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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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의정

영조 ~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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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의정
문숙공(文肅公)
채제공
蔡濟恭


파일:채제공 초상.jpg이명기, <채제공 초상 일괄 - 흑단령포본>, 18세기 후반

출생
1720년 5월 12일
(음력 숙종 46년 4월 6일)
충청도 홍주목
(現 충청남도 홍성군)
사망
1799년 2월 22일 (향년 78세)
(음력 정조 23년 1월 18일)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재임기간
제211대 영의정
1793년 7월 2일 - 7월 11일
(음력 정조 17년 5월 25일[1] - 6월 4일[2])
시호
문숙(文肅)
본관
평강 채씨 19세 공(恭) 항렬

백규(伯規)

번암(樊巖), 번옹(樊翁)
붕당
남인(청남, 근기남인), 시파
가족
할아버지 채성윤
아버지 채응일 / 어머니 연안 이씨
아들 채홍원, 채홍근

1. 개요
2. 생애
2.1. 남인 최후의 거물로서
2.2. 남인의 집권을 위한 승부수
2.3. 유생들과의 충돌
2.4. 사후
3. 여담
4. 가족 관계
5. 대중매체
5.1. 소설
5.2. 만화
5.3. 드라마
5.4. 영화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조선 후기의 문관이다. 영조정조 때 살았고 당색은 남인이며 시파에 속한다.[3] 조선 후기 내내 탄압받는 야당 이미지였던 남인 중에서는 최고이자 최후의 거물 정치가라고 할 수 있다.


2. 생애[편집]


할아버지는 참판 채성윤(蔡成胤)이고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채응일(蔡膺一)이며 어머니는 연안 이씨 현감 이만성(萬成)의 딸이고, 충청도 홍주목에서 태어나 강박, 오광운과 이익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스스로 남인의 학통을 이황 - 정구 - 허목 - 이서우(李瑞雨) - 이익으로 규정했다. 숙종조 초반 각각 탁남청남의 영수였던 허적윤휴에 대해선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1735년 15세로 향시에 급제한 뒤 음서로 통덕랑(通德郞)을 역임하던 도중에 1743년(영조 19년)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丙科) 5위로 급제했다.# 그 뒤 정6품 홍문관 수찬(修撰), 교리(校理), 익릉별검(翼陵別檢), 승문원의 가주서(假注書), 예문관검열 순으로 맡다가 중인의 분산[4]을 강제로 뺐었다고 양사의 탄핵을 받은 뒤 파직되었다. 그리고 1년 동안 삼척에 유배되었다.

1753년에 호서암행어사로 관직에 돌아와 균역법 조사 및 폐단과 문제를 파악한 뒤 보고했다. 이후 홍문관 수찬, 사간원 헌납, 홍문관 교리, 사헌부 집의를 역임하다 사도세자의 스승으로써 그를 가르쳤다. 한편, 나주 괘서 사건 당시 조정에 얼마 안 남은 소론남인을 지키려 노력했고, 본인을 비롯한 소수 남인은 조정에 남아있을 수 있었다. 또한, 동부승지 시절엔 사도세자후견인이 되어 사도세자가 영조와의 갈등이 심각해졌을 때 이를 중재해 주는 역할을 주로 했다.

1758년(영조 34년)에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한다는 교지를 내렸는데 당시 동부승지였던 채제공이 눈물까지 흘리며 만류하는 통에 그만두었으나 4년 뒤에는 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모친상을 당해 내려가 있어서 사도세자를 돕지 못했다. 물론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사도세자는 결국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영조가 "진실로 나의 사심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라고 나중에 세손(정조)에게 말할 정도였다.

이후 정조 때에는 홍국영과도 잘 아는 사이였고[5] 사도세자의 신원을 주장하여 선왕(영조)의 정책을 부정했다는 등의 공격을 받아 이후 서울 근교 명덕산에서 8년간 은거 생활을 하였다.


2.1. 남인 최후의 거물로서[편집]


공격을 받은 채제공임에도 정조는 반대를 무릅쓰고 그를 중용했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복권하려 했던 효심깊은 정조로서는 당연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1786년(정조 10년)에는 평안병사에 제수했다.

남인 채제공의 복귀에 노론 벽파와 소론이면서 벽파에 우호적인 서명선 등이 손을 잡고 격렬하게 탄핵하였고 서명선은 "채제공이 역적이 아니면 제가 역적입니다!"라고 선언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것도 채제공이 이전에 하던 벼슬의 높이를 생각하면 별 거 아니다. 그런데 막상 김종수, 심환지 등 노론은 서명선이 소론이라는 이유로 도리어 원수 취급했다.

1788년(정조 12년) 2월에는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1790년(정조 14년)에는 좌의정, 1793년(정조 17년)에는 영의정을 역임했다. 좌의정에 있을 때는 영의정이 없어 독상이라고 불려 실제 조정의 영수였는데 1791년 신해통공[6]을 적극 추진하는 입장에 섰다. 이것은 자유로운 상업의 발달을 하는데 이바지했고, 조선 후기의 경제가 크게 발달하는데 기여했다.[7] 그러나 노비종모법을 폐기해 많은 양인천민으로 돌리고 서얼 허통은 국법이 아닌 집안 별로 행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8]

이외에도 이조전랑의 권한인 정3품 이하의 관리 추천하는 통청권과 자기 후임을 지명하는 자대권[9]을 없애 당쟁을 완화하려 했다.


