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종서(조선) (문단 편집) == 생애 == 출생 연도에는 1383년설과 1390년설이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의 1451년 기록을 보면 김종서가 다음 해에 나이 70세가 된다는 이유로 [[벼슬]]에 나오지 않는 장면이 나온다. 이를 토대로 역산하면 1383년이 정확한 생년이 되는데 과거 급제 연령이나 활약 시기를 감안해도 1383년설이 설득력이 있다. 1390년설의 경우는 16살에 급제한 것이 되어서 조선 시대 과거 급제 연령에서 연소자 쪽에서 2위가 된다.[* 1위가 [[고종(대한제국)|고종황제]] 시기의 [[이건창]]으로 당시 15세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왠지 좀 애매하다. 17세는 [[선조(조선)|선조]] 시대에 문과 [[장원]]급제를 한 [[박호]], [[종친]]이기는 하지만 무과 장원급제를 한 [[남이]] 등이 존재한다. [[인터넷]] 상에서는 김종서의 생년이 점차 1383년으로 수정되어 가는 추세인데 [[도서]] 쪽은 아직도 1390년으로 기록한 도서가 많다.] 출생지는 [[충청남도]] [[공주시]]이고, 선대와 부친 김수(金陲)의 고향은 [[전라남도]] [[순천시]]이다.[* [[순천 김씨]] 문중에 따르면 순천 김씨는 조선 전기까지 순천에 근거를 두었으며, 김종서의 집안은 김수 대에 서울과 근거지인 순천 사이인 공주 요당에 집을 마련했다고 한다.] 생원시에 입격하고 1405년(태종 5년) 식년시 문과에 동진사 13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a_1405_000188|급제한 뒤]] 전형적인 문신 코스를 밟은 인물로 초기에는 주로 간언하는 간관직과 지방의 민정을 살피는 감찰직을 주로 맡았으며 세종에게 크게 신임을 받아 중용되었다. 아래는 세종 대 북방 개척의 1등[[공신]]이었던 김종서의 [[시조(문학)|시조]]로 유명한데 그의 변방 정벌의 포부를 엿볼 수 있는 구절이다. >삭풍(朔風)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明月)은 눈 속에 찬데,[br]만리변성(萬里邊城)에 일장검(一長劍) 짚고서서[br]긴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didustkwns.jpg|width=100%]]}}}|| ||<#ddd> {{{#000 '''<야연사준도>'''}}} || 북방 개척 중 관아에서 연회를 열었는데 갑자기 화살이 날아와 중앙의 술항아리에 꽂혀 모두 놀라워하고 있는데 김종서는 "간사한 자가 나를 시험하려 한 것"이라며 태연히 연회를 즐겼다는 일화를 묘사한 그림. 누각 안 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이 김종서다.[* 위 그림에 남겨진 대담함과 관련한 일화도 많지만 선배 정승격인 황희에게 자주 혼나는 이야기가 많다. 가령 친구에게 바로 옆에 화살이 날아와도 두려움이 없지만 황희만 만나면 오금을 못 펴겠다고 징징거린 일화가 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유명한 활약은 바로 현재 [[대한민국]]의 국경선을 확정짓게 된 세종의 북방 개척 때 활약이다. 1433년 함길도([[함경도]]) 도절제사에 임명되어 북방에 파견된 이후 8년 동안 변방에 있으면서 [[4군 6진]] 중 6진의 개척을 총지휘하고 [[두만강]] 이남을 완전히 조선의 [[영토]]로 만드는 데 큰 공훈을 세웠다. 이 때의 포스가 대단했는지 '''"큰 호랑이(大虎)"'''라고 불리며 명성을 떨쳤다. 북방으로 파견되기 전에 세종은 김종서를 불러 [[활]]과 [[화살]]을 주며 "항상 가지고 있다가 [[짐승]]을 쏴라."라고 말했다.[* 말이 짐승이지, 임금이나 조정의 허락을 일일이 받지 않고도 북방 현장에서의 [[생사여탈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고대 중국사의 소위 [[구석]]의 '부월'과 같다.] 이 일이 있은 얼마 후에 김종서는 북방에 파견되었다. 북방에서 돌아와서는 형조판서와 예조판서 직을 역임하다가 세종 말년에 [[명나라]] 황제 [[정통제]]가 [[오이라트]]에게 [[토목의 변|사로잡히는 사태]]가 발생하여 [[요동]] 지역이 어수선해지자 다시 노구를 이끌고 [[평안도]] 도체찰사로 북방에 파견되기도 했다. 세종은 "북방의 일은 김종서가 있어도 과인이 없었으면 이루지 못했을 것이고 과인이 있어도 김종서가 없었으면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이라는 말로 김종서의 공적을 평가했다. 