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립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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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선조 22년(1589) 10월 2일에 일어난 기축옥사의 시발점이다.
2. 전개[편집]
전 도사(都事) 조대중(曹大中)을 하옥하여 죽였다. 대중이 전라 도사가 되어 역변의 초기에 부안(扶安)의 관창(官娼)을 대동하고 보성(寶城)에 이르러 서로 이별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에 종인(從人)이 지체하는 것을 지루하게 여겨 밖에 나와 사람에게 말하기를 ‘현재 울고 있는 중이니 어느 겨를에 길을 떠나겠는가.’ 하였는데, 이 말이 와전되어 ‘대중이 정여립의 죽음을 듣고 방에 들어가 울었다.’는 것으로 되었다. 홍여순이 이 말을 듣고 보성군의 향관(鄕官)·이복(吏僕) 등에게 첩문(牒問)하니, 모두들 공술하기를 ‘관창과 이별하며 눈물을 흘린 것은 사실이다.’ 하였다. 그런데 그 설이 유소(儒疏)에서 ‘적을 위해 울었다.’로 되어 마침내 대론(臺論)에 나와 나국(拿鞫)하게 된 것이다.
대중이 공초하기를 ‘여립이 죽었다는 것을 들은 날 나는 광주(光州)의 향가(鄕家)에 있었다. 담양 부사(潭陽府使) 김여물(金汝岉)이 내방하여 「국적(國賊)이 이제 죽었으니 오늘은 술 마시며 즐겨도 관계없을 것이다.」 하기에 여물과 함께 종일토록 술자리를 벌이고 크게 취한 뒤에 파하였다. 증명해 주기 바란다.’ 하였다. 이때 여물이 서울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는데도 국청에서는 물어보지 않았다.[1]
....(중략)
당시 조사(朝士) 김빙(金憑)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평소 눈병을 앓아 바람만 쏘이면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립을 추형(追刑)할 때 김빙이 반행(班行)에 서 있었는데 날씨가 너무 추워 흐르는 눈물을 아무리 닦아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그는 논핵을 입고 국문을 받다 죽었다. 이 당시 와언(訛言)이 날로 일어나 대론(臺論)이 매우 준엄하였으므로 이런 식으로 억울하게 걸려든 자가 많았다.[2]
-조선왕조실록 선조 23년 3월 1일 기사
발단은 선조 22년(1589) 황해도 관찰사 한준, 안악군 군수 이축, 재령군 군수 박충간의 연명 상소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정여립이 한강이 얼 때를 기다려 한양으로 쳐들어가 병조판서 신립과 조정 중신들을 죽이고, 어명을 위조하여 지방관들을 파직하거나 죽이는 등의 혼란을 야기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놀란 선조는 중신들을 불러모아 대책 회의를 하였다. 당시에는 동인들이 집권 중이었고, 정여립은 동인에 속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정언신을 중심으로 한 동인들은 정여립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동인들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실록》에 의하면 정여립은 안악군의 조구가 자신의 계획을 고변한 사실을 금구에서 변숭복에게서 전해들었다. 그 후 변숭복 및 아들 정옥남과 함께 자신이 서실을 차리고 대동계(大同契)를 운영했던 죽도(竹島)[3] 로 도주했다. 그러나 진안 현감이 토벌대를 조직해 추격하자 변숭복과 정옥남을 살해한 후 자신도 칼을 거꾸로 세운 다음 자살했다. 이후 동인들의 입지는 축소되어 버렸는데, 그의 자살은 반역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4]
2.1. 실제로 정여립이 반란을 꾀했나?[편집]
여기서 정여립이 정말 모반을 꾀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정여립의 행보와 정황적 증거들로 미루어 볼 때, 정여립이 모반을 꾀했다고 보기에는 어렵기 때문이다.