2.2. 남인의 집권을 위한 승부수[편집]


채제공은 영의정에 오른 직후 승부수로 사도세자의 신원을 하자는 동호지필(董狐之筆)이라는 상소를 올린다. 그러나 노소론을 막론하고 조정 내에서 반발이 심해지자 정조는 영의정 채제공을 파직하면서 벽파인 좌의정 김종수도 함께 파직해버린다. 이렇게 쌍으로 묶이며 임용과 강경 상소, 파직과 낙향을 반복하던 채제공과 김종수는 며칠 차이를 두지 않고 1799년 세상을 떠난다. 1800년 정조도 세상을 떠나니 정조 시대의 벽파와 남인의 대결도 이렇게 끝났다.

영의정까지 역임하며 당대 관리들은 물론 남인이란 것은 감안해서 엄청 성공한 채제공이 승부수를 띄운 것에는 이유가 있다. 과거 남인은 숙종 시절 갑술환국으로 사실상 박살났고 정조 시기 조정은 벽파가 원내 다수당이었다. 채제공은 이 판을 뒤집고 조정을 다시 남인 주도로 돌리기 위해 수시로 사도세자의 추숭을 건의했고 이에 따라 노론 벽파(특히 이들의 수장이었던 김종수)와는 극한 대립의 관계였다. 영의정이 된 이후 사도세자의 추숭을 건의하다가 바로 벽파의 역풍을 맞은 적도 있었다.[10]

사망하기 1년 전엔 정조가 은언군을 만나는 것을 반대하다 왕의 화를 사 잠시 파직됐다가 다시 복직했다.

이른바 다섯 신하인 김종수, 심환지, 정민시, 서명선, 채제공은 정조가 아끼고 신임했으나 거기까지였다. 개인적으로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 정도로 불협화음이 심했고 정조가 이를 조율하고 제어하는데 힘이 부칠 정도였다. 벽파이자 노론 강경파인 김종수, 심환지와 남인인 채제공의 관계가 좋지 않은 것은 당연할 수 밖에 없지만, 소론 서명선과의 관계도 좋지 않았다. 서명선 본인이 직접 채제공을 등용하면 본인을 역적이라고 칭하라며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서명선과 서명응 형제가 소론임에도 벽파 입장에 있긴 했지만. 재미있는건 5명 모두 1790-1800년대 사망[11]함으로써 정조조 준론 탕평의 막도 내리게 된다. 그만큼 정조의 준론 탕평에 있어 강한 상징성을 가진 인물들인 것이다.


2.3. 유생들과의 충돌[편집]


1790년(정조 14년) 7월 4일(음력 5월 22일)에 좌의정이었던 채제공이 갑자기 사직 의사를 나타냈다.

하루는 채제공이 권두(權頭)[12]와 함께 돈의문(서대문)을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김관순(金觀淳)과 김병성(金炳星)이라는 젊은 유생들이 두루마기도 걸치지 않은 채 서로 건방지게 팔짱을 끼고 가마 옆에 서서 곰방대를 물고 담배를 뻑뻑 피워대고 있었다. 그들의 행동을 보다 못한 권두가 담배를 그만 피우라고 훈계했다. 여기까지라면 어르신이 좀 예민한가 보다 하고 말 일 같지만 김관순이 이를 보고 내뱉은 한 마디가 일을 키우고 말았다.

내가 무엇 때문에 저자를 보고 담뱃대를 빼겠나(吾豈見渠而去竹乎)?

그러니까 "저 노인네가 뭔데 우리한테 담배 피우지 말라고 참견이냐"며 대든 것이다. 김병성은 돈령부(敦寧府) 참봉 김세근(金世根)의 아들이었고, 김관순은 동부(東部) 봉사(奉事) 김이의(金履毅)의 아들이었다. 돈령부는 왕실의 친족 중 종친이 아닌 인사들의 명단을 관리하는 부서이고 동부 봉사는 한성부의 동부 관아에 속한 관료이다. 종8~종9품 관료의 자식들한 국가의 재상에게 저 따위의 실언을 한 셈. 어이없어하며 아무 말도 못한 채제공 대신 권두가 하인들을 시켜 두 청년을 옥에 가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인정종(人定鍾)이 있은 후 3경쯤(밤 11시~새벽 1시 사이) 되었을 때 중부학당의 유생 수십 명이 옥사 앞에 몰려온 것이었다. 이들은 전옥서 관리들에게 '지금 갇혀 있는 유생은 곧 중부학당의 장의(掌議)[13]이며 또 소청(疏廳)의 담당자[14]이다. 너네 관원에게 말하고 대신에게 전달하여 풀어주는 것이 좋을 것'이라며 옥문을 때려부술 기세로 과격 농성을 벌였다. 만약 두 사람을 석방하지 않으면 전옥서의 관리를 죽이겠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비변사에서 전옥서 관리들에게 심문한 내용을 보면 더 가관이다. 전옥서 관리들이 이걸 입직관(入直官)[15]에게 보고했고, 입직관은 "이들은 대신(채제공)이 체포를 명령했으므로 대신의 허락이 없이는 함부로 석방할 수 없다"고 했다. 이 내용을 학당 유생들에게 말하였으나 유생들은 물러나지 않고 계속 버티고 서서 '아 됐고 풀어내라고' 식으로 전옥서 관리들을 거의 협박을 했다고. 이 과정에서 "너희들을 지금 당장 학궁으로 끌고 가서 때려 죽여줄까?", "우리가 지금 여기서 옥문의 자물쇠를 부수고 갇힌 사람 빼낼까?" 하는 식의 이게 학생이야 깡패야 살벌한 말이 유생들로부터 나오기도 했다.[16]

소식을 듣고 짜증이 치밀어오른 채제공은 두 청년을 형조로 넘겼다. 그러자 다음 날부터 유생들이 채제공을 욕하고 헐뜯는 사발통문을 돌리기 시작했다. 화가 난 채제공은 이들을 정식으로 고발해서 엄히 다스릴 작정을 했다. 그러나 김세근이 하인들 보는 앞에서 아들의 볼기를 치며 설설 기었고, 김관순의 할아버지도 채제공에게 '패역한 손자를 뒀다'는 내용으로 인편을 보내 애걸하니, 채제공도 이쯤하고 이 둘을 용서하게 된다.

