신도 어립선이 포격을 당해 노부나가가 준 황금부채도 잃어버리고 부하들이 몸으로 막은 덕분에 겨우 살아난다. 그 뒤 황금부채는 이순신이 주인공에게 진상을 하였고, 노부나가가 처음에는 그를 죽일 기세였으나 히데요시의 변호로 다카토라를 규슈로 다시 보내 후방 지원이나 계속하라는 명을 내린다.

하남벌 전투 이후 약 2만의 별동대를 이끌고 상주로 향한다. 상주로 가던 중 왜인여진 교스케를 이용한 권율의 속임수에 당해 북병들이 매복한 단밀현으로 들어가 버린다. 단밀현 전투에서 호소카와 타다오키와 하치스카 이에마사에게 전투병 대부분을 넘기고 소수의 전투병과 일꾼들만 데리고 후방에 남아 있다가 황진의 기병대가 본진에 난입하였고 부하들이 그를 살리기 위해 분투했으나 결국 황진의 남만도에 목이 베여 사망한다.

단밀현 전투에서 토다 카츠타카 아래에서 종군. 좌익을 맡았으나 권율의 매복에 당해 대패한다. 호위무사와 갑옷을 바꿔 입고 간신히 탈출한다. 그러나 노부나가에 의해 군의에서 쫓겨난다. 간신히 다시 들어오긴 했지만 호소카와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

논산 전투에 참전하여 난전 중 전사한다.

을미동정 때 다테, 우에스기와 함께 히데요시를 배반한다.


3.7.1. 모리 가[편집]


오다에게 굴복하기 전 조선에 도움을 청하지만 주인공은 불가능하다 생각하고 이를 무시한다. 이후 경인왜란 당시에는 본인이 조선으로 오지는 않았으나 조선 침략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히데요시가 히데노부의 후견인을 명목으로 천하인이 된 뒤 히데노부를 뒷전으로 만들고 양자 히데토시를 후계자로 선포하자 이에 반발하여 쿠마가이 모토나오를 조선에 밀사로 보낸다. 하지만 조선과 동맹을 맺을지에 대해 우물쭈물하여 결국 조선과의 동맹은 실패한다. 1595년 조선의 일본 침공이 시작된 뒤 어느 편에 설지 고민만 하다가 항복할 시기를 놓친다. 심지어 히데요시가 감시를 위해 보낸 가메이 고레노리를 살해해 놓고도 조선에 붙을지 히데요시에게 남을지 우물쭈물만 하고 있을 정도. 결국 히데요시가 조선군에 생포되고 도쿠가와가 조선군과 강화를 맺을 때까지도 입장을 못 정하고 조선군과 전투 상태를 유지하다가 얼떨결에 최후의 히데요시파 다이묘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고 120만석의 영지 중 고작 13만석을 빼고 다 몰수당해 군소 다이묘가 되었다.

모리 데루모토의 지시로 조선에 밀사로 들어와서 조선이 히데요시를 공격할 시 모리 가는 조선 편에 서겠다는 뜻을 전한다. 천주교 신자이며[163] 경인왜란에 참전하지 않았는데 일부러 조선의 심기를 덜 거스를만한 인물로 선정해서 보낸 것.

모리 데루모토의 숙부로 경인왜란 당시 4군을 이끌고 전라도를 공략한다. 전황이 악화되자 오다의 초토화 명령이 내려지기 전부터 대규모 약탈을 시작하여 주인공의 살생부에 이름을 올린다. 을미동정 때는 시마즈 가의 주선으로 목숨을 보전해주는 조건으로 조선에 투항한다. 그런데 이건 시마즈 쪽에서 합의도 없이 마음대로 내세운 조건이었기에 조선 측에서는 히데요시,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원래 계획대로 책형에 처한다.


3.8. 일본 황실[편집]


히데요시가 고노에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서 관백이 되는 것을 허락했다. 조선군의 침공으로 교토가 함락되기 직전 호소카와 후지타카가 모시고 모처에 피난시켰으며,[164] 히데요시를 역적으로 선포하는 칙명을 반포하여 조선군과 반 히데요시 세력에게 명분을 실어준다.


3.9. 기타 명사/상인[편집]


후루타 시게나리호소카와 타다오키다도 스승.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신이 불안정해지자 다도로 달래보려 하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이후 오사카 성에서 발생한 화재로 많은 인질이 사망하자 이에 대해 히데요시를 비난했고 분노한 히데요시에게 참수 당한다. 그래도 원역사보다 4년 더 살았다.

오사카의 거상. 을미동정 2년 전인 1593년 사망.

이마이 소큐의 아들.

오사카의 거상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협력관계. 일찌감치 조선측에 붙은 하카타 상인들과 협조하여 조선 측에 서기로 한다. 구로다 요시타카가 오사카 성을 조선 측에 무혈항복 시킨 후 오사카에서 조선군에 대한 물자 보급을 도우며 이에야스에게 현재 상황을 전달한다.

오사카의 거상.


3.10. 조선 순왜[편집]


하성군의 망나니 아들로 왈패들을 이끌고 도성을 휩쓰는 유명한 양아치였다. 경성군은 하성군과의 친분으로 인해 방관하고 있었지만 주인공은 빙의한 뒤로 처벌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차차의 계락에 넘어가 차차와 화간하려던 것이 그만 차차의 시녀를 강간해버리게 되었고 이에 벌할 기회를 계속 노려 온 주인공에게 사형당할 뻔했다가 차차가 구해준다. 이후 차차와 혼인하게 되면서 차차에게 꽉 잡혀 살게 된다. 차차에 의해 하루 종일 무예 수련만 하며 주변에서는 망나니가 개과천선했다고 생각하지만 본성은 그대로였다. 무자호란에서는 민간인 학살, 강간에 경계근무 도중 부하들이 술을 퍼마시다가 기습을 당해서 몰살당했지만 부하들은 죄다 시체까지 불타버린 덕분에 술을 마셨다는 사실이 감춰지고 본인도 원래라면 경계 소홀로 참수되어야 하지만 그 날 배앓이를 하냐고 약을 타간 것이 확인되고, 또 배앓이 탓에 술을 마시지 않았기에 병에 걸린 것이 정상참작의 이유가 되어서 장창병으로 강등된 것으로 끝났다. 일본의 침공이 임박해 오자 주인공이 하성군을 일본에서 빼오기 위해 버림패로 대신 보내서 일본으로 간다.
일본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딸 아이히메와 2번째로 결혼한 뒤 오다가 '지금 조선 국왕은 왕 자격이 없어.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명나라를 치자. 니가 왕이되면 누가 상관하리?'라는 사탕발림에 넘어가 괴뢰 조선 국왕이 되어 순왜의 대표주자가 된다. 그 도중 하성군의 가노들과 문객들을 끌어들여 간첩질을 시켜 왜란 초기 왜군이 승승장구하는 발판을 만든다. 한동안 괴뢰왕 노릇을 했으나 오다에게 오위군이 조선의 유일한 정예병이라는 허위정보를 전해 신뢰를 잃었고, 심복이었던 국경인에게 속아 다시 조선군에게 붙잡힌다. 경인왜란이 끝난 후 주인공은 명에서 능지형 기술자까지 초빙해 도성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1천 토막을 내어 죽였고, 살점으로 젓갈을 담가 전국으로 보낸 뒤 머리와 뼈만 남은 몸통은 도성에 내건다. 어찌나 참혹하게 죽였는지 아무리 역적이라지만 처벌이 너무 잔인하다는 상소까지 올라올 정도였다. 나중에 살점은 강에 고기밥으로 던져지고, 뼈와 머리는 모조리 태워버렸다고 한다.[165] 1, 2부 통틀어 최악의 발암 캐릭터이자 인간 말종으로 다른 악역인 차차, 원균도 털끝만큼이나마 인간미가 느껴지는데, 임해군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는 잔혹하며 살인, 강간을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혐오스러운 인간성을 보인다. 결국 차차, 원균은 나름대로 성공하거나 적어도 목숨만은 건지는데 임해군은 조선 역사상 가장 처참하게 처형되는 것으로 대가를 치렀다.

주인공 왈, 최고의 일본 수군 장수이자 2부 최고의 개그 캐릭터. 니탕개의 난 때 이일과 함께 여진족 여인 포로들의 목을 베고 머리를 짧게 깎아 수급이라고 보고하다가 이순신의 보고서와 내용이 어긋나는 것이 발각되어 삭탈관직되고 북방으로 귀양을 가서 눈 쓰는 신세가 된다.[166][167] 이 시기에 동상으로 발가락 3개를 잃는 등 고생하여 이순신과 주인공에 대해 증오를 품는다. 이후 하성군이 일본으로 떠날 때 주인공은 "쓰레기를 버린다"는 느낌으로 호위로 삼아 일본으로 보내버렸는데, 고생하던 원균은 화려한 일본 문화를 즐기며 나름 행복해하고 특히 히데요시와 아주 친한 사이가 된다.[168] 경인왜란이 시작되자 당장 살아남기 위해 임해군에게 찬동해 순왜가 되었는데, 고니시에 의해 동생 원전이 살해당하고 수급이 돼서 돌아오자 멘붕하고 고니시를 증오하게 된다. 이후 몇몇 전투에 참가하나 지휘 능력도 바닥인데다 눈치를 봐서 일본에 붙을지 조선으로 투항할지 계속 간만 봤기에 싸우는 족족 참패, 순왜들이 숙청당할 때 히데요시의 빽으로 혼자 살아남아 일본으로 탈출한다. 절친 히데요시가 천하인이 된 후 소 요시토시의 실종으로 공석이 된 일기도 도주가 되어 1만석 다이묘가 되었는데[169] 조선 공신이 되고 싶었지 왜국 영주가 되고 싶던 게 아니라면서 향수병에 걸려 술과 기생에 빠져 도주의 임무를 방기하고 거동이 어려울 정도의 고도비만이 된다. 이 시기에 자서전인 <왜지일록>이라는 책을 쓴다. 을미동정이 시작된 후 규슈로 도망간 뒤 몇 차례 전투를 지휘하지만 매번 참패하며 죽음의 공포로 인한 스트레스로 살이 급격히 빠진다. 마지막에는 건주위 병력에게 궤멸당하는데, 비만이었을 때 원균보다 더 비만인 호위무사 슌스케가[170] 원균으로 오인받아 집중사격을 당해 죽었고 살이 잔뜩 빠지고 일반 병사 갑옷을 입은 원균은 또 살아남아 일반 하급 사무라이인 척하며 건주위의 포로가 된다. 조선군은 화살 3발을 맞아 얼굴이 뭉개진 슌스케의 시신을 원균의 시신이라고 결론내려 뼈를 발라내서 강무관에 전시하기로 했고 원균은 또다시 살아남는다. 건주위 병사들도 늙은 원균은 노예로 쓸 가치가 없다고 저화를 받고 조선군에 팔아버렸다. 대남도에 노비로 끌려가기 직전 동생 원연을 만나 정체가 발각당하나, 원연이 저주만 퍼붓고 신고는 하지 않아서 또다시 목숨만은 건졌다. 대남도에 가서 모토야마(원산)라는 가명을 쓰며 정준석의 코끼리 똥을 치우는 노비가 되었다.[171] 정준석에게 갈굼당하며 맞거나 코끼리 똥에 처박히는 등 북변에서 만큼이나 고생한다. 이후 죽을 때까지 코끼리 똥만 치우다가 1608년 68세 나이에 늙어죽었다.
3부 시점에서 김만중이 집필한 역사소설 정씨남정기에 다이묘 출신 노비 캐릭터 원산으로 등장하는데 재석은 일본에 모토야마라는 다이묘는 없으니 가상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본가인 원주 원씨 가문에서는 호적에서 제명되었고 아들 원사웅이 세운 미주 원씨 가문에서도 비난받으며 양쪽 가문 모두에게 버림받았다. 덕분에 원래 역사처럼 미화될 일도 없을 것 같은데 대신 이 세계에서는 원균명장설이 아닌 스스로 역적의 탈을 쓰고 적 진영 내부로 잠입하여 의도적 태만과 졸렬한 지휘를 통한 트롤링으로 왜군들의 발목을 잡아 조선군 승리에 기여하신 경인왜란과 을미동정의 숨겨진 비운의 영웅 원균이라는 원균첩자설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 의외로 히데요시에게는 능력면에서 고평가 받는데 조선을 대비한 전략 등을 제시한 것에서 원균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 꽤 있다보니 히데요시도 원균의 말이 옳았고, 그의 말을 들었어야 한다며 한탄하다보니 독자들의 반응도 원균이 왜 이리 머리가 좋냐는 의문을 드러내곤 한다. 이 때문에 후대에는 어쩌면 장수로서는 무능해도 책사로서는 유능했다는 개드립이 나올 수도 있다. 한편 원균의 자서전 왜지일록이 공개되었는데 살고싶다는 자기 변명이 가득한 책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일부 호사가들에게는 어느정도 동정여론이 나오고 있다.
가끔 원균 미화물 아니냐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은근히 정감 가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원균의 활약들은 물론 악행이 맞긴 한데 임해군과 달리 동생의 죽음에 슬퍼하는 등 종종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초반에는 욕심 때문에 일을 벌인 반면 경인왜란 중반을 넘어가면 어려운 상황에서 꾸역꾸역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하는 모습이 주로 나오기 때문. 임해군과 달리 무고한 조선인들을 살해하는 묘사도 나오지 않아서 반감도 덜했고 지휘관으로서는 무능 그 자체지만 어차피 작중의 원균은 적장이라서 원균의 졸렬한 지휘는 발암은 커녕 카타르시스가 된다. 그래서 독자들은 '겐킨'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있다. 은근 입체적인 캐릭터인데, 처음에는 출세를 위해 노력하지만 상황이 점점 나빠지며 결국 지위나 명예를 다 포기하고 오직 생존만을 바라는 등 현실적인 기회주의자의 모습을 보인다. 모든 걸 잃은 상황에서도 죽을 수는 없다며 '삶이란 소중한 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한다. 평생 똥 푸는 노비로 살게 되었지만 이런 태도를 가진 원균 입장에서는 아무리 몰락해도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 나름의 해피엔딩처럼 보이기도 한다.[172]

하성군의 집에 문객으로 있던 중 함께 일본으로 보내졌고 하성군이 귀국한 후 순왜가 되어[173] 통역과 포로 심문을 하고 있다. 출세하겠다며 임해군에게 절대 충성한다. 대구성 포위 이후 상주로 우회 중인 토다 카츠타카 아래에서 종군 중. 잔꾀가 많아 권율이 탈영병으로 위장시켜 거짓정보를 보낸 왜인여진 교스케를 보고 뭔가 수상하다고 정확히 맞추긴 했으나 토다는 국경인이 그저 자기 공을 교스케에게 뺏기는 게 싫어 저런다고 생각하고 말을 듣지 않는다. 이후 진짜 함정이 맞았던 것으로 밝혀지자 진영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역시 내 말이 맞았다면서 자기 공을 강조하다가 빡친 토다가 그를 진영 뒤로 끌어내라고 지시한다. 토다가 쫓아낸 덕분에 죽지 않고 후퇴할 수 있었다. 하성군의 빽으로 군역을 면제받아서 군무를 잘 모른다고 한다. 단밀현 전투 대패 이후 노부나가에게 내통을 의심받아 처형될 뻔했으나, 처음부터 계략을 의심했지만 토다가 듣지 않은 것이라고 호소카와 타다오키가 변호해줘서 살 수 있었다. 이후 멍청한 임해군 대신 호소카와에게 충성하기로 한다.
노부나가가 거듭된 패배를 내부 간자 탓으로 돌리자 히데요시는 일단 쓸모없어진 순왜들을 모두 간자 혐의로 죽여 노부나가의 화를 달래고 조선과 협상해 철수하도록 간언할 예정이었는데, 호소카와는 그동안 자신에게 충성했던 국경인만은 살려주고 싶어서 하나쯤 도망가는 것이 더 그럴싸할 거라는 이유로 국경인에게 처형 예정 사실을 미리 알려줘 도망가도록 한다. 그리고 국경인은 조선에 다시 투항해도 자신이 죽지 않을 수 있도록 임해군에게 함께 탈출하자며 데리고 나가 대구성의 조선군에게 바친다. 문제는 사실대로만 말했으면 살 수도 있었을 것을, 오다는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 없었는데 임해군이 부추긴 거라고 위증을 했다. 이미 이 전쟁이 오다 본인의 계획임을 하성군이 조정에 알려줬기에 살아남을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차버린 셈. 결국 류성룡에 의해 온갖 고문을 당하고 있다고 한다. 주인공이 친국을 열었을 때는 이미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반 송장이 된 상태였다. 직접 참수되는 장면은 나오지 않으나 이항복이 임해군에게 국경인은 이미 참수되었다는 것을 전한다.

  • 이 서방
하성군의 노비. 일본에 남았다가 임해군의 협박과 회유에 넘어가 전라도에서 다른 노비들을 꼬드겨 성문을 열게 한다. 공포에 의해 했지만 결국 공을 탐하며 역적이 되어가는 인간상을 보여준다. 임해군과 국경인이 빠져나갔으니 왜장들이 간자 혐의까지 씌워버려 오다 진영에 있던 순왜들이 무더기로 효수당했다는 묘사가 나오는데 이 때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기도주이자 명목상의 대마도주.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이기도 하다. 무종 시절 일기도주로 임명된 종우마의 자손인데, 이미 대마도는 경상도에서 직접 통치하기에 명목상 도주일 뿐 실제로는 일기도만 지배하고 있다. 겉으로는 조선의 봉신이지만 사실은 오다에게 양다리를 걸친 채 조선에 대한 정보를 넘기고 있는 박쥐같은 인물이다.[174] 그래서 정벌이 끝나고 주인공도 종의지의 의도에 대해 의심하고 있는 중. 하성군이 노부나가의 침략이 확정되었음을 알린 후에는 주인공과 조선 조정은 종의지는 이제 믿을 수 없다고 판단, 전쟁이 끝난 뒤 종씨 일가를 벌하고 영토를 직접 통치할 계획이다.
경인왜란이 시작되자 고니시 휘하의 1군에 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참전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조선군이 자기 군대 코앞에서 진지를 구축하는 모습을 코앞에서 보고도 멀뚱멀뚱 방관하는 등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다. 아직 양다리 걸치기를 포기하지 못한 듯. 논산 전투 직전 주인공이 직접 사자로 지명해 불러들여서 조선 임금의 존재를 왜군에게 확인시켜 유인작전을 성공시키는 데 이용한다. 논산 전투 중 운 좋게 살아남아 포로가 되어 죽은 왜장들의 신원을 식별하는 일을 맡는다. 주인공이 오다 편을 든 것에 분노하여 원래는 죽여버릴 생각이었지만, 일단 전쟁을 이긴 뒤 주인공의 화가 그럭저럭 풀렸고 주인공이 일본으로 돌아간 히데요시의 동향에 대한 정보를 얻는 일을 맡겨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주인공은 살아남기 위해 애처로울 정도로 최선을 다해 정보를 모아 제공하는 모습을 보고 일단 살려주기로 한다. 일기도와 대마도는 모두 조선 직할령이 되었고 대신 하카타를 통치하는 지방관이 된다. 작중 조선을 배신한 인물들 중 유일하게 처형되거나 몰락하지 않고 호강하게 된 인물. 원 역사와 달리 고니시의 딸 고니시 마리아와 이혼하지 않았고, 외가를 자신의 집에서 보호중이다.


3.11. 일본측 유럽인[편집]


  • 호세
오다가 조선과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고용한 에스파냐 용병. 일본군에게 대구경 화포가 사실상 없는 상황이라 오다가 사들인 약 100여문의 남만포로 이뤄진 부대를 지휘한다. 휘하 병사들도 대부분 남만인들. 오다 가에 종속 관계인 다른 일본인 가신들과 달리 돈으로 고용된 입장이라 의견 표현에 한결 자유로운 편. 동래성 전투에서 남만포 공격에도 성이 파괴되지 않자[175] 반격당하면 위험하다며 후퇴했지만 오다는 별 트집 잡지 않고 후퇴를 허락하고 이후 작전에서는 포진지를 보강해달라는 요구도 순순히 들어준다. 그러나 대구성 공략전에서 조선군에 24파운드급 컬버린이 있다며 참전을 거부하자 오다가 싫으면 계약을 해지하고 보수도 식량도 안전보장도 없을 것이라고 협박하여 어쩔 수 없이 참전한다. 지속된 전투에 소모되고 노부나가가 전면 철수한 부산 전투 즈음에선 휘하 화포가 17문 밖에 남지 않는다. 그리고 노부나가가 최후 거점으로 삼은 동래성에서 조선 도감군에게 마지막 포격을 걸지만 조선 도감군이 400보 밖에서 쏜 강선조총의 탄막사격에 휘하 용병들과 함께 전멸하고 만다.

  • 안토니우 다 실바
오다 노부나가가 고용한 6척의 갈레온 함대 중 대장 격인 갈레온 아리마대의 요셉 호의 선장. 조선 수군도 중국 해군과 비슷한 수준일 거라 생각하고 별 준비도 없이 벽란도를 공격하러 온다. 그렇지만 접근하는 것이 발각되어 최호가 이끄는 경기수영군의 매복에 당하고 지나치게 복잡한 벽란도 인근 지형에서 좌초되어 본인은 전사하고 함대는 전멸해버린다. 사망한 안토니우 다 실바 외의 다섯 선장들은 해적 혐의로 참수되었고[176] 나포한 갈레온 중 상태가 양호한 3척은 포로가 된 선원들을 동원해서 조선쪽에서 일본을 공격하러 가기 위해 재사용한다. 오다는 이들의 소식이 끊기자 실패했거나 선금만 받고 튀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조선으로 갈 이주민들 중 포함된 항해사. 마르코 폴로동방견문록을 읽고 일본에 환상을 품어서 일본으로 가보기 위해 자원했다.