- 우선 정여립이 정말 모반을 꾀한 게 맞다면, 설령 도망치더라도 그 전에 모반과 관련된 모든 문서들을 소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집에서는 수많은 문서와 편지들이 고스란히 발견되었다. 그의 도피는 변숭복의 급보로 이루어졌다는데, 그는 수사의 손길이 곧 본인에게 미칠 것을 알면서도 집안에 각종 편지와 문서들을 방치하여 후일 이 문서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을 연루자로 죽게 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 또한 정여립이 도망친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대동계원들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게다가 그가 도망친 곳은 자신이 대동계원들과 함께 하던 연고지인 죽도였다. 또한 정여립은 죽도로 간다고 밝히기까지 했다고 한다. 급보를 받고 도망간다면 연고지가 아니라 지리산 같은 심산으로 방향을 잡았을 것이며, 또 가족에게 행선지를 알려 관군의 손이 곧 미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여립이 도망치는 신세에 놓인 사람이었다고 보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 다른 정황적 증거들도 의구심을 더 부채질한다. 김장생(金長生)의 《송강행록》[5] 에 의하면 "정여립 사건이 났을 때, 공은 나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그는 정여립이 반드시 도망을 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며, 극구 만류에도 불구하고 입궐을 서둘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만 놓고 본다면, 정철은 정여립의 행적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이로 인해서 서인 세력들이 이 사건의 실체를 알고 있지 않았느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실제로 《동소만록》과 같은 야사에서는 "정여립이 죽도로 놀러갔는데, 선전관과 현감이 정여립을 습격하여 살해한 후 자결로 위장했다"라는 기록도 존재한다.
- 길삼봉은 원래 나이 많은 어느 집 노비라는 이야기가 돌았으며, 정여립과 친해서 반역을 같이 도모하다가 정여립의 체포 당시에 사망했거나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정작 진안 죽도에 가서 정여립의 체포 작전 당시에 희생된 사람들을 조사하는 것보다 엉뚱하게도 정여립의 시체와 정옥남을 압송해갔다. 그렇게 해서 정여립의 체포 작전에 대해 제대로 된 조사보다 급하게 조사를 마무리 하다보니 길삼봉은 조선 시대 역사서에 등장하는 최대의 미스테리 인물이 되면서 신분도 불명이고, 연령도 불명이 되었다.
- 사망했거나 실종된 길삼봉은 나중에는 연령도 20대에서 70대까지, 신분도 사대부에서 노비까지, 반역에 있어서도 일개 수하에서 심지어 정여립보다도 상위 위치('길삼봉이 상장, 정팔룡과 정여립이 차장')를 커버하게 되면서 정체가 완전히 사라졌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등장하는 길삼봉의 기록만 해도 밑도 끝도 없다. 그래서 길삼봉이라는 이름은 가져다 붙이기만 하면 사람이 죽어나가게 만들 수 있는 마법의 말처럼 사용되었다. 길삼봉으로 엮여서 죽은 사람만 1천여 명에 이른다. 이 때문에 길삼봉에 대해 정여립 본인 혹은 옥사를 주도한 인물들이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란 해석도 있다[6] .
이러한 의문점들로 인해 정여립의 난이 아예 날조라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만약 자살이 아니라 살해설이 맞다면 모반의 주동자로 지목된 정여립 본인을 잡아다가 문초하지도 않았으며, 실제로 당시에는 정철이 서인의 모략가인 송익필(宋翼弼)[7] 형제와 모의하여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조작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고 한다.[8] 하지만 타살설은 어디까지나 설이고 정여립은 자살한게 맞는 걸로 보인다. 정여립이 자결할 때 그 자리에 있던 정여립의 아들 정옥남과 박춘룡은 정여립의 죽음이 자살로 위장되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들을 심문했던 사람은 정여립과 9촌 관계로 정여립과 가까운 사이라고 유배되었던 정언신이었다. 이후 선조가 친국하는 자리에서도 정여립이 타살당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정옥남과 박춘룡은 잡혀온 후 한참 동안을 감옥에서 심문 받고 권정례 이후 처형되었는데, 만약 서인이 정여립을 죽인 후 자살로 위장한게 사실이라면 서인들이 그때까지 정옥남과 박춘룡을 살려둘 이유가 없다.
