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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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편집]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명종 때 형조판서를 지낸 심광언의 고손이자 성종의 6녀 경숙옹주의 외5대손이다.[4] 효종의 부마 청평위 심익현의 아버지이다.
2. 생애[편집]
광해군 12년 문과에 급제하지만, 그 당시 주류였던 북인들과 뜻을 함께하지 않았다. 3년 뒤 인조반정으로 벼슬길에 오르고, 계속해서 승진을 한다. 특히, 1630년에는 함경도 어사[5] 로 활동하고 업무를 크게 성공해 인조의 신임을 받았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노모 때문에 남한산성으로 가지 못했다. 결국 강화도로 가서 항거하려 했지만, 이는 곧 임금을 따라가지 못했다는 이유로 한동안벼슬길이 막힌다. 그러나 1643년 다시 등용되고 이후 요직을 계속했다.
한편, 효종 때에는 아들 심익현이 효종의 딸 숙명공주에게 장가가서 효종의 신임을 얻었다. 이후, 청나라에 다녀오는데, 이듬해 우의정이 된다. 우의정이 되면서 양송[6] 을 불러들일 것을 청한다. 이듬해, 좌의정에 오르고, 1657년에는 한번 더 청나라에 갔다와 영의정이 된다. 훈련도감 도제조를 겸직하다가 다시 좌의정이 되고, 현종 때에는 좌의정으로서 원상과 총호사를 겸직하였다. 예송논쟁에는 별로 큰 역할을 하진 않았다.
3. 평가[편집]
당파는 서인인데, 굉장히 소극적이다. 에로 들자면, 남인계 인사, 그것도 강경 남인 윤휴와 허목을 불러들이고, 예송 논쟁 때 남인을 변호한 조경의 억울함을 풀자고 청했다.
4. 여담[편집]
파주에 자기 조상의 묘를 조성했는데, 문제는 파평 윤씨의 대표 인물인 윤관 장군의 묘가 심지원의 부친의 무덤 바로 위에 있었다는 것. 게다가 심지원의 묘는 그 윤관의 묘 위에다가 마련했다.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 둘 다 당대의 명문가였기 때문에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와의 기나긴 산송이 400년 가까이 이어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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