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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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의정

중종 ~ 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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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의정
윤원형
尹元衡

출생
1503년(연산군 9)
경기도#역사 파주목
사망
1565년 12월 20일[1] (향년 61 ~ 62세)
(음력 명종 20년 11월 18일)
황해도 강음현
(현 황해북도 금천군)
재임기간
제69대 영의정
1563년 2월 19일[2] - 1565년 9월 19일[3]
(음력 명종 18년 1월 17일 - 명종 20년 8월 15일)
봉호
서원부원군(瑞原府院君)1565년(명종 20) 삭탈
본관
파평 윤씨

언평(彦平)
부모
부친 - 파산부원군(坡山府院君) 윤지임(尹之任, 1475 ~ 1534)[4]
모친 - 전성부부인(全城府夫人) 전의 이씨(1475 ~ 1511)
형제자매
형 - 윤원개(尹元凱)
윤원량(尹元亮, 1495 ~ 1569)
윤원필(尹元弼, 1496 ~ 1547)
윤원로
큰누나 - 윤씨
작은누나 - 문정왕후[5]
부인
정실 - 연안 김씨 김안수(金安遂)의 딸[6]
측실 - 초계 정씨 정난정(? ~ 1565)
자녀
장남 - 윤설(尹紲) 정난정 소생
차남 - 윤효원(尹孝源) 정난정 소생
3남 - 윤충원(尹忠源) 정난정 소생
4남 - 윤담연(尹覃淵) 정난정 소생
장녀 - 이조민(李肇敏)의 처 정난정 소생
차녀 - 이귀남(李貴南)의 처 정난정 소생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대중매체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조선 중기의 권신. 문정왕후남동생이자 정난정남편이다.


2. 생애[편집]


연산군 9년인 1503년에 태어났다.[7] 명문인 파평 윤씨 집안 사람으로 중종 28년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갔다. 이후 권신 김안로에게 찍혀 내쳐졌다가 김안로가 숙청된 이후 복직해 외척으로서 세를 불려 나갔다. 그는 실제로 정략에 뛰어났는데 권신인 김안로가 자신을 문정왕후와 엮어서 숙청하려 하자 먼저 선수를 쳐 김안로를 몰락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을 나라를 위해 쓰지 않고 자신의 권력과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썼다. 이후 세자 이호를 밀어주는 윤임 일파와 문정왕후가 낳은 경원대군을 밀어주는 소윤의 정쟁에서 당연히 명종 쪽에 줄을 섰다. 이후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파직되었다가 8개월만에 인종이 붕어하면서 복직하여 소윤의 영수로서 세를 키웠고 형인 윤원로를 능가하는 권력을 누렸다. 이러한 권력 차지는 물론 누나인 문정왕후가 든든한 뒷배경 역할을 해줘서 가능했던 것이다. 이후 윤원형은 을사사화를 일으켜 대윤의 영수였던 윤임을 비롯한 대윤 일파(사림 세력 포함)를 모함하여 역모죄로 제거했다.

윤원형의 형인 윤원로는 한때 소윤에서 윤원형 급의 세력을 가지고 있던 소윤의 맹장으로 그의 저돌적인 성미 때문에 대윤과 다른 대신들은 그를 매우 경계하고 있었다. 어린 명종이 즉위하기가 무섭게 강직한 대신이었던 류관 등의 주도로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무슨 짓거리를 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대신들이 문정왕후를 압박하여 유배를 보내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는 자충수가 되어 이기, 정순붕 등의 지원 사격에 힘입어 류관, 류인숙, 윤임 등은 사사되고 그의 아들들은 교형에 처해졌으며 이에 휘말린 종친 계림군 등도 죽었다. 유배가 풀려 돌아온 윤원로는 각종 위험한 발언과 행동을 일삼았는데 "문정왕후는 늙었으니 이제 곧 내 세상이다.", "내가 하는 말이 곧 대비전의 말이다.", "난 한명회와 같아서 날 따르지 않으면 모두 죽일 것이다.", "인종은 우매하여 어서 죽어야 한다." 따위인데[8] 하나같이 폭탄 발언들이다. 특히 문정왕후의 위엄을 저해하는 발언까지 한 바람에 윤원형의 싸바싸바가 먹혀들었고 문정왕후는 윤원로를 유배시킨 다음에 몇 년 후에 사사해버린다. 이에 원한을 품은 그의 아들 윤백원이 떠오르던 권신 이량에게 빌붙어서 복수를 하고자 했으나 탐욕만 많은 이량에게 실망한 명종이 이량을 숙청해버리면서 같이 숙청된다.

