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안

덤프버전 :



조선 영의정

중종 ~ 광해군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60420, #b82642 20%, #b82642 80%, #960420); min-height: 31px; color: #fff"
[ 펼치기 · 접기 ]


제48대

류순

제49대

박원종

제50대

김수동

제51대

류순정

제52대

성희안

제53대

송질

제54대

류순

제55대

정광필

제56대

김전

제57대

남곤

제58대

정광필

제59대

장순손

제60대

한효원

제61대

김근사

제62대

윤은보



제63대

홍언필

제64대

윤인경



제64대

윤인경

제65대

홍언필

제66대

이기

제67대

심연원


제68대

상진

제69대

윤원형

제70대

이준경



제70대

이준경

제71대

권철

제72대

이탁

제73대

홍섬

제74대

권철

제75대

홍섬

제76대

권철

제77대

홍섬

제78대

박순

제79대

노수신

제80대

류전

제81대

이산해

제82대

류성룡

제83대

최흥원

제84대

류성룡

제85대

이원익

제86대

윤두수

제87대

이원익

제88대

이산해

제89대

이항복

제90대

이덕형

제91대

이항복

제92대

윤승훈

제93대

류영경



제94대

이원익

제95대

이덕형

제96대

이원익

제97대

이덕형




성희안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조선 영의정
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 충정공(忠定公)
성희안
成希顔

출생
1461년(세조 7)
사망
1513년 9월 6일[A] (향년 51 ~ 52세)
(음력 중종 8년 7월 27일)
재임기간
제52대 영의정
1513년 5월 16일[1] - 9월 6일[A]
(음력 중종 8년 4월 2일 - 7월 27일)
봉호
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
시호
충정(忠定)
본관
창녕 성씨

우옹

인재
부모
부친 - 성찬(成瓚)
모친 - 덕천군[2]의 장녀
형제자매
3남 4녀 중 차남
형 - 성희증(成希曾)
남동생 - 성희옹(成希雍)
누이 - 조원윤(趙元倫)의 처
영천 이씨 이제손(李悌孫)의 처
남원 윤씨 윤형(尹衡)의 처
평산 신씨 신수린(申壽麟)의 처
부인
풍양 조씨 - 조익상(趙益祥)의 딸
자녀
1남 2녀
장남 - 성율(成瑮, 1498 ~ ?)
장녀 - 안동 권씨 권영(權詠)의 처
차녀 - 평창 이씨 이희명(李希明)[3]의 처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대중매체



1. 개요[편집]


조선 전기의 문신.


2. 생애[편집]


고조부인 성사달은 고려 때의 인물로 홍건적을 격퇴하고 김용의 난을 제압하는데 공을 세워 공신에 임명되고 창산 부원군에 봉해졌다. 증조부의 이름은 성부, 조부는 성효연, 부친은 성찬이며 모친은 정종의 아들 덕천군의 딸이다. 어머니가 성희안을 낳을 때 꿈 속에서 노인이 지팡이를 내밀며 '이것을 짚어라. 너의 집안에 복록이 흥창하리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1485년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경연에 참여하여 성종의 눈에 들었다. 연산군 때에는 종2품인 이조참판 자리까지 올랐으나 연산군이 신하들에게 시를 써서 바치게 했을 때 풍자적인 내용의 시를 올려 연산군의 분노를 사는 바람에 종9품 부사용으로 좌천당하였다. 이후 성희안은 박원종, 유순정 등과 모의하여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끌어내리고 중종을 즉위시키는데 1등 공신이 됨으로서 박원종, 유순정과 함께 삼대장이라 불리는 실질적인 최고 권력의 자리에 서게 된다. 중종이 즉위한 후 형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의 벼슬을 거쳤으며 박원종과 유순정이 죽은 뒤인 중종 8년 영의정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자리를 오래 지키지 못하고 그해 사망하였다.


3. 평가[편집]


중종실록에 기록된 삼대장 졸기 중 사관의 평가가 가장 후한 것이 성희안의 졸기다. 우선 삼대장 중 유일하게 연산군에게 쓴소리를 하다가 보복을 당한 경험이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점수를 잘 받은 듯하다. 그러나 반정에 성공한 뒤 자잘자잘한 친인척들까지 죄다 공신에 포함시키는 등의 행보를 보여 그 빛이 조금 바랜 감이 있다.

이렇게 성희안은 최고 권력에 오른 뒤에도 아주 깨끗한 삶을 살았던 사람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국왕을 대하는 태도가 불량하고 집과 밥상이 국왕의 것을 능가할 정도였으며 뇌물을 많이 받고 연산군의 창기들 중 마음에 드는 창기들을 골라 첩으로 삼고 따로 별실까지 지어 살게 하는 등 부패한 삶을 살았다고 기록된 박원종, 성격이 우유부단해 과단성이 없었고 매관매직을 일삼았으며 말년에는 여색을 밝혀 독한 약을 먹다가 시력까지 잃었다고 기록된 유순정에 비하면 자기 절제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4. 대중매체[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3 11:26:26에 나무위키 성희안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A] A B 율리우스력 8월 27일.[1] 율리우스력 5월 6일.[2] 정종의 10남.[3] 이희명의 외고조부가 광평대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