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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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역대 집권자 · 집권 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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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학파 · 훈구파 · 사림파 · 동인 · 서인 · 남인 · 북인 · 소론 · 노론 · 개화당 · 수구파 · 정동파 · 위정척사파 · 급진개화파 · 온건개화파)






북인
北人

형성 전
동인[1]
형성
1589년[2]
해체
1599년[3]/1613년[4]/1623년[5]
종주
남명 조식
내암 정인홍
화담 서경덕
수장
이산해[6]
이이첨[7]
유영경
박승종
류희분
주요 인물
홍여순
남이공
기자헌
정창연
허균
분당
대북, 중북, 소북

1. 개요
2. 역사
2.1. 북인의 집권 기간
2.2. 등장
2.3. 분당
2.4. 몰락
3. 북인의 역대 영수
3.1. 대북의 영수
3.2. 소북의 영수
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북인()은 조선의 붕당 초기 4색 당파 중 하나이다. 동인에서 남인과 더불어 갈라져 나왔으며, 서인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최전성기는 1599년부터 1623년까지. 남명 조식의 제자들(남명 학파)이 주축을 이루긴 했지만, 이황을 종주로 모신 남인이나 이이를 종주로 모신 서인처럼 확고한 중심축을 구성한 건 아니었다.

이산해, 홍여순 같은 서경덕 계열 문인을 비롯한 이이첨, 김신국처럼 특별한 학맥이 없는 신진 사림 등 여러 집단들이 참여했기에, 짧은 전성기에 비해 갈래가 많은 게 특징이다. 대표적 인물로 정인홍유영경이 있으며, 이들에 의해 대북소북으로 나눠서 광해군 즉위 이후로는 대북은 기자헌, 유몽인, 이이첨이 속했고, 소북은 박홍구, 박승종, 류희분이 속했다.

1623년에 인조반정이괄의 난이 일어나면서 대부분 대북과 소북 영수들은 죽임을 당했고 남이공김신국 등이 남아 조정에서 제대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로 추락했다. 이후에 남인에 흡수되어 활동했기 때문에 조정 상에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 역사[편집]



2.1. 북인의 집권 기간[편집]


  • 서인과 남인의 대거 실각 때부터 대북과 소북의 분열 때까지: 유성룡, 윤두수 등을 비롯한 서인과 남인 거물들의 대거 실각 (1598년 ~ 1599년) ~ 이조판서 이기가 홍여순을 대사헌에 천거 하자 같은 북인인 남이공과 김신국이 홍여순을 대사헌으로 임명하는 것에 대해 반대해 북인 내에 분열이 생겨 홍여순의 대사헌 천거를 지지하는 대북과 홍여순의 대사헌 천거를 반대한 남이공과 김신국을 지지하는 소북으로 분당 된다.[8]
  •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 직후 유영경의 소북 집권부터 선조 승하 이후 광해군 즉위까지의 유영경 내각: 대북과 소북의 분열 및 유영경 내각 집권 (1604년) ~ 선조 승하 및 광해군 즉위 (1608년)
  • 광해군 즉위 이후 계축옥사 이전까지 대북, 소북 공동 집권: 광해군 즉위 (1608년) ~ 계축옥사 (1613년)[9]
  • 계축옥사 이후 인조반정 때까지 대북 단독 집권 내각: 계축옥사 (1613년) ~ 인조반정 (1623년)


2.2. 등장[편집]


등장의 발단은 정여립의 난을 빌미로 서인 강경파 정철이 실권을 쥔 사건이었다. 기회만 되면 정적들을 손봐주려고 벼르고 있던 정철은, 실권을 쥐자마자 선조의 동의 하에 정여립을 빌미삼아 무려 네자릿수에 달하는 동인의 유력 인사들을 죽이는 피의 숙청을 실시했는데, 이것이 기축옥사이며, 그 과정에서 이발 등 동인 명문가의 사람들이 많이 죽고 서인이 권력을 독식하게 된다. 물론 엄청난 피해를 치른 동인들은 이를 되갚아 줄 때를 기약하게 되었다.

