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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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4년 6월 25일 선조에 의해 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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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복
정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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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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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승
심충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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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근수
윤두수
윤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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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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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
정희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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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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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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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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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우
전 용
정대길
정 탁
정한기
조귀수
최 빈
최세준
최언순
최윤영
최응숙
허 준
홍 택



1 1608년 탄핵으로 인한 제명, 1623년 인조 때 복권
2 유릉 저주 사건이 무고임을 알고도 시인한 혐의로 인한 제명, 1635년 인조 때 복권
3 인목대비를 폐하라는 상소를 올렸던 혐의로 인한 제명
4 1624년 이괄의 난으로 인한 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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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이달의 문화인물(1998-2005)
}}}


허준 / 許浚

파일:허준 표준영정.jpg
▲ 허준의 표준영정

청원(淸源)

구암(龜巖)
본관
양천 허씨(陽川 許氏)
출생
1539년(중종 33)[1]
경기도 장단도호부 임강면 우근리
혹은 경기도 양천현 파릉리
(현 북한 개성시 판문구역 또는 서울특별시 강서구)
사망
1615년(광해 7)
10월 9일 (음력 8월 17일) (향년 75-76세)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 산129번지
직업
한의사
종교
유교(성리학)
가족
허곤(조부)
허륜(부)
정경부인 김씨(부인)
허겸(자)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대중매체
5. 관련 문서
6. 관련 단체



1. 개요[편집]


조선 중기의 의학자로, 의학서 동의보감의 저자로 유명한 인물이다.


2. 생애[편집]


본관은 양천으로 경기도 양천현 파릉리(현 서울특별시 강서구 등촌2동)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 양천 허씨 시조 허선문(許宣文)의 20세손으로 할아버지는 경상우수사를 지낸 허곤(許琨)이며 아버지는 용천부사를 지낸 허륜(許碖)이다. 어머니는 허륜의 소실 영광 김씨로 적모로 윤씨가 있고 서모로 일직 손씨가 있다.[3] 이복형으로 허옥(許沃)이 있으며[4] 바로 아랫동생인 허징(許澂)[5]은 같은 어머니가 낳은 동복형제로 허준은 허륜의 차남이다. 허륜의 소실 영광 김씨는 허준의 어머니로 김욱짐의 딸로 당대에서도 설명되고 있다.

일단 허준이나 허징은 족보에는 서자로 표기되어 있다. 다만 천민 소생이 아닌 양인 신분의 첩의 소생으로 동의보감 원작이나 드라마 허준에서 묘사된 것처럼 천민 소생은 아니다. 허징도 형 못지 않게 비범한 인물로 서자이면서도 문과에 급제하고 선조 시절 영의정을 지낸 노수신의 딸과 결혼까지 한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허준이 1575년 선조의 어의로 임명되었기에 이때 신분이 면천되어 어머니인 영광 김씨와 허준의 동복동생인 허징 또한 중인 출신이 아닌 반가의 혈족으로 인정받았을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허징은 1586년(선조 19년) 문과 알성시 병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고 학관(學官)을 거쳐 목사(牧使)를 역임했는데, 형 허준의 능력으로 허징의 신분이 면천되어 대과를 볼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6]

