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거란 전쟁/역사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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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총론
2.1. 외교
2.2. 무기
2.3. 의복
2.4. 건축
2.5. 문화
2.6. 언어
2.7. 거란
3. 회차별
3.1. 1회
3.2. 2회
3.3. 3회
3.4. 4회
3.5. 5회
3.6. 6회
3.7. 7회
3.8. 8회
3.9. 9회
3.10. 10회
3.11. 11회
3.12. 12회
3.13. 13회
3.14. 14회
3.15. 15회
3.16. 16회
3.17. 17회
3.18. 18회
3.19. 19회
3.20. 20회


1. 개요[편집]


KBS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의 역사적 내용에 대한 탐구 문서이다.


2. 총론[편집]


사건과 인물을 제외한 시대 고증은 대체로 문종 이후 ~ 원 간섭기 이전까지 약 200여 년에 걸친 시대상을 폭넓게 재현했다. 이는 남아있는 고려시대 문물이 한정적이라 조선시대와 달리 시기별로 세세하게 추적하고 재현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의복 고증은 대체로 인종 즉위 시점의 문물을 관찰한 고려도경이나 의종 때의 공복 규정을 따르고 있으며 이는 드라마 배경보다 약 100 ~ 150년 이후의 모습이다. 이렇듯 시대 재현에 있어 현대와 가깝고 기록이 많은 조선 시대에 비해 역체감이 크지만 이전 고려 시대 배경 드라마들에 비해서는 더 많은 기록과 이미지가 반영되었다.


2.1. 외교[편집]


  • 작중 강감찬이 거란 황제와 고려 군주의 조공책봉관계(조공)를 언급하며 '고려 국왕'이라 칭하는 부분 또한 등장하는데 여기서 강감찬강조의 정변을 강하게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발언한다. "중대사께서 자행하신 일거란 황제의 책봉을 받은 고려 국왕을 해친 일이옵니다. 거란이 알면 분명히 이걸 구실로 삼아 전쟁을 일으킬 것이옵니다. 아마도 고려 국왕을 해친 역신을 처단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겠지요." 실제로 고려 전기에 '중국 왕조'와의 조공책봉관계를 보면 '외왕' 방면에서는 국왕(국가)의 대외적인 위상은 시종일관 제후(국)였다. 정확히 당대 고려는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外臣제후(국)였으며 당시 고려와 '중국 왕조' 사이의 대외 관계는 조공책봉관계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 관계 속에서 고려 국왕은 외국의 군주이면서 황제의 신하(제후)로 규정되었다.[1] 때문에 드라마에서도 강감찬이 직접 거란 황제의 책봉을 받은 고려 국왕강조가 해친 일로 거란이 이걸 구실로 삼아서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한 것이다.

  • 강감찬이 이제 막 즉위한 현종에게 당대의 조공 책봉 관계를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여기서 현종이 “나는 천자요. 헌데 왜 거란의 황제에게 책봉을 받아야 하는 것이오?”라며 “그럼 짐은 거란 황제의 신하인 것이오?”라고 묻자, 강감찬은 “그들의 체면을 살려주고 평화를 얻기 위한 것이며, 그저 외교적인 관계일 뿐입니다”라고 답변한다. 이는 11세기 거란, , 고려, 서하 등이 참여하는 다원적 국제질서 속에서, 고려가 대외 방면에서 제후국[外臣]으로서 거란의 책봉을 받으면서도, ‘외왕내제’에 의거하여 자국 내에서는 황제국 체제를 갖추었다는 통설을 반영한 것이다.[2] 이는 현종이 천자이기 때문에 원구제를 시행해야 한다는 원정황후, 고려가 속국이 아닌 '자주적인 황제의 나라'라고 직접 언급한 강감찬 등, 등장인물의 언설을 통해 꾸준히 지시되고 있다.[3]

