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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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승
문정공(文正公)
송시열
宋時烈|Song Si-yeol


파일:송시열1.jpg

출생
1607년 12월 30일
(음력 선조 40년 11월 12일)
충청도 옥천군 이내면 구룡촌
(現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구룡리)
사망
1689년 7월 19일 (향년 81세)
(음력 숙종 15년 6월 3일)
전라도 태인현
(現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사사형
묘소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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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문정(文正)
본관
은진 송씨[1]

영보(英甫)

우암(尤庵)
아명
성뢰(聖賚)
별칭
송자(宋子)
학력
생원시 장원 (음력 1633년)
신장
190cm 이상[2]
붕당
서인
노론
부모
부친 - 송갑조(宋甲祚, 1573 ~ 1628)
모친 - 선산 곽씨(善山 郭氏, ? ~ 1655)
부인
한산 이씨(? ~ 1677)[3]
자녀
3남 2녀
장남 - 송순(宋純)
차남 - 송회(宋懷)
3남 - 송석(宋惜)
장녀 - 안동 권씨 권유(權愈)의 처
차녀 - 파평 윤씨 윤단(尹摶)의 처
양자 - 송기태(宋基泰, 1629 ~ 1711)[4]
직계 후손
13세손 송영무[5]



파일:external/cfs10.blog.daum.net/4764c338718cf&filename=%EC%86%A1%EC%8B%9C%EC%97%B4%EC%9C%A0%EC%A0%81%EB%8B%B5%EC%82%AC(9).jpg

송시열의 이조판서 임명장

1. 개요
4. 사상
6. 붕당
7. 여담
8. 대중매체
9.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바탕으로 삼고, 사업은 효종께서 하고자 하시던 뜻(북벌론)을 주로 삼으라.

죽기 전 수제자인 권상하에게 남긴 말.

조선 후기의 정치가, 유학자, 저술가, 중신(重臣)이자 권신이다.

파란만장한 시대를 살았던 서인의 영수이자 노론의 종사로서 인조부터 숙종까지 4대조를 섬긴 원로대신으로, 그의 후학들에게 공자, 주자에 버금간다며 송자(宋子)라 불렸다.

사후에도 노론이 세도 정치 직전까지 계속 집권하면서[1] 해동성인(海東聖人),[2] 송자(宋子)라고 높여졌다.[3] 율곡 이이, 김장생도 듣지 못한 칭호였다. 특히 훗날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양현전심록>이라 하여 주자의 일생과 송시열의 일생을 비교한 글을 쓰기도 했고 즉위 이후에는 내탕금과 국비를 지원하면서까지 <송자대전> 등의 문집과 저서들을 간행했다. 송시열을 빼놓고는 조선 후기의 정치와 사상을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당대는 물론 이후의 조선 정치와 사상에도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조선왕조실록에 3천번 이상 언급되었으며 현대에 와서는 상당히 엇갈리는 해석과 평가를 받는다.


2. 생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송시열/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특징[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송시열/특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사상[편집]


큰 인물은 하늘이 낸다 하였다. 대성 공자를 하늘이 내리시었고

그 뒤를 이을 주자도 하늘이 내셨다는 것이요 주자의 학문을 송자가 이었으니

또한 송자가 아니면 주자의 도가 이 땅에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 그렇다면 공부자와 주부자와 송부자의 도는 천지사이에 날과 씨와 같고

우주의 기둥과 대들보처럼 우뚝하니 이 세 어른 중에서 한분만 안 계셔도 아니 된다는 것이다.

지금의 시대는 홍수가 범람하여 산허리를 싸돌고 언덕에 오르는 급박하고 질서 없는 시대에 처했으니

어찌 분주히 노력하여 세 부자의 도학을 취하지 않겠는가?