4. 명[편집]



4.1. 황실[편집]


명의 황제. 스승 장거정의 부정부패에 대해 주인공이 친서에서 언급하자 이를 계기로 장거정 일족을 탈탈 털고 조선 국왕은 번국의 의무를 다했다며 요청했던 각 분야 산업의 기술자를 보내주고 종계변무 문제도 해결해준다. 그러나 곧 원 역사대로 셀프 파업 모드에 들어가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장거정 고발 때 주인공은 자신에게 퍼주는 이유를 만력제의 정치적 의도[177]로 봤지만 이후 행보를 보면 그냥 별생각 없었던 것이 맞는 듯하다. 주인공이 해서부 토벌을 할 때는 오공충을 통해 무려 쌀 150만 석, 은 150만 냥이라는 거액을 조선에 원조해줘서 조선은 만 1년 8개월간의 전쟁 동안 소모한 전비를 그대로 보충하고도 돈이 남았다. 경인왜란 당시에도 전비에 쓰라며 거액을 원조하여 다시 한번 고려천자의 면모를 보여주셨다. 이후 경인왜란이 끝난 후 주인공이 왜군 포로들과 빼앗은 무기들을 조공으로 바치자 매우 기뻐하며 파업을 풀고 직접 조선 사신들을 접견, 조선에 전후 복구비 명목으로 또 거액을 원조하고 조선이 안남, 섬라와 교류하는 것도 승인해준다. 펠리페 2세는 만력제의 말 한마디에 그렇게 막대한 액수가 지원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중국이 얼마나 큰 나라인지 실감하게 되어 중국 정복 계획을 완전히 포기한다. 조선에서 바친 경인란록을 읽는 것이 삶의 낙이었는데 이를 다 읽자 비용이 얼마가 들어도 상관이 없으니 [178] 일본 보복 원정을 매일 보고받을 수 있도록 하라는 막장 황명을 내린다. 조선에서 대신 읽어보라며 보낸 서양 역사서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을미동정이 끝난 후에는 조선에서 바친 축소형 판옥선과 왜선을 호수에 띄우고 왜병 포로들을 왜선에 태운 후 실제로 사격을 해서 침몰시키는 해전 놀음에 미쳐 있다는 모양. 덕분에 실제 역사처럼 급료를 체불당한 병사들이 탈영하고 곳곳에서 반란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1598년 갑자기 조선이 왜를 정벌했으니 자신은 북원을 정벌하겠다며 무리하게 카라코룸 원정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원정군 10만은 카라코룸에 도착도 못 하고 5만을 잃었으며 이여송까지 전사하는 패배를 당하자 조선군에게 양응룡 토벌에 파병하라고 지시한다. 조선군이 대승리를 거두자 조선군 수뇌부를 불러 이를 치하하면서 주인공과 상희의 아들인 진안군에게 "네가 조선 왕위를 이어도 되지 않겠느냐?"라고 해버리는 바람에 진안군의 앞길을 확고하게 막아버리는 트롤링을 저지른다.
석성의 차남이자 석성 일족의 유일한 생존자인 석재금의 말에 의하면 석성은 언제나 만력제를 두고 '폐하는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전혀 나누어 생각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평했다고 하며, 그런 인간이기에 "황상께서 진정 얻고 싶어 하시는 건 조선 기병인데, 지금 조선에 기병을 내라고 하면 건주위를 경계한다는 핑계로 군사를 안 낼 테니 건주위를 토벌하라는 명을 내릴 가능성이 아주 크다."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석재금이 아예 '내가 생각해도 미친 소리인 건 알지만 저 정신 나간 황상이라면 (고작 조선의 기병을 자기 손아귀 안으로 집어넣겠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다'라는 말을 정여립에게 할 정도인 걸로 보아, 차후에 가만히 있던 조선과 건주위를 오직 지 개인적인 이유만으로 괜히 건드렸다가 명을 말아먹게 될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 주인공이야 경인왜란 때부터 신하들 앞에서 드러내 놓고 고려천자 드립을 쳤던 이력이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2부가 진행될수록 다른 조선인들 사이에서도 명에 대한 사대주의 콩깍지가 벗겨지면서 만력제를 안 좋게 보는 인물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양응룡의 난 진압 때도 의군으로 자원해서 참전한 사대부들이 만력제의 황제답지 않은 꼬락서니에 실망했다는 언급이 나올 정도. 정여립은 석재금의 저 말을 듣고 "배신(陪臣)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대국 황족과 중신들은 도대체 얼마나 얼간이들이기에 그런 미친놈을 제위에 그대로 남겨둔다는 말이오?"라고 아주 대놓고 씹었다. 만력제가 재미로 허구한 날 내관과 궁녀를 때려죽인다는 얘기를 듣고는 은나라 주왕, 전폐제 유자업, 후폐제 유욱 등과 만력제를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할 정도다.
그리고 끝내 건주위와의 전쟁이라는 희대의 미친 짓거리를 저질러버렸다. 결국 사르후 전투에서 참패하고 누르하치를 건주왕에 봉해준 후에도 패장들을 처형하는 등 못된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179] 주상락이 (독살로 강하게 추정되는)병사하자, 드디어 총애하던 3남 주상순을 황태자로 책봉하며, 책봉식에만 은 1,000만냥[180]을 소비하는 폭거를 저지르고, 황릉이 완성된 뒤에는 황릉 밖의 장제전을 왕궁 수준으로 만드는 등, 갈수록 등장인물들은 물론 독자들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미친짓거리를 연속해서 저지르고 있다.
그리고 3부 시점에서, 이에 대한 인과응보로 명나라는 원역사보다 비참하게 멸망하며 명나라 황족 대다수도 분노한 민중들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명의 황태자. 아버지 만력제는 주상락이 아닌 주상순을 총애하고 있어서 정치적 입지가 불안한 상태. 2부 후반에 약을 잘못 먹고 쓰러지는데 귀비 정씨의 독살 시도로 추정된다. 결국 불치병으로 인해 사망[181]했으며, 황태자 자리는 이복동생 복왕 주상순에게 넘어가 명 황제들의 계보가 달라지게 된다. 명나라가 망한 후에는 주상락의 아들인 주유교만이 생존해서 조선으로 탈출해서 대명공으로 봉해져 대를 이어가게 된다.

만력제의 후궁으로, 주상순의 친모. 태자 주상락이 쓰러진 이후 조선에 비밀리에 접촉하여 주인공의 즉위를 이유로 들어 자신의 아들을 황제로서 지지해 줄 것을 부탁한다. 당연히 주인공은 기겁한다. 결국, 사실상 주상락을 독살한 뒤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만드는것에 성공한다.
만력제가 총애하던 서자로, 만력제가 20살이 돼서야 주상락을 책봉한 원인이 된다.[182] 원래 황태자였던 주상락이 죽은 뒤, 만력제에 의해 황태자로 책봉된다. 원 역사의 태창제인 형 주상락과 달리 본인이 태창제가 되고 3부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명나라를 멸망하게 만든 마지막 황제이자 암군이 된다.[183]


4.2. 조정[편집]


그가 죽자 이를 기회로 여긴 주인공은 만력제에게 그를 탄핵하는 친서를 보낸다. 이에 만력제는 고려천자의 행보를 보이기 시작하고, 종계변무까지 해결해주며 파업을 시작한다. 장거정의 일족에게 남은 것은 어머니에게 남긴 입에 풀칠할 정도의 재산뿐이었다.

주인공인 조선 국왕에게 인삼과 은으로 뇌물을 받아먹고 이후 여진족을 정벌한 조선이 이미 목단강 유역까지 자기 영토로 인정받은 만큼 아예 송화강까지 넘겨주자고 제의하여, 여진족 상대가 귀찮았던 명 조정내에서 큰 지지를 얻어 조선이 먼저 요청한다면 송화강 유역을 조선 영토로 하사하겠다는 결정을 하게끔 유도한다. 경인왜란 후 조선이 타이완 섬까지 영유하겠다고 요청하자 서양인에게 타이완을 뺏기기보다 명나라에 충성하는 조선이 타이완을 영유하는 게 명나라 안보에도 낫다고 조선의 편을 들어 조선은 타이완까지 영유하게 된다. 원 역사에서도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에서 다른 관료들이 조선이 일본과 손잡고 명을 치는 거 아니냐고 모두 의심하는 와중에 당시 군권을 쥔 명나라의 병부상서로서 끝까지 조선을 믿고 임진왜란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조선에 원군을 파견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해서 결국 원군 파병을 관철시킨 당시 명 조정 내에서의 대표적인 친조선파 인물이었는데 명군 내 세계관에서도 조선의 영토를 늘려주는데 크게 기여한 친조선 성향의 인물로 기록에 남을 가능성이 크다.[184] 만력제의 무리한 몽골 원정이 참패로 끝난 이후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삭탈관직 후 투옥되었고 명 조정 내 최고위 친조선파인 석성의 투옥으로 조선의 입지가 나빠졌다. 이후 석성의 차남인 석재금의 입을 통해 결국 석성이 원정 실패의 책임을 모조리 덤터기 쓰고 처형당했으며, 일가족 역시 역적의 일문이라는 이유로 모두 유배지에서 혹독한 처우로 죽거나 옥사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석성의 집안 식구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은 차남인 석재금(石在錦) 뿐으로, 조선관에 당도하여 정여립의 보호를 받으면서 만력제가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들을 제공한다.

  • 이지충
정 3품 병부좌시랑. 이산해가 명에 가서 일본의 침략을 받아 지금 당장 전비와 식량이 부족하니 지원해 달라 하자 실제로 조선이 지원이 필요한지 확인하기 위해 칙사로 파견되었다. 벽란도에 와본 뒤 조선이 생각보다 번영중인 것을 보고 놀란다. 한양에 도착하자 17일동안 비변사에서 문서로 산을 쌓고 읽으며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이 요청하는 물자원조에 긍정적인 대답을 남기고 돌아간다.

무자호란, 경인왜란 당시 예부상서. 조선을 의심하여 이산해를 추궁한다.

무자호란, 경인왜란 당시 이부상서.

무자호란, 경인왜란 당시 병부상서. 조선군을 높이 평가한다.

무자호란, 경인왜란 당시 호부상서. 왜란이 터지자 조선이 내통한 것이 아닌지 의심한다.

무자호란, 경인왜란 당시 예부상서.

무자호란 당시 형부상서. 조선에게 속말주를 넘기는 것을 우려한다. 경인왜란 당시에도 유임.

장거정 일가의 몰락 당시 대학사. 장거정의 노모를 구원하고자 만력제에게 탄원한다.

무자호란 당시 공부상서. 경인왜란 시에는 석성으로 교체되었다.

대남도 개척 당시 이부상서. 대남도를 먹겠다는 조선을 비웃는다.

  • 이장춘(李長春)
대남도 개척 당시 예부상서. 조선의 확장을 우려한다.

대남도 개척 당시 호부상서. 돈을 아끼기 위해 석성과 함께 조선의 대남도 차지를 찬성한다. 하지만 만력제가 툭하면 조선에 군자금을 보내다보니 재정 지출이 많아서 조선 사신이 왔다고 하면 심장이 두근거려 청심환을 먹는다고 한다.

일본 원정 당시 이부상서. 전쟁 준비 중인 조선을 의심하며 견제할 궁리를 한다.

일본 원정 당시 예부상서. 누르하치가 공을 못 세워 한탄하는 것을 언급하며 조선을 견제하는 의도를 보인다.

양응룡의 난, 사르후 전투 당시 병부시랑. 유정과 양호, 이항복을 휘하에 두고 진압을 총지휘 한다. 요동이 건주위에게 모두 함락되자, 상관인 소대형이 충격으로 졸도하여 역할을 대신한다.

사르후 전투 당시 병부상서. 조선을 의심하는 양시교를 말린다. 요동이 건주위에게 모두 함락되자 충격으로 졸도하여 이화룡이 역할을 대신한다.

사르후 전투 당시 이부상서 서리. 이항복의 중재안을 듣자 조선과 건주위가 결탁했음을 의심한다. 건주위에 보내는 칙서로 정7품에 불과한 웅정필을 보내는 몽니를 부린다.

사르후 전투 당시 형부상서.

사르후 전투 당시 예부상서 서리. 이항복의 중재안을 다른 상서들에게 알린다.

  • 조황
사르후 전투 당시 공부상서. 만력제가 총애하는 이항복을 질투한다.


4.3. 군부[편집]


요동 총병관. 해서부와 조선을 서로 충돌시켜 양쪽을 모두 약화시키려는 의도로 복수귀가 된 니탕개의 부여주 대침공을 묵인한다. 이 탓에 조선은 부여주 백성들을 3만 명이나 잃었으나, 곧 신립이 강무관에서 교육받던 이억기·김응서·정기룡 등 능력이 뛰어난 젊은 장교들을 이끌고 가 진압하고 이후 주인공이 전쟁을 부추긴 것에 대한 보복으로 명 조정에 로비를 해서 해임된다. 허나 달자원정 실패로 인해 요동 일원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여 다시 요동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이후 건주 정벌에 반대하다가 북경으로 압송되었다. 건주 정벌 이후 양호와 함께 언제 처형될 지 모르는 상태지만 만력제가 이성량에 대해 잊어버린 것인지 목숨은 붙어있다. 그러나 자신의 왕국이었던 요동이 모두 자신의 쫄따구였던 누르하치에게 넘어가고 아들들도 모두 잃은데다 심지어 누르하치가 건주군왕 책봉까지 받았다는 사실에 분사한다.

이성량의 아들. 무자호란 당시 5만 요동군을 이끌고 조선을 돕기 위해 출병하지만 자기 아버지 이성량의 땅이었던 해서부에 조선이 손을 뻗치게 용납하지 않겠다는 속마음을 품고 있다. 그 때문에 해서부 지역을 조선이 영유할 명분을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예허 부장 부자이와 하다 부장 후르한에게 자신에게 항복하면 부족의 존속을 보장하겠다고 회유하나 이 정보를 입수한 신립이 왜인여진 기병대만 이끌고 맹추격하여 예허 부가 최후의 전력으로 아껴뒀던 2천 철기를 박살내고 예허·하다 두 부족을 섬멸해버리면서 계획이 실패한다. 물론 이여송은 이후 주인공에게 생떼를 부리지만 주인공이 '그럼 이 총병은 그 두 놈을 살려주실 생각이었소? 어쨌든 나는 사실대로 만력제께 고하고 황제의 처분을 기다리겠소.'라고 이여송이 반박할 수 없게 틀어막아버리는 바람에 그대로 물러나고 만다. 이후로는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게 하겠다는 듯 본인 휘하의 요동군을 훈련으로 빡세게 굴리고 있다고 언급된다. 본인 앞마당에서 완전히 새 된 경험이 어지간히 굴욕이었던 듯. 왜란 중엔 조선이 크게 밀리고 있지도 않고 조선 측에서 원군 파병을 요청하지도 않는 상황이라 북원과 여진족들이 후방에서 조선을 공격하지 못하게 견제만 했다. 1598년 만력제가 무리하게 명령한 카라코룸 원정을 이끌었다가 북원군의 게릴라전으로 10만 병력 중 5만을 잃고 전사한다.

원 역사에서는 척가군을 만들어 왜구 격퇴에 큰 공을 세운 명장이다. 직접적인 등장은 없었지만 장거정의 부패가 알려졌을 때 관군을 풀어 장거정을 경호했음이 드러나 삭탈관직 당한 것이 언급되며 경인왜란 즈음에 사망한다.

이여송의 동생. 일본 원정에 참전한 건주위 군사들과 함께 감군으로 출전. 요동에서 평안도로 내려오는 길에 온갖 행패를 부려 일대의 반중감정이 급상승했다고 한다.[185] 그나마 조선인 상대로는 폭행, 약탈, 강간까지 했다간 후환이 생길 수 있으므로 적당히 선은 지키지만 건주여진은 마음 놓고 괴롭힌다. 그러면서 빨리 안 내려가고 적당히 농땡이 피우지만, 이순신을 정1품 도독으로 임명하는 황명을 받은 칙사가 도착하고 그를 호위하며 일본으로 건너가야 하는 신세가 되면서 위세가 하루아침에 꺾였다. 이순신과 양호의 눈치가 보여서 직접 약탈은 안 하고, 대신 슈르하치를 빵셔틀로 만들었다. 약탈을 시킨 뒤 약탈물을 죄다 빼앗고 슈르하치 본인을 포함한 건주위 병력들에게 상습적으로 폭행을 하는 식. 그러던 중 교토 전투에서 선봉을 맡아 교토에 돌입하는데, 약탈에 눈이 멀어 경계를 소홀히 하다 3,000명밖에 안 되는 왜군에게 1,000명이 넘는 손실을 입는 졸전을 벌인다. 다행히 이여백에게 뇌물을 상납받던 양호의 변호로 이순신에게 참수되는 것은 면했다. 하지만 이미 슈르하치의 원한을 잔뜩 샀기 때문인지 1598년의 북원 원정에서 슈르하치가 의도적으로 태업을 하다 철수해버려 휘하 병력 대부분을 잃고 간신히 살아남는다. 만주 토벌전에도 종군하나 삼로 중 이로군이 격파당하자 자기 사병인 요동군 2만이라도 살리기 위해 유정의 사천병을 내팽개치고 바로 퇴각한다. 아군을 버리고 퇴각한 죄로 처형당할 상황이 되자 칼로 목을 찔러 자살한다.

이여백처럼 감군으로 일본 원정에 참여하는데, 이여백과 달리 조선군의 작전에 간섭하지도 않고 예의를 지키고 성실했다. 이여백이 농땡이 피우는 사이 권율과 함께 2진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순신을 이야라고 부르며 매우 존경하여 그의 해전에 참관하는 건 물론, 예하 기병 200명도 빌려주기까지 해서 기병 전력이 없는 등선군이 정찰하는 데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아주 깨끗한 것은 아니어서 이여백에게 뇌물을 상납받고 있었음이 밝혀진다. 전쟁 후 일본과의 강화협상에 끼어들어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일본 국왕 자리를 유지하게 만들었다.[186] 양응룡의 난 진압에도 순무 직책으로 참전해 조선군과 협조한다. 만주 토벌전에서 원역사대로 사로병진 계책을 냈다가 이여백이 빼낸 요동군 2만과 조선 쪽으로 탈출한 사천병 5천을 제외한 모든 병력을 홀라당 날려먹는다. 이 패배의 책임을 지고 수감되었으나 만력제가 잊어버렸는지 처형은 되지 않고 있다.

사르후 전투 당시 산해관 총병. 원역사처럼 계번성을 공격하다 각개격파당해 전사한다.

사르후 전투 당시 산해관 부총병. 원역사처럼 계번성을 공격하러 간 두송의 뒤에 남겨져 각개격파당해 전사한다.

사르후 전투 당시 개원 총병. 각개격파 당해 수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후퇴한다. 후퇴한 죄로 벼슬이 깎이고, 이후 개원성에서 전사한다.

진양옥의 남편. 유정과 진양옥이 사천병 5,000명을 데리고 탈출하는 동안 후위를 맡아 분전하다 전사한다.

사르후 전투에 이여백의 감찰어사로 종군하고, 전투 후 이여백의 죄를 상소로 고발해 이여백이 자살하는 계기를 만든다. 정7품에 불과하지만 현실을 인정하기 싫어 몽니를 부린 명나라 상서들 덕분에 누르하치를 건주군왕으로 봉하는 칙사가 된다.

일개 소기에 불과했지만 누르하치를 건주군왕으로 봉하는 칙사가 된 웅정필을 부관으로 수행하며 등장한다. 실제 역사와 같이, 작중 경인왜란 중의 조보를 엮어 만든 해적판 경인왜란록을 구해서 탐독하는 밀덕인데, 칙사로 가서 건주에서 제공하는 만찬과 담배를 거리낌없이 즐기는 대범한 모습을 보인다.[187]

사르후 전투 당시 심양 총병.

  • 조필성
이여백의 후임 요동 총병. 군사들을 혹독하게 엄벌하다 프래깅을 당하고, 목이 잘린다.

사르후 전투 당시 심양 부총병.


4.4. 기타[편집]


  • 오공충
가상인물. 명의 대상인. 조선과의 감합무역이 시작되자 돈 냄새를 맨 먼저 맡고 달려와서 인근 항구 지역 땅을 싹 사버리고 조선과의 인삼 무역을 독점한다. 조선에 배를 보내서 밀무역을 하기도 하며 다른 명 상인들의 배에 대해 해적질을 한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이렇게 막 나갈 수 있는 것은 조상이 개국공신이기 때문인데, 집안에 면사금패[188]가 있어서 명 관리들도 오공충을 쉽게 건들지 못한다. 밀무역 정도로는 손도 못 댄다고. 조선 측에는 상품 값을 나쁘지 않게 쳐주는 괜찮은 거래상대.[189] 조선과 서로 윈윈하는 좋은 파트너가 되어가면서 해서부 지역을 조선이 영유해야 평화가 정착되고 자신의 장사도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인왜란 때도 조선을 돕고 있으며, 이덕형이 마닐라 총독부에서 구입한 군수물자 대금까지 자신이 선결제 해주겠다고 제안하고 신호영을 안남 대방과 연결해주고, 양응룡 난 토벌에는 파병된 조선군의 군수물자를 지원하는 등 적극적으로 친 조선 행보를 이어나가고 있다. 3부에서 언급되기로는 명나라가 망할 때 가문을 이끌고 모든 재산을 챙겨 조선으로 망명했으나 망명하는 배 안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 오재영
오공충의 아들. 3부에서 언급되기로는 대한 망명 후 대한이 지배하는 주산군도에서 주산방을 세워 가문을 다시 일으키고 대 후송 무역을 맡았다고 한다.

원역사와 동일하게 파주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그 무리가 15만이나 된다고 하며 닥치는 대로 관리들을 잡아 죽이고 있다. 원역사와 달리 카라코룸 원정 실패로 명군이 크게 약화되었기에 반란이 진압되지 않고 지속되어 명 조정에서 조선에 파병을 요청하는 원인이 된다. 조명 연합군에게 대패한 뒤 전황이 암울해지자 두 첩과 함께 목을 메 자살한다.


