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윤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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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의 문신.
2. 생애[편집]
아버지는 쇄미록을 기록한 오희문이고, 어머니는 문천군수 이정수와 익양군의 차녀 이계환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연안 이씨이다. 즉 오윤겸은 익양군의 증손자가 된다. 오윤겸은 다른 인재들에 비해 그다지 특출나진 않았다. 20대에 사마시에 급제했으나 36세의 늦은 나이에 전시 문과에 급제했다. 그것도 갑과, 을과도 아닌 병과였다. 그 전에는 능참봉이나 송강 정철의 종사관 같은 미관 말직에 종사했다. 그가 등과하는 1595년은 임진왜란 중이었고, 그와 동세대인 이항복과 이덕형은 이미 대사헌을 거쳐 참판, 판서를 다는 당상관이었다.
사실 오윤겸은 과거 시험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간절한 소망 때문에 과거 시험을 보기는 했는데 과거 시험 문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응시하지 않고, 다 써 놓은 답안지에 다른 사람이 실수로 먹물을 쏟아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런데 평강현감으로 있을 때 우연히 문과에 응시해 급제했다.
야사에 따르면 정철이 이산해에게 사윗감을 구해달라고 해서 오윤겸을 추천했더니 이산해는 사위 이덕형과 같은 준재를 고르면서 정작 자신에게는 오윤겸과 같은 답답한 인간을 소개해주냐고 절교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는 대인(待人)과 접물(接物)에 있어서 언제나 모가 나지 않았고, 자기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여 겸허한 태도를 보였다. 보수적인 성격이지만 유화스럽게 상황을 이끌어나가 사람들에게 친밀감을 주었다. 그는 또한 류성룡의 제자 정경세(鄭經世)와 함께 당대 가장 경전에 밝은 사람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오윤겸의 벼슬 운은 전쟁이 지나고나서도 순탄치 않았다. 전후에도 북인 공세기는 지속되었고 이때 그는 성혼을 변호하다가 함경도 경성 판관으로 좌천되었으며,[4] 평안도 안주 목사, 경상도 동래 부사를 전전해야했다. 오윤겸이 돌아온 것은 광해군 때(1610년)였지만, 당상관에 오른지 얼마 되지도 않아 문묘 배향 문제로 물러난다. 조식의 문하로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 배향을 반대하던 정인홍과 부딪쳤던 것이다.[5] 이에 강원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이후 1613년 계축 옥사로 인목대비의 지친들이 대거 잡혀들어가자 스스로 외직을 자처했다.
이렇게 지방관의 세월이 길다보니 이때의 업적이 더 많다. 백성에게 인기가 많았고, 세금을 줄여주거나 인사를 청렴하게 수행하였다는 평을 받는 청백리였다.
이후 정3품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고, 이 해 1617년(광해군 10년) 조선 통신사로 다녀와 포로 송환에 기여했다. 이때 풍랑으로 죽을 뻔했고, 북인의 득세가 계속되자 다시 물러났다가 1622년(광해군 14년)에 다시 명나라 천계제의 등극을 축하하러 명나라 사신으로 가던 중에 해로로 갔다가 풍랑으로 또 죽을 뻔했다. 특징은 서인이면서도 계속 북인 정권과 인목대비 폐비에 반대하면서도 궂은 일은 도맡아 했다는 것.
이렇게 광해군 조정에서 오래 일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반정 공신이 아닌데도[6] 정권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그제서야 외직과 사신을 전전하던 60대의 오윤겸에게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판서를 역임한건 물론이고, 이괄의 난에서 왕을 공주까지 호송한 이후로 우의정에 올랐다. 정묘호란에는 인목대비와 인열왕후를 강화도로 호송했으며, 기어이 좌의정을 거쳐 1628년 70세의 나이에 영의정에 올랐다. 인조가 추진하는 생부 정원군의 원종 추존을 반대했다. 사실 이건 이귀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서인들이 반대했던거긴 하지만 여하간 할 소리는 하면서도 좌천당하진 않았다.
오윤겸은 서인이었지만 당색을 초월했다. 그래서 오윤겸은 남인 같은 서인이고, 이수광은 서인 같은 남인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오윤겸과 이수광은 폐모론에 반대하며 외직을 떠돈 점, 그런 소수파였음에도 광해군 정권에 참여한 점,[7] 이수광 역시 광해군 시절 명의 사신으로 마테오 리치와 자주 접했다는 점,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같이 인조를 호송했다는 점 등 여러 비슷한 점이 많았다. 다만 이수광이 정묘호란 직후(1628년) 이조 판서의 자리에서 사망해 정승에는 이르지 못했다.[8]
이후 좌의정을 역임하다가 병자호란 전에 죽었다.
3. 여담[편집]
오윤겸의 아버지와 조카도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아버지는 조선 중기 민간인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사료로 중요한 일기 쇄미록(보물 1096호)을 남긴 오희문이고, 조카는 병자호란 당시 삼학사의 한 사람인 오달제다. 병조좌랑과 부교리를 지내고 청나라에 끌려가 28세의 나이에 죽었다. 오달제는 이 공로로 훗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해주 오씨 추탄공파가 그의 후손들이다. 유명 인물로는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오명항, 오세훈 서울특별시장, 오신환 전 국회의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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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율리우스력 11월 10일.[2] 성종의 9남 익양군의 외손녀.[3] 오명항의 증조부.[4] 영의정이었던 이항복도 이 일 때문에 물러났다.[5] 정인홍이 좀 무리를 한것은 사실이다. 차라리 조식의 문묘 배향을 주장했으면 되었을 것을 괜히 이언적까지 몰아 공격하다가 명분을 많이 잃게 되었다.[6] 공서파가 아닌 청서파였다는 이야기다. 그 이전에 광해군 정권에 참여하기도 했고.[7] 지봉유설은 이때의 작품이다.[8] 맏아들 이성구가 남인임에도 불구하고 영의정이 된걸 보면 아마 이수광이 장수했다면 정승이 되고 남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성구 역시 서인으로 분류되는 이항복의 송덕비를 북청 땅에 세워주어 북인의 미움을 사 유배된 전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