본래는 서자나 얼자[7] 모두 과거에 응시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나 서자는 양첩 사이에서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허준이 10살 무렵인 1550년부터 과거 응시가 가능하도록 법이 바뀌었다.[8] 허준은 과거시험 잡과 중 의과에 합격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과거는 양반만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오해하는데 법률상으로는 천민이 아닌 모든 사람이면 과거 응시 자격이 있었다. 애초에 과거에 합격해야 양반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양반이어야 과거에 응시할 수 있다고 말하면 모순이다. 반대로 의과를 포함한 잡과를 중인'만' 볼 수 있던 것도 아니다. 의관 중에서도 유의라 해서 사대부 출신 의관들이 많이 있었다.
소설 동의보감 등에서는 그가 용천부사 허륜과 기생 출신의 손씨 상에서 난 얼자라서 설움받고 멸시받고 지내다가 아버지 곁을 떠나 경상도의 명의 유의태에게 의학을 배웠다고 나오나 이는 어디까지나 소설상의 이야기일 뿐이다. 유의태라는 사람은 가공 인물이고 모델로 보이는 유이태라는 인물은 허준이 죽고나서도 약 150여년 뒤인 숙종 대의 인물이다. 허준이 어디서 어떻게 의학을 배웠는지는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아 알 도리가 없다. 아예 처음부터 서자가 아니고 후대의 족보 기록이 잘못되었다는 소수의 주장도 있지만 이를 확실히 입증할 만한 물증은 없다. 따라서 서자였다는게 중론인데 서자라고 유별나게 차별받거나 가난하게 사는 그런 환경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축첩이 당연한 일이었던 전근대 시대에는 서얼의 과거 응시 제한 같은 사회적 차별과는 별개로 서얼 개개인이 집안에서 받는 대우는 어디까지나 시대, 지역, 가풍에 따라 달랐다. 그래서 현대인의 통념과는 달리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 같은 사례[9]는 생각보다 적었다. 만일 허준의 집안이 서자를 강하게 차별하는 집안이었다면 같은 서자인 허준이나 허징이 아무리 유능하다고 해도 공부를 시켰을 리가 없다. 즉 허준이나 허징이 집안에서의 좋은 대우와 본인의 재능이 겹쳐서 성공했다는 게 정설. 허준이 어떻게 의학을 배웠는지는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으나 내의원에 들어오기 전에 허준이 의학으로 명성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오므로 아버지인 허륜이나 적모 윤씨, 친모 김씨, 서모 손씨, 이복형 허옥 등의 지원 아래 여러 스승을 들여 의학을 배웠다는 추론이 있으며 역사스페셜에서 한차례 다루었는데 서자를 차별하지 않는 깨어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지원을 받아 의학의 기초를 갖추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선조 대의 관료이자 학자인 미암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에 의하면 1569년에 유희춘 자신이 허준을 이조판서 홍담에게 내의원에 천거해달라고 부탁했다는 기록이 있고 1573년에 정3품 내의원정에 올랐다는 것으로 보아 1569년에 내의원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내의원에 천거되려면 기본적인 의학 수준 이상을 갖추어야 하고 집안의 배경도 추천의 근거가 되므로 본인 실력과 뒷받침해주는 가문의 배경으로 내의원에 들어간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추천장을 성 대감에게 받고 유의태가 추천장을 불태우는데 실제 허준은 추천으로 내의원에 들어간 것이다.

1575년부터 선조를 진료하는 의원이 되었고 1578년에 내의원 첨정에 올랐으며 1587년에는 어의 양예수와 함께 선조를 치료하여 호피를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1590년에는 광해군의 두창을 치료하여 1591년 당상관[10][11]에까지 오르게 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의 곁을 떠나지 않고 호종을 해서 전후 호성공신 3등에 제수되었다. 게다가 임진왜란에는 류성룡, 이덕형, 이항복, 이원익, 이산해와 더불어 자신은 가족들과 함께 피난가지 않고 자진해서 조정에 남아 선조를 모셨다. 원작소설인 동의보감이나 이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 허준 등에서 의료 기록을 빼내서 짊어지고 오느라 늦게 선조에게 도착한 탓에 선조가 분노했다는 내용은 완전히 허구다. 다만 의서는 옮겨졌을 가능성이 있는데 선조가 피난길에 오를때 병을 앓아 치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다만 이때도 의서를 옮긴 이들은 허준이 아닌 하급 서리들이나 짐꾼들이 했지 허준이 한 것이 아니며 의서를 옮기는데도 결정을 내린 이는 허준이 아닌 당시 수의[12] 양예수라고 보는게 타당하다.

1596년에는 세자 광해군의 천연두를 고쳐 종2품의 가의대부(차관급)에 제수되었다. 또한 이때 선조가 조선의 실정에 맞는 의서 편찬 작업을 명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동의보감 편찬의 시작이었다. 허준을 비롯해 어의(御醫) 양예수, 이명원, 김응탁, 정예남 등과 민간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유의(儒醫) 정작 등 6인이 공동으로 동의보감 편찬 작업을 시작했다.[13] 그러나 정유재란의 발발로 1년 만에 작업이 중단됐다. 이후 1601년 선조는 다시 허준에게 명하여 동의보감을 단독으로 편찬하도록 하되 보다 시급한 의학책인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 등 3종을 우선 편찬하라고 명했다. 또, 내장방서(內藏方書) 500권을 내줘 편찬에 고증할 수 있게 했다.

