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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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
鄭汝立


파일:정여립.png

출생
1546년(명종 원년)
조선 전라도 전주부
사망
1589년(선조 22년) 10월 17일 (향년 43세)
조선 전라도 진안군 죽도
본관
동래 정씨[1]

인백(仁伯)

죽도(竹島)[2]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이력
2.2. 율곡을 배신하였는가?
2.3. 송익필 환천 사건
2.4. 대동계의 조직
2.5. 정여립의 난?
3. 사상
4. 죽음에 대한 의혹
5. 후일담 - 남인/북인의 분열
6. 기타
7. 대중매체에서
8. 같이보기



1. 개요[편집]


조선시대문신 겸, 체제 비판적 사상가이자 공화주의자.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이력[편집]


본관은 동래이고 전주에서 태어났다. 오늘날 전라북도 전주시의 도로명 중에도 정여립로가 있고 완주군 상관면에 정여립 생가터가 있다. 태어난 곳은 전주인데 생가터의 지명이 완주군 상관면인 이유는 과거 전주시와 완주군은 원래 같은 전주군이었다가 일제강점기 때 도농 분리 정책으로 인해 도시 지역인 전주부와 농촌 지역인 완주군으로 행정 구역이 분리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태어난 곳을 <연려실기술>에는 전주성 남문 밖이라고 하고 <조선왕조실록>에는 전주성 동문 밖이라고 하였다. 태생 설화에서는 고려 중반 무신정변을 일으킨 주역 중 하나인 정중부태몽에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는데 1570년(선조 3년) 과거에 급제하여 1584년 수찬의 벼슬에 이르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여립이 어린 시절부터 흉포하고 잔인한 인물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린 시절 새를 잡아다가 찢어 죽인 것을 여종이 정여립의 아버지에게 알렸고 이후 아버지에게 혼난 정여립이 앙심을 품고 여종이 자는 틈을 타 배를 갈라 죽인 다음 다음날 "이 아이가 나의 잘못을 일러바쳤기에 내가 죽였다."고 태연하게 말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방약무인한 성격은 성인이 된 후에도 그대로여서 어전에서도 눈을 부릅뜨고 왕을 노려보았다는 야사도 있다. 당연하지만 왕이 '고개를 들라'거나 '내 얼굴을 보라'는 말이 있기 전까지는 납작 엎드린 채 고개를 들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이런 미친 짓을 했다면 카더라식 야사가 돌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에 정여립의 목이 날아간 자초지종이 쓰여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은 반체제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정여립의 이미지를 훼손하기 위해 꾸며냈을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인조 대에 조선 전기의 야사들을 모아서 편찬된 <대동야승>에서는 “정여립은 넓게 보고 잘 기억했으며 논의가 격렬하여 마치 거센 바람이 부는 듯했다.”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당대 지식인들 사이에서 총명하고 박학다식했다는 평가 역시 전해진다.

한마디로 정여립을 부정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잔인한 살인자, 무례한 반역자라는 프레임을 씌운 확률이 높다는 것.

2.2. 율곡을 배신하였는가?[편집]


원래 자신의 입지 확보를 위해 율곡 이이와 성혼의 문하로 들어갔기 때문에 서인에 속해 있었지만 이이가 죽은 후 동인으로 전향하여 이이는 물론 서인의 영수인 성혼, 박순 등을 비판했다. 이는 당대 사람들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문제였는데 군사부일체라는 말이 통용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이가 모친 신사임당의 죽음에 충격 받아 잠시 불가에 몸을 담은 적이 있는데 정여립이 이 사실을 발설하는 바람에 유학자 이이의 이미지를 엄청 깎아먹었다. 결국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정여립이 서인에서 동인으로 전향했다거나 스승 이이의 이미지를 깎아먹었다는 등의 얘기는 사실 서인 측에서 주장한 것뿐이다. 율곡 이이 자신부터가 양시양비(兩是兩非)를 주장하며 서인과 동인 어느 측에도 속하는 걸 극도로 꺼렸다. 이이가 학문이 높지만 한때 승려 생활에 몸 담은 전력 때문에 출사를 못했으므로 불가에 몸 담았다는 건 비밀도 아니었다.

