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다 마사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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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다 마사유키
사나다 가문의 여섯 닢 엽전 가몬

真田昌幸(진전창행)
1547년 ~ 1611년 7월 13일, 음력 6월 4일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대중 매체에서



1. 개요[편집]


일본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

다케다 가의 명군사로 활약한 사나다 유키타카의 삼남이자, 사나다 노부유키, 사나다 노부시게 형제의 아버지. 겉보기와 달리 보통내기가 아닌 자 (表裏比興の者)라는 평가를 받았다.[1]


2. 생애[편집]


어린 시절 다케다 신겐의 명으로 무토 가에 양자로 들어가서 무토 기헤에 마사유키란 이름을 받았다. 이후 다케다군의 메츠케로써 활약했으나 나가시노 전투에서 큰형 노부츠나, 둘째 형 마사테루 두 형이 다 죽었다. 그래서 사나다 가문이 단절될 위기에 놓였기 때문에 다시 사나다 씨로 입적하여 사나다 마사유키가 되었다.

마사유키의 아버지인 유키타카는 다케다 신겐이 시나노를 정벌할 즈음부터 참모였고, 자신도 어려서부터 신겐의 시동으로 시작하여 옆에서 그 군략을 보고 익혔기 때문에, 고슈류 군략의 정통 후계자라고 할 수 있다.시마 사콘, 나오에 카네츠구와 함께 천하 3군략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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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나카지마 전투 때의 소년장수
첫 전투 출전은 제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에서 아시가루 대장이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사실여부는 불분명하다. 이때 나이가 15살때였다. 다케다 신겐의 측근으로 활약하고. 나중에는 다케다 가의 영역이었던 시나노우에노와 코즈케의 누마타를 영지로 맡아 다스렸다.

그러나 다케다 신겐이 병사하고 다케다 카츠요리가 뒤를 이었다. 마사유키는 신푸 성 건설에 착수하고 누마타 성을 손에 넣는 등 다케다 가문을 위해 분골쇄신했으나 1582년, 노력도 헛되이 오다 노부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연합군에 의해 다케다 가는 멸망한다.

1582년, 오다 가문의 시나노 방면 총대장 타키가와 카즈마스의 대대적인 침공이 시작되자 주군인 다케다 카츠요리에게 본인의 관할 구역인 시나노 지역으로 피신해 올 것을 권유하였으나 이미 다케다의 군세는 완전히 와해된 상태라 가츠요리 일행에서 병사는 수십 명 정도밖에 안됐고 대부분이 비무장의 일꾼, 시녀들 뿐이었다. 때문에 험준한 길목에 위치한 시나노의 우에다 성이 아닌 가까운 오야마다 노부시게의 이와도노야마 성으로 발길을 옮겼지만 이미 노부시게는 오다 측과 내통하고 있었다. 결국 앞은 배신자, 뒤는 추격군에 의해 궁지에 몰린 가츠요리 일행은 텐모쿠산에서 자결한다. 이로 인해 오야마다 노부시게는 배신자로 비난받고 마사유키는 '마지막까지 타케다를 지키려한 충신' 이미지를 얻었다. 관련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마사유키가 호죠 가와 자주 서신을 주고 받았다는 자료가 발견되어 오늘날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마사유키가 호죠 가와 짜고 카츠요리가 오면 붙잡아서 호죠 가에 보내겠다고 약속하고 있던 게 아니냐는 주장을 펴나 이는 상상에 기반한 것으로 실제 근거가 뒷받침되어 있는 주장은 아니다.[2][3] 새로 나오고 있는 전국시대 관련 컨텐츠에서도 서신을 주고 받았다는 내용은 반영하되 마사유키 배신자 설은 배제하는 방향을 택한 것을 보면 이는 막연한 추측 내지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것이 중론.

타케다 가 멸망 후, 마사유키는 선조들의 고향인 시나노우에다에 자리잡는다. 그리고 상황을 보다가 쾌진격을 해오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복속하여 타키가와 카즈마스의 휘하에 배치되었으나 3개월 후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급사하자 상황은 급변하게 된다. 호죠 우지마사에게 타키가와 카즈마스가 패하자(칸나가와 전투) 카즈마스를 시나노 근처까지 보내 준 뒤 대놓고 오다의 뒤통수를 치지는 않았지만 무주공산이 된 구 타케다 영지의 가신들을 포섭하는 등 물밑공작을 하였다. 그렇게 세력권 기반을 다지면서 오다가문이 물러나자 도쿠가와에게 접근해 우에스기를 비롯한 북방의 적들을 견제를 위한 방어력이 뛰어난 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자기에게 투자만 해준다면, 우에스기를 비롯한 북방의 적을 막아주겠다며 구슬렸으며 그렇게 이에야스의 돈과 인력을 원조받아 자신의 노하우를 반영한 성 설계도가 완성되고 당시로서는 최첨단 축성기술까지 더해지면서 전략적 요충지이자 사나다 가문의 본성이 되는 우에다 성을 짓는다. 이것이 나중에는 이에야스 군의 침공을 막는 아이러니가 되기도 했다.[4]