1600년(선조 33년) 정2품 지중추부사를 겸직하던 수의 양예수가 병사함에 따라 허준이 내의원 최선임자로 수의가 되었다. 1604년 임진왜란 당시 어가 호종의 공로로 호성공신 3등에 오르게 되고 이때 의관으로서는 처음으로 대권으로 정1품 양평부원군에 제수되었으나, 대간들의 반대로 인해 종1품 양평군(陽平君)으로 강격되었다. 참고로 군(君)은 왕의 서자나 당상(堂上)의 위계에게 주어지는 부군(府君)의 관작을 말한다. 종1품상계인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고 1606년 왕실의 병을 다스린 공로로 다시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제수되었으나, 보국숭록대부는 당상관의 문관이 받는 위계라는 이유로 허준은 의관이므로 관례에 어긋난다고 또 한 번 대간들의 반대를 불러 백지화되었다. 1607년에는 임금의 병이 위중하고 잘 낫지 않았는데 이것은 허준이 약을 잘못 썼기 때문이라 하여 연일 조정에서 수의 허준을 벌주어야 된다는 여론이 강했으나 선조가 벌을 주기보다 의술을 다하게 해야 한다며 무마시켰다.

대간들이 허준을 질투하거나 멸시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허준에게만 이례적으로 특혜를 준 것이기 때문에 대간들의 반대가 유별난 것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품서용 원칙이 적용되는 잡과 급제자는 정3품 당하관이 승진의 끝인데 허준은 종1품에 제수되고 봉군까지 된 상황에서 정1품으로 진급한 것이다. 이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잡과 응시자가 순수하게 잡직으로만 근무하며 정1품을 달성한 유일한 사례이다. 이처럼 허준에게만 특례가 적용된 것은 무엇보다도 선조의 절대적인 신뢰를 얻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며, 재위 내내 유능한 신하들에 대한 심각한 의심병과 열등감 폭발에 시달려서 이순신의 공적을 깎아내리고 원균을 찬양할 정도로 멘탈이 막장이었던 선조의 항구적이고도 절대적인 신뢰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것은 전시에 대통령의 목숨을 구한 대통령 주치의나 국립중앙의료원장에게 대통령이 삼부요인급 의전을 준다는 거의 실현 불가능한 수준으로 9급 공무원이 국무총리까지 승진하는 넘사벽 난이도의 문제조차 넘어서는 것이다.[14]

당시에도 백성들 사이에서 중인에서 정1품까지 출세한 허준의 입지전적인 출세 스토리는 화제가 되었다고 하며 백성들 사이에 계속 회자되면서 허준 설화가 전국 곳곳에서 전해지는 계기가 된다. 이런 허준과 관련한 설화 혹은 전설들이 우리가 아는 소설과 드라마의 소재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1608년 선조가 사망하면서 어의인 허준은 책임을 지고 귀양을 가게 되었다. 사실 조선에서 왕이 사망하면 왕의 건강을 책임지던 어의는 사직하거나 형식적으로 귀양을 갔다가 곧 풀려나서 복귀하는 것이 관례였다.[15] 그래서 1609년 말 1년 정도의 귀양에서 풀려난 허준은 광해군의 어의가 되어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다. 1999년도 작 허준 드라마에서는 선조가 사망하고 그 책임을 지고 귀양을 가서 십수년을 귀양살이를 하며 그 기간동안 동의보감을 완성한 것으로 극화되었다. 실제 동의보감은 선조가 살아있던 1596년 선조의 왕명으로 편찬된 것이라서 허준이 독자적으로 편찬한 것도 아니었고, 편찬 과정에 당시 책임자는 태의[16]인 양예수였고, 그 외에 유의 정작(鄭碏)과 김응택, 이명원(李明源), 정예남 등과 함께 편찬하였으니 허준 혼자만의 공도 아니었지만 허준이 선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고속출세하여 허준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그가 동료들과 함께 편찬한 동의보감이 허준 개인이 편찬한 것으로 오인받는 요인이 되었다. 1999년작 드라마 허준에서 선조가 사망하고 십수년간 귀양살이를 한 것으로 묘사된 것도 선조때부터 기획하여 광해군이 등극하고 완료된 것을 포함한 것이다.