이후 공신이 되고 20년 권세의 길을 닦았다. 그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는데 당시 뇌물로 받은 쌀이 썩어나[9] 유기 그릇으로 대체하였다고 한다.[10] 이외에도 농장이 많았고 한양에만 자신 소유의 대저택이 10여 채나 되었으며 노비, 곡식 등 모든 것이 완비되어 있었다. 명종 6년에 우의정으로 임명되자 윤원형이 예의상 1차례 거절을 표했는데[11] 이후 영의정부터 3사까지 나서서 "윤원형만한 인물이 없습니다."라며 상소를 올렸고 결국 어쩔 수 없는 척하며 우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보통 왕이 "나 왕 그만두고 세자한테 물려줄래"라고 하면 신하들이 "전하! 아니되옵니다"라며 왕권을 강화하는 이벤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신하로서 이러한 이벤트를 진행할 정도로 권력을 쥐고 전횡을 부렸다.[12] 당시 모든 관료의 임명과 진급, 죄수의 처벌이나 방면 등이 그의 손을 거쳐갔으며 뇌물이 넘쳐흘러 뇌물을 가득 실은 배가 수도인 한양으로 정기적 운항을 할 정도였는데 일반 상선도 아니고 군함을 징발해 파문이 일기도 했다. 바다를 메워 땅을 넓히는 간척 사업을 진행해 땅을 자신의 사유지로 사용했고 국유지도 사유지처럼 사용하는 등 간신의 끝을 보여줬다. 공포 정치로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백성들을 착취하는 등 김안로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자신을 조금 화나게 했다는 이유로 자기 첩의 자식인 두리손이라는 아들을 살해하고 시체를 강물에 던져 버렸으며 집을 찾아온 배다른 동생의 부인을 강간하고 소문이 날까 두려워 그녀를 절에 강제로 보내어 여승이 되었다는 설이 돌기도 했다. 덩달아 그의 노비들도 기고만장해져 대낮에 민가를 약탈하고 부녀자를 강간했다.[13]

이런 권세는 명종 친정 이후로도 계속되었으나, 1565년 문정왕후가 병으로 사망후 정난정에게 밀려나 죽은 본처 연안 김씨의 계모 강씨가 고발한 덕에 그동안의 본인의 횡포들이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급속도로 몰락했다. 야사에서는 그동안 눈치를 보던 명종이 그래도 외숙부라고 차마 사형에 처하지는 못해 귀양을 보냈고 귀양지에서 물거품이 된 권세를 그리워하면서 살다가 부인 정난정과 함께 독약을 마시고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실제로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는 그에 대한 탄핵 요구가 빗발쳤는데 명종 20년 8월 3일 홍문관 부제학 김귀영의 소를 시작으로 8월 27일까지 매일 홍문관과 양사에서 귀양보내라고 난리를 쳤고 8월 9일과 8월 15일에는 좌상 심통원, 8월 11일에는 예문관, 8월 14일에는 대사간 박순과 대사헌 이탁, 8월 16일에는 춘흥부 당상 윤개, 8월 16일에는 좌찬성 홍섬과 육조 당상, 8월 17일에는 대호군 정현, 8월 19일에는 독서당 관원 김계휘[14] 등이 릴레이로 요구했다. 단순 귀양 요구에서 중벌 요구에 죄상을 적은 소까지 올라왔지만 명종은 이를 거부하다가 8월 15일 영의정에서 내쫓고 새로 이준경을 영의정에 삼았으며 8월 21일 윤원형을 파직했지만 요구는 그치지 않았고 새 영의정 이준경, 영평 부원군 윤개, 승문원 판교 박승임, 이천군 이수례 등이 벌을 청했고 나중에는 아예 이준경이 백관을 이끌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9월 8일 윤원형의 전 장모인 강씨가 딸인 전처 김씨의 억울한 죽음의 범인으로 정난정을 고발하면서 타겟이 정난정으로 바뀌었고 대부분의 윤원형 처벌 요구가 정난정 처벌 요구로 공격 타겟을 바꾸었지만 왕은 계속 침묵하면서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와중에 11월 13일 정난정은 남의 손에 죽느니 자기 손에 죽겠다고 독을 먹고 자결하면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고 귀가하여 그 사실을 안 윤원형은 식음을 전폐하고 울기만 하다 닷새 후에 정난정 뒤를 따라 자결하면서 탄핵 소동은 일단락되었다.

