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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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승

태조 ~ 연산군


[ 좌의정 ]

문하좌시중
문하좌시중 → 문하좌정승

초대

배극렴

제2대

조준


문하좌정승

제2대

조준

제3대

심덕부

제4대

성석린

제5대

민제


문하좌정승
문하좌정승 → 좌정승
좌정승

제6대

이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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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형

제8대

하륜

제9대

조준
좌정승
판의정부사 → 좌의정

제10대

하륜

제11대

성석린

제12대

하륜

제13대

남재

좌의정

제14대

하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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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



제16대

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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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대

류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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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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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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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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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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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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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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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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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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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대

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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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대

김국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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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신


제6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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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승
충익공(忠翼公)
김종서
金宗瑞


파일:김종서 흉상 전쟁기념관, 한국문화정보원(공공누리).jpg전쟁기념관에 있는 김종서 장군 흉상

출생
1383년(우왕 9년)
양광도 공주목
사망
1453년 11월 19일[1] (향년 69 ~ 70세)[2]
(음력 단종 1년 10월 10일)[3]
한성부
시호
충익(忠翼)
본관
순천 김씨[4]

국경(國卿)

절재(節齋)
직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정1품 품계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집현전 경연사(領集賢殿經筵事)
춘추관사(監春秋館事)
세자부(世子傅)

부모
부친 - 김수(金陲)
모친 - 성주 배씨 배규(裵規)의 딸(? ~ 1435)
부인
파평 윤씨 - 윤원부(尹元富)의 딸
자녀
장남 - 김승규
차남 - 김승벽(金承璧, ? ~ 1453)
3남 - 김승유(金承琉)
장녀 - 김자정(金自埥)의 처
4남(서자) - 김목대(金目臺)
5남(서자) - 김석대(金石臺)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대중매체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조선 초기의 정치인, 문관,[5] 군인.

세종 대인 1433년부터 1437년까지 6진을 개척했으며 단종 대에는 좌의정에 올라 고명대신으로서 섭정을 했다. 하지만 1453년 계유정난으로 인해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2. 생애[편집]


출생 연도에는 1383년설과 1390년설이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의 1451년 기록을 보면 김종서가 다음 해에 나이 70세가 된다는 이유로 벼슬에 나오지 않는 장면이 나온다. 이를 토대로 역산하면 1383년이 정확한 생년이 되는데 과거 급제 연령이나 활약 시기를 감안해도 1383년설이 설득력이 있다. 1390년설의 경우는 16살에 급제한 것이 되어서 조선 시대 과거 급제 연령에서 연소자 쪽에서 2위가 된다.[6] 출생지는 충청남도 공주시이고, 선대와 부친 김수(金陲)의 고향은 전라남도 순천시이다.[7] 생원시에 입격하고 1405년(태종 5년) 식년시 문과에 동진사 13위로 급제한 뒤 전형적인 문신 코스를 밟은 인물로 초기에는 주로 간언하는 간관직과 지방의 민정을 살피는 감찰직을 주로 맡았으며 세종에게 크게 신임을 받아 중용되었다. 아래는 세종 대 북방 개척의 1등공신이었던 김종서의 시조로 유명한데 그의 변방 정벌의 포부를 엿볼 수 있는 구절이다.

삭풍(朔風)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明月)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萬里邊城)에 일장검(一長劍) 짚고서서
긴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파일:attachment/didustkwns.jpg
<야연사준도>
북방 개척 중 관아에서 연회를 열었는데 갑자기 화살이 날아와 중앙의 술항아리에 꽂혀 모두 놀라워하고 있는데 김종서는 "간사한 자가 나를 시험하려 한 것"이라며 태연히 연회를 즐겼다는 일화를 묘사한 그림. 누각 안 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이 김종서다.[8]