사실 허준은 귀양살이에서는 귀양만 살았고 귀양에서 풀려나 삼의사의 수의로 복귀한 1610년 동의보감의 편찬을 완료하여 광해군에게 바친다.[17] 1596년 선조에게 첫 왕명을 받은 지 14년 만의 일이었다. 허준은 그동안 바쁜 공무로 인해 선조가 승하할 때까지도 동의보감의 편찬을 끝내지 못했으나 선조 승하 이후 유배로 인해 시간적 여유가 생긴 허준은 이미 사망한 태의 양예수 외에 생존해 있던 유의 정작(鄭碏)과 김응택, 이명원(李明源), 정예남 등 다른 동료들과 동의보감 편찬에 몰두하여 편찬을 마칠 수 있었다. 참고로 당시는 전란 직후라 출판 사정이 좋지 않아 동의보감은 편찬 완료 후 3년 뒤에나 출판될 수 있었다고 한다.

동의보감은 당시에 출판된 조선과 중국의 확보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의서를 참고하고 여기에 내의원의 연구가 더해져 완성된 일종의 의학 백과사전으로 출판되자마자 조선, 청나라,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심지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간 사람들마다 베이징서점에서 동의보감이 팔리고 있다는 기록을 남길 정도였다.

다만 동의보감이 처음부터 허준이 단독으로 시작한 작업은 아니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1596년 선조의 명으로 당대의 여러 명의들과 공동으로 편찬 작업에 착수하였으나 작업 초반 정유재란(1597년)의 발발로 작업이 중단됐다. 이후 1601년 선조가 다시 허준에게 따로 동의보감의 편찬 작업을 재개할 것을 명한 것이다. 동의보감 편찬은 공동 프로젝트로 시작하였고 여러 명의들이 왕실 서고와 민간에 떠돌던 수많은 의서들을 참고하여 제대로 된 것을 추려내고 자신들의 의학관과 경험을 첨가하여 작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동의보감이 허준의 단독 작품인 것처럼 취급될 수 있었던 이유는 전란으로 편찬 작업의 참가자들이 모두 흩어지며 초반에 중지됐던 작업을 이후 허준이 허준이 책임자로 임명되어 다른 명의들을 지휘하여 편찬 작업을 완료했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초반에 중단되어 무산될뻔한 프로젝트가 허준을 책임자로 하여금 무사히 끝마칠 수 있게 됐으니 동의보감 편찬에 허준의 공이 제일 큰 것은 부정할 수 없기에 동의보감이 허준의 단독 저작물이라는 오해가 생긴 것이다.

허준은 이후에도 각종 의서 편찬에 매진하였는데 이는 임진왜란 이후 피폐해진 백성들을 위해 의학자로서 나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615년 10월 9일 향년 76세로 사망하였고 생전에 보류되었던 정1품 양평부원군 보국숭록대부에도 추증되었는데 그동안 반대했던 대간들도 동의보감 편찬에 공을 세운 것을 인정하여 이때는 반대하지 않았다.

동의보감과 다른 한 권을 제외하면 전부 전염병 관련 저작이다. 원작소설인 동의보감과 이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에서는 침술의 달인으로 곧잘 나오지만 실제로는 탕약 및 역병의 예방 및 치료가 주 분야였다. 동의보감 원작에서 삼적대사가 탕약 및 병의 예방 및 치료가 주 분야이다. 실제로 허준은 광해군의 두창을 탕약으로 치료한 공로로 선조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18]

실록에서도 허준 본인이 선조에게 직접 "소신은 침 놓는 법을 모르옵니다"라고 솔직하게 대답한 기록도 있다.

이 이르기를 "침을 놓는 것이 어떻겠는가?"하니, 허준(許浚)이 아뢰기를, "증세가 긴급하니 상례에 구애받을 수는 없습니다. 여러 차례 침을 맞으시는 것이 미안한 듯하기는 합니다마는, 침의(針醫)들은 항상 말하기를 ‘반드시 침을 놓아 열기(熱氣)를 해소시킨 다음에야 통증이 감소된다.’고 합니다. 소신(小臣)은 침 놓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마는 그들의 말이 이러하기 때문에 아뢰는 것입니다. 허임[19]

도 평소에 말하기를 '경맥(經脈)을 이끌어낸 뒤에 아시혈(阿是穴)에 침을 놓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이 일리가 있는 듯합니다."하였다.

ㅡ <선조실록> 선조 37년(1604년) 9월 23일


다만 그렇다고 해서 허준이 침술에 아주 문외한이란 뜻은 아니다. 당대에 침술은 조선에서 의관이라면 당연히 할 줄 알아야 하는 기본 기술이었다. 침의가 따로 있으니 겸양의 의미일테고, 주 전공은 아니었던 것.