여론 기관인 삼사의 관리를 추천하고 자신의 후임을 지명할 수 있어서 권한이 막강한 이조전랑[3] 자리를 두고서 왕의 외척인 심의겸과 심충겸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이를 반대하는 김효원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서인과 동인이 갈라지니 이것이 동서 붕당의 시발점이다.

한편 이이, 성혼, 박순 등은 붕당을 꺼리던 대표적인 인물들로 후일에도 붕당을 최소화하려 노력하지만 서인으로 분류되고 정여립은 동인의 입장에 서게 되니 심의겸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비판한다. 심의겸과 김효원 이전에는 서인과 동인 당색 자체가 없었는데 훗날 소급 적용하여 이이의 제자이니 서인이고 서인에서 동인으로 옮겼다는 말 자체가 모순이다.

박순, 허엽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같은 스승에게 배워도 서인과 동인으로 당색이 달라지니 당색이 학문적 성향을 따라가는 것도 아니었다. 이이가 스스로 서인이라고 한 적이 없었으나 선조 시대에 관료 생활을 시작한 이황조식의 제자들이 이전에 진출한 기성 사림들을 변절자들이라는 식으로 깎아내리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이이와 성혼은 조정하고자 하였으나 편협한 젊은 사림들은 이들이 자신들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다고해서 서인이라고 낙인찍고 비난하매 이에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이 대체로 서인의 학통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정여립은 이러한 분위기를 보았음에도 스승을 모욕한 자들과 어울리면서 앞장서서 이와 같이 주장하였으니 비난받아 마땅한 인물이었다.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원인은 간단하지 않다. 왕의 외척을 편들면 왕을 위하는 것 같지만 역사적으로 외척의 발호는 왕권의 약화를 불러왔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외척의 발호를 막으려는 동인은 서인과는 대척점에 서있는 것이다.

동인 입장에서 서인은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를 파기한 세력이고 서인은 왕의 정통성을 이유로 임금의 자격을 인정할 수 없다. 훗날 예송논쟁의 기저에 깔린 정서가 이와 다를 바가 없다. 서인 측이 정여립을 스승에게 대들었다지만 동인 측이 볼 때 서인은 임금에게 대드는 것이다. 붕당 당시 상황을 단지 노쇠한 기득권 세력과 버릇없는 신진 세력과의 세력 다툼으로 볼 수만은 없다.


2.3. 송익필 환천 사건[편집]


당시 한 사건이 일어나는데 동인에 의해 서인의 모주(謀主)로 지목되던 송익필의 조모가 노비임이 들춰지며 송익필 일가 70여 명이 노비로 환천(還賤)되는 일이 발생한다. 동인은 서인 송익필의 부친 송사련이 좌의정 안당과 그 아들들을 고변하여 멸문시키고 재산과 노비들을 가로챈 행적을 들어 서인을 도리에 어긋난다고 비난하였다.

안당의 부친 안돈후와 노비인 첩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송사련의 모친이고 송익필의 조모가 된다. 송사련은 신분이 천했지만 안당의 배려 덕에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었는데, 안당의 집안을 멸문시키고 재산과 노비들을 빼앗은 건 동인에서 볼 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설에는 서인의 책략가로 통하던 송익필이 노비로 환천된 자신의 일가를 다시 살려내기 위해 이 일을 들춰낸 동인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정여립 사건을 기획했다는 설도 있다. 송익필과 자주 어울리던 친구들 중에 가장 뜻이 맞는 사람이 정철이었고 정여립 사건으로 가장 피해를 입은 가문이 동인의 영수 이발인데 이발은 송익필 집안이 노비로 환천되도록 주도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엄밀히는 송익필은 노비가 아니라 조모가 얼자 출신이다. 양인과 천민이 혼인하여 자식을 낳으면 낮은 신분인 천민이 되는 법이기는 하지만 양반과 노비 출신 첩 사이에 낳은 자식을 노비로 한다는 말은 들어보도 못한 말이다. 송익필의 아버지는 하급 관리였는데 조선 시대에 노비가 하급 관리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동인은 조사 결과 양친이 모두 노비라는 명목으로 송익필과 일가를 모조리 환천시켜 버렸다. 대다수의 일가는 일단 도망갔으나 당연히 추쇄가 시작되었으며, 송익필은 결국 자수하여 장례원에서 노비로 확정이 된다. 그러나 안당의 가노로 떨어진 건 아니라서 유배와 석방을 반복하며 전국을 떠돌았고 후일 인조때 서인이 정권을 잡자 복권되었다.[4]