위에 언급했듯이 두 사람의 아버지들은 각기 종8~종9품 정도의 미관말직 나부랭이였지만, 채제공은 그냥 정1품도 아니고 조정 내 인사권을 틀어쥔 판이조사를 겸직하는 최고의 실세인 좌의정이었고, 이것만으로도 엄청난데 당시 채제공은 조정의 독상(獨相)[17]이기까지 했다. 그나마 김병성·김관순은 김상헌·김상용의 후손이지만, 어찌됐건 말단직의 자식들이 왕의 신임을 받는 정승에게 무례한 짓을 했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오히려 가문 빽으로 무마되긴커녕 "자식 교육 똑바로 안해서 집안 망신만 시킨다"는 식으로 역풍 맞을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연좌의 풍습이 지금보다 훨씬 강한데다 예를 중시하는 조선 사회에서 채제공이 당한 모욕이면, 종8~종9품인 부친 따위는 파직으로 끝나면 다행인 수준이었으니 그냥 알아서 길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끝나면 좋았겠으나 일이 더 커졌으니, 난동을 일으킨 유생들이 도리어 '채제공이 유생들을 모욕했다'면서 '선비는 죽일 수 있어도 모욕할 수 없다'고 투서를 마구 쏟아냈다. '유생들을 모욕했다'느니 '선비는 죽일 수 있어도 모욕할 수는 없다'라는 말이 웃긴 게, 요즘 말로 번역하면 "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청년들, 국가의 꿈나무인 청소년들을 총리랍시고 이런 식으로 자기 권력을 이용해서 찍어누르고 창창한 애들 앞길을 막아도 돼?" 내지 "유교를 국시로 삼는 이 나라 조선에서 고위 관리랍시고 감히 선비를 탄압하려 들다니!" 라고 한 것이다. 처음부터 누누이 설명하지만 잘못을 저지른 쪽은 유생들로, 윗사람 앞에서 담배를 피운 걸 걸리자 '내가 왜 꺼야 하냐'는 수습 불가능한 망언을 했다. 정치적인 목적이 있다고 한들, 애초에 그 유생들이 채제공에게 행한 행동에 대한 제재도 할 수 없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봐도 말이 되지 않는다.

이에 폭발한 채제공은 조정에서 대놓고 이렇게 말했다.

대낮 큰 길가에서 홀옷 차림으로 담뱃대를 피워물고 대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어찌 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앞으로 선비라는 이름으로 온갖 패악질을 해도 가만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관직을 박차고 나가려 했다. 정조는 황급히 채제공을 어르고 달랜 뒤, 전옥서 난동의 주동자 이위호(李偉祜)에게 과거 응시 종신 금지를, 가담한 조학원(趙學元)·윤선양(尹善養)·원재형(元在亨)·원재행(元在行) 등에게는 응시 10년 금지를 먹였다. 그리고 김정순(金鼎淳)에게는 군역에 복무하게 할 것을 명령하였다. 과거시험이 당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생각한다면, 주동자에게는 거의 매장 선고였다. 더 나아가 정조는 '이딴 짓거리에 가담한 놈들은 선비도 아니다'라 하며 아예 유적(儒籍)[18]에서 이름을 빼버리고, 이 불량유생들이 처벌받은 기록을 널리 알려 다른 선비들의 반면교사로 삼도록 명령하였다.

조선시대 당시에 과거 응시를 금하고 유적에서 뺐다는 것은 양반의 자제가 성인 양반으로 인정받기 시작하는 유생의 자격을 박탈한 것으로, 생원시나 진사시에도 응시를 할 수 없으니 관직에 진출하기는 커녕 양반의 자격도 유지할 수 없고 평민들처럼 군역과 노역의 의무를 지도록 하는 사실상의 폐서인 조치였다. 행패를 부린 이 유생들은 본인 뿐만 아니라 후손들 신세까지 망친 것이다.