허준의 경우 기록을 종합해보면 주 전공은 약제 분야로 추정된다. 환자를 직접 담당하는 주치의가 기본 진료 및 처방 방침을 정하면 외과 등 직접 시술을 맡은 전문의가 방침에 따른 시술을 진행하는 것처럼 어의 역시 직접 진료하는 의관이 치료 방법을 결정하고 이를 따라서 침의가 침을 놓는 형태이다. 굳이 현대 의학으로 비유하면 실력있는 내과 전문의가 외과 수술 실력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20] 또한 당대의 어의들도 현대 의사들의 협진처럼 진료 및 치료 시술을 분담하였다.


3. 기타[편집]


  • 허준이 해부할 시체가 부족해서 제자들을 해부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당연히 사실이 아니니 믿지 말자. 당장 허준은 임진왜란을 겪은 인물이고, 비록 근왕을 해서 직접 전화에 휩쓸리지는 않았다고 하나 역병이나 기아로 인해 시체를 접할 기회는 충분히 많았을 것이다. 또한 허준은 내의원 소속의 의관인 만큼 제자를 두었다면 당연히 주변에 소문이 퍼졌을 텐데, 그런 사람의 제자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면 당대에도 상당한 이슈가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당연히 그에 관련된 기록은 없다. 무엇보다 조선 사회는 유교 사회이며, 학파로 당파가 갈릴 정도로 사제관계가 중요시되는 사회에서 허준이 제자를, 그것도 해부 목적으로 살해했다는 것이 기록으로 남을 정도로 사실이었다면 현재 동의보감의 저자는 허준일 수가 없을 것이다.

  • 허준의 묘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에 위치해 있다. 아쉽게도 이곳은 민통선 지역이라서 방문하기는 쉽지 않다. 위치가 위치인지라 오랫동안 실전되었다가 1991년에야 발견되었는데[21], 발견 당시에는 봉분과 석물이 묘임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방치된 상태였으며 묘비도 두 동강이 났을 정도[22]로 상당히 훼손된 상태였다고 한다. 허준 묘 발견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사. 다행히 묘비에 그의 묘임을 알리는 '허준', '양평군', '호성공신'이라는 표기가 남아있어서 허준의 묘로 판명될 수 있었다.

  • 허준의 직계 후손들은 대부분 북한에 남아 있어서 자세한 파악이 되어있지 않다.


  • 2009년, 동의보감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23]


4. 대중매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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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관련 문서[편집]



6. 관련 단체[편집]