5. 여진[편집]



5.1. 건주위 → 만주[편집]



5.1.1. 역대 추장[편집]


누르하치의 할아버지. 2부 시작 시점의 건주위 추장. 과거 명종 때 먼 친척인 오도리의 연줄로 큐슈 원정에 참전해서 한 몫 단단히 잡았다고 언급된다. 명의 배신으로 아들 아이신기오로 탁시와 함께 살해당했고 손자 누르하치가 건주위를 이어받게 된다. 언급은 되지 않았으나 현손인 청 세종 아이신기오로 요토와 후금 무종 아이신기오로 호오거가 각각 칭제했기에 청과 후금 양쪽에서 황제로 추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이 80년 전부터 부여주를 지배중이고 여진 부족 중 다수가 조선에 충성하고 있는지라 실제 역사처럼 청나라를 세우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래도 능력은 어디 안 가서 무자호란을 틈타 해서여진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어부지리를 챙겨 세력을 급속도로 불리는 중. 조선에게서 옥수수와 감자도 얻어가서[190] 식량 사정도 크게 개선되게 생겼다. 겉으로는 조선에게 협조적인 입장이지만 조선을 등 쳐 먹으며 이익을 볼 궁리만 하고 있다.[191] 주인공의 해서부 친정 때 평안도군과 협동작전을 펴며 조선군 좌군을 맡지만 속으로는 조선과 해서부가 서로 싸워 공멸하기만 바라고 있다. 주인공은 이런 누르하치를 얍삽하게 여기긴 해도 그렇게 미워하진 않는다. 내심 의형제나 혼인 동맹이라도 맺어볼까 생각까지 할 정도.[192] 1부 시절부터 주인공은 여진족을 적당히 키워 중원을 뜯어먹게 만들고, 그런 정세를 이용해서 만주를 차지해 조선을 제국으로 키운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역사에서 송-거란-고려가 이런 식으로 대치할 때 고려가 외교적으로 거란과 송을 적절히 뜯어먹은 전례가 있다. 일단은 현 시점까지는 조선에 협조하며, 신립과 함께 연합군을 구성해 몽골 코르친 부를 정벌, 승리하고 돌아온다.
왜란이 터지자 남쪽으로 가는 도감군에 군량과 마초를 공짜로 제공하는 호의를 보이며 2만 명 정도는 원군으로 지원할 수 있다는 선심 어린 제의를 한다[193]. 뭔가 노림수가 있는 듯하지만, 함부로 통수는 못 칠 듯하다. 배후에 이여송의 명나라 요동군이 있는데다가, 몽골 철기들이 조총과 화포로 중무장한 조선군에게 어떻게 쓸려갔는지 목격했기 때문. 왜란의 혼란을 틈타 도감군을 모두 죽이고 속말주를 빼앗을 줄 알았던 동생 슈르하치에게 일본은 조선에게 결국 질 것이며 그따위 짓을 했다간 건주위도 조선에게 무시무시한 보복을 당할 거라 장담한다. 경인왜란 동안 약속을 지켜 조선에 말 4만 마리, 소 5천 마리, 낙타 1천 마리, 소고기 1만 마리 분, 양고기 3만 마리 분을 공급하고, 대가로 조선에서 말 2만 마리 분은 면포, 차, 소금으로 받고 나머지는 왜군에게 노획한 왜조총 2천 자루, 탄환 10만 발로 받기로 한다. 조선 왕은 누르하치에게 아들 한 명을 조선에 볼모로 보낼 것을 제의하고 누르하치도 그러면 조선쪽도 건주위가 명나라에 고변해버릴 수 있다는 약점을 잡히는 것이기 때문에 손해는 없을 것으로 생각하여 긍정적으로 답한다. 울라 부의 부잔타이가 조선에서 탈출하려 하자 이를 받아주는 척하다가 울라 부를 환영잔치에서 쓸어버린 뒤 장정들은 조선으로 다시 압송하고 여자와 아이들은 건주위로 흡수한다.
조선의 일본 보복원정에 칙명을 받아 건주위가 참전하게 되자 동생 슈르하치를 보냈고, 슈르하치가 제철 기술자와 조총 기술자들을 데려왔다는 보고를 받고 크게 기뻐한다. 또한 조선이 왜인 포로를 이용해 왜인여진을 만든 것을 보고 자신도 왜인만주를 만들겠다며 왜인 포로들을 팔기에 편제해 부족한 보병 전력을 충당했다. 조선에서부터 전파된 담배를 즐기는 흡연자가 되었다. 만주 통일과 중원 정벌의 야망을 갖고 있으나, 조선은 선제공격을 맞고 보복을 하면 했지 선공을 날리진 않는 나라임을 알기에 조선은 최대한 건드리지 말자고 한다.[194] 또한 중원을 손에 넣더라도 조선은 이후에도 건드리지 않을 생각인 것이 괜히 호랑이를 건드렸다가 피해를 볼 것이라 생각하고 우려하고 있다. 아들들인 추옌과 다이샨이 후계 구도를 놓고 암투 중이라 중신들이 걱정하지만 누르하치 본인은 아직 자신이 정정하니 아들들이 그렇게 경쟁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지 딱히 중재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명나라와의 전쟁에선 승승장구 중이며, 추옌이 병력 1만을 잃고 대참패했다는 소식을 듣자 뒷목을 잡으며, "그놈은 돌격대장이 어울리지 결코 지도자감이 아니며, 내가 계책을 짜주지 않으면 전승도 거두지 못하는 둔하고 멍청한 놈"이라 깐다. 다만 지도자의 입장과는 별개로 괜히 혼잣말을 하고 담뱃대를 잡은 손이 떨렸다는 묘사가 있는 걸 보면 아버지 입장에서 아들을 사지에 내몰았다는 죄책감은 있는 모양.

사르후 전투 이후 추가적인 안전지대인 요동을 획득한 뒤 명과 중재하고 군왕 책봉을 도와줄 것을 조선에 요청하고, 그 후로는 북원을 공격할 계획. 칭기즈 칸처럼 다이샨과 홍타이지에게 나라를 나눠서 물려주는 것을 목표로 공언하며 조선의 협력을 구하고 홍타이지의 청혼을 지원했으며, 산해관을 넘고 중원을 분할해 아들들에게 분봉이 이뤄지면 요동은 얼마든지 조선에 넘길 수 있으니 조선과는 두 천자가 형제로 지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친조선 성향을 유지한다. 다만 만주를 입관시켜 중원을 분할하는 계획의 조선측 설계자를 세자 성이로 생각하고 있고 진정한 흑막이 왕 재석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요양과 개원을 점령하고, 이항복의 중재를 통해 건주군왕으로 책봉받은 후 만주의 칸을 자칭한다. 정식으로 만주의 국왕이 된 이후엔 곤룡포[195]를 착용하고 조선을 모방하여 정치체제를 3정승 6판서로 바꾸는 등 건주를 개혁하고 있다.
조선에서 전래된 담배에 제대로 맛들렸는지 시도때도 없이 줄담배를 피워대는 골초가 됐다. 혼자서 담배연기로 도넛 만드는 기술까지 익혔을 정도. 독자들 사이에서도 "원숭환 만나기도 전에 폐암으로 먼저 가버리는 거 아니냐"는 말이 나왔으나, 폐암으로 죽긴 했으나 원역사보다 고작 1년 일찍 죽었다. 3부에서 언급에 따르면 1622년 몽골 할하부를 멸망시키고 몽골 대칸 작위도 빼앗았지만, 그 다음해에 사망하고 아들 다이샨이 건주국왕으로 즉위했으며, 중원에 입관한 다음 화북을 차지하고 동생인 홍타이지에게는 막북과 할하를 나눠주어서 둘 다 칭제건원하고 양국에서 태조로 추존되었다. 원역사의 모습 때문에 언제 어떻게 통수를 칠지 긴장을 일으키는 캐릭터였으나, 북방전쟁 중에 조선군 몇 명을 기습으로 죽인 것을 빼고는[196] 조선과 협력 관계를 유지했고, 그 결과 원역사보다 더 큰 부와 강한 권력을 누리고 후손들도 융성하게 된, 인생의 승리자가 되었다.


5.1.2. 아이신기오로 가[편집]


누르하치의 아버지. 아버지 기오창가와 함께 살해되었다. 언급은 되지 않았으나 증손인 청 세종 아이신기오로 요토와 후금 무종 아이신기오로 호오거가 각각 칭제했기에 청과 후금 양쪽에서 황제로 추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누르하치의 동생. 누르하지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며 형이 세우는 계획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조선이 왜란에 정신이 팔렸을 때 도감군을 모조리 죽이고 속말주를 빼앗자고 누르하치에게 건의하지만 거절당하고[197], 그 대신 조선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코르친을 약탈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조선의 일본 보복원정에 건주위 파견군을 이끌고 일본이 약탈물로 가득한 풍요의 땅이라 듣고 잔뜩 기대하고 왔다. 그러나 총대장 이순신은 무허가 약탈을 엄금하고 이여백은 약탈한 뒤 자신에게 상납할 것을 강요해서, 억지로 약탈을 나갔다가 조선군에 걸린 건주위 병사들은 처형되고 그렇게 몰래 얻어온 약탈물도 죄다 이여백에게 뺏기는 비참한 신세가 되어 명나라와 이성량 일가에 대한 증오심이 깊어진다. 반면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 준 조선에 대한 감정은 호의적이 되어 간다. 어쨌든 원정에 사실상 실패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부족 내의 영향력을 모두 잃고 형에게 완전히 굴복하게 되는 줄 알았으나... 일본에서 잡아온 포로 중에 건주위가 가장 필요로 하는 철광석 제련 기술자와 조총 제조 기술자가 있었다! 이 공로로 인해 다시 1등 공신 대접을 받게 된다.
만력제가 명령한 무리한 카라코룸 원정에 종군했으나, 잠깐 가까운 곳에서 약탈하면서 참전하는 시늉만 하다가 낙마해 부상당했다는 핑계를 대고 철수해서 명군의 참패에 일조한다. 이후 명나라와 전쟁을 하게 되자 을미동정에서 잡아온 왜병들을 왜인 팔기로 편제해 자신들에게 부족한 공성전 기술을 채워 톡톡히 재미본다. 하지만 형의 자리를 완전히 넘볼만한 전력도 없는 상황에서 형과 지나치게 대립각을 세우다가 결국 숙청당한다. 차남 아민을 제외한 슈르하치의 자손들은 모두 누르하치에게 처형되거나 권력을 잃고[198] 본인은 그동안 세운 공이 많아 목숨만은 건진 채 감금당한다.

누르하치와 슈르하치의 동생. 추옌과 함께 조선군과의 전투에 참가하나 김수길에게 저격당해 전사한다.

누르하치의 장남. 부친을 따라 여러 전장에 종군해 위세가 강력하다. 다른 동생들은 그만한 공적이 없어 비할 바가 아니지만 다이샨만큼은 조선을 등에 업고 을미동정에도 종군한 터라 잠재적인 정적으로 보고 견제 중. "을미동정에도 참전했으니 다이샨에게 버일러 호칭을 주자"는 의견이 나오자 "달랑 3백기만 데리고 조선군 뒤만 따라다닌 게 무슨 공적이냐"라고 다이샨 앞에서 대놓고 폄하하는 말을 던져 버렸고, 결국 버일러 호칭 수여가 취소되자 다이샨 쪽에서도 이를 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화기와 보병 전술로 맹활약하는 왜인팔기의 활약상을 본 뒤 "화기와 보병 운용도 중요하다"고 보는 다이샨과 달리, "조상들께서 싸우던 방법이 아니다"라는 어이없는 이유를 대면서 "전통적인 유목민 특유의 기병 전술로 싸워야 한다"고 시대착오적인 똥고집을 부린다. 심지어 부친인 누르하치가 바로 앞에서 "화포 좀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 걸 보고서 한 소리가 저거다. 시대의 흐름을 못 보는 만큼 눈치도 없어서 조선이 건주위와 굳이 싸우고 싶어하지 않아 생색내기용으로 병력을 보냈다는 것도 눈치 못 채고, 작전 회의 때 당당하게 "조선군을 처부숴 보이겠다"는 말까지 던졌다. 결국 누르하치에 의해 조선군을 상대하는 역으로 야르하치, 홍타이지와 함께 보내진다. 예상대로 조선군에게 병력을 죄다 들이박았다가 일방적으로 참패했고, 퇴각하려던 중 누르하치의 밀명을 받은 홍타이지에게 살해당한다. 사실 이미 누르하치에게 "기껏해야 돌격대장감이지 후계자감은 아니다"라고 눈 밖에 난 상태였고, 마지막 기회로 조선군과 싸우도록 해본 후 실패하면 조선의 손을 빌려 숙청할 생각이었다.[199][200]

누르하치의 차남. 누르하치가 다이샨을 조선에 정략결혼시키는 구상을 하던 중 주인공이 아들 한 명을 볼모로 보내라고 하길래 조선에 볼모로 보내졌다. 평안도 억양이긴 하나 조선어도 잘 구사하며, 을미동정 때 족친위의 일원으로 참전도 한다. 조선식 이름은 김대선. 주인공은 미래를 위해 그를 사위로 삼고 추후 누르하치의 후계자로 삼아 건주위에 영향력을 행사할 계획으로 상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희정옹주와 혼인시킨다. 조선에 머무는 동안 세자를 비롯한 종친들과 친한 사이가 되었고, 세자와는 '요동을 조선에게 넘긴다면 건주위가 화북을 차지하도록 돕겠다.'는 밀약을 맺고 희정옹주와 함께 건주위로 돌아간다. 그런데 건주위에 돌아가자마자 누르하지가 마련해둔 첩을 셋이나 들인다.[201] 한동안은 조선의 빽을 바탕으로 전공이 훨씬 많은 형 추옌과 차기 건주 국왕 자리를 놓고 경쟁했으나 사르후 전투에서 추옌이 사망하고 본인은 큰 공을 세우면서 대패륵이 되고 가장 유력한 차기 건주 국왕 후보가 된다. 전투에서는 조선의 편곤을 사용하고, 싸우는데 조선에서 배운 군략을 활용하는 등 조선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3부에서 언급에 따르면 1623년 아버지 누르하치가 사망하자 건주 국왕에 오르고 명이 고영상의 난으로 멸망할 때 방관하다가 뒤늦게 황제의 복수를 명분으로 입관하여 화북을 장악한다.

누르하치의 8남. 14세의 소년이지만 벌써 추옌보다 훨씬 이성적인 판단력을 보인다. 추옌, 야르하치와 함께 조선군을 저지하기 위해 출병하면서 누르하치에게 여차하면 추옌의 목을 조선군에 바치고 투항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예상대로 추옌이 조선군에 참패하고 야르하치가 전사하자 추옌을 죽이고 조선으로 가 다이샨 대신 볼모가 된다. 재석에게 삼궤구고두례를 올리고, 자신도 둘째 형처럼 부마가 되고 싶다는 청을 한다. 조선의 국력이 크게 성장한 이유가 선교사로부터 서양 기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김류에게 접근, 거짓으로 천주교에 관심이 있는 척 하며 건주에 선교사를 초빙하고 싶어한다. 누르하치에게는 다이샨과 함께 후계자 감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건주가 충분히 크게 성장한다면 나라를 둘로 나눠 다이샨과 홍타이지에게 각각 나눠줄 계획이다. 결국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고, 희연공주도 함께 천주교 신자가 되어 혼인한다. 형 다이샨이 화북으로 입관할때 몽골 지역을 분할받는다.

  • 아이신기오로 요토[202](김악탁)
다이샨과 희정옹주의 아들. 주인공과 누르하치의 손자. 요토라는 이름은 누르하치가 직접 지어준 이름으로, 다이샨이 명장이 될 것이라고 기대를 하고있다. 3부에서 나오는 언급에 따르면 다이샨의 뒤를 이어 건주국왕이 되었고 칭제건원하여 청나라를 건국한다.


5.1.3. 신하[편집]


  • 동가신
동청례의 손자. 아버지가 조선에서 관직을 받지 못하자 다시 건주위로 귀순하여 건주위에서 살고 있다. 볼모가 된 다이샨을 수행하기 위해 동행한다.

  • 자이사[203]
누르하치의 측근.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원수인 니칸 와이란의 목을 갖다 바쳤기에 누르하치의 신뢰를 받고 있다.

  • 호호리[204]
건주위의 대신. 조선에게 코르친에서 약탈해온 말을 파는 일을 맡는다. 장재웅에게 낙타도 구입해보는 건 어떠냐고 호객행위를 한다. 누르하치의 아들들이 제 목소리를 낼 만큼 장성하자 추옌과 다이샨의 충돌을 불안하게 보고 있다. 건주위가 책봉을 받아 왕국으로 재편된 후에는 영의정의 자리에 오른다.

  • 수무르 양굴리[205]
누르하치의 사위. 누르하치를 최측근에서 모시는 심복으로 조선과의 교섭이나 명나라 약탈의 선봉을 담당한다. 이후 건주군왕이 된 누르하치에 의해 병조판서로 임명된다.


5.2. 야인여진[편집]


실제 역사대로 니탕개의 난을 터뜨린다. 원래의 역사처럼 추장 '우을지'와 함께 다른 추장들을 포섭하여 신립이 지키고 있는 부여주를 우회해 함경도를 급습하지만 경원부사 이일이 비록 초기에는 방심하다가 적의 기습을 허용했으나 곧 정신 차리고 우주방어를 시전 하여 전투가 교착상태에 빠지고 신립도 급보를 듣고 빠르게 기동하여 여진족을 몰아내며, 주인공이 중앙군을 다시 강선조총으로 무장시켜 파병하는 바람에 결국 털려버리고 이후에 다시 복수귀가 되어 명나라 영역에 살던 해서부 야인들을 앞세워 대대적으로 부여주를 침공해 오지만 이마저도 곧 신립이 사관학교인 강무관에서 교육받던 이억기·김응서·정기룡 등 능력이 뛰어난 젊은 장교들을 이끌고 와서 진압하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부하들의 배신으로 목이 잘려 죽는다.

실제 역사처럼 추장 '니탕개' 등 다른 추장들을 포섭하여 신립이 지키고 있는 부여주를 우회해 함경도를 급습하지만 경원부사 이일이 비록 초기에는 방심하다가 적의 기습을 허용했으나 곧 정신 차리고 우주방어를 시전 하여 전투가 교착상태에 빠지고 신립도 급보를 듣고 빠르게 기동하여 여진족을 몰아내며, 주인공이 중앙군을 다시 강선조총으로 무장시켜 파병하는 바람에 결국 패배하고 도망치고 만다. 이후 우을지 추격 임무를 부여받은 이순신과 임꺽정의 활약으로 결국 이순신 부대에 생포,[206] 한성으로 압송되어 참수형을 당한다.

도망친 니탕개를 숨겨준다.

  • 갈다개
니탕개의 사촌동생. 니탕개에게 도피를 제안하지만 니탕개에게 살해당한다.


5.3. 해서부[편집]


  • 부자이(布齊, 포제)
무자호란 당시 예허부(葉赫部, 엽혁부)의 부장. 자신에게 항복하면 부족의 존속을 보장하겠다고 회유하는 이여송의 말을 믿고 하다 부장 후르한과 함께 이여송에게 항복하려고 하지만 이 정보를 입수한 신립이 왜인여진 기병대만 이끌고 맹추격, 예허부가 최후 전력으로 아껴두었던 2천 철기가 박살나고 예허·하다 두 부족은 섬멸, 후르한과 함께 주인공 앞에 끌려오게 된다. 이후 주인공에게 "우리는 이미 명 황제 폐하의 신하이므로 죽이면 이여송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라고 뻗댔지만, 주인공을 보좌하던 유성룡은 같잖은 블러핑 따위는 무시한 채 그냥 죽이고 이여송에게는 몰랐다고 발뺌하자고 진언하고, 주인공은 곧바로 진언을 받아들인다. 부자이는 끝까지 건방지게 굴다 결국 능지처참을 당한다.

무자호란 당시 하다부(哈達部, 합달부)의 부장. 자신에게 항복하면 부족의 존속을 보장하겠다고 회유하는 이여송의 말을 믿고 예허 부장 부자이와 함께 이여송에게 항복할려고 하지만 이 정보를 입수한 신립이 왜인여진 기병대만 이끌고 맹추격해 예허부가 최후 전력으로 아껴뒀던 2천 철기는 박살, 하다·예허 두 부족은 섬멸되고 부자이와 함께 주인공 앞에 끌려온다. 이후 주인공에게 마구 뻗대는 부자이와 달리 무조건 자기가 잘못했다고 데꿀멍한 덕분에, 후르한에겐 자비를 베풀어 고통 없이 깔끔히 참수형으로 생을 마감할 수 있게 해준다.

해서 4부족 중 가장 조선에 적대했던 울라부(烏拉部, 오랍부)의 부장으로 무자호란 당시 직접 주인공이 주둔하고 있는 신북성에 거짓 항복을 핑계 삼아 접근하나 그것은 이미 주인공이 놓은 함정에 걸려든 것이었고, 결국 스페인식 갑옷·무기·전술로 훈련된 훈련도감군과 신립이 강병으로 조련한 오위군의 협공으로 울라 부는 4만 병력이 거의 전멸하고 이에 옳은 말을 하는 부하들까지 마구 죽이면서 미쳐 날뛰다가 자기편이 쏜 화살에 맞아 죽는다.

  • 바인다리(擺銀答里, 파은답리)
무자호란 당시 호이파부(輝發部, 휘발부)의 부장으로 다른 여진족 부장들과 함께 조선의 북방을 대대적으로 침공하지만 결국 조선군의 반격으로 왜인여진에게 박살나는 바람에 호이파 부는 그대로 궤멸, 본인도 죽임을 당한다.