<정조대왕(正祖大王)의 어제시(御製詩) 宋夫子[4]


경전에 대한 독자적이고 참신한 해석과는 거리가 멀다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성리학 원리주의자로서 철저하게 주자를 존숭하는 주자 중심의 학문을 추구하고 주자의 학문을 더 심화하는 것이 그와 그의 학파의 연구 경향이었다. 예를 들어 주희와 제자들의 문답을 모아 놓은 방대한 분량의 "주자어류"라는 어록집이 있는데 이를 강독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후학들에게 좀더 정리된 내용으로 전하기 위해 순서와 배열을 바꾸고 재편집한 "주자어류소분"이라는 책도 만들었다. 송시열 말년에 작업에 착수해서 후손들과 제자들까지 대대로 작업에 참여하여 결국 완성했다.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은 송시열이 주자어류를 교감하고 항목을 재분류하여 편집한 책이다. 주자어류는 사서오경(四書五經), 성리설, 역사, 정치, 문학 등에 관한 주자의 학설을 담고 있다.

그러다가 최근 현존하는 유일한 필사본이 송시열의 9대손인 독립운동가 송병선(宋秉璿) 선생의 문충사(文忠祠)에서 발견되었다. [5]

사단칠정을 이(理)라고 주장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런데 사단이 이에서 나왔긴 한데 이도 선악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래서 해석에 따라 이황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쪽도 있고 이이를 주자학의 정통에 세우려 하였다는 쪽도 있다.

원리주의적 성향의 학자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결과적으로는 정적이 많은 편이었는데 송시열은 주로 반격을 하는 패턴이었지 먼저 누구에게 시비를 건 적은 비교적 적었다. 송시열은 처음에는 남인 집안과 통혼을 할 정도로 남인에 대해서 원만하게 잘지냈으며 악감정이 전혀 없었으나 예송논쟁 당시 난데 없이 무방비 상태에서 선빵 극딜을 당한 이후로는 다른 성향을 보이게 되었다. 물론 송시열의 예송 논쟁의 주장은 논리적으로나 당시 유교적 관점으로서나 공격 당할 요소가 많았다는 점은 고려해야 할 것이다.

송시열을 보수적이라고 비난하기도 하는데 남송으로 쫓겨 내려갔지만 도통만은 지켰다는 주자의 상징성에 당시 오랑캐한테 얻어터졌던 조선을 은근히 동질화하는 정신승리. 성리학의 교조화 문제는 오랑캐라고 한 청나라에 항복한 이후 명분을 중시하는 것이 유학(주자학)이었기에 발생한 필연적 귀결이었다.


5. 평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송시열/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1607년 - 1680년
입문


1680년 - 1689년



7. 여담[편집]


  • 오늘날에도 기호 지방(경기도 / 충청도)에 잔존하는 유림들에게는 말 그대로 '송자'로 대우된다. 왜냐하면 기호 지방을 기반으로 하는 서인 - 노론 당파가 조선 말까지 집권하는 토대를 마련한 사람이 바로 송시열이기 때문이다.[6] 그러나 이는 조선의 기호학파 유림 한정이며 학맥상의 최고격 스승은 당연히 지폐에까지도 얼굴이 올라간 이이성혼이다. 그와는 반대로 동인 - 남인 당파의 지역 기반이었던 영남에 잔존 중인 유림층에게는 사문난적으로 취급되었으며 영남 유림층은 송시열을 송자라는 어감과는 반대로 '시열이'라는 극단적인 혐오감을 담은 단어로 지칭하는데 심지어 개 이름을 '시열이'라고 짓기도 했다고 한다.[7] 심지어 처음 만난 사람의 성이 은진 송씨일 경우 말도 섞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지은 유홍준은 남인의 본거지였던 안동 지역의 노인들과 대화하는 사람이 만약 자신이 은진 송씨인걸 밝히면 은근히 분위기가 험악해진다고 말한다.