이후 도쿠가와와 우에스기를 견제하기 위해 잠시 호죠 가문에 복속하게 되는데 이때 구 타케다의 영지인 시나노와 카이의 지배권을 두고 호죠와 도쿠가와 사이에 전투(텐쇼 진고의 난) 벌어진다. 이때 도쿠가와는 마사유키에게 밀사을 보내 마사유키가 호죠의 후방을 공격 및 사나다 영지를 지나는 보급로를 차단해주면 영토를 인정해주겠다는 제안을 하자 마사유키는 친척 사나다 노부타다를 보내 시나노와 카이 영지 인정을 요구한다. 도쿠가와는 일단 전황이 급하니 이를 받아들이고 확약을 하면서 도쿠가와라는 뒷배를 얻게되자 호죠를 배신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는다.

그렇게 마사유키는 보급로를 끓는 등 호죠가문의 후방을 끓는 활약에 단숨에 전황은 이에야스 측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다 이긴 전투에서 진 호죠가문은 아득바득 이를 갈 수 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그렇게 사나다는 승리의 여운을 느끼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이에야스는 호죠와의 휴전협정과 동시에 동맹을 맺고 호조 가는 동맹의 조건으로 사나다의 영지인 누마타 지역 먹는다는 것을 걸었고 이에야스는 이를 동의하였다. 당연히 마사유키는 반발하였고 바로 도쿠가와와는 동맹을 파기하게 되면서 사나다와 도쿠가와 가문가의 악연이 이 일을 기점으로 시작된다. 그렇게 도쿠가와와 호죠 두 가문과 척을 지게된 마사유키는 자신들을 지켜줄 뒷배로 과거 통수를 한번 때렸던 우에스기에게 접근한다. 반면 우에스기의 우에스기 가게카츠는 사나다의 박쥐같은 배반 행동으로 인해 못 미더워하여 인질을 보내라고 요구, 이에 차남 사나다 노부시게를 인질로 보냈다.

한편 이에야스는 빨리 호죠에게 누마타 지역을 양도하라는 요구를 연일 보내지만 마사유키는 이전 약속을 거론하며 이를 거부,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도쿠가와가 토리이 모토타다, 오쿠보 타다요, 히라이와 치카요시 등의 가신들을 필두로 7천 명[5]의 정벌 병력을 보내면서 사나다 마사유키는 도쿠가와/호죠 양측에게 공격을 받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마사유키는 이에 맞서 약 2천 명의 병사와 자신의 영지에서 징집한 농민 연합군으로 우에다 성에서 농성, 도쿠가와 군을 도발해 유인한 뒤 매복과 함정을 이용한 마사유키의 지략으로 대승을 거둔다. 누마타 성도 호죠에게 공격을 받았지만 누마타 성주의 끈질긴 저항으로 상황이 종료되기 전까지 함락되지 않았다.

먼저 게릴라 전술로 200명의 기습부대로 적의 전방을 공격하고 후퇴, 뒤따온 적을 일부러 성문을 열어 성 안으로 유인, 산노마루를 함락하고 방심해 있던 적을 전군 일제 집중 사격과 큰 돌과 나무로 공격, 당황하고 도망치는 적병을 바깥 성에 대기하고 있던 부대가 측면에서 2차 기습공격. 후퇴하는 적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마을에 불을 질렀고, 추격하면서 재공격. 이때 마사유키는 유유히 바둑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결과 도쿠가와 측은 5명 중에 1명이 죽는 1300명의 사망자를 내고 패퇴, 그에 비해 사나다 측의 전사자는 40명에 머물렀다. 이것이 1585년 8월에 벌어진 제1차 우에다 전투이다. 여담으로 육상자위대에서 유일하게 가르치는 농성전[6]이라고 한다.

이 우에다 전투에서 마사유키는 우에스기 가에게 원군을 요청했는데, 당시 우에스기는 내부 상황과 이전 다케다 가문과의 전투로 병력 소모가 심해 여유가 없었으나 의를 중시하는 우에스기 가문은 어떻게든 긁어모을대로 긁어모아 적은 수의 병력만을 원군으로 보냈다. 이후 우에스기는 중앙조정의 명을 이용한 도요토미에 의해 복속하게 되면서 더 이상 우에스기를 의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마사유키는 패권을 잡은 도요토미 히데요시한테 복속하였으며 이에 우에스기가에 인질로 있던 노부시게를 보낸다.[7]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의 권위를 교묘하게 이용하며 둘 사이를 중재, 사돈 관계를 맺게 했다.[8] 사돈 관계가 된 이는 마사유키의 장남 노부유키와 도쿠가와의 중신이자 맹장 혼다 타다카츠의 딸인 이나히메를 결혼시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마사유키가 '나도 영주고 이에야스도 영주인데 급이 낮은 이에야스의 가신과 사돈이라니 말도 안된다'라고 하며 반발하자 결국 이에야스가 형식상 양녀로 삼아 사돈을 맺었다. 물론 형식적인 양녀라 마사유키와 이에야스가 직접 사돈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실제로 세키가하라 전투 후에 마사유키의 구명요청도 노부유키와 혼다 타다카츠가 했다.

