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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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강우규 의사.jpg

출생
1855년[1] 7월 14일[2]
평안도 덕천군 무릉방 제남리[3]
(現 평안남도 덕천시 제남동)
사망
1920년 11월 29일 (향년 65세)
경기도 경성부 서대문형무소
(現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본관
금천 강씨 (衿川 姜氏)[4]
이명
강영일()

찬구()

왈우()
직업
한의사 → 독립운동가
가족
아버지 강재장
장남 강중건[5], 차남 강건형[6]
손녀 강영재
종교
유교 (성리학) → 개신교 (장로회)
서훈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단두대상에 홀로 서니 춘풍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사이토 총독 암살 미수 사건
2.3. 최후
3. 기타
4. 대중매체에서
5. 관련 자료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이자 한의사. 본관은 진주(晉州), 호는 왈우(曰愚).[7] 1919년, 당대 기준으로 상당한 고령에도 불구하고 조선총독부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던져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끝내 미수에 그쳤으며 사형이 선고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2. 생애[편집]



2.1. 초기[편집]


1855년 7월 14일(음력 6월 1일) 평안도 덕천군 무릉방 제남리(현 평안남도 덕천시 제남동)의 빈농가에서 아버지 강재장(姜齋長)의 4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친누나 집에서 성장하였고, 친형에게 한학과 한의학을 익혀 생활의 방편으로 삼았지만, 전통적 학문으로는 개항 이후 점증하는 사회의 근대화 요구를 실현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점차 개화 사상으로 기울어졌고, 개신교 장로회에도 입교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집안 어른들과의 갈등도 생겨 1883년 함경도 홍원현(현 함경남도 홍원군)으로 이주하였으며, 홍원현 읍내 남문 앞 중심지에서 한약방을 경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이를 기반으로 읍내에 사립학교교회를 세워 신학문을 전파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계몽운동을 전개한다.[8] 이후 홍원군 용원사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1910년 8월 강우규는 경술국치로 인해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결심했고, 1911년 봄 홍원군 용원면을 떠나 청나라 길림성 화룡현 두도구(頭道溝)[9]망명하였고 이후 길림성과 동부 시베리아, 연해주, 흑룡강성 일대를 방랑하면서 박은식, 이동휘, 계봉우 등 애국지사들과 만나 독립운동 방도를 모색하여 갔다. 1917년 우수리강 대안의 길림성 의란도(依蘭道) 요하현(饒河縣)[10]으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북만주에 위치한 이 곳은 남만주와 연해주를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였다. 강우규는 이 곳에 한인 동포들을 불러모아 새로운 마을을 만들어 신흥동(新興洞)이라고 명명하였다.[11] 을 많이 모은 강우규는 사립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세워 청소년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려 노력하였고, 군자금 조달에 주력하기 위해 박은식이 조직한 '노인동맹단'에 가입한다.

2.2. 사이토 총독 암살 미수 사건[편집]


1919년 조선에서 전국적인 3.1 운동이 일어나자 강우규 역시 독립에 대한 희망을 갖고 그해 4월 신흥동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그러나 세계 열강으로부터 민족의 독립을 승인받지 못하고 1919년 5월을 넘기며 점차 소강 상태에 빠져들자, 이에 위기감을 느끼고 5월 말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으로 갔다. 그곳에서 제2대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총독 관직을 사임하고 귀국했는데, 새로 누군가 후임 조선 총독으로 임명되어 온다는 것을 들어 알게 되었다.

그는 하세가와 요시미치 총독이 4년여간 조선에 있으면서 조선의 사정에 정통해 내선일체를 표방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통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3.1 운동을 통해 도저히 조선을 통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조선의 독립을 허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이 상황을 골칫거리로 여겨 모면하기 위해 단연 사직하고 조선을 떠나려고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새로운 조선 총독이 재차 부임한다는 것은 실로 세계의 대세인 민족자결주의에 반하고 하늘의 뜻을 멀리하고 사람된 도리를 무시하는 행위이며,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혀 2천만 조선 동포를 궁지에 빠뜨리려 하는 원흉이므로 스스로를 희생해 새로 임명될 제3대 조선 총독을 처단해 조선인의 열성을 널리 알려 국내외의 동정을 받아 궁극적으로 조선 독립의 승인을 얻고자 결심했다.

그는 그로부터 몇 달 전 동부 시베리아 우수리 철도선 웨리노(靑龍:청룡)역 부근에서 한 러시아 군인으로부터 주철로 만든 영국식 예화(曳火) 수류탄에 대한 사용법을 듣고 미리 1개를 구입해둔 바 있었다. 위와 같은 결심을 한 뒤 당시 거주하던 신흥동으로 되돌아와 수류탄을 휴대하고 이를 사용해 신임 조선 총독을 처단하기로 계획했고,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수류탄을 천 조각 중앙에 싸서 꿰맨 뒤 그 양 끝을 허리끈으로 결속해 바지 내부 사타구니기저귀를 차듯이 매달아 숨긴 뒤 6월 11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기선 에치고마루(越後丸)를 타고 14일 함경남도 원산부에 내렸다.