  • 작 중 소배압과 거란 황제 야율융서가 고려는 거란에 충성을 맹세했으면서 송나라에 거란을 같이 치자고 요구했다고 언급한다. 11~12세기 다원적 국제질서상 조공책봉관계에서 조공국은 중세 유럽의 최우선 충성 맹세처럼 하나의 나라만을 사대해야 하는 것이 아니어서 많은 나라들이 복수의 국가에 조공을 바쳤다. 그래서 고려는 요나라의 1차 침공 이후에도 송과의 외교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소배압 또한 고려와 송의 협력을 문제 삼을 뿐 송나라와의 관계 유지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않는다.[4]

  • 작품 분량상 고려와 거란 사이의 전쟁의 이유들을 상세하게 짚고 넘어가지는 않아서 조금 아쉬운 편인데, 거란이 굳이 고려를 여러 번 찍어 누르려고 한 이유는 꽤나 복잡한 편이었다. 먼저, 980년부터 국제 정세가 급변하게 되고 이에 고려와 거란 양국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대응했다. 거란은 군사력 증진과 전쟁을 통해 역량을 확대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요동 방면으로의 정복을 서둘렀고, 고려는 전통의 조공 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내실을 기하는 정책을 취했다.[5]

거란은 986년 송 태종의 북벌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뒤, 정안국을 멸망시키고 여러 여진 부족을 복속시켰다. 이후 993년, 요나라는 고려를 침공해 복속시키려 했고 이것이 제1차 여요전쟁의 시작이었다. 고려의 완강한 저항에 공세가 한풀 꺾인 요와 요의 대군이 부담스러웠던 고려는 994년에 고려가 요나라에 신종하고 그 대가로 요나라가 고려의 강동 6주 지배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강화 협상을 이루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화친 조약은 양국 모두에게 잠시 동안의 휴전 협정으로 남게 되었다.[6]

이후 거란은 1010년 고려에서 벌어진 목종 시해사건의 문죄(問罪)를 구실로 제2차 여요전쟁을 일으켜 고려를 완전히 종속시키려 했다. 그러나 통주 전투에서 강조의 30만 고려 주력군을 깨고 개경까지 불살랐음에도 고려의 항복을 받아내지 못했고, 1019년에 다시 침공했지만, 요나라는 끝내 고려의 완전한 종속을 이루어내지 못했다.[7]

  • 한편 제2차 여요전쟁은 거란의 내부 사정도 작용하였는데, 요 왕조는 초창기부터 황위 계승 분쟁이 매우 첨예하게 벌어졌으며 드라마 시점에서 계승 투쟁 없이 권력을 승계한 유일한 요나라의 군주는 성종뿐이었다. 모후의 활약 덕분에 황권을 유지한 성종은 승천태후가 승하하고 난 뒤부터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여 어머니의 부재로 인해 발생한 권위의 공백을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성종은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권위를 쌓기 위한 첫 번째 무대로 고려를 선택했으며 무리한 원정이라는 비판을 묵살하면서까지 친정을 감행했다.

그렇게 황제가 친정한 제2차 여요 전쟁에서 거란은 통주 전투에서 강조가 이끌던 30만 고려군을 격파하고 고려의 수도인 개경까지 점령하는 전과를 거두었고, 그 과정에서 성종은 조정과 군부로부터 지도력과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거란의 2차 침공은 성종의 권위가 확립되는 전환점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으며 요나라의 역사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사건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8]


2.2. 무기[편집]


  • 1회에서 김숙흥이 거란 척후병을 추격할 때 쇠뇌를 마상에서 사용한 장면이 지적되기도 했다. 당대의 군용 쇠뇌는 엄청난 장력 때문에 장전하려면 발까지 사용해야 해서 마상에서 절대 쓸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이 인물만 그렇게 사용하는 것으로 묘사되었고 그런 부대가 있는 것처럼 묘사된 것도 아니며, 당시 대부분의 군인들은 무기를 각자 맞춤형으로 제작하여 사용했기 때문에 문제되는 부분은 아니다.
    • 편견과 달리 동아시아에서 쇠뇌 기병은 이미 중국 전국시대~한나라 시기부터 사용된 유서 깊은 병종이며, 송나라에서는 마갑을 씌운 쇠뇌 중갑 기병(카타프락트), # 중세 유럽에도 석궁 기병이 있었다.# 따라서 마상에서 석궁을 쓸 수 없다는 것은 잘못된 말이며, 장전이 불편하다는 단점이 있긴 해도 운용이 충분히 가능했다.

