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코 추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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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시아 항에서 오랑으로 이송되는 모리스코 인들

1. 개요
2. 배경
3. 추방
4. 의의


1. 개요[편집]


1609년 4월 9일 펠리페 3세의 명으로 인해 이베리아 반도에 남아있던 기독교로 개종한 무어인들인 모리스코[1]들이 마그레브 혹은 기타 이슬람권[2]으로 추방된 사건들을 일컫는다. 추방된 무슬림들은 대대로 살아온 안달루스의 고향과 비슷한 곳에 안달루스 양식으로 '실향 도시'를 세우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모로코의 셰프샤우엔이 있다.[3] 그들은 동시에 막막한 생계 해결 및 스페인에 대한 복수를 위해 바르바리 해적이 되어 기독교 유럽의 해안을 위협하였다. 본래 살던 동네라 지리와 방어시설 등에 익숙했다고 (...) 고향털이

2. 배경[편집]


서고트 왕국무슬림들의 침략에 의해 와르르 무너진 이후로,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은 이슬람 제국영역이었다. 그 당시는 물론 심지어 19세기까지 이베리아 반도를 유럽이 아닌 아프리카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무슬림은 피지배자 기독교인들을 탄압했고, 이 때문에 세월을 걸쳐 90% 이상의 인구가 무슬림이 되어버렸다. 전성기에는 칼리파 상주 도시가 지금의 코르도바였을 정도. 그만큼 이베리아 반도는 이슬람 문화가 꽃핀 곳이었다. 만약 후술할 레콩키스타가 끝내 실패로 끝났다면, 오늘날의 이베리아 반도는 터키령인 동트라키아아나톨리아 반도처럼 이슬람 문화권으로 남았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에 따라 지리적으로는 유럽으로 분류되지만 문화적 의미에서는 중동으로 분류되는 상황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슬람 제국의 와해와 함께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세력은 분열되기 시작했다. 타이파의 난립과 이를 파고든 서고트 왕국의 후예 국가들의 이베리아 반도 탈환기는 레콩키스타에서 알 수 있는 이야기.

당시 스페인 인구가 9백만이 안되고, 그 중 무어인은 50만에서 100만 가량 있었는데, 레콩키스타의 완료 이후 무슬림인 척 한 기독교인(모사라베)은 원복했고, 지배층인 무어인(무슬림)은 지브롤터를 건너 북아프리카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여전히 많은 무어인이 이베리아 반도에 남았다. 처음에 이들은 종교의 자유를 가졌지만, 얼마 되지 않아 스페인은 악명 높은 종교재판을 수 백년 동안 계속하며 이슬람교와 유대교를 금지했고 무어인과 유대인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추방되었다. 가톨릭으로 개종한 무어인들과 유대인들을 각각 모리스코, 마라노라고 불렀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모리스코들이 아랍어를 유지하고 있었고, 주류 사회에 잘 융합되지 못한 데다가 일부는 개종한 척 하면서 몰래 이슬람 신앙을 유지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가톨릭 지배층은 그들의 개종을 진실되지 못하다 여겼고, 종교재판으로 이들이 제대로 개종했는지 지속적으로 확인, 간섭했다. 특히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 속에서 모리스코들은 오스만 제국의 첩자로 의심받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1567년 모리스코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네덜란드의 신교도들의 독립문제가 있던 스페인은 모리스코의 반란으로 더 큰 문제에 직면했다. 모리스코들은 오스만 제국에 지원을 요청했고, 오스만 제국은 화승총과 같은 무기와 4000여명의 군사를 스페인 남부 산맥으로 보냈다.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를 파견하여 모리스코의 반란을 진압했다.

종교재판소도 집중적이고 폭력적인 탄압은 성립 초기 15세기 말, 16세기 중반의 스페인루터교 발색 등의 시기에 집중되었고 평소에는 예산과 인력 부족, 다른 행정 기관들과 충돌, 민간 사회와 종교적으로 더 느슨한 귀족층의 반발 등으로 인해 장기적으로 꾸준히 목적대로 개종한 유대인, 무슬림들을 감시, 관리하며 가톨릭 주류 사회에 동화할 형편이 못 되었다. 미국의 유명한 코메디언 멜 브룩스세계의 역사 코미디 모음집 중 스페인 종교재판 에피소드 같은 대중 문화에서는 종교재판소에서 유대인, 무슬림을 탄압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아예 개종도 안 하겠다고 버틴 유대인과 무슬림 무어인은 종교재판소에 갈 것도 없이 그냥 추방당했다. 종교 재판소의 역할은 거짓 개종자, 그리고 나중엔 개신교, 사상범, 성적 일탈 행위 색출과 처벌이었다.[4]


3. 추방[편집]


1609년 4월 9일 펠리페 3세는 칙령을 발표해 모리스코들을 북아프리카로 추방할 것을 명령했다. 최근 연구 결과에 의하면 당시 모리스코의 60% 정도가 추방된 것으로 보고 있다.