이후 도요토미 체제 아래에서 도쿠가와의 군문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천하를 잡은 도요토미 집안과 깊은 인연을 맺어두었는데, 차남 노부시게는 도요토미의 중신이자 이시다 미츠나리의 맹우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사위였을 뿐만 아니라, 히데요시에게 '겐지'(노부시게의 아명 겐지로의 애칭)라 불리며 귀여움을 받았다.

어찌되었든 히데요시한테 다이묘로 인정받고 도요토미의 중재하에 이에야스와 화해했지만, 호죠는 도요토미에게 상락을 거부하면서 버티다가 호죠측이 누마타를 넘기면 상락을 하겠다는 딜을 걸어온다. 히데요시는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면 된다라는 마음으로 이를 받아들이는 바람에 결국 누마타 성 영지를 넘겨야 했는데 마사유키는 누마타의 나루구미에 사나다 가문의 선조가 뭍힌 선산이 있으니 이는 양보할 수 없다고 요청하였고 도요토미측이 이 의견을 받아들여 나루구미를 제외한 누마타성과 누마타 영지 3분의 2를 호조 가에게 넘겨주게 된다. 대신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그만큼을 땅을 받아서 영지의 크기는 유지했다.

그러나 호죠의 우지마사는 이 협정은 사실상 반쪽짜리 거래라 생각한데다가 북방의 맹우 다테가문과의 동맹을 믿고 따를 생각은 없었고 나루구미가 누마타 성보다 고지대에 있어서 껄끄러운 위치에 있다보니 사나다 가문의 나루구미 성을 호조 가문이 공격해 점령해버린다. 이는 우지마사가 호죠가문을 멸문으로 이끈 최대 실책으로 도호쿠의 다테를 제외한 나머지 다이묘들로 부터 상락을 받아낸 천하인 히데요시의 중재를 위반하는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즉각 중재안에 따라 나루구미를 돌려주지 않는다면 전면 전쟁이라며 호죠가문에게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호조 우지마사는 이를 무시한다. 히데요시 상락관계에 있는 모든 다이묘들에게 호죠가문 토벌에 관한 호령을 내렸다. 소집된 마사유키는 히데요시의 명대로 우에스기 카게카츠, 마에다 토시이에 등과 함께 호죠가문의 거점 오다와라성 전투가 아닌 호조 가문의 북쪽영지를 공격하는 군으로써 출전했다.[9] 결국 1590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와라성 전투에서 호조 가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 이후 마사유키는 누마타 영지도 되찾았다.

시간이 흘러 히데요시의 헛된 망상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에 동원령을 받아 규슈에 위치한 나고야성에 집결했으나 다행히도 소규모 세력이라 참전하지 않고 평온한 세월을 보내던 중, 1598년 8월 18일 히데요시가 지병으로 사망한다. 이후 마사유키는 토요토미 가신들 사이에서 친도쿠가와 vs 반도쿠가와 세력으로 나뉘는데 여기서 줄타기를 하며 상황을 지켜봤는데 이 다툼이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를 부른다.

1600년 6월 도쿠가와는 우에스기 가문의 군사 나오에 카네츠구가 도요토미를 통렬히 비꼬는 나오에장을 받고서 매우 열받은 이에야스[10]는 '우에스기가 평화를 깨려고 하며 전쟁준비를 하고 있다.'는 명분으로 우에스기 카게카츠를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는데 도요토미의 중재로 도쿠가와를 섬기고 있던 마사유키도 이 토벌군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7월 21일 이시다 미츠나리 일파로부터 비밀 편지를 받고, 서군에 붙어서 승리에 일조해준다면 엄청난 보상을 주겠다며 우리 편에 서라는 제안을 받는다. 일단 동/서군 어디에 붙더라도 연줄이 있어서 갈등하던 마사유키는 가족 회의 결과, 도쿠가와 가의 사위였던 장남인 노부유키는 동군으로, 자신과 노부시게는 서군 측에 참가한다.[11] 우에다 성으로 돌아가던 도중 며느리 이나히메가 지키던 누마타 성에 손자를 보자는 핑계로 들어가려 했으나 노부유키가 없는 것을 보고 의심한 이나히메가 시녀들까지 완전 무장을 시켜 성벽에 배치하고 노부유키가 있어야 성문을 열겠다고 활을 들이대서 그대로 물러났다는 일화가 있다. 다만 마사유키가 물러난 뒤 사적으로 아들과 함께 마사유키에게 찾아갔다고 한다.

