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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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초기의 문신. 황씨가 아니라 황보씨로 복성에 외자 이름이다.
2. 생애[편집]
1414년 문과에 급제하고 세종 때는 북도 체찰사로서 김종서와 더불어 6진을 개척하고 우의정이 되었다. 이후 지속적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다가 세종 때에는 고명대신이 되어서 김종서, 정분과 함께 고명대신이 되었다. 문종의 고명을 받아서 단종을 보필했다고도 알려져 있는데 문종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는 말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력이 쇠했었기 때문에 고명대신이 없다. 황희의 후임이었던 하연이 퇴임하자 뒤를 이어서 영의정에 올랐다.
눈치가 빨라 수양대군의 야심을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으나[2] 수양대군이 그정도로 막나갈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해 향년 67세에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계유정난이 벌어지기 전까지 나이 많은 중신들이 수양대군 파를 압도하고 있었던 점, 태종이 심온을 사사한 이후 반세기 동안 정승이 참살당하거나 역모죄로 처형되는 일이 없었던 점으로 미루어 수양대군에게 허를 찔렸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항상 선왕의 유지를 받들려 노력하였고 권력에는 전혀 욕심을 품지 않았고 강직하였다. 성품이 인자하고 자애로워 자신보다 낮은 이들도 함부로 대하지 않아 다른 이들의 호감을 많이 샀는데 일례로 계유정난에 휘말려 가문이 멸문의 위기에 처하자 그 집 여종인 단량이 황보인의 손자[3] 황보단(皇甫端)을 데리고 경상도 연일현(경상북도 포항시 연일읍)까지 피신하여 평생 숨어 키움으로써 가문의 대를 잇게 되며 이 때문인지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성동리에 영천 황보씨 집성촌이 있다.
수백 년이 지난 후 숙종이 다시 벼슬을 올리고 영조가 충정(忠定)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묘는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이천리에 있는데 인근이 황보씨의 선산인 듯. 곳곳에 산재한 묘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크다.
3. 기타[편집]
- 2009년 도굴되었다가 되찾은 한명회의 묘지 비석에 따르면 원래 한명회가 황보인의 사위가 될 뻔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황보인이 한명회를 1번 보고는 '국사'(國士)라고 생각을 해서 딸을 시집보내려 했으나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당시 도굴 사건 및 기록에 관한 기사 그 내용이란 한명회의 종조부인 참판 한상덕이 "황보인은 권력을 쥐고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니 혼례를 받아들여 부귀를 얻으라"고 했으나 한명회는 "처가의 권세에 힘입어 부귀 영화를 바라겠습니까. 이는 저의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라며 거절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출처가 한명회의 무덤 비석인 만큼 신뢰성이 낮고 다른 문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이야기다. 개연성 역시 다소 미심쩍다.[4]
- 똑같이 단종을 보필하다 살해된 김종서와는 달리 인지도가 낮은 편인데 김종서는 그나마 기록이 남아 있는데 비해 황보인은 그런 것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6진으로 잘 알려진 김종서는 물론이고 인지도가 낮은 정분도 숭례문과 해미 읍성을 비롯해 각종 저수지와 제방을 건설하는 등의 행적을 남긴 반면 황보인은 북방 개척 건이 김종서와 캐릭터가 겹치는데다 온건한 조정 신료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역사 콘텐츠에서 잘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이름에 관한 맞춤법에 있어 자주 인용되는 이름이다. 그의 호가 '지봉'인데, 성씨와 붙여 쓰면 황보지봉이라는 미묘한 이름이 되기 때문. 물론 한국어 맞춤법에 따라 성과 명은 필요한 경우엔 띄어쓰기가 가능하므로 '황보 지봉' 같은 식으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띄어쓸 수 있다.국립국어원 답변
- 개요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성이 황보이고 이름이 인이지만 이상하게 그가 등장하는 거의 모든 사극들이 황보씨가 아닌 황씨라고 칭한다. 비교적 최근작인 영화 관상에서도 보인 대감이라고 칭해지는가 하면 KBS의 사극에서는 아예 "이 나라가 김씨(김종서)의 나라입니까, 황씨의 나라입니까!" 라고 하는 대사까지 등장한다.
그리고 다음날 신문 문화면에서 까였다.거의 유일하게, 1994년 KBS 드라마 한명회[5] 에서는 띄어쓰기까지 하면서 황보 인으로 제대로 표시했다. 이 드라마는 역사 콘텐츠에서 잘 다루지 않은 황보인이 꽤 비중 있게 나오기도 했다.
4.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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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A B 율리우스력 11월 10일.[1] 율리우스력 11월 20일.[2] 드라마 한명회에서는 수양대군의 사람에게 병권을 맡길 수 없다면서 수양대군이 추천해서 병조판서가 된 정인지를 실권이 없는 한직으로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3] 황보인의 차남 황보흠(皇甫欽)의 아들.[4] 한명회의 졸기에는 어버이를 일찍 잃었다는 내용이 언급되므로 그의 부모가 아니라 종조부 한상덕이 혼인에 관여하고 있는 것은 정황상 꽤 그럴듯하다. 문제는 연령이다. 한명회는 1415년생이다. 한상덕은 1427년에 호조참판으로 임명되며 처음 참판직을 역임한다. 1430년에 와서는 '전 참판'으로 언급되며 적어도 이 때에는 참판에서 물러나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4년 뒤인 1434년에 이르러 사망한다. 여기까지의 나이 정보를 종합하면 아무리 나이를 올려 잡아도 한명회의 나이 21세 이전에 혼담이 제의되었다는 것. 조선 전기의 결혼 연령을 고려하면 이 나이에 혼담이 오가는 것은 이상할 것도 없지만 낙방을 거듭하던 한명회의 커리어로 보아 저렇게 이른 나이에 황보인에게 국사로 인정받았을 가능성은 그렇게 높지 않다.[5] 이덕화가 한명회로 나온 그 드라마. 황보인은 이치우가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