그러나 그의 가장 유명한 활약은 바로 현재 대한민국의 국경선을 확정짓게 된 세종의 북방 개척 때 활약이다. 1433년 함길도(함경도) 도절제사에 임명되어 북방에 파견된 이후 8년 동안 변방에 있으면서 4군 6진 중 6진의 개척을 총지휘하고 두만강 이남을 완전히 조선의 영토로 만드는 데 큰 공훈을 세웠다. 이 때의 포스가 대단했는지 "큰 호랑이(大虎)"라고 불리며 명성을 떨쳤다. 북방으로 파견되기 전에 세종은 김종서를 불러 화살을 주며 "항상 가지고 있다가 짐승을 쏴라."라고 말했다.[9] 이 일이 있은 얼마 후에 김종서는 북방에 파견되었다. 북방에서 돌아와서는 형조판서와 예조판서 직을 역임하다가 세종 말년에 명나라 황제 정통제오이라트에게 사로잡히는 사태가 발생하여 요동 지역이 어수선해지자 다시 노구를 이끌고 평안도 도체찰사로 북방에 파견되기도 했다. 세종은 "북방의 일은 김종서가 있어도 과인이 없었으면 이루지 못했을 것이고 과인이 있어도 김종서가 없었으면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이라는 말로 김종서의 공적을 평가했다. 하지만 북방에 있으면서 세종에게 "제발 한양으로 올라가게 해 주세요"라고 상소를 지속적으로 올렸던 것을 보면 북방에 짱박힌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던 듯.[10][11]

북방 개척 때의 활약 때문인지 세종 당시 영의정이자 원로였던 황희에게 인정을 받았는데 황희가 자신의 후계자로 김종서를 점 찍어놓고 맹사성이 말릴 정도로 사정없이 굴렸다. 오죽했으면 김종서가 황희 앞에서 늘 각 잡고 지냈다는 얘기까지 있다. 그런데 분명 전형적인 문신 코스를 밟았는데도 장군의 이미지가 강하게 되어 있는데 실제로도 여러 외직과 언관직을 거치며 훌륭한 행정 수완과 강직함으로 이름이 높았고 예학, 경학, 역사에도 밝아 고려역사서인 <고려사>와 <세종실록> 편찬의 책임자를 맡기도 했다.

세종 사후에 문종 즉위년에는 의정부 좌찬성이였다가 이듬해에 우의정에 올랐고 단종 즉위년에 남지가 와병으로 사직하자 좌의정이 되면서 정계의 실력자가 되었다. 단종 시기에는 세종의 고명대신으로 영의정 황보인[12], 우의정 정분[13]과 정국을 주도했는데 이 때 인사와 관련된 황표정사라는 것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14]

조선 왕조 최초로 사초를 왜곡하다 걸린 사람이기도 한데 단종 원년(1453년) 5월 <세종실록>을 편찬할 때 당시 책임자였던 김종서가 안숭선(安崇善)의 가장사초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기록을 발견했다. 내용은 명나라 황제가 조선에 송골매를 조공할 것을 요구하여 전국 일대를 뒤져 겨우 7마리를 잡았을 때 당시 좌승지였던 김종서가 세종에게 아첨하기 위한 목적에서 2마리를 몰래 빼돌려 바치려다 세종의 분노로 실패한 일이었다. 이걸 그대로 적어놓은걸 보고 기사관을 시켜 구절을 삭제한 것인데 곧 들켜버렸다. 단, 들킨 당시에는 김종서가 고명대신으로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큰 문제 없이 넘어갔고 이런 연유로 진짜 사초 왜곡질로 큰 문제가 발생한 것은 예종 때의 민수옥사[15]를 첫 케이스로 본다. 다만 <단종실록>이 엄청난 왜곡과 미화로 악명높은 실록인지라 신빙성에는 의문이 있다.