이에야스는 군대를 두 개로 갈라, 삼남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3만 8천명의 군사를 맡겨 북쪽 길로 가서, 마사유키가 있는 우에다 성을 공략하고 세키가하라에 합류하는 전략을 짰으나, 이 역시 마사유키의 지략으로 우에다 성에서 2500여 명의 군사로 농성전을 펼쳐 무려 1주일을 버텨냈다.

이때 무단파의 수장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기후성을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진격, 세키가하라에서 이시다 군이 진을 친 정보를 얻은 이에야스는 상황파악이 빠르게 한 뒤 곧바로 우에다 성을 공략하던 히데타다&마사노리의 군대에게 세키가하라로 합류명령을 내린다. 결국 도쿠가와 군대는 성의 공격을 포기하면서 세키가하라로 진군한다. 마사유키는 어쨌든 이 엄청난 공적을 세운데다가 도쿠가와 군으로부터 승리하였으니 축배를 들며 상황을 지켜보며 서군이 이기겠지 라는 마음으로 관망을 하는데 마사유키의 생각과 달리 세키가하라 전투는 단 하루 그것도 6시간만에 동군의 승리로 끝났고, 사나다에게 발목을 붙잡힌 히데타다는 5일이나 늦게 도착해서 이에야스에게 무진장 깨지게 된다.

그러나, 세키가하라에서는 도쿠카와 측이 이끄는 동군이 너무나도 가볍게 압도적인 승리하여, 사나다 집안은 그 대가를 치루게 된다. 마사유키는 이 패전소식에 그야말로 믿을수 없었지만 서군 패전소식에 우에스기가 바로 꼬리내리며 항복한데다가 2500명의 군세로 수만에 가까운 도쿠가와 군을 이길 힘은 없는 자기들이 저항한다 한들 개죽음이라 여겼고 자신의 장남 노부유키가 구명해주겠지 라는 마음으로 항복을 한다. 결국 마사유키가 다스리던 우에다 영지(고쿠다카 3만 8천 석)는 몰수되어 노부유키에게 이어졌고 자신과 함께한 차남 노부시게와 함께 쿠도야마로 유배되었고, 이에야스 편에 섰던 노부유키가 기존의 누마타(2만 7천 석) 영지와 함께 세키가하라 공적으로 얻은 3만 석을 더해 9만 5천성의 중소 다이묘가 된다.

마사유키는 생전의 히데요시조차 보통내기가 아닌 자(表裏比興の者)라고 하여 두려워하고 경계한 인물이고, 이에야스는 마사유키에게 10배가 넘는 병력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 일이 2번이나 있었으니 그 정도가 더 심하여 마사유키가 도쿠가와 반대측에 붙는다면 도쿠가와에게 큰 위협을 끼칠거라 판단해 아예 죽이려고 했지만, 노부유키의 장인인 혼다 타다카츠는 노부유키의 탄원에 응해 "만약 주군이 내 사위의 아버지를 죽이려 한다면 그전에 소승 헤이하치로와 일전을 벌이셔야 할 겁니다."라는 첫 협박[12]에 가까운 탄원을 받아들인다.[13] 결국 마사유키를 차남 노부시게와 함께 키이국 구도산(현 구도야마 정)[14]에 유폐시켜버리는 것으로 끝낸다. 도쿠가와 아래 가문을 보전한 노부유키는 그래도 자주 찾아와 아버지를 극진히 모셨던 모양인데, 마사유키는 요구조건이 까다로운지라 항상 애먹었다고 한다. 구도산에서 마사유키는 생활고를 겪었다고 하지만 사실 나름 대접을 받았으며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동쪽(에도)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혼다 마사노부를 통해 탄원을 넣을려는 시도도 해봤지만 이에야스는 마사유키가 유폐에서 벗어나면 어디로 튈 지 모른다고 판단해 유폐조치가 풀리지 못 하였다. 그렇게 유폐 해제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이에 크게 실망하게 되면서 건강 역시 악화된다.

결국 마사유키는 1611년 끝내 전란에서 다시 날개를 펼치고 싶다는 뜻을 펼칠 기회를 잡지 못하고 노환과 병으로 죽었지만, 쿠도야마에서 유폐되어 있는 동안 군략을 차남인 노부시게에게 가르쳐주고 자신의 노하우가 담긴 비전서를 주며 전략/전술을 가르쳐준 덕분에 노부시게는 지휘관으로써 첫 실전인 오사카 전투에서 그 이에야스를 여러번 궁지에 몰아넣기도 했다. 그런데 마사유키는 병석에서 죽어가면서 아들에게 '나한테 도쿠가와를 쳐부술 기가 막힌 전술이 있거든? 근데 이건 나처럼 유명한 사람 아니면 못 해. 근데 넌 무명이잖아 넌 안 될 거야, 아마.'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마사유키의 말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는데 아군측이 들어도 하도 대담한 작전이라 군략의 천재로 검증받은 자신이 진언하면 모를까 당시까지만 해도 무명이었던 노부시게가 진언하면 들어주지도 않을 거라는 의미였다. 실제로 노부시게는 오사카 입성 내내 출진을 진언했지만 무능한 오사카 수뇌부들은 농성만 하면 이긴다며 언제나 각하당했다.[15]