  • 화살통인 '전통(箭筒)'이 전통(傳統)적인 첩개, 동개가 아닌 등에 매다는 물건으로 나온다. 현대의 국궁 동호인들마저 장비를 갖추면 동개, 아니면 임시방편으로 궁대(활띠)를 허리춤에 묶어두고 전대처럼 쓰고 있는 실정인 것을 생각해보면 이상하리만치 한국 영상물 제작자들이 편집적인 것.[10]
    • 다만 5회에서 양규가 화살을 꽂을 때 전통을 등에 매달지 않고 허리춤에 매달아 허리 뒤쪽으로 돌려 담는 장면을 보여주고 깍지를 끼거나, 활시위를 놓을 때 오른손을 튕기는 장면도 나와서 기존에 신경쓰지 않던 부분을 살렸음을 알 수 있다.
    • 지휘관 양규가 일반 화살과 함께 일정 비율로 효시를 챙기는 것도 세심한 묘사다. 효시는 화살에 일종의 호루라기를 붙여서 쏘는 방향으로 날카로운 소리가 나게 만든 것으로, 지휘관이 공격 지시를 내리거나 부대의 목표물을 정하는 중요한 물건이며 한국사에서는 명궁으로 유명한 장수인 이성계애용한 화살로도 유명하다. 전쟁터에서 지휘관에게 효시는 필수지만 기존 사극에서는 태조 왕건에서만 제한적으로 등장했을 뿐,[9] 나머지 사극에서는 이를 다루지 않았다. 효시를 몇 번째에 꽂는지 확인하는 것 역시 디테일한 묘사이다.

  • 5회 공성전에 나오는 투석기는 동아시아에서 활용하던 인력식 투석기(망고넬)가 아니라 무게추와 인력 밧줄 꾸러미를 함께 사용하는 형태의 투석기로서 인력식에서 무게추식로 변화하는 과도기에 탄생한 것이다. 무게추식 투석기는 제작 기간이 긴 대신에 인력을 적게 쓸 수 있고 정확도가 상대적으로 높으며 안정적으로 포탄을 발사할 수 있었다.
몽골군은 이 트레뷰셋 전문가들을 중동에서 고용하여 공성 무기를 제작하게 하고 회회포(回回砲)란 이름을 붙여 양양성 공략에 사용했다. 회회포가 투입된 양양성 전투는 동아시아에서 인력식 투석기가 아닌 다른 종류의 투석기를 사용한 사례 중 하나다. 드라마에 나오는 투척 방식이나 거리 측정법은 몽골군이 중동 지역의 공성술을 습득하여 활용하던 방식과 유사하다.
  • 요군은 노문진 같은 한인 장군과 한인 기술자들로부터 공성술을 습득했기 때문에 중국의 인력식 투석기를 사용하는 게 적절할 것이지만, 무기의 운용과 관련된 묘사를 살리기 위하여 부득이하게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는 몽골군의 전투 방식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11]
  • 흥화진의 고려군 또한 투석기로 맹화유를 날려 맞대응하는 장면이 있으나 실제 역사 고증에 맞게 하려면 투석기가 아닌 팔우노(八牛弩)라는 노포를 운용해야 했으며, 맹화유는 흥화진의 성문을 뚫으려는 충차(衝車)를 불태울 때 사용해야 한다.

  • 기존 KBS 대하드라마와 마찬가지로 도검 패용은 가죽띠를 사용하는 방식 등을 재현하고 있지만, 패용 고리는 대부분 사용하지 않고 손에 쥐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 본작에서는 기존의 고질적인 문제들을 많이 개선했기에 후술할 건축 재현과 마찬가지로 아쉬운 부분이다.[12] 허리띠에 연결한 경우도 많은 것으로 보아 촬영 편의나 제작비 문제 때문에 혼용된 듯 하다.