일설에는 자결을 한 것이 아니라 맺힐대로 맺힌 백성들에게 정난정과 길거리에서 맞아 죽었는데 파평 윤씨 종친회에서 조상들의 명예를 위해 이를 덮고 자결했다는 소문을 유포했다는 설도 있지만 <명종실록>을 쓴 사람들은 윤원형을 싫어했던 사림들인지라[15] 죽음을 좋게 포장해줄 이유도 없고 설사 윤원형의 죽음을 곱게 포장해주자는 여론이 있을 정도로 칭송받는 사람이었다쳐도 <조선왕조실록>의 특성상 관련 내용이 없을리가 없다.

윤원형이 강음(江陰)에서 죽었다. 처음 윤원형은 물론을 입어 재상에서 파면되었는데도 며칠을 지체하며 머물러 있다가 동문 교외로 나갔다. 많은 사람들의 분노가 그치지 않고 공론이 더욱 격렬함을 듣고 끝내 면하기 어려움을 알았으나, 또 가산이 흩어질 것을 염려해 어둠을 틈타 부인의 행색처럼 밤에 교자를 타고 도성에 들어와 집으로 돌아왔었다. 이어 그의 첩 정난정과 더불어 강음 전사(田舍)에 가서 거처하였는데, 정난정의 죽음을 보고 드디어 분울해 하다가 또한 죽었다.

윤원형이 사림들을 풀베듯 죽이며 흉악한 짓을 있는 대로 다했는데, 오래도록 천벌을 면하더니 금일에 이르러 마침내 핍박으로 죽으니, 조야가 모두 쾌하게 여겼다. 윤원형이 일단 패하고 나니 원수졌던 집에서 떼를 지어 빼앗겼던 재물에 대한 송사를 다투어 일으켰다. 조정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알고 바로 각도에 이문(移文)하여 관원을 차출해 재물들을 본주인에게 돌려주게 하니 그 집안에서도 온갖 고통을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임금은 위사(衛社)의 공이 있다 하여 3등의 장례를 하사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전대의 권간으로 그 죄악이 하늘까지 닿기로는 윤원형 같은 자가 드물 것이다. 중종 말년, 인종이 동궁에 있을 때 사자(嗣子)가 없음을 보고, 그의 형 윤원로(尹元老)와 더불어 서로 어울려 헛소문을 만들어 동궁의 마음을 동요시켰으며 문정왕후가 안에서 그 의논을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대윤(大尹)이니 소윤(小尹)이니 하는 말이 있게 되어 중종이 이 걱정으로 승하하였다. 혹자는 동궁이 실화한 것이 모두가 윤원형 등의 행위라고 하였다. 그 뜻이 또한 흉참하다 하겠다. 인종이 승하함에 미쳐, 윤임(尹任)을 핍박해 내쫓고는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지 못하다가 끝내는 윤임이 다른 마음을 가졌다 하였으니, 실은 윤원형 등이 빚어낸 말이었다. 이 이후로 사림들 가운데 당시 명망이 있던 사람들을 일체 배척해 모두 역적의 무리로 몰아, 죽는 자가 계속되었다. 명종이 친정을 하게 되었지만 문정왕후의 제재를 받아 자유롭지 못했는데, 윤원형은 무슨 일이고 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문정왕후와 내통하여 명종을 위협하고 제재하여 임금의 우분(憂憤)이 언사와 안색에까지 나타나게 하였다. 내수(內竪) 중 혹 이를 아는 자가 있으면 윤원형은 궁인들에게 후히 베풀어 모두에게 환심을 얻었다. 때문에 임금의 일동 일정을 모르는 것이 없었다 하루는 상이 내수에게 ‘외친이 대죄가 있으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라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윤원형을 지칭한 것이었다. 이 말이 마침내 누설되어 문정왕후에게 알려졌는데 문정왕후가 이를 크게 꾸짖어 ‘나와 윤원형이 아니었다면 상에게 어떻게 오늘이 있었겠소.’ 하니, 상이 감히 할말이 없었다. 모든 군국(軍國)의 정사가 대부분 윤원형에게서 나와 상은 내심 그를 미워하여 이양(李樑)을 신임해 그 권한을 분산시켰다. 정사를 잡은 지 20년, 그의 권세는 임금을 기울게 하였고 중외가 몰려가니 뇌물이 문에 가득해 국고보다 더 많았다. 윤원로의 권세가 자기와 비슷해짐을 저어해, 윤춘년(尹春年)을 사주해서 그 죄목을 열거해 글을 올리게 해서 죽게 하였고, 천첩을 몹시 사랑해 정처를 버리더니 필경에는 그를 독살하는 변을 빚었으며 이어 첩으로 부인을 삼았다. 첩에게서 낳은 자식들을 모두 사대부가에 혼인시켰으며 자신이 죽은 뒤에라도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을까 두려워 첩의 자식도 벼슬을 허락해야 한다는 주장을 힘써 내세워, 이를 미봉하였다. 당시의 재집(宰執)들이 휩쓸려 그를 따랐지만 오직 임권(任權)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따르지 않았다. 기타 흉악한 죄들은 머리털을 뽑아 헤아린다 해도 다 셀 수가 없다. 비록 견출(譴黜)이 가해졌으나 체형(體刑)을 면했으니, 세상 인심의 분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