'사나다가 오사카 성에 입성하였다'는 보고를 받은 이에야스는, '아버지인가, 아니면 아들인가!?'라고 물으며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고('이미 죽었는데 왜 떠냐?'는 반응을 한다면 위의 내용을 다시 보시기를 권한다. 죽은 척하고 숨어있기에 딱 좋은 이미지). 아들 쪽이라는 보고를 받자 이에야스는 '그럼 별 것 아니군'이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하나, 결과적으로는 아버지의 군략을 제대로 이어받은 노부시게(유키무라)에게 흠씬 당했으며 요도도노를 비롯한 오사카성 수뇌부가 무능했기에 망정이었지 안그랬으면 진짜 졌을지도 모른다..


3. 기타[편집]


일생을 처세의 달인으로 살아온 사람이지만, 순박한 면도 있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린 부채같은 것을 애지중지하거나 하기도 했다고.

육문전 문양은 사실 사나다 고유의 것이 아니라 북 시나노 지방 호족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던 가문(家紋)이었다. 사나다가 다케다를 모시기 이전 주군인 운노씨(海野氏) 또한 육문전 문양을 사용했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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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다 마사유키의 갑주. 2종류가 남아있다. 하나는 의전용, 하나는 실전용.[17]

사진 우측의 갑주는 마사유키가 세키가하라 이후 쿠도야마(현재의 와카야마현)로 유폐되었을 때 동행한 10명의 가신 중 한 명인 츠게(柘植) 가에서 그의 갑주를 받아 대대로 물려받았고 현재도 그의 후손인 츠게 지로(柘植弐郞)씨가 개인소장 중이나 현재 우에다 시 박물관 별관 2층에서 관람 가능하다.


4. 대중 매체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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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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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야망 대지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아버지, 아들들에 비해서 만능형인 다이묘. 비록 통솔, 지력은 각각 아버지인 유키타카, 둘째아들인 노부시게에 비해서 낮지만[18] 모두 무력(70대 ~ 80대 초반)을 제외한 90대 중반이고 정치는 90대 초반으로 사나다 가문 중에서 제일 높다. 비록 노부나가 포위망부터 원복하지만, 만능인 능력치로 세대차이를 상회할수가 있다. 마지막 시나리오까지 살기 때문에 수명이 길다. 창조에서는 작은 아들의 고유전법인 육문전처럼 자신도 표리비흥을 부여받았다. 이 전법은 상위 전법인 이간의 상위호환계다. 이간에 비해 시간도 길고 무엇보다도 명령 자체를 봉인하기 때문에 적의 대군을 병신 그 자체로 만들어낼 수 있다.[19] 이는 열세인 상황 속에도 꿋꿋이 버텨낸 그의 저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나다 가문은 전략가인 본인과 싸움꾼인 차남 사나다 노부시게를 제외하면 전부 C급 장수이고[20] 영지가 하나만 있고, 주위에 어느정도 강력한 도쿠가와, 우에스기, 후호조씨의 가운데에 있기 때문에 금방 멸망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나마 군웅집결에서는 사나다가문이 다소 호의적인 타케다 가와 공작하여 동맹을 맺으면 어느 정도의 숨통은 트이게 된다. 그리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도요토미, 이시다, 모리, 우에스기)과 동맹관계로 있지만 가신이 3명이고, 정치를 잘하는 애가 마사유키만 있어서 사실상 내정은 못한다.[21]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유저들 사이에서 1582년 시나리오의 사나다 마사유키는 상당히 플레이 인기가 많은 다이묘다. 최악의 상황을 우수한 무장들과 유저의 플레이를 통해 타개해 나가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데 이게 마사유키가 다이묘로 등장하는 모든 시리즈 공통으로 인기가 많은 편. 유튜브나 니코동 등에서 노부나가의 야망 플레이 실황 영상에서도 1582년 사나다를 플레이하는 영상을 찾아보기 쉽다.

삼국지 12에서는 능력 상한으로 인해 낮아지기는 했으나 통/무/지/정이 각각 93/71/94/87이라는 능력치를 달고 왔다. 웬만해서는 소유하기 힘든 전투용 특기 5개(신속, 수련, 냉정, 군사, 귀모)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참군이 될 만한 조건으로 전투용 비책이 하나도 없다. 전법은 주유전단, 오기가 가지고 있는 신화계.[22] 신장전생 시나리오를 하게 될 시 딜러 역할로 쓰면 된다. 대신 표리비흥이라는 특성을 가진 인물인지라 그의 상성(102)과 극악인 조조 상성(25)에 가까운(조조, 사마의)세력은 그의 충성도를 신경써줘야 한다. 작은 아들과는 다르게 배신 많이 한다.

