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가와 키요히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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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편집]


中川清秀. 1542년 ~ 1583년 6월 10일(음력 4월 20일) 전국시대 인물. 세베에(瀬兵衛)라고도 부른다.

덴분 11년 (1542년) 셋츠노쿠니(摂津国)[1] 후쿠이 마을 나카가와하라(현재 오사카부 이바라키시)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셋츠의 호족이었던 이케다 가쓰마사를 섬겼고 오다 노부나가가 상경하자 이를 따라갔는데 나중에 이케다 가에서 내분이 일어나 가쓰마사가 추방되고 이케다 토모마사가 당주가 되자 잠시 오다 가문과 적대했다.

겐키 3년(1572년), 마찬가지로 토모마사를 모시고 있었던 아라키 무라시게와 함께 오다의 와다 코레마사를 물리치고(시라이카와라 전투), 전후 이바라키 성의 성주가 되었다. 이후 셋츠에서 유력했던 와다 씨 및 이바라키 씨, 이타미 씨, 이케다 씨가 잇따라 쇠퇴 몰락하자 아라키 무라시게, 다카야마 나가후사(다카야마 우콘)와 함께 셋츠에서 독립 세력이 된다. 후에 노부나가가 아라키 무라시게를 셋츠의 영주로 삼자 키요히데도 그를 따랐다.

덴쇼 6년(1578년), 아라키 무라시게가 오다 노부나가에 대해 반기를 들자(아리오카 성 전투) 함께 노부나가에게 적대했지만, 오다 군이 대거 공격해 오자 항복. 노부나가의 가신이 되어 반대로 무라시게를 공격하게 되었다. 그 후 니와 나가히데와 이케다 츠네오키 휘하에서 전투를 벌이게 된다. 덴쇼 10년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횡사한 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측에 붙어 야마자키 전투에서 활약했다.

덴쇼 11년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도 히데요시 측 선봉으로 참전했지만 오이야마 산성을 다카야마 우콘, 미요시 히데츠구[2]와 함께 지키고 있을 때, 시바타 군의 용장 사쿠마 모리마사의 맹공을 당하고 분전했지만 전사했다.[3]

사세구는 중천[4]도 이제는 삼도천이로다. 어차피 같은 여울[5]일지니, 내 이 몸 잠길지라. (中川も 今は三途の 川ぞかし 同じ淵瀬に 身をば沈めむ)

그의 장남 나카가와 히데마사는 이런 아버지 덕에 히데요시의 총애를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에 군감으로 참전해서 전투도 아니고 매사냥 중에 기습을 맞아 사망하여 히데요시를 격노케 했다[6].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평수정(平秀政/平秀正)이라는 이름으로 기록이 나오고, 북경으로 압송[7]했더니 참형[8]했다고 하는 기록도 있다.[9]

그의 차남 히데나리는 하필이면 아버지의 원수인 사쿠마 모리마사[10]의 딸과 결혼했고 그녀를 깊이 사랑해 결국 히데나리의 아들이 사쿠마 가를 잇게 된다.[11] 아들 키워봤자 다 소용없다 일본어 위키에는 히데마사가 그런 식의 죽음으로써 가이에키[12] 당할 것을 두려워해 전사라고 거짓보고했지만 사실을 알게 된 히데요시가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그래도 키요히데의 공을 봐서 절반으로 감봉해도 히데나리가 나카가와 가문의 영지를 잇는 걸 허용했고, 이후 에도 막부 시절까지 살다 아들에게 물려줬다고 한다. 다만 아들 중에 사쿠마성을 가진 사람이 있는 걸 보면 사쿠마가를 이었을 수도 있지만, 역시나 그 사람이 히데나리의 아들인가는 출처가 필요하다고 기술되어 있다.


2. 일화[편집]


야마자키 전투 후, 가마를 타고 영내를 돌아보던 히데요시가 키요히데의 진영에서 "세베에, 수고했네(骨折り)"라고 하자, 키요히데는 "원숭이놈아, 벌써 천하를 손에 넣은 기분이냐?"라고 대갈하였다고 한다. 이에 히데요시는, 못 들은 척 지나갔다는 일화가 있다. 그래서 미끼로 쓰여서 쓱싹당한걸지도


3. 대중매체에서[편집]



3.1. 군사 칸베에 [편집]


아라키 무라시게가 반란을 일으키도록 꼬드겨놓고서는 우콘이 기독교도들을 인질로 삼은 노부나가에게 어쩔 수 없이 항복하자 곧이어 항복하는 황당한 짓을 저지른다. 이런 놈을 중신이라고 크게 썼던 무라시게만 불쌍하다.