2.4. 대동계의 조직[편집]


인망이 높았던 정여립에게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고 정여립은 전라도 진안의 죽도(竹島)에 서실을 차린다. 이곳의 이름 때문에 바다 위에 있는 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나 진안의 금강 상류에서 구량천과의 합류 지점에 위치한 섬 모양의 지형이다. 하중도까지는 아니고 금강과 구량천이 아슬아슬하게 잘록목을 이룬 호리병 모양이다. 네이버 지도

정여립은 죽도에서 활쏘기 모임을 하는 등으로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大同契)'(유학의 이상사회가 '대동(大同)')를 만들었다. 대동계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한 모임이었고 이는 정여립의 성향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다. 뛰어난 학식과 통솔력, 활 솜씨를 겸비한 정여립을 추종하는 동인의 무리가 많았다.

특히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그의 명망이 높았다. 후일 정여립의 난 당시 연루되어 죽거나 귀양간 선비호남에는 1,000명, 영남에도 수백 명이 있었다고 할 정도였다. 실제로 이 옥사를 기점으로 하여 영호남, 특히 호남 출신의 과거 급제자 수는 크게 줄어든다.

물론 호남 사림이 완전히 가 마른 것은 아니었다. 주로 피해를 입은 호남 사림은 전주 일대의 동인 계열 사림들이었고 무엇보다 옥사를 확대시킨 세력 중에는 서인 계열 호남 사림도 있었다. 훗날 선조가 "과인이 간악한 정철에게 속아 호남의 어진 선비들이 고초를 겪었다"며 화해의 손짓을 내밀기도 하였으니, 호남이 정치 아니면 먹고 살 길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후에도 광산 김씨처럼 정치적으로 노론에 속한 가문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옥사를 기점으로 호남 민심이 정치에 환멸을 느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1587년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 1528 ~ 1594)[5]의 요청으로 정여립은 대동계원들을 이끌고 손죽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격파했다. 이를 볼 때 대동계는 관군에 버금가는 무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남언경은 이 때 정여립의 손을 빌렸다는 이유로 한패로 몰려 모반 사건 이후 탄핵당한다. 그럼에도 그는 정여립이 무고하다고 생전에 항변했다.


2.5. 정여립의 난?[편집]


1589년 10월 2일 황해도 관찰사 한준 등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정여립이 한강이 얼 때를 기다려 한양으로 진격해 모반을 꾀한다는 고변을 하였다. 이에 선조는 의금부 도사를 보내 정여립을 체포하도록 지시했고 정여립은 아들 정옥남과 함께 죽도로 도망쳤다가 관군이 포위하자 자살했다는 것이 역사의 기록이다.

그러나 정여립 모반 사건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것들 투성이다. 먼저 정여립이 도망친 곳이 죽도인데 정여립은 이미 죽도에서 대동계를 이끌고 있었고 이는 조정을 비롯한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죽도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그런데도 죽도로 도망쳐서 관군에게 포위되어 자결했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정여립이 대동계를 이끌고 있던 곳은 전라도 진안인데 황해도 관찰사인 한준이 상소를 올렸다는 점, 당시 조선에서는 모반 사건에 대해 암행어사나 승지 등을 파견해 해당 사건을 면밀히 조사한 후 한양으로 압송해 국문을 통해 역모 여부를 판단하는 등 엄밀한 조사 과정을 거쳤는데 아무런 조사 과정도 거치지 않고 군대가 먼저 갔다는 점도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다만 당시 기록들을 보면 처음에는 무고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고변한 사람들까지 체포해서 조사하려고 금부도사를 파견했는데, 금구에서 일하는 저리가 정여립 집 여자 노비의 남편이었고, 그가 정여립에게 정보를 흘린 탓에 정여립 일당이 미리 도주한 것이었다.