이 사건을 굳이 현대로 비유하면 이렇다.
  1. 국무총리 자리와 두 명의 부총리 중 한 자리가 공석인 상황에서 사실상 총리 대행으로서 업무를 수행하던 부총리[19] 길을 가다가, 불량한 자세와 옷차림을 하고 있는 미성년자 내지 20대 대학생(혹은 공시학원에 다니는 공시생) 2명이 할아버지뻘 되는 부총리 앞에서 담배를 피운 것도 모자라 싸가지 없게 반응했다.
  2. 부총리의 수행비서가 이들에게 어른을 대하는 태도가 불량함을 지적하자, 오히려 부총리를 "뭐래 저 꼰대가 ㅋㅋㅋ" 이렇게 모욕해버렸고[20] 이에 분노한 수행비서가 경찰에 신고하여 2명을 근처에 있는 파출소 유치장으로 보냈더니, 이 2명의 친구들이 한밤중에 해당 파출소에 떼로 몰려가서 자기 친구들을 유치장에서 풀어달라고 깽판을 치고, 심지어 이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근무하던 서울지방경찰청 소속 경찰공무원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한다.[21]
  3. 당연히 부총리는 제대로 분노하여 사건의 시발점이었던 두 청년을 정식으로 고소한 다음에 경찰서 유치장을 습격한 학생들까지 고발하면서 그들 전부를 엄벌하려고 했으나, 그의 인사권 하에 있는 행정부 소속 중·하급 공무원이자 담배를 핀 2명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국무총리가 보는 앞에서 사고를 친 아들·손자들을 구타함과 동시에 사죄하자, 부총리가 받아들이면서 사건을 마무리지으려고 했다.
  4. 그런데 파출소에서 행패를 부린 당사자들이 국무총리와 행정부처 소속 공무원들에게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반성하기는커녕, 국민청원SNS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가 청년들을 억압한다"고 해당 사건을 왜곡하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일삼자 분노한 부총리가 기자회견을 열어 "부총리짓 못해먹겠네 ㅅㅂ"이라고 울분을 터뜨린다. 이 사태에 정치 입문 때부터 부총리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던 대통령이 그를 진정시킨 다음, 행안부와 교육부에 지시해 사건의 시발점이였던 두 학생의 친구들 중 파출소로 쳐들어가 행패를 부린 주모자에게는 국가시험 응시 자격을 영구 박탈, 나머지 친구들에게는 국가시험 응시 자격을 10년간 박탈하는 조치로 끝나지 않고, 이들이 소속된 학교(학원)에서도 퇴학(출학)하도록 하는 동시에, 대한민국 정부가 국민에게 제공하는 권리를 거의 모두 박탈하는 징계를 취했다.

즉 현대 기준으로 재해석해도 정신이 어지러워질 수준의 사건이였던 셈이다. 현대에도 뿌리 깊게 남아있는 공무원 선호 사상과 당시의 유교적 출세주의를 생각해봤을 때, 당사자들은 제대로 사회적 매장을 당한 셈이며, 현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봐도 어처구니없는 사건이다. 예나 지금이나 발 뻗을 자리를 보고 뻗어야 하며, 명분이 없으면 개기면 안 된다는 걸 잘 보여주는 사건. 또한 해당 시기에 담배를 둘러싼 폐해가 유교 사회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22]

이상 이야기의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정조 14년 5월 22일 임인 4번째 기사이다. 이 이야기는 인터넷 상에서도 '사람 사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 없다'의 예시로 인용되고 있다.##


2.4. 사후[편집]


채제공은 정조가 승하하기 1년 전인 1799년에 사망하였다. 그리고 실록은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정조가 상당히 애통해하다고 기록하였다.

저녁부터 새벽까지 백성을 걱정하는 한 생각뿐이었는데, 이제 채제공이 별세했다는 비보를 들으니, 진실로 그 사람이 어찌 여기에 이르렀단 말인가. 내가 이 대신에 대해서는 실로 남은 알 수 없고 혼자만이 아는 깊은 계합이 있었다. 이 대신은 불세출의 인물이다. 그 품부받은 인격이 우뚝하게 기력(氣力)이 있어, 무슨 일을 만나면 주저없이 바로 담당하여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굽히지 않았다. 그 기상을 시(詩)로 표현할 경우 시가 비장하고 강개하여, 사람들이 연조비가(燕趙悲歌)의 유풍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젊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여 이때부터 영고(寧考)(영조)께 인정을 받아 금전과 곡식을 총괄하고 세법(稅法)을 관장하였으며, 어서(御書)를 윤색(潤色)하고 내의원(內醫院)에 있으면서 선왕의 옥체에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매양 주대(奏對)할 적마다 선왕의 웃음이 새로웠는데, 그때는 그의 수염이 아직 희어지지는 않았었다. 내가 즉위한 이후로 참소가 여기저기서 빗발쳤으나 뛰어난 재능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는데, 극히 위험한 가운데서 그를 발탁하여 재상 지위에 올려 놓았었다. 이어 내각(內閣)에서 기사(耆社)로 들어갔고, 나이가 80이 되어서는 구장(鳩杖)[23]

을 하사하려고 했었다. 그 지위가 높고 직임이 나와 친근하였으며, 권우가 두텁고 은총이 성만하여 한 시대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입을 못 열고 기(氣)가 빠지게 하였으니, 저렇듯 신임을 독점했다고 이를 만한 사람으로서 옛날에도 들어보기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50여 년 동안 조정에 벼슬하면서 굳게 간직한 지절은 더욱 탄복되는 바인데, 이제는 다 그만이구나. 죽은 판부사 채제공 집의 모든 일에 대해서는 의당 관례에 의거해서 거행하되, 승지가 치조(致吊)하는 일은 홍 영부사(洪領府事)[24]의 전례에 의거해서 하고, 내각의 속관을 보내어 상제(喪制)를 돌봐주는 일과 호상(護喪)하는 등의 절차에 대해서는 각신(閣臣)과 대신의 전례에 의거해서 할 것이며, 성복일(成服日)의 치제(致祭)는 승지가 스스로 의당 거행할 것이나, 내각의 치제에 대해서는 또한 김 봉조하(金奉朝賀)[25]의 전례에 의거하여 제문(祭文)을 지어 내리기를 기다려서 각신을 보내 거행하도록 하고, 녹봉은 3년 동안 그대로 보내주도록 하라. 그리고 장사지내기 전에 시호를 의정하도록 하라."하였다. - 정조 23년(1799년) 1월 18일의 기사

정조 사후 1801년 그는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인한 천주교 탄압이 시작되면서 삭탈관직됐으나 1823년 영남만인소로 원상 회복되었다.