만타이의 친동생. 어려서부터 조선인 밑에서 교육받았기에 조선 문화에 해박하고 형과 달리 그렇게 조선에 악감정은 없으나, 이 때문에 형에게는 친조선파 배신자 같은 취급을 받는다. 군대를 이끌고 삼성부를 포위하나 권율·김시민 등 조선 장수들의 활약과 지뢰·화포·진천뢰같은 화약무기들로 인해 공략에 실패한다. 뒤이어 지원군으로 온 이순신에게 공격당해 병력을 잃고 임꺽정에게 잡혀 항복하고 만다. 그 후에는 형 만타이의 뒤를 이어 울라 부 부장이 되나 조선의 꼭두각시가 되어 있다. 경인왜란이 터지자 조선을 돕기 위한 파병을 강요받아 정여립의 감시를 받으며 직접 기병을 이끌고 유극량의 도감군에 합류, 남하한다. 주인공은 울라 부 기병들을 전라도에 남아있는 왜군 낙오병 사냥에 투입했다가 논산대첩에 참가시킨다. 부잔타이는 명목상의 부장일 뿐 논산대첩에서도 사실상 총독인 정여립이 부장으로써 울라 기병들을 지휘한다. 이후 조선에서 부잔타이에게 다테에게 넘길 기병 1000기를 차출하라는 명을 내리자 이대로는 영원히 조선에게 뜯기며 살겠다 싶어 누르하치의 휘하로 들어가려 한다. 하지만 누르하치에게 통수를 맞아 사망, 마지막 울라부 잔당들조차 멸망해버린다.

  • 아바하이
만타이의 심복부하로 울라부에서는 맹장으로 통했지만 부잔타이에 의해 지휘책임을 지고 처형된다.

후르한의 친동생으로 하다부의 지배권을 놓고 형과 다투다 울라부로 망명했다.

부자이의 사촌으로 동예허부의 수장. 서예허를 다스리던 부자이의 계략으로 2차 니탕개의 난 당시 조선군에 의해 전사.

  • 감목관을 쏜 여진족 형제
부여주의 조선인 감목관을 쏜 울라부민 4형제들. 만타이는 이들의 조선 송환을 거부하고 주인공은 전쟁을 개시한다. 조선인 감목관들의 저급한 패드립이 원인이 되었으나 그들의 행동이 해서부 멸망이라는 나비효과를 가져왔고 생존자들은 조선의 피지배 민족으로 전락했다.


6. 대유주[편집]



6.1. 스페인[편집]


스페인 국왕. 조선 임금이 직접 가톨릭 선교사를 초빙한데다가 선물로는 금은보화도 아닌 작물 씨앗을 요구했다는 사실을 알고 감동해서 조선에 올리베이라 백작을 사신으로 보내고 많은 선물을[207] 보내준다. 이에 주인공이 정곤수를 정사로 한 1차 견서사와 선물들[208]을 보내서 화답한다. 사신단이 도착한 후 직접 알현하고 인삼도 맛본다. 조선에 대해서는 "너무 멀어서 동맹을 맺을 수도 정복을 할 수도 없으니,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동아시아 선교의 거점으로 삼고, 교역 정도만 하면 된다"고 결론 내린다. 중증 워커홀릭으로 성리학적으로도 괜찮은 면모를 보여 조선 관료들도 호감을 가지나, 서류 하나까지 일일이 다 처리하는 깐깐함[209]은 좋지 않게 봤고 유럽식 근친혼 개족보에 대해서는 기겁을 한다. 무적함대의 패배와 건강, 나라 빚 문제로 근심이 깊어진 와중에 조선이 2차 견서사를 보낸 걸 알고 "당장 시급한 문제가 아니라 크게 신경 쓸 거 없다"면서도 인삼을 그리워하는 모습도 보인다. 경인왜란 중 만력제가 조선에 지원한 물자의 양을 듣고 "황제의 명 하나만으로 그런 막대한 지원이 가능할 정도의 대국이라면 정복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짓는다. 그리고 광해군에게도 "아내와의 관계를 소중히 해야 한다"고 충고하기도 했다. 3차 견서사가 알현했을 때는 통풍으로 거동조차 못 할 정도로 노쇠해져 있었고 몇 달 후 견서사가 프랑스에 체류하던 동안 사망한다.

펠리페 2세의 후임 스페인 국왕. 가톨릭 광신도 암군이다. 원역사처럼 모리스코들을 추방하는 등 뻘짓을 벌인다. 조선에 우호적이던 선왕과 달리 조선 국왕이 선왕의 호의를 받고도 개종하지 않은데다 적성국인 네덜란드, 잉글랜드와 교류한다며 맹비난한다. 이후 조선에 광신도 가르시아 신부를 보내 무례하게 개종을 강요하면서 아버지가 쌓아온 조선과 스페인의 우호관계를 한 방에 완벽하게 박살내버릴 뻔 한다. 그러나 천회사 이기빈이 아랍에서 벌인 약탈이 스페인에 조선 수군이 메카를 불태웠다고 와전되면서 조선에 대해 큰 호감을 갖게 되어 찾아온 견서사에게 자신이 조선을 오해했다고 사과하고 연회를 베풀고 훈장과 선물을 퍼주는 등 조선과의 우호관계를 계속 유지하기로 한다.

6대 스페인령 필리핀 총독. 임기는 1590년 5월까지. "일본군과 연합해 명을 정벌하겠다"는 주장을 펼친 장본인.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시작된 전쟁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으며 일본이 이길 것이라 생각한다. 조선이 예수회 외의 수도회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정작 명 정벌을 주장하면서도 중국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선민사상 덩어리.

7대 스페인령 필리핀 총독. 임기는 1590년 6월부터. 견서사에게 직접 아시아 정세에 대해 배운 이후 부임했기에 전임자인 데 베라보다 아시아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다. 데 베라와 달리 일본이나 명보다 조선의 개종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고 있으며 부임 이후 조선을 지원할 계획이다. 정확히는 경인왜란에 개입해 조선에 생색을 내는 어부지리로 조선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에 스페인의 영향력을 확대할 속셈이다. 예상대로 조선이 승리했으니 바른 판단을 내린 셈. 원 역사대로 1593년 자연사한다.

  • 디에고 데 올리베이라 백작
스페인에서 조선으로 사신으로 온 인물. 조선에서 선물 받은 인삼을 복용하고 넘치는 기운을 정부를 만나 쏟아 부은 후 인삼의 유명세에 일조했다. 아래의 올리바레스 백작과 이름이 비슷하여 조선인들이 동일인으로 혼동했다. 2차 견서사와 재회했으며 조선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아시아 담당 위원회에서 일하게 되었다.

시칠리아 부왕. 2차 견서사에서는 이덕형, 이항복과 유럽, 아시아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펠리페 2세에게서 "광해군이 천주교를 믿도록 설득하라"는 명을 받는다.

허균이 우연히 만나 홍희동전의 스페인어판의 검수를 받고 있다. 허균과 함께 홍희동전 공동저자로 알려질 듯.[210] 이덕형을 통해 허균이 완성한 홍희동전 스페인어판을 전달받고 검수한 뒤 유럽에 출판하고 수익을 나누기로 한다. 그리고 2차 견서사가 오자 약속대로 수익의 절반을 이덕형에게 넘겨준다. 3차 견서사에서 허균과 재회하여 홍희동전 3부가 스페인에선 폭망했음을 알린다. 펠리페 3세로 인해 조선과 스페인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이제는 만날 수 없을지 모른다는 허균의 우려에 안타까움을 표하며 하다못해 자신이 쓰고 있는 기사 소설이 완성되면 조선으로 보내겠다 말한다.

  • 곤잘레스 중위
올리비에라 백작의 스페인 사절단 호위 병력 중 일원. 견서사가 사절단이 타고 온 배를 타고 가기로 결정되자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50여명의 부하 병력과 함께 조선에 남게 되었다. 당초 올리비에라 백작의 명령은 다음 교역선이 왔을 때 마닐라로 이동해서 마닐라 수비대에 합류하라는 것이었지만 주인공이 남만별기와 같은 보수를 제시하자 남만별기에 합류하여 무자호란 이전까지 함께 교관 노릇을 한다. 계급상으로는 로드리고 대위 쪽이 상급자이지만 로드리고 대위는 식민지 군 장교이고 자신은 본토 장교라는 우월의식 때문에 충돌을 빚는다. 무자호란이 발발하자 자신들은 잠시 용돈벌이를 한 거지 조선을 위해 싸우다 죽을 생각은 없다며 부하 대부분을 이끌고 마닐라로 가버린다.

  • 탄끄레도
1차 견서사가 펠리페 2세에게 선물한 수컷 호랑이. 서반아 궁정에서 11년을 살았으나 자식은 남기지 못했다. 이후 조선과 서반아의 우호의 상징으로 남는다.

루앙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요양중에 플랑드르로 가는 이항복에게 추천서를 써준다. 얼마 뒤 부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파르네제의 장남.

파르마 공작의 후임 네덜란드 총독.

  • 가르시아
펠리페 3세가 조선으로 보낸 특사. 도미니코회 소속 신부. 가톨릭 광신도. 조선에 예수회 이외의 수도회가 들어와 활동할 수 있도록 할 것과 조선 국왕이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무례하게 요구한다. 주인공은 이 자가 일부러 무례하게 행동해서 자신을 죽이도록 유도하여 순교자가 되고 싶어 하고 있으며 이를 빌미로 스페인이 조선을 침략하게 만들 의도라는 것을 깨닫고, 죽이지는 않은 채 조밥과 간장만을 먹이다가 마닐라로 추방하도록 한다. 스페인에 돌아가서 조선에 대해 열심히 험담을 한 듯 하나 메카 습격 오보로 조선의 이미지가 좋아지는 바람에 예수회에 대한 시기로 조선을 음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아메리카로 보내진다.


6.2. 교황령[편집]



6.2.1. 역대 교황[편집]


작중 처음 접촉한 교황. 조선 임금이 직접 가톨릭 선교사를 초빙했다는 사실과,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이 프레스터 존의 나라라고 주장하는 것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 엔리코 오르시니[211] 주교를 사절로 보낸다. 프란치스코회 출신이라서 예수회를 은근히 냉대한다고 한다. 세스페데스의 조선왕 사제왕설이 말 안 되는 추측성 보고였기는 하지만, 정황상 그렇게 착각할 만했던 상황을 참작해 근신 3개월 처분을 내린다. 로마에 방문한 견서사 일행을 알현해 조선인 가톨릭 신자의 제사 허용에 대한 토론을 한다. 교황은 혹시 조선 왕이 제사 허용을 요청하는 것이 "그래야 본인이 세례성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김칫국을 마시고 있다.[212] 하지만 명군답게 성급한 추진 대신 일단 현재 상태를 묵인하면서 조선의 제사 문제를 전담 조사할 교황특사를 조선에 보내고, 결과를 가지고 돌아오면 정식으로 공의회를 열어 확정하기로 한다. 문제는 이 모든 절차를 마무리하려면 약 5년이 예상되는데, 식스투스 5세는 실제 역사에서는 그 다음해 사망한다. 조선인들은 "돼지치기 농부 출신이었다가 학문을 쌓아 임금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라며 좋게 평한다. 역사대로 2차 견서사가 방문했을 때에는 사망한 상태였다.

2차 견서사가 유럽에 방문할 시점의 교황. 종교적 문제에 대해 엄격한 인물이라 식스투스 5세의 제사를 인정하려던 방침을 따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제사를 인정하지 않으면 조선의 개종은 불가능하다는 것과 조선이 유럽 기준으로도 상당한 국력을 가졌다는 것을 이해하고, 절대 불허하려는 원칙주의자까지는 아니며[213] 협상의 여지는 남겨두고 있다. 제사 허용 문제는 공의회가 아니라 교황 교서 정도면 충분하다고 보고 있다. 결국 예수회가 그동안 해온 절충안을 묵인하는 결정을 내린다. 3차 견서사 방문 시점에는 통풍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거동이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장조 승하 2년 후 시점인 외전 5부 시점의 교황. 장조가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으로 기대했다가 그 기대가 무너지자 공개적으로 실망감을 표현하고, 광해군이 요청한 장조 추도미사도 불허한다.


6.2.2. 추기경[편집]


교황 식스투스 5세가 조선인 천주교도들에게 제사를 허용해달라는 요청을 듣고 제사라는 것에 대해 조사해보기 위해 조선에 파견하는 2번째 특사. 베네치아 출신이며 파도바 주교이다. 본래 조선에 갈 생각이 없었으나 교황의 측근인 카에타니 추기경이 반쯤 쫓아내듯 특사로 추천해버린다. 이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 이유는 괜히 교황청 내에서 소란을 일으켜 조국 베네치아에 피해를 주기도 싫었고 동방의 상품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서 조국 베네치아에 전달하면 베네치아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선에 도착한 뒤 조선과 일본의 전쟁은 예상치 못했다며 경인왜란에서 중립을 지킬지 조선을 지원할지 고민한다. 조선에는 약 1년간 머무를 계획. 논산대첩 때 주인공의 손님으로 전투를 참관하고 조선의 힘을 생생히 느낀 후, 조선군에 대한 정보와 함께 교황청은 조선에 일부 양보하고서라도 조선과 우호관계를 유지해야 하겠다는 보고서를 보낸다. 단순히 조선의 국력만이 아니라 극진한 대접을 받는 등 개인적으로도 조선에 대한 호감도가 꽤 높다. 유럽행 갈레온에서 문성군부인 유씨에게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유럽 예법을 가르친다. 그리고 로마로 귀환해서 클레멘스 8세 휘하 추기경들에 맞서 조선에서의 제사 허용을 해야 한다고 주장 중이다. 광해군과는 항해 도중 가까워지기도 했고 왕족을 입교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친밀히 지내는 중.
원역사에선 경인왜란이 시작되는 1590년 사망하였으나 원역사에서 사망했을 시점에 홍삼을 복용한 뒤 원기를 되찾았고, 이후 조선에서 인삼을 장복하면서 몸이 좋아져 원역사보다 몇년 더 살았다.

친 스페인파 추기경. 제사허용문제를 강경하게 반대한다. 정적인 페데리코 코르나로 추기경을 치워버리기 위해 조선 특사로 추천해서 멀리 보내버린다. 제사 문제가 허용으로 결론난 후에는 조선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레고리오 13세가 임명한 추기경.


6.2.3. 예수회[편집]


예수회 소속 스페인인 선교사. 주인공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통로로 쓰기 위해 일본에서 류성룡을 시켜 데려오도록 한다. 한국어가 능숙하며 조선 문화를 존중하는 등 모범적인 선교사의 모습을 보인다. 주인공이 성경과 서양사에 대한 지식이 많음을 보고 프레스터 존의 후손이라고 확신했다.[214] 증기기관을 목격하고 이를 '솔로몬의 악마'라고 믿는데, 주변 선교사들은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치부했다. 결국 교황청으로 소환되어 왜 그런 소리를 했는지 교황에게 해명하기에 이른다. 결국 별 근거 없이 보낸 추측성 보고이긴 했지만 악의는 없었고, 정황상 그렇게 착각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임을 고려하여 3개월 근신 처분을 받는다. 2부 최고의 개그캐릭터 중 하나이자 도라에몽. 주인공과 이항복에게 속아 서양기술과 정보를 뜯기는데, 주인공은 이후 실수로 미래지식을 발설하면 다른 사람들에겐 세스페데스에게 들었다는 핑계를 대고, 세스페데스에게는 책에서 읽었는데 책을 너무 많이 보고 살아서 어느 책인지 까먹었다고 둘러댄다. 둘의 대화기록이나 세스페데스가 교황청에 보낸 편지가 후세까지 남는다면, 현대 한국과 스페인 역사학계에 희대의 미스터리로 남을 듯하다.
교황청에 불려간 이후로는 조선이 선교의 블루오션이라는 걸 교황청 인사들에게 열심히 설명하는 설명역으로 활약했고, 교황청에서 스페인과 별도로 조선에 성 요한 기사단 해군 군사고문들을 파견하는 결정을 내리는 데에 영향을 주었다. 견서사와 함께 조선에 3년 만에 돌아온다. 교황 특사로 온 페데리코 추기경을 도와 조선의 제사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보고하기 위해 2차 견서사와 함께 다시 유럽으로 향한다. 유럽에 도착한 직후 식스투스 이후의 교황들이 연이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진다. 이후 직접 묘사되지는 않았으나 유럽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몇 개월 만에 조선말을 의사소통 가능할 정도로 익혔으며 류성룡, 이항복 등을 출세할 사람들이라 생각하고 차차의 검은 속내를 눈치 채는 등 상당히 관찰력이 뛰어나고 머리가 좋다.

  • 알라르콘
전직 군인 출신의 스페인 국적 예수회 신부. 레판토 해전 참전자이며 당시 아래의 로드리고 로페스 데 알바레스의 상관이었다. 레판토 해전 이후 느낀 바가 있어 전역한 후 성직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215] 왜군 장창병에 고심하는 주인공에게 로델레로 전법을 알려준다. 무자호란이 터지고 주인공이 친정에 나서자 스페인 용병들을 위해 종군 신부로 참가하는 한편, 자신이 익힌 서양 의술로 조선군 부상병들을 치료한다. 이러한 노력이 헛되지 않아 조선 병사들 사이에서도 천주교 신자들이 나오게 되었고, 무자호란 종료 직전에는 군 내 신자들의 수가 수백 명 단위로 늘어난다.[216] 북방에서 여진족들에게도 선교를 해 3부에서는 많은 여진족 신자가 생겼으며 장조 말년시점에서는 세손의 라틴어 스승이 되었다.

  • 팔레데스
세스페데스의 후임으로 조선 천주교단을 담당하고 있다. 프로이스와 달리 "하느님의 가르침은 전쟁이 아닌 사랑으로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개념있는 인물이다. 현재 조선 정부에 협력하여 도성의 방비를 위한 이탈리아식 요새 건설을 조언하고 조선군 전사자에 대한 위령미사를 올리는 등 프로이스가 노부나가에 협력하면서 생길 천주교의 반감을 만회하고자 분투하고 있다. 조선교구 주교로 선임되었다.

  • 로카넬라
조선에 1진으로 온 예수회 신부 중 유일한 이탈리아인. 이탈리아인답게 스페인인들과 달리 유머감각도 갖췄다. 대학을 나온 엘리트로, 세자 이성에게 그리스어·라틴어·서양 고전 등의 교육을 하고 있다. 더불어 수학과 건축 전문가로서 한성에 건설될 이탈리아식 요새를 담당한다.

  • 아돌포 파누치
을미동정 시기에 조선에 온 이탈리아인 신부. 건축에 정통해서 을미동정 이후 건축되는 개선문의 설계를 담당한다. 조선에 오기 전에 한문과 조선어를 마스터하고 왔다고 한다.

1599년 조선에 온 예수회 신부. 조선식 이름은 이마태. 역사가 바뀌며 명이 아닌 조선으로 온다. 성경을 조선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맡았으며, 성경 번역이 끝난 후에는 명나라 선교를 하고 싶다고 요청하여 명나라로 간다. 북경에 방문한 최초의 남만인으로 명나라에서 큰 관심을 받았다고 한다.

예수회 선교사. 원 역사대로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하며 조선에도 진출하고자 하나, 조선의 왕 경성군이 외국인 선교사들이 들어오는 걸 막아 입국도 못하고 있다가 경성군에 빙의한 주인공이 쇄국을 풀고 선교사를 초청하자 큰 기대를 걸고 세스페데스 등 예수회 선교사들을 조선에 보낸다. 이후에도 일본에 머물며 조선에 들어간 예수회 선교사들을 지원하다가 무자호란 승전을 축하하는 일본 사절단에 섞여 조선을 방문한다.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좋은 사람 같았지만 노부나가의 사위 가모 야스히데가 "함께 명나라를 쳐서 천하를 나눠갖자. 만약 출병이 어렵다면 명나라를 칠 길이라도 빌려달라."라는 노부나가의 제안을 주인공에게 전달할 때 옆에서 "두 나라가 힘을 합쳐 중국을 정벌하면 선교에 장애가 되는 걸림돌이 사라지고 수천만 중국인들에게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전달할 수 있을 겁니다."라며 동참해 줄 것을 부추기는 충공깽한 말로 주인공이 할 말을 잃게 만든다.[217][218]
이후 조선이 일본과 협력하지 않을 것이 확실해지자 일본의 조선 및 명 침략에 적극 협조하기로 하고 오다에게 마카오에서 포르투갈 갈레온 6척과 서양식 대포를 용병으로 빌릴 수 있도록 주선해주고 있다. 프로이스 입장에서는 오다에게 협조하지 않을 경우 오다는 가톨릭 탄압에 나서고도 남을 인물이므로 동아시아 선교 최대 거점인 일본을 잃을 가능성이 높아서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 그러나 조선이 도착한 코로나로 추기경이 조선을 지원할지 중립을 지킬지 고민 중인데 조선을 지원하기로 한다면 입장이 난처해질 것이다. 그러나 일본 내 가톨릭 교세 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명분이 있는 만큼 이 때문에 프로이스가 교황청 차원에서 큰 벌을 받진 않을 것이다. 결국 일본이 전쟁에 패하고 동래성이 조선군에게 탈환되기 직전이 되자, 오다 나가마스와 함께 노부나가의 사절 명목으로 성을 나오게 된다. 주인공은 프로이스를 코르나로 추기경에게 넘긴다. 이후 행적은 언급되지 않았으나 작가의 말에 의하면 유럽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6.2.4. 기타[편집]


하성군의 차남. 아버지와 형과는 달리 책을 좋아하는 차분한 모범생 스타일. 주인공은 원역사 광해군의 세자 시절 행보를 생각해서 높게 평가하고 잘 대해준다. 두창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 상희가 완성한 종두를 맞고 회복하여 조선의 첫 종두 사용자가 되는데 그 후로 상희를 연모하게 된다. 하성군이 일본에 간 후 보내는 정보보고는 형식적으로는 광해군에게 보내는 편지로 되어 있기 때문에 광해군이 갖고 입궐해 주인공을 알현하는데, 이때 곁에 상희가 있으면 얼굴이 빨개지고 말을 더듬는다고 한다. 14살이 되어 어른들이 혼사를 추진하나 상희에 대한 짝사랑 때문에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하성군의 강력한 권유로 문성군부인 유씨와 일단 결혼했지만, 형이 순왜가 되면서 인생이 꼬였다. 주인공은 광해군을 좋아해서 연좌죄로 처벌하고 싶지 않기에 신립의 관을 운구하는 일을 맡긴 뒤 족친위로 참전시켜서 죄를 씻게 해준다. 그럼에도 광해군을 처벌하라는 여론이 심해서 부인 유씨와 함께 견서사로 파견하는데 광해군에게는 시야를 넓힐 기회가 되지만 광해군을 처벌하라는 선비들에게는 이것이 귀양으로 여겨졌기 때문. 견서사로 떠나면서 바닷길에서 임신을 하면 곤란하다는 이유로 유씨와 관계를 전혀 맺지 않는데 이 때문에 유씨와 관계가 크게 악화되어 결국 유럽 체류 도중 유씨와 이혼했고[219] 상희에 대한 미련과 집안이 망한 것에 대한 허탈감으로 천주교에 귀의하여 신부가 된다. 3차 견서사와 재회했으나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교황청에서는 차기 조선교구 주교로 내정해둔 상태이다. 외전 5부에서 장조 승하 소식을 베네치아에 주재하던 한호에게 듣고 교황에게 추도미사를 요청하나 거부당하자 조선인들만 모여 조촐하게 사적으로 추도미사를 집전한다. 이때 유럽이 종두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자신의 남은 삶 동안 조선과 유럽 사이의 간격을 줄이는데 바치겠다고 다짐하며, 그 공로로 추기경까지 올랐으며 죽을 때까지 다시는 조선으로 오지 않았다고 한다.