정여립이 과연 모반을 꾀했는가 하는 것도 의문이다. 물론 그의 대동계가 무력을 갖춘 것은 사실이지만 불과 2년 전에 관에서 왜구를 토벌하는데 동참해 달라고 의뢰할 정도라면 이미 관아에서도 용인한 집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지방 관청의 시선과 중앙 정부의 시선은 다를 수도 있다.

정여립의 행동은 모반을 꾀한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이상한데 만약 정여립이 진정 모반을 꾀했다면 자신의 계원들을 이끌고 싸워보기라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의문들로 인해 정여립의 난은 조작된 모반 사건이라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동인에서는 정여립이 죽도에서 대동계원들과 잔치를 벌이다가 관군의 기습을 받아 죽었다고 기록된 문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건 사실과 다른데, 실제로는 도주하다가 관군의 추격을 더 이상 뿌리칠 수 없는 상황에 몰린 정여립이 같이 도주하던 동료들을 죽이고 자신도 칼에 목을 박아서 자살한 것이었다. 이때 전부 다 죽은 건 아니었는데, 정여립의 아들은 살아있었고, 관군에게 체포되었을 때, 처음에는 다른 사람인 척 하다가 들통나고 말았다.

이런 조작설은 어디까지나 정황이 앞뒤가 안 맞아서 제기되는 가설일 뿐, 확실한 증거도 없고, 근거로 제시된 것들 또한 어느정도는 신빙성이 부족한 것들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애초에 이 조작설을 처음 제기한 건 당시 기축옥사로 큰 피해를 본 동인 측인데, 잘 보면 이들의 주장은 자신들의 당파적 입장과 서인에 대한 적대감이 상당히 반영된 주장이다. 객관성도 부족하고, 증거와 근거로 제시된 설들 또한 교차검증해보면 사실과 다른 점들이 많았다.

현대에는 서인 배후설이 아닌, 선조 배후설을 제기하며 선조가 조작의 배후일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이는 당시 상황이 너무 커진 동인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던 선조에게 유리했다는 점을 근거로 하고 있다. 하지만 선조가 조작의 배후라기보다는 그냥 주어진 상황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악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정여립의 형 정여복과 정여립의 사위인 김경일이 정여립의 행동을 수상하게 생각했고 정여립과 친하게 지내던 승려인 도잠과 설청 등은 정여립이 반역을 한다고 생각해 도망치기도 했으며 이발의 동생인 이길이 정여립과 만난 후에 이발에게 정여립이 역모를 했다고 편지를 쓰기도 한걸 보면 정여립의 행동이 수상쩍기는 했던 모양이다.

정여립의 난에 대한 해석과 판단이 어려운 이유는, 해당 사건에 대한 기록들 중에 사실과 다른 내용을 기록하거나, 저술가의 주관적 관점이 강하게 반영되어서 서로 모순되고 충돌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임진왜란의 영향도 있는데, 전란으로 상당히 많은 사초가 소실되었고 ,이중에는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에 대한 공식 기록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중에 기록을 다시 복원할 때, 당시 사정에 잘 아는 사람을 찾아서 그 사람의 기억에 의존해야 했기도 했다. 이후 선조 수정 실록 또한 작성자의 당파적 입장이 어느 정도는 반영되어서 해당 사건에 대해 기술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 사건에 대한 해석과 판단은 다양한 사료에 대한 철저한 교차검증을 통해 어디까지가 실제 사실과 부합한지, 어떤 사람의 어떤 입장과 관점이 반영된 정보인지, 조심스럽게 고려하면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


3. 사상[편집]


정여립은 시대를 앞선 주장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천하공물론(天下公物論), 즉 "천하는 공물(公物)이니 어찌 주인이 따로 있으리요"이라는 말을 했다는 사실이 훗날 부각되어 반체제적인 인사로 낙인찍혔다.

