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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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의 문신.
인조반정의 1등 공신인 이귀의 아들이며, 이시방의 형이다.
2. 생애[편집]
젊었을 때에는 이항복의 문하에 있으면서 최명길, 장유 등과 친구가 되었다.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하려고 하자 동생과 함께 아버지와 모의를 하였다. 인조반정 때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 2등을 받았고, 인조 2년(1624년)에 연양군(延陽君)에 봉해졌다.[3]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모병협수사(募兵協守使)가 되어 이천 일대에서 향병을 모집하였다.#
병자호란 때에 수어사로 남한산성의 서쪽 부분을 지키는데 후금의 군사들이 밤 중에 야습을 가하자 갑옷도 입지 않고 병졸들보다 앞서 화살을 쏘다 적의 화살을 두 발이나 맞았으나 전투가 끝날 때까지는 이를 숨기고 끝까지 지휘했다. 소란과 동요가 심했던 다른 쪽 성들과는 달리 이시백이 지휘한 서쪽 부분은 침착하게 대응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시백도 패배 경험이 있는데, 북문에서는 군사 300을 이끌다 청나라군에게 모두 몰살당한 일도 있다.
여담으로 인조는 결국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뒤 술자리를 만들어 이시백을 불러 "병판은 주량이 얼마나 되오?"라고 물은 뒤 이시백이 자신은 술을 잘 못하고 병이 있어 더욱이 못한다라고 답하자 인조가 그 병은 남한산성을 지키다 생긴 병이라며 대답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인조는 다시 이시백의 자녀가 몇 명인지 묻고 왜 과거를 보지 않냐고 다시 물으며 나라에 충성하려면 무과라도 좋다며 부친의 공을 자신은 잊지 못한다고 자식들이 과거를 보기를 부탁하자 이에 이시백은 감동하여 "아버지가 눈감기 전에는 오직 나라가 있음을 알 뿐이었습니다. 이제 전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감읍하여 눈물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답하자 인조는 자리를 같이한 봉림대군으로 하여금 이시백에게 술을 따르게하며 “내가 이분을 팔다리처럼 여기니 너도 뒷날 이분을 높게 대접하라!”라고 당부했다.
현종 1년(1660년) 4월에 병이 위중해져 왕이 약물을 내렸으나 5월에 사망했다. 현종 15년(1674년)에 충익(忠翼)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3. 평가[편집]
청렴하고 충의롭고 근신한 절의는 당대의 재상들 중 따를 자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5]# 현종 개수 실록에서도 벼슬살이 38년 동안 청렴하고 삼가고 검소한 것이 전혀 변함이 없었다는 선비로서 받을 수 있는 극찬을 받는다. 또한 인척[6] 인 김자점의 역모에도 불구하고 효종의 배려를 받았다는 얘기를 적으면서 그가 임금에게도 많은 총애를 받았다는 얘기까지 곁들여져 있다.#
4. 대중매체[편집]
- 고전소설 <박씨전>에서는 주인공인 박씨 부인의 남편인데 이시백이 모티브이다. 아버지가 이귀가 아닌 이득춘이라는 인물로 나오며 동시에 윤씨였던 부인 역시 박씨로 나오는 등의 차이가 있으나 이건 이 이야기가 픽션이라는 장치로 보면 된다. 인성이 개차반이라 자기 아내를 못 생겼다는 이유로 매우 박대하고 구박한다.[7]
- 웹소설 <조선후궁실록 : 호란기연>에서는 유응부의 아들이자 여주인공 이화진의 연인이었던 유정운의 환생으로 나온다. 마지막에는 이화진의 외할아버지 영찬의 희생으로 죽음을 피하고 이화진과 재회하지만 상철의 희생으로 죽음을 피했던 소연도 결국 경민을 낳고 얼마 후에 사망했다는 걸 생각하면 시백 또한...
- 2017년 개봉한 영화 <남한산성>에서는 배우 박희순이 연기했다. 실제 역사에서는 문관임에도 지휘관이 무쌍난무하는 클리셰 때문에 작중에서 조선 무쌍을 찍는다. 어느 정도냐면 후반부에 무너진 성벽을 타고 청나라군이 밀고 오자 백성들을 징병한 조선군들은 무서워서 다가가지 못하는데 이시백 혼자 무너진 성벽 틈을 칼춤 추며 막으며 혼자 수십 명을 썰어버린다. 다만, 갑옷을 입지 않은 채로 활을 쏜 기록이 있기에 아예 판타지적인 고증오류까지는 아니라고 볼 수 있으며 영화에서는 아예 고증을 의도적으로 비틀어 무관으로 등장하기에 일종의 영화적 허용으로 보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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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율리우스력 11월 5일.[2] 영산군의 외고손녀.#[3] 효종 때에 연양부원군으로 높여진다.[4] 이 일 때문에 남한산성 북문의 이름이 전승문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5] 동생 이시방도 비슷한 평가를 받았다. 이시방은 김육이 대동법 실시에 실무를 담당할 만한 인재 중 한 명으로 추천한 바 있다.[6] 이시백의 여동생이 김자점의 동생인 김자겸의 부인이고 이시백의 외손자인 김세창은 김자점의 손자이다.[7] 그런데 허물을 벗고 미녀로 둔갑하니까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