  • 현대에 성리학의 위상이 추락하고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가 무너지면서 성리학 교조주의자, 사대주의자 등으로 평가되었다. 조선의 역사가 연구되면서 비록 정치적 계산이라고는 해도 송시열의 행보가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이었기 때문에 아직도 이런 이유로 저평가하는 사람이 많다. 더불어 송시열이 치졸하고 소인배적 행동을 여러 번 보여주었고 이것이 연구 과정에서 드러나면서 이 쪽으로도 저평가를 받는다.

  • 이후에도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쳤는지 정조 때에는 송시열의 후손인 송덕상이 홍국영과의 결탁을 이유로 파직되었는데 전국에서 송덕상을 처벌한게 잘못되었다고 하여 한동안 파란이 일었다.

  • 현대에 송시열은 충신에서 왕권에 도전하는 권신으로 각각 재평가되었다. 재미있는건 송시열과 죽은 뒤 5년 후에 태어난 영조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영조나 송시열은 노론의 지지를 받아 최상위에 올랐고 정치 철학이나 학식도 높았고 83세에 장수하다 죽은게 공통점이다. 다만 송시열과 영조의 차이점은 정치적 포용력으로 송시열은 자신의 뜻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배척하여 서인 내부에서도 을 많이 만들었다.[8] 자신과 친한 사이래도 속으로는 사이가 좋지 않으면 조문에다 조롱하는 조문문을 쓰고 나중에 권신인 김석주와 김익훈의 전횡을 묵과하는 등 좋지 않은 면모도 보였다.[9] 반대로 영조는 탕평이라는 정책으로 자신을 지지해준 노론 편을 무조건 들어 주는게 아니라 자신과 대척점에 있던 소론을 준론을 배척하고 완론을 등용하였다 나중에 이인좌의 난나주 괘서 사건으로 인해 소론의 위세가 위축되자 노론측이 다 멸당시키라는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고 노론에게 당론을 다시 지껄이면 역률로 다스리겠다는 엄포를 놓았다. 사실 영조가 후기에 노론 편향이 된건 소론 준론과 남인 탁남이 역모를 저질러서 그렇다.[10] 그렇게만 되지 않았더라도 중립을 지키고 탕평을 완수시킬 수 있었다.[11] 그러니 정치적인 포용성인 면모를 보면 영조가 송시열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 조선왕조실록에서 역대 국왕들을 제외하면 그 이름이 가장 많이 언급된 인물이다. 살아있을 때에는 1000여번, 사후에도 2000여번 이상이나 언급될 정도이다.

  • 한명회, 윤원형, 박원종, 허목, 홍국영, 흥선대원군 등과 더불어 조선의 파벌 정치인의 한사람.[12][13]

  • 시집 가는 큰딸에게 교훈으로 써주라며 써 준 <우암선생계녀서>(우암계녀서尤庵戒女書)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에 소경(여기서는 법사를 말한다)들이 하는 기도는 어쩔 수 없지만 무녀나 화랭이가 굿하는 집은 머잖아 상놈이 될 집안이니 굿구경 가지 말라는 내용이 있어 충청도 지역에서 경을 읽는 앉은굿이 발달한 게 이 사람 영향 아니냐는 설도 있다.[14]

  • 대단한 대인배여서 자신을 몰라보고 싸다귀를 갈긴 무관을 중용하려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에 따르면 송시열은 어느 비오는 날 주막에서 우연히 만난 한 무관과 장기를 두다 통성명을 하게 된다. 그 전까지 무관은 그를 알아보지 못해 거만하게 굴었는데 그가 송시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당황하지만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 "어디서 감히 우암 대감 행세를 하냐!"라고 하며 싸다귀를 갈기고 튀었다. 하지만 송시열은 오히려 재치와 배짱에 감탄해서 얼마 뒤 그를 중용하려 했으나 이미 죽은 후여서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이러한 종류의 야사는 웬만한 조선시대 거물들이라면 하나씩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신빙성은 높지 않다.[15]