당시 일본은 입출국하는 사람들을 검문했지만, 강우규는 65세인 노인이었고 검문에 걸리기 전에 사타구니가 붓는 '산증(疝症)'을 앓고 있다고 적당히 둘러대어 검문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도착한 당일 원산부 본정5정목 42번지 원일여관에 투숙했고, 이튿날인 15일 원산부 광석동(현 강원도 원산시 광석동)의 거리에서 일찍이 시베리아에서부터 서로 알던 최자남(崔子南)과 만나 원산부 상동 183번지에 있던 그의 집에서 잠시 머물렀다. 이때 가져온 수류탄은 최자남의 집 서까래 천장 안쪽에 숨겨 두었고, 그 사이 신문을 통해 신임 조선 총독이 누구이며 언제 조선으로 오는지를 알아보려 했다.

그 뒤 7월 17일 최자남이 덕원군 북성면 황석리(현 강원도 문천시 황석동) 1번지에 신축 가옥으로 이사하자 강우규 또한 이쪽으로 옮겨 갔고, 그날 저녁 사랑방에 누웠다가 한밤중에 최자남을 흔들어 깨워 자신이 독립운동을 위해 조선으로 돌아왔고, 필요에 의해 수류탄 1개를 가져왔으며 이 수류탄의 위력은 6연발 권총 24자루에 해당하고 사람들이 밀집한 장소에 투척하면 100여 명을 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수류탄의 사용방법을 말해준 뒤 수류탄을 꺼내 최자남에게 수류탄을 숨겨달라고 부탁했다. 최자남은 이를 승낙하고 수류탄을 받아 곧바로 자택 건넌방 취사장에 튀어나온 벽장 위에 숨겨두었다.

강우규는 일전에 원산부에서 최자남으로부터 소개 받은 허형(許炯)과 함께 8월 4일 원산부를 출발해 도중에 안변군 문산면 사기리 석왕사 부근 영월여관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인 5일 경기도 경성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허형의 소개로 경성부 안국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96번지에 있던 김종호(金鍾頀)의 집에 기거하며 형세를 살폈는데,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이미 지난 7월 5일 경성부를 출발해 도쿄로 가서 8월 초 사표를 제출했고, 후임 조선 총독은 일본 해군 대장 사이토 마코토라는 신문 보도가 전해지는 것을 보고 신임 조선 총독의 부임을 기다리며 예정된 계획을 실행하고자 8월 17~18일에 원산부로 돌아갔다.

원산부에 도착한 그는 최자남으로부터 일전에 맡겨 둔 수류탄 1개를 받고 다시 경성부 김종호의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때 예정대로 8월 12일부로 신임 조선 총독 임명이 발표되어 머지 않아 부임한다는 보도와 함께 신문지에 등사된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사진을 눈여겨 본 뒤 그 사진을 오려 가지고 다니면서 사이토 총독의 얼굴을 익혔다. 그리고 20일 다시 원산부로 가서 최자남의 소개로 원산부 신촌동 51번지에 있던 한흥근(韓興根)의 집에서 한흥근이 일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밀수해온 폭탄 2개 중 1개를 강우규 자신에게 줄 것을 요청했고, 승낙을 얻어낸 뒤 경성부로 돌아갔다.

경성부로 돌아간 뒤 신문을 통해 마침내 신임 조선 총독이 그해 9월 2일 경성부에 부임한다는 내용의 기사를 봤고, 기존에 묵고 있던 안국동 김종호의 집은 남대문정거장과 멀리 떨어져 있어[12] 걸어 다니기에 적잖이 불편할 것이라 생각한 결과, 8월 28일 남대문 정거장과 가까운 남대문통5정목(현 중구 남대문로5가) 60번지[13] 박영선(朴泳銑)이 경영하던 여인숙으로 옮겨 숙박했다. 그리고 매일같이 남대문정거장[14] 앞으로 나가 부근을 산책하며 정거장 출입구 주변의 지형지물을 면밀히 답사하며 폭탄을 투척할 위치를 탐색하는 등 주도면밀히 거사를 준비했다.