  • 각궁 소품이 실제 자연 재료로 만든 전통 각궁이 아닌 현대의 개량궁이다. 전통 각궁은 장인들이 재료를 준비하고 수제작해야 하는 만큼 비용이 개량궁보다 2 ~ 3배 높은 가격, 긴 제작 기간, 아교가 습기에 취약한 점 등 구매와 관리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시위를 걸지 않은 상태의 활도 종종 묘사하는데,[13] 전통 각궁과 개량궁은 시위를 걸지 않았을 때의 형태가 서로 다르니 궁금하다면 개량궁 항목을 참고하는 게 좋다.

  • 고려군의 결전병기로 검차가 계속 강조된다. 다만 7회에선 검차를 뛰어주기 위해서 마치 거란군이 검차 개념을 모르는 듯이 연출되었는데,[14] 검차는 무경칠서육도삼략[15]에도 나오는 교과서적인 대기병 무기이므로 거란군이 그 개념을 모를 수가 없다. 원작자인 길승수 작가의 인터뷰 에서도 "검차는 고려만의 무기는 아니고 모든 농경민들이 유목민을 상대할때 쓰는 수레로 만든 무기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는데[16] 고려군이 검차를 '잘' 써서 놀라는 정도로 했으면 고려도 띄워주고 고증에도 더 맞았을 것이다.[17]


2.3. 의복[편집]


  • 기존 고려시대 사극과 마찬가지로 고려 임금이 담황색 또는 주황색 단령을 착용한다. 면복을 제외하고 알려진 고려 임금의 복식에는 담황색 상포(緗袍), 주황색 자황포(柘黃袍)·자황포(赭黃袍), 치자 염색 치황의(梔黃衣) 등 크게 3가지 색의 황포와 강사포(絳紗袍)라는 홍포가 있었다. 황색 계열 중 상포는 상복(常服)으로 평상시 집무복이고, 나머지 3개는 예복으로 건국 초의 자황포(柘黃袍)는 후대의 자황포(赭黃袍)와 사실상 같고, 자황포(赭黃袍)는 연말연시의 대조회 하례, 팔관회, 연등회 등 큰 행사에서, 치황의는 연등소회 같은 작은 행사에서, 홍색 계열인 강사포도 예복으로 대체로 월별 정기 조회나 그에 준하는 행사 때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21]
    • 이처럼 임금이 입는 옷이 여러 개다 보니 목종은 주황색, 현종은 담황색으로 다르게 묘사할 수 있었으나, 엄밀히 따지면 자황포와 상포는 용도가 다르기 때문에 이 둘의 의복은 고증과 상관 없이 단순히 색깔만 다른 것이다. 각 임금의 상징색은 전작인 <천추태후>에서 경종은 주황색, 성종은 노란색, 목종은 주황색, 현종은 노란색으로 번갈아가며 부여한 내부 설정을 계승했다.[18] 다만 노란색은 천추태후에서 샛노랗게 묘사된 것과 달리, 고려도경 원문에서 '상()'이 엷은 노란색을 가리키는 점을 감안하여 전작인 <정도전>, <태종 이방원>에서부터 명도와 채도가 상당히 낮아졌다.[19][20]
    • 한편 고려도경에는 '고려왕은 휴식을 취할 때 검은 두건에 하얀 옷을 입어 일반 백성과 다를 바 없다고 한다.'고 되어 있는데, 드라마에서는 완전한 평복처럼 묘사하지는 않고 흰 용포로 대체하였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복장 중 홍색 계열인 강사포는 명백하게 용포와 단령이 아니며, 나머지 황색 계열도 전부 용포나 단령 계통의 옷인지는 불명이다. 드라마에서는 집무복은 황포, 편복은 자유 형식의 외출복과 침전에서 쓰는 백포로 구성했다.