태합입지전 5에서도 만능형의 능력치. 거기에 사기인 풍림화산 카드를 들고 있으며 군학이 4이기 때문에 여러모로 좋다.

사나다마루에선 아직 노부시게가 어린 시절이라 사실상의 초반부 주연. 배역은 쿠사카리 마사오.[23] 위에서 나온 호죠가의 밀통 건을 카츠요리가 알고 있었기에 마사유키에게 가지 않은 것으로 설명되는데 본작에서는 마사유키가 호죠가와 서신을 주고 받은건 사실이지만 일종의 보험 성격이지 정말 배반할 작정은 아니었던 것으로 나온다. 다케다 가문 멸망 이후 가문을 보존하기 위해 여러가지 책략을 쓰는데, 먹힐땐 먹히지만 때론 실패할 때도 있다. 예를 들자면 오다 가문에 붙는게 좋을 것 같아서 책략으로 겨우 들어갔는데 얼마 안돼서 혼노지의 변이 일어났다.(...) 결국 관동 지방을 맡고 있던 타키가와 카즈마스에게 붙고자 그에게 아케치를 토벌해서 오다 가문의 실세가 되라고 했는데 며칠 뒤에 하시바 히데요시에 의해 아케치 척살. 계속해서 위태로운 상황에 이르자 아예 독립하기로 결심, 우에스기 가문과 호조 가문을 조종해서 시나노 지방을 사실상의 공백지로 만들게 된다.[24] 그러나 그가 어떻게 머리를 굴리든 결국엔 다른 대가문, 특히 도쿠가와에 의해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려서 세키가하라 이후에는 유폐되고 만다. 그리고 노환으로 사망.

작중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똥을 지리며 후퇴하게 만든 장본인으로 설정되어 있다.

일본 만화 거짓말은 주군의 시작에서 그야말로 악의 축으로 등장. 사나다 마사유키 본인은 자신의 성에 불을 지른 후, 이것을 호죠 가에 누명씌어 몰락하게 만들었으며, 손자인 사나다 유키마사는 주인공인 우지노부를 죽이려 든다.

차남이 메인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전국 바사라 시리즈스핀오프 외전작 전국 바사라 사나다 유키무라전장남과 함께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참전이 확정되었다. 성우는 오오츠카 호우츄. 자세한 정보는 2016년 4월 현재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이 많지만 일단 공개된 바에 따르면 전투 스타일은 적을 교란시키는 트리키한 기술들이 주력이 되는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 인물이 전략가였다는 점을 반영한 듯. 두 아들과는 대조적으로 복장이 서양풍인 것도 특징적이다. 자세한 사항은 사나다 마사유키(전국 바사라) 문서 참조.

전국무쌍 시리즈에 4까지 클론 무장이었다가 전국무쌍 사나다마루에서 무쌍 무장으로 참전했다. 자세한 내용은 사나다 마사유키(전국무쌍) 문서 참조.

