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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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
李潑

성명
이발(李潑)

경함(景涵)

동암(東菴)
본관
광산
출생
1544년(중종 39년)
조선 전라도 함평군
사망
1589년(선조 22년) 12월 1일
조선 한성부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대중매체



1. 개요[편집]


조선 중기의 문신. 이조전랑, 부제학, 대사간 등을 역임했다. 기축옥사멸문지화를 당한 사람이다. 호는 동암.


2. 생애[편집]


호남의 명문가 광산 이씨 집안 출신[1]으로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에서 출생해 최영경 등과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1568년 과거에 급제해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부제학 등 여러 관직을 거쳐 1584년 대사간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동서 분당 사태가 일어난 때 이조전랑[2]에 기용되어 자신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다수 기용하여 자연스럽게 동인의 지도자가 되었다. 동인이었지만 후일에 서인의 거두로 추증되는 이이를 무척이나 존경하여 이이와의 사이가 각별했다. 이이는 이발과 정철을 불러 손을 맞잡게 하고 화해를 주선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서 분당의 감정의 골은 두 사람의 표면적 화해 정도로 끝날 수준이 아니었고 동인 중에서도 최고 강경파인 정인홍이 이발, 이이[3][4]와 함께 심의겸을 탄핵하는 과정에서 "이게 다 서인 놈들이 소인배라 그렇다"라는 말을 멋대로 하는 바람에 선조가 분노하고 이이도 분격하는 사태가 벌어져 이에 책임을 지고 이이, 정철, 정인홍 등이 모조리 사직해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다.[5][6] 본인 역시 동인 중에서도 강경파인 인물이라[7] 심의겸 뿐 아니라 박순, 송익필, 이항복을 탄핵했고 이는 자신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589년 정여립의 난이 일어나자 이발은 정여립과 공모했다는 의혹과 선조에 의해 왕권을 위협하는 권신과 국정을 망하게 하고 나라를 혼란스럽게 빠지는 간신으로 지목당하는 누명을 씌우고 체포되어 종성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문초 과정에서 정여립과의 연루 의혹과 예비 권간 의혹의 누명이 재등장하자 한양으로 다시 끌려와 정철의 혹독한 고문 끝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발 뿐만 아니라 이발의 가족 모두 끌려와 혹독한 고문 끝에 사망했는데 이발의 80세 노모는 맞아 죽었고 이발의 어린 아들들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압슬형을 받다가 사망했다. 아무리 봐도 선조는 이발의 가문이 세도정치할 가문이라는 생각으로 착각에 빠지고 있었다. 그 외로도 정언신, 김우옹, 백유양, 정개청, 최영경도 역시 모반 참여 혐의와 왕권에 방해되는 예비 권간으로 지목당하면서 유배를 가거나 죽임을 당했다.

인조 2년인 1624년에 동생 이길과 함께 복권 되었다.

정철과 워낙 앙숙지간이었던 탓에 사람들은 정철이 자기 원한을 풀기 위해 이발과 이발의 일가를 처참하게 몰살시켰다고 보았다. 이발의 가족이 모조리 잡혀가기 직전에 이발은 자신의 아들과 종의 아들의 을 바꿔 입혀서 아들 하나는 살아남게 했다 한다. 그래서 이발의 가계가 겨우 이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발의 후손들은 제사를 지낼 때 고기를 다지며 "정철정철정철..."이라고 중얼대는데[8] 정철에 대한 원한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9] 하지만 정작 정철은 이발의 죽음에 관여한 바가 없는데 '역모죄는 에 구애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없는 가족들까지 수사하여 죽게 만든 것은 선조 본인의 의지였다. 오히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이발의 동생 이길이 연루되어 사형에 처하게 되었을 때 정철이 선조를 찾아가 만류하였으나 선조가 이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3. 여담[편집]


  • KBS 한국사전에서 정철을 다룰 때, 이발의 가문인 광산 이씨 종가를 찾아가서 이 의식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집안에 시집 온 한 여성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 여성 역시 이 주문의 내력을 알고 있었고, 주문에 대해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오늘날까지도 이럴까"라는 감상을 말했다.

  • 야사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이발의 방계 집안에 어쩌다가 정철의 방계 집안 출신 며느리가 시집왔는데, 집안 여자들이 '정철정철정철...' 거리며 고기를 다지는 것을 이 며느리도 멋모르고 따라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를 보다 못한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직접 '아가, 너는 그거 따라하지 마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는 믿지 못할 이야기인 게, 당파가 다른 집안끼리 통혼하지 않는 것은 양반 사회에서 기본이었다. 하물며 철천지원수의 가문과 혼인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고기를 다지면서도 정철정철거릴 정도로 옛 원한을 잊지 못하면서 통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 이발의 조카로 윤선도가 있다. 이발이 윤선도의 할아버지 윤의중의 사위였으므로 윤선도에겐 고모부가 된다. 윤선도 문서에 나와 있듯이, 윤선도는 서인에 대해 큰 반감을 가졌는데 이는 이발과 관련된 가족사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 동인 강경파의 영수 였지만 이이를 존경해 그의 문하를 자칭하기도 했기 때문에 이이의 제자이자 서인 강경파인 조헌과 절친한 사이였다 수정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조헌이 이발에게 정여립과 절교할 것을 권했지만 무시 했기 때문에 옥중에서 조헌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을 후회하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 기축옥사가 일어나 이발의 집안이 화를 입자 조헌이 이발의 노모인 윤씨를 찾아가 뵙기도 했다. 이발의 집안이 언급되는 일이 있으면 조헌이 매우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