- 《조선왕조실록》 윤원형 졸기 기사에 대한 사관의 논평.


파일:윤원형묘.jpg
살아 생전에는 임금 위에 군림한 척신이었지만 죽은 후에는 초라하게 묻혔다. 묘는 현 경기도 파주시 당하동 산4-20번지 선산 근처에 안장되었다.

이렇게 간신짓을 한 윤원형도 순종 때 복권되는데 윤원형의 복권을 건의한 인물은 다름아닌 이완용. 사실 1907년 한일신협약을 기점으로 1910년 경술국치까지 모종의 이유로 역적 취급받던 인물들을 이완용의 주도로 추증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이 자체는 딱히 매국노 짓은 아니고 어차피 나라도 망해가니 죽은 사람 신원이나 해주자는 의도에 가깝다. 윤원형 이외에도 정인홍, 이징옥, 윤휴 등이 모두 이 시기에 복권되었으며 조선후기 실학의 대명사인 박지원정약용 역시 이 시기에 추존되어 시호를 받았다. 그런데 그 때까지 윤원형의 묘는 자손들만 알고 있었고 몰래 제사를 지내며 거의 잊혀 있었는데 이완용의 뻘짓으로 윤원형 자손들이 묘비를 세울 명분을 주었다. 지금은 윤원형과 정난정의 묘비가 초라하지만 세워져 있고 자손들이 제사를 지낸다. 현재까지도 윤원형의 자손들과 윤임의 자손들은 왕래도 없고 문중 행사에서 만날 일이 있어도 서로 개무시하고 지나간다고 한다.


3. 기타[편집]


  • 물론 윤원형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선조 대의 동서 대분열의 궁극적 원흉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선조 대에 동서 대분열의 주역인 김효원심의겸이 갈등을 빚게 된 기원이 심의겸이 우연히 윤원형 집 앞을 지나다가 김효원이 그 집 대문에서 나오는걸 보고 빡쳐서 시작된 것이었다. 심의겸은 "윤원형 같은 소인배 집에서 식객으로 밥을 먹는 김효원도 소인배"라고 규정하여 훗날 김효원이 이조전랑이 되자 소인배라고 맹비난해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져 버린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심의겸이 서류 결재를 위해 윤원형의 집을 방문했었고 그 때 그 집을 드나드는 식객들에게 쓸 무수한 이부자리를 보았다. 심의겸은 한심해하며 그 이부자리가 누구의 것인지를 하나하나 물었는데 그 중 김효원의 이름이 나왔고 벼슬자리 얻자고 권력자 집에 드나드는 한심한 선비로 여겼던 것이다. 당시 김효원은 아직 벼슬이 없었지만 재야에서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심의겸은 이를 기억해두었다가 나중에 김효원이 과거 급제하고 신고식을 할 때 대놓고 "저 인간은 윤원형이네 집에서 빌어먹던 식객이네"하고 대놓고 디스를 걸었고 때문에 김효원은 장원 급제를 하고도 몇 년간 한직을 떠돌아야 했다. 문제는 김효원 역시 이를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심의겸을 끊임없이 공격했다는 것이다. 진실은 김효원과 윤원형의 사위가 절친이어서 그 집에 밤늦게까지 과거 시험 공부를 하러 간 것이었고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안 심의겸도 후회하면서 서로 화해하고 우정을 나눴지만 동서 붕당은 이미 두 사람의 불화 수준을 떠나 있었다.

