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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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洪汝諄
(1547년~1609년)

조선의 인물. 자는 사신(士信). 홍은의 아들.


2. 생애[편집]


남양(현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출신으로 1567년에 생원을 지내다가 1568년에 증광 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하고 황해도 도사를 지냈으며, 1575년에 성절사 질정관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1580년에 관직에 해임되었다가 의정부의 홍문록에서 선발되었으며, 1583년에 창평 현령이 되었고 1589년에 왕명의 경중을 제멋대로 정하거나 남을 모함한다고 해서 사헌부로부터 탄핵당하였다.

대사간을 지내다가 1590년에 전라도 순찰사, 가의대부, 1591년에 대사간,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고 1592년에 임진왜란 때 병조 판서에 임명되어 왜군의 공격을 받아 북쪽으로 피난 가면서 선조를 호송하는 역할을 했으며, 그 와중에 호조 판서가 되었고 평양에서 백성들에게 맞아 뼈가 부러지기도 했다. 우참찬, 지중추부사 등을 차례로 지내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순천부로 유배되었으며, 1595년에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고 1596년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자 함경도 관찰사가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었다.

사헌부에서 여러 차례 파직할 것을 요청했지만 선조를 이를 거절하고 홍여순은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1], 1598년에 지의금부사, 형조 판서, 한성부 판윤을 지냈고 임진왜란이 끝나자 남이공, 김신국 등과 함께 류성룡을 몰아내 정권을 잡았다. 1599년에 사헌부 대사헌을 지내다가 간악한 성품을 가졌다고 해서 수많은 탄핵을 당했으며, 대사헌에 임명된 일로 남이공과 대립해 북인에서 갈라져 대북파를 형성했다.

이이첨과 함께 소북파와 함께 대립하다가 1600년에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가 박탈되었으며, 1602년에 관작이 회복되고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603년에 형조 판서, 지중추부사, 1605년에 동지중추부사, 호조 판서, 지중추부사, 1606년에 좌참찬, 1607년에 우참찬, 동지, 형조 판서 등을 지냈다.

광해군 때도 성품을 문제로 여러 차례 탄핵당했으며, 1608년에 파직당하고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이원익으로부터 이 사람을 쓰다가는 국가에 큰 화가 미치겠다는 평을 받았다.


3. 대중매체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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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의 행적들만 놓고 봤을 때 파직은 물론 멀리 유배를 보내야 정상인데, 선조가 저렇게 감싼 이유는 정빈 홍씨가 그의 조카였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