  • 조선시대 사람임에도 키가 크고 덩치도 좋은 거구였다. 초상화를 봐도 넓은 어깨와 체격이 두드러지는데, 실제로 1658년에 효종이 송시열에게 선물한 초구(담비가죽 옷)의 사이즈를 봐도 키가 거의 190cm 정도의 장대한 몸집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현대 기준으로도 매우 큰 키다. 그에 걸맞게 이 장사라고 하여 장정 여럿이서 겨우 드는 비석을 혼자서 이리저리 돌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 몸이 안좋아 몸져누웠을 때[16] 정적이지만 의학에 능통했던 남인의 거두 미수 허목(許穆)에게 처방을 부탁했는데 허목이 극약인 비상(비소)[17]을 처방하자 모두가 "허목이 정적인 대감을 해치려는 것"이라며 먹지 말라고 했는데도 태연하게 비상을 먹은 결과 병이 나았다는 일화도 있다. 심지어 송시열의 아들이 비상을 빼고 을 지어온 것을 알고 "허미수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다시 가서 약을 지어오너라."라고 꾸짖고 병이 낫자 아들 대신 사과했다는 후일담도 있다.[18]

  • 송시열은 건강 관리를 매우 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사되기 전까지 건강하게 살았던 그는 소식(少食)의 습관을 가졌다고 한다.[19]

  • 훗날 사사될 때에도 송시열이 아니라 사약을 먹이는 금부도사가 고역을 치렀다. 사약을 들이키고 온돌방에 들어갔는데도 멀쩡하니 급기야 금부도사가 송시열에게 빨리 일 좀 끝내게 해달라고 애걸을 했다고 한다. 결국 입천장을 긁어 상처를 낸 뒤 내리 3사발이나 마신 뒤에야 겨우 죽을 수 있었다. 사실 송시열 뿐만이 아니라 당시 사약의 경우에는 이런 일이 잦았는데 설계해서 만든 즉사형 독약이 아니라 그냥 게알, 짐독, 부자 등의 치사량이 높은 것들을 내의원에서 마구 조합해서 만든 약이니 효과가 검증될리가 없었다. 때문에 사사를 집행하러 갈 때는 예비용으로 사약을 몇 사발 더 챙겨가야 했으며 그래도 죽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미리 줄을 챙겨가서 사약이 통하지 않으면 사지를 잡아놓고 활줄로 교살했다고 한다. 그런데 송시열은 당시 노론의 거물은 물론이요, 왕들까지 존경을 표하던 대인이었기 때문에 그런 무례한 방법을 써서 죽일 수도 없었으니 금부도사가 애간장을 태운 것.

  • 오늘날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에서 자랐다. 송촌동(宋村洞)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바로 이 송시열과 송준길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동네에 세워진 아파트 단지 이름은 선비마을이다. 선비마을 3단지 맞은편에 송준길의 호를 딴 동춘당 공원이 있는데 송준길 선생의 고택도 있다. 그리고 송촌동 근처에 작은 야산의 이름도 어르신들은 송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대구광역시 동구 각산동은 본래 쇠뿔 모양의 바위가 있었다고 하여 소바우 또는 우암곡이라고 불렸으나, 구한말인 1907년에 이 곳에 현감으로 부임한 송헌면(宋憲冕)이 자기 조상인 우암 송시열의 호와 지명이 같다는 이유로 피휘하여 소 우(牛)의 뿔 각(角)과 바위 암(岩)의 산 산(山)을 따 와서 각산동으로 지명을 고쳤다고 한다.


8. 대중매체[편집]


이상하게도 조선사에 있어서의 존재감이 엄청나는데도 사극에서 다뤄진 적은 별로 없다. 숙종 시기 장희빈을 다루는 사극들이 많지만 다뤄진 적이 별로 없는건 마찬가지. 사실 송시열 초상에 드러나는 이미지와는 달리 왜소하고 깡마른 인상의 배우들이 연기한 것이 특징.

