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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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학파 · 훈구파 · 사림파 · 동인 · 서인 · 남인 · 북인 · 소론 · 노론 · 개화당 · 수구파 · 정동파 · 위정척사파 · 급진개화파 · 온건개화파)






1. 개요
2. 특징
3. 역사
3.1. 세조 ~ 성종 시기
3.2. 연산군 ~ 중종 시기
3.3. 명종 시기와 몰락
4. 여담
5. 나무위키에 등재된 훈구파 인물
6. 훈구파의 주요 인물
7. 훈구파의 집권 기간
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훈구파()는 조선 세조 공신 세력을 중심으로 형성된 절대적 왕권을 숭상하는 왕당파 관료 집단이다. 정인지, 신숙주, 최항, 권람, 서거정, 양성지, 이석형, 강희맹, 이극돈 등이 있다.


2. 특징[편집]


흔히 관학파와 같은 의미 혹은 관학파의 한 갈래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훈구파 중에서도 관학파 출신이 제법 포함되어 있고 관료 출신들도 다수 있으나 한명회, 홍윤성과 같이 관학파와는 전혀 관련 없는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고[1], 단종 때 관학파의 핵심 세력인 김종서 세력과 사육신 세력은 계유정난 때 대거 숙청당하고 단종 복위 운동 거사가 실패하면서 또 숙청당하거나 몰락하였으며 생육신 세력 역시 세조의 왕위 찬탈에 저항하면서 관직을 포기하고 낙향하였다.[2] 이런 잘못된 인식 때문에 '훈구파가 기반 잘 깔아놨더니 사림이 다 말아먹었다' 는 식의 틀린 인식이 널리 퍼지는 데 밑바탕이 되기도 하였으며, 이는 붕당에 대한 오해로 연결되는 문제이다.

훈구파는 세조를 도와 세조를 반대하는 관학파를 몰아낸 뒷골목 건달들과, 변절한 관학파 세력[3]으로 이루어진 집단으로 보면 된다. 도리어 이들이 들어오는 과정에서 사육신과 같은 많은 관학파들이 갈려나갔으며 이들을 육성하는 데 핵심 역할이던 집현전도 폐지되어 예문관으로 이전되었다. 즉 관학파가 추구한 왕권과 신권의 조화 기반을 사실상 훈구파가 세조가 꿈꾸는 전제 군주제로 바꿔버린 셈이다.[4]


3. 역사[편집]



3.1. 세조 ~ 성종 시기[편집]


훈구파의 정치적 성향은 이들은 절대적 왕권을 숭상한 왕당파였다. 그리고 대부분 관학파 출신의 관료인 덕이고 세조의 탈성리학적 성격으로 계유정난을 도운 자신의 노비들도 등용시켰고 이를 반대하지 않았다. 당시 '실학'이라는 학문으로 명명하지 않았을 뿐이었지 사법 체계, 경제 체제, 과학기술, 군사적 개혁으로의 국내 착호정책[5] 대외 정벌사업으로의 식민지 개념의 확보 등으로의 실학주의 사상을 주류로 여겼다. 법 체계에 대해서 매우 관심이 많아 세조 대에 새로 개정한 법전을 추진, 성종 때에 법전인 경국대전을 지어 법을 세우는 큰 업적을 보인다. 게다가 성종 대에는 성종이 추진하려는 중인계급 폐지와 기존 중인계급들의 양반 편입 정책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등 유연한 사회적 법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외교적 성향에선 관학파들의 대명 외교 방식은 '겉으론 숭상, 안으론 실리 추구'였지만 세조와 훈구 신하들은 민족주의적 정신을 고취하고 있었기 때문에[6] 명나라를 견제하기 위해서 대국의 예는 매우 형식적으로 수행하고 실제로는 대놓고 환구단을 만들어서 제사를 지내거나[7] 군사적 성향에서는 세조의 성향대로 화끈하게 밀고들어가는 성향을 지니게 되었다. 세종 대와 문종 대에 개발한 신 무기 체계와 전략 체계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고구려 시절의 조상들의 영토인 요동 정벌 정책을 다시 추진하자고 하는 등 자주성을 표방하고 홍윤성 등으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간도의 여진족과 왜구들을 토벌하여 안보 안정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8]