8월 31일 아침 안국동 79번지 윤희식(尹喜植)의 집에 기거하던 허형을 찾아가 허형으로부터 최자남이 강우규 앞으로 '아들 도착', 즉 왔다는 의미로 보낸 암호 전보가 도착했음을 들었다. 이에 허형을 길가로 불러내 원산부로 가서 최자남을 만나 한흥근에게서 폭탄 1개를 받아 올 것을 부탁했고, 허형은 이를 승낙해 강우규로부터 여비 및 편지를 받아 그날 당일 원산부로 가서 최자남과 만나 찾아온 뜻을 말했다. 그러나 한흥근은 이미 그 전날인 8월 30일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다는 말을 들었고, 어쩔 수 없이 다음날인 9월 1일 박영선의 여인숙 부근에 있던 중국 음식점에서 강우규와 만나 이 사실을 알렸다. 이때 강우규는 허형에게 자신이 항상 다른 사람에게 사용할 폭탄 1개를 갖고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했다.

거사 당일인 9월 2일, 오전에 강우규는 미리 바지 위 전면에 명주로 짠 수건의 가운데 한 끝을 꿰매어 수류탄을 가운데에 싼 뒤, 되접고 반대로 꺾어 자신의 허리 부분 후방에 돌려 단단히 묶고 나서 상의에 흰 모시 두루마기를 걸치고 손을 넣으면 바로 폭탄을 꺼낼 수 있도록 나름대로 장치를 해 두었으며, 검은 띠의 페도라를 쓰고 가죽으로 만든 조선 신발을 신고 손에 양산 및 서양식 수건을 들고 숙소를 나왔다.

남대문중국 음식점에서 식사를 마친 그는 남대문정거장 앞에 이르자 신임 조선 총독에게 폭탄을 던져 암살에 성공할 경우, 그 자리에서 자신이 지은 자작시 한 수를 큰소리로 읽고 기뻐하며 손뼉을 치며 덩실덩실 춤을 추고 조용히 체포될 것을 결의하고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날 오후 4시부터 조선 총독을 환영하기 위해 다수의 차마(車馬)가 남대문정거장 부근으로 와서 모이는 것을 보고 총독이 경성부에 도착한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고, 마침 정거장 귀빈실 출입구에서 총독이 탄 마차를 발견하고 폭탄을 투척하기 좋은 곳을 물색해 귀빈실 동북쪽 울타리에서 가까운 어느 다방 출입구 앞에서 군중 속에 섞여 시기를 노렸다.

그리고 오후 5시가 지나자 남대문정거장에서 조선 총독 일행이 마침 기차에서 내려 귀빈실을 거쳐 전방 출입구로 나왔고, 사이토 마코토가 자신의 부인과 비서관 이토 타케히코(伊藤武彦) 등이 마차에 오르자, 강우규는 즉시 갖고 있던 신문지면상 총독의 사진과 동일인물임을 확신하고 미리 폭탄을 꺼내 오른손에 쥐고 서양 수건을 쥔 왼손으로 이를 숨겨 폭탄을 던질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곧 왼손으로 안전핀을 뽑고 약 12m 거리에서 사이토 총독이 오른 마차 위로 그의 흉부를 겨냥해 수류탄을 던졌다.

폭탄은 마부 앞 약 7보 떨어진 장소에 떨어져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파편이 사방에 튀어 흩어졌다. 여러 개의 파편은 사이토 총독이 탄 마차에 충돌했고, 그중 한 개의 파편이 마차의 후방을 관통했으나 사이토 총독의 허리 부분 검대(劍帶)를 손상하는 것에 그쳤으며 주변에 있던 일본인 취재 기자 2명을 포함한 3명(오사카 아사히 신문 경성 특파원 타치바나 코키츠(橘香橘),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경성 특파원 야마구치 이사오(山口諫男), 경성부 본정경찰서장 고무다 쥬타로(小牟田十太郞)이 사망하고, 정무총감인 미즈노 렌타로, 뉴욕시장의 딸이었던 해리슨 부인, 만주 철도 이사장인 쿠보, 호위 군경, 조선총독부 관리 등 37명에 중경상을 입혔다. 정작 사이토 마코토는 그가 입고 있던 두꺼운 일본 해군복의 혁대 덕분에[15] 파편 몇 조각이 혁대에 박혔을 뿐, 부상을 입지 않았다.[16] 일본 경찰들은 강우규를 체포했다가 '설마 노인이…'라는 생각에 풀어줬다고 한다. 혼비백산하는 군중들 사이로 빠져나온 강우규는 안국동의 김종호, 사직동의 임승화, 가회동의 장익규 집으로 옮겨다니면서 다시금 의거를 계획하지만, 9월 17일 목격자가 나타나는 바람에 장익규의 집에서 친일 경찰 김태석에 의해 체포된다.


2.3. 최후[편집]



파일:강우규(수감중).png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당시 촬영된 사진.
1920년 2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폭발물 취체벌칙 위반 혐의로 사형선고받은 이후 자신의 폭탄에 휩쓸린 취재 기자들에 대해 "폭탄의 위력을 몰랐다"[17]고 항변한 그는, 곁에 있던 아들 강중근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그는 원심 판결에 대해 공소하여 4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위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 중 자신에 관한 부분이 취소되었으나 사형 판결은 그대로 유지되었고, 마지막으로 상고했으나 그해 5월 27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위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면서 결국 사형선고가 유지되었다.