  • 1990년대 중반에 효종의 북벌을 주제로 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잃어버린 제국>에서 이완과 함께 영웅 유닛으로 등장한 전례가 있다. 송시열은 무기가 큰 붓이고 황소를 타고 다닌다.



  • KBS 역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재연극 수준으로 나왔는데 <역사 추리>의 김성겸[20][21], 의 맹호림 등이 분한 바 있다.

  • 시드노벨에서 송시열을 모에화한 라이트 노벨이 2014년 8월 1일 발매되었다. 제목은 <모애모애 조선유학>. '조선 최고의 거유'라는 듯. 은진 송씨 가문 홈페이지에 이거 괜찮느냐 문의한 사람도 있다. 까임방지책인지 송시열(宋始悅)로 한자 표기를 바꿔놓았지만 실상 눈 가리고 아웅. 유학자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에 팬티가 보일만큼 심한 노출도를 자랑하는 기모노를 입혀놨다고 까이는 중. 역사 카페에서는 의견이 분분한 상태. 상당히 충격과 공포에 벙찐데다 개드립인줄 알았다고 한다. 정말 나오면 분서 인증하겠다는 사람도 있는데 결국 진짜로 분서 인증했다. 그러나 한국 복식이라고 주장하기에는 저 옷이 전통 한국 복식의 면모가 분명 있으나 허리에 띠를 두르는 오비(기모노 허리띠)가 나오니 무리수다. 한국에 대대라는 허리띠가 있지만 허리띠 위에 하얀 끈을 두르는 형상은 아무리 우기더라도 오비에 가까운 형상이다. 또한 논란을 잠재우기란 무리니 현재의 주요 쟁점은 굳이 송시열이란 이름을 쓴 무리수, pv와 표지 일러스트 문제 때문이라 내용이 잘 나오더라도 현상 유지 아니라면 최악의 결과가 나타날 확률이 높다. 결국 시드노벨은 7월 28일 등장 인물의 이름을 변경한다는 공지를 내놓았고 바뀐 이름은 '송시연'. 이름의 경우 작가가 당초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는 얘기가 있어서 시드노벨의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해석도 있다.

  • 대체역사소설 <천윤의 비사>에서는 김상헌과 마찬가지로 원래 역사와 달리 보수 꼴통에 문제있는 인물로 나오며 암군 인조의 명으로 교사 자격으로 성경(심양)에서 봉림대군을 왕재로 만들려한다.

  • 대체역사 소설 근육조선에서는 전설적인 내수린꾼으로 언급되며, 어릴때부터 입신체비와 내수린에 재능을 드러낸 신동으로 나온다.