의외로 단종을 지키려는 뜻은 같았으나 한 뜻이 되지 못했던 이들이 있었는데 바로 성삼문 등의 집현전 학사들이었다. 그 이유는 김종서의 전례없는 독단 때문이라고 하는데 한 학사가 그의 황표정사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자 "대신을 참소하니 죽어 마땅하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김종서는 서슬퍼런 힘을 가지고 있었다.[16] 권신이 되려면 국법을 어기고 전횡을 부리며 부정부패를 해야 하는데 김종서는 청렴결백했을 뿐 아니라 사치를 부렸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17] 그러나 당시 정권을 두고 다투던 수양대군에게 눈엣가시가 되었고 결국 계유정난 때 살해 0순위로 지목되게 된다. 수양대군은 김종서만 죽이면 나머지 무리는 걱정할 것도 없을 것이라 호언장담했는데 후에 진짜 그렇게 되기는 했다. 적어도 이런 사육신을 포함한 소장파 신료들이 김종서를 포함한 고명대신들이 독단적으로 권력을 휘두른다는 인식을 가진 것은 확실했다고도 볼 수 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불시에 김종서의 집[18]에 들이닥친 수양대군이 "사모뿔이 떨어졌는데 빌릴 수 있겠습니까"라는 한 마디 이야기를 하고 편지를 읽어보라고 김종서에게 건네주자 김종서는 편지를 달빛에 비추었으며 그 후 수양대군의 종인 임어을운이 철퇴를 휘둘러[19] 그를 살해한 줄 알았으나 눈치를 챈 아들 김승규가 필사적으로 아버지를 몸으로 감쌌고[20] 양정이 칼로 찌르자 아들인 김승규만 절명하고 김종서는 그 자리에서 죽지 않았다. 살아남아 다시 깨어난 김종서는 에 들어가 수양대군과 대결하기 위해 여장을 해 부인의 가마를 타고 4대문을 모두 돌았으나 들어가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둘째 며느리 친정인 사돈댁에 들어가 숨었는데 날이 밝자 있는 곳이 들통나 다시 찾아온 수양대군의 부하였던 양정, 이흥상, 홍달손 등에게 향년 71세에 결국 살해당했다. 살해당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정승의 몸으로 어찌 걸어가겠느냐! 초헌을 가져오너라!"였으며 이후에 목이 길에 내걸리는 효수형을 당했다.

세조가 즉위한 이후 역적으로 남아서 <고려사> 편찬자 명단에서도 삭제되고 권력을 탐한 신하로 남았으나 정작 <조선왕조실록>에 김종서의 비리나 개인적 결점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21][22]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이렇게 된 것[23]은 김종서가 권력자의 자리에 올랐는데도 막나가지 않고 정도를 지켰다는 방증이라 하겠다. 오히려 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수양대군 일파야말로 갖은 부정축재와 비리 사건으로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한명회홍윤성이 대표적인 예. 수양대군 일파는 자신들의 쿠데타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여러가지 핑계를 꾸며내느라 김종서를 권신이라고 몰아붙인 것이다. 김종서 뿐만이 아니라 세종 시대의 많은 명신들이 이 때 사라졌는데 그나마 살아남았다면 세조의 편에 선 정인지신숙주 정도다. 이렇게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지만 선왕들의 뜻을 받들어 단종을 모신 충신이자 명신이면서도 의정부 서사제로 권력의 최정점에서 초기 조선을 호령한 권신이란 모습도 보여진다. 그 활약상과 명성에 걸맞게 야사에도 많은 일화를 남겼으며 현재에 이르는 국경선을 확정하는데 활약한 걸 생각하면 알게 모르게 한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300여년이 지난 영조 22년, 사육신과 함께 복권되고 충익(忠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파일:external/cafe.cha.go.kr/DSCN9693.jpg
무덤은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에 있다.(김종서 장군묘) 원래 공주시 장기면이었다가, 2012년 세종시에 편입되면서 장군의 묘소가 있는 곳임을 알리고 그를 기리기 위해 '장군면'으로 개칭됐다. 세조에게 죽고 역적으로 몰리는 바람에 시신 수습을 제대로 못하여 현재 묘에 묻혀 있는 것은 김종서의 다리 하나 뿐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 위치한 공주 지역의 어른들은 '대교리'란 이름의 지명을 그를 기억하여 '한다리' 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사실 역적으로 몰려 죽었으니 정확히는 다리도 묻지 못한 가묘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겠다.