명군이 되어보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싸움 때문에 더 이상 일본에 있기는커녕 가문의 존속도 난감해지자, 그냥 자신이 영원히 일본 땅을 뜨는 대신 가문을 장남 사나다 노부유키에게 물려줘 존속시킨다는 약속을 노부나가에게 하고 아들 사나다 노부시게와 함께 차차의 호위병 명목으로 가문의 병사 2백을 거느리고 조선에 온다. 주인공은 수성의 달인[25]인 그가 조선으로 온 것에 기뻐하며 '사마유'라는 조선 이름을 내려주고[26] 정3품 별장직에 일본에서 귀순한 무사들의 부대인 왜별기 지휘관직을 내린다. 그 후 전주, 대구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 축성 계획을 세우다가 해서부 야인들이 불온하다는 소식을 들은 주인공의 명으로 왜별기 전 부대를 이끌고 부여주 삼성부로 이동, 권율과 함께 삼성부 방어를 성공적으로 해내고 있다.[27] 이 양반이 출세했다는 소식이 일본에 퍼지면서 '조선에 가서 공을 세우면 출세할 수 있다더라!' 같은 인식이 생겨 시마즈 토시히사를 필두로 오다 노부나가와 척을 지거나 원수가 된 이들이 바다를 건너 조선에 귀순한다. 무자호란이 끝난 시점에 이런 도왜들의 수가 무려 2천여 명에 달한다고. 이후에는 임금의 사돈이 되고(!)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재차 주인공에게 마음속으로 충성을 맹세한다. 경인왜란 당시에는 정3품, 훈련도감 소속 별장으로 대구성에서 오다군과 전투를 펼치고 있다. 일본군 부대에 이에야스가 참전하지 않은것에 유감스러워 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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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 일본어에서는 표리 비겁한 자이라는 한자가 되지만, 전국시대에 이 말은 くわせもの(겉모습만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운, 얕잡아 볼 수 없는 보통내기가 아니다), 老獪(경험이 많아 의뭉하고 능란함)이라는 뜻으로 긍정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실제로 마사유키는 소국의 작은 영주에 불과했지만 쟁쟁한 대세력들 사이를 교묘하게 건너다니면서 끝내 가문을 지켜냈다.[2] 우에노와 누마타는 호죠 가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데다, 동맹은 오다테의 난 문제로 인해 파기되었을 지언정 양국의 교류까지 하루아침에 끊어진 것은 아니므로 서신을 교환하는 것을 수상한 일로 보긴 힘들다. 주가의 멸망이 기정사실이 된 시점에서는 살아남을 방도를 궁리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야마다 노부시게가 더욱 비난을 받는 이유는 그나마 우호관계가 있었던 호죠 가와는 달리 오다 가의 경우에는 당장 나가시노 전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생각해보자.[3] 설령 정말로 호죠 가에 넘길 생각이었다 한들 불구대천의 원수 격인 오다 가와 내통하고 있던 오야마다 노부시게와는 무게감부터가 다르다. 오다 가와 다케다 가의 관계는 더 따질 필요도 없는 적대관계인만큼 카츠요리가 오다 가에 넘겨진 후의 선택지는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지만, 호죠 가의 경우에는 비록 다케다와의 동맹을 파기했다고는 하나 카츠요리의 아내가 호죠 우지야스의 딸이었고 호죠 측이 당시 오다 편을 들고는 있었지만 고슈 정벌 내내 소극적으로 일관한데다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던 만큼 목숨을 보장받을 최소한의 기회는 있었다고 보는 편이 설득력이 있다. 예를 들어 카츠요리의 존재를 내세워 시나노의 지배권을 주장할 수도 있었다는 것. 실제로 고슈 정벌 이후에도 호죠 우지마사는 오다 가의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긴 했으나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죽자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 바꿔 코즈케와 시나노를 침공하였으므로...[4] 일부 일본 역사학자들은 마사유키가 우에스기는 물론 이에야스의 북상을 막기 위한 확실한 성을 얻기 위해 이에야스에게 일부러 접촉해 사기에 가까운 딜을 성사했다는 설을 이야기 하기도 한다.[5] 일설에는 3만 명[6]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농성전이면서도 성 안 마을까지 이용한 셈이니 14세기판 첫 시가전이라 할 수 있다.[7] 사나다 가문에 대한 역사적 고증을 좀 반영한 사나다마루 대하드라마에서는 우에스기 측이 도요토미의 세력을 보기위해 사신을 보냈다가 되려 도요토미 가문의 인질이자 객장이 되었고 온갖 고민끝에 마사유키가 도요토미측에 붙는것으로 되었다.[8] 히데요시가 매우 교묘했는데 처음에는 도쿠가와가 도요토미에게 상락을 하며 복속되면서 사나다를 쳐도 되냐는 요청에 "마음대로 해라"라고 하여서 도쿠가와는 히데요시의 허락도 받았겠다 신나게 병력을 집중시키며 전쟁준비를 하였는데 갑자기 히데요시로부터 "야, 사정이 바뀌었으니 공격하지 마라" 라는 지시가 내려온다. 도쿠가와는 많은 돈 들여서 전쟁준비를 했는데 자신의 힘으로는 히데요시에게 한 주먹거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일단 전쟁준비 중지를 명한다. 즉, 도요토미 한 마디에 대다이묘 도쿠가와 측의 전쟁준비가 올 스탑 되는 꼴을 보였으니 일본 전국에 히데요시의 힘을 과시한 꼴이었다. 이후 히데요시의 중재안은 정략결혼과 사나다 가문은 도쿠가와의 군문에 들어간다는 조건이었다.[9] 이는 사나다에 대한 영향력을 도쿠가와로부터 일시적으로 되찾은 견제 행위로 해석된다.