  • 윤원형이 임진왜란의 진정한 전범이라는 낭설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연산군의 폭정과 중종의 대옥사, 무능한 정치로 인해 관리들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백성을 수탈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피폐하게 만드는 등 기강이 쇠하던 시절이었다. 사실 저때 살았던 왕과 신하들이 모든걸 말아먹지 않고 전쟁 발발 자체는 막을 수 없어도 국력을 갖추어 고려시대거란 전쟁처럼 초반에 격퇴시킬 수 있었을 것이며 전쟁이 장기전이 되고 전국을 휩쓸지는 않았을 것이다.

  • 한국형 미라로 잘 알려진 파평 윤씨 산모 미라와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그 여성의 할아버지가 윤원형의 형 윤원량으로 각각 조카 손녀-종조부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윤원량은 소윤계였지만 동생들인 윤원로, 윤원형과 다르게 권력을 탐하지도 않았고 성격도 둥글둥글하여 남을 해코지한 기록은 없다. 사소한 일로 탄핵당한 기록이 있기는 했는데 <중종실록>에 따르면 권모술수가 뛰어난 동생과 달리 어리석고 용렬하였다 한다. 윤원형이 권력에 쫓겨나자 동생을 위로 하려고 집에 방문했는데 만나주지 않았다. 그의 딸은 인종의 후궁이었고 여동생인 문정왕후와 척을 지지 않았다. 명종도 외숙으로 친하게 지냈고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죽은 뒤에도 편하게 천수를 누렸다. 한마디로 간신이었던 동생 윤원형, 그런 그에 무모하게 맞서려던 윤원로와 달리 그럭저럭 잘 살다 간 셈.

  • 상당한 애처가였다고 하는데 정난정을 부인으로 놓고 보면 애처가겠지만 정난정은 정실 부인이 되기 전에는 이었고[16] 이전 정실 부인은 따로 있었다. 정실 부인을 대상으로 본다면 애처가라는 개드립은 절대 나올 수 없다. 정실 부인 김씨는 윤원형에게 학대당하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는데 야사소설에서는 식혜에 독을 타 죽였다고 하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김씨를 며칠 굶긴 다음에 독이 든 음식을 한 상 잘 차려주어 독살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후 김씨의 친모가 이 일로 상소해 고발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게 정실 부인 김씨는 윤원형의 정적이었던 김안로의 5촌 조카였으므로 김안로는 윤원형의 처당숙.[17]윤원로의 아들(이름은 윤백원)이 김안로의 손녀(김안로의 장남 연성위 김희와 중종의 딸 효혜공주 사이에서 태어남)와 결혼했으므로 사돈 관계도 된다. <여인천하>에서도 김안로의 친척인 본처 김씨의 위태로운 처지가 잘 고증되었다.[18]

  • <어우야담>에 실려 있는 일화로 윤원형의 병조판서 시절 어떤 무인이 변방의 장수로 임명받고는 감사의 표시로 화살통을 주었는데 그 무인이 가고 난 뒤 윤원형은 "활도 안 쏘는 나한테 왜 이런 걸 주느냐"며 투덜대고는 내용물을 확인하지도 않고 다락에 처박아 두었다.[19] 그 무인이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 "그 화살통을 열어 보셨습니까?" 하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던가?" 하고 되물었더니 "대단한 것이 들어 있사옵니다."(혹은 "열어 보시면 아실 것이옵니다.")고 다시 답하자 윤원형이 화살통을 꺼내 열어 보았더니 그 안에는 정말로 귀한 담비 가죽이 가득 들어 있었다. 윤원형은 크게 기뻐하며 그 무인을 부유한 읍의 수령으로 임명해 주었다.

