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명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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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편집]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분무공신, 우의정에 올랐다. 붕당은 소론이며, 영조 집권초기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의 마지막 1등 공신이다. 오윤겸의 현손이자 소론계 중진인 대제학 오도일의 종손이다.
해주 오씨 경파의 시조 묘역인 용인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에 묘소가 있다.
2. 생애[편집]
1673년(현종 14) 태어나 1705년(숙종 31) 문과 급제했다.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숙종이 소론을 여당으로 삼으면서 1715년 이조 좌랑이 된다. 이듬해 경상도, 강원도, 평안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다가, 1724년 영조 즉위 후 소론이 실각하자 사직서를 낸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다시 여당이 되면서 오명항도 이조판서, 병조판서에 잇달아 오른다.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영조는 오명항을 4도 도순무사 겸 판의금부사로 임명하고 난을 진압하게 한다. 이인좌 역시 소론으로, 소론이 스스로 진압케 하려는 궁리도 있었다. 본인도 병조판서를 역임한 적이 있고 전략·전술에 능했다. 이인좌의 첩자와 자객을 모두 잡아냈고, 안성·죽산에서 반군을 격퇴해 이인좌를 생포했다. 파죽지세로 추풍령을 넘어 영남의 반란군을 조기에 분쇄하면서 호남의 역도들과 합세하지 못하게 해 한 달 여만에 난을 평정했다. 결국 반란군의 핵심이었던 충청의 이인좌군을 조기에 격파한 것이 반란 진압의 열쇠가 된 셈.
상당히 덕장 스타일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발걸음을 숨기고 산 뒤쪽을 점거하기로 한 부대가 군령을 어기고 깃발을 세우고 북소리까지 울리며 진군한 바람에 이인좌가 남은 군을 이끌고 미리 산을 올라가버려 전략이 크게 꼬일뻔했음에도 나무라기만 했을뿐 벌을 내리지 않았으며 이후 종사관 조현명이 군법은 엄격해야 한다고 지적하자, "국가가 태평한 지 1백 년이어서 군기가 느슨해졌으니, 갑자기 엄격한 군율을 들이대면 원망만 늘 것 아니겠나"라고 답했다. 또한 군영에서 잠을 잘 때 부하들이 볼 때는 일부러 크게 코를 골면서 잠을 자는척 했는데, 얼마나 자신이 있으면 저렇게 편안하게 자겠냐면서 사기가 올랐다고 한다.
이인좌의 난 진압 후 분무공신 1등에 봉해졌고 우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임명돼 해은부원군의 작위를 받았다. 얼마 안돼 사망했는데 영조가 직접 제문을 짓고 아들을 중용하게 했다. 그가 장수했으면 영의정은 따놓은 당상이었고 소론도 더 집권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인좌 때문에 숙청되고 세가 약해진 소론은 곧 권좌를 놓는다. 영조는 이후 노론을 여당으로 삼고 순조 때의 세도정치 전까지 조선 조정은 노론 일색이 됐다.
항목 위에 있는 오명항 초상화는 보물 1177호로, 장만의 초상 등과 더불어 조선시대 사실주의 기법을 잘 보여준다. 얼룩같은 검은 점들은 마마 자국을 묘사한 것이다. 얼굴이 검어 간질환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이며 사인이 간경변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오명항의 초상은 두 점이 더 남아 있는데 모두 같은 특징을 띈다. 그의 집안은 선조인 오도일부터 오명항 본인을 거쳐 후손인 오태증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애주가로 유명했는데 이게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다.
위 초상화와 같은 해에 그려진 초상화인데, 병세가 심각하게 악화되어 흑색황달이 일어난 나머지 얼굴이 완전히 갈색으로 변해버린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초상화는 덴리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있다.
3.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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