그 직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관직에 있던 자들 중 더러는 선조를 호송하기도 했지만, 재야로 내려간 이들 중에서는 조식의 문하(남명 학파)를 중심으로 남쪽 지방에서 정인홍의병을 지휘하는 자들이 나타난다. 이들이 훗날 북인, 특히 대북파의 거두로 발돋움한다. 북인의 사상이 특출나서 타 당파보다 의병 활동을 활발히 한 것은 아니다. 북인보다 많았으면 많았지 적지 않았던 서인계 의병장은 대부분 전사해서 내세울 사람이 없었고, 남인은 향촌 근거지인 경상 좌도가 왜군 진격로라 다 쓸려나간데다 전시 행정부를 이끈 집권 여당이라 유력인사들이 대개 정부에 몰려있었다 보니 의병 활동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래서 왜란 때의 의병장들이 살아서 종전을 맞이했고, 이후 집권당이 된 북인이 돋보이는 것이다. 정여립의 난 이후에는 선조의 후계자 논의가 정계의 핵이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정철은 선조의 심중도 모르고 후계자 논의를 강권하다가 미운 털이 박히고 만다. 마침 서인 일변도의 정계를 한바탕 물갈이 할 필요도 있다고 본 선조의 암묵적인 의중을 바탕으로 정철의 건저[建儲] 사건을 계기로 서인은 대거 몰락하고 동인이 실권당으로 급부상한다.

처음에는 동인 내 강경파와 온건파 정도였던 의견차는, 선조가 임진왜란 이후에 최영경 추증 등을 명하며 정철을 확실하게 내칠 뜻을 밝히면서 극단적으로 갈리는데, 이때 정철에게 깊은 원한이 맺혀 강력한 처벌을 주장한 측은 북인, 온건한 처분을 주장한 측은 남인으로 분당된다.

다만 본격적으로 남북이 분열 된 건 건저의 사건으로 정철과 서인이 몰락해 정철의 처벌 수위를 놓고 다툴때였지만 그 이전에도 이미 동인 내에서도 남북의 설은 있었다 윤국형의 문집인 갑진만록에 선조 21년인 1588년에 북인 남인이 언급되고[10]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에서도 기축옥사 때 백유양이 선조에게 본인과 이발 이길 형제 정언신 정언지 정여립등이 북인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존재한다.


2.3. 분당[편집]


분당 이후로도 북인과 남인은 나름대로 균형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나, 남인의 핵심 인물인 류성룡이 실각하면서 본격적으로 이산해를 영수로 한 북인이 정계를 주도하게 된다. 1599년(선조 32) 이조 판서 이기가 홍여순(洪汝諄)을 대사헌으로 천거하자 같은 북인인 남이공과 김신국 등이 반대하였다. 그러자 정인홍유영경이 만나 논쟁을 펼쳤는데 서로 타협을 보지 못해 결국에는 북인 내에 분열이 일어나 정인홍을 지지하는 북인인 대북과 유영경을 지지하는 북인인 소북으로 갈렸다.

대북에는 의병 지휘로 명성을 쌓은 정인홍이 영수가 되고, 기자헌, 유몽인, 이이첨 등이 있었고 소북에는 유영경이 영수가 되며, 박홍구, 유희분, 박승종 등이 있었는데, 이 중 유영경은 선조와 혈연도 이어져 있었기에 선조 말년에 최고의 총애를 누리던 조정의 실세 중의 실세였다. 임진왜란 이후로 광해군이 세자가 되기는 했지만 이 시기까지도 정철 몰락의 계기인 선조의 후계자 문제가 여전히 정리되지 못한 상태였는지라, 선조의 후계를 두고 치열한 의견 대립이 벌어져 대북은 광해군을 지지했고 소북은 영창대군을 지지하였다.

소북이라고 모두 광해군을 반대하고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남이공이 유영경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면서 소북 내에 유영경 파와 남이공 파 사이에 알력이 발생했고, 결국 다시 갈라졌다. 전자는 탁소북, 후자는 청소북이라고 불리게 되는데, 이름이 너무 장황해서인지 보통 각 영수의 성을 따서 유당과 남당으로 불렸다. 물론 이쯤 되면 존재감이 너무 희미한 수준이라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어쨌든 영창 대군을 밀다가 분당까지 감행한 유영경은, 선조가 광해군을 싫어하는 것이 눈에 보이자 선조에게 광해군을 쫓아내고 영창 대군을 세우자며 은근히 밀었고[11], 만력제의 후계 문제로 신경이 곤두선 명나라가 광해군의 승계를 반대하는 점을 선조와 같이 이용해먹으면서 광해군의 뒤통수를 쳤지만, 선조가 57세로 갑자기 승하하면서 유영경의 정치적 명줄도 종언을 고한다.