3. 기타[편집]


  • 비록 세조 때문에 권신이라는 오명이 덧씌워졌지만, 실제로는 훌륭한 신하였고, 그 죽음도 억울했기에 실제로 그를 역신이라고 하거나 나쁘게 평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수백년이 지난 정조 시대에 정약용도 자신의 책인 <경세유표>에서도 "우리나라의 장재로서 예전에는 김종서를 칭하고 근세에는 이순신을 칭하는데, 종서는 충신이고 순신은 효자였다."라고 말하며 김종서를 높이 평가했다. 이에 대해 단종이 묘호를 받은 것이 정조의 증조부인 숙종 때에야 되었기에 중간에 인식의 변화가 있었던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문맥상 '근세의 이순신'과 대비되는 의미의 '예전'이므로 임진왜란 이전이다.

  • 전설에 의하면 김종서의 집안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서자 하나[24]가 요행히 탈출해서 수양대군의 악행을 보고 가출한 서녀와 만나 일가를 이루어 간신히 대를 이었다고 한다. 다른 버전은 나중에 온천에 온 수양대군을 이 부부가 만나서 욕을 한바탕 해주었다고도 한다.[25] 이는 고종 대에 출간된 야사집 금계필담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 전승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드라마가 공주의 남자다. 하지만 실제 기록에서는 이 서자의 행방은 찾아볼 수 없으며, 김종서의 적손은 끊기지 않았다. 김종서의 손자 김행남, 김중남, 김팽, 김효달이 은진, 익산, 순창, 담양 등지에 은거하였기 때문이다.

  • 황희가 일찍이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고 주시하다 보니, 황희와 연관된 야사들이 몇 개 있다. 김종서가 의자에 비딱하게 앉아서 거만한 태도를 보이자, 황희는 "여봐라. 김 판서 저 놈이 앉은 의자 다리가 한 쪽이 망가진 모양이니 나무 토막을 가져다 받쳐 놓도록 해라."라고 호통을 치자 그제서야 김종서는 정신이 번쩍 들어서 자세를 고쳤다. 황희를 비롯한 정승들이 일을 하던 도중 식사 시간이 되자, 김종서가 아랫 사람들에게 명해서 음식상을 차려 정승들을 대접했다. 그러자 황희는 고맙다는 말 대신 "관리들을 대접하는 일은 조정의 예빈시가 맡아서 하는 것인데, 왜 자네가 멋대로 월권 행위를 하는가? 당장 치우게!"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또는 황희가 밤늦게 일을 하느라고 시장할까봐 김종서가 정승들을 위한 저녁을 푸짐하게 차려 놓았는데, 문제는 당시에는 아침은 하루의 시작이라 든든히 먹어 두고, 저녁은 자기 전이므로 적게 먹는게 관례였다.[26] 그래서 황희가 김종서가 예의를 어겼다고 정승들 앞에 세워 두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 자신보다 20여년 어린 남지가 본인보다 승차가 빠르자 질투를 했다는 기사가 있는 반면에 그의 동생 남간을 도와준 기사가 실록에 전해 온다.

  • 김종서의 체구는 작은 편이었다고 한다.

"지금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는 본디 유신(儒臣)으로서 몸집이 작고, 관리로서의 재주는 넉넉하나 무예(武藝)는 모자라니 장수로서 마땅하지 못하다. 다만 그가 일을 만나면 부지런하고 조심하며 일 처리하는 것이 정밀하고 상세하며, 4진(鎭)을 새로 설치할 때에도 처치한 것이 알맞아서 갑자기 그 효과를 보았으니, 이것은 포상(褒賞)할 만하다."