하지만 북방에 있으면서 세종에게 "제발 [[서울특별시|한양]]으로 올라가게 해 주세요"라고 [[상소]]를 지속적으로 올렸던 것을 보면 북방에 짱박힌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던 듯.[*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힘을 가진 [[신하]]가 변방에 오래 있으면 오해를 사는 경우가 많아 그랬다고 표현했다. 사실 북방에서 계속 있는 것은 누구라도 별로 좋아하지 않을테니 당연한 것이겠으며 모친상과 부인상을 제대로 치러주지 못했고 박호문의 농간에 휘말려 더욱 싫었을 것이다. 반대로 이징옥은 북방에 10년 넘게 근무하면서도 아무 말 않았지만 이쪽은 처음부터 무관인 데다가 일개 진을 책임진 위치라 김종서와는 위치가 달랐다. 그리고 사실 김종서만이 아니라 이후 인계받은 [[황보인]]이나 그 외 몇몇 이들도 김종서처럼 북방에 근무하면 거기서 오래오래 일해야 했다.][* 사실 이징옥이나 양정같은 무관 출신들은 그래도 큰 불평불만 없이 자리를 지켰으나 김종서는 원래 문관이다보니 그랬던 듯하다.] 북방 개척 때의 활약 때문인지 세종 당시 [[영의정]]이자 원로였던 [[황희(조선)|황희]]에게 인정을 받았는데 황희가 자신의 [[후계자]]로 김종서를 점 찍어놓고 [[맹사성]]이 말릴 정도로 사정없이 굴렸다. 오죽했으면 김종서가 황희 앞에서 늘 각 잡고 지냈다는 얘기까지 있다. 그런데 분명 전형적인 문신 코스를 밟았는데도 [[장군]]의 이미지가 강하게 되어 있는데 실제로도 여러 외직과 언관직을 거치며 훌륭한 [[행정]] 수완과 강직함으로 이름이 높았고 예학, 경학, [[역사]]에도 밝아 [[고려]]의 [[역사서]]인 <[[고려사]]>와 <[[세종실록]]> 편찬의 책임자를 맡기도 했다. [[세종(조선)|세종]] 사후에 [[문종(조선)|문종]] 즉위년에는 의정부 좌찬성이였다가 이듬해에 우의정에 올랐고 [[단종(조선)|단종]] 즉위년에 [[남지]]가 와병으로 사직하자 좌의정이 되면서 정계의 실력자가 되었다. 단종 시기에는 세종의 고명대신으로 영의정 [[황보인]][* 황보인은 세종 29년에 우의정, 세종 31년에 좌의정, 문종 1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이렇게만 보면 황보인이 [[정권]]의 최고여야 하지만 대체로 김종서가 황보인보다 앞서는 것은 원래부터 영의정은 [[조선시대]] 내내 신료들의 수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명예]]직에 가까웠고 국초인 이 시기에는 더더욱 명예직에 가까웠다. 이에 비하여 좌의정은 조정의 좌장으로 주요 [[사업]]을 지휘 감독하는 위치에 있었다.], 우의정 [[정분]][* 단종 즉위년에 좌의정 [[남지]]가 와병으로 빠지면서 좌찬성이였던 정분이 우의정으로 [[승진]]할 수 있었으나 사람이 [[토목]]에 집중하던 인사라 실권이 없기도 하였고 원래 [[정인지]]보다 아랫반열이였다가 문종이 순서를 바꾸면서 올라갔기에 [[경력]]이 많은 편도 아니였으며 계유정난 시기에는 하삼도 도체찰사로 있으면서 [[서울특별시|한양]]에 있지도 않았다.]과 정국을 주도했는데 이 때 인사와 관련된 [[황표정사]]라는 것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때문에 [[권신]] 아니냐고 오해할 수 있는데 주의해야 할 것이 황표정사를 이들 3대신만 하였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세조(조선)|수양대군]]도 하고 [[안평대군]]도 했다.] 조선 왕조 최초로 [[사초]]를 왜곡하다 걸린 사람이기도 한데 단종 원년(1453년) 5월 <[[세종실록]]>을 편찬할 때 당시 책임자였던 김종서가 안숭선(安崇善)의 가장사초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기록을 발견했다. 내용은 [[명나라]] 황제가 조선에 송골매를 조공할 것을 요구하여 전국 일대를 뒤져 겨우 7마리를 잡았을 때 당시 좌승지였던 김종서가 세종에게 아첨하기 위한 목적에서 2마리를 몰래 빼돌려 바치려다 세종의 분노로 실패한 일이었다. 이걸 그대로 적어놓은걸 보고 기사관을 시켜 구절을 삭제한 것인데 곧 들켜버렸다. 단, 들킨 당시에는 김종서가 고명대신으로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큰 문제 없이 넘어갔고 이런 연유로 진짜 사초 왜곡질로 큰 문제가 발생한 것은 [[예종(조선)|예종]] 때의 민수옥사[* 사초에 [[이름]]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바른 말을 썼던 것을 수정을 했다가([[임꺽정]]의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왕조실록]]에 사관의 생각이 [[조선왕조실록#s-5.3|쓰여져 있다.]]) 