유영경은 선조가 광해군을 후계자로 책봉한 교지를 받고서도 가택에 빼돌리는 등 마지막까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결국 그것이 탄로나 끝장이 난 것이다. 아무튼 광해군 집권 이후 유영경을 지지하는 탁소북은 전멸했다. 많은 사람들이 광해군 집권 이후 소북이 멸망한 줄 아는데, 밑에도 기술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유영경을 중심으로 영창 대군의 계승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탁소북만 거의 전멸하고 청소북은 살아 남았을 뿐만 아니라 광해군 초기 정권도 잡았었다. 광해군 대의 최강 권신이자 6명의 북인 대신들이 3명씩으로 각각 대북파(기자헌, 이이첨, 유몽인) 청소북(박홍구, 박승종, 유희분)이 골고루 3명씩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다.

이후 권력을 잡았는데 광해군 즉위부터 인조반정으로 인한 폐위까지 의외로 소북과 대북은 어떠한 우위를 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청소북의 일원인 유희분이 광해군의 처남으로 왕의 외척이지만 단 한 번도 권세를 행사하지 못했다. 그래서 탁소북 계였으나 유희분과 손을 잡아 권세를 얻은 박승종과 박홍구가 주요 인물이 되었다.[12] 대북의 경우에는 기자헌, 유몽인, 이이첨이 있기는 했으나 학식과 경륜 면에서는 정인홍을 능가하는 인물이 없었기에 그가 대북 전체의 웃어른 노릇을 했다.

그러다 봉산옥사를 거치면서 이이첨의 권세가 강해지고 대북이 실권당에 오르면서 소북 계열은 상대적으로 찬밥 신세가 되었다. 박승종이 대북이 지긋지긋해 "대"짜 들어가는 대문도 외문이라고 부르게 했으며, 칭병으로 자주 출사하지도 않았다는건 유명한 이야기. 물론 애초에 그가 소북 내에서도 강경파인 탁소북 출신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권당 대북은 폐모론이 불거지는 과정에서 또 다시 영창 대군만 죽여야 한다는 계통의 골북(骨北), 인목왕후도 죽여야 한다는 이이첨, 허균 계통의 육북(肉北), 영창 대군과 인목 대비의 사형을 모두 반대하는 소수의 중북(中北, 기자헌, 유몽인)으로 나뉘었다.[13]

대세가 몰리자 중북인 유몽인과 기자헌까지 영창대군 제거에는 찬성하나 폐모론에서는 반대했으며, 정인홍은 폐모론에 지지하나 인목왕후의 예우를 전과 같이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찬성한 것은 허균. 어쨌든 이이첨 등 실권자들이 주로 가담한 것은 육북이었으나, 대비를 대놓고 죽이자는 쪽은 허균파 말곤 없었다. 이이첨도 겉으로는 사사에는 반대했을 정도.

한편 남은 중북 세력은 정창연[14]을 중심으로 구성이 되어있으나 폐모론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에는 서인남인 등과 더불어 유배 생활을 겪어야했다. 소북에 속했던 박홍구, 박승종, 유희분 역시 폐모론에 소극적으로 반대했으나, 폐모론을 주장하는 이이첨이 기자헌과 유몽인까지 몰아내어 대북 내 교통정리를 하는 동안 (봉산옥사, 계축옥사 때와 마찬가지로) 방관했다. 이에 대북과 소북에 대해 완전히 실망해버린 서인과 남인은 능양군(인조)를 옹립할 반정을 준비했다.


2.4. 몰락[편집]


이후 인조반정이 터지고 반격의 기회를 엿보던 서인과 남인 다시 정권을 독식하는 과정에서 북인 내의 실력자들과 광해군의 총애를 받은 측근들은 처참한 피의 숙청을 겪는다. 대북의 경우는 이이첨이 죽임을 당했고,[15] 소북의 경우는 반정 공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조의 강력한 주장으로 유희분을 처형했으며, 박승종은 의병 모집을 시도했다가 궁궐이 점령당하고 임금이 바뀌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미 일이 틀렸음을 깨닫고 광해군에게 절의를 지키기 위해 아들 박자흥과 함께 처벌당하기 직전에 자결했다.[16]

중북 계열인 유몽인과 기자헌도 인조 정권에 출사를 거부하고 광해군에게 의리를 지키려 했기에 숙청을 당했다. 유몽인은 광해군 복위를 꾀한다는 무고를 받아 아들 유약과 함께 처형당하고 중북 원로 기자헌은 이괄의 난때 이괄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며 여러명의 북인쪽 사람들과 함께 처형당하고 임취정과 박홍구는 유배를 가나 북인 내의 실력자들과 광해군의 측근 세력에 대한 냉혹한 숙청에 반발해서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모시고, 흥안군인성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거사를 세웠지만 이내에 발각되어서 처형되었다. 이후에도 북인들은 유효립이 주축이 되어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인성군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하였고 1629년에 후금과 내통해 반역을 꾀했다가 틀통 난 양경홍의 역모사건과 1631년에 발각 된 정한추대사건[17] 등을 꾸미는 등 서인 세력에게 계속해서 반격을 하려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래서 이이첨, 기자헌, 유희분, 박승종, 유몽인, 임취정 박홍구를 비롯한 북인 권신들은 인조가 집권하는 과정에서 대거 숙청되었으며, 이괄의 난때 이괄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기자헌을 포함한 38명의 북인 정치범들이 숙청되자 이원익도 탄식할 만한 정도였다.