  • 윤원형이 이조판서일 때 어떤 사람이 누에고치 수백 근을 바치고 능참봉 자리를 달라고 했는데 문제는 폭주하는 뇌물과 업무량을 버틸 수가 없었던 윤원형이 하필이면 그 날 피곤해서 잠이 들었다. 발령장을 쓰려고 기다리다 지친 낭관이 윤원형을 깨우며 "다음 벼슬 자리를 줄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윤원형은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조차 기억도 못 하고 잠결에 그냥 "고치"라고 답했고 이 말을 들은 낭관은 진짜 사람 이름이 '고치'인 줄 알고 명단 마지막에 그대로 '고치'라고 적은 것. 그 뒤 윤원형의 집에 들른 사람의 명부를 뒤져서 그 '고치'를 찾아보고자 했으나 그런 사람이 있을 턱이 없어서 본격적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녀도 도무지 찾지를 못하다가 엉뚱하게도 '고치'(高致)라는 이름의 가난뱅이를 찾아 참봉 자리를 주자 고치 본인은 에서도 생각 못 한 벼슬[20]을 거저 하게 되어 어리둥절했다고 한다. 이에 윤원형은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어떻게 내색할 수 없었다 한다. 덕분에 그 참봉의 별명은 '고치 참봉' 또는 '누에 참봉'이었다고 한다. 이 부분은 전래된 버전에 따라 차이가 많이 있으니 대략적인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윤원형이 누에고치 수백 근을 상납받음 → 낭관에게 발령장을 쓰라고 하면서 '고치'라고 말을 함 → 그 고치를 사람 이름으로 생각한 낭관이 엉뚱하게도 진짜로 '고치'(高致)라는 이름을 가진 가난뱅이에게 벼슬자리를 줌.

  • 뇌물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받았는데[21] 당시 주된 거래 수단이 이었던 만큼 쌀이 너무 많아 썩어버릴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수법이 유기(놋그릇)로 바꿔 축적했는데 왜 하필 유기냐면 조선 초중기 무렵에는 명나라의 금은 조공을 우려해 의 채굴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금과 은의 수요가 늘자 그제서야 채굴한 것. 따라서 윤원형이 의도한 바든 아니든 간에 금과 맞먹는 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던 유기를 축적했으니 재테크의 달인이라는 표현에 걸맞는 것이다.[22]

  • <어우야담>에 실린 일화로 윤원형이 몰락하기 전 어느 날 한강 두모포[23]에서 한 어부가 물고기를 잡다가 고래만한 큰 물고기를 낚아 강가로 끌고 올라왔다.[24] 바닷가에서도 잡히기 어려운 물고기가 그것도 생전 처음 보는 물고기가 한강까지 올라와서 잡혔다는 사실에 경악해서 다들 할 말을 잃고 있는데 누군가[25] 이를 보고 파자점을 치기를 윤원형의 형(衡)을 파자하면 양 쪽에 다닐 행(行)이, 가운데 아래 큰 대(大)가 나오며 나머지 부분은 물고기 어(魚)에서 연화발(火 → 灬)이 빠진 글자가 되는데 지금 크고() 이상한 물고기()가 잡혀 올라온() 상황과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라 이는 곧 윤원형의 운명이 이 물고기와 같게 될 그가 몰락할 징조라 했다. 그로부터 3일이 지나자 과연 문정왕후가 사망하면서 정말로 윤원형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 선조의 친부인 덕흥대원군과 혼사를 맺으려 시도하기도 했다. 순회세자가 사망하고 명종의 직계 후손이 없게 되자 명종과 가장 가까운 관계인 덕흥군의 집안이 자연스레 차기 왕위를 이어갈 후보로 꼽혔다. 그래서 윤원형도 권세를 이어가기 위해 덕흥군 집안과 접촉한 것. 그것도 정난정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을 덕흥군의 아들 중 한 명과 맺어주려 했다. 그러나 곧 문정왕후가 사망하고 윤원형도 몰락하면서 이 혼사는 유야무야 끝났다. 신하들이 윤원형의 죄목들을 끄집어 낼 때 그 중 하나가 바로 덕흥군 가문과의 혼사를 추진했던 일이었다.


4. 대중매체[편집]


  • 윤승운의 <맹꽁이 서당>에서는 같은 본관파평 윤씨로서 나쁜 짓을 다 해서 더욱 싫어서인지[26] 귀양지에서 금부도사가 와서 사약을 내릴까 하여 불안감에 빠져 시름시름 앓다가 지옥에 갔다고 분노에 찬 결말을 보여준 바 있다. 귀양지에 금부도사가 왔다는 소식에 정난정이 먼저 독약을 먹고 자살하고, 윤원형 본인도 결국 정난정의 뒤를 따라가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금부도사는 다른 죄인을 잡으러 가다가 귀양지 근처에 있는 역참에서 을 갈아타러 왔던 것.