김종수가 세상을 떠난 이후 벽파는 정순왕후수렴청정과 함께 몇 년이나마 집권했지만 남인은 채제공 이후로 정승 하나도 배출 못할만큼 위축되고 신유박해로 그야말로 정계에서 퇴출당한다. 당초 채제공은 영조 시대의 탕평 분위기를 타고 성장했으나 정조가 채제공의 후임으로 키우려던 이가환형조판서를 1번 역임한 것 외에는 서인들의 반발로 인해 정승에 올라가지 못했다. 서인 일변도의 정국에서 채제공의 입지가 그만큼 불안했다는 증거이지만 거꾸로 말하면 남인에게 그만큼 중요한 거물이었다는 뜻.


3. 여담[편집]


  • 1751년 약 1년 간 강원도 삼척으로 유배를 갔는데, 어느 중인의 묘소가 있는 선산을 명당이라 하여 탈취하여 고발당했기 때문이다. 당시 9품 미관말직에 숨만 붙어있는 남인이었음을 생각하면 매우 경솔한 행동이었다.

  • 채제공의 초상화를 보면 왼쪽 눈이 바깥쪽으로 돌아가 있는데 잘못 그린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시였다.
  • 그가 현직 재상에게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도움을 청하자 재상이 지필묵을 주니 그는 아무리 가난해도 손수 물건을 들고 가는 건 아니지 않나고 하자 재상이 사과하고 하인에게 지필묵을 들고 가게 했다. 그리고 그가 문을 나서다가 추위를 견디기 위해 등에 넣어두었던 개가죽이 떨어지자 사람들이 비웃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인에게 개가죽을 등에 다시 넣어달라고 부탁한 다음 제 갈 길을 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 서학 유포와 관련된 정조와의 대화에서 천주교에 대한 견해를 다음과 같이 표명하였다.
그 가운데 좋은 것도 간혹 있으니, 이를테면 하느님[上帝]이 굽어살피시어 사람들의 좌우에 오르내리신다는 설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만 그 인륜을 무시하고 상도(常道)를 배반하는 것 가운데 큰 것으로는, 저들이 높이는 대상이 하나는 하느님[玉皇], 하나는 조물주[26][造化翁]이고, 제 아비는 3번째로 여기니 이는 아비를 무시하는 것이고, 저들 나라 풍속은 남녀의 정욕이 없는 자를 정신이 응집(凝集)된 사람이라 하여 그를 나라의 군주로 삼는다 하니 이는 임금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 학설이 행해지면 그 폐해가 어떠하겠습니까. 그 말에 있어서는 비록 불교를 배척한다고 하지만, 대개 불교의 일면의 소견을 훔쳐다가 자기들의 교리로 삼았으니 이는 불교 중의 별파(別派)입니다.
(중략)
그 책에 ‘하느님이 내려와서 예수가 된 것이 중국에 요(堯)·순(舜)이 있는 것과 같아 소경을 눈을 뜨게 하고 절름발이를 잘 걷게 하였다.’ 하였으니, 이것은 허무 맹랑한 말입니다. 하늘의 문을 열고 날아서 들어간다는 설에 이르러서는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 46집3면 정조 12년 무신 8월3일 임진일의 기사

다음은 진산 사건이 일어난 후의 일이다.

그 학술은 오로지 천당과 지옥의 설이 중심인데, 그 본뜻은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자는 것에서 생긴 듯하나, 그 폐단은 마침내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이른바 아비가 없다고 한 말은, 아비로 섬기는 것이 셋이 있는데, 그중에 상제(上帝)를 높여 첫째 가는 아비로 삼는 것은 그나마 서명(西銘)의 ‘하늘을 아버지라 부른다.[乾稱父]’는 뜻에 속하지만, 조화옹(造化翁)을 2번째 아비로 삼고 낳아준 아비를 3번째 아비로 삼는 점에 있어서는 윤리가 없고 의리에 어긋나는 설입니다. 임금이 없다고 한 말은, 그 나라의 풍속은 본디 임금이 없고 일반 백성 가운데 뛰어난 자를 골라서 임금으로 세운다 하니, 더욱 흉악합니다. 또 그들은 말하기를 ‘사람이 죽으면 선을 행한 자는 천당으로 돌아가지만 악을 행한 자는 지옥으로 빠진다. 그러니 비록 제사를 지내더라도 천당으로 돌아간 자는 반드시 기꺼이 와서 흠향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지옥에 빠진 자는 또한 와서 흠향할 수가 없다. 그러니 쓸데없는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예의의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도리어 요망한 설에 미혹되니, 실로 가증스럽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15년 10월 25일 병인일의 기사