<세종실록> 세종 22년(1440년) 7월 5일



4. 대중매체[편집]


단종과 세조을 다룬 드라마에서 항상 등장하며, 주인공이 누구냐에 따라 권력을 탐한 권신 혹은 군주를 지키려 한 충신 식으로 다양한 캐릭터로 그려진다. 참고로, 체구가 작았다는 기록이 있는데도 거진 무인형의 캐릭터로 등장했다.
  • 1980년 KBS 드라마 <파천무>에서는 배우 신구가 연기했다.




  •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배우 조경환이 연기했다.[27] 지나친 수양대군 미화의 대표적 피해자로 안평대군, 혜빈 양씨 등과 더불어 수양대군에게 대립각을 세운 캐릭터라면서 난신적자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강압적이고 오만한 인물로 묘사되었으며 심지어는 실록에 없는 내용까지 멋대로 지어내어 부하들을 시켜 문종의 상여에 곡을 하는 백성들을 "새 임금이 즉위하셨는데 이미 죽은 왕에게 곡을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라는 이유로 매질하고 민가를 감시하게 하는 장면까지 나왔다. 그나마 독선적이긴 해도 스스로의 부귀가 아니라 단종을 보위하기 위한 것이고 세조의 대사나 내레이션 등으로 만고의 충신이라고 언급된다는 점에서 약간이나마 참작할 여지가 있다. 여담으로 조경환이 전직 보디빌더 출신이어서 워낙 거구였던 탓에 계유정난 당시 김종서를 업고 달리는 내용이 배우의 몸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서 가마를 타는 것으로 바뀐 해프닝이 있다.

  • 2008년 KBS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배우 이병욱[28]이 연기했다. 무신보다 문신에 가까운 인상이며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세종이 승하하지 않기에 수양대군과의 대립 등은 다루어지지 않는다.


  • 2011년 JTBC 드라마 <인수대비>에서는 배우 한인수[29]가 연기했다. 배우 특유의 굵은 목소리와 근엄해보이는 얼굴이 굵직한 연기와 함께 제대로 포텐셜을 터뜨려 14부까지 극의 중심 축으로 활약하였다. 어린 단종에게 "군왕이란 이렇게 해야 한다"며 눈물짓는 연기는 드라마의 명장면 중 하나.

  • 2013년 개봉한 영화 <관상>에서는 배우 백윤식[30]이 연기했다. 무인형 캐릭터가 아닌 수양대군의 찬탈을 저지하려는 진중한 노신 이미지.