이 소문에 의하면, 정철은 송익필 형제를 시켜 전라도에서 "정여립이 모반을 꾀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는 것이다. 또한 송한필은 황해도에 정여립에 대한 호의적인 소문을 내서 정여립으로 하여금 모반을 부추기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조작의 주체는 세력도 미미했던[9] 서인이 아니라 선조 본인이 상황을 기가 막히게 이용한 것뿐일 가능성이 크다. 후술하겠지만 후일 선조는 정철이 '건저 사건'으로 몰락한 이후 정철의 측근들과 양천회를 비롯한 당시의 고변자들을 혹독하게 심문하여 정철의 사주였다는 증언을 받아내긴 했는데 이거 자체도 그냥 고문으로 인한 허위 자백일 가능성이 크다. 역모 조작범이라는 정철을 처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정여립의 형 정여복과 정여립의 사위인 김경일이 정여립의 행동을 수상하게 생각했고, 정여립과 친하게 지내던 승려인 도잠과 설청은 정여립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생각해 정여립에게서 도망쳤으며, 이발의 동생인 이길이 정여립과 만난 후에 이발에게 정여립이 역모를 했다고 편지를 쓰기도 한 걸보면 정여립의 행동이 수상했던 건 사실로 보인다.
정여립은 파격적인 이론 제시가로 알려지기도 했다. 다만 그가 말했다는 '천하는 공물(公物)이니...'라는 말은 정여립이 먼저 한 건 아니고, 이전부터 나와 있던 말이다. 단재 신채호는 이 부분을 높이 평가하여 조선 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인물이 정여립이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조선이 정여립의 '천하는 공물(公物)' 이라는 사상을 받아들였다면, 서양 크롬웰의 공화정보다도 앞서 이를 실현한 나라가 됐을 것이라고 하였다.[10][11]
3. 이후의 전개 - 기축옥사[편집]
정여립이 자결한 후, 선조는 조정 중신들을 위관으로 임명하고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정철은 정여립의 집에서 압수한 문서와 편지들을 샅샅이 검토하여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교류가 있었던 사람들은 모조리 잡아들이게 했다. 1차로 정여립과 상당히 친했고, 정여립과 같이 모반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이기, 황언윤, 신여성 등이 처형되었다. 정여립의 조카 이진길은 그 집을 수색해보니
라고 쓴 편지가 발견되어 장형 끝에 죽고 말았다. 이렇게 마무리하면 정여립의 난에 대한 조사는 끝이 나지만 이걸로 부족했던 정철 등의 서인들은 진정한 목표를 정언신, 김우옹, 이발, 백유양, 정개청, 최영경을 위시한 동인 세력들의 제거로 바꿨다. 서인측 유생들은 동인측 인사들이 정여립과 모반을 꾸몄다며 이들을 처벌하라고 상소를 올렸다."지금 임금의 어두움이 날로 심하다."
한편 정언신도 위관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정언신이 정여립의 9촌(九寸)으로, 즉 인척지간이므로 위관을 해서는 안 된다고 아뢰어 대신 정철이 위관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정언신이
며 여러 대신들과의 자리에서 한 발언이 선조에게 알려졌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정여립과 주고 받은 서신들이 발견되어 삭탈 관작되고 옥에 갇혔다. 그렇게 정언신은 우의정에서도 물러나게 되었는데, 정언신이 삭탈되자 무인(武人)들이 한숨짓고 개탄했다며, 정언신이 오랫동안 병권(兵權)을 장악하고 무인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운 점도 훗날 화근이 될 수 있다며 문제가 되었다. 결국 사헌부에서 정언신에 대하여 역적을 두둔하고 옥사를 지연시켰다는 죄목으로 유배형에 처할 것을 청하니 선조가 그렇게 하라 명했다."역모를 고변한 자의 목을 베어버리겠다!"