  • 그에 관련된 유명한 이야기가 하나 있다. 옛날에 가난해서 부잣집 사람들에게 많은 놀림을 받았으며, 산사에서 1년 간 공부한 뒤 각자 시를 쓰면서 회포를 풀었는데 그 때 그가 쓴 시는 다음과 같다.
가을바람 불 때 해묵은 잣나무에는 매가 새끼를 치고(秋風古栢鷹生子)
눈 내린 달 빈 산에는 호랑이가 정기를 기르도다(雪月空山虎養精)
이런 시를 듣자 어느 재상집[27] 아들이 아무런 의미 없는 시 아니냐며 아버지께 말하자 아버지 왈, "에구 네가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매는 가을에 새끼를 치지 않으니 가을에 매가 새끼를 친다는 말은 너희처럼 겉모양만 그럴듯한 양반가 사람들을 디스하는 것이고, 눈 내릴 때 호랑이가 정기를 기른다는 말은 자기가 곧 호랑이처럼 크게 될 것이니 두고보라는 것이다." 라며 채제공은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
  • 이런 일화도 있다. 1774년(영조 50)때 평안도 감사로 일하던 채제공에게 있던 이야기다.[28]
당시 한양에 살고 있던 채제민(蔡濟民)이라는 젊은이가 사업을 하기 위해 평양으로 이사를 했다. 그런데 돌아갈 노자(路資)마저 못 챙기고 사업이 쫄딱 망해 발이 묶이고 말았다. 그 때 그가 묵고 있던 집의 주인이 자신의 딸과 채제민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임을 눈치채고는 한양 출신 양반이니 뭐 있겠거니 싶어 그를 데릴사위로 삼았다. 그러나 결혼 후 채제민은 하는 일 없이 빈둥빈둥 지냈고[29] 당연히 그의 장인·장모는 그를 구박했다.
그러다가 '채제공'이란 감사가 새로 부임해오자 채제민의 장인은 '혹시?' 싶어 "채제공이란 사람을 아느냐"고 물었다. 장인·장모의 괄시가 너무 심했던 나머지 채제민은 장인에게 채제공이 자신의 4촌 형님이라고 거짓말을 하고야 말았다. "잭팟이다!" 쾌재를 부른 장인은 사위에게 얼른 4촌 형님인 채제공에게 인사 한 번 드리러 가자고 한다.
구박은 뚝 끊겼지만 장인이 '평안 감사 채제공이 자기 사위의 4촌 형님'이라고 자랑을 하고 다니자 속이 타기 시작한 채제민은 장인·장모 몰래 홀로 채제공을 찾아간다. 채제공은 그의 이름을 듣자 '어라? 나와 항렬이 같지 않은가?'[30] 하더니, 자초지종을 듣고는 "내가 너의 4촌 형 노릇을 해주면 될 것 아니냐?" 하고, 자신의 처자식에게 채제민을 간만에 본 4촌 동생이라고 소개해주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나중에 사돈(?) 앞에서도 천연덕스럽게 "얘(채제민)와 연락이 끊긴 지 오래여서 어떻게 사나 했는데, 댁내에 거두어주시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잘 맞아주었다.
그리고 채제민은 채제공의 평안 감사 임기가 끝나자 그와 함께 한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현재 서울 종로구 돈의동에 아랫채와 윗채 두 집을 짓고서 윗채에는 채제민이 살고, 아랫채에는 채제공이 살아 의(義)를 두텁게 했다.
이두호 화백의 역사만화[31]에서도 이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는데, 채제공의 평안감사 부임연 자리에서 '4촌 동생을 사위로 삼았더라'는 장인의 말에 영문을 모르던 중 채제민이 귓속말로 이실직고하자 벌컥 화를 내며
에잉, 이런 천하에 고얀 놈 같으니…너는 어찌하야 이 종형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혼인까지 다 하였단 말이냐?
고 은근슬쩍 맞장구를 쳐준 뒤, 청하에 있던 장인에게 내 아우를 보살펴주셔서 참으로 고맙고 은혜가 산 같다며 감사 인사를 하더니 사돈(?) 어른이라며 자기와 같은 자리에 앉히고 술도 올리는 등, 평양의 내로라하는 지역 유지들 앞에서 장인의 체면을 세워주고 채제민을 자신의 4촌 동생으로 공인하는 좀 더 극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여담으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돈의동의 원래 명칭은 정말 따로 있었지만 이 둘이 이곳에 살기 시작하면서 돈의촌 ~ 돈의동으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 본인의 저서로 《번암집》 59권이 있는데, 정조의 친필과 교지를 포함시켰다. 그전에도 경종수정실록, 영조실록, 일성록, 국조보감 편찬에도 참여했다.
  • 허목과 채제공 자신과 친분이 있었던 안정복의 견해에 영향을 받아 민족의 시조는 단군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허목 본인도 본인의 저서 동사에 단군세가(檀君世家)를 싣기도 했다.

  • 본인에겐 자식이 없었지만 조카들을 키웠다. 둘째 여동생이 시가가 가난해서 어쩔 수 없이 친정인 채제공의 집에 와서 생활했다. 이 때 여동생의 자녀, 즉 채제공의 조카들은 총 5명이었는데 채제공이 귀가하면 서로 맞이하겠다며 다툴 정도로 채제공을 잘 따랐단다.


4. 가족 관계[편집]




  • 증조부: 시상(時祥)
    • 조부: 참판 성윤(成胤, 1659~1733)
      • 삼촌: 응만(膺萬)
      • 삼촌: 응종(膺鍾)
      • 삼촌: 응팔(膺八)
      • 부모: 지중추부사 응일(應一, 1686~1765), 연안 이씨[36]
        • 부인 동복 오씨[32]
        • 부인 안동 권씨[35]
          • 양자[34]: 홍원(弘遠, 1762~1832). 이조참의·형조참판
            • 양손[33]: 과영(果永, 1804~1852). 1852년(철종 3년) 문과 급제
          • 서자: 홍근(弘謹)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각각 75세, 80세로 장수한 편이다. 본인도 80세까지 당대 기준으로 장수할 수 있던 것은 유전의 영향일 있었을 것 같다.


5. 대중매체[편집]



5.1. 소설[편집]


  • 소설가 이인화의 베스트셀러인 <영원한 제국>에서는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주인공이 속한 남인의 대표로 자주 언급되는데 채제공이 역사 인물로 대중에게 알려진 계기이다.


