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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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역대 집권자 · 집권 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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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任
출생
1487년 7월 26일(성종 18년)
사망
1545년 8월 30일(명종 즉위년) (향년 58세)

1. 개요
2. 생애
3. 대중매체에서
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조선 중기의 문신.[1] 장경왕후의 오빠로 인종에게는 외숙부가 되며 대윤(大尹)의 거물. 을사사화숙청당했다.


2. 생애[편집]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고 얼마 안 있어 사망하자 본격적으로 궁궐로 들어가 관리 생활을 했는데 당시 원자였던 인종을 등에 업고 서서히 세력을 키우던 중이었다고 한다. 그는 중종의 어머니 자순대비(정현왕후)와 모종의 결탁을 해서 같은 파평 윤씨 가문의 딸들을 왕후로 간택했다. 한 사람은 대비가 천거한 처녀였으나 미색이 형편없다는 이유로 낙방하고 한 사람은 윤임이 천거한 처녀인데 훗날 문정왕후다. 그가 자순대비와 결탁하여 파평 윤씨 가문의 딸들을 다시 왕후에 올린 까닭은 가문의 명예를 위한 구실도 있지만 왕후를 자신이 직접 천거하면 자신의 말을 잘 따라 줄 것이라 여겼기 때문.

김안로와 가까이 지낸 듯한데 나중에 김안로에 붙었다는 이유로 유배되기도 했다. 하지만 김안로가 너무 심하게 군데다가 문정왕후가 아들 경원대군을 낳자 문정왕후를 폐위하려 음모를 꾸몄다가 윤원로, 윤원형 형제가 윤임에게 "전하의 같은 처남인데 신경 안 써주시나요?"하며 징징거렸다. 이후 세력이 급격히 커지는 소윤(小尹)과 대립하게 되는데[2] 윤임이 학식도 딸리고 정치 감각도 딸려서 그런지 중종은 윤원형을 더 아끼는 모습을 보이지만 세자의 보호자라는 명분 덕에 윤임쪽도 세력을 규합한다. 두 세력은 지지 대상뿐 아니라 구성원도 보면 차이가 난다. 대윤이 사림 계열이 더 많은데 이유는 인종이 세자인 명분과 성향이 사림들에게 너무 잘 맞았기 때문이다.[3] 소윤 쪽은 잘해봐야 흑화한 사림 정도? 대표적으로 유인숙과 정순붕이 있는데 둘 다 조광조의 세력이었고 기묘사화 때 화를 입어 정치 생명에 타격을 입은 적이 있다. 그러나 정계 복귀 후 각기 대윤과 소윤으로 갈라지면서 대립하게 된다.

대윤, 소윤 얘기가 처음 거론된 것은 중종 38년 경연 도중 구수담의 발언인데 구수담은 세간에 대윤과 소윤의 이야기가 돈다고 보고했다. 중종은 이에 대해 괴이한 이야기라고만 얘기하고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는데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미 너무 많은 옥사를 치른지라 일이 더 확대되고싶지 않던 왕이나 신하들이 일을 조용히 덮은 것이고 제기한 구수담 역시도 일으 확대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두 윤씨(윤임, 윤원형)에게 경고가 되기 위해서 제기한 것으로 여겼다.

중종 39년 정순붕이 "세상에서는 대윤과 소윤이 싸운다는데 대윤은 간신배 같고 소윤은 역적 같습니다."라는 식의 말을 했는데[4] 이게 왜 중요하냐면 세자에 붙은 사람들은 당연히 세자가 왕이 되면 좋은 대우를 해줄 가능성이 높다. 비판을 받아도 "저 인간들은 출세나 하려고 세자에게 붙는구나!" 정도로 여길 가능성이 높다. 즉 나쁘게 봐도 간신배 정도. 하지만 세자가 살아있는데도 대군에게 붙은 사람에게는 뭐가 어울릴까? 역적뿐이다. 국본을 흔들려는 무리로 낙인찍힐게 뻔하다. 하다 못해 이를 아뢴 정순붕은 "전하가 계신데도 사사로이 세자를 부호하는 자는 간사한 꾀를 가진 자들이고 대군에게 붙으려는 자들은 역적들입니다!"라고 했는데 말이다.

문제는 이에 대한 중종의 대응인데 중종은 이에 대해서 뭔가 조치를 안 취할 순 없었는지 둘 다 처벌한다. 문제는 윤원형은 파직에 그쳤던 반면 윤임은 한 때 김안로와 같은 편이었다는 이유로 유배를 보낸 것이었다. 대윤, 소윤의 존재가 거짓이든 진실이든 간에 두 사람은 각각 세자와 대군의 외삼촌인 이상 대윤, 소윤의 얘기가 나온 이상 오히려 대윤이라 할 수 있는 윤임이 더 큰 처벌을 받는 것은 자칫하면 국본을 흔들만한 일로 비추어질 수 있었고 이에 질겁한 신하들이 "저 따위 유언비어에 현혹되어선 안 됩니다!"하자 윤임의 처벌 등급을 유배에서 고신 회수로 낮춰준다.