정언신은 이렇게 고변 당시에는 전혀 믿지 않고 손 놓고 있다가 선조가 독촉하자 하는 시늉만 하려고 했다.[12] 그리고 상식적으로 역모 의심자의 인척이 역모 사건에서 추국을 담당한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후 문제가 된 서신도 처음에는 주고 받은 사실이 없다고 했는데, 원래 서신에는 정언신이 '종로'(宗老) 즉 '집안의 큰 어른'으로 적혔있던 걸 알지 못했다가 '종로'(宗老)가 '정언신'임이 밝혀지자 문제가 커진 것이었다. 다른 중신들도 위관이었지만 사실상 정여립 사건 수사는 정철이 주도했다.[13]
한편 이발은 왕의 권력을 위협하거나, 국정을 혼란스럽게 하고 나라를 망치려는 권간으로 지목당해서 원지로의 귀양에 처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12월 12일, 교생 선홍복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다시 이발의 이름이 나오자, 선조에 의해 예비 권간으로 지목당한 이발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다시 끌려와 국문을 받게 되었고, 국문 과정 중 장을 맞다 죽고 말았다. 선홍복은 자백 이후 처형되었는데, 처형 직전
고 울부짖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가장 처참하게 당했던 죽음으로는 멸문당한 이발의 가족들일 것이다. 동인 출신인 이발은 본인뿐만 아니라 일가가 모조리 붙잡혀 선조 앞에서 국문을 당했다. 이발의 가문은 9대조부터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가문이었는데, 선조는 이발의 가문을 세도정치를 할 가문이라는 잘못된 생각으로 가문 자체를 거의 박살냈다."이발 등의 이름을 대면 살려 주겠다고 했으면서 왜 이렇게 하느냐"
이때 선조가 이발의 어린 아들에게
라고 묻자, 이발의 어린 아들이"너는 네 아비로부터 무엇을 배웠느냐"
라고 답했다. 이 말에 선조가 길길이 날뛰며"저는 아버지께 충, 효 외에는 배운 것이 없습니다."
라며 이발의 어린 아들을 고문했다. 이발의 아들은 압슬형[15] 을 받고 사망했으며, 80세가 넘은 노모는 장형으로 사망, 즉 맞아 죽었다.[16][17]"역적의 자식놈이 저런 참람한 말을 하다니!"
이런 엄청난 비극 때문에, 오늘날 겨우 살아남은 이발의 후손들은 조상의 제사를 모실 때마다 고기를 다지며
을 외친다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전한다. 하지만 정철이 이 모든 일에 주도적으로 나서긴 했으나, 결국 최종적인 지휘자는 선조였다. 정철도 일이 커지자 크게 당황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훗날 선조는"정철! 정철!"
며 정철에게 뒤집어씌우니 선조가 정철을 이용한 것인지 아님 정철이 주도한 것인지 다만 추측할 뿐이다. 또한 호남 출신의 유학자로 독자적인 학문 세계를 가지고 있었던 정개청도 조정에서 제대로 된 관직을 지내지 않았지만 정여립의 집터를 봐주었다는 것과 예비 권간이라는 이유로 붙잡혀와 억울하게 희생되었다. 정철은 정개청의 저서인 《우득록》을 보고선"과인이 간악한 정철에게 속아 호남의 어진 선비들이 고초를 겪었다"
며 그를 맹비난했다.[18]"절의를 배격했다."
심지어
라고 할 정도였다. 사실상 정개청을 왕의 권력을 위협하거나 나라를 어지럽게 해 국정을 혼란하게 만드는 권간으로 다루어서 처벌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말이었다. 정개청의 제자들은 이를 정철이 젊을 적에 정개청이"개청은 반역하지 않은 여립이요, 여립은 반역한 개청이다"
라고 말한 것에 앙심을 품었기 때문이라는 야사가 있다. 사실 그보다는 정개청도 정여립 같은 철새였기 때문이다. 원래 정개청은 서인의 영수인 박순이 거두어서 가르치고 키운 인물이었는데 박순이 실각한 이후에는 그를 배신하고 동인들과 어울렸다. 이에 정철이 그를 조정에서 높은 관직을 지내지는 않았지만, 예비 권간으로 비루하게 대우하며 혹독하게 심문했고, 결국 고문치사시켰다."정철처럼 술마시고 노는 걸 어린애들이 보고 배운다."
하지만 이는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 부족이다. 원래 박순과 허엽(허균과 허난설헌의 부친)은 화담 서경덕을 스승으로 하는 동문이었는데, 이조정랑의 자리를 두고서 박순은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을, 허엽은 김효원을 밀면서 서인과 동인으로 갈라섰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같은 스승에게 배워도 당색이 달라지니, 학문적인 성향이 당색과 일치하는 것도 아니었다. 정개청은 화담 서경덕으로부터 수학하기도 했다. 원래 박순과 허엽의 당파는 없었는데, 그 이유는 심의겸과 김효원 이전에는 서인과 동인의 붕당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즈음 박순은 서인으로 분류된다. 정개청의 제자들은 좌의정 남이공과 같이 동인 계열이 많아서 동인으로 분류되지만 정작 정개청 자신은 뚜렷한 당색없이 학문에만 전념하는 학자였다.