5.2. 만화[편집]


  • 1990년대에 나온 학습만화 중 따옥이 만화 <채근담>이라는 책에서는 어처구니없는 모습으로 왜곡되어서 나왔다. 어린 시절 천재여서 기대를 받았으며 일찍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 자리를 받아 출세했다가 젊을 때부터 청탁도 받고 일은 하지 않고 기생을 끼고 을 마시며 놀다가 그 소식을 들어 분노한 왕에게 벼슬을 박탈당하고 쫓겨나면서도 후회하기는 커녕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신나게 웃으면서 "모아둔 돈이 많다"며(먼저 언급된 청탁 부분으로 뇌물을 잔뜩 받아서 재산이 많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평생 놀 수 있다"고 계속 술을 마시고 기생집에 가면서 여자를 끼며 놀다가 늙어서 재산을 다 날리고 집까지 팔아서 초라한 오두막에서 늙어죽어 인생을 망쳤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나왔다. 실제로 분노한 후손 측에서 해당 출판사인 파랑새에 항의해서 출판사는 사과하고 내용을 바꿨다고 한다.
  • <조선왕조실톡>에서도 사시인 것을 언급했다.
  • 윤승운 화백의 만화 맹꽁이 서당에서는 7권에 등장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양반임에도 가난하게 지냈지만 기개와 학식을 겸비했던 비범한 면모,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꿋꿋이 공부를 하며 내공을 키운 싹싹한 젊은 시절, 홍봉한의 목숨을 구해준 인연, 체제민이라는 청년을 자신의 사촌으로 받아주며 형제의 의를 지켜나간 일화 등을 다루었다.[37] '사도세자의 후견인'이나 '남인의 영수'로서의 행적은 많이 생략되었고, '공자의 제자 안회처럼 가난했지만 똑똑하고 꿋꿋하게 실력을 키워나간 인재',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정조의 애민정책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청백리 관리'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졌다.


5.3. 드라마[편집]


  • 1989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에서는 배우 강성욱[38]이 연기했다. 9부 《한중록》에서 임오화변 당시 모친상을 당해 내려가 있다가 상복을 입은채로 상경하여 대궐 앞에서 눈물로 사도세자 구명을 호소하는 모습으로 첫 등장하여 10부 《파문》까지 그대로 출연한다.
  • 2000년 KBS 드라마 <소설 목민심서>에서는 배우 전무송이 연기했다.
  • 2007년 MBC 드라마 <이산>에서는 배우 한인수가 연기했다.
  • 2008년 SBS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는 채제공을 닮은 단역 배우가 연기했다. 김홍도신윤복이 상상만으로 초상화를 그리는 대결을 할 때 "고명한 정승의 초상화를 사시로 그리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공격을 받자 채제공 본인이 등장해서 사시인 것을 인증하고 꼭 닮게 그렸다고 칭찬하니, 김홍도&신윤복 팀의 승리를 확정짓게 된다. #
  • 2010년 KBS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에서는 배우 김익태가 연기했다.


5.4. 영화[편집]