내무적 성향에서는 세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의 교육과 문화 사업 정리가 이들의 주도하에 이루어지고, 상공업을 육성해서 시장이 확장되고 농지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해안 간척지가 늘어나는 등의 공이 있다. 하지만 간척지마저도 여기에 들어가는 노동력은 내수사와 이에 딸린 소작농들을 동원해서 나왔고, 이렇게 늘어난 토지는 다시 고리대에 이용되는 등 이들이 부를 축적하는 동시에 민생을 어지럽혔기에 민생은 어려워졌으며, 조정에서 은퇴한 훈구 관료들이 유향소 직원으로 내려오는 등 지방 중소 지주 세력에 대한 압박이 심해졌다.

또한 훈구파와 비교해 사림파가 더 성리학 원리주의적으로, 비현실적이고 이상에 집착한다는 편견이 있었지만 사실 성종 시절이 되면 훈구파도 사회적으로 신분 차별을 공고히 하는 등 보수적인 색이 굉장히 강해지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유교가 사회문화 전면에 등장한 것이 이때로, 열녀문/효자문을 세워 요역과 잡세를 면천시켜주는 정문/복호가 대대적으로 실시된 것도 이 때다[9]. 또한 천민의 면천을 쉽게 해주지 않으려는 분위기도 강했는데, 심지어 기근 중에 곡식을 바치거나[10] 살인사건의 범인을 알리면 성종이 직접 면천시켜주겠다는 것을 노사신이 반대하는 일[11]도 있었다. 그렇다고 면천된 노비들에게 제대로 양인 대우를 해준 것도 아닌 것이, 양인이 되었다 한들 갑사가 되지 못하게 만드는 등(현대로 치면 군 간부에서 자동으로 떨어트리는) 차별을 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며 훈구파에는 크게 두 가지 파벌이 생성된다. 한명회, 신숙주로 대표되는 정난공신파와 이후 이징옥 이시애의 난에서 공을 세운 신공신파로 나뉜다. 정난공신파의 등쌀에 시달린 세조가 단종 사사후에 의도적으로 훈구파들을 길들이기 위해서 신공신파를 지지해준다. 신공신파의 대표 인물이 남이, 박원종이다. 예종 즉위 직후 남이가 역모로 몰려 죽은 것과, 예종 승하 후 예종의 적자 제안대군과 세조의 장손 월산대군이 모두 임금이 되지 못한 대신 성종이 왕이 된 것은 정난공신파의 입지를 재차 다지기 위함이었고[12], 성종도 그 은혜가 있기 때문에 정난공신파를 구태여 건들지 않아 성종기까지는 그럭저럭 연착륙에 성공한다.

또한 훈구파는 계파갈등이 여러차례 있었는데 세조 초반 때 있던 집현전계와 정난계의 갈등도 있었다. 집현전계는 세종 때부터 관료였던 자들이 많았고, 정난계는 세조의 즉위를 도운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예종 때의 구공신파와 신공신파는 물론이거니와, 성종 때도 훈구파 내 계파갈등이 있었는데 5대 공신 세력(정난, 좌익, 적개, 익대, 좌리)과 일부 적개공신과 성종의 총신들이 합쳐서 결성한 왕실 친위세력 간의 갈등이 있었다. 그리고 연산군 때도 연산군과 거리를 둔 부중파와 연산군 친위파인 궁중파가 나뉘어서 대립하는 경향이 있었다.