3.2. 슈팅 게임 바사라2[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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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요시의 원한을 되갚아주마!


최종 스테이지 2번째 중간보스로 등장. 히데요시의 원수를 갚겠다며 덤벼온다.

마지막 스테이지의 갑옷 메카라서 탄막 패턴 자체도 성가시고, 오른쪽에서 끝없이 나오는 나타나는 4족 보행병기도 굉장히 짜증난다. 모아베기를 필수로 사용해야 하는데 메카가 공격하는 탄을 소거해주면서 4족 보행병기를 동시에 파괴해야한다. 게다가 메카의 근접 참격이 리치가 커서 메카까지 유도해주어야 하는데다가 4족 보행병기 뿐만 아닌 다른 졸개들까지 덤비기 때문에 6스테이지 최대 난관.

보스도 나온 후 도망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지 않기 때문에 스코어링을 위해서는 속사가 필요하다.


3.3. 효우게모노[편집]


주인공 후루타 사스케의 아내인 오센의 오라버니로 등장. 차에 열중하는 매부 사스케와는 대조적으로 거친 무사로 묘사된다.[13]

야마자키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을 때 나중에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식들을 부탁한다며 사망 플래그를 강하게 꽂은 후 당연하다는 듯이 1년이 채 못되어 전사. 사스케는 처남의 아들이 장성할 때까지 그의 후견인을 맡기로 하다가 이후 히데요시에 의해 오리베노카미의 관위에 오른 후부터는 조카에게 위임하게 된다.


3.4.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편집]



혁신, 천도

이 능력치로는 히데요시의 원수를 갚을 길이 없다... C급 졸개무장.

태합입지전 5에도 등장하지만 역시 졸개급. 기능 3레벨 이상을 찍은 게 하나도 없으며 능력치도 가장 높은 통솔이 63밖에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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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오사카부 북중부의 대부분과 효고현 남동부에 해당한다.[2] 도요토미 히데츠구, 이시기엔 아직 미요시 성(姓)을 사용하고 있었다.[3] 이것은 히데요시가 노린 것이다. 양측의 방어가 공고해서 먼저 공격하는 쪽이 질 정도였는데, 사쿠마의 공격으로 시바타 군의 방어선이 흐트러졌다. 나카가와가 전사하는 피해는 입었지만 하시바 군의 방어선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고, 곧 회군해서 역습한 하시바 군의 공격에 시바타 군은 박살나고 사쿠마는 잡혀서 책형당하며 시바타는 불타는 성 속에서 자결하게 된다. NHK대하드라마 토시이에와 마츠(2002년), 공명의 갈림길(2006년)에 이 부분이 잘 나온다. 정작 이 문서의 주인공은 "나카가와 세베에 전사!"라는 보고 한줄이 끝이지만(...)[4] 中川. 나카가와 자신.[5] 여울. 단, 여기서는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같이 전사한 일족, 후치노스케(中川淵之助)와 자신을 묶은 중의적 의미.[6] 정확하게는, 전장에서 이렇게 딴짓하다 죽으면 가독을 상속하지 못하게 되는데, 이걸 전사했다고 거짓 보고를 했다가 걸려서 분노를 산 것[7] 선조실록 113권, 선조 32년 5월 20일 정묘 4번째 기사[8] 선조실록 116권, 선조 32년 8월 9일 을유 3번째 기사[9] 단 이것은 동명이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자세한 것은 나카가와 히데마사 항목 참조[10] 시바타 카츠이에의 조카로 모리마사의 모친이 카츠이에의 누이[11] 근데 이것도 이러이러 했다는 하나의 설이다[12] 개역(改易). 영지 및 재산 몰수.[13] 실제 역사에서는 이 양반도 다도에 일가견이 있었다는 기록이 많다. 괜히 일류 다도가 아라키 무라시게의 직속이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