3부에서 견서사로 파견 온 재석은 미술품들을 막 수집하는데, 그 중 루벤스가 그린 광해군 그림을 수집하게 된다. 추기경이 된 광해군이 환갑이 지나서 한복을 입고 그리게 한 그림으로, 현실에서 한복 입은 남자를 대체하게 되었다.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원 역사와 달리 작중 역사에서는 최초의 조선 출신 추기경으로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두고두고 추앙 받을테고, 비신자들이라도 역사를 공부하며 기억하게 될 인물이 될테니 작품의 수혜자가 되었다.

교황 식스투스 5세가 세스페데스의 조선왕 사제왕설을 확인하기 위해 조선에 보낸 특사. 이탈리아의 명문가인 오르시니 가문 출신이다. 프란치스코회 소속으로 조선 국왕이 예수회만을 받아들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예수회 신부들을 압박하기도 한다. 2차 견서사가 오자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 파견단장 로드리게스
성 요한 기사단 단원. 교황 명령으로 조선에 3년 기한으로 선상백병전 고문관으로 파견되었다. 대외적인 명목은 교황 특사 호위. 최신화에서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 소식을 듣고 관심이 동해 페데리코 추기경에게 전선 참관을 부탁해 달라는 귓속말을 하고 이에 페데리코 추기경이 부탁을 하게 되고 마침 성 요한 기사단의 능력을 이용하고 싶었던[220] 주인공의 오케이 사인으로 이순신과의 접점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정발과 함께 다니고 있으며[221] 수전을 보고 싶어한다. 조선 수군이 어떻게 싸우는지 알아야 가르치든 배우든 할 수 있기 때문. 그리고 조선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라는 코르나로 추기경의 지시를 받고, 부산 교두보에서 벌어진 최후의 결전에서 조선 수군 등선군과 함께 등선군으로 참전한다. 경인왜란 종결 후 3년간 등선군을 훈련시키고 3년이 지나자 유럽으로 귀국하여 보복원정은 참가하지 않는다.


6.3. 잉글랜드[편집]


잉글랜드 여왕. 대부분의 견서사 관원들은 일단 여자가 왕위에 오른 것을 부정적으로 봤고 여왕의 늙고 추한 외모를 비웃지만 이덕형과 허균은 그러지 않았다.(하지만 이들도 결혼하지 않은 것은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이덕형과 라틴어로 대화한 뒤 이덕형의 잘생긴 외모에 반한다. 그래서 질투 때문인지 롤리타는 단 한 번도 여왕에게 초대받지 못했다. 조선의 유교에 대해 "동방에서 왜곡된 형태의 기독교가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국왕이 교회의 수장이라고 이해하고 좋게 평가한다.

잉글랜드인으로 로어노크 식민지를 개척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 2차 견서사 방문 당시 이항복과 마우리츠 판 나사우의 회담에 참가해서 네덜란드인과 보헤미아인들을 조선으로 보낼 배편을 마련해주기로 한다. 이항복에게 아메리카에 로어노크 식민지를 건설한 것을 알려주는데, 작중 시점에 이미 로어노크 식민지는 멸망했고 본인도 그것을 알지만 허세를 부리려고 멸망했다는 부분은 빼고 말했다. 3차 견서사가 방문했을 때에는 아조레스를 약탈하는 대전과를 올려 유명해진 상태였고 재정난으로 조선이 미리 보내둔 선물과 교역품들을 허락 없이 처분했다. 로버트 데버루에게 모함을 당해 궁지에 몰리자 자기 사후 월터 롤리가 처형당하는 것은 원치 않았던 여왕이 그를 조선 대사로 보내기로 결정하여 조선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전 재산을 처분해 이민갈 사람들을 모집하고 자기도 전 가족을 이끌고 조선에 왔으며, 외국 사절을 한양에 두는 것은 예전 몽골의 다루가치가 연상된다며 대신들이 반대하자 주인공은 개성에 상관을 마련해 주재하도록 배려해준다. 사실상 추방을 당했지만 조선이 아메리카 개척에 나서자 영국 여왕의 전권대사 자격으로 조선의 아메리카 영유를 형식적으로 승인하고,[222] 최초의 증기선을 보고 미친듯이 정보를 수집하고, 여왕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자 통곡하는 등 애국심과 여왕에 대한 충성심은 잊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이후 계속 개성에서 살다가 1614년 62세로 병사한다.

2차 견서사와 함께 조선으로 떠난 잉글랜드 선박의 선장. 바런츠 제독의 함대가 북극항로 탐사를 위해 떠났다가 조난당하는 동안 왜병 포로를 동남아에 팔거나 조선군의 군수물자를 운송하는 등 운송업으로 짭짤하게 부수입을 올렸다. 3차 견서사의 파견과 함께 유럽으로 돌아간다.

셰익스피어를 좋아하던 상희가 주인공에게 2차 견서사를 통해 셰익스피어 전집을 구해다달라고 한다. 이에 이항복이 월터 롤리를 통해 셰익스피어 전집을 구하려 하나, 셰익스피어는 시인이지 극작가는 아니라며 시집만 구해다준다. 사실 1차 견서사가 방문한 시점은 셰익스피어가 극작가가 되기 전이었고, 로미오와 줄리엣 등 주요 작품들은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다. 주인공과 상희가 셰익스피어의 활동 시기를 정확히는 몰랐던 듯. 3차 견서사 방문 시에는 극작가가 되어 막 베니스의 상인을 무대에 올리는 등 활동 중이었다. 허균은 셰익스피어를 만나 그의 모든 희곡에 대한 조선에서의 출판, 상연, 각색 권리를 구매하고 상희가 부탁한대로 셰익스피어에게 거액을 주고 친필로 원고를 써줄 것을 부탁한다. 허균은 베니스의 상인 내용이 너무 샤일록을 나쁜 놈으로 몰아가는 반유대주의인 점을 안 좋게 보지만 독자들이 원하면 작가는 따라갈 수밖에 없는 법이라고 이해한다. 세상 반대편에서도 자신의 연극에 관심을 가진다는 사실에 감격했고 글로브 극장에 조선 왕실의 후원을 받는다는 광고를 써붙여 장사가 더 잘 되고 있다고 한다.

벌리 남작. 사망한 아버지 윌리엄 세실의 뒤를 이어 최고 고문, 국무장관, 재무장관을 겸임한다.

에식스 백작. 엘리자베스 1세의 젊은 애인. 권력을 위해 늙고 추한 여왕의 애인 노릇을 하고 있다. 정적 월터 롤리를 제거하기 위해 월터 롤리가 가톨릭 세력, 친스페인 국가인 조선과 힘을 합쳐 반란을 꾸미려 한다는 누명을 씌우려 한다. 결국 월터 롤리는 궁지에 몰려 조선으로 떠나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 사후 잉글랜드의 왕이 되어 4차 견서사와 접견했다.[223] 혐연가라 조선이 준비한 선물 중 담배는 거절했다고 한다. 성리학에 관심을 가져서 견서사에게 여러가지로 질문하고 수준도 높았다 하는데,[224] 이 세계의 왕권신수설은 성리학과 결합할지도 모를 일이다.


6.4. 네덜란드[편집]


네덜란드를 대표해서 이항복과 회담한다. 지금 네덜란드인들을 조선으로 보내서 조선 내에 네덜란드인 집단을 만들어두면 추후 교역에 유리하다는 이항복의 설득에 넘어가 조선에서 요구하는 기술자들을 보내주기로 한다. 3차 견서사와 재회하여 이주민들의 안부를 묻는다.

마우리츠 공작을 보좌해서 사실상 네덜란드의 국정을 운영한다. 조선에 보낼 사절단 편성과 친서 작성을 맡으나 본인이 직접 가진 않는다. 무뚝뚝한 마우리츠 판 나사우를 대신하여 사실상 외교 교섭을 전담한다.

2차 견서사와 함께 조선으로 떠날 네덜란드 선단의 제독. 일단 남쪽 항로를 통해 조선으로 간 뒤 북극항로를 통해 유럽과 아시아의 교통이 가능할 지 알아볼 목적이다. 탐사 결과를 조선에 제공하는 조건으로 조선의 지원을 받아 캄차카 반도로 향한다. 주인공은 이 세계에서는 캄차카 앞바다를 '바렌츠 해'라고 부르게 되겠군 하고 생각한다. 결국 북극항로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오호츠크해에서 조난당해서 유귀국(사할린 섬)에 고립됐다가 이순원 탐험대와 접촉하여 겨우 귀환하게 된다. 타고 온 배 3척이 모두 오호츠크 해에서 난파해버려서 조선이 보내는 3차 견서사의 배를 얻어 타고 네덜란드로 돌아가기로 한다. 그런데 배를 3척이나 날려먹고 나서도 북극항로를 포기하지 못하고 조선으로 이어지지 않으니 중국으로 이어질 거라 확신하고 다시 탐험대를 꾸리려 한다. 하지만 결국 귀환하지 못하고 실제 역사처럼 북극 바렌츠 해에서 불귀의 객이 되었다. 이로써 네덜란드인들은 북극항로로 동양과 교류하려는 걸 포기했다고.

  • 루트비히 판 메이헤런
네덜란드 중개업자. 허균이 가져온 조선 교역품 매각을 도왔고, 앞으로도 조선과의 교역을 독점하고 싶어서 허균에게 음식과 성적 향응을 제공한다. 이름의 모티브는 한 판 메이헤런으로 추정된다.

  • 안톤 판 베이트호번 대령
홀란드 출신 보병 장교. 조선에 파견된 네덜란드 특사. 언어가 달라 발음이 다를 뿐 알파벳으로 쓰면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 같은 성씨다. 주인공은 혹시 그 베토벤의 직계조상이라면 이 사람을 건드렸다가 역사에서 베토벤이 사라져버릴까 두려워서 꼭 고히 모셔서 유럽으로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한다.[225] 주인공에게 마닐라 갈레온이 아닌 자신들을 통하여 유럽과 교역할 것을 제안한다.


6.5. 신성로마제국[편집]


신성로마제국 황제. 조선 측에서는 왕보다 격이 높긴 하나 중화의 황제와 같은 격으로 부를 수는 없다 하여 원문 그대로 음차하여 카이저라고 부른다. 선물 받은 인삼을 여러 귀족들에게 나눠준 펠리페 2세, 식스투스 5세와 다르게 자기가 전부 독차지했다고 한다. 2차 견서사 때는 이덕형이 광산기술자를 초빙하기 위해 다시 알현하려 하나 마침 신성로마제국이 오스만 제국과의 15년 전쟁에 돌입하는 시점이기에 알현이 연기되고 있다. 더불어 이 전쟁으로 인해 병력이 부족하다며 원래 주기로 했던 윙드 후사르 100기를 20기로 줄여버린 장본인이다.

트란실바니아 공. 황진에게 윙드 후사르 100명을 건네준다.

헝가리군의 용장. 바토리 에르체베트의 남편.


6.6. 프랑스[편집]


이전부터 위그노 전쟁에 관련되어 자주 언급되었으나[226] 3차 견서사가 알현하며 처음 직접 등장한다. 조선인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임에도 조선에 대해 많은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조선을 포함해 동양의 전쟁사에 대해 관심이 많다. 결국 역사대로 가톨릭교도에게 암살당한다.

앙리 4세의 재무담당관.

앙리 4세의 측근으로 스페인을 수차례 격파한 명장. 조선을 이용해 스페인을 견제할 궁리를 한다.

  • 베르트랑
앙리 4세가 조선으로 보낸 특사. 가톨릭 평신부. 주인공의 비위를 잘 맞추는 유능한 외교관이다.


6.7. 기타 유럽 인물[편집]


  • 고메즈
벽란도에 드나드는 상선 캐러밸 산 안드레아와 갈레온 산 페드로의 선장. 처음 조선에 방문할 때 판옥선이 갈레온보다 작은 것을 보고 조선 수군과 전투가 벌어지면 손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세스페데스는 그가 혹시 조선을 상대로 해적질을 하지 않을까 우려한다. 조선과의 교역량이 늘어나자 더 큰 배인 산 페드로를 타기 시작한다. 벽란도에 드나드는 유럽 상선은 오직 산 안드레아와 산 페드로 뿐이었기에 사실상 조선과의 교역을 독점한 셈. 세스페데스의 우려대로 1,000두캇을 받고 일본에 벽란도로 들어가는 해도를 팔아넘긴다. 그러나 갈레온 함대가 목격되자 내통을 의심받고 조선에 억류되었다. 1등 항해사 에스피노사가 결국 금위사 심문에 이틀 만에 내통 사실을 자백해버렸다. 이후 등장은 없으나 해적 선장들처럼 참수되었거나 죽진 않더라도 다시는 조선과 교역하지 못할 테니 순간의 이득에 눈이 멀어 독점적인 교역로를 잃어버린 멍청이라 할 수 있다.

  • 안토니오
베네치아의 출판업자. 조선에 가져갈 책을 고르는 광해군에게 코르나로 추기경이 주선해주었다. 조선에 가져갈 책의 대금을 돈이 아닌 조선 서적으로 받기로 했으며 조선으로 따라가서 직접 조선 서적들을 가져갈 계획이다. 조선으로 가기 전에 미리 유학을 공부한다. 조선에서 동의보감을 포함한 수많은 책들을 가지고 유럽으로 돌아간다.

원역사대로 광해군과 결혼했다. 표면적인 부부 관계는 나쁘지 않아 보이지만, 어린 시절 천연두를 고쳐 준 상희를 깊이 짝사랑하는 광해군은 한 번도 유씨에게 애정을 가져 본 적이 없다. 광해군과 함께 2차 견서사에 동행해 '최초로 유럽에 가본 조선 여인'이 되었다. 유럽행에 앞서 주인공이 왕실외교를 위해 문성군부인이라는 봉작을 내렸다. 전쟁터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광해군과 달리 일개 어린 규방 규수일 뿐이라 유럽행을 두려워했으며, 남만선에 탄 뒤에도 초기에는 멀미도 심했고 우락부락한 남만인 선원들이 무서워서 선실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227] 유씨에게 아무 애정이 없던 광해군은 유럽행 반 년 전부터 "혹시라도 임신한 상태로 배 타게 될까 걱정된다"는 핑계로 전혀 관계를 갖지 않았다. 어느 정도 남만선에 적응한 후 코르나로 추기경에게 매일 1시진씩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를 배우고 있는데, 광해군이 혹시 불륜 관계로 오해받을 것을 걱정하여[228] "추기경을 너무 가까이하는 것 같다"고 우려를 표하자 "유럽 문물을 배우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그러냐"고 화를 냈다.
유럽에 도착한 후에는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며 예법과 이국적 미모를 겸비해 사교계에서 주목을 받고 자신감을 회복한 듯. 광해군과 2년간 단 한 번도 관계를 맺기는커녕 아내 대접도 받지 못해 스스로를 소박데기처럼 느끼게 된 나머지 소외감과 분노가 폭발, 광해군과의 결혼생활은 거의 파탄에 이르렀다. 문성군부인은 광해군에게 "나랏일을 맡았으니 소홀히 할 수는 없지만, 당신이 나를 아내로 대하지 않으니 나도 당신을 남편으로 대할 생각이 없다"며 이혼만 안 했을 뿐 부부관계는 끝장임을 선언했다. 광해군은 아내가 변한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유럽 남자들이 군부인을 유혹했음에도 외도는 끝까지 하지 않아서 정숙한 여인이라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 견서사가 귀국할 때가 되자, 조선으로 귀국하는 대신 광해군과 이혼하고 유럽에 남아 볼로냐 대학 문학부에 입학한다. 3차 견서사가 왔을 때는 편지만 교환했을 뿐 조선인들과 직접 만나지 않았고, 이탈리아인 애인이 생겼다고 한다. 4차 견서사가 왔을 땐 졸업해 피사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후 조선에 돌아가지 않고 유럽에 정착했다고 한다.


7. 대아주 각국[편집]



7.1. 몽골[편집]


북원의 제 37대 대칸(실제론 38대)으로 무자호란이 끝날 쯤에 조선의 영토 확장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는데 때 마침 해서부 정벌 당시 결국 코너에 몰린 해서부 하다 부와 예허 부가 몽골의 코르친 부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이에 전체 몽골의 대칸으로서 주인공에게 사신을 보내 "조선은 고려의 후신이고 고려는 대원의 부마국이었으니 조선도 마땅히 대원의 신하이다! 당장 해서부를 내놓고 물러가지 않으면 40만 몽골군을 끌고 와 조선을 멸망시키겠다!"라고 협박을 한다. 하지만 이항복이 금위사를 통해 알아낸 정보로는 40만은 몽골의 총병력이고 실제 코르친 부가 평시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5만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오히려 주인공에게 조소당한다. 결국 전쟁에 무리를 해서 10만 기병(총기병+철갑기병 포함)을 동원하지만, 신립과 오도리군의 퀴레시안 기병에게 대패하고 이후에 누르하치를 길잡이로 내세운 신립에게 역으로 침공당해 몽골족 1만이 넘게 죽은데다가, 수많은 포로와 가축·물품도 뺏기는 등 역으로 털리고 만다. 원역사대로 1592년 사망한다.

아버지 자사그트 칸의 뒤를 이어 북원의 대칸이 되었다. 틈만 나면 약탈하러 오는 건주위와 간신히 우호관계를 회복한다. 1598년 명의 카라코룸 원정에서 미리 정보를 입수한 뒤 철저히 준비한 초토화 작전과 게릴라전으로 명의 원정군을 완벽하게 격파한다. 이 대승리로 인해 몰락해가던 북원은 크게 기세가 오른다.
  • 에센 타이시[229]
북원 코르친부 수장. 무자호란 당시 조선이 세력을 확장해 코르친의 속령인 시버를 건드릴까 두려워 해서부를 부추겨 조선을 공격했다. 그러나 주력인 구왈차와 시버는 호랑이 병마사 신립에게 전멸했고, 이후에도 조선의 북원 침공, 건주위의 주된 원정 루트가 코르친이라 자신의 부가 완전히 털릴대로 털렸으니 좋은꼴은 못 봤을것이다.

명에 귀순한 몽골인 장수. 실제로는 임진왜란 직전인 1592년 초에 반란을 일으켰지만 여기서는 더 일찍 무자호란 와중에 반란을 일으키고 그덕에 이여송의 요동행을 늦춘다. 이후 난을 진압하고 무자호란에 참전하러 가는 이여송이 동생 이여백과 나눈 대화 중 잡아 베었다고 언급한다.

체첸 칸이 명군을 대파하고 기세를 올려 오이라트 부까지 지배하려 하자 조선에 원조를 청하러 온 사신들. 체첸 칸의 할하 부 군대에 대항하기 위해 조선에서 총과 화약을 얻는 대신 조선을 형의 나라로 받들고 한혈마낙타로 값을 치르겠다고 한다. 조선에 있는 동안 임꺽정을 만나 친해진다. 주인공은 한혈마도 탐나고 몽골을 견제하기 위해 오이라트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7.2. 아모국[편집]


  • 석탈왜(아푸카스카무이)
무종 시절에 찾아온 아이누인 석호랑의 증손자로 4대째 조선 조정 사역원에서 일하고 있다. 아이누식 이름은 겨울곰이라는 뜻의 아푸카스카무이. 조선의 힘을 빌어 북해도에서 일본 세력을 몰아내고 아이누의 나라를 세울 꿈을 품고 있다. 이름이 행보 그 자체인 인물이다. 그러나 아이누 부족 통합은 실패했고 오다 노부나가가 모가미 요시아키를 보내 북해도 정벌을 시작해 버렸으며 많은 반일성향 아이누족들이 살해당했다. 경인왜란이 끝난 후 조선의 일본 원정에 맞춰 다시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킬 계획이며 조선에서 왜조총 300정을 포함한 대량의 물자를 받아온다. 을미동정 이후 아이누 중립화가 결정되었으나, 외부의 위협이 사라지자 아이누 부족들은 다시 뿔뿔히 흩어진다. 이에 이이첨의 조언으로 무력을 통한 통일보다는 연맹제를 통한 선거군주정 국가를 세울 계획이다. 선거군주가 되어 10년을 통치했으나 아모국 족장들은 엄중한 국제 현실을 모르고 부족사회에 안주하려고만 하여 석탈왜 사후 아모국은 다시 구심점을 잃어버렸고, 석탈왜의 후손들은 아모국을 떠나 조선에 옮겨와 조선에서 명문가로 살아간다고 3부에 언급되었다.


