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

덤프버전 :

분류

파일:한시적 넘겨주기 아이콘.svg   육군사관학교의 김좌진 및 독립운동가들의 흉상 철거에 대한 내용은 육군사관학교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 문서
{{{#!html </div>의 육군사관학교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 번 문단을
육군사관학교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김좌진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김좌진[1]
金佐鎭 | Kim Jwa Jin


파일:Kim Chwa-chin.jpg

출생
1889년 12월 16일[2]
충청도 홍주목 고남하도면 행촌리
(現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신기마을)[3]
사망
1930년 1월 24일[4] (향년 40세)
중화민국 흑룡강성 해림현 산시진 도남촌
(現 중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하이린시 산스진 다오난촌)
묘소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김좌진 장군묘[5]
본관
장동 김씨[6]
자 / 호
명여(明汝) / 백야(白冶)

[ 펼치기 · 접기 ]
부모
아버지 김형규, 어머니 이상희
형제자매
김경진, 누나 김옥출
남동생 김동진
배우자
오숙근
김계월(두 번째 재혼)
나혜국(세 번째 재혼)[1]
자녀
김두한(장남), 김석출(장녀), 김철한[2](차남)
친인척
조부 김병호, 양조부 김병태
9촌 숙부 김옥균, 족제 김종진
친손자 김경민 친손녀 김을동

증손자 김장춘[3], 증손자 김도현[4]
외증손자 송일국
외현손자 송대한, 송민국, 송만세
학력
신흥무관학교 (졸업)
종교
유교(성리학) → 대종교
신장
185cm[5]
군사 경력
임관
육군무관학교 (기수 불명)
복무
대한제국 육군
190?년 ~ 1907년
북로군정서군
? ~ ?
주요 보직
북로군정서군 총사령관
주요 참전
청산리 전투


1. 개요
2. 생애
3. 이념
4. 기타
5. 비판
6. 대중매체에서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국가보훈부 유튜브 채널에서 소개하는 영상

[스토리박스K]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 - 국방TV 2021.1.11
청산리 전투지휘관으로 유명한 조선 말기~일제강점기의 교육자, 군인, 독립유공자. 그 유명한 김두한의 친아버지이기도 하다.


2. 생애[편집]


1889년 12월 16일 충청도 홍주목 고남하도면 행촌리(현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신기마을)의 명문 양반가에서 아버지 김형규[7][8]와 어머니 한산 이씨 이상희[9][10]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3살 때 부친을 여의었지만 넉넉한 재산으로 경제적으로 문제는 없었으며 모친으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형 김경진[11]한성부에 거주하는 15촌 지간의 족숙(族叔) 김덕규(金德圭, 1848. 8. 19 ~ 1900. 11. 1)[12]에게 양자로 가면서[13] 집안의 차남인 김좌진 자신이 장남 역할을 했다. 날래고 용맹함이 뛰어나 1905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07년 정환덕의 회고에 따르면, 김좌진은 당시 헤이그 특사단을 수행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으나, 무슨 일인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후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나이 17세에 노비들을 해방시키며 전답을 나눠 주고 자신의 집에 호명학교(湖明學校)[14]를 세우는 등 교육 사업도 활발히 펼쳐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사례로 꼽힌다.

1911년 서간도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한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경기도 경성부 돈의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돈의동)에 거주하던 9촌 지간의 삼종증조부(三從曾祖父) 김종근(金宗根, 1844. 5. 17 ~ 1925. 12. 18)을 방문했다가, 이미 변절하여 일본 경찰과 내통한 김종근의 뒤통수로 체포되었다. 이 때문에 서대문형무소에 2년 6개월 간 수감되었다.