결국 1920년 11월 29일, 강우규는 65세를 일기로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순국한다. 강우규는 사형 집행 당시 "감상이 어떠하냐"는 일제 검사의 물음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긴다.

단두대 위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겠는가(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


3. 기타[편집]


  • 광복 이후 남한에 정착한 가족으로 장남 강중근, 손녀 강영재가 생존해 있었으나 1985년 12월 강영재가 후사없이 세상을 떠남에 따라 현재 남아있는 후손은 없다.

파일:statue.png

  • 2011년 9월 구(舊) 서울역 광장에 강우규 의사 동상이 건립되었다. 이 때문에 강우규 의사가 구 서울역사를 배경으로 의거를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지만, 실제로 강우규 의사의 의거 당시인 1919년 구 서울역사는 건평 15평 수준의 조악한 목재 가건물이었고, 구 서울역사는 의거 이후인 1922년 착공되어 1925년 준공된 건물이다. 이외에도 그가 독립운동 활동을 했던 것을 기리기 위해 활동지였던 서울역 인근의 서울역버스환승센터(02-007) 정류소 명칭을 '서울역버스환승센터.강우규 의거 터'로 병기한다.참고

4. 대중매체에서[편집]


  • 박경리의 소설 <토지> 2부에서는 의료 활동을 했던 행적을 따라서 '강 의원'이라고 등장하며 토사곽란에 시달리는 주갑이를 치료해주고 주갑이는 강우규를 따라서 만주의 독립운동에 참가하게 되는데 작중 유일한 실존 인물이다.
  • 나카지마 아쓰시의 단편 <순사가 있는 풍경>의 주인공 조교영이 체포하려는 사람이 강우규이다. 다만 소설은 직접적으로 강우규를 다루지 않고 순사로서의 자신과, 조선인으로서의 자신, 그리고 비참한 식민지의 풍경 속에서 고뇌하는 조교영 개인의 묘사에 집중한다. 이를 통해 1920~1926년의 청소년기를 조선에서 보낸 나카지마 아쓰시에게도 강우규 의거가 소설의 배경이 되었다는 것은 당시 조선 식민지 내부에서 꽤나 충격을 준 사건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5. 관련 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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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족 및 문중 기록, 진주강씨소감공파(少監公派)세보 등에는 1859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2] 음력 6월 1일.1920년 2월 25일 판결문에는 6월 1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진주 강씨 인헌공파 집성촌이다.[4] 진주 강씨 인헌공파라고도 한다. 조상인 강감찬이 탄생한 낙성대가 금천(시흥)에 속했기에, 강감찬의 후손만을 금천 강씨라고도 한다.[5] 姜重建. 이명은 강건하(姜鍵夏).[6] 姜鍵衡.[7] 간혹 일우(日愚)라고 표기되어 있는 곳도 있으나, 왈우가 맞다. 날 일()과 가로 왈()이 비슷하게 생겨 혼동이 일어나는 듯 하다.[8] 이는 "우리 집에서도 몇 차례 이동휘 선생을 모셨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다는 손녀의 기억에도 드러나듯이, 당시 관서관북 지방민들의 존경을 받던 이동휘의 영향이 컸다.[9]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화룡시 터우다오진(頭道鎭).[10]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솽야산시 라오허현(饒河縣).[11]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은 이 곳에서 한민족을 새롭게 발흥시키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12] 지금 기준으로도 3.5km 정도의 거리로 걸어서 1시간 가량 걸린다.[13] 현재는 사라진 지번이나, 서울 지하철 1호선 서울역 3번 출구 곁에 63-1~10번지가 남아 있는 것으로 봐선 60번지도 이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4] 현재의 서울역. 서울역의 이름은 경부선 철도가 개통될 때인 1900년 남대문역으로 출발하여 1923년 경성역이 되었다가, 1947년 서울역으로 변경되어 지금에 이른다.[15] 당시 일본 해군복의 혁대는 다른 군복과 달리 두꺼운 편이라, 웬만한 물체도 뚫기 어려웠다.[16] 훗날 사이토 마코토는 조선총독 재임 후 1932년 일본 총리 자리에 오르지만, 1936년 2.26 사건으로 파시스트 청년 장교들에게 살해되고 만다.[17] 강우규는 저격에 사용한 수류탄러시아인에게 구입했는데, "안전핀을 뽑고 목표로 삼은 사람에게 던지라"는 주의사항을 듣고 "그 안에서 뾰족한 것이 튀어나와 내가 죽이려는 사람 하나만 맞히는 줄 알았다"고 심문에서 진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