  • 1996년 KBS 드라마 조광조에서는 배우 주민준[27]이 연기했다.

  • 1996년 SBS 드라마 임꺽정에서는 배우 박근형이 연기했다. 10화 초반에 인종의 목숨을 뺐기 위해 인형에 저주의 바늘을 꼽는 상황에서 임꺽정에게 발각되어 된통 얻어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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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배우 이덕화[28]가 연기했다. 또 역사와는 달리 원래의 성격은 넉살도 좋고 신분이 자신보다 낮아도 두루 잘 지내고 잘 대해주는 등 나름 호감형이었다. 실제로는 윤원형에게 천대 받던 정부인 김씨도 작중에서는 깊게 사랑하진 않아도 최소한 정실부인 대접을 해 주며 예를 갖추고 존중해주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난정과 누이 문정왕후와 함께 갈수록 점점 흑화+타락하는 것으로 나온다.[29] 참고로 왼쪽의 여성은 윤원형의 첩 정난정을 맡은 배우 강수연이다. 초반에는 문정왕후의 세력과 위상이 약해서 윤임, 김안로, 경빈 박씨 세력의 눈치를 보지만 후반에 김안로가 몰락하면서 소윤의 영수가 된다. 을사사화로 대윤이 몰락하고 정실인 김씨도 정난정이 모살한 후 정난정과 함께 오만 전횡을 일삼다가 역사대로 문정왕후의 사후에 강음으로 피신했다. 그러다가 한양 정세를 알아보러 잠시 내려간 정난정이 백성들에게 뭇매를 맞고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자살한다. 근데 사실 이는 헛소문으로, 이때 정난정은 소문과는 달리 죽지 않은 상태였고, 은사 당추 스님이 구해서 에 머물고 있었지만, 윤원형에게 소식을 전한 하인이 잘못 전한 탓에 와전된 것이었고, 결국 정난정도 마지막 장면에서 바다에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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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왕전하의 비선실세>에서 등장해 시작부터 뇌물을 주는 이들로 집 앞이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로 강력한 권세를 누리고 있다. 임꺽정의 동평관 침입으로 조선 조정이 곤란해지자 일을 일단 책임자들만 벌하고 드레이크와 주인공에게 명예 관직을 내려 은근슬쩍 덮어버리자고 제안한다. 주인공에게 설탕 뇌물을 받고 잉글랜드-조선간 무역 성사에 힘을 보탠다.

  • <고우영 임꺽정>에서는 메인 빌런인 윤원빈 뒤에 숨어 있는 진정한 흑막으로 출연한다. 무예에 뛰어난 조카 윤원빈을 시켜 반대파들을 죽이지만 자신의 가 드러나게 생기자 조카를 내쫓는다.