박순이 서인이니 정개청도 당연히 서인이고, 그런데 동인으로 바꿨다는 주장은 서인 측에서 나중에 꿰어맞춘 주장일 뿐이다. 훗날 정개청의 사당 건립 문제는 조선 말까지 이어지는 뜨거운 논쟁이었다. 또한 남명 조식의 제자인 진주의 최영경은 정여립 본인으로 추정되는 부두목 '정팔룡'의 수괴인 '길삼봉'(吉三峯)이라는 것과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제대로 된 관직을 지내지 않았지만, 선조가 그를 왕의 권력을 위협하거나 국정을 혼란하게 하고 나라를 망칠 권간이라는 누명을 씌우는 바람에 억울한 죽음을 당해야 했다. 그간 최영경은 정철을 비롯한 서인의 거두들이 소인이니 모두 죽여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일삼아 서인 세력의 미움을 사고 있었는데 정여립이 잔치를 열면서 최영경을 극진히 모셨다는 진술이 나오면서 잡혀 들어갔다. 이에 선조에 의해 예비 권간으로 지목당한 최영경은 자신이 한양에 있을 때 인연이 있었지, 편지 왕래도 하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주장했으나 편지가 하나 나오긴 했다.
이에 최영경은 나이가 들어서 헷갈렸다고 했다. 정철을 비롯한 수사관들은 아무래도 이 양반은 깨끗한 것 같으니 풀어주는 것이 맞다고 선조에게 진언했으나 대간이 그럴 수 없다고 결사 반대하는 통에 선조가 풀어주려다가 입장을 번복했고, 결국 왕이 최영경을 예비 권신과 간신으로 다시 지목하면서 최영경은 옥사하고 말았다. 정여립의 난으로 일어난 일련의 대숙청을 기축옥사라고 한다. 정언신, 김우옹, 이발, 백유양, 정개청, 최영경을 왕의 권력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권간이라는 누명을 씌운 후 제거한 선조는 왕권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19] 한편 정철이 지나치게 동인계 인사들을 잡아들여 죽인 탓에 말썽이 일었고, 기축옥사 이후 서인의 권력이 너무 커졌다고 우려한 선조는 정철이 광해군의 조속한 세자 책봉을 주장한 것을 빌미로 그를 파직시켜 버렸다.
또한 건저의 사건으로 정철, 성혼, 윤두수, 윤근수, 이해수, 홍성민, 이산보[20] , 박점, 황정욱, 백유함[21] , 유공진, 장운익 등 서인들이 죄다 유배형에 처해졌으며, 동인이었던 이성중과 우성전[22] 도 건저의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형에 처해졌다.[23] 최영경을 '길삼봉'이라고 무고한 양천경, 양천회 등[24] 은 국문을 받다가 죽었다. 심지어 선조는 조정에서 제대로 관직을 추천하지 않으며, 왕의 권력을 위협하는 권신 및 나라를 망치려는 간신으로 지목해서 제거한 최영경을 복권시키고 정철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이는 결국 정여립의 난에 이어진 참혹한 기축옥사의 배후에 선조가 있었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지나치게 세력이 커진 동인을 정철을 내세워서 제거한 다음, 그 부담은 모두 정철에게 뒤집어씌운 것이었다. 훗날 기축옥사의 고변자들이었던 양천회 형제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건저 사건으로 정철이 몰락한 이후에 잡혀와서 정철의 사주를 받아 그랬다고 자복하곤 곤장을 맞다가 죽었는데 정작 정철에겐 죄가 더해지지 않았다. 정철은 그냥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반증이다. 실제 정철이 주도했든지, 선조가 정철을 이용했든지 간에 훗날 선조는 정철을 '독철'(毒澈)이라 부르며,
며 기축옥사의 책임을 정철에게 다 뒤집어 씌웠고, 정철은 동인들의 씨를 말리다시피 했다며악독한 정철이 내 선량한 신하들을 다 죽였다.