출옥 후 상경하여 경기도 경성부 재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재동)에 거주하였다가, 본디 다른 뜻을 품어 항시 조국 독립의 마음이 있던 그는 1918년 만주망명의병을 일으켜 대한광복회 부사령관을 맡았다. 대한광복회 와해 후[15]간도 지역으로 건너가 북로군정서군을 이끌었으며 청산리 전투(1920년)에서 독립군 연합 부대를 이끄는 등 일본 군대와 교전하여 여러 차례 기이한 공적을 세웠다. 이후 밀산을 거쳐 북으로 이동하다가 다시 남으로 내려왔는데 이 때 북으로 간 군대들은 자유시 참변(1921년)에 휘말려 큰 피해를 입은 탓에 그나마 다행이라는 평도 있다. 이후 1920년대 중후반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자유시 참변을 계기로 반공 노선으로 전향한 김좌진은 참변으로 불모지나 다름없는 만주에서 다시 시작하면서 한족총연합회 주석 등에 임명되는 등 만주의 독립운동 지도자로 활약했다. 1925년 신민부(초기에는 한족연합회),[16] 1929년 한족총연합회 등을 창설하고 활동했는데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배제하고 항렬이 같은 아우뻘인 김종진[17]아나키스트들을 받아들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길림성 해림현 산시진 도남촌(현 헤이룽장성 하이린시 산스진 다오난촌)에서 1930년 1월 24일 40살의 젊은 나이에 암살당했다.[18] 이 때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 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라는 유언을 남겼다. 김좌진을 살해한 공산당원 박상실은 얼마 안있어 현지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당시 만주는 봉천군벌의 위세가 남아있던 시기였기에 한국인 독립운동가를 죽인 혐의로 사형이 선고된 후에는 봉천으로 이송되어 사형에 처해졌다.고 김좌진씨 하수인 박상실에 사형판결 1947년 서울특별시에서 정식적으로 장례식을 가졌으며 추도사를 김구가 읽었다. 김좌진의 유해는 아내 오숙근이 1937년 봄에 직접 길림성 해림현으로 잠입해 그 백골을 취하여 가져와서 수습한 후 충청남도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 김복한의 묘소 인근에 가명으로 밀장되었다가 1957년 전답을 노비들에게 나눠주면서 어머니의 이름으로 남겨진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에 있는 선산에 아들 김두한에 의해 아내 오숙근과 합장되었다. 1999년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어 여러 교육 사업 활동을 펼치고 있다.


3. 이념[편집]


대중적으로 김좌진이 공산주의자와 대립했고 반공주의 우익이었다는 인식이 존재한다. 하지만 논문에 의하면 이것은 복잡하다. 김좌진은 이념적으로는 공산주의에 배격하는 성향이 존재했고 화요파 중심의 특정 공산주의 단체에는 반대하고 대립했으나 다른 공산주의 단체와는 관계가 달랐다. 서울 청년회 계열과 합작하여 공산주의자동맹을 결성하거나 조선국내의 청년회파와 연계한 활동이 존재하며 1927년엔 김좌진 세력은 소련과 연계하여 직접 소련으로 들어갔고, 1928년부터는 김좌진은 공산주의 단체와 연계를 맺고 있었다. 이런 배경이 김좌진이 아나키즘 사상을 수용한 배경으로 추정된다.[19]

김좌진은 아나키즘을 받아들이기 전부터 "인류의 자유평등을 위해 강권을 배척"한다는 사상이 있었고 아나키스트로 변화한 이후에는 "파괴, 암살, 폭동 등 일체 폭력운동을 적극적으로 진행한다.", "일반민중을 혁명화하고, 혁명은 군사화할 것", "내외를 불문하고 합법운동과 기회주의자를 박멸할 것", "반민중적 정치운동이론을 철저히 배척할 것"[20] 등 매우 과격한 아나키즘 성향이 나타났다.[21]