  • 의성허준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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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537년 설, 1546년 설 등 출생년도에 대해 여러 설이 있으나 동시대 인물인 최립(崔笠, 1539~1612)의 문집인 간이집(簡易集)에서 자신이 허준과 동갑이라는 언급이 있으므로 1539년 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다.[2] 서지학계(서지학자 이양재씨 주장)를 중심으로 경기도 장단군 대강면(현 북한 개성시)에서 출생했다는 학설이 등장하면서 논란 중에 있다.[3] 드라마 허준의 원작인 소설 동의보감과 그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에서는 사실과 다르게 허준의 어머니가 손씨로 나온다. 참고로 손씨도 허륜의 첩실로 실제 허준에게 손씨는 서모에 해당한다.[4] 구암 허준에서는 허석으로 나온다.[5] 동의보감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허준과 허징은 1539년, 1549년생으로 10살 차이가 난다.[6] 드라마 허준에서는 허준이 어의가 되자 면천이 되어 자신의 아들이 대과를 볼 수 있는 자격이 생긴 걸로 각색되어 나왔다.[7] 양민 신분의 첩(妾)이 낳은 자식을 서자(庶子)라 하고, 천민(賤民)인 첩이 낳은 자식은 얼자(孼子)라고 한다.[8] 하지만 이 경우도 서자의 손자 대부터 응시 가능이었기 때문에(서얼의 후손은 당대 기준으로는 적자라도 서얼이다.) 족보에 모친이 첩으로 기록된 허징이 도대체 어떻게 문과 시험을 볼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 남으나 허준이 어의로 임명되어 허징 또한 면천이 되어 양반의 신분으로 과거에 응시했다고 보는게 타당하다.[9] 오히려 홍길동전 원전에서도 홍길동은 집안 내에서의 차별은 거의 받지 않았다. 아버지와 형 모두 홍길동을 정말로 가족처럼 대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부호형 자체, 서얼로서의 공적인 차별은 그대로였으므로 이를 타파하기 위해 집을 나와서 의적이 된 게 원전의 내용이다. 즉, 집안 내에서 서얼의 대우는 가문마다 다를 수 있었다.[10] 조선의 정3품상(上) 이상의 고위 관리를 칭하는 말이다. 정3품하(下) 이하는 당하관이라 칭한다. 당상관은 몇몇 예외는 있었지만 원칙적으로 문과, 무과 전시(殿試)를 합격한 자들이 오를 수 있었고 기술직이나 환관, 음서로 관직에 오른 자는 당상관 이상의 직책과 청요직에는 오르지 못했으므로 당시에 어의라고는 해도 의관인 허준이 당상관에 오른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다.[11] 허준이 당상관에 가자되자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삼사와 의금부에서 일제히 나서서 탄핵, 왕자를 치료한 것은 의관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이고 비록 공이 있다 해도 의관에게 당상의 가자를 내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므로 취소할 것을 왕에게 여러 번 간청했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 선조실록에서 허준을 검색해보면 허준 탄핵 기록이 무수히 쏟아져나온다(...) 이들이 허준에게 악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기술직인 의관이 당상관에 오른다는 게 전대미문의 사례였기 때문이다.[12] 실직으로서 내의원의 최고서열[13] 동의보감을 편찬할 당시 영의정이었던 류성룡도 조언을 해주었다고 한다.[14] 1999년도 작 허준 드라마에서는 허준이 어의에서 은퇴한 이후 산음으로 귀향했다가 역병이 퍼졌음을 알고 고을 현령에게 환곡을 풀라고 종용했다가 관아에서 쫓겨나는데 나중에서야 현령이 자기가 쫒아낸 사람이 임금님의 충신이자 공신인 이름높은 구암 대감이었다는 것을 알고 식겁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정1품은 삼정승과 정승이 겸직하는 각 정부기관 도제조만이 달 수 있는 것이고 종1품 역시 장관급인 판서들, 학문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성균관 대제학, 지방관들의 끝판왕인 관찰사와 한성판윤보다 위인 품계다. 쉽게 말해 종5품인 고을 현령은 쳐다보지도 못할 품계인데 곧은 말 했다고 박대하며 쫓아내버렸다. 그 이전에 환곡을 풀지않아서 역병이 크게 번졌는데 허준이 조정의 구원을 기다리다못해 혼자서 역병을 잡으러 들어갔고 역병은 수그러들었으나 허준이 죽었으니 본인이 목이 잘리는 것은 당연하고 자기 가문이 망하게 생겼다.[15] 실제로도 허준이 받은 조치는 방축(放逐), 귀양보다 한단계 낮은, 고향으로 부처시키는 형벌이었다. 이후 기록에 황예(荒裔), 변방으로 간 듯한 표현이 등장하지만 광해군의 상투적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16] 삼의사의 수장인 수의에서도 가장 계급이 높은 수의를 태의라고 한다.[17] 광해군은 허준이 선왕의 유업을 완수했다고 해 허준에게 좋은 말 1필을 상으로 내렸다고 한다.[18] 그런데 지금 보면 코미디인 치료법이 많다. 예를 들어 천연두에는 음력 12월에 채취하고 응달에 말린 매화꽃을 많고 적음을 가리지 말고 복용하고 꿀로 감실만한 크기의 환을 만들어 매일 1환씩 좋은 술로 녹여 먹으면서 '태을구고천존'을 100번 외우라고 하는데 물 떠다놓고 기도하는 것과 아무 차이가 없는 수준의 치료법이다. 저 '태을구고천존' 주문은 현대까지 사이비 종교 단체에서 잘 쓰이고 있다.[19] 드라마 명불허전에서 다루는 실존 인물이다. 실제로 허준의 일화라고 알려진 것들 중 대개는 천출이었던 허임의 일화가 각색된 것이 많다. 이 문서에서 다루는 허준의 침술과 관련된 일화도 이 예시 중 하나이다.[20] 물론 당시의 침술이 현대의 외과 수술과 같은 것은 아니니 주의.[21] 1980년대의 위인전기 중 하나에는 묘지가 북한에 있다는 기술이 있기도 했다.[22] 지금도 허준 묘의 묘비를 보면 묘비가 두 동강이 났던 흔적을 볼 수 있다.[23] 의서 최초 기록은 1997년에 등재된 타밀 의료기록 모음집과 디오스쿠리드 필사본 등의 의학 서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