  •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고려 임금이 오대십국시대복두의 일종인 절상건을 착용한다. 보통 고려도경에서 왕의 복장으로 상포에 쓴다는 오사고모라고 하는 것을 오늘날 시각에서의 절상건이라고 본다.[22] 그러나 시대에 따라 오사고모라고 불리는 모자의 형태가 일정하지 않은데다 뿔이 위로 뻗는 경우는 보통 절각향상처럼 구체적으로 방향을 지시하는 말이 있고, 고려도경에서는 왕이 관료나 백성 앞에 나설 때는 여기에 복두를 더했다고 해서 둘을 별개의 모자로 인식하고 있으므로 분명하지는 않다.[23] 금실 테두리 장식 역시 기본적으로는 창작이다.[24] 송나라 황제나 고려 말 공민왕 어진의 복두를 기준으로 한다면 실제로는 일반 신하들처럼 검정색 단색의 전각복두였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드라마 내에서 임금과 신하의 신분을 구별하기 위해 창작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 현종이 의례에서 천자국의 복제인 12류 면류관을 착용하는데, 각 류에 달린 12개 구슬이 모두 백색으로 나오지만, 원래는 위에서부터 붉은색-백색-푸른색-누른색-검은색-붉은색-백색-푸른색-누른색-검은색-붉은색-백색 순으로 내려오도록 구슬 색을 배치해야 한다. 극 중 묘사처럼 고려 전기의 군주가 12류관 또는 9류관을 썼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고려사에 의하면 문종 19년에 거란 황제가 고려 국왕에게 제후국 복제인 9류관 및 9장복 등을 사여하였기에 최소한 11세기 후반부터는 분명히 9류관을 썼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인종 20년에 금 황제도 9류관과 9장복 등을 보냈다고 한다.[25] 다만 면류관복 자체는 신라 때부터 있던 것이며, 하사받은 예복은 외교 의례에서 활용하는 일이 많았기에 이것만으로 전래 시점이나 실제 사용 여부를 가르기 어렵다.

  • 관료의 복두 재현은 원작 작가 길승수의 책 고려거란전쟁: 고려의 영웅들의 설명을 반영했다. 문관은 원래 고려 사극에서 흔히 보던 뿔이 일자로 뻗은 전각복두를 쓰고, 중앙의 무관은 뿔이 위로 꺾인 절각복두를 쓴다고 한다.[26] 그러나 일반적으로 고려 복식을 이해하는 데 있어 기본적인 자료가 되는 고려도경에 나타나는 고려 군인들의 모자의 종류는 그렇게 단순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정확히는 고려도경에서 상절각복두 또는 상절복두라고 지칭하는 것은 근위대 중에서도 궁궐 숙위병인 공학군이 착용하던 것이며, 그보다 높거나 낮은 지위의 중앙의 군인들 중 복두를 착용하는 경우는 대개 전각복두이거나 그 변형이다.[27] 게다가 이 절각복두라는 개념 자체가 뿔이 모자 바로 뒷 부분에서 꺾이는 형태인지, 아니면 드라마의 묘사처럼 양쪽 뿔 끄트머리가 구부러진 형태를 가리키는 것인지도 단정짓기 어렵다. 후자의 경우 중국에서는 대체로 전각복두의 다양한 형태 중 하나로 인식되며 별개의 개념으로 구분하지는 않는다.
    • 원작의 설명이 기계적으로 반영되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문관인 전중감, 공부시랑 등을 역임한 이주정이 절각복두를 쓴다. 또 3~4회에 걸쳐 묘사된 현종의 즉위식에서, 원작의 설명대로라면 강조는 중추사 우상시, 이현운은 이부시랑으로서 각각 도순검사와 도순검부사로 나가있었기 때문에 이 둘의 복두는 같은 형태여야 한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강조는 절각복두를, 이현운은 전각복두를 쓴다. 강조는 중앙의 문관직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조정에 돌아와서는 절각복두를 착용할 이유가 없다. 만약 문무 여부를 당시의 직임에 따라 판단하여 병용한다 치면 이땐 이현운이 절각복두를 써야 한다. 4회에서 이현운이 전각복두를 쓰고 다니며 문관 놈들 운운한다거나, 동급의 문관직인 병부시랑을 맡은 장연우가 절각복두를 착용하기도 하는 것을 볼 때, 개별 인물마다 경우에 따라 다른 복두를 쓰고 나올 때는 원작에서 제시하는 기준을 기계적으로 따르지는 않았다. 한편 고려시대의 회화 자료와 달리 복두 뿔 너비가 삼각형에 가까울 정도로 과도하게 넓어지거나, 뿔이 부착된 위치가 너무 높거나 하는 기존 소품의 한계 역시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 관복에 어대(魚袋)를 착용한다. 어대는 출입증을 담은 주머니 겸 장식으로 6품 이상 문관의 공복에 착용한다. 허리띠에 끈으로 드리운 주머니가 어대이다. 이는 이전의 고려시대 사극에서는 재현하지 않던 것이다. 다만 드라마에서는 주요 배역들만 차고 나오고, 주머니의 색깔을 구분하는 기준이나 근거는 없다.