이 말 앞에는 "사마광이 쓴 <자치통감>에는 위나라가 정통임을 주장하는데 주자는 이를 부정하니 참 신기한 일이다."라는 말이 붙어있다-). 그의 천하공물론은 라틴어에서 '공화국'을 가리키는 용어 "res publica"와 그 의미가 일치한다. 'res publica'는 직역하면 공공의 것, 공중의 것이라는 의미이다. 말 그대로 국가는 공공의 것이라는 의미. 그는 "누구든 임금으로 모시고 섬길 수 있다"라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주장하기도 했다. 왕의 혈통이 아니더라도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선진적인 사상인 것.

신분제에 대한 비판은 만적 등 이전부터 있었고 정여립이 직접 만든 것이 아닌 과거의 사상을 가져온 것에 가깝기는 하지만 이렇게 보면 정여립은 한반도에서 기록상으로 드러나는 최초의 공화주의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신채호는 그를 많이 띄웠다.

종종 전북 지역 신문이나 책에서 올리버 크롬웰보다 60년 앞섰다며 세계 최초의 공화주의자라고 띄워주는 걸 볼 수 있다. 이는 종종 지방에서 볼 수 있는 지역 출신 인물의 지나친 띄워주기인데 이미 15세기에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있었고 고대 아테네나 로마도 공화정을 했었다. 올리버 크롬웰은 영국 공화주의의 대표로 여겨지는 인물이지 서양 최초의 공화주의자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공화주의의 역사를 생각해보면, 세계 최초의 공화주의자란 선전은 반박이 많이 나올 수 밖에 없다.

4. 죽음에 대한 의혹[편집]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의문이 많다. <선조수정실록>을 포함하여 대체적으로 그가 자결한 이후 시신이 한양으로 이송되어 육시를 당하였다고 나온다. 그러나 영조 시기에 작성된 <봉사말록>이나 남하정이 쓴 동인 계열 당론서인 <동소만록>에서는 죽도로 놀러간 정여립을 진안 현감 등이 꾀어내 살해하고 이후 자결한 것으로 꾸며 상소를 올렸다고 전한다.

그러나 당시 상황으로 보면 정여립이 자살한 것은 맞는 걸로 보이는데 정여립이 자결할 때 그 자리에 있던 정여립의 아들 정옥남과 박춘룡은 정여립의 죽음이 자살로 위장되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들을 심문했던 사람은 정여립과 9촌 관계로 정여립과 가까운 사이라고 유배되었던 정언신이다.

이후 선조가 친국하는 자리에서도 정여립이 타살당했다고 주장하지 않았으며 정옥남과 박춘룡은 잡혀온 후 한참 동안을 감옥에서 심문 받고 권정례 후 처형되었는데 만약 서인이 정여립을 죽인 후 자살로 위장한 게 사실이라면 서인들이 그 때까지 정옥남과 박춘룡을 살려둘 이유가 없다.


5. 후일담 - 남인/북인의 분열[편집]


실상 정여립의 난은 서인이 동인의 씨를 말리려 한 구실이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이 때 가장 앞장서서 동인을 몰아내려 했던 인물이 서인의 정철이었지만 뒤에서 조종한 것은 사실상 선조였다는 평가가 대다수. 하지만 임금을 미워할 수는 없으니 결국 타깃은 정철이 되었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정철이 선조의 비위를 상하게 하고 만다. 이에 대해서 정철이 선조의 총애를 받던 인빈 김씨의 아들 신성군 대신 광해군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으나 정철이 투옥된 이유는 건저(建儲) 문제(왕세자 책봉을 건의하는 문제)의 총대를 매었기 때문이었다. 동인과 함께 건의하려다가 동인 측이 빠지는 바람에 결과적으로는 혼자 제기한 셈이 되어버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건저문제 당시 조정 상황은 정철이 당할 수밖에 없는 구도였다. 선조가 신성군을 마음에 두고서 건저를 의논하고자 삼 정승을 불렀는데 당시 영의정이 이산해, 좌의정이 정철, 우의정이 류성룡이었다. 정철 정도면 거기서 "신성군이 가한 줄로 아뢰오."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 자리에서 꿋꿋이 광해군을 지지한 그도 책임이 없지는 않다.