고쳐 쓰여진 것을 검열관이 발견해 사초를 고쳐쓰고자 관련 요청을 받았던 사람들, 요청을 허락한 사람들이 줄줄이 참형 또는 귀양가거나 고치고자 요청한 것을 거절했음에도 [[태형]]을 당하고 군역 편입되버린 적이 있던 사건.[[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0155|#]] 이후 다시 사초에 이름을 넣지 않게 돌려놓는다.]를 첫 케이스로 본다. 다만 <단종실록>이 엄청난 왜곡과 미화로 악명높은 실록인지라 신빙성에는 의문이 있다. 의외로 단종을 지키려는 뜻은 같았으나 한 뜻이 되지 못했던 이들이 있었는데 바로 [[성삼문]] 등의 [[집현전]] 학사들이었다. 그 이유는 김종서의 전례없는 독단 때문이라고 하는데 한 학사가 그의 황표정사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자 "대신을 참소하니 죽어 마땅하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김종서는 서슬퍼런 힘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집현전 학사들이 [[계유정난]]을 반대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세조에 의해 집현전이 폐지됐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권신이 되려면 국법을 어기고 전횡을 부리며 [[부정부패]]를 해야 하는데 김종서는 청렴결백했을 뿐 아니라 [[사치]]를 부렸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단종실록>은 세조 시절 "노산군일기"라는 제목으로 기술되며 사관이 알 수 없는 세조의 잠저 시절 음모 꾸리는 장면까지 대놓고 나오며 따라서 계유정난 승리 후 계유정난을 정당화하기 위한 [[프로파간다]]가 되었다. 그런데 이런 <단종실록>에도 김종서의 집이 호화스러웠다거나 [[매관매직]]을 했다거나 국정을 농단했다는 기록은 거의 없다. 기껏 해야 김종서나 황보인의 아들이나 사위 등이 파격 [[승진]]을 했다, 성묘 길에 환송객이 장안을 메웠다는 정도에 불과하다. [[박시백]]은 이런 그의 모습을 "[[공인]]으로서의 절도를 잘 지켜나갔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당시 [[정권]]을 두고 다투던 수양대군에게 눈엣가시가 되었고 결국 계유정난 때 살해 0순위로 지목되게 된다. 수양대군은 김종서만 죽이면 나머지 무리는 걱정할 것도 없을 것이라 호언장담했는데 후에 진짜 그렇게 되기는 했다. 적어도 이런 사육신을 포함한 소장파 신료들이 김종서를 포함한 고명대신들이 독단적으로 권력을 휘두른다는 인식을 가진 것은 확실했다고도 볼 수 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불시에 김종서의 집[* 현재 서울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근처에 있는 농협박물관 앞]에 들이닥친 수양대군이 "사모뿔이 떨어졌는데 빌릴 수 있겠습니까"라는 한 마디 이야기를 하고 [[편지]]를 읽어보라고 김종서에게 건네주자 김종서는 편지를 달빛에 비추었으며 그 후 수양대군의 종인 임어을운이 철퇴를 휘둘러[* 이 공으로 황보인의 집을 상으로 받는다.] 그를 살해한 줄 알았으나 눈치를 챈 아들 [[김승규(조선)|김승규]]가 필사적으로 아버지를 몸으로 감쌌고[* 왜소한 김종서와 달리 김승규는 당시 장사로 이름이 높을 정도로 [[거구]]였다고 한다.] 양정이 칼로 찌르자 아들인 김승규만 절명하고 김종서는 그 자리에서 죽지 않았다. 살아남아 다시 깨어난 김종서는 [[궁]]에 들어가 수양대군과 대결하기 위해 [[여장]]을 해 부인의 가마를 타고 4대문을 모두 돌았으나 들어가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둘째 며느리 친정인 [[사돈]]댁에 들어가 숨었는데 날이 밝자 있는 곳이 들통나 다시 찾아온 수양대군의 부하였던 [[양정(조선)|양정]], 이흥상, 홍달손 등에게 향년 71세에 결국 살해당했다. 살해당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정승의 몸으로 어찌 걸어가겠느냐! 초헌을 가져오너라!"였으며 이후에 목이 길에 내걸리는 [[효수형]]을 당했다. 