  • 웹툰 <신과함께>의 신화편 차사전에 이 인물을 본딴 것으로 추정되는 토벌대장이 등장한다. 이름이 '김맹호'이고 북방의 국경선을 넓히려고 조선 조정에서 파견했으며 별명이 호랑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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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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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승총(震乘總)
[ 본기(本紀) ]
권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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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정종기(定宗紀)」,
,제3대 「태종기(太宗紀)」,
,제4대 「세종기(世宗紀)」,
이단
이경
이방원
이도
권2기
,제5대 「문종기(定宗紀)」,
,제6대 「단종기(端宗紀)」,
,제7대 「세조기(世祖紀)」,
,제8대 「예종기(睿宗紀)」,
이향
이홍위
이유
이황
권3기
,제10대 「연산기(燕山紀)」,
,제11대 「중종기(中宗紀)」,
이융
이역
권4기
,제12대 「인종기(仁宗紀)」,
,제13대 「명종기(成宗紀)」,
이호
이환
권5기
권6기
권7기
,제14대 「선조기(宣祖紀)」,
,제14대 수정기,
,제15대(중초본, 정초본) 「광해기(光海紀)」,
이연
이혼
권8~9기
,제16대 「인조기(仁祖紀)」,
이종
권10기
,제17대 「효종기(孝宗紀)」,
,제18대(개수록) 「현종기(顯祖紀)」,
이호
이현
권11~12기
권13기
,제19대(보궐정오) 「숙종기(肅宗紀)」,
,제20대(수정록) 「경종기(景宗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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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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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율리우스력 11월 10일.[2] 연 나이 70세.[3] 세는나이 71세.[4] 부계의 본적지. 전라도#조선시대 순천.[5] 1405년(태종 5) 식년시 문과에 동진사 13위로 급제했다.#[6] 1위가 고종황제 시기의 이건창으로 당시 15세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왠지 좀 애매하다. 17세는 선조 시대에 문과 장원급제를 한 박호, 종친이기는 하지만 무과 장원급제를 한 남이 등이 존재한다. 인터넷 상에서는 김종서의 생년이 점차 1383년으로 수정되어 가는 추세인데 도서 쪽은 아직도 1390년으로 기록한 도서가 많다.[7] 순천 김씨 문중에 따르면 순천 김씨는 조선 전기까지 순천에 근거를 두었으며, 김종서의 집안은 김수 대에 서울과 근거지인 순천 사이인 공주 요당에 집을 마련했다고 한다.[8] 위 그림에 남겨진 대담함과 관련한 일화도 많지만 선배 정승격인 황희에게 자주 혼나는 이야기가 많다. 가령 친구에게 바로 옆에 화살이 날아와도 두려움이 없지만 황희만 만나면 오금을 못 펴겠다고 징징거린 일화가 있다.[9] 말이 짐승이지, 임금이나 조정의 허락을 일일이 받지 않고도 북방 현장에서의 생사여탈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고대 중국사의 소위 구석의 '부월'과 같다.[10] 박시백조선왕조실록에서는 힘을 가진 신하가 변방에 오래 있으면 오해를 사는 경우가 많아 그랬다고 표현했다. 사실 북방에서 계속 있는 것은 누구라도 별로 좋아하지 않을테니 당연한 것이겠으며 모친상과 부인상을 제대로 치러주지 못했고 박호문의 농간에 휘말려 더욱 싫었을 것이다. 반대로 이징옥은 북방에 10년 넘게 근무하면서도 아무 말 않았지만 이쪽은 처음부터 무관인 데다가 일개 진을 책임진 위치라 김종서와는 위치가 달랐다. 그리고 사실 김종서만이 아니라 이후 인계받은 황보인이나 그 외 몇몇 이들도 김종서처럼 북방에 근무하면 거기서 오래오래 일해야 했다.[11] 사실 이징옥이나 양정같은 무관 출신들은 그래도 큰 불평불만 없이 자리를 지켰으나 김종서는 원래 문관이다보니 그랬던 듯하다.[12] 황보인은 세종 29년에 우의정, 세종 31년에 좌의정, 문종 1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이렇게만 보면 황보인이 정권의 최고여야 하지만 대체로 김종서가 황보인보다 앞서는 것은 원래부터 영의정은 조선시대 내내 신료들의 수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명예직에 가까웠고 국초인 이 시기에는 더더욱 명예직에 가까웠다. 이에 비하여 좌의정은 조정의 좌장으로 주요 사업을 지휘 감독하는 위치에 있었다.