(毒澈殺我良臣)
이라고까지 불렸다.동인백정
(東人白丁)
게다가 당대의 고승인 휴정과 유정도 연루되었다. 정여립과 가까이 지냈던 승려 중 무업(無業)이란 자가 고문을 받고 휴정과 유정이 역모와 연관이 있다고 무고를 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휴정과 유정 모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선조가 두 사람을 신임하여 풀려날 수 있었다. 훗날 구국의 명장으로 칭송될 이순신도 연관된 적이 있다. 이순신의 조카인 이분의 《행장록》에 따르면 이때 하급 관리였던 이순신이 정언신을 면회할 겸 의금부에 방문했다가 의금부 관리들이 술판을 벌이는 것을 보았다. 당시 정언신은 정여립의 친척으로, 정여립의 반란 음모를 듣고 비웃은 사람이었으며 원래 사건 조사관이었다. 하지만 정여립의 친척이라는 이유와 선조에 의해 왕권을 위협하거나, 국정을 어지럽게 해서 나라를 혼란에 빠지게 하는 권간으로 지목되어 자리에서 쫒겨나고 수감되었다.
이때 선전관이었던 무신 이응표는 정여립의 집에서 나온 문서 중 정언신 관련 편지들을 몰래 처분했으나 문인들의 멋부리는 표현을 이해하지 못해 17장이나 문서가 남았다.[25] 당시에도 이 사건이 조작이라는 여론이 있었다는 걸 반증한다는 설부터 이순신의 의기를 강조하는 설 혹은 《행장록》에 적힌 미화된 이야기라는 설 등 의견이 여러가지로 나뉜다. 이순신과는 다른 면으로도 연결되는 점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부하들 중 한 명인 안위는 명량해전 때 이순신으로부터
며 호되게 꾸중을 들은 장수이다. 명량해전 당시의 이미지를 앞뒤 이해없이 본다면 느낄 선입견과는 달리 실제로는 부산의 왜군 진영에 침투해 진영을 홀라당 불태워 버리는 등의 작전을 수행한 용맹한 인물이었고, 명량해전 때도 가장 먼저 복귀해 싸워서 이순신의 추천으로 파격 승진한 사람이었다.[26] 이 두 사건으로 '성웅의 남자'란 평가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27] 안위는 기축옥사 당시에는 정여립의 5촌 조카라는 이유로 투옥되어 조사를 받았고, 전공을 세워서 승진한 이후에도 '역적의 친척'이라며 몇 차례나 파직을 당했다."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 같으냐?"
정여립의 난이 과연 정말로 모반 사건이었는지 아니면 (주체가 누구던 간에) 조작된 정치적 사건인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연루되어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면모를 볼 때 조작된 사건 쪽에 좀 더 무게가 실린다. 그러나 기축옥사의 공초(수사 및 공판 기록)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불타 없어져 버렸고, 그 때문에 더 자세한 연구가 어렵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리고 기존의 서인 주도론은 별로 설득력이 없는 것이 법에 따라 여자와 아이는 고문할 수 없다는 서인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발 가문을 세도정치를 할 가문으로 생각해서 개박살내고 아이와 노인까지 고문해서 죽인 장본인이 선조였으며, 예비 권간으로 지목한 최영경도 정철이 풀어주자고 한 것을 선조가 거부했다.[28]
훗날 정철을 토사구팽해버린 과정을 볼 때 강경파였던 정철을 희생양으로 삼으며, 선조는 정언신, 김우옹, 이발, 백유양, 정개청, 최영경이 왕권을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조가 그들을 제거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술수를 부린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동인들 중에 류성룡을 비롯한 남인들이 큰 피해를 입지 않은 것도 지나치게 서인 세력의 힘이 커지는 것을 경계한 선조가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해석이 강하다. 실제로 선조는 류성룡 등을 탄핵한 상소를 보고 아예 류성룡에게 보여주며
라며 비난했고, 류성룡에게는"이놈들이 나라 대신들 다 죽고 나서야 그만둘 모양이다."