9.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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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홍국영 일파나 경주 김씨 김귀주 가문, 안동 김씨 김조순 가문, 풍양 조씨 조만영 가문도 모두 당색으로는 노론이었다. 다만 그때쯤 되면 다른 노론들마저 밟아버리고 족벌 체제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2] 조선 한정. 같은 유교 문화권이라 해도 타국에서는 성인으로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퇴계 이황의 경우는 중국의 사상가 량치차오에게서도 성인 대접을 받았다.[3] 비슷하게 퇴계 이황도 추종자들로부터 이자(李子) 또는 이부자(李夫子)라 불리기도 한다.[4] 국보 제239호인 송시열의 영정에 직접 정조대왕이 친필로 남긴 어제시다. 대로사(大老祠)의 비문 또한 정조대왕의 친필이다. 송시열을 송자(宋子)또는 송부자(宋夫子)라 하여 국가의 스승으로 추대하고 송시열의 문집과 자료를 모아 송자대전을 간행하였다.[5] 주자어류소분의 어류소분 권수목록(卷數目錄)에 의하면, 전30책은 원본(原本/元本)의 두 종류로 구성되어 있는데, 부첨지가 원본에만 붙어있는 걸로 보아 원본은 우암과 직전제자들의 작품인 반면, “보본은 원계(遠溪)에서 완성된 것이라는 목록의 기록으로 보아 보본은 고종 22(1885)년 3월에 원계로 이사해서 살았던 송병선이 제자들과 함께 산실된 자료를 수집하여 필사하고 교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현존 필사본 주자어류소분은 우암과 직전제자들이 기초작업을 했던 17세기 후반부터 송병선과 제자들이 보완작업을 했던 20세기 말엽까지 우암학파의 주자어류 연구가 결집된 학문적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6] 정확하게 말하면 '송자'라는 명칭을 기호 지방 유림들이 추숭하듯이 붙였겠지만 송시열의 문집인 <송자대전>을 정조 시기에 국가에서 편찬하는 등 조선 후기에 공인된 명칭이다.(중앙 정계를 노론이 장악한만큼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럼에도 공인된 것은 되었다고 해야 한다.)[7] 이름 가지고 놀리는게 뭐 그리 대수냐고 할 수 있겠지만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이름이란 함부로 마구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니 호니 관직이니 존칭이니 하면서 인칭 표현이 극도로 발달한 것도 이 때문이며 이름을 대놓고 부르는 경우는 집안 어른이 연소자도 아니고 아주 어린아이를 대할 때 정도가 고작이었다. 때문에 이름을 함부로 부른다는 것은 그 자체가 엄청난 모욕에 해당했다. 영조 초기에 노론들이 소론 영의정 이광좌를 두고 "광자"니 "광"이니 하면서 어린아이까지 찧고 까불었던 것이고 이게 영조의 격노를 샀던 것이다.[8] 영조는 숙종과 천한 무수리 최씨 사이에서 나온 얼자로 조선시대 통념상 별볼일 없는 출신으로 왕이 되기 위하여서는 여러 사람들을 잡아야 했다.(노론들로서는 희빈 장씨의 소생인 경종이 왕이 되는 꼴을 보는 것은 죽기보다 더한 치욕으로 여겼기 때문에 영조를 지지한 것이지 영조의 능력과 성품에 감동해서가 아니다.) 반대로 송시열은 이이에게서 학통을 이어받았다는 사계 김장생의 노년에 제자로 들어가서 아들인 신독재 김집에게까지 제자로서 배움을 받은 학문적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학문이 조선 성리학의 가장 정통성이 있는 것인데 다른 이상한 논쟁을 받을 이유는 전혀 없다. 초년에 송시열은 비교적 포용력을 보였으나 자신의 학문적인 권위에 도전하려는 것에 점차 독선적으로 가게 되었다.[9] 김익훈은 송시열의 스승인 사계 김장생의 손자로 숙종의 1번째 장인인 김만기의 숙부였으며 김석주는 숙종의 외숙이였다. 김석주와 김익훈이 벌인 남인을 공격하기 위한 조작은 숙종의 의중이 들어간 일이였다.(처음 이 사건을 들었을 때에 송시열은 이것을 비판하였지만 이후 서인의 중진들이 와서 설명하자 이후 말을 바꾸었다. 