7.3. 유구[편집]


유구 국왕. 오다가 조선 침공에 앞서 쌀 2만 석과 황금 1만 냥을 요구하자 당장 오다의 침략을 막기 위해 쌀 5천 석을 바친다. 그러나 전쟁이 조선의 승리로 끝나자 조선이 오다에게 협조한 류큐를 공격할까 두려워하여 저자세를 취한다. 최근은 바닷길이 위험해져 상행을 못 하고 있지만 류큐는 교역 경험이 많다며 조선의 동남아 상행에 동행하길 원한다.


7.4. 현돌궐[편집]


오스만 파디샤. 조선에서는 대칸이라고 부른다. 이기빈의 아라비아 남부 해안 습격을 보고받고 항구를 제대로 수비하지 못한 장수와 지방관 여럿을 처형한다.

해시시에 중독된 무능하고 거만한 인물.[230] 이기빈의 천회사가 방문하자 자신은 조선을 듣도보도 못했다며 조선과 조선 국왕을 야만인 취급하는 등 모욕적인 말을 쏟아내서 이기빈을 분노하게 만든다. 이후 이기빈이 커피 씨앗을 빼돌리려 하다 발각되자 잡입했던 강연성과 리카르도를 채찍질로 고문하고 조선 국왕의 친서를 찢어버려서 이기빈의 분노를 폭발시킨다. 해시시에 취해서 자다가 기습한 조선군에게 생포당한 뒤 모카 시 전체가 조선군에게 점령당했고 광장에 끌려나와서 온몸의 털을 삭발당하는 수모를 겪는데다 커피 씨앗 뿐 아니라 묘목과 전문 농부, 노예시장의 노예들, 자기 성노예 셀린까지 몽땅 털린다. 결국 콘스탄티노플로 끌려가 혀가 뽑히고 전신의 가죽이 벗겨진 채로 바닷물에 빠뜨리는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처형되며, 전신이 토막난다.
이후 3부시점 오스만에서도 한세기에 걸친 모르는 나라와의 적대관계를 만들었다고 하여 평이 안좋다.


7.5. 동남아[편집]


섬라(아유타야 왕국)의 국왕으로 경인왜란 도중인 1590년 즉위했다. 섬라에 아시가루 1만명과 노획 병장기를 팔아넘기고 쌀을 사들일 생각중인 주인공은 즉위를 축하하기 위하여 이수광을 사절로 보낸다. 처음에 신호영이 납서선이라고 한자로 음차해서 보고했기에 주인공이 듣고 누군지는 못 알아들었으나 나중에 나레쑤언임을 알게 된다. 조선과 교역을 맺은 것을 매우 기뻐하며 보답으로 조선에 태국 요리사들을 보내 조선에 태국 요리가 전파된다.

베트남 응우옌씨 정권의 초대 국왕, 후 레 왕조가 허수아비이긴 해도 아직 남아있으므로 황제를 칭하지는 못하고 광남국왕(廣南國王)을 칭하고 있다. 주인공이 쌀을 수입하는 대신 나레쑤언처럼 왜병 포로들을 용병으로 팔자 이 용병들로 적대하는 막씨 정권과 싸우는데 쏠쏠한 재미를 보고 왜병을 더 팔아달라고 청하지만 조선에도 팔 왜병이 없어 대신 무기를 팔기로 한다. 그 대금으로 쌀 대신 코끼리로 결제하고 싶다고 청했고 병조판서 김명원은 나레쑤언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전투용 코끼리 도입을 주장했지만 주인공이 처음에는 전투용 코끼리는 별 쓸모없다고 거부했으나 기중기, 견인차 용도로는 쓸모 있을 것 같아 코끼리로 대금을 받기로 한다.

미얀마 따웅우 왕조의 왕세자. 나레쑤언에게 코끼리 결투에서 패해 죽는 모습을 이수광이 목격한다.

  • 범씨향(안남파)
안남 상단의 여대방. 신호영에게 필담으로 쌀을 원한다면 섬라국으로 가볼 것을 제안하며 정보를 준다. 신호영은 대방이 여자라는 것에 당황했는데, 거유라고 한다. 이후로도 조선과 계속 교역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범씨향이라는 본명보다는 안남파라고 주로 불린다고 한다. 남자 상인들보다 훨씬 담력 있는 호걸로 유명한 듯.


7.6. 천축국[편집]


무굴 제국의 황태자. 이기빈이 해적들을 털다가 해적들이 잡아놓았던 무굴 귀족들을 구출하여 콜카타로 데리고 오자 마침 그 근처를 순시하다가 이기빈을 만나 술자리를 베풀고 크게 치하한다. 두 사람의 성격이 비슷하여 금방 호형호제 하는 사이가 되었고 조선이 콜카타에 상관을 세우고 무역을 하는 것을 허락한다. 조선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이기빈에게 전해듣고는 왜병을 받고 대가로 보물을 보냈다.