[13] 단종 즉위년에 좌의정 남지가 와병으로 빠지면서 좌찬성이였던 정분이 우의정으로 승진할 수 있었으나 사람이 토목에 집중하던 인사라 실권이 없기도 하였고 원래 정인지보다 아랫반열이였다가 문종이 순서를 바꾸면서 올라갔기에 경력이 많은 편도 아니였으며 계유정난 시기에는 하삼도 도체찰사로 있으면서 한양에 있지도 않았다.[14] 이 때문에 권신 아니냐고 오해할 수 있는데 주의해야 할 것이 황표정사를 이들 3대신만 하였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수양대군도 하고 안평대군도 했다.[15] 사초에 이름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바른 말을 썼던 것을 수정을 했다가(임꺽정의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왕조실록에 사관의 생각이 쓰여져 있다.) 고쳐 쓰여진 것을 검열관이 발견해 사초를 고쳐쓰고자 관련 요청을 받았던 사람들, 요청을 허락한 사람들이 줄줄이 참형 또는 귀양가거나 고치고자 요청한 것을 거절했음에도 태형을 당하고 군역 편입되버린 적이 있던 사건.# 이후 다시 사초에 이름을 넣지 않게 돌려놓는다.[16] 실제 역사에서는 집현전 학사들이 계유정난을 반대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세조에 의해 집현전이 폐지됐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17] <단종실록>은 세조 시절 "노산군일기"라는 제목으로 기술되며 사관이 알 수 없는 세조의 잠저 시절 음모 꾸리는 장면까지 대놓고 나오며 따라서 계유정난 승리 후 계유정난을 정당화하기 위한 프로파간다가 되었다. 그런데 이런 <단종실록>에도 김종서의 집이 호화스러웠다거나 매관매직을 했다거나 국정을 농단했다는 기록은 거의 없다. 기껏 해야 김종서나 황보인의 아들이나 사위 등이 파격 승진을 했다, 성묘 길에 환송객이 장안을 메웠다는 정도에 불과하다. 박시백은 이런 그의 모습을 "공인으로서의 절도를 잘 지켜나갔다"고 표현했다.[18] 현재 서울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근처에 있는 농협박물관 앞[19] 이 공으로 황보인의 집을 상으로 받는다.[20] 왜소한 김종서와 달리 김승규는 당시 장사로 이름이 높을 정도로 거구였다고 한다.[21] 아들들 벼슬을 올려줬다는 것 정도인데 이 정도는 당시 관행으로는 애교였고 높은 벼슬로 올려준 것도 아니었다. 명재상으로 추앙받는 황희에 비하면 이건 애교도 안 된다. 당시 관직 체계에서 소헌왕후가 사망하고서 몇 년 지나자마자 세종이 승하하였고 또다시 몇 년 지나 문종이 승하하면서 고위 관직자들이 교체되지 못하면서 인사 적체가 발생하였다. 이 와중에 승진이 된 것이니 심하다고 할 수도 있다. 오히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지적되었듯 김종서를 '권신', '부정부패' 등으로 매도한 세조의 공신들이야말로 김종서 저리가라 할만큼 권력남용과 부정부패에 찌들었다.[22] 다만, 사람들이 가장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청렴함과 권력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이 유난히 권력자의 청렴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은데, 권력욕과 청렴함은 대비되는 성질이 아니다. 가장 큰 예가 프랑스의 독재자 로베스피에르이다. 반대파조차도 로베스피아르만큼 청렴한 사람은 없다고 말했을 정도로 그는 청렴한 사람이었으나, 자심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독재자다운 모습을 보인 걸 생각하면 청렴함과 권력욕은 전혀 별개의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23] 애초에 조선왕조실록은 왕이 요구한다고 순순히 의도적인 서술을 넣지는 않는다. 사관들이 목숨을 걸고 자신의 판단대로만 서술하기 때문에 승자의 기록이라는 시각은 상황에 맞지 않는다. 단지 광해군 관련 서술과 같이, 사관 본인이 이데올로기적 판단을 통해 부정적인 사초를 작성할 수는 있다.[24] 기록, 구전에 따라 적자라고도 하고 손자라고도 한다.[25] 맹꽁이 서당 버전 야사에서는 세조가 이들을 알아보고 데려가려 했으나 이들은 절개를 지키기 위해 도망쳐 버렸다고 한다.[26] 관례이기는 하지만 나름 합리성도 있는게 아침에는 하루를 시작해야 하니 든든히 먹어두는게 좋고 저녁은 자기 전이므로 (상대적으로) 적게 먹어야 한다.[27] 4년 뒤인 2002년 KBS 드라마 <제국의 아침>에서 박술희를 연기했는데, 여기서도 선왕의 고명을 받들어 새 임금을 보위하지만 결국 쿠데타 세력에게 살해당한다는 점이 유사하다.[28]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윤소종 역.[29] 1994년 KBS 드라마 <한명회>에서는 정인지 역.[30] 1980년 KBS 드라마 <파천무>에서는 문종 역, 1994년 KBS 드라마 <한명회>에서는 성삼문 역, 2011년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이방원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