  • 행렬에 등장하는 고려 친위군 복식은 고려도경에 묘사된 신호좌우친위군의 금화대모를 재현한 것으로 보인다.

  • 고려의 왕사와 국사가 어깨에 걸친 붉은 가사는 국보 제218호 '아미타삼존도' 불화를 참고하여 재현하였다.

  • 고려시대의 여인들이 외출할 때 착용했던 쓰개인 '몽수(蒙首)'가 재현되었다.

  • 고려도경에 따르면 고려 갑옷의 기본적인 큰 틀은 여말선초 찰갑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28] 그렇기에 여말선초 찰갑에 개심사지 오층석탑의 팔부중상 부조, 몽골의 1차 일본 침공 당시 고려군을 묘사한 회화 같이 탱화나 불탑 부조, 몽고습래회사 등에서 고려군이 착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봉시식이 달린 송나라식 투구를 조합한 것은 현재 시점에서 참고할 수 있는 자료를 최대한 활용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29]


  • 원래 거란 황제들은 중국식 복제를 따랐으나 본 작품에서는 유목민 복식만을 하고 있다. 고려 국왕과의 구분과 유목민이라는 개성을 살리기 위함과 동시에 거란 내에서도 거란족과 한족을 구분하는 장치이다.[30] 한기를 위시한 한족 관료들은 단령복두를 쓰고 나온다.


2.4. 건축[편집]


  • 광화문을 배경으로 한 장면은 기존 조선시대 배경의 문경새재 세트장[31]을 활용하여 재현이 형편없지만, 그나마 이외의 장면은 남아있는 고려시대 건물 중 하나인 봉정사 극락전의 화반과 공포를 그대로 차용하여 어느 정도 재현에 신경쓴 MBC 신돈 고려 건축 세트를 활용한 점이 다행이다.

  • 한국 사극의 고질적인 오류가 왕과 신하가 '정전(政殿)'에 모여 정사를 논하는 것인데, 실제로 고려와 조선 때 궁궐의 정전은 외국 사신이 오거나 특별한 국가 행사 시에만 사용하던 공간이었다. 고려시대 개경 본궐(만월대)의 경우, 기록을 보면 외국 사신 접대 및 각종 불교 행사를 진행한 공간으로 적혀있다. 일반적으로 정사를 논하고 왕이 대부분 있던 공간은 '편전(便殿)'이다.

  • 정전 세트의 경우 '보'를 사용하는 대량식 구조에서는 나올 수 없는 깊이의 공간이다. 내부에 기둥이 더 있고 보로 연결되는 구조여야 하는데, 실제로 지붕부를 실내 세트장에서 구현할 필요가 없다 보니 이를 생략하며 깊이는 남북 방향으로 깊은데 비해 내부 기둥을 지나치게 많이 줄여서 구조적으로 말이 안되는 넓은 공간을 만들게 된 것 같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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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궁 만월대의 초입인 신봉문. 경복궁의 광화문격에 해당한다.

