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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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의 문신이자 유학자로 우의정,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니탕개의 난을 진압하는 등 공도 세웠으나 정여립과 친척(9촌)이었으며, 그와 서신을 주고 받았던 탓에 기축옥사 당시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다.
2. 생애[편집]
2.1. 전반[편집]
전주 지역의 명문가 출신으로 부친은 영의정에 추증된 정진(鄭振)이며, 조부는 좌찬성에 추증된 정홍손(鄭洪孫)이다. 친형 정언지(鄭彦智) 또한 이조 참판을 지냈다.[3]
1566년 명종 21년에 40세의 나이로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71년에는 전라도 도사를 지내고 이후에는 사헌부에서 경력을 쌓다가 1579년 경기도관찰사로 임명된다. 1582년 여진족 니탕개가 니탕개의 난을 일으켰다. 이에 선조는 정언신을 우참찬으로 승진시키며 함경도 도순찰사를 겸직시키며 정언신에게 니탕개의 난을 진압할 것을 명했다. 이에 정언신은 신립, 이일, 이순신, 김시민, 이억기 등의 장수들을 이끌고 난을 성공적으로 진압했으며,[4] 녹둔도에 둔전을 설치하고 병사를 주둔시켰다. 선조는 난을 진압한 정언신을 함경도 관찰사에 임명했다. 1587년 병조판서를 거쳐 1588년에는 우참찬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인 1589년에는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2.2. 정여립의 난과 최후[편집]
1589년 9촌 친척인 정여립이 모반 혐의를 받게 된다. 처음에는 정언신은 이를 조사하는 위관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정언신이 정여립의 구촌(九寸) 즉 인척지간 임을 지적하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또한 정언신이 "역모를 고변한 자의 목을 베어버리겠다!"며 여러 대신들과의 자리에서 한 발언이 선조에게 알려졌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정여립과 주고받은 서신들이 발견되어 삭탈 관작되고 옥에 갇히었다. 그렇게 정언신은 우의정에서도 물러나게 되었는데, 정언신이 삭탈되자 무인(武人)들이 한숨짓고 개탄하였다며, 정언신이 오랫동안 병권(兵權)을 장악하고 무인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운 점도 훗날 화근이 될 수 있다며 문제가 되었다. 당장 정언신과 정여립이 주고받은 서신을 없앤 이응표도 무신이였다. 결국 사헌부에서 정언신에 대하여 역적을 두둔하고 옥사를 지연시켰다는 죄목으로 유배형에 처할 것을 청하니 선조가 그렇게 하라 명하였다.[5] 사실 이 정도에 그친 것도 선조의 엄청난 배려라고 볼 수 있다.
이 때의 일화가 한 가지 있는데, 평소 친분이 있던 선전관 이응표가 정언신의 이름이 들어간 서신을 모두 제거하고 이를 정언신에게 알렸다. 이를 믿은 정언신은 선조에게 정여립과 서신을 주고 받은 적이 없음을 주장했지만, '宗老信(종가의 큰어른 언신)'이 처음에는 누구인지 알지 못하다가 '종로(宗老)'가 '정언신' 임이 밝혀지자 문제가 커졌다. 무신이던 이응표가 당시 문인들이 멋부려서 자신을 칭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 일어난 일.
이렇게 해서 억울한 누명을 당한 정언신은 유배형에 처해졌으며 유배지인 갑산에서 사망한다. 같은 시기에 김우옹, 이발,백유양, 정개청, 최영경 등도 유배를 가거나 죽임을 당했다. 그래도 정언신은 삼정승을 지내고, 10년 후에(1599년) 선조에 의해 복권도 되었지만, 그 외 다른 사람들은 삼정승은커녕, 의정부의 찬성이나 참찬이라는 벼슬까지 못 받으면서 선조의 의심을 받고 갑자기 권간으로 지목을 당해 유배나 죽음을 당해야 했으니 누명에 의한 억울함이 더 심했다.
3. 여담[편집]
- 이항복은 정언신이 사망하자 몰래 찾아가 관 속에 만언시(挽人詩)를 지어 넣어 애도의 뜻을 표했고, 선조도 그의 죽음을 후회하고 사후 복권을 시켜주었다.
- 군사적 재능은 확실히 뛰어났는지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 황정욱은 "정언신이 있었으면 왜적에 이렇게 짓밟히지는 않았을 것."라고 탄식했으며, 류성룡도 징비록에서 임란 시기에 그가 없음을 아쉬워했다.
- 전주시 덕진구에 그의 이름을 딴 '정언신로'라는 도로명이 있다.
4. 대중매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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