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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이 김질인 가야의 8대 왕에 대한 내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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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승
태조 ~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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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
| 제2대
김사형
|
|
조선 정승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문정공(文靖公) 김질 金礩
|
출생
| 1422년(세종 4)
|
사망
| 1478년 4월 6일[1] (향년 55 ~ 56세)[2] (음력 성종 9년 2월 24일)[3]
|
봉호
|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
시호
| 문정(文靖)
|
본관
| 구 안동 김씨
|
자
| 가안(可安)
|
호
| 쌍곡(雙谷)
|
부모
| 부친 - 김종숙(金宗淑, ? ~ 1470) 모친 - 이양직(李良直)의 딸
|
부인
| 동래 정씨(? ~ 1458) - 정창손의 장녀
|
자녀
| 장남 - 김의동(金義童) 차남 - 김예동(金禮童) 3남 - 김지동(金智童) 4남 - 김성동(金誠童, 1452 ~ 1495) 5남 - 김이동(金利童)
|
조선초기의 문신. 개국공신
김사형의 증손으로
단종 복위를 위한
사육신의 정변 계획을
세조에게 고해 바친 것으로 유명하다.
1450년(문종 1) 추장
문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고
성삼문,
신숙주와 함께
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55년(세조 1) 성균관사예로 임명되었는데, 이 때 성삼문의 제안으로
단종 복위 거사에 동참하게 되었으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 목숨을 잃을 것을 우려하여 장인
정창손의 집으로 찾아가 거사를 밀고하였고 결국에는 세조에게 사육신의 계획을 고하게 된다.
[4] 단 정창손은 계유정난에 가담한 인물인 만큼, 이 음모를 고변해야 할 입장이기는 했지만, 자기 사위가 저 혼자 살려고 자기 동료들을 배신했다는 비겁함에 기가 막혀 '이 더러운 놈...'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사육신 사건 이후에는 세조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군기감판사로 임명되었으며, 좌익공신, 상락군, 평안도관찰사, 공조판서, 병조판서, 우참찬,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우의정과 좌의정까지 지냈다. 세조가 승하한 이후에는
한명회,
신숙주와 함께 원상이 되어 어린
예종과
성종을 보좌했으며,
경국대전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후손으로
김자점,
김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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