3.2. 연산군 ~ 중종 시기[편집]


단종과 세조 시기의 혼란기를 틈타 세조의 즉위와 치적들을 도우고 단종 복위 운동과 여러 반란 세력을 진압하며 공신이 된 정난공신파는 공적으로 하사한 토지와 노비, 권력 투쟁으로 제거된 신하들의 재산을 흡수하면서 경제적인 이익을 얻었다. 그리고 세조의 친분을 바탕으로 조선의 국정 운영에 깊게 관여하면서 사회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정난공신파는 대체로 유능하고 현실주의, 실학에 먼저 눈을 뜬 실질주의적 세력이라는 인식이 있으나 세조 시기에 이들이 공신이 된 뒤 후대에는 권신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권력 독주로 인해 왕권까지 견제를 받으면서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성종 등의 이해와 맞물려 사림이 등용되었고, 이들이 충돌한 끝에 사화 등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연산군 시기에 정난공신파는 갑자사화 때 완벽히 몰락하고 중종반정으로 집권 세력이 된 신공신파는 명종 때까지 권력을 누린다.

한편 연산군과 중종 시기는 사화를 비롯한 옥사들이 자주 일어나서 신하들이 죽거나 유배가 되는 일이 발생했고, 그 탓에 정국이 혼란 상으로 빠졌다.[13] 이러한 연산군과 중종 시기의 정치 혼란은 미래에 대한 불안함으로 확산되었고, 집권한 훈구파들은 보신주의에 빠져 이들은 자신의 재산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고리대와 자신들이 소유한 대토지의 이점 등을 활용하여 재산을 확대하였으며, 이로 인해 농민들은 유랑민 신세로 전락했다.

게다가 이들은 왕실 내수사와도 연관되어 폐단이 되었으며 조광조 등 신진 사림 세력이 비판하고 나선 것도 바로 이런 부분이었다. 그래서 세도정치기의 전유물로 알려진 삼정의 문란의 기운은 16세기부터 조선의 문제점으로 자리잡았다. 그 원인은 조선 중기에 국가 막장 테크 빠지게 했던 연산군의 폭정과 정치 판단력이 약해 옥사를 자주 저지른 중종의 실정이 한 몫을 하지만 보신주의에 빠져 재산을 늘리며 민생을 파탄하게 만든 훈구파의 책임도 매우 크다.[14]

중종 시기의 훈구파는 워낙 도를 넘어서 혼란 상에 이용한 재산 불리기에 모자라 자기네 끼리도 서로 간의 정치 투쟁을 벌여 옥사로 피를 봤다. 중종반정으로 집권하며 취약한 정통성을 이들의 비호로 커버하기 위해 힘을 실어줬던 중종 본인조차도 치세 전반에 이후로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사림 세력을 등용해서 등 훈구를 견제하나 훈구파들도 기묘사화로 반대파들을 족족 제거해버린다. 이후에 작서의 변김안로의 전횡까지 겪은 중종은 다시 한번 사림들을 등용하나 때는 늦었고 김안로가 죽은 지 7년이 지난 중종 본인도 사망한다.


3.3. 명종 시기와 몰락[편집]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 수렴청정기에 훈구 세력들은 윤임(대윤)과 윤원형(소윤)으로 나뉘었으며 외척(척신) 세력과 연합하면서 이 과정에서 을사사화가 일어난 것이며 이후에 양재역 벽서 사건이라든지, 이홍윤의 역모 사건으로 대윤에 속했던 훈구 세력들이 제거되거나 유배를 당했으며, 사림들도 역시 떼거지로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를 갔다.

명종이 친정을 시작한 이후로 명종은 이전 연산군, 중종, 문정왕후와 다르게 정치적 사건을 옥사로 잇지 않았으며, 옥사를 통한 정치적 변동보다 안정을 중시하면서 훈구 세력들이 사림 세력들을 제거할 책모를 막았다. 시간이 흐르며 사림 세력들도 명종 친정기에 회복이 되었으며 여기에 혼란기에 은퇴한 관리들과 과거를 통한 관리 출사를 거부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성리학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은퇴한 관리와 관리 출사를 거부한 사람들로 형성된 중종, 명종 시기의 사림파는 성리학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성리학에 대한 이론과 학설을 조선에서 독자적으로 발생시켰다. 여기에 1545년에 세운 백운동서원이 1549년에 사액 서원이 된 것을 바탕으로 서원들이 전국 곳곳에서 세워졌으며, 서원을 바탕으로 사림 세력들을 자신들이 내세운 학설을 바탕으로 제자들을 양성하면서 세력을 키우게 되었다.