  • 구한말에도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독립운동가 이동휘의 부친이자 자신도 독립운동가였던 이발이다. 원래 이름은 이승교였으나 독립운동을 하기위해 이름을 바꿨다. 중국에서 독립운동 단체일을 하다가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난 걸 알게 되자, 경성으로 와서 같은 해 5월 1일에 무려 69세의 나이로 노인동맹단 경성만세운동을 벌였다. 당시 45살이면 할아버지라 불리고, 60살이면 생을 마감할 준비를 하던 사회분위기에서는 정말 충격적이었던 일[10][11]이었다. 본관이 달라서 조상관계는 아니다. 또한 이 항목의 이발은 물수변이 있는, 활발하다라고 할때의 발이지만, 이동휘의 부친 이발은 거기서 물수 부수자를 뺀, 출발하다라고 할때의 發이다.


4. 대중매체[편집]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께서는 양쪽 다 옳다고 얼버무리시는데 세상에 둘다 옳은게 뭐가 있소이까?”라는 말과 처음 등장한다. 이 일이 있고 난 직후 이이는 정철과 이발을 불러 서로 손을 잡고 둘이 사고만 치지말라고 당부한다. 이후 정인홍과 함께 심의겸을 탄핵하려 했지만 소식을 듣고 온 이이, 성혼, 김우옹에 의해 탄핵이 취하되자 이이의 집에 찾아가서 “사람이 공을 신뢰하지 않는 이유는 공께서 의견을 져버리지 않기 때문이옵니다. 공이 의겸을 버린다면 동서를 막론하고 공을 따르게 되어 동서간에 화합을 이룰수 있을터인데, 공이 자꾸 의겸을 감싸려하면 정인홍도 그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라며 심의겸을 탄핵할 것을 설득한다. 이발의 말에 걱정이 피어난 이이는 결국 이발의 의견을 수락했다. 이후 1589년 정여립의 옥사가 터지면서 정철이 지휘하는 국문을 받고는 결국 사망하면서 등장 종료.

[1] 특히 이발의 집안은 이발의 8대조부터 이발에 이르기까지 9대가 꾸준히 과거 급제자를 내어 전국에서 알아주던 명문가였다. 참고로 과거 급제자는 200명에 불과했으니 지금으로 치면 고등고시 합격자를 9대 연속 배출했다고 생각하면 된다.[2] 인사(人事)를 책임지는 요직.[3] 동인 세력을 달래기 위해 이이는 심의겸 하나를 탄핵하는걸로 서인과 동인이 화해한다면 그도 어쩔 수 없다고 이발의 설득 이후 심의겸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다.[4] 심의겸의 형수는 이발의 이었다.[5] 야사에서는 이이의 중재로 둘이 서로 호기롭게 을 마셨는데 원체 술버릇이 개같았던 정철이 술김에 이발의 얼굴에 침을 뱉어 서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고 한다.[6] 조헌의 문집인 중봉집에서는 반대로 이발이 먼저 정철에게 잘못한 것으로 나온다. 술에 취한 이발이 정철의 수염을 뽑아버리자 이에 화가 난 정철이 이발의 얼굴에 침을 뱉어 버렸다고 한다. [7] 이 때문에 선조 수정실록의 기록에 북인의 일원으로 언급된다 https://sillok.history.go.kr/id/knb_12212001_007[8] 전라도 사투리 억양과 약간 섞여서 "증철증철증철..."이라 들리기도 한다. 또는 그냥 "철철철철..."이라 중얼대기도 했다고.[9] 이발은 후에 남인의 거두가 되는 윤선도의 고모부이기도 해서 이발의 고문사는 윤선도로 하여금 정철과 서인에 대한 증오를 불태우게 했다.[10] 심지어 조선총독부에서 노인동맹단 체포 뒤, 오직 70살부터는 곧 죽을 나이니까 더 독립운동을 못 할거라는 이유로 전체 단원 중 이승교와 70대 단원까지 두명만 구속을 시키지 않고 기소유예로 풀어주게 하였다. 이후 석방된 이승교가 "왜놈들은 왜 나를 동지들의 배신자로 만드느냐"며 칼로 자살기도를 하다가 주변에서 빨리 막아서 경상으로 끝났다고 알려진다. [11] 강우규 열사 역시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사건 후 현장에 있었어도 안 잡혔는데, 그 이유는 66세였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경찰이 현장의 모든 사람들 중 가능성 있는 젊은 사람들만 조사한다고 해서, 강우규가 66세라고 말하자 일본 경찰이 그냥 풀어줬다. 읭? 잡힌 건 추가수사를 한 나중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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