이로 인하여서 소장파들에게서 송시열에 대한 권위가 추락했는데 송시열로서는 스승의 손자를 처벌하기에도 그렇고 경신대출척 때에 정권을 잡고 있던 남인들을 실질적으로 몰아낸 김석주를 비판하는 것도 어려웠으며 이러한 조작의 배후 자체가 왕인 상태에서 비판을 해봤자 아무 소용없음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전에 그가 왕과도 싸웠던 것을 생각하면 좀 그렇다.)[10] 정말로 역모를 저질렀을지는 알 수가 없다. 남인들과 소론 준론들이 영조를 왕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영조는 자신의 정통성을 확고하게 잡지 못하였다.(경종 시기 노론4대신이 처벌받았을 때와 경종 사망시에 돌던 독살설 등은 영조에게 있어서 큰 약점이였다. 무엇보다 노론4대신이 처벌받은 것은 그들의 주장이 지나쳤지만 영조가 세제로서 다음 후계가 되도록 하였는데 소론 완론을 포용한다고 그들을 무죄 방면하지 못하였다. 경종의 죄인인 영조는 왕이 아니라는 생각이 사라질 수가 없었다. 이에 결국 노론4대신에 대한 무죄 방면을 하면서 영조의 포용은 실패가 되고 말았다.)[11] 영조의 탕평은 노론, 소론, 남인이 아니라 자신이 중심이 되는 탕평파라는 세력을 만드는데에 있었다. 학문적 권위가 없이 부평초 같이 변신하는 어중이 떠중이들이 모여들면서 이해타산만 따지는 집단이였기에 다음 왕인 정조는 정반대가 되는 집단을 구성하고자 하였다.[12] 한명회, 윤원형, 박원종은 자신들이 모으기도 했지만,사실은 권세를 쫓아서 모여 든 것이고, 송시열허목은 학문적인 권위를 가지고 주변에 영향력을 끼쳤으며, 홍국영흥선대원군은 대세를 장악한 적들에 대항하고자 세력을 모았다는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13] 송시열은 좌의정을 지냈으며 그의 친구인 송준길은 좌참찬을, 그의 애제자인 김수항은 영의정을 지냈고, 김수항의 형인 김수흥도 영의정을 지냈고 그의 또다른 제자인 민유중도 병조판서를 지냈다. 또 그의 형인 민정중도 좌의정을 지냈는데 역시 송시열의 제자였다. 또 숙종의 첫번째 장인인 김만기도 병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냈는데 역시 송시열의 제자였고 김만기의 동생인 김만중도 송시열의 제자로 예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냈다. 또 숙종 때 서인의 영수인 이상진도 우의정을 지냈는데 역시 송시열과 가깝게 지냈고 조복양도 예조판서를 하면서 송시열과 가깝게 지냈다.[14] <앉은굿 무경> 안상경 저, 민속원 P.145 참고[15] 흥선대원군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내려오며 이 쪽은 상대가 진짜 이하응인걸 알고도 모른 척한게 아니라 왕족의 체통을 지키라고 싸다귀를 날렸다고 하며 그 역시 나중에 대범하게 넘어갔다고 한다. 뒷날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이 그 사람을 다시 불러서 내가 또 그러면 또 뺨을 치겠냐고 하니까 왕족으로서 체면을 안 지킨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16] 원인은 평소에 건강 관리를 한답시고 민간요법으로 아이의 소변을 마시는 일이 잦았는데 그 때문에 체내에 노폐물이 쌓였던 것이라고 한다.[17] 비상이 항상 독한 것은 아니다. 흔히 사약의 재료로 알려져 있지만 이 아니다. 양 조절에 실패하면 부작용이 큰 약재 중 하나일 뿐이며 체질에 따라서는 아무리 마셔도 안 죽는다.[18] 혹은 아들이 비상을 빼고 지어온 약을 먹었을 때는 낫는 듯 하다가 다시 병이 도졌는데 송시열의 아들이 허목에게 가서 사죄하고 다시 1번 처방을 받아와 그대로 만들어 먹이자 나았다는 이야기도 있다.[19] 이는 영조의 식습관과 같다. 송시열과 영조가 사망할 때 80대가 넘은 것(특히 송시열은 자연사한게 아니라 사약을 먹어 죽었음에도 사망할 때의 나이가 영조와 비슷했다.)과 영조의 장수가 소식한 것으로 꼽히는걸 보면 송시열도 소식한 것이 장수에 도움이 된 듯.[20] 배우 키가 180이 넘고 덩치가 커서 이미지는 초상화랑 가장 닮았는데 자기보다 5살 위에다가 영의정이었던 정태화를 제치고 상석에 앉아서 서인을 좌지우지하는 송시열이 나온다. 심지어 정태화가 꺼낸 '관례 강조'도 송시열이 시킨걸로 나온다.[21] 사실 외모를 보면 주현이 가장 송시열에 어울리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