추방을 실시해야 할 지방 관리도 사람인지라, 추방 명령을 따르지 않고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여러 예외사항이 있었는데, 모리스코들만 사는 곳은 면했고, 4살 이하는 해당되지 않았다가 이후 16세로 상향 조치되었다.

추방에 저항해 일어난 봉기도 있었는데, 모두 진압되었다.

추방은 북아프리카 이슬람 국가와의 협의 따윈 없었고 모리스코들은 조상이 북아프리카인들일 뿐 무슬림이 아닌 가톨릭교도였으므로 모리스코들을 실은 배는 상륙하자 마자 공격받았다. 이때 많은 이가 죽고, 정착하고, 바르바리 해적에 가담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생지옥을 뚫고 4만명에서 9만명 가량이 포르투갈, 프랑스, 북아프리카를 거쳐 스페인에 돌아왔다. 이들은 충성 서약을 했으므로 다시 추방시키지 못했다.

추방의 영향은 발렌시아 지방에서 가장 컸는데, 바로 모리스코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렌시아 지방은 인구 감소로 극심한 경제 침체에 시달려야 했다.


4. 의의[편집]


펠리페 2세가 죽자 그가 진 부채와 모든 재앙이 결코 유능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아들 펠리페 3세의 머리 위로 덮쳤다. 게으르기 그지없었던 펠리페 3세는 총신들에게 권한을 위임함으로서 그때까지 스페인에 남아있던 무어인 27만 5,000여 명을 전원 배에 실어 추방시키는 대실책을 범했다. 이런 비생산적인 조치로 인해서 무어인에게 돈을 빌려주었던 발렌시아아라곤의 중산계급, 토지를 임대해주었던 귀족들은 실제적으로 파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추방은 박해를 받아야 마땅할 25만 명 이상의 이단자들을 갑작스레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종교재판소의 존립 자체를 위태롭게 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 카를로스 푸엔테스


이 사건은 당시 스페인이 이슬람 치하를 수치스럽게 여겼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거의 전 주민이 이슬람으로 개종했으며, 이에 따라 이슬람 세력의 축출 이후 강경한 가톨릭 원리주의 추진으로 이 기간의 악몽을 지우고 싶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당시는 스페인과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 패권을 놓고 경쟁하던 사이라, 유사시 오스만에 동조할 수 있는 모리스코들을 사전에 몰아내어 근심을 덜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모리스코들은 천 년에 가까운 기간동안 북아프리카에서 베르베르인, 아랍인이 이동해서 거주하다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람들이었므로 스페인을 고향으로 여기고 있었다.[5] 이들의 동화과정은 진통이 심했지만, 추방 이전에도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모리스코인 순교성인 또한 있었을 정도이다. 하지만 동화 속도가 스페인 사회의 인내를 따라가지는 못했으며, 이에 따라 극단적인 추방 조치가 시행되었다.

하지만 급격한 인구축출의 부작용을 안 지역관리 등의 조치, 중앙과 지방정부의 불협화음등 현실적인 이유로 모리스코 추방은 부분적인 성공일 뿐이었다. 스페인 내에서 이슬람 신앙과 아랍어 등은 전멸했지만[6], 스페인어 내의 지대한 아랍어 영향, 사람들의 외관, 성당의 건축양식, 공예품 양식등 스페인 문화의 많은 분야에서 무어인의 영향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페인 전통의 민족가톨릭주의 이념을 비판하다 스페인 내전 발발 직후 프랑코 정권에게 살해당한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는 살아 생전에 평하길, "모리스코 추방이야말로 그저 쓸데없는 분풀이로서 되려 스페인 경제와 문화에 큰 타격을 준 비극만 초래했다"고 비난했다.

실제로 모리스코 추방은 스페인 경제에 큰 피해를 입혔는데, 왜냐하면 모리스코들 대부분이 물건을 만드는 수공업자였는데 이들이 쫓겨나자 스페인의 숙련된 기술자들이 한꺼번에 없어져서 스페인의 제조업에 비상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리스코 추방을 찬성했던 발렌시아의 가톨릭 대주교도 "이제 누가 우리의 신발을 만들어 줄까?"라고 한탄했다.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의 드넓은 식민지와 풍부한 천연자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중반 이후로 부흥에 실패하고 긴 쇠퇴의 길을 걸었던 이유도 바로 모리스코 추방으로 인한 제조업의 타격 때문이었다. 제조업이 부실하니 거의 모든 물건들을 수입에 의존하고, 수입에 의존하니 물가가 오르고,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져온 금과 은을 모두 대금으로 지불하니 아메리카 대륙의 풍부한 천연자원도 죄다 해외로 유출되어 스페인 본국은 그리 이득을 보지 못했다[7].