  • 2015년 개봉한 영화 <사도>에서는 배우 최민철이 연기했다. 모친상을 당해 내려가 있던 <조선왕조실록>과 다르게 나올 때마다 세자의 처분을 거두어달라고 청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세자를 모시다가 연좌제로 가문이 해를 입을거나 걱정하던 신하들에게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 당신들 가문 걱정할 때냐"고 일침을 날리거나 편집된 장면에서 경연 중 영조에게 "세초 명령까지 포함하여 임오화변에 있던 일을 다 기록할 것"이라고 말하는 등 강직한 모습으로 나온다.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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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705025_001[2]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706004_001[3] 시파는 노론뿐만 아니라 소론과 남인도 섞였다.[4] 墳山, 분묘를 쓴 산.[5] 하지만 친하다고 보기에는 무리인게 1779년(정조 3년) 홍국영과의 마찰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던 적이 있었다.[6] 육의전을 제외한 나머지 시전 상인의 특권(금난전권 등)을 박탈해 자유로운 상권 보장. 육의전은 비단, 무명, 종이, 모시, 생선, 명주 등을 말한다.[7] 물론 당연하게도 시전 상인들은 채제공의 행차까지도 막아가면서 원상 복귀를 호소했지만 정조도 채제공만큼이나 정책을 지지해서 결국 신해통공이 이루어졌다.[8] 평안병사 시절에는 이런 논지 때문에 서얼에게 멱살이 잡히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9] 이 자대권이 동서분당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10] 벽파가 직접적으로 사도세자의 죽음에는 책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서지 않은 것은 그것이 채제공의 남인이 내세우는 논리였기 때문이다. 남인은 '사도세자의 죽음은 세자 본인의 과실이 아니라 모함이었고 사도세자의 죽음을 일으킨 것은 당시의 조정 세력이다'라는 논리를 폈고 그렇게 되면 당시의 집권당인 노론은 연산군 때의 갑자사화처럼 쓸려나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모함은 실제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고 세자 제거의 주체는 영조라는게 정설이지만 정조와 시파가 세자를 신원하고 추숭하려는 마당에 왕조 국가의 특성상 감히 선왕이 잘못했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책임은 당시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노론에게 돌아간다. 남인은 이걸 노리고 추숭 지지파인 시파로 들어간 거기도 하다.[11] 서명선(1791 졸), 채제공(1799 졸), 김종수(1799 졸), 정민시(1800 졸), 심환지(1802 졸)[12] 정1품 아문에서 보좌관 역할을 하는 일종의 비서. 주업무는 경호.[13] 지금의 학생회장.[14] 소청은 유생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조정에 상소하는 일종의 민원 창구이면서, 동시에 조정에 대해 유생들의 의견을 대변하는 언론 창구의 역할도 있었다. 즉 '소청의 담당자'를 강조한 건 '그를 옥에 가둬두는 건 유생들의 여론을 탄압하는 행위'라고 압박하는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대형 언론사 대표가 어떤 비리 혐의로 검찰에 구금되는 경우, 언론에서 앞다투어 정권이 '언론 길들이기' 하려는 것 아니냐는 보도를 내는 것과 같다.[15] 이날 당직 책임자.[16] 다만 비변사에서 조사·보고할 때는 "그때에 전옥서의 관리가 여러 유생들의 공갈을 못 이겨 대신에게 가 보고할 때 사실을 더 보태어 대신을 놀라게 할 계책을 쓴 것은 이상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라고 보고했다. 전옥서 관리들의 진술에 나온 유생들의 깽판이나 막말이 사실 그대로일 리는 없고, 서로 간에 감정이 좀 격해지다 보니 어느 정도 와전된 말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17] 독상은 삼정승이 모두 갖추어 재임하지 않고, 그 중 한 정승만이 재임하여 다른 정승들의 업무와 권한을 행사하던 일, 혹은 그런 정승을 이야기한다. 즉, 당시 채제공은 조정의 수상(首相)이자, 병권을 책임지는 판병조사이기까지 했다는 것이다.[18] 유학자들의 가계·학통 등을 기록하는 문서[19] 사실 현대의 대한민국에는 감사원장이 부총리보다 국가의전서열이 높은데다, 좌의정의 위상이나 업무는 부총리보다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장에 가깝다(다만 국가수반 권한대행의 순서를 따질 경우, 부총리는 국무총리 다음인데 비해서 감사원장은 18부의 장관보다 순서가 늦다). 다만 조선시대에는 중앙정부가 입법·사법·행정권을 모두 행사한데다, 오늘날의 감사원에 해당하는 사간원은 수장조차 정2품이 최대였기 때문에, 정1품인 좌의정보다 훨씬 급이 낮았다. 따라서 사건 당시 채제공의 위치는 부총리와 제일 가깝다고 볼 수 있다.[20] 그것도 상대가 누군지 모르고 그런 것도 아니고 아는데도 말이다! 심지어 이름까지 내뱉었으니 현 시점에서도 굉장히 무례한 행위.[21]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경찰한테 이 따위로 행패를 부리면 형사처벌에 들어간다. 10대 후반~20대니 촉법소년도 적용 안 된다.[22] 담배에 의한 폐해는 숙종 시기의 이익 시기부터 지적되어왔지만, 이 사건이 일어난 정조 시기에는 담배의 사회적인 폐해에 대해서 지적이 많이 되고 있었다. 다만 왕인 정조가 골초여서 딱히 제대로 된 결론은 안 나왔다.[23] 손잡이에 비둘기를 새긴 지팡이. 임금이 70세 이상의 공신이나 원로 대신에게 주던 것으로 이것을 하사받는 건 신하로서 최상의 예우를 받는 셈이다.[24] 정조의 모친 혜경궁 홍씨의 6촌 형제이자 영의정을 지닌 홍낙성이다. 그는 1년 전인 1798년에 세상을 떠났다.[25] 좌의정을 역임한 김종수이다. 그는 노론 벽파의 거두로서 채제공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다. 하지만 심환지와 같은 강경파는 아니었으며 사안에 따라서는 협력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채제공보다 11일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거의 열흘 간격으로 두 당파의 핵심 지도자가 사망한 것은 유례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뿐만아니라 1년 후인 1800년, 정조가 승하하기 직전 총신이자 시파의 중진 정민시마저 사망하면서 정조의 건강은 더욱 악화된다.[26] 순서상 예수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27] 위에서 채제공이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지필묵을 청하러 갔던 그 재상이라고도 한다.[28] 참고로 박문수에게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29] 80년대 어느 한국만화에선 이걸 각색해서 채제민이 장사치로 일했지만 돈도 못 벌고 하다못해 집에서 나무를 패는데 2조각낸 나무땔감이 장독대를 깨부수는 개그로 각색되어 나왔다. 산에서 나무라도 베려고 하다가 사유지로 들어가 나무를 베는 통에 사유지 주인에게 두들겨맞고 나무를 상처입은 댓가로 지게와 도끼를 돈대신 주고 집으로 와야했다. 채제민은 불같이 화낼 장인을 피하려고 몰래 들어왔지만 장인이 방안에서 분노한 채로 기다리고 있어서 몽둥이를 내던져 맞고 별을 보는 것으로도 나온 바 있다….[30] 그러나 그의 돌림자는 '제'가 아니라 '공'이다. 이 일화가 훗날 만들어졌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31] 우리 선조의 참다운 삶 슬기로운 삶 - 역사 속의 인물들이 남긴 멋과 기지의 자취, 성심도서, 1992년작 관련 링크[32] 오필운(吳弼運)의 딸[33] 조카 홍기(弘璣)의 아들[34] 6촌 동생 민공(敏恭)의 아들[35] 권상원(權尙元)의 딸[36] 이만성(李萬成)의 딸.[37] 두 사람이 같이 살았던 동네는 형제간의 의리가 두텁다는 뜻에서 돈의동이라 불렸다. 위치는 현재의 종로 3가.[38] 3부 《설중매》에서는 정창손역, 5부 《임진왜란》에서는 류성룡 역, 11부 《대원군》에서는 오경석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