[1] 을미동정 때 천황에 의해 조적(朝敵, 조정의 적)으로 선포되면서 양자 관계가 끊어지고, 도요토미 성도 박탈당해 다시 하시바로 돌아온다,[A] A B C 의성은 원 역사 의성왕대비 인순왕후의 존호로 나머지 두 글자는 여기에 대응해서 추정.[2] 원 역사 의인왕후의 시호.[3] 작중 묘사 없음. 추정.[4] 단 주인공과 상희가 연심을 품고 있다는 정도까지만 알았다. 물론 무당이 아닌 이상 전생에 부부였다는 초자연적인 부분은 모르는 게 정상이다.[5] 다만 일본과의 전쟁준비를 이해하지 못하는 등 국제정세를 읽는 눈은 당시 조선 사람들과 똑같은 수준인 듯하다. 실제로 주인공이 현대인이라 미래를 알고 있었던 것뿐이지, 저 시대 조선 사람들은 신료들을 포함해 전부 저랬다.[6] 이 점은 본인부터 백정의 외손녀라서 신분이나 출생에 따른 차별의식이 희박하고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지녔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만 이건 후궁이 낳은 자식들도 중전의 자식들로 취급받기에 중전이 본인 자식이 아님에도 옹주의 혼약을 찬성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던 것인지라, 옹주의 친모인 후궁은 자기 딸을 어디 반듯한 양반가 자식도 아니고 왜인한테 시집보낸다는 청천벽력 같은 결정에 충격과 공포. 결국 동병상련의 처지에 있는 상희가 가서 달래줘야 했다.[7] 사실 처녀적 다지를 봤다는 말은 들었고 중전 본인도 주인공이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눈치챘으니 주인공이 무종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진실이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고 남편이자 임금으로 섬기기로 했을 뿐.[8] 다만 아직 상빈 이씨와 인현황후 민씨가 같은 상희라는 것과 재석과 상희가 미래인이고 이 두 사람의 윤회가 끝나려면 멀었다는 사실까지는 모르고 있다.[9] 원 역사의 선조의 아들 영창대군과는 군호와 이름만 같은 가상인물이다.[10] 독자들도 "경성군에게서 어떻게 이런 아들이 나온 거냐"는 반응이 많다. 작가에 의하면 중전의 유전자를 많이 받았다고. 세자가 야심이 대단하긴 하지만, 반역을 일으키진 않을 것이라 한다.[11] 이건 세자된 입장에서 부왕에게 성리학자로서 상식적인 수준의 답변을 한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내심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12] 사실 아무리 세자래도 이 정도로 솔직한 발언은 왕권에 대한 도전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주인공이 세자의 권위를 챙겨주는 것은 이미 유명했고, 세자의 권위에 대한 도전은 결코 용납하지 않고 대리청정도 여러 번 맡기면서 경험을 쌓아주고 했기에 이 정도의 깊은 신뢰가 생겨 이런 대화도 목숨 걱정 없이 할 수 있게 된 것이다.[13] 공이 크지만 종도 조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신하가 많았는데 성이 조로 결정하고 밀어붙였다. 실제로 신하들은 선왕 묘호를 한 끗발 낮아 보이는 걸 지지한 뒤 선왕의 아들인 새 왕이 그보다 위상 높은 묘호로 결정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부왕에 대한 효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왕의 권위를 높여야 물려받은 자신의 권위도 높아진다는 정치적 계산도 깔려 있다. 이 때문에 효성 지극한 문종은 말할 것도 없고, 아버지와 사이 좋았다고 할 수 없는 광해군도 묘호에는 신경썼다.[14] 정통성 있는 세자에서 즉위한 것도 있지만 주인공이 세자의 권위를 생전부터 워낙 잘 챙겨준 탓에 권위가 드높았고, 실무도 여러 번 맡아보았으며 무엇보다 국왕에게 타국에서도 공포로 여길 강력한 군권이 있기에 주인공이 죽고 난 후 자리를 순식간에 잡을 수 있었다. 주인공도 왕권이 막강했지만, 본인의 업적에서 기반된 것이지만 이성의 경우는 아예 국왕의 적자인 세자에서 즉위한 케이스라 정통성이 다르며 그 아들인 이연은 아예 원손에서부터 시작해 세자를 거쳐서 즉위했기에 더욱 크다. 이 차이를 단종 복권으로 비교할 수 있는데 주인공은 정통성 문제 때문에 단종을 복권하고 싶어도 후폭풍 때문에 할 수가 없으며, 세자인 이성도 정통성면에서 주인공보다 나아도 쉽지 않으나 손자인 이연은 단종을 복권할 수 있을 정도로 더욱 크다고 비교했다.[15] 이것이 대단한 것이 이 시기 조선군은 대규모 전쟁을 수차례 겪으며 동아시아 역사에 없던 수준의 어마어마한 강군이다. 이런 강군을 손에 쥐고도 확장을 하지 않고 내치에 집중 했다는 것은 경조가 굉장히 실리적인 사고를 했다는 뜻이다.[16] 이연은 단종과 같은 원손-세손-세자-국왕 루트를 탈 예정으로 그야말로 절대적인 정통성을 가지게 된다. 아버지 이성은 문종과 달리 건강하고, 장조 승하 시점에서 이연도 이미 14세를 넘겨 단종과 달리 어린 나이에 즉위해 찬탈당할 가능성도 전무. 감히 이의를 걸 수 없는 정통성과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물려준 왕권으로 단종 복위는 어렵지 않게 이룰 수 있어 보인다. 실제 역사에서 단종을 복위한 숙종 역시 막강한 정통성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었다.[17] 만력제가 생각없이 한 말처럼 보이지만, 소설 세계의 만력제는 주상순을 태자로 책봉했다. 작가의 만력제 해석을 고려하면, 만력제가 명분이 부족한 주상순을 태자로 책봉한 것에 대한 반발을 억누르기 위해서 일부러 한 정치적인 말로 보인다.[18] 출정 전에 했던 '어차피 출세도 못하는거' 같은 발언도, 야심을 품었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서 숙청될 여지가 있었다. 15살 때야 그냥 철 없던거고 부왕에게 좀 혼난거로 끝났지만, 중국에서 저런 말 들은 상태로는 진안군이 권력을 노리는 눈치만 보여도 역모로 해석됐을 것이다.[19] 연재일인 2019년 12월 5일 기준 은 시세는 트로이온스(31.1034768 g) 당 16.94달러, 환율은 매매기준율 기준 1,191원으로 은 천냥(37.5 kg)은 2432만 4700원이다.[20] 명대에는 이미 유물과 골동품 수집이 유행해서 짝퉁도 그만큼 넘쳐났다. 장팔사모는 소설 삼국지연의에만 등장하며 정사에는 언급도 되지 않는다. 재미있는 것은, 이 위조된 가짜 장팔사모도 현대에 오면 진안군의 일화와 함께 문화유산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21] 실제로 13세기부터 19세기까지 쭉 프랑스 국왕의 대관식에 쓰이던 샤를마뉴 대제(742~814)의 검 주와이외즈는 오늘날 퍼멀은 10~11세기경, 가드는 12세기, 칼집은 13세기 물건으로 추정되며 심지어 본체인 칼날의 연대도 명확하지 않은데도 계속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22] 내용이 마치 실제 우리 세계 역사의 임진왜란을 보고 쓴 것 같다. 왕이 피난 가는 곳이 의주가 아니라 함흥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그래서 내용을 들은 상희가 놀란다. 이쪽 세계 대체역사소설의 시조가 된 셈.[23] 결국 만력제는 본인 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진안군에게 왕을 시켜주고 싶다는 뜻을 이뤘다.[24] 성질 더러운 경성군이 인빈 조씨를 인격적으로 대우해준 것은 아니다. 동침을 가장 자주 했을 뿐.[25] 표면적으론 임금이 남만에서 들여온 고구마를 가져가 심으라며 나눠줬는데 바로 죄다 삶아 먹은 사건으로 벌어진 숙청이다. 실제론 서인 숙청과 정계개편을 통해 정부조직을 확고하게 장악하려고 벌인 사건도 아니고, 그냥 우연히 벌어진 황당한 사건이었다. 그 때문에 주인공도 기군망상이지만 강경한 처벌을 하지 않고 이 때 사고를 친 이들을 나중에 천천히 은퇴시키는 정도로 끝냈다.[26] 전해지는 얘기에 이 사람은 기억력이 엄청 비상했다고 전해지며, 인재 보는 눈도 뛰어났다고 한다. 한음 이덕형의 외삼촌이다. 아들 류희서는 훗날 도승지를 지내고 왜란도 무사히 넘겼지만 (첩 문제로 인해 원한을 산 임해군이 사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화적패의 습격을 받아 비명횡사한다. 이 세계에서는 임해군이 왕자가 아니며 왜란 뒤 사형당해 아들이 변을 당하지 않았으니 이 세계의 숨겨진 수혜자다.[27] 원역사에서 음력 1590년 4월 7일 사망했는데 10일 더 살았다고 한다. 사실, 그냥 살 수도 있었지만 대체역사 마이너 갤러리의 유저 하나가 갤주인 작가에게 노수신의 자연사 시점을 알려주자 다음 화에서 죽어버렸다.[28] 역모사건이라고 판을 벌였는데, 정작 역모에 동원될 군대와 추대될 왕족이 없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다시 말해 기왕 물갈이 할 거면 조작을 좀 그럴 듯하게 해서 외관직도 같이 갈아버리라는 뜻이다. 그 중 군대 부분에 전라도 관찰사였던 윤두수가 엮여버린 것이다.[29] 원래 역사에서도 이순신을 모함한 것 외에는 선조가 명나라로 도망가려는 것을 끝까지 막는 등 큰 오점 없는 사람이긴 했다.[30] 단, 주인공의 말에 의하면 유능함으로는 류성룡이 이항복 이상이라고 한다.[31] 2년 반 만에 해낸 일이며,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도 "어지간한 예수회 신부보다 낫다"며 감탄한다.[32] 다만 우연히 만난 장다르메 20기를 데려오기는 했다.[33] 예를 들어 정월 대보름 날 주인공과의 대화가 이렇다. "영상." "예, 전하." "내 더위 사시오." "예?... (뻘쭘)" 이에 주인공은 '쳇, 이런건 역시 이항복한테 해야해.'라고 생각한다(...)[34] 이항복이 서양 여인을 꼬시려하자 "그럼 당당히 가라"고 한 뒤 뒤에서 이억기에게 "여기서도 무례긴 한데, 형님 성격상 막아도 꼬시려 할 양반이라 당당하게 하도록 하는 게 낫다"고 말하기도...[35] 여담으로 딸 이름이 롤리타다.[36] 실제 초상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덕형은 당대에도 인정받은 공인 미남이었다. 즉, 자신의 궁금증을 풀어준 이가 잘생기기까지 했으니 안 반할 수 없는 것. 그 얼굴값은 3차 견서사 때도 이어져 엘리자베스 여왕이 총애했으며 롤리타를 질투해 그녀를 초대하지 않을 정도이다.[37] 원래 1백기를 주겠다 했는데 루돌프 2세가 거부하여 20기만 데려올 수 있었다.[38] 그렇지만 사실 흘리기 전에 이미 정여립 쪽에서 눈치를 챈 상황이라서 이산해가 선수를 치지 않았으면 본인도 같이 쓸려나갈 수도 있었다.[39] 이때 그 친구장인과 서로 니 사위가 나쁘다고 투닥거리는게 은근히 웃기다. 조정과 군부의 최상위 실력자들이 사위문제로 다투는 것이기 때문. 덤으로 그 사위들도 조정에서 최상위 실력자들로 아예 고명대신이 될 정도였다.[40] 미래인인 주인공에게 있어서 정철은 입으로는 성리학 소리나 하면서 정작 본인은 중증 술고래에 실무행정 능력은 개판이라 아니꼽고, 무엇보다 그 뛰어난 글 솜씨로 하여금 주인공을 포함해 21세기 대한민국 수험생들을 고생시키는 철천지원수나 다름없는 인물이었기에 정철이 더더욱 싫을 수밖에 없었다. [41] 주인공도 진짜 어지간하면 복귀 안 시켜주고 싶었는데, 정철이 쓴 기록이 너무 방대하고 정확했기 때문에 기록 문화가 왕성한 조선에서 복귀시키지 않기는 힘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도로 데리고는 오되 사전청 도제조 정도면 정치적 실권은 없으면서 글재주나 실컷 발휘할 수 있는 자리일 테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 그 자리에 앉힌다.[42] 연해주에서 조선 조정이 확실하게 통제 중인 인구는 고작 5만 명 정도라고 한다. 3만명은 야인들이며, 1만 명은 조선인들이고, 1만 명은 강제 노역하러 온 죄인들. [43] 참고로 이 F4는 고구마게이트 사건 당시 고구마를 죄다 삶아먹지 않은 사람들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원익과 류성룡은 고구마를 가져다 제대로 심었고 이항복은 몇 개는 삶아먹고 나머지를 심었고 이덕형은 "나는 농사꾼이 아니다"라며 가져가지도 않았다.[44] 이게 얼마나 대단한 것이나면, 현대 재판소에서 재판장이 하루 15건의 소송을 해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것도 전라북도에서 경상북도까지 직접 오가면서 원고와 피고 둘 다에게서 항소가 들어오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45] 증거가 없으니 밝혀질 가능성은 별로 없겠지만 정일한의 혈통이 밝혀지면 난리가 날 것이다. 주인공이 빙의해 있는 경성군은 무종의 동생 진성대군의 증손자이지만 정일한은 무종 본인의 손자이자 명종의 사촌, 즉 그가 왕위 계승 서열이 더 높다. 그러나 유전자 검사 같은 것도 없으니 이 사실이 밝혀질 일은 없을 것이며, 밝혀졌을 땐 무종이 암행을 나가서는 남사당패 출신의 천한 여인과 불륜을 저질러 사생아를 낳았다는 정통성 문제가 또 생긴다. 즉 정일한의 아버지는 혈통이 밝혀질 경우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될 확률이 높은 조선 역사상 유례없는 임금의 사생아였다. 정호찬이 이 아이를 자기 아이로 키운 것은 무종에 대한 최대한의 충성이었던 셈.[46] 상희는 정일한을 자신의 손자가 아닌 정호찬의 손자로 알고 있지만 1부 때 정호찬과 친분이 있었기에 그의 손자로 알려진 정일한의 근황에는 관심을 갖고 있다.[47] 주인공이 미리 신경 써서 조총을 50정이나 챙겨준 권율과 다르게 정일한은 말 그대로 맨땅에서 시작했음에도 조총 몇 정을 구해오고 노궁 몇 개를 직접 제작해서 고을의 무장을 갖췄다.[48] 실제 역사에서는 일본의 침공 가능성에 대하 황윤길과 상반된 보고를 한 외에도 축성에도 반대한 바 있는데, 이는 백성들을 괴롭힌다는 명분에서였다. 하지만 명군 세계에서는 일본의 침공 의도가 명백한데다가 축성을 해도 백성에겐 저화를 지급해 부역이 민폐가 아니라 오히려 구휼의 의미까지 가지게 됐으니, 김성일이 전쟁준비를 반대할 이유도 모두 사라졌다.[49] 이 상황을 지금에 대입하면, 한국에 쳐들어온 적국의 외교관과 한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만나는 자리에서 서울대 다니다 행정병으로 입대한 이등병이 고래고래 소리 지른 격이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이었기에 딱히 김상헌이 실수를 저지른 것처럼 묘사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원래 조선은 언로의 자유를 매우 중시해서 타당한 주장이라면 아무리 신분이 낮은 이도 비교적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다.[50] 광산기술자를 뽑는다는 명목으로 후스파 신교도를 머나먼 조선 땅으로 추방하려는 가톨릭의 음모라는 소문이 돌았다. 기술자를 섭외하는 공고문이 찢기는 등 곤란을 겪기도 하지만 '섭외 대상은 가톨릭 신자에 한한다'는 추가공고를 내 수습.[51] 어머니가 스페인 교관과의 하룻밤 인연으로 낳은 자식이라 대외적으로 사실대로 밝히기가 힘들어 그렇게 키운 듯하다.[52] 여담이지만 링크에 있는 정곤수 초상은 최근 X-ray 촬영 결과 청나라 관리의 초상 위에 덧칠을 해서 조선 관복을 그려 넣은, 위작임이 밝혀졌다.[53] 실제 역사에서도 명나라를 상대로 외교 활동을 했다.[54] 사실 아전들은 대남도 호족에 가까운 정준석에게 데인 경험들이 있어서 겨울 바다를 건너다 난파해서 죽어버리라는 심보로 추천했으며, 홍윤범은 이 속내를 눈치챘지만 중앙에서 파견된 관찰사로서 정준석이 눈엣가시인건 마찬가지라 갔다 오는 중에 죽어버리면 그의 영향력을 일소할 수 있고 잘 다녀오면 그냥 좋은게 좋은거란 생각으로 결정했다. 물론 정준석이 대남도에서 관찰사 다음가는 거물이기 때문에 그가 대관이 될 이유는 충분했다.[55] 무자호란 중 목단강에 다리를 짓고 이서 지역(조선이 할양을 요청하려고 생각했지만 아직은 명나라 영토였던)에 수비 거점을 짓자, 임시 어전회의에서는 우려를 표하나 신립만은 "거기 도적들이 많은 지역이니 상관(商館)을 크고 튼튼하게 지었다고 하면 되잖아"라고 일축할 정도.[56] 덕분에 기병제일주의로 느려터진 보병을 짐으로 여기기도 한다.[57] 주인공은 성품이 차분하고 시야가 넓은 무인을 선호한다. 그래서 1부 당시 원 역사에서 나중에 권력을 쥔 후 타락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유순정을 키웠다.[58] 북원 원정을 성공시켜서 주인공이 온갖 포상을 내려주면서도 공이 너무 커서 대체 뭐라고 칭찬해야할지 모르겠다고 대놓고 말할 정도였다. 그걸 듣는 신립은 이보다 더 당당할 수가 없었다고 하며, 내려진 포상에 만족한다.[59] 다만 이것도 하남벌 전투의 상황을 본다면 나름 최선의 판단이었다. 자세한 것은 해당 회차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60] 하남벌 전투의 패장인지라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대신 왕의 사돈이라는 권위를 이용해 확실히 관철시키려는 주인공의 의도였다. 정치적으로도 의미가 있는데, 현재 세자에 이어 왕위계승 2순위인 영창대군이 만일 이순신 같은 전설적인 무장의 사위라면 정국 불안정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지만, 신립은 이미 전사했기 때문에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61] 이 세계선에서는 무종이 노비종부법을 법제화해서 아버지가 양인인 유극량은 자동으로 양인...이긴 했으나, 어머니가 그냥 노비도 아니고 도망노비라 법적으로 문제가 없진 않았다. 그래도 어쨌든 아버지 신분이 양인이니 배 째고 양인으로 살려면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실제 역사처럼 어머니의 옛 주인에게 사죄, 주인이 그 정직함과 기개를 높이 사 용서해주고 뒷배가 되어줘서 양인으로 인정받은 후 벼슬길까지 나아간다.[62] 주인공이 "북방에 무슨 일 생길지도 모른다"고 해서 원정에 참여하지는 않았다.[63] 임꺽정은 1504년생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것은 아니라길래 1540년생으로 설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1504년이 아니라고 해도 1550년대에 도적 두목을 하던 사람이니 1540년생은 살짝 무리수. 작가의 말에 의하면 타고난 무력과 리더십이 뛰어나다면 10대 중반에 도적 두목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고 임꺽정을 등장시키고 싶어서 약간 무리수를 썼다고 한다. 어차피 대체역사고 주인공의 노력으로 현실이 바뀐 세계선이니 실제 역사보다 늦게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64] 임꺽정을 신립이라고 오해한 야인들은 모랄빵이 나서 도주한다.[65] 물론 3명의 우열은 명확하지만.[66] 물론 유극량이나 선거이 등등과 함께 전쟁의 승리에 큰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다.[67] 물론 살아남아서 원정군에도 참여했고 앞으로도 계속 승진이 보장되었으니 삶 자체는 훨씬 나아졌기에 역사의 피해자까지는 아니지만 역사적 임팩트는 크게 줄어들었다. 그래도 사후 무묘에 배향되었기에 잊혀지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68] 물론 구하러 갔을 때보다 안 갔을 때 더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과 구하러 가지 않아도 아군이 버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있었다.[69] 2부 시점에서 무묘가 설립된 이후 배향된 공신은 유순정, 이장곤, 김지, 신립뿐이다.[70] 실제 역사에서는 조선에 왔다가 실종되었다. 그래서 김충선이 이 사람 아니냐는 학설도 있는 사람.[71] 다만 후퇴한 이후에는 퇴각에 집중한 나머지 남원성에 보관 중이던 양곡을 처리하지 못한 것을 한탄한다.[72] 역덕후 재석도 모른 것을 한의사 출신 상희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간단한데, 상희가 상주 출신이라서.[73] 머리에 조총을 1발 맞지만 남만투구가 튕겨내서 살았다.[74] 애타게 이순신의 지원군을 기다렸지만 안타깝게도 이순신의 수군은 와키자카 군과 전투를 치르고 화약을 보충해야 해서 도울 수가 없었다.[75] 원 역사대로 조복을 입고 절을 올리려 했지만 자신의 집을 포함해 성 전체가 불바다가 되어서 갑옷을 입고 절을 올린다.[76] 공교롭게도 어머니인 주모는 전쟁 중에 궁궐을 찾아와서 남편과 큰아들이 군인인데 둘째도 천주교 의군이 되어서 죽으러 나가겠다고 해서 살려달라고 호소했었고, 전쟁 후 재석이 암행을 갔을 때 간 주막의 주인으로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었다. 여담으로 남편과 장남 둘 다 전란 중 잘 싸운 도감군에 속해있었고, 남편은 전주에 있다가 왜군의 기세가 꺾인 시점 이후에 경상도에 가서 전사했고 장남은 조선군이 대승을 거둔 논산 전투에서 전사했으니 운이 무척 안 좋은 편.[77] 칼부림의 그 김경서와 동일인물이며, 김응서는 개명 전의 이름이다. 원 역사에선 항왜들의 후원자 역할을 하였으나 간첩 요시라의 꼬드김에 넘어가 이순신이 의금부에 갇히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78] 판옥선을 명령무시하고 건조하다 파직당한 상태였다.[79] 장수들 중 유일하게 전쟁에 나갈 때마다 걱정하며 주인공이 선조를 싫어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순신을 핍박한 것 때문이었다. 역덕인 주인공에게는 당연히 최고의 영웅이었을 듯.[80] 대마도 공략은 대마도 백성들을 구출하도 왜군의 후방을 불안하게 만든다는 전략적 목표 달성은 물론이고, 오위군 포로들을 구출하고 왜군의 치중까지 싹 쓸어오는데, 이 모든게 완벽한 기습으로 이뤄져서 조정에서 출정 보고인줄 알고 장계를 받았더니 전과 보고여서 재석과 신하들을 다 벙찌게 만든다. 한산도대첩에서도 아군 피해는 거의 없이 1천척에 달하는 왜 수군 중 800척을 격파했다.[81] 실제 역사에서는 조금만 군율을 위반해도 "끌어내 베었다" 혹은 "곤장을 쳤다"는 언급이 있을 정도지만, 작품에서는 본인이 못마땅해도 너무 지나친 수준만 아니면 군기대에 넘겨 처벌하는 정도다.[82] 그래서 을미동정 당시 오사카도 재빨리 항복하지 않았으면 통째로 도시가 불탈 뻔했다.[83] 헛소리하던 사람들은 견서사로 만리타국에 보내는 걸 일종의 유배로 알았는지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84] 원래 작가가 견서사로 보냈다고 했다가 설정을 까먹고 무자호란에 참전시킨 뒤 견서사에 동행하려다가 말았다고 해서 설정구멍을 메꾼 것.[85] 그러나 개인 성격과는 별개로 장수로서 군사적 대응은 최후의 수단으로 남기는 분별력과 인내심이 있다. 후술할 전투에서도 전략 목표를 정확히 설정하고, 주변환경과 가진 군사자원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고, 휘하 병력들을 잘 통제해서 큰 피해 없이 목표를 달성하는 뛰어난 모습을 보인다.[86] 실제로 170여년 후 류큐로 표류했던 조선인 장한철의 표해록에도 류큐인들이 이 원한을 잊지 않아서 조선에서 표류한 자들 중 탐라인은 찾아내서 죽이려 했다는 기록이 있다.[87] 이왕 일이 벌어진 김에 제대로 하기 위해서 비대한 태수 몸무게만큼의 생두, 묘목, 농부까지 털어왔다.[88] 이기빈이 단독으로 이런 공격을 결정한 이유는 당시 조정이 정철이 지은 "제국수도낙성기"(동로마 제국 멸망기)를 읽고 여기에 성리학적 세계관을 대입하여 푹 빠져서 감히 주나라 문왕 시절부터 있었던 황제국을 멸망시키고 제도 콘스탄티노플을 군사로 짓밟고 황제를 전사케 한 오스만 투르크를 적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묘사된다. 매사 용의주도했던 작중 이기빈은 여기서도 이런 조정과 사대부의 정서까지 고려하고 일을 벌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실제로 이후 뒷수습을 할 때 조정의 여론도 이렇게 돌아갔다.[89] 정말 용의주도한 게 처음엔 조선에서 가져온 배 한 척, 소코트라에서 산 배 한척만 가지고 가서 따지니 상인들이 가소롭다며 내쫒으려 했지만 그제서야 수평선 너머에 숨겨둔 본함대를 끌고 나와 기겁하게 만든다. 즉 처음부터 함대를 끌고 갔으면 상인들이 냉큼 배값 물려주고 말아 구실을 안잡혔겠지만 애초부터 구실을 만들기 위해 함대를 숨긴 것.[90] 재물도 재물이지만 스페인과 관계가 개선되고 무굴 제국과 우호 관계를 맺게 된 게 너무 커서 처벌하기도 까다로웠다.[91] 원래의 경성군도 김지의 자질은 나름 인정하고 있었던 듯하나, 짠돌이 경성군은 그 역량을 무기를 싸게 개발하는 데 쓰라고 임명한 것이었는데 눈치 없는 김지가 돈 잡아먹는 무기들을 팍팍 들고 오는 바람에 그만...[92] 총통틀을 12개나 올린 현대로 치면 MLRS+중전차스러운 물건이다.[93] 거북선 용머리로 적선이 부서지는 걸 보면서 그걸 안주삼아 병나발을 분다(...)[94] 실존인물인 항왜 여여문으로 추정된다.[95] 사실 아버지 마사유키가 아들 혼인시켜 주는 걸 까먹었다(!). 어차피 왜인 출신이라 버젓한 집안에 장가보내긴 힘들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고...[96] 사노부는 왜인 출신이긴 해도 그 나이 대에 조선에서 비교할 바가 없는 최정예 무인이고 이면은 경력은 짧아도 그 이순신의 아들답다는 말이 나올 정도니 안 그래도 양자인 처지라 입지가 썩 안좋은 권익경이 아무래도 밀리기 마련이다.[97] 실존인물 송희원과는 출생시점도 다르고 가족관계도 다른 가상인물이다.[98] 윤두수 딸과도 눈이 맞기도 했다. 당시 윤두수는 전가사변 중인 죄인 신분으로 좁아터진 집에 사는 중이라 남녀 간에 내외하기가 힘들었다. 그 덕에 군무 보러 윤두수 집에 자주 드나들던 김충선이 윤두수 딸과 서로 반한 것.[99] 원주민들 앞에서 순록을 타다가 떨어지자 남방의 번개신인 자신과 북방의 신은 맞지 않는다고 둘러대서 이 일로 반차원에게 놀림을 받는다.[100] 자신은 펠리페 2세가 보냈으니 자신의 충성의 대상은 펠리페 2세지 그 아들이 아니라는 논리다.[101] 그래서 이후 합류한 네덜란드 교관들이 스페인 교관들을 뒷담화하고 있다는 걸 금위사 보고를 통해 알고 마뜩치 않아한다.[102] 작가 댓글에 따르면 이름의 모티브는 쾌걸 조로의 히로인 롤리타 프리드(Lolita Prideaux)다.[103] 그래도 조선으로 사실상 추방당한 월터 롤리를 도와주기는 했다.[104] 모카에 남겨두고 가면 모카 베이에게 위치를 밀고했다는 이유로 보복당할 것이 분명하단 점도 있다.[105] 어느 날 주인공이 악몽을 꾸었는데, 명나라가 망하고 조선이 칭제건원을 한 이후 시점에서, 정일한의 후손이 한양을 급습하여 황제로 등극하는 꿈이었다. 정황상 정준석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106] 본래 아내가 있었으나 경인왜란 직전 병사했고 이후 경인왜란에 참전했다가 대남도로 떠나는 등 바쁘게 지내면서 재혼하지 못했다.[107] 그렇다고 승병들이 싸움을 못하는 건 아니다. 근접전에서는 웬만한 병사들 보다 낫다고 하고, 실제 행주 대첩에서도 처영은 승병 700여명으로 목책을 돌파해 들어온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병력을 막아내 승리에 공헌한 바 있다.[108] 당연히 사전청에 번역해 달라고 했지만 이미 번역할 책이 너무 많아 대기 순서가 언제가 될지도 모르는 상태. 심지어 그림 있는 책이라 복제도 힘들었다...[109] 원 역사에서 선조가 일부러 이순신을 고통스럽게 하려고 소화도 어려운 고기를 내린 걸 알기에, 반대로 소화도 잘 되고 먹기 편하며 영양도 풍부한 두부와 나물을 먹을 수 있게 배려한 것.[110] 유학자인 허균의 한계상, 근친 간의 연애감정까진 묘사했어도 차마 근친간 성관계 장면 묘사는 하지 못했고, 그래서 세르반테스에게 "할 거면 제대로 했어야 한다"고 까인다.