반면에 훈구파는 연산군-중종-문정왕후 시기에 정치적 혼란을 막지 않았으며 오히려 혼란 상을 바탕으로 토지와 노비를 비롯한 재산을 확장하면서,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해 조선의 재정과 조세를 흔들었다. 학문적 정당성도 연산군과 중종 시기에 관학이 몰락해서 성리학으로 무장한 사림 세력을 이길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훈구파가 선택한 것은 사림 세력의 조정 진출을 허용하는 것과 자연적으로 소멸하는 길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살아남은 훈구파들은 외척 세력과 사림에 녹아들었고 선조 이후 대부분 서인에 흡수된다. 그리고 훈구파 가문들도 대다수가 서인 가문이 되었다. 그것도 지식층이면서 실질적인 관료 집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걸 대표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가 훈구파 영수였던 김국광의 후손이 대표적인 서인 가문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는 것이다.

훈구파는 훈구를 구성하는 권신들이 세월이 흐르며 연산군과 중종 시기의 혼란으로 권력을 잃고 중앙 정치계에서 밀리거나 늙어서 자연사하는 등으로 와해되었다. 명종 시기에 사림들의 정계 진출로 사림 세력들이 확장하는 와중에 훈구파들이 흡수되는 방식을 통해 소멸한 것으로 보는게 타당하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훈구파고 아들은 사림파라는 식으로 나뉜 경우도 많은 것이기 때문이다.[15]

4. 여담[편집]


  • 훈구파라는 단체의 정의에 애매한 점이 있는데, 사림파는 학연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당파로서의 공통점이 있는 반면 훈구파는 훈구파 내에서도 이들을 하나로 묶을 만한 공통점이 부족하며 이들의 존재는 사림파에 대한 반대축으로서 도입된 개념이 아닌가 하는 의문점도 있다. 당초 훈구란 단어는 오래된 공신이란 뜻인데 이 의미와 관계 없는 인물들도 많다. 심지어 이극돈의 경우 훈구 세력으로서 사림을 적대한 인물조차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자기 직위에 맞는 일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사림파도 정치적으로 사리분별도 못하고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고 이중잣대에 협소적인 집단이였다. 사화가 있을 때 피바람이 일어나서 연산군이나 중종을 말리거나 사림파를 변호하고 죄형을 낮추려고 노력하거나 피해자 수를 줄이려 했던 것도 훈구파 대신들이었다. 사림파는 훈구파 대신들을 꼰대 소인배라고 비난하였지만, 조선 초중반실록을 보면 오히려 사림파가 꼰대에다가 소인배 같은 짓을 한 옹졸한 집단이었다.[16]

  • 하지만 이러한 애매한 것은 사림파도 마찬가지였다. 애초 사림파들도 어찌됐건 같은 사대부들로서 서로 얽히고 얽힌 사이였다. 이항복은 서인으로 분류되고, 이덕형은 동인, 남인으로 분류되지만 이들의 우애는 굉장히 유명했다. 이산해는 북인 영수고 이덕형은 남인이지만 이산해는 이덕형의 장인이었다. 그리고 광해군 당시 대북이자 강경한 대비 폐비, 영창대군 사사를 주장한 이이첨은 이덕형의 친족이다. 영창대군의 처형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관직을 걸고 극렬하게 영창대군 사사를 반대한 이덕형과는 대조적이다.


  • 영화 <간신>에서의 훈구파 세력들은 연산군에게 피해를 받으면서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반정 혁명을 준비하는 사이다 인물들로 나온다. 하지만 이들도 나중에 변절될 수 있다는 씁쓸한 장면이 나온다.