세조가 즉위한 이후 [[역적]]으로 남아서 <고려사> 편찬자 명단에서도 삭제되고 권력을 탐한 신하로 남았으나 정작 <조선왕조실록>에 김종서의 [[비리]]나 개인적 결점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아들들 벼슬을 올려줬다는 것 정도인데 이 정도는 당시 관행으로는 애교였고 높은 벼슬로 올려준 것도 아니었다. 명[[재상]]으로 추앙받는 [[황희(조선)|황희]]에 비하면 이건 애교도 안 된다. 당시 관직 체계에서 [[소헌왕후]]가 사망하고서 몇 년 지나자마자 세종이 승하하였고 또다시 몇 년 지나 문종이 승하하면서 고위 관직자들이 교체되지 못하면서 인사 적체가 발생하였다. 이 와중에 승진이 된 것이니 심하다고 할 수도 있다. 오히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지적되었듯 김종서를 '권신', '부정부패' 등으로 매도한 세조의 공신들이야말로 김종서 저리가라 할만큼 권력남용과 부정부패에 찌들었다.][* 다만, 사람들이 가장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청렴함과 권력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이 유난히 권력자의 청렴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은데, 권력욕과 청렴함은 대비되는 성질이 아니다. 가장 큰 예가 [[프랑스]]의 독재자 [[로베스피에르]]이다. 반대파조차도 로베스피아르만큼 청렴한 사람은 없다고 말했을 정도로 그는 청렴한 사람이었으나, 자심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독재자다운 모습을 보인 걸 생각하면 청렴함과 권력욕은 전혀 별개의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이렇게 된 것[* 애초에 조선왕조실록은 왕이 요구한다고 순순히 의도적인 서술을 넣지는 않는다. 사관들이 목숨을 걸고 자신의 판단대로만 서술하기 때문에 승자의 기록이라는 시각은 상황에 맞지 않는다. 단지 광해군 관련 서술과 같이, 사관 본인이 이데올로기적 판단을 통해 부정적인 사초를 작성할 수는 있다.]은 김종서가 권력자의 자리에 올랐는데도 막나가지 않고 정도를 지켰다는 방증이라 하겠다. 오히려 [[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수양대군 일파야말로 갖은 부정축재와 비리 사건으로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한명회]]나 [[홍윤성]]이 대표적인 예. 수양대군 일파는 자신들의 쿠데타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여러가지 핑계를 꾸며내느라 김종서를 권신이라고 몰아붙인 것이다. 김종서 뿐만이 아니라 세종 시대의 많은 명신들이 이 때 사라졌는데 그나마 살아남았다면 세조의 편에 선 [[정인지]]나 [[신숙주]] 정도다. 이렇게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지만 선왕들의 뜻을 받들어 단종을 모신 [[충신]]이자 명신이면서도 의정부 서사제로 권력의 최정점에서 초기 조선을 호령한 권신이란 모습도 보여진다. 그 활약상과 명성에 걸맞게 [[야사(역사)|야사]]에도 많은 일화를 남겼으며 현재에 이르는 국경선을 확정하는데 활약한 걸 생각하면 알게 모르게 [[한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300여년이 지난 [[영조]] 22년, [[사육신]]과 함께 복권되고 충익(忠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cafe.cha.go.kr/DSCN9693.jpg|width=100%]]}}}|| 무덤은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에 있다.([[김종서 장군묘]]) 원래 [[공주시]] 장기면이었다가, 2012년 세종시에 편입되면서 장군의 묘소가 있는 곳임을 알리고 그를 기리기 위해 '장군면'으로 개칭됐다. 세조에게 죽고 역적으로 몰리는 바람에 시신 수습을 제대로 못하여 현재 묘에 묻혀 있는 것은 김종서의 다리 하나 뿐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 위치한 공주 지역의 어른들은 '대교리'란 이름의 지명을 그를 기억하여 '한다리' 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사실 역적으로 몰려 죽었으니 정확히는 다리도 묻지 못한 가묘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