[111] 참고로 그런 다양한 인종들이 모두 가톨릭으로 개종했음에도 스페인 독자들은 그들과 평등해질 것이라 여기지 않았다. 즉 그들을 같은 가톨릭의 범주에 끌어들이는 것과는 별개로, 그들은 언제까지고 스페인 사람보다 낮은 위치에 있어야 마땅하다는 것. 그 때문에 홍희동전 3부는 스페인에선 망했고, 조선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면 모두 같은 조선 백성이라고 생각하던 허균은 그런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112] 고니시 유키나가가 조선으로 와서 유학한 것으로 인한 변화로 추정된다. 미츠히데 군에 숨겨둔 스파이로 미츠히데의 반역사실을 눈치채 노부나가에게 보고하였고 히데요시에게도 충의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노부나가를 구할 것을 종용한 것. 덤으로 모리 란마루도 생존했으며 노부나가가 멀쩡하게 살아있으므로 야스케도 아직 추방되지 않았다. 그러나 장남 노부타다가 노부나가를 엄호하다 사망한다.[113] 원래 오다 집안 자체가 오다 노부나가오이치노카타를 포함해 미남미녀가 많기로 유명했다. 다만, 임해군에 따르면 상당히 무섭게 생겼다고.[114] 히데요시의 별명은 '원숭이'가 훨씬 더 유명하지만, 노부나가가 네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히데요시를 '대머리쥐'라고 칭한적이 있다.[115] 단적으로 오구리 슌노부나가 콘체르토를 제외한 다른 노부나가가 등장하는 사극을 보면 성질이나 폭력이 보통이 아닌데, 우에노 주리고우 ~공주들의 전국~을 보면 오이치와 차차·하츠·고우 등 모녀가 아즈치 성에서 노부나가와 대면할 때 가신들과 동생·조카들이 보는 히데요시를 주먹으로 두들겨 패었을 정도고 최측근이자 혼노지의 변의 주인공 아케치 미츠히데도 노부나가의 폭력을 피할 수 없었다.[116] '속전속결로 조선왕과 명나라 황제만 잡으면 전쟁은 다 이긴 거고, 만약 몽진을 택해 놓쳐도 자기 성을 버리고 도망친 겁쟁이 군주를 섬길 백성들은 없을 것이고, 농민들은 누가 왕이 되는 신경도 안 쓰며 오직 강한 자에게만 복종할 것이다' 라고 주장하여 조선의 민초들이 의병을 일으켜 저항한다는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등 전형적인 센코쿠 시대 일본 무장의 기준에서 생각하고 행동한다.[117] 차차와 임해군의 혼인식 날 어찌나 시달렸던지 표정이 그야말로 해탈한 수준이라고 묘사된다.[118] 그러나 본인 말에 의하면, 조보로 얻어온 형님의 연이은 패전 소식 때문에 걱정이 늘어서 그렇다고 한다.[119] 딱히 전투에 참여하거나 양민 학살 같은 건 하지 않았고 그럴 위치도 아니었다. 대신 사자 역할 하느라 발이 닳도록 고생했고.[120] 의문스럽게도 어떻게 검색해도 '아이히메'라는 이름의 오다 노부나가의 친딸은 나오지 않는다. 1582년 오다가 혼노지에서 사망한 이후 태어난 원역사에서 없었던 가상의 딸이라기에는 작중 묘사된 나이대와 맞지 않는다. 아마도 원역사에서 마에다 토시이에의 아들 마에다 토시나가와 결혼한 오다 에이히메를 다르게 표기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에이히메는 1574년생으로 작중 묘사된 나이대와 맞기 때문.[121] 현대 기준으로도 큰 키지만, 이 시대 기준으로는 어지간한 남자들보다 머리 하나는 커서 갓 쓴 조선 남자들의 갓 높이와 비슷한 키이다.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는 현대에 180cm가 훨씬 넘는 미녀 모델들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일 듯.[122] 차차는 일본식으로 훌륭한 무장이면 친자가 아니라도 후계자로 삼을 거라고 생각해서 숙부가 들려주는 조선식 계승법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123] 이 외에도 남편 임해군과 짝사랑하던 히데요시가 모두 끔찍하게 죽었기에 차차를 마가 낀 재수없는 여자로 여기는 이유도 있다.[124] 멀쩡한 나가마루까지 폐위하는 이유는 조선의 무종의 사례를 보고 나가마루가 정이대장군에 오른 뒤 차차의 복수를 하겠다며 무종처럼 사화를 일으킬까 우려해서라고 한다. 무종이 일으킨 수 차례의 사화가 후대에는 어머니의 복수 때문이라고 알려진 듯.[125] 다만 설정 오류인지 반대되는 서술도 존재한다.[126] 이 때 임해군과 유키의 성관계 묘사가 굉장히 적나라하게 높은 수위로 묘사되었는데, 댓글창에서 초등학생 아들과 함께 소설을 보고있는데 당황했다는 독자의 항의가 나오자 이후 성적 묘사를 줄이기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중에 까먹은 것인지 3부 1화에서 재석이 올렝카에 핸드잡을 해서 오르가즘을 보내버리는 장면을 넣었다가 편집부에게 경고를 받고 내용을 수정하기도 했다. 참고로 작가는 아직 실제 역사를 잘 모르는 초등학생이 대체역사물부터 먼저 보는 것은 좋지 않다는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127] 다만 이 상황은 유키가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히데요시 측 닌자들은 '조선에는 닌자가 없으니까' 안심하고 차차의 처소에 접근했는데, 미리 지붕 위에 매복하고 있던 유키가 기습적으로 암기를 날려 한번에 셋을 처리했다. 그리고 나머지 둘은 당황해서 지붕 위로 뛰어오르다가 지붕 위에 대기하고 있던 유키에게 그대로 당했다. 물론 이렇게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 것도 실력이고 상황이 유리하다고 해도 여자의 몸으로 순식간에 여러 명을 살해하는 것을 보면 대단한 실력인 것은 분명하지만, 유키가 자신에게 죽은 닌자들과 일대일 검술대결을 해도 이긴다는 보장은 없다.[128] 차차는 유키의 존재를 은폐하려고 자기가 닌자 다섯을 죽였다고 주장했지만 당연히 씨알도 안 먹혔다.[129] 작가의 지인이 그린 유키 설정화.[130] 여자 닌자가 있긴 있었지만 이들의 임무는 미인계를 이용한 정보 수집, 암살 등 스파이 활동이 주류였지, 이렇게 액션게임마냥 남자들 목을 뎅겅뎅겅 따버리는 존재는 아니었다.[131] 처음에는 그냥 죽이기만 했는데 계속 탈주자가 생기자 다시는 도망갈 생각 못 하게 도망간 시녀의 너덜너덜해진 시체를 마당에 전시해서 겁을 주자 더 이상 탈주자는 생기지 않았다.[132] 야스케가 만일 임꺽정을 이겼더라도 무사히 탈출할 가능성은 없었다. 임꺽정이 무승부로 끝났던 야스케와의 대결을 마무리 짓고 싶어서 일부러 부하들에게 사격 명령을 내리지 않고 일대일 대결을 벌였던 것이기 때문. 야스케는 부하도 모두 잃고 말도 없는 상태였으므로 만일 야스케가 임꺽정을 이겼더라도 그 직후 야스케는 수십 명의 등선군이 쏜 조총에 벌집이 되어 죽었을 것이다.[133] 이를 보면 실력은 임꺽정이 근소하게 우위였던 듯하나 불확실하다. 마지막 대결에서 임꺽정은 야스케가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고 바로 출전해서 쌩쌩했던 반면 야스케는 며칠이나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조선군에게 추격당하여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기 때문.[134] 임꺽정은 등선군에 속한 왜인들과 어울려 지낸 반면, 야스케는 늘 오다의 곁에만 있었기 때문.[135] 베이기 직전 자신은 노부나가의 사위라고 소리쳤으나 그를 베려던 서아지가 이미 휘두르기 시작한 칼을 멈추지 못하고 그대로 베어버렸다.[136] 유모의 친자식을 이르는 말, 전근대 사회에서 젖형제는 거의 자동적으로 의형제 관계를 맺게 된다.[137] 을미동정 때 천황에 의해 조적(朝敵, 조정의 적)으로 선포되면서 양자 관계가 끊어지고, 도요토미 성도 박탈당해 다시 하시바로 돌아온다,[138] 가상인물이며 등장은 없을 것이라고 한다. 원역사보다 고니시의 능력이 훨씬 뛰어나진데다 일본인도 차별 없이 제자로 받아준 것을 보면 결과적으로 나라에 해를 입혔지만 상당한 능력자에 개념인인 듯. 주인공은 누군지 알면 조져버릴 생각이다.[139] 사신으로 왔을 때 아이누와의 교역 문제를 완벽한 성리학적 논리로 항의해 주인공과 조정신료들이 잠시나마 제대로 반박도 못했을 정도다.[140] 여담으로, 사실상 오다를 구한 대활약을 했음에도, 부하의 공은 장수의 공이라는 이유로 고니시의 활약은 모두 히데요시 것이 된 듯하다. 작중 일본에 온 류성룡이 히데요시를 오다를 구한 장수 아니냐고 묻자 바로 표정이 썩기도 했다.[141] 고니시의 마지막 작품인 행장기는 제목 그대로 고니시 자신의 자서전이다.[142] 당연히 원역사에서는 거리낌 없이 처를 내다버린 종의지가 인간적인 정에서 보살피는 것은 아니고 처를 버리지 않으면 이에야스에게 처형당했을 원역사와 달리 이 세계에서는 종의지가 아내를 버리면 본인은 역적인 주제에 전범의 딸이라고 아내를 버렸다고 욕을 더 먹을 상황이기 때문.[143] 와키자카가 있는 전장은 모두 패배하지만 본인은 항상 살아남으니 재앙신이라는 별명도 얻는다.[144] 하라다 노부타네는 임진왜란 중 행방이 묘연해져 김충선이 아닐까 추정되는 인물 중 하나인데 본작에서는 스즈키 요시유키를 김충선으로 설정했고 하라다 노부타네는 사망했다. 하라다 노부타네가 김충선이라는 가설은 별로 지지를 얻지 못하는 편.[145] 덤으로, 주인공이 어린 시절 곽제우 위인전에서 안 좋게 본 기억 때문에 안 좋게 찍힌 것 역시 컸다. 효게모노 덕에 목숨을 건진 후루타와 반대되는 경우이다. 주인공은 어지간하면 왜장은 나중에 처형하더라도 일단 당분간은 살려두는 편이었기에 아예 안코쿠지를 몰랐더라면 그냥 잡장이라 생각하고 전쟁 종결까지는 포로로 놔뒀을 수도 있었다. [146] 히데요시가 이런 소리를 했다면 대번에 이마빡에 술잔이 날라갔겠지만(...), 이에야스는 오다 가문에 볼모로 있으면서 노부나가와 친분이 깊고 동맹관계다 보니 구박 정도로 끝난 거라고....[147] 다만 도쿠가와 막부의 권위가 계속해서 상승하며 일본 입장에선 전성기를 이룩시켰으며, 그 외세와의 전쟁이 침략을 했다가 역으로 공격을 당하는 등 오다 노부나가의 바보짓이 원인이었으며 조선의 후신인 대한국이 너무 강한지라 이를 미화할 수 없을 것이다.[148] 오다 노부나가가 일본을 통일해서 장악해놓고도 괜히 쓸데없이 조선을 쳤다가 역으로 처참하게 몰락한 모습을 언급하면서 자신은 그런 꼴을 당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실제로 이후 막부에서도 대한국을 두려워하지 않고, 경신대기근 때 식량이 부족해져서 약탈하려 드는 상황 정도가 아닌 이상 대한국이 타국을 선제공격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믿고 있다. 이는 누르하치의 믿음과 같다.[149] 이 세계에서는 차차가 히데요시 대신 임해군, 히데타다와 혼인했기에 도쿠가와 이에미츠, 도요토미 히데요리 등은 태어나지 않았다.[150] 그래도 적장자인데 계승권을 박탈할 거 있냐는 의견도 나가마루가 쇼군이 되면 백년 전 조선의 무종처럼 친모의 복수를 하며 피바다를 만들 것 아니냐며 일축한다.[151] 도쿠가와 막부 내내 마츠다이라 성은 도쿠가와 쇼군 종가의 친척 수준의 대우를 받았다. 실제로 쇼군의 친자 중에서도 계승권한과 자격이 있는 아들만 도쿠가와를 받고, 나머지는 마츠다이라를 받았다. 쇼군의 친자이외에는 쇼군 직계가 끊어졌을때 방계로 계승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고산케와 고산쿄의 당주와 그 계승자. 조선으로 치면 도쿠가와 성씨는 대군급, 마츠다이라 성씨는 급이다.[152] 원역사에서는 임진왜란에 반대하는 반란에 연루되어 히데요시에게 처형당한다.[153] 실제로 한양성을 처음 보고도 "이렇게 큰 성은 지키기가 곤란할 텐데..."하며 수성 생각부터 하고 있었다.[154] 그런데 한자 표기가 馬(말 마)有(있을 유), '말 있음'이라는 뜻이어서 너무 대충 작명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 있다. 작가는 의미에 대해서는 별 생각 없이 한자키 누르고 1번을 2번 눌렀을 가능성이 높다.[155] 성 외곽에 별도의 외보(성 외부의 소형 요새)를 설치하고 틀어박혔다는 것으로 봐서 모티브는 아마도 아들내미의 사나다마루지 싶다.[156] 무네시게가 조선 백성들을 해치지 않은 점도 감안해 마지막 기회를 준 것.[157] 류성룡과 김성일은 "강원도를 침공하는 정신 나간 짓을 할 리가 없다"며 길을 잘못 들었거나 북쪽에 대기하고 있다가 남침으로 기습하려는 계략으로 오판한다. 때문에 졸장 서득운과 함께 본의 아니게 동래성 함락의 일등공신이 된다.[158] 1부에서 유담년이 우데게족을 만난 지역인 듯하다. 첨부된 지도상에서는 해삼위에서 약 600km 정도 떨어진 곳.[159] 이동경로가 구불구불 하더니 도착지가 ???다.[160] 이에야스는 조선을 자주 오간 나가마스야 그럴만도 하지만 특별할 거 없는 후루타를 조선 국왕이 좋아하는 이유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161]도쿠이 미치유키는 계승권을 포기하고 노부나가의 직신이 되어 조선군이 비워놓고 떠나 다시 왜군이 상륙한 대마도 수비군을 지휘하고 있다고 한다.[162] 울산에 주둔 병력이 대구 포위를 위해 차출되면서 6,000여 명가량만 남게 되었다.[163] 원역사에서는 천주교 신앙을 이유로 박해받아 살해당한다.[164] 신하로서 예를 지킴과 동시에, 오다의 조선 침공을 반대한 만큼 "조선에 지은 죄가 없는데 넘겨줄 수 없다"고 독백한다.[165] 이때 주인공이 한 말이 걸작인데, '그따위 개같은 쓰레기를 묻을 땅은 한평이라도 내어주고 싶지 않다.'[166] 주인공은 죽이고 싶었으나 이일까지 묶어 죽일 수는 없고 원균의 빽이 커서 이 정도로 만족한다.[167] 눈 쓸기에 한이 단단히 맺혀서 왜장이 된 후 가몬의 문양을 제성용 넉가래와 빗자루를 교차시킨 모양으로 만든다.[168] 술과 여색을 즐긴다는 공통의 관심사가 있었고, 원균이 하성군에게 날아오던 화살을 대신 맞아 위기에 처했던 히데요시가 빚을 졌고, 히데요시는 일본인이 아니기에 오히려 오다 노부나가 험담이나 오이치에 대한 연정도 공유할 수 있는 원균을 최고의 친구로 생각했다.[169] 원래 친구 히데요시는 더 좋은 영지를 주고 싶었으나 원균이 전공이 너무 없어서 일기도주를 내렸다.[170] 카게무샤로 쓸 셈이었는지 일부러 많이 먹여서 자신보다 더한 비만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에 원균을 지키기 위해 화살에 맞으면서도 엎드리지 않은 것을 보면 원균이 꽤 잘 대해준 것 같다.[171] 정준석은 처음에는 이름 외에 아무런 과거도 말하지 않는 원균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일본에서 높은 신분이었다가 노예로 전락한 처지가 부끄러워 그런가보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다.[172] 이렇게 끝까지 비밀리에 살아남는 건 실제 역사에서 원균 생존설을 모티브로 삼은 듯하다.[173] 원역사에선 남방 전주 출신인데 죄를 지어 북방 회령에 유배 보내져 조선에 앙심을 품었다가 왜란이 터지자 순왜가 되었다는 배경이 있다.[174] 그러나 종의지 입장에서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일기도는 방어하기 불리한 섬이고 당장 복종을 요구하는 오다에게 대들며 조선에 원군을 요청해봤자 조선군이 도착했을 때 자신은 오다에게 죽은 뒤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 조선식으로 생각하면 그냥 오다의 침공 이전에 도망쳐서 조선에 들어왔으면 처벌받지 않았겠지만, 일본 다이묘인 종의지 입장에서 유일한 영지를 버리고 도망간다는 발상은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175] 사실 이 시기에도 석성을 화포로 무너뜨리긴 어렵다. 좀 앞선 시점이긴 하지만 콘스탄티노플 전투에서도 대형 화포로 지속적인 공격을 퍼부었지만 결정타는 열린 문으로 밀고 들어간 오스만 투르크 보병들이었다. 화포로 성곽을 공략가능하게 된 건 더 긴 사정거리에 파괴력 있는 작렬탄이 일반화된 후의 일.[176] 이들은 자신들은 사략해적이라며 포로 대우를 요구했으나 이항복은 증거가 없다며 처형해버린다. 하필이면 안토니우 다 실바만 사망한 것이 운이 좋았는데, 일본에서 사략 증명서는 달리 써주지 않았고 이를 증언해줄 아리마대의 요셉에 동승했던 일본인 감관이 생포되었음에도 그가 살았는지 다른 선장들이 알 길이 없었다.[177] 명나라 내 신하가 장거정을 고발하면 그 신하가 새로운 권신이 될 수도 있으나 조선 국왕이 고발하면 그럴 걱정이 없다.[178] 신하들이 국방비를 언급하자 조선이 국방을 대신해주면 된다는 망언을 떠들어댔다.[179] 문제는 이 때 건주를 치는 전략을 만력제가 입안한 것이 오히려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 초반에 만력제가 내세운 숫적 우위를 이용한 전략은 주인공도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했지만, 그것을 양호 등이 뜯어고쳐서 원래 역사의 그 막장 전략으로 바꿔버린 탓에 손쉽게 대패한 것이라 만력제는 "내가 옳았는데, 저것들이 망쳐놨어."라고 신하들의 잘못으로 몰아붙였기에 반성이 없는 것. 거기다가 일단은 누르하치가 굽히면서 대외적으로는 항복했고, 조선쪽에서도 1만의 건주군을 날려버리고, 누르하치의 장남의 수급도 보내와서 얻었다보니 본인의 체면이 손상되지 않은 것이 이런 경향을 부추겼다. 대외적으로도 천자로서 권위는 손상을 입지 않고, 오히려 패전의 잘못은 단순하지만 오히려 이길 가능성 높은 만력제의 초기 전략을 잘못된 전략으로 수정한 신하들이 모조리 책임지게 됐다보니 만력제는 별다른 피해가 없던 것. 특히 누르하치의 장남의 수급이 만력제 앞에 바쳐진데다가 누르하치가 굽혔기에, 대외적으로 명군의 손실이 커도 누르하치도 장남을 잃는 큰 피해를 보고 항복을 해서 천자가 자비롭게 용서하고 군왕으로 삼았다라고 할 수 있기 때문.[180] 경인왜란과 을미동정 2차려의 전쟁때 조선에 지원한 은자가 1,700만냥임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지는 수치다.[181] 혹은 암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182] 이 책봉 문제 때문에 양응룡의 난에서 만력제가 진안군의 앞길을 틀어막기도 했다.[183] 조선으로 탈주하려다가 실패해서 죽었다.[184] 참고로 원역사에서 석성의 후손들은 이후 조선에 정착해서 살게 되었는데 현재 해주 석씨성주 석씨가 바로 석성의 장남과 차남이 각각 해주와 성주에 정착해서 탄생한 귀화 본관들이다.[185] 사행을 해로로 하는 게 관행이 되면서 평안도는 중국 사신 대하는 노하우도 다 잊어버려서 더 고생했다.[186] 다만 주인공은 이도 나쁘지만은 않다고 봤는데, 만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원역사대로 정이대장군에 일본 국왕 책봉까지 받았다면 더 통제하기 어려웠을 것이며 아시카가가 조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도가 되었기 때문.[187] 3부에서 현실 역사의 오삼계 포지션이 되는데, 이런 결말의 복선일 수도 있다.[188] 주로 공신들에게 내려지는 것으로, 반역죄 수준이 아니면 어떤 죄를 지어도 한 번 정도는 무조건 사면해주는 권리이다. 특히 개국공신에게 내려진 면사금패는 황가의 시조가 내린 면죄부기 때문에 정말 어지간한 잘못 가지고는 손도 못 댄다.[189] 단타로 치고 빠질 예정이라면 최대한 뜯어먹고 튀면 그만이겠지만, 오공충은 아예 이쪽 지역에서 거래되는 인삼을 자기가 독과점하고 오래오래 혼자 다 해먹을 생각이기 때문에 장기 거래상대인 조선을 나쁘게 대해봤자 본인 손해가 될 공산이 크다. 때문에 인삼가격도 괜찮게 쳐줬다. 사실 오공충은 인삼 값을 더 비싸게 쳐주고 아예 명에 들어오는 조선 인삼을 전부 독과점 하겠다는 제의까지 했었으나 주인공이 그건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거절했다.[190] 옥수수는 건주위 야인들이 몰래 훔쳐서 키웠고, 감자는 중요성을 모르는 평안감사가 현지에서 군량을 생산할 겸 해서 공짜로 줬다.[191] 그래도 명나라 놈들보단 조선 놈들이 나은 것 같다고 여기는 관점은 있다.[192] 무자호란이 끝나고 난 후에도 주인공이 상희에게 "왕족이라 정략결혼은 피할 수 없으니 우리 딸내미 황후 만들어 볼까?"라고 반쯤 농담 삼아 이야기하기도.[193] 묘사를 보면 조선에서 넘겨받은 감자와 옥수수 농사가 잘 되고 인구도 많이 늘어났다고. 전시에 10만명 정도는 동원할 수 있기에 2만의 원군도 어렵지 않다고 한다.[194] 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같은 생각이었다.[195] 조선 왕보다 격이 낮은 사조룡+검은 바탕의 흉배를 착용한다.[196] 이것도 통수를 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결정적인 순간에 도와주고 생색을 잔뜩 내려고 증거인멸을 한 행위였다.[197] 당연히 현명한 건 누르하치 쪽. 요런 짓을 했다간 건주위는 을미동정이 끝난 직후 조선군에게 짓밟혔을 것이다.[198] 실제로 죽은 건 도중에 저항한 장남 아이통아(阿尔通阿), 삼남 자사그트(扎萨克图, 찰살극도) 뿐. 나머지는 각 팔기에 분산되어 공을 세워야 복귀할 수 있도록 했다.[199] 그래도 그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기회를 주려고 했는데, 2천 정도 잃을 줄 알았는데 무려 1만의 병사와 갑옷, 말을 모두 꼬라박고 참패했다는 말을 듣자 "어리석고 아둔하며 돌격대장이나 어울리는 한심한 놈"이라 깐다. 그렇지만 장남의 죽음에 아예 무심할 수는 없어서인지, "유독 말이 많고 담배를 피는데 손을 떨었다"는 묘사가 나왔다.[200] 그리고 추옌이 죽은 것이 건주위의 멸망을 막은 것이기도 하다. 추옌은 본래 조선 본토로 원정하여 약탈하고 민간인을 학살할 계획이었는데, 만일 조선군과의 일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이 계획을 성공시켰더라면 조선은 모든 병력을 총동원해서 건주위를 완전히 멸망시켜버렸을 것이다. 추옌은 더 열심히 싸운다는 이유로 전향자들을 선호해서 대부분 해서 출신의 병력을 이끌고 나갔는데, 예상보다 큰 피해를 입긴 했지만 한인 귀순자들로 그보다 더 많은 병력을 확보했으니 크게 봐서 건주의 피해는 미미했다.[201] 옹주를 '가장 좋은 활과 말처럼 아끼겠다'고 해서 재석을 벙찌게 만들긴 하지만, 제일 아끼는 아내인 것은 진심이었는지 조선이 명이 건주를 정벌하는데 군사를 내서 분위기가 험악해진 와중에도 아내를 최대한 보호해서 무사히 출산할 수 있게 해준 것을 보면 진심으로 아내를 사랑한 것으로 보인다.[202] 원 역사의 요토보다 6년 늦게 태어났고 어머니도 다르니 이름만 같은 가상인물로 봐야 한다.[203] 정확한 이름은 불명이다. 일단 기록 상에 남아있는 이름으로는 '계사(戒沙)', '재살(齋薩)', '제살(濟薩)'이다.[204] 현실에서 후금 개국오대신 중 하나로 불리는 누르하치의 측근 중 하나이다.[205] 원역사에서는 병자호란 도중 광교산 전투에서 조선 저격수에 의해 전사한다.[206] 실제 역사에서도 우을지는 이순신에게 생포되었다.[207] 각종 가축과 작물의 엄선한 종자와 여러 산업 분야의 기술자들. 주인공은 입이 떡 벌어졌으며 신하들도 사치품이 아닌 실용적인 선물들을 보고 좋아한다.[208] 살아있는 호랑이 1마리, 호랑이 가죽을 비롯한 모피들, 나전칠기 등 아름다운 장식들, 인삼 등. 이는 선물이기도 하지만 유럽에 보내는 조선산 무역품들의 샘플이기도 하다. 특히 인삼.[209] 실제 역사에서도 펠리페 2세는 이 때문에 사무직들이나 걸릴만한 병에 시달렸으며 소설 속에서도 병 때문에 조선에서 선물로 보낸 인삼을 복용한다.[210] 작가의 의하면, 이 시점에 세르반테스가 어디에 거주했는지 잘 모르겠어서 볼일이 있어 마드리드에 왔다가 허균과 만났을 거라고 설정한다.[211] 오르시니 가문은 교황을 3명이나 배출한 이탈리아의 명문가이다.[212] 주인공은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영국네덜란드개신교 국가들이 더 강해지고 아시아에도 진출할 것이므로, 수십 년만 버티면 가톨릭의 종교적 압력에서는 벗어나니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다.[213] 원역사에서도 유명한 커피 일화를 남기는 등 융통성 있는 인물이었다.[214] 세스페데스를 처음 만났을 때 주인공이 세스페데스의 관심을 끌어보기 위해 성서와 서양 정세에 대해 말했다. 서양과 교류한 적도 없는 주인공이 서양 정세 및 천주교 인사법을 훤히 꿰고 있는 걸 본 세스페데스는 주인공이 사제왕 요한의 후손이라고 너무 굳게 믿었다. 심지어 교황청까지 그 보고가 들어가자 일이 곤란해질까 봐 후회한다.[215] 실제로 예수회의 창립자인 이냐시오 데 로욜라는 전쟁터에도 나간 군인이었다가 개심하여 성직자가 되었다. 여기서 모티브를 딴 듯.[216] 주인공은 생사의 문턱에서 떠는 병사들이 위안을 얻을 수 있다면 상관없다는 입장에서 이런 포교를 방관했다.[217] 당연하지만 전쟁이 벌어지면 3개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텐데 태연하게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거론하며 저런 말을 한 것이다. 그것도 타 지역의 문화적 상대성을 존중하는 것으로 알려진 예수회 출신이! 같은 예수회로 통역을 맡던 팔라데스 신부도 하도 충격 먹어서 "저 말을 어찌 생각하냐"고 묻는 주인공에게 "주님의 뜻은 전쟁이 아닌 사랑과 십자가로 전해야 하는 것"이라고 완전 다른 문장을 둘러대듯 말했을 정도다. 이쯤 되면 이 인간이 얼마나 선교에 미친 건지 짐작도 안 간다.[218] 이 인간이 한 말 때문에 천주교를 고깝게 여기던 사대부들이 이를 빌미로 조선에서 천주교를 몰아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자, 주인공이 천주교를 변호하느라 잠시 고생한다.[219] 이항복의 말을 보면 상희에 대한 짝사랑도 들킨 것 같다.[220] 전투력은 조선 수군이 뒤지지 않지만 배울 것은 있을 것이고 결정적으로 이들이 조선 수군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한다면 서구 세계에 조선의 위상을 높여 외교 입지를 단단하게 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221] 전쟁을 참관하러 온 참관단이라 이순신이 탐탁해하지 않았으며 결정적으로 수군에서 기사단과 소통이 가능한 건 세계일주 동안 스페인어를 배운 정발뿐이었던 것이 컸다.[222] 어차피 잉글랜드의 능력으로는 식민지를 탈환하거나 유지할 능력도 안되기에 그냥 조선에 넘기고 대신 수익을 분배받는 것으로 국익을 챙긴 것.[223] 본래 스코틀랜드 왕인 그가 스코틀랜드가 아닌 잉글랜드에서 다스린다는 걸 들는 조선 조정에서는 금나라 같은 중국 정복왕조처럼 동화되고 이게 후환의 불씨가 될 거란 의견이 나온다.[224] 실제로 제임스 1세는 학식이 높은 것으로 유명했고 현대 학자들도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특히 '지식만 많았다'는 평가를 받는 헨리 8세와는 다르게 진정으로 학자로서의 이해력과 사고력이 있었다고 인정받는다.[225] 하지만 베토벤 가 족보에 등장하지 않는 것을 보면 같은 가문일 수는 있어도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직계 조상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226] 주인공은 스페인 무적함대가 잉글랜드에게 패배할 것이라거나 앙리 4세가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등 유럽 정세 예측을 자주 했는데 이에 대해 이항복이 추궁하자 천녀가 알려줬다고 둘러댄다. 이를 들은 광해군은 천사를 본 것이라고 생각한다.[227] 실제로 본인까진 괜찮았지만, 동행한 시녀들에게는 수작을 거는 선원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228] 이 와중에 이항복이 "사실 천주교 사제들 중 몰래 여색을 탐하는 이들이 많다"고 알려주며 부추겼다.[229]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에센 타이시와는 시대와 출신 부족 상 동명이인.[230] 참고로 대마초는 기억과 학습능력을 떨어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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