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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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승
문충공(文忠公)
김상용
金尙容
출생1561년 6월 1일[1]
(음력 명종 16년 5월 9일)
한성부
사망1637년 2월 16일 (향년 75세)
(음력 인조 15년 1월 22일)[2]
경기 강화부 읍성 남문루
(현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남산리)
시호문충(文忠)
본관신 안동 김씨
경택(景擇)
선원(仙源), 풍계(楓溪), 계옹(溪翁)
부모부친 - 김극효(金克孝, 1542 ~ 1618)
모친 - 동래 정씨 정말정(鄭末貞, 1542 ~ ?)[3]
형제자매남동생 - 김상관(金尙寬, 1566 ~1621)
김상건(金尙蹇, 1567 ~ 1604)
김상헌
김상복(金尙宓,1573 ~ 1652)
부인정실 - 안동 권씨 - 권개(權愷)[4]의 딸
측실 - 광산 김씨 김종생(金終生, 1583 ~ ?)[5]
자녀슬하 4남 6녀#
[ 정부인 권씨 소생 - 3남 3녀 ]
적장남 - 김광경(金光烱, 1577 ~ ?)
적차남 - 김광환(金光煥, 1579 ~ 1642)
적3남 - 김광현(金光炫, 1584 ~ 1647)[6]
적장녀 - 김정순(金正順, 1582 ~ ?)
적차녀 - 김이순(金二順, 1587 ~ 1654)[7]
적3녀 - 김계순(金季順, 1590 ~ ?)
[측실 김종생 소생 - 1남 4녀 ]
서장남 - 김광소(金光熽, 1597 ~ ?)
서장녀 - 김영순(金英順, 1602 ~ ?)
서차녀 - 김애순(金愛順, 1605 ~ ?)
서3녀 - 김임순(金壬順, 1612 ~ ?)
서4녀 - 김오순(金午順, 1618 ~ ?)

1. 개요
2. 생애
3. 순절한 것이 맞나?
4. 여담



1. 개요[편집]


선조, 광해군, 인조 시대의 문신이다. 김상헌의 형이며, 장유의 장인. 인선왕후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하다.


2. 생애[편집]


1561년 종2품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낸 아버지 김극효(金克孝)와 어머니 동래 정씨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딸[8] 사이의 다섯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582년(선조 15) 식년시 진사시에 2등 1위로 입격하고, 참봉(종9품)을 지내다가 1590년(선조 23) 증광시 문과에 병과 8위로 급제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유도대장(留都大將)에 임명되었으나 적군이 임진강을 건넜다는 소식에 도성을 버리고 달아났다.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 2월 11일 무신 6번째기사[9]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거쳐 1632년(인조 10) 우의정에 올랐다. 1635년 눈병으로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어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정1품)에 올랐다가 이듬해인 1636년에는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종1품)로 직임이 옮겨졌다.

같은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에 들어가 노구를 이끌고 강화성을 지키고 있었다. 이듬해 강화성 전투 중 성의 남문루(南門樓)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절하였다. 손자와 종 한 명이 그 뒤를 따랐다. 사관은 그의 졸기에 "항상 몸을 단속하여 물러날 것을 생각하며 한결같이 바른 지조를 지켰으니, 정승으로서 칭송할 만한 업적은 없다 하더라도 한 시대의 모범이 되기에는 충분하였다."라고 기록했다.


3. 순절한 것이 맞나?[편집]


사망 당일 장계(狀啓)에는 “김모(金某)가 불이 나 죽었다”는 기사와 함께 여러 사망자와 나란히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난 후에야, 가족과 측근들을 중심으로 그가 순절했다는 주장이 등장한다.# 인조는 "착한 것을 칭찬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 할지라도, 그 칭찬하는 말이 참되고서야 죽은 자가 영화롭고 산 자가 사모할 것이다.", “절의를 지켜 죽은 일은 속이거나 숨길 일이 아니며 나라의 법이란 사사로운 정을 용납할 수 없으므로, 내가 거짓된 일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지 유독 김상용에게 박해서가 아니다.”라며 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1년여의 공방 끝에 결국 인조가 굴복하고 만다.[10]

정말로 적에 맞서 싸우다가 순절하고자 했다면, 성이 함락된 후 적군이 몰려들 때 최대한 많은 적군을 길동무 삼아 자폭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폭발 시점은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경)이고, 정작 강화성은 날이 저문 후에야 함락되었다. 적군은 한 사람도 죽이지 못하고 강화성에 쌓여 있던 화약만 전부 날려먹은 셈인데, 집안의 대를 이을 어린 손자까지 함께 죽었다!! 과연 이것이 의도된 결과일까?

게다가 그 시점에 강화성에는 봉림대군[11]과 원손, 비빈을 비롯한 왕족들이 있었다. 신하가 함께 있는 왕족들을 끝까지 지키지 않고 먼저 죽는다는 것도 상식적이지 않다.

결론적으로, 순절이라고 보기에는 이치에 맞는 구석이 하나도 없다. 사고사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애당초 강화성을 지키지 못했다고 순절할 양반이면, 정묘호란 때 도성을 버리고 도망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4. 여담[편집]


  •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오래 산 편인데(76세), 동생인 김상헌 또한 80을 넘어 장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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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율리우스력 5월 22일.[2] 세는나이 77세.[3] 정유길의 3녀.#[4] 권철의 아들.[5] 김계휘(金繼輝)의 서차녀.#[6] 호는 수북(水北)이다. 문과 급제 후 부제학을 거쳐 이조참판에 이르렀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병자호란 당시 숙부 김상헌과 함께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하였다. 훗날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빈의 옥사 당시 사위가 강씨의 친오빠인 관계로 이조참판에서 순천부사로 좌천되었다가 울분으로 사망하였다. 증손자인 김시보(金時保, 1658 ~ 1734)는 일가인 김창협의 문인이다. 관직에 있을 당시의 평은 좋지 않다.링크[7] 효종의 국구(國舅) 신풍부원군 장유의 부인으로, 인선왕후의 어머니.[8] 광해군의 장모인 봉원부부인과 자매지간이다[9] 정작 후금군은 한성까지 오지도 않았다는 게 코미디.[10] 이홍주(李弘胄)·이현영(李顯英)·유백증(兪伯曾)이 다 그 실상을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남초를 피우다 불이 나서 번졌다는 말은 나도 그것이 거짓인 줄 알았는데, 경들이 상차한 사연을 보고는 내 의심이 풀렸다." 하였다. 유백증이 아뢰기를, "이미 그 실상을 통촉하셨으니, 곧 특이한 행실을 정표해야 인심이 쾌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인조 15년 11월 24일[11] 김상용의 딸 영가부부인이 효종의 장모이므로, 외손녀사위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