그러면 스페인 사람들이 직접 공장을 차리고 물건을 만들면 되지 않겠냐고 할 지 모르나, 사정이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이 당시 스페인 제국 자체가 주권과 통치 주체가 명확한 근대 국가들과 달리 동군연합과 카톨릭 통합 보편 제국에 대한 열망 같은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기반했던 나라다 보니 경제 정책을 그리 일관적으로 짤 수가 없었다. 따라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가 당장 제노바 공화국을 필두로 이탈리아반도신성 로마 제국, 재정복한 저지대 10개주 같은 유럽 내 스페인 봉신, 제후, 동맹 세력들을 구슬리고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현대 국민국가의 관점에선 이해하기 힘든 수준의 경제적 특권을 막 뿌렸는지라 스페인 내부, 특히 왕실이 직접적으로 과세, 징병할수 있는 카스티야-안달루시아 양대 카스티야 연합왕국 직할령에선 이전만 하더라도 상당한 수준이었던 제조업이 17세기 초반에 한번 박살나고 다시 복구되지 못한 것이다. 스페인 제국이 하나의 지정학적 헤게모니로 패권을 굳히는 과정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물질적인 인구, 경제력의 핵심 출처인 이베리아 반도 내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자체적인 경제기반이 뿌리채 뽑힌 것이라 볼수 있다.[8]

모리스코 추방과 비슷한 일이 1685년 프랑스에서도 벌어졌는데,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가 퐁텐블로 칙령을 발표하여 국내의 신교도인 위그노 신자들한테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는다면 재산을 빼앗거나 감옥에 가둘 것이라고 위협을 가했던 것이다. 그러자 수공업에 종사하고 있던 약 30만 명의 위그노 신자들이 잉글랜드, 네덜란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과 북미 등지로 달아나는 바람에 프랑스의 제조업은 큰 타격을 입었고, 이 피해를 130년 후인 나폴레옹 전쟁 때까지 극복하지 못해서 프랑스 군인들이 입는 군복의 절반 가량이 적대국인 영국산 옷감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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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포르투갈어로는 모리스다. 당시 스페인포르투갈압스부르고 왕조동군연합이베리아 연합이었기 때문에 스페인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의 모리스코(모리스쿠)들도 대거 추방당했다.[2] 오스만 제국의 호의로 이스탄불로도 다수 망명하였다.[3] 20세기 터키에서 추방된 기독교도들과 발칸에서 추방된 무슬림들도 비슷한 행보를 보인다. 대표적으로 이즈미르(스미르나) 출신 정교도들이 그리스에 세운 네아 스미르니가 있다.[4] 종교재판소의 관할은 근본적으로 기독교 내에서 올바른 신앙 확립이지 선교가 아니었다. 따라서 마찬가지로 스페인령 아메리카 식민지에서도 종교재판소의 관할 범위는 현지 스페인계 백인+흑인 노예+개종한지 좀 됐고 정착민들과 같이 부대끼는 도시에 사는 개종자 원주민+혼혈로 국한됐고, 아예 개종도 아직 안됐거나 여전히 종교재판소에 세울만큼 기독교에 대한 지식 자체가 의심스러운 원주민들은 프란치스코회, 예수회, 도미니코회 같은 선교 수도회의 영역이었다.[5] 청나라의 중원 입관 이래로 200년 넘게 중원에서 살았던 만주족도 청나라 말기에는 만주족 자신들의 고향인 만주에 대한 애착이 줄어들고 사실상 중원을 자신들의 고향으로 여길 정도였는데, 만주족이 중원에서 살아온 것보다 훨씬 오랫동안 이베리아 반도에서 살아온 모리스코들이라면 가톨릭으로 개종까지 했으니, 북아프리카인이라는 정체성이 사실상 없어지다시피 하고 그저 조상들의 고향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6] 그나마 현재는 소수의 모로코계 스페인인들 사이에서 간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을 스페인에 남아있는 알안달루스 문명의 마지막 후예로 여기고 있다.[7] 출처: 신의 전쟁/ 도현신 지음/ 이다북스/ 111~112쪽[8] 레콩키스타 과정에서 형성된 상무적, 이상주의적이고 노동을 천시하는 귀족적인 문화적 영향력도 있긴 있지만 스페인 제조업의 역사적 몰락에서 주된 원인으로 볼수는 없다. 손으로 노동하는 걸 천하게 보고 귀족이면 마땅히 전쟁, 아니면 하다못해 공무원이나 교회에서 하나님을 봉사하는게 좋다는 귀족주의적 가치관은 귀족 나리들에게나 통하는 얘기고 스페인 평민들은 어디서나 다 그렇듯이 적당한 실용주의적 먹고사니즘이 일반적인 가치관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무적, 귀족주의적 문화도 어디까지나 카스티야-안달루시아 내에서나 통하는 소리지 카탈루냐, 바스크, 모리스코 추방으로 집중타격 받은 발렌시아 같은 지역은 중세 아라곤 연합왕국 시절부터 반대로 실리적이고 상업, 제조업을 존경하는 문화가 발달했고, 카스티야 왕국 내에서도 동시대엔 세계적 규모의 무역항이었던 세비야나 갈리사아, 칸타브리아의 무역항들처럼 상업문화가 발달하지 않을래야 않을수가 없었던 동네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