아나키스트들은 김좌진과 같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이 있으나 세르게이 네차예프, 야코프 트랴피친, 네스토르 알렉산드로비치 칼란다리쉬빌리 등의 동시대 아나키스트들은 전투적인 성향을 보였다. 러시아 혁명 이전 한창 이전부터 아나키스트들은 유럽 왕족, 미국 대통령 같은 각국 정치인들을 암살하는 소위 '행동의 프로파간다'로 악명 높았고, 그 이후 현대까지 가장 조직적으로 아나키스트들이 특정 사회에서 정치적 헤게모니를 잡고 있었던 사례인 스페인 내전 당시 카탈루니아, 아라곤 일대에서도 오히려 다른 정파, 외국 정부 눈치라도 봐야 하는 공산당이 뜯어 말리려 할만큼 가톨릭 교회 상대로한 테러는 아나키스트들의 전문이었다. 아나키즘이 '강권을 반대한다'는 것은 가장 대표적으로 정부, 국가부터 시작하여 각종 사회 구조와 지배이념에서 항구적인 위계체제를 없에겠다는거지, 혁명 수단으로서 폭력을 거부하는 게 아니다. 이건 평화주의고 개개인 활동가 차원에선 톨스토이 같은 아나키즘과 평화주의, 비폭력주의의 교집합도 있지만 하나의 집단적 정치 운동으로서 아나키즘의 역사는 비폭력과는 거리가 멀고, 본인들이 비폭력주의자임을 자처한 적도 없다.

스페인 내전 시기 바르셀로나 같은 곳에서 가톨릭 교회 신부 끄집어 내 쏴죽이고 내부는 한번 싸그리 불태운 다음 다시 지역 자치 대안 학교, 주민 복지 센터로 재개장하는 무자비한 폭력성과 대안 사회를 향한 이상주의가 공존하는 모순적인 모습은 대단히 새로운 것도 아니라 스페인, 미국, 중남미 같이 한국과 달리 아나키즘이 현대 사회에선 거의 영향력 자체가 없는 역사적 유물이 아니라 직간접적 형태로 사회운동판에서 여전히 영향력이 있는 곳에선 예전부터 익히 알려져 있던 일면이었다. 아나키즘을 포함하여 일단 총칼 무력을 수단으로 특정 정치적 목적을 구현하려는-그 목적이 민족 독립든, 이상 사회 구현이든 취지는 얼마나 좋던간에-운동은 본질적으로 비폭력적일수가 없고, 아나키즘과 김좌진도 마찬가지로 특정 사상은 이러이러한 행동을 안 할 것이다란 관점보다 그 행적 자체를 살펴봐야한다.


4. 기타[편집]