  • <<근육조선>>에선 김안로의 탄핵으로 조정에서 쫒겨나자 상인이 되었는데, 자신의 이득 때문에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전염병을 퍼트렸다는 사실이 걸려서 거열형에 처해졌다고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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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여흥 민씨 중심 온건 개화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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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왕파
친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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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율리우스력 12월 10일.[2] 율리우스력 2월 9일.[3] 율리우스력 9월 9일.[4] 중종의 국구(國舅)이자 문정왕후의 아버지.[5] 중종의 2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6] 정난정에게 독살 당해 사망.[7] <기년편고> 참조.[8] 심지어 "을사년에 죄받은 것들은 도리어 서용되고 공신들은 죄받아야 한다."라는 말도 했다. 대윤과 소윤과의 대립이 끝나고 소윤이 정권을 잡는 과정상에 을사사화가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 엄청난 발언.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 대사 뒤에 '이런 옳은 말도!'라는 드립을 넣었다.[9] 당시에는 쌀이 기본 화폐였다.[10] 그나마도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한다.[11] 권력을 가졌는데 높은 지위까지 가지면 비난받을게 두려웠다는 해석도 있다.[12] 이런 것이 가능한 다른 경우는 전반적인 명성이 좋은 경우, 그러니까 문정왕후 사후 이황의 경우, 명종이 아무리 불러도 오지 않거나 잠깐 오고 물러갔지만 신하들은 계속 이황을 불러야 한다고 말했고 송시열의 경우에도 송시열이 계속 벼슬을 사양해도 서인들은 계속 송시열을 불러야 한다고 했다. 근데 윤원형은 명성 없이 권력으로 이를 해낸 것이다. 윤원형처럼 명성보다는 권력으로 이를 해낸 비슷한 케이스는 홍국영 정도다.[13] 윤원형이 몰락하자 노비들은 사람들에게 맞아 끔살당하거나 관아로 끌려가 죽을 때까지 곤장을 맞으며 인과응보를 제대로 당했다.[14] 후일 서인의 중추적 위치에 오르는 김장생이 아들이다. 자연스레 그 아들 김집은 손자.[15] 숙적 윤임은 선왕인 인종의 보호자, 윤원형의 대척자라는 이미지 때문에 어떻게 포장이 되었는지 선조 때 바로 사림이 신원해달라고 해서 결국 선조 10년 신원시켜 줬다. 덕분에 윤임의 아들인 윤흥신, 윤흥제는 무과로 관직 생활을 하다 임진왜란 때 다대포에서 전사한다.[16] 본래 첩이었던 정난정이지만 윤원형은 왕에게 이혼을 청해 원래 정실 부인과 이혼하고 정난정과 재혼하여 새 부인이 된 것이다.[17] 웃긴건 김안로가 몰락하는데 자신도 한몫 했다.[18] 김안로는 조선 왕조가 멸망되기 전까지 복권되지 못하고 윤원형만 복권되는 관계로 정실 부인 김씨의 친정 집안(특히 김안로) 관계는 묻혀졌다.[19] 이 일화는 <맹꽁이 서당>에서도 소개되는데 투덜거리는 윤원형에게 맞장구를 치는 하인의 대답이 일품이다. "참 눈치도 없는 자올시다. 돈을 좋아하시는 대감께..."[20] 능참봉이 종 9품의 최말단 벼슬이긴 해도 명백히 품계가 있는데다 아무나 받는 벼슬도 아니다. 대게는 현지에서 명망있는 사람 등에게 주었고 왕의 무덤을 관리한다는 엄청난 상징성이 있기에 왕실하고도 직통라인이 있었다. 그래서 중앙에서는 몰라도 지방에서는 제법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리였다. 어느정도냐면 수령도 품계는 당연히 능참봉보다 높지만 그렇다고 능참봉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왕실 라인이 있기 때문.[21] 그래서 재산도 엄청나 곳곳에 농장이 있고 대저택도 서울에만 10여 채는 되었다고 한다. 그 저택들마다 보물과 음식 등이 완비된건 덤.[22]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재테크의 달인이라며 비판했다.[23] 오늘날의 동호대교 북단.[24] 문정왕후의 병세 때문에 붕어를 잡기 위해 쳐 놓은 그물에 낚였다는 설도 있다.[25] 남사고라는 설이 있다.[26] 작가가 본인 성씨에 자부심이 강한 듯 윤씨 위인에게 인사 올리고 옹야하는 장면도 있고, 반대로 윤씨 성을 가진 이들의 실책에 대해서는 작가가 나와 '내가 쪽팔리네...'라고 한탄하는 장면도 있다.[27] 당시엔 본명 '이영호'로 출연.[28] 이덕화는 특유의 악역 연기가 발군의 솜씨를 자랑하는 배우로, 문정왕후 역의 배우 전인화와 똑같이 남매로 나왔던 1988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인현왕후>에서는 장희재라는 또다른 악역을 연기하였다. 실제 역사와는 달리 작중에서는 문정왕후의 오빠로 나오는데, 이는 당시 배역을 맡은 이덕화가 워낙 나이가 많은 배우여서 부득이하게 오빠 역으로 드라마를 진행한 것이다. 실제로 이덕화는 문정왕후 역을 맡은 배우 전인화보다 나이도 13살이나 더 많고, 또한 젊은 시절부터 얼굴도 상당히 노안이었다. 참고로 문정왕후와 윤원형은 실제로는 선술했듯이 누나와 남동생 사이지만, 반대로 장희재와 희빈 장씨는 실제로도 오빠와 여동생 사이다.[29] 그도 그럴 게 일단 정난정부터가 아예 윤원형 - 문정왕후를 빌어 신분상승+권력을 얻고자 일부로 접근하여 혼인한 여자다. 또한 문정왕후를 견제한답시고 김안로+윤임에게 누명도 자주 쓰고 심하게 고문을 받은 적도 있으니 복수심 때문이라도 눈이 안 돌아갈 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