인조 시기까지 살아남은 북인 잔존 세력들인 김신국, 윤휘, 이경전, 정온, 남이공, 남이웅, 김세렴, 심열, 정창연, 이명 등 비교적 연배가 낮고 급변기에 필요한 능력을 갖춘 소북, 중북계 실무관료들은 살아남아 중용되었다. 좌의정을 거친 남이공과 김신국을 구심점으로 근근이 명맥을 유지했으나 과거 같은 존재감을 되살릴 수가 없었다. 효종현종 시기를 거치면서는 사실상 남인에 흡수당하다시피 했고, 영조 대에 이르러서는 과거의 존재가 되었다. 정창연의 집안처럼 서인으로 갈아탄다음 크게 번창한 가문도 있기는 했다.

그나마 소북 양명하이인좌의 난에 참여했다는 영조 실록의 기록, 그 밖에 영조가 정조에게 대리 청정을 명하면서 "어린 세손이 노론을 알겠는가? 소론을 알겠는가? 남인을 알겠는가? 소북을 알겠는가? 이판으로는 누가 좋고 병판으로는 누가 좋을지 어찌 알겠는가?"라고 할 때 사색 당파의 하나로 언급되면서 어느 정도 흔적은 밝히는 정도. 물론 당파를 바꿔도 인맥 자체는 후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가령 윤휴허목은 당파상 남인의 계파인 청남에 속했으나 원래 그들의 가문은 기호 지방의 소북 출신 가문이다. 중농학파의 거두였던 반계 유형원의 아버지가 북인이었다가 인조 반정에 사망했고 유형원은 범남인에 속했지만 어린시절의 트라우마로 뛰어난 학자로 명성을 떨쳤음에도 본인이 스스로 벼슬길을 마다했다. 이 점에서 소북계의 인맥은 남인에 흡수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고, 이후 실학의 등장에도 영향을 끼친다. 같은 이치에서 훗날 정약용 같은 기호 지방 남인의 후예(신서파)는 서인의 노론 시파에 가담하기도 했다.

한참 후 19세기 말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옛 북인의 후예들을 제법 등용하였다 하나, 어차피 이 시기에 이르러선 붕당 정치라는 것 자체가 크게 퇴색한 상황이었고, 결국 조선은 일제에 의해 망국을 맞는다.


3. 북인의 역대 영수[편집]


잠깐이나마 권력 자체는 충실히 장악했으나 워낙 어그로를 잔뜩 끌다가 삽질과 민폐를 벌이고 맞을 짓을 하고 사라진 집단이라 같은 계열이자 적수였던 남인과는 달리 긍정적인 인물도 적고 영수가 적다.(...) 사실은 북인 자체가 꼬장꼬장한 강경파 선비들이 현실타협적인 남인들과 갈등을 빚고 떨어져서 나온 집단으로서, 시작이었던 이산해의 분당 배경부터 실질적인 조선시대 붕당싸움의 시발점에 가까울 정도이다.


3.1. 대북의 영수[편집]


  • 아계 이산해: 북인과 남인으로 분당하기 전에는 동인 전체의 영수이기도 했다. 이후 육북 의 영수가 되었다.
  • (재야 영수) 내암 정인홍: 대북의 영수이기는 하지만 연배로 보나 경륜으로 보나 학식으로 보나 그가 이산해 사후 북인 전체의 영수격으로 존중받았다. 특이하게도 폐모론에는 찬성했지만, "서모도 어머니는 어머니인데 어떻게 자식이 어머니를 죽이는가?"라며 인목왕후와 영창대군을 죽이는 걸 반대했다.
  • (조정 영수) 광창 부원군 관송 이이첨: 정인홍이 대북의 정신적인 지주였다면 이이첨은 대북의 행동 대장 겸 실세였다.
  • 홍여순: 골북의 영수.
  • 유몽인: 중북 의 영수. 인조반정 이후 그의 아들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해서 아들과 처형되었다.