그래도 정철은 류성룡 덕분에 약 사발 안 먹고 살아남을 수는 있었는데 이산해는 당장 갈아버리자고 했다. 정철의 대표적인 작품사미인곡이 유배 문학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 시기에 쓰인 작품은 아니다. 세자 건저 문제로 귀양간 것은 1591년 2월이고 관동별곡과 사미인곡은 1585년과 1589년 사이에 쓰여진 작품이다.

현재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는 정여립 모반 사건동인남인북인으로 갈라진 하나의 계기로 설명하고 있다.

상술하듯 정철이 세자 건저라는 트롤링을 벌여 서인을 말아먹을 시점에 동인은 이것을 서인을 몰아낼 구실로 삼았다. 이 때 정철 축출에 적극적으로 행동했던 사람(이자 동시에 옥사에서 타격을 많이 받은 쪽)들을 북인, 소극적으로 행동했던 사람(이자 동시에 옥사에서 거의 타격을 입지 않은 쪽)들을 남인으로 본다.

6. 기타[편집]



  • 정여립의 태생 설화에서는 태몽에서 정중부가 여러번 나왔다는 기록이 <연려실기술>에 존재하나 이는 정여립을 폄하하기 위하여 날조된 설화일 가능성이 높다.

  • 정여립은 말발이 매우 뛰어났다고 하는데 그가 입을 열면 사람들이 탄복할 정도였다고 했고 거기에 여립이 틀린말을 해도 그와 대적할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7. 대중매체에서[편집]


  • 1991년 KBS 드라마 <왕도>에서는 배우 유동근이 연기했다. 홍국영 가문의 주요한 비밀인 '대동계' 명단을 보관한 사람으로 나온다. 나레이션으로 정여립 모반 사건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대사 1마디 없이 폼을 잡다가 칼에 맞아 죽는걸로 퇴장한다.

  • 2004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배우 안내상이 연기했다. 류성룡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다가 류성룡과 언쟁을 벌인 이후에 사라진다. 이후 대동계를 조직해 그들을 이끌고 왜구와 싸우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지만 역사대로 점차 조정에 의해 역도로 몰리기 시작한다. 그 상황에서 정여립은 자신의 사상이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점에 절망하고 자신이 시대를 잘못 탔다는 한탄을 한 이후 시점이 조정으로 바뀌어 정여립이 자결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사실상 퇴장한다.

  • 2009년 KBS 드라마 <전설의 고향> 죽도의 한에서는 배우 김갑수가 연기했다. 애초에 역모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묘사하며 자살설 대신 살해설을 택하여 토벌군 총사 윤흥국의 칼에 찔려 폭포 아래로 떨어진 것으로 나온다.

  • 2010년 개봉한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는 배우 임재윤이 연기했다. 중립적인 포지션으로 등장하지만 지나치게 완고한 태도를 보여 왕을 비롯한 동서인 양측에 비난을 받았고 오프닝 씬이 끝나자마자 목이 잘리고 시체는 갈기갈기 찢어진다.