[10] 나오에장 현실에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에 대한 여부가 확실치 않으며 일단 도쿠가와측이 우에스기 토벌을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한 가상의 문건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일단 나오에 카네츠구가 이에야스를 통렬히 까는 내용이었고 이에야스가 얼마나 열 받았는지 가신들 보는 앞에서 서신을 갈갈히 찢어버렸다고 한다.[11] 이에야스가 반드시 다시 우에다를 노릴 것이라고 생각했고, 전쟁에서 져도 가문은 이어갈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었다.[12] 타다카츠는 이 일이 있기전까지 이에야스에게 단 한번도 NO를 외치지 않은 예스맨에 가까운 충신이자 맹장이었다.[13] 도쿠가와가 혼다 타다카츠의 협박에 꼬리내린게 아니라 혼다 타다카츠가 단 한번도 자신에게 거스르지 않은 충신이 처음으로 반대표를 던져서 타다카츠의 체면을 살려줄 겸 받아들인것이다.[14] 와카야마현 쿠도야마역 인근.[15] 실제 마사유키가 이 시절까지 생존해서 오사카 전투를 지휘했다면 도요토미 가문이 승리했을 가능성이 어느정도 있었다는 의견은 생각보다 많은 편, 일단 도요토미 가문 측을 깍아내릴 의도도 어느정도 있어보이지만, 당시 도요토미 가문을 총 지휘한 사람이 요도도노가 아니라 장성한 히데요리였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적힌 내용은 제법 있는 편인데, 만약 마사유키 정도되는 재능과 명망 있던 사람이 도요토미 가문 측에 있었더라면 히데요리는 베테랑인 마사유키를 전적으로 신임하며 친정이 한결 수월해지긴 했을 것이다. 추가적으로 노부시게가 주구장창 주장한 것 하나가 바로 히데요리의 친정이었다. 실제로 오사카 전투는 요도도노의 실책에도 불구하고 말년의 이에야스도 사나다 노부시게에게 죽을 고비를 넘겼을 정도로 매우 치열하게 전개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일리가 없는 IF는 아니다. 그러나 마사유키가 있었어도 실패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는편이다. 일단 요도도노를 비롯한 오사카 수뇌부의 무능은 상상을 초월했고 히데요리는 어머니에게 약한 모습만 보이던 마마보이였다. 더욱이 마사유키가 군략으로 유명한 장수 이미지가 있듯 반대급부로 우에스기->도쿠가와-> 다시 우에스기 등등의 배신의 아이콘으로 유명하여서 요도도노를 비롯한 오사카 수뇌부들이 친정을 반대한 이유가 히데요리의 안전인데 그 안전을 마사유키가 배신을 해버리면 본말전도이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반대했을 가능성도 있었다는 것이다.[16]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에서 운노가가 사나다가와 같은 육문전 문양을 사용하는것으로 구현되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유저들은 이를 사나다 유키타카에게 승계해서 초기 시나리오부터 사나다가로 플레이하는 편법으로 써먹는다(...).[17]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썸머 워즈에서는 이 두 갑옷이 짬뽕이 된 형태로, 여주인공의 집안에 모셔져 있다.[18] 정말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아버지 유키타카는 야마모토 간스케보다도 지력이 낮지만, 마사유키의 최신작 대지에서의 지력은 99로 공동 2위. 모신 다음가는 수치에 금공명과 동위, 모성, 전국의 선구자보다 높다.[19] 단, 이간과 마찬가지로 다대다 싸움 : 대회전(아군, 적군의 부대가 각각 5부대 이상이고 아군, 적군 각 총합이 최소 2만이 넘어갈 경우)에 유리한 전법이기 때문에 전투 컨트롤을 충분히 연습하시고 난 뒤에 사용하기를 권함[20] 사나다 노부유키는 창조에서 크게 상향이 되기전까지는 정치력만 높은 B급 장수이다. 사나다 10용사는 후반부에 이제야 나오고 안 나오는 시리즈도 있다. 마사유키의 아버지인 유키타카는 타게다에 속하고 노부나가의 포위망에서 이미 사망한 지 오래이고 군웅집결에서 사나다 세력으로 속한다.[21] 노부유키는 혼다 타다카츠의 딸인 이나히메하고 결혼한 상태라 도쿠가와 가문에 있다.[22] 일본 전국시대 3대 책사 중 쿠로다 칸베에(화계)도 모리 모토나리(연환계)조차도 신화계를 받지 못했다.[23] 1985년 <사나다태평기>라는 드라마에서 사나다 노부시게 역을 맡았었다. 31년 후 그 배역의 아버지 역을 맡게 되어서 감회가 새로울듯.[24] 우에스기 가문에 임관하고 있던 카스가 노부타츠가 다케다 가문 출신인 것을 이용, 카스가 상대로는 다케다 가문을 부활시키자고 꼬시고 호조 가문에겐 카스가를 꾀어냈으니 확실히 하도록 편지를 보내게 했다. 그런데 편지를 받은 카스가는 마사유키의 동생 노부타다에 의해 살해당하고, 우에스기 가문은 "음모"를 알아내게 돼서 호조 가문의 기습을 막는다. 이에 호조 가문은 결국 카이를 공략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싸우기로 했고, 우에스기 가문도 에치고의 반란 때문에 돌아가야 했기에 시나노는 다른 가문의 영향권이 사실상 사라진다.[25] 실제로 한양성을 처음 보고도 "이렇게 큰 성은 지키기가 곤란할 텐데..."하며 수성 생각부터 하고 있었다.[26] 그런데 한자 표기가 馬(말 마)有(있을 유), '말 있음'이라는 뜻이어서 너무 대충 작명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 있다. 작가는 의미에 대해서는 별 생각 없이 한자키 누르고 1번을 두 번 눌렀을 가능성이 높다.[27] 성 외곽에 별도의 외보(성 외부의 소형 요새)를 설치하고 틀어박혔다는 것으로 봐서 모티브는 아마도 아들내미의 사나다마루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