  • 지금까지 김좌진의 암살은 단순히 공산주의자들의 암살로 여겨졌으나 암살 사건을 연구한 학자들은 복잡한 배경이 있다고 보고 있다.
    • 박상실은 김좌진이 운영하던 방앗간에서 일하던 일꾼이었는데 김좌진을 암살한 뒤에 도망쳤다. 김좌진의 장례식에서 밝혀진 바로는 박상실은 고려공산청년회의 회원이자 재중 한인청년동맹원으로 알려졌다. 김좌진의 측근들은 박상실이 혼자 김좌진을 암살했을리 없고 배후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배후로 지목된 인물은 김봉환으로 한때 '김일성'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었던 탓에 북한김일성이 김좌진 암살의 배후라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그러나 이후 연구를 통해 김봉환과 김일성은 다른 인물임이 밝혀졌다. 북한의 김일성은 김좌진이 사망할 당시 18세(1912년생)여서 암살 배후일 가능성은 희박했다. 중국 자료가 공개되면서 박상실의 정체도 드러났는데 박상실은 가명이며 진짜 이름은 '공도진' 혹은 '이복림'이라고 한다. 이복림과 박상실이 동일 인물인지를 밝히는 명확한 증거는 없으나 연변대학 교수 김동화는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 사실 일본 내무 보고서와 공산당 측 주장에 일치하는 주장이 있다. 빈주 사건에 대한 보복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아래 비판 문서의 '간민호회 테러와 최계화 암살', '김좌진이 살해된 근본 이유' 관련 문단 참고.
    •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신용하 명예교수는 공산단체 '적기단'의 배후설을 주장한다. 신용하 교수 기사
  • 부인도 여럿이고 축첩도 해서 후손이 많은데 서자가 조직폭력배 출신 국회의원 김두한으로 김두한의 딸인 전 새누리당 국회의원(19대) 김을동에게는 조부가 된다.[22] 김좌진의 부인들이었던 오숙근과 나혜국은 모두 광복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까지 살아남았다. 오늘날 김두한의 큰어머니[23]로 잘 알려진 오숙근(吳淑根)은 1958년 사망해 김좌진과 함께 합장되었으며 나혜국은 노태우 정부가 끝나는 시기인 1992년 11월에 사망했다. 후손은 정실 부인 오숙근 사이에서 난 장녀 김석출, 첩 김계월에게서 얻은 장남 김두한, 후처 나혜국에게서 얻은 김철한이 있다. 김석출과 김철한은 정식 자식들이고 김두한이 서자이다. 아래에 언급된 증손자 김도현은 김두한의 손자[24]이며 송일국은 김두한의 외손자[25]이다.
  • 2013년 8월 대한민국 해군 손원일급 잠수함 4번함이 '김좌진함'으로 명명되었다. 증손자 김도현은 육군 병장으로 전역한 뒤 공군 부사관이 되었다가 다시 해군 장교로 임관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로 증조부의 유지를 잇고 있다.#
  • 일본군의 기밀 자료에 따르면 "김좌진의 키는 약 185cm,[26] 얼굴은 타원형이고 눈빛이 형형하고 사람이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의 인상이며 총명함이 출중하고 좌담에 능하며 특히 해학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라는 상세한 내용이 남아 있다. 김좌진은 오늘날 남아 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시피해서 일제 기록 속의 김좌진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그를 그려볼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다. 문제는 저런 자료는 김좌진 본인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기 때문에 독립군에서도 극비로 다뤄졌어야 할 자료인데 그런 자료가 일본군의 손에 넘어갔다는 것. KBS에서 2019년 8월 추적한 자료에 의하면 이를 일본군에 넘겨준 사람은 김좌진의 최측근인 이정(李楨)이었던 걸로 밝혀졌다. 이정은 북로군정서의 막료로서 "진중일지"라는 자신의 일기에 당시 독립군들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일들을 자세히 서술해서 오늘날 우리가 만주 독립군들의 실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일제의 밀정에게 김좌진의 구체적인 신상명세를 건네줬다는 것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게다가 이정은 청산리 전투 4년 뒤인 1924년 일본에 김좌진 장군을 비롯한 독립군들의 기밀 자료들을 밀고한 것으로 드러났다.[27]
  • 외증손자인 송일국과 외모가 상당히 비슷하며 키는 아예 둘 다 185cm로 동일하다. 물론 시대를 감안하면 김좌진 쪽이 훨씬 크다. 당시 남성 평균 키가 161cm였다는 것과 현재 남성 평균 키가 174cm라는 걸 생각하면 현재 기준으로 정확히 2m가 된다.
  • 암살당할 당시 가지고 있었던 유품인 은식기가 1995년 손녀 김을동에 의해 진품명품 1화에서 감정을 받았는데 감정가를 받지 못했다.#
  • 제26신병교육연대의 별칭은 그의 이름을 딴 '김좌진부대'다.
  • 아래 비판 항목중 하나인 빈주 사건 같은 흑역사가 사료에서 발굴되면서 일부에서는 아들행적과 똑같다고 부전자전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5. 비판[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좌진/비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대중매체에서[편집]


  • 1947년 김영수 극작가가 그의 일대기를 다룬 연극 <황야>를 지었는데 배우 서일성이 연기했다.
  • 1982년작 KBS1 기록드라마 <우둥불>에서는 배우 문오장이 연기했다.
  • 1983년 이장호 감독 영화 <일송정 푸른 솔은>은 청산리 전투를 다룬 영화로 배우 김기주가 연기했다. 이 영화는 청산리 전투 참전자 마지막 생존자였던 이우석의 영상으로 마무리된다.
  • 1995년작 KBS 광복 50주년 기획드라마 <김구>에서는 배우 이한위가 연기했다.
  • 2002년작 SBS 대하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배우 최동준이 연기했다. 종영 후 2010년대 들어 인터넷상에서는 김두한의 내면 속에서 위기 때마다 도와주는 조력자로 나온다. 자세한 내용은 김좌진(야인시대) 문서 참고.
  • 2010년작 SBS 8.15 특집 HD 다큐드라마 <북만벌, 칼을 가는 나그네 - 백야 김좌진 장군>은 그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인데 장형일 감독이 연출을 맡고 배우 이일재가 김좌진을 연기했다.
  • 2018년 김철 작가가 <좌진전>을 자신의 블로그에 무료 배포했다.
  • 2021년 영화 소년 김두한이 제작되면서 원기준이 김좌진 역할을 맡게 됐다는 게 공개되었다.[28]