3.2. 소북의 영수[편집]


  • 김신국
  • 설사 남이공: 청탁분당 이후에는 청소북 의 영수가 된다.
  • 유영경: 탁소북 의 영수.
  • 문창 부원군 화남 류희분
  • 밀창 부원군 퇴우당 박승종[18]: 정확히는 자신이 이 당에 속한다 한 것이 아니라 분류된 것이다. 동인에 소속된다라고 할 만한 것이 과거 정여립의 절친을 사관에 추천한 적이 있다. 정여립은 동인이고 역적(...)이었던게 함정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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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대 권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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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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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인과 분당.[2] 정여립의 난 이후.[3] 홍여순이 대사헌으로 천거되자 남이공이 반대하면서 분열.[4] 계축옥사. 이를 계기로 일부 소북이 숙청당하고, 박승종과 대북의 갈등도 시작되었다.[5] 인조반정. 남이공을 중심으로 어찌어찌 소북(청소북)은 존속했고 중북 역시 재야 유림으로 잔존했다. 그러나 그 이후엔 모두 남인으로 흡수되었다. 남인이 집권당이었다면 남인 속 북인계 계파가 힘을 썼을 수도 있지만, 남인 역시 순탄치 않은 길을 걸으며 북인이란 정체성은 없어졌다.[6] 북인의 수장으로, 선조 때와 광해군 초기 시절엔 재야엔 정인홍, 조정엔 이산해와 이이첨으로 대북은 나뉘어져 있었다.[7] 대북육북의 수장.[8] 다만 1604년까지만 해도 집권당인 북인은 그리 큰 여당이 아니었는데 이 때만 해도 정승판서는 주로 서인, 남인들이 차지했다.[9] 다만 이 때 내각은 서인과 남인이 독차지했는데 이 때 조정은 여소야대였던 것이다.[建儲] 세자를 세운다는 뜻. 이 부분의 본문에서 서술하고 있는 서-동 정권교체사건 자체를 건저 사건, 건저 문제, 건저의사건(建儲議事件 건저에 대한 의견을 냈으므로 '의논할 의'자를 쓴다) 등으로 칭하기도 한다.[10] 이른바 남북이란 말도 유래가 있다. 무자년(1588, 선조 2가을에 문소(聞韶)에 가서 부모님을 뵙고 돌아오니, 중숙(重叔)이 나에게 말하기를, “근래 남북이란 말이 있는데, 그대는 들은 일이 있소?” 하므로, 내가 놀라 묻기를,“그것이 무슨 소리오?” 하니, 대답하기를, “남은 이현을 우두머리로, 그 다음이 경선ㆍ자앙, 그리고 그대 등 몇 사람이며, 북은 여수(汝受 이산해(李山海))를 우두머리로, 중겸(仲謙 백유양(白惟讓))ㆍ경함(景涵 이발(李潑)) 형제 및 나까지 몇 사람이오.”하였다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46A_0010_000_0010_2002_014_XML[11] 대놓고는 못한다. 명색이 국본이요, 그것도 임진왜란 때 공이 큰 세잔데 "쫓아내시졈?"이라 했다가는 "니 목부터 떼고 이야기 하지."가 된다. 그런데 은근한 푸시조차도 너무 큰 배팅인지라 결국 그는 제 명에 못 죽는다.[12] 이들 대북과 소북 인물 중에서 광창부원군 이이첨(李爾瞻 1560년 ~ 1623년, 예조 판서 겸 대제학), 밀창부원군 박승종(朴承宗, 1562년 ~ 1623년, 대제학을 거쳐 정승), 문창부원군 유희분(柳希奮 1564년 ~ 1623년, 대사간, 도승지)의 "삼창"이 부원군으로 봉해지면서 광해군 재위 후반기에는 정계의 실세로 자리매김한다.[13] 사실 골북 육북 중북은 이미 선조실록부터 등장하는 말로, 당시에는 강경파인 홍여순을 골북, 온건파인 이산해를 육북이라고 했으니 폐모론에 빗대어 분파를 판별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중북은 중자(中子) 혹은 골북 육북에 대응하여 더욱 온건파라는 의미로 피북(皮北)이라고도 하였다.[14] 다만 정창연은 서인 계열과도 접촉점이 많다. 인조반정 이후로는 정창연은 서인으로 전향한다.[15] 정인홍의 일가 제외. 당사자는 88세의 나이로 참형당했다.[16] 그러나 대북에 의해 탄압을 받은 소북의 일부는 오히려 인조반정이 일어나 인조가 즉위한 이후 직첩과 신원을 복권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유영경 등이다.[17] 이 역모에 정인홍의 조카들도 참여하였다.[18] 서인의 주요 인물인 김류, 이귀(서인 강경파)와도 친했다 라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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