중종이 사망하고 인종이 즉위하자 윤임의 앞날이 괜찮아지나 싶었지만 인종이 8개월 만에 승하했다. 윤임은 경원대군이 아닌 다른 이를 인종의 후계자로 모색하다가 문정왕후의 존재감에 포기한다. 결국 윤임은 인종이 죽은지 2달도 안되어 사사되는데 같이 사사당한 유관, 유인숙은 많은 사람들이 변호했지만 윤임은 누가 봐도 문정왕후가 살려둘리 없었기 때문에 권벌과 백인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윤임을 변호해주지 못했다. 권벌이 상소를 올리려 했을 때 사림의 거두였던 이언적도 권벌의 주장이 옳다고는 생각했으나 현실적으로 윤임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판단해서 "그대는 어찌하여 시기를 생각하지 않으시오. 이미 윤임은 구할 방법이 없소. (이런 상소는 올리면)도움은 안되고 해만 될 뿐이오.(명종실록 명종 즉위년 8월26일 기사)"라며 권벌을 말렸다.[5] 사실 이언적 입장에서는 조정 내에 사림이 큰 화를 당하는 것만은 막아야 했기 때문에 이미 구하기 틀린 윤임 대신 유관과 유인숙의 구원에만 집중하자는 현실적인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유관과 유인숙을 구하는 데에도 실패했고 본인도 유배당하고 말았다. 윤임이 죽은 후 김명윤이 윤임의 역모에 공모자가 있다고 해서 나중에는 3일간 효수당하고 그의 일가들도 역모죄에 해당하는 벌을 받았는데 정작 그의 아버지 윤여필은 무사히 풀려났는데 문정왕후가 "장경왕후의 부친이니 풀어주자"라고 했기 때문.

사후 선조에 의해 복권되는데 윤원형 일파가 명종 때 숙청되었고 윤임 자신은 나름대로 청렴했기 때문에 외척인데도 빨리 복권되었다.[6] 사림으로서는 윤임을 복권시킬 필요성이 있었는데 윤임은 사림의 원수인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정적이었고 윤임 집권기에 사림이 대거 등용되었다가 을사사화를 전후하여 윤임과 함께 사림이 숙청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소윤(친윤원형)=훈구 외척 권신 vs 대윤(친윤임)=사림"의 구도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윤임의 복권은 곧 사림이 훈구와의 싸움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여 결국 훈구의 시대가 막을 내렸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윤임의 자식들은 을사사화 때 아버지와 함께 숙청당했으나 윤흥신 등 일부는 나이가 어려서 죽음을 피하였다. 윤흥신은 윤임이 복권된 이후 무신으로 관직 생활을 하였는데 임진왜란 당시 부산의 다대포 첨사로 참전해 싸우다가 다대포진성 전투 때 전사했다. 영조조엄이 그의 공을 기려야 한다고 주장하여 부산 충렬사에 향사되었다. 훗날 윤임의 손자 윤호(尹琥)는 혜정옹주(惠靜翁主)의 딸인 홍씨와 결혼했다. 혜정옹주는 중종과 경빈 박씨의 딸이므로 윤호는 중종의 외손녀사위가 되는 셈. 덕분에 윤임이 탄핵되었을 때도 윤호는 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5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윤임의 자손들과 윤원형의 자손들은 어떠한 교류도 없으며 문중 행사에서 마주쳐도 서로 무시하고 지나간다고 한다.


3. 대중매체에서[편집]



  • 가상역사물 조선공주실록에서는 진성공주와 엮이는 세 남자 중 1명으로 등장한다.[7] 우연히 집에 데려온 유나를 사랑하게 되어 혼인을 약속하지만 유나가 죽었다고 들은 후에는 연산군에게 복수하기 위해 외숙부 박원종이 추진하는 거사에 가담하는데 유나가 진성공주 이수련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3부에서 수련이 여왕으로 즉위한 뒤 여전히 수련을 사랑하는 탓에 외숙부를 독살하고 경복궁 경회루에서 수련의 간택을 받아 국서가 된다. 이후 선왕의 두 번째 밀지 내용을 알게 되면서 아들 천윤을 세자로 올리고자 여동생 여진에게 낙태를 강요하고 세력을 모아 천윤을 세자로 책봉해달라는 상소를 올리게 한다. 하지만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수련은 그를 폐위시키고 끝끝내 홍연을 택하자 수련을 죽이려 한다.


4.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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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과에 급제하고 수군절도사를 지낸 사실상 무관 출신이다.[2]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명종 대까지 대소윤의 존재를 설로 치부한다. 그러나 양재역 벽서 사건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사관의 기록에서 등장하는만큼 실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애초에 붕당이라는 것은 공식적인 창당과 결성이 없다.[3] 인종은 중종의 적장자였기에 적장자 우선의 종법질서 계승에 익숙한데다 인종이 친 사림적이었기에 사림은 인종을 지지했다.[4] 중종실록 104권, 중종 39년 9월 29일 을축 1번째기사 중. 원문은 이렇다. "(상략)...이른바 대윤의 당이라는 자는 동궁(東宮)을 부호(扶護)하고 소윤의 당이라는 자는 대군(大君)에게 마음을 두었다 하는데 위에 주상이 계신데도 사사로이 동궁을 부호하는 자는 간사한 꾀를 형용할 수 없는 소인일 것이고 대군에게 마음을 두는 자라면 패역(悖逆)의 정상을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입니다(所謂大尹之黨者, 扶護東宮云, 小尹之黨者, 有心於大君云, 上有主上, 而私扶護東宮者, 邪譎之謀, 無狀小人, 若有心於大君, 則悖逆之狀, 口不可道)...(하략)"[5] 이 때문에 이언적은 훗날 이이에게 신랄하게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언적도 사건의 확대를 막는데 꽤나 공을 기울였다.[6] 정적이였던 윤원형은 대한제국 멸망 직전에야 복권된 것도 모자라 복권을 해준 인물조차도 다름아닌 이완용이었다.[7] 나머지 두 남자는 부마 신홍연과 그녀의 이복 오라버니 연산군 이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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