7. 둘러보기[편집]




[1] 이명은 김사진(金砂鎭).[2] 음력 11월 24일[3] 도로명 주소 :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백야로546번길 12[4] 음력 12월 24일[5] 충청남도 기념물 제73호.[6] 문충공 상용파 26세 진(鎭) 항렬.[7] 金衡圭, 1864 ~ 1892. 3. 11[8] 족보명 김명균(金銘均).[9] 1863년생으로 1949년 8월 30일에 사망했다.[10] 이윤직(李潤稙)의 딸이다.[11] 金景鎭, 1883. 2. 8 ~ 1963. 5. 13[12] 초명 김덕균(金德均).[13] 순조사위 동녕위(東寧尉) 김현근(金賢根, 1810. 12. 12 ~ 1868. 8. 25)의 양증손자로 입적했다. 그의 가문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14] 현재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에 위치한 갈산중학교 및 갈산고등학교의 자리가 호명학교의 자리였고 당시 90여 칸이나 되는 김좌진의 자택을 학교로 사용하였다.[15] 이 사이 1918년 10월 22일 공주지방법원에서의 궐석 재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공갈 혐의로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받은 바 있다.[16] 빈주 사건 역시 이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17] 김종진도 1년 후에 공산주의자들에게 피살된 것이란 이야기가 있는데 정작 정화암 선생이 이정식 선생에게 한 면담, 이강훈 선생 증언을 보면 가해자가 공산당이 아닌 기존 한족총연합회 내부 세력으로 나온다. 이강훈, 『민족해방운동과 나』. 서울:제삼기획, 1994; 면담: 이정식; 편집해설: 김학준; 수정증보: 김용호,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 김성숙·장건상·정현섭·이강훈의 독립투쟁』, 서울: 민음사, 2005 참고.[18] 이 사건을 계기로 김두한은 당시 공산당 전위대에 속해 있었으나 박용직이 전말을 알려주면서 대한민청으로 전향했다. 그 전까지 김두한은 김좌진이 친일파에게 암살된 줄 알고 있었다.[19] 박환. (2002). 김좌진장군의 항일독립운동 성격과 역할 -투쟁노선과 정치이념을 중심으로-. 군사, 46, p.15-17#[20] 박환. (2002). 김좌진장군의 항일독립운동 성격과 역할 -투쟁노선과 정치이념을 중심으로-. 군사, 46, p.16, 22#[21] 물론 우익 중에도 극좌와 유사한 파시스트란 이념이 존재하지만 김좌진이 파시스트와 유사하다는 정황은 존재하지 않으며 학계에서도 그런 언급이 없다. 그리고 좌익이 우익보다 민중에 대한 폭력이 약하다는 증거도 없다.[22] 송일국은 김좌진의 증손자.[23] 정확히는 서자가 아버지의 정실을 이르는 표현인 적모(嫡母)다.[24] 김두한의 둘째아들 김현성의 아들이다.#.[25] 김두한의 딸 김을동의 아들이다.[26] 본인의 아들인, 큰 키로 유명했던 김두한보다도 더 큰 장신이다.[27] 방송에서는 우덕순도 거론했는데 우덕순은 의심스러운 행적만 발견될 뿐 밀정 행위는커녕 반민족 행위조차 했다는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반면 이정은 실제 역사학자들의 연구에서 밀정 행위가 명백하게 증명되었다는 점이 결정적인 차이다.[28] 원기준은 김좌진의 증손자인 송일국과 함께 주몽에서 호흡을 맞췄다. 원기준 본인도 인터뷰에서도 자신이 송일국의 증조할아버지 역할을 맡게 되었다며 농담을 던졌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6 21:54:26에 나무위키 김좌진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