5. 나무위키에 등재된 훈구파 인물[편집]




6. 훈구파의 주요 인물[편집]




7. 훈구파의 집권 기간[편집]




8.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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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집 중심 친일파, 친미파, 친러파
근왕파
친일파



[1] 다만 한명회는 개국공신 한상경의 형 한상질의 손자이므로 관학파와 연관이 있다.[2] 관학파 중에 살아남은 김종서 세력과 사육신, 생육신 등을 포함한 절의파들과 청담파들은 나중에 대거 사림파에 합류했다.[3] 전자는 한명회, 후자는 신숙주가 대표적이다. 그 외에 정인지, 정창손, 구치관, 김질 등도 있다. 다만 한명회는 건달들치고는 행정능력이 뛰어나, 양정이 사형당하고 홍윤성이 죽는 등 동료들이 몰락하는 와중에도 변절한 관학파들이 훈구파의 주류 세력이 되는 동안 길게 살아남는다.[4] 이는 세조 개인의 치세의 문제라 할 수 있는 부분이나 훈구파들은 세조의 패륜 행위에 가담하여 성립된 세력인 만큼 세조의 치세와 이들을 분리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5] 호랑이를 토벌하여 북쪽으로 쫓아내는 정책. 당시 조선은 너무 많은 호랑이의 개체 수로 많은 백성들이 피해를 봤다[6] 세조는 고구려 역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기록되어있다. 통일 중원국가인 명나라 앞에서 고구려 덕질 ㄷㄷ[7] 환구단이란 천지신명인 하늘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인데 이는 말 그대로 하늘의 아들인 천자의 나라 명나라 혼자만 올릴 수 있었고 주변 조공국들은 권한이 없었다. 그런데 조선이 그런 성대한 제사를 올린다는 것은 세조와 훈구파의 강력한 민족적 독립성의 고취를 표현한다.[8] 이는 당시 명나라가 토목의 변에서 탈문의 변으로 이어지는 내외적 혼란기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북로남왜 항목도 참조.[9] 이 때문에 사칭 사례도 빈번히 발생했다.[10] 진천에 사는 사노(私奴) 임복(林福)이 곡식 2천 석을 바친 일이 있었는데, 한명회는 이에 찬성했지만 심회는 반대하거나 노사신은 가족을 전부 면천시키면 안된다는 등, 내부에서도 반대가 있었다. 끝내 성종이 면천시켜주긴 했지만 결국 납속 정책을 재검토하게 된다.[11] 심지어 "살인범은 못 잡아도 되지만, 강상이 허물어지는 건 나라에 해가 된다"라는 말까지 했다. 이 살인사건에 대해서는 창원군 항목 참조.[12] 성종은 한명회의 사위였다. 예종이 중용한 인물인 월산대군의 처남 박원종도 신공신파다.[13] 중종 시기는 대형 옥사가 10년 주기로 발생했으며 중종은 신하들을 많이 죽이거나 유배를 보내지 않았으나 안정 기간이 10년 내외 수준이라서 중종 재위기간 내내 정치가 불안정했다.[14] 사실 연산군의 폭정과 중종의 실정이 합친 시너지 효과는 정치, 경제, 학문, 군사 분야의 문란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가 임꺽정의 난으로 대표되는 민생파탄, 그리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조선군의 고전 원인이었던 국방력 약화로 이어졌다. 훈구파도 마찬가지로 책임이 크다.[15] 비슷하게 여말선초 때도 권문세족의 자제로 태어났지만 신진사대부가 되었던 몇몇 인물들이 있다. 유연하게 시대의 변화에 순응하여 후대에도 살아남은 경우.[16] 물론 이극돈이 사림파를 싫어했던 건 사실이나 개인적 정치적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사림파들의 무능함과 사리분별도 못하는 옹졸함에 치가 떨려서 그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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