라며 신임을 보여줬다. 특히 서인 강경파인 조헌에 대해서는 '간귀'라 부르며 이후로도 마천령을 넘게 될 것(=마천령을 넘어 귀양가게 될 것)이라고 디스했다. 즉 남겨둬야겠다고 마음먹은 이들은 남겨놨다는 뜻이다."금옥과도 같은 선비"
그렇지만 선조의 바람과는 달리 기축옥사로 동인이 받은 타격은 심각했고, 정철의 처리와 급진/온건 성향을 문제로 조식 계열의 북인과 이황 계열의 남인으로 또다시 분당되었다. 이후로는 류성룡 주축의 남인이 여당이 되지만, 이 남인은 임진왜란이라는 숙청 이상의 파급력을 가진 어마어마한 사건이 벌어지면서 책임을 떠안아 북인에게 세력을 넘겨주게 되었고, 북인은 다시 광해군과 함께 몰락하면서 동인 계열은 사실상 남인 계열의 극소수만 남아버리게 되었다. 이것은 이후 왕권에도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데. 기본적으로 동인은 '근왕파'로서 '왕도정치'를 추구하는데, 인조 이후로는 '신권정치'를 추구하는 서인이 주도권을 가져가게 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정여립의 난으로 인해서 17세기부터 조선에서는 이른바 정씨진인설이 나돌면서, 반란이 잇달아 일어났다. '정씨진인'[29] , 즉 구세주가 군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켜 부패한 조선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워 태평성대를 누린다는 내용인데 그 정씨 성을 쓰는 진인의 모티브가 바로 정여립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정씨진인설을 담은 예언서인 《정감록》이 18세기부터 조선 사회에 나돌면서 조선 사회는 끊임없이 반란에 시달리게 되었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 불멸의 이순신에서 36에 등장했는데 정작 반란을 일으킨 모습을 보이지않았으며 오히려 반란 자체가 날조되었다는설을 극중의 복선들을 통해 보여줬다. 위의 항목에서도 보이듯 정여립의 난 자체가 정말로 일어난 난 이었는지 불명이라 이런 장면을 넣었으리라 보인다.
- 구름을 버서난 달처럼 영화판은 이몽학의 난과 이 사건을 결부시켜서 그리고 있다.
- 전설의 고향 2009판에서는 '죽도의 한'이라는 제목으로 정여립의 난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나왔다. 전설의 고향이라 전체적으로 미스테리한 분위기를 심었다. 정여립 역할은 공교롭게도 사극에서 죽는 역할로 자주 나오는 배우 김갑수다.
- 이두호의 작품 '《파행》'에서는 주인공인 임차손[30] 이 모종의 일로 모은 재물을 가지고 이 쪽과 결탁했다는 암시를 풍겼다. 오래된 친구 이순신[31] 에게 말하는 대사로 길삼봉이라는 자가 동쪽에서 온...것으로 암시하지만 작품 자체가 어른의 사정으로 연중되는 바람에 실체가 드러나지는 않았다.
- 유승진의 《포천》에서는 정도령과 결탁해서 반란을 꾀하는 것으로 나온다.
- 웹툰 《오성X한음》에서는 사건이 나기 5년 전부터 선조가 배후에서 일부러 정여립이 대동계를 조직하게 유도하여 장기적으로 왕권 강화를 위한 미끼로 쓰는 것으로 나온다. 선조의 계획대로였다면 왕권이 강화되어 치세에 아무 문제가 없었을테지만, 선조 본인도 예상못한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제대로 멘붕에 빠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 드라마 구가의 서에서는 직접 나온 것은 아니지만, 등장인물들의 언급을 통해서 언급된다. 정확히는 살해당한 박무솔에게 역적의 누명을 씌우기 위해 조관웅이 그를 이 난과 연관시킬 때 대동계가 언급된다.
- 소울 칼리버 6에서는 황성경 스토리의 주된 배경이다. 황성경이 어느 날 종적을 감추고 행방불명되나, 황성경의 사부인 성한명[32] 은 서인들의 감시를 받아 공공연히 황성경을 찾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충무공 이순신이 동인과 친분이 있는 인물이라 서인들의 견제를 받고 있는데, 성한명은 이순신의 절친한 친구이며, 황성경은 아예 이순신의 직속 부하인지라 이순신과 같이 엮여 있기 때문. 여기에서는 정여립의 난이 조작이라는 학설을 따랐으며, 정철은 소울 엣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국왕은 이순신이 아끼는 부하에게 소울 엣지 탐색 임무를 맡긴 것을 씁쓸해한다고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