  • 2014년 KBS 드라마 <왕의 얼굴>에서는 배우 최철호가 연기했다. 드라마 초반에 하차하지만 정여립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계속해서 활동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 2015년 KBS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초반부에 대사 1마디 없이 기축옥사를 묘사하기 위해 등장한 것에 그쳤다. 대동계의 사람들을 단련시키는 장면과 이후 모반으로 오인받자 칼 위에 엎드려 자결한 채 정여립을 잡으러 온 왕의 선전관이 발견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 웹툰 <포천>에서는 정사의 기록을 따라 잔혹하고 음험한 인물로 그려진다. 같은 작가의 웹툰 <오성X한음>에도 등장하는데 이이이항복을 총애하는걸 질투해 일을 벌이며 이런 행적이나 훗날의 대동계 조직과 모반이 모두 선조의 의도대로 놀아난 것으로 나온다.

  • 이두호 화백의 만화 <파문>에서는 주인공인 임차손이 축적한 거대한 부를 바탕으로 동쪽(=일본?)과 결탁한 거대한 조직의 수장으로 묘사된다. 작중에서 이순신이 그 실체가 지어낸게 아니냐는 질문에 사실 더한게 있다는 말로 처리. 다만 연재 중단으로 이후 행보는 미지수.

  • 슈타인호프의 대체역사소설 <명군이 되어보세!> 2부에 등장한다. 1부에서 연산군에 빙의한 주인공 덕분에 역사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뀐 영향인지 국왕을 보위하는 비밀 경찰 '금위사'의 수장이 되어 있다. '대동계'도 정여립이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조직한 정보 조직의 이름으로 나온다. 일반적인 평가를 반영한 듯 유능하지만 냉혹한 성격으로 묘사되며 주인공이 빙의한 국왕의 개혁에 반대하는 정철 등 서인을 '정철의 난'이라는 역모로 몰아 서인 세력 1만 명을 부여주(작중 조선령 북만주)로 강제 이주형을 받게 만드나 잔혹한 고문을 일삼은데다 개인적인 원한으로 무고한 사람까지 역모로 몬 것이 발각되어 본인도 삭탈관직되고 유배를 가게 된다. 하지만 귀양지에서 절치부심해서 야인들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워 복권되고 해외 정보를 전담하는 비밀 기관 '익문사' 수장에 임명된다.

  • 마늘맛스낵 작가의 대체역사소설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로 이 세계관에서 공산주의의 시초이기 때문. 물론 정여립은 작중 고려보단 떨어져도, 보다 괜찮은 세상을 만들어보기 위해서 이상향인 고려 다음가는 나라를 만들어보겠다는 뜻으로 만들었으나, 정작 후대의 공산주의자들은 정여립의 이상과 달리 그냥 미치광이들이자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악마들로 변해버렸다.


8. 같이보기[편집]


[1] 다큐 역사스페셜에 의하면 동래 정씨 족보에서 제명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편찬한 족보에는 정여립의 이름이 그대로 실려 있다.파일:정여립족보.jpg[2] 혹자는 정여립의 호와 사망지가 일치하는 것을 두고 우연의 일치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조선시대에 호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 터를 잡고 사는 지역이나 마을 이름, 자신과 인연이 깊은 지명을 호로 삼는 것이 관례였기에 벌어진 일이다. 대표적으로 퇴계 이황의 경우도,자신이 벼슬을 물러난 후 터를 잡은 낙동강 상류의 '토계마을(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의 지명에, 자신의 평상시 지론인 '물러날 퇴'를 더하여 '퇴계(退溪)'라는 호를 지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여립 역시 자신이 가장 아끼는 곳이자 대동계의 탄생지가 된 지명인 진안군 죽도(竹島, 이름은 죽도지만 실제로는 섬이 아닌, 물길이 빙 둘러서 돌아가는 호리병 모양의 산이다)를,자신의 호로 삼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 셈이다. [3] 정5품 정랑과 정6품 좌랑[4] 인조반정의 주요 공신들이 송익필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결정적으로 김장생이 송익필의 제자로 송익필의 면천 및 사후 복권에 특히 애를 썼다.[5]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여립의 난 파트에서 엑스트라 1 같은 인물처럼 나오는데 사실은 거물이다. 서경덕의 제자로 이황과도 토론할 정도로 학문이 높았다. 조선 최초의 양명학자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며 정제두의 스승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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