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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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중기의 무관#武官. 임진왜란 당시 탄금대 전투에서 사망한 신립의 아들이다.
2. 생애[편집]
광해군이 즉위하여 대북이 정권을 장악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그러던 중 1623년(광해군 15) 음력 3월에 김류, 이귀, 이괄, 최명길 등과 함께 인조반정을 계획했다. 정작 본인은 반정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으나 그래도 반정을 가장 먼저 계획했다라는 이유로 인조반정 공신인 정사공신에 올랐다. 흔히 이야기하는 인조 반정의 4대장 중 한 명이다.
이괄의 난 당시에 흥안군 이제를 처형했고, 정묘호란 시기에는 인조를 옆에서 모시고 따라가 그 공으로 부원군이 되었다. 병자호란때는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1643년(인조 21) 영의정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
김류와는 대를 이어서 친분이 깊었는데 아버지들과는 서열이 바뀌었다.
3. 묘역[편집]
현재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에 신경진의 묘가 있다. 봉분은 하나이며 봉분 하단에는 호석이 둘러져있다. 묘 앞에는 묘비, 상석이 각기 1기 씩 있고, 망주석 1쌍과 문인석 2쌍이 있다. 문인석 2쌍 중 1쌍은 상석 양 옆에 있는데, 굉장히 크기가 아담해서 귀여운 느낌마저 준다.
신경진의 묘 서북쪽에 그의 일생과 업적을 적은 신도비가 있다. 너비는 99cm, 두께는 32cm이며, 총 높이는 368cm로 그 중 비신의 높이는 189cm이다. 거북이 형상을 한 받침돌 위에 비신을 올리고 그 위에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머릿돌은 팔작지붕 형태로, 그 위에 이무기 두 마리를 조각해두었다.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박태유[8] 가 글씨를 썼다.
한동안 이 신도비가 누구 것인지 알려지지 않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사람들이 받침돌의 모양을 따서 '거북비'로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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