  • 고려의 본궐을 묘사하며 광화문(廣化門) 뒤로 궁궐의 내문들이 열을 맞춰 쭉 배치된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실제 고려의 개경은 황성의 정문인 광화문이 동쪽으로 나있었고, 광화문을 지나 3성 6부가 모여있는 대로(한성의 육조거리에 대응한다)를 쭉 따라간 후 다시 오른쪽으로 틀어야 궁성의 정문인 승평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명백한 오류다. 이러한 오류는 드라마 대왕 세종을 위해 만들어진 광화문(光化門) 세트에 현판만 바꿔달아 썼기 때문으로 보인다. 제후국 양식을 따른 조선은 도성에서 궁궐의 정전까지 4개의 문(숭례문-광화문-흥례문-근정문)을 통과하도록 구성되었지만, 고려는 황제국 방식을 모방해 황성에서 궁궐의 정전까지 5개의 문(광화문-승평문-신봉문-창합문-회경문)을 통과하도록 구성되어 있기에 경복궁 광화문에 실질적으로 대응되는 문은 승평문임을 간과하고, '황성'의 정문이라는 설명을 '궁궐'의 정문으로 해석해 발생한 문제로 보인다. 만약 경복궁 광화문이나 창덕궁 돈화문 앞처럼 본궐의 외부를 묘사하고 싶었다면 승평문이나 신봉문 현판이 더 적절하다.

  • 침전의 경우 바닥에는 카페트를 깔고, 당가를 응용한 침대를 구성했는데 재현에 완전 맞지는 않지만 당시 고려 가옥은 입식구조였기에 아주 틀리지는 않다. 극 중 정전의 바닥을 보면 나무널로 마루를 구성한 것을 볼 수 있는데, 고려나 조선 모두 정전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다. 나무널로 마루를 깐 것은 반영 오류.

  • 단청의 경우 송나라 영조법식의 것을 참고한 것으로 보이나, 실상은 1972년 서울 진관사에서 신축된 건축물인 '나가원'의 단청과 거의 같다. 나가원의 경우, 단청 머리초가 송나라 영조법식에 나오는 단청 머리초와 흡사하지만 자세한 구성은 다르기 때문에 엄연히 말하면 재현에 맞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재현에 맞으려면 공포부를 참조한 봉정사 극락전의 12세기 고려 단청을 참조하고, 송나라 및 금나라, 요나라의 단청을 참조하는 것이 맞다.

  • 대량원군(현종)이 승려로 출가해서 기거하던 신혈사는 당시엔 주지인 진관스님이 혼자 생활하던 작은 암자였다고 하나, 작 중에선 이미 승려와 전각이 많은 큰 사찰로 등장한다. 사서에는 현종이 출가할 '당시'의 신혈사가 진관이 머무르는 작은 암자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목종이 대량원군을 직접 출가시켰다는 설이 힘을 얻고 있어서 목종이 직접 진관사에 지원을 해주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이는 모두 추측에 지나지 않으며 진관사의 중창이 현종 즉위 이후에 이뤄졌다는 사서의 기록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진관사의 큰 규모는 제작진의 창작으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 본작을 비롯한 여러 사극에서 재현되지 않는 부분인데, 고려의 성벽 위에는 투사병기나 외부침입을 막기 위해 회랑 건축물인 '성랑'이 존재했다. 성벽에 나무 기둥이 꽂혀 있고 그 위에 지붕이 올라가는 것이다.# 고려시대 기록을 잘 살펴보면 성벽을 개축하거나 쌓을 때 수백 칸, 수천 칸을 쌓았다는 식으로 되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칸'이란 기둥과 기둥 사이를 의미한다. 이렇게 성벽 위에 올라갔던 회랑은 '성랑', '행랑', '궁가', '나각', '낭옥'이라는 이름으로 조선 후기까지도 등장한다. 이는 기둥을 성벽 안쪽으로 박아 넣어서 올리는 형태였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전기까지 유지되던 성랑은 임란 이후 점점 사라졌는데 인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시대가 변함에 따라 나무 기둥에 물을 묻히는 것 정도로는 화공을 막을 수 없게 되었고, 더는 필요 없어진 게 결정적인 듯하다. 그럼에도 성랑은 좀 퇴락하긴 했어도 조선 말기까지 존재했는데 이후 조선은 벽돌성을 만들어보다가 익힌 기술력으로 벽돌 여장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조선 말기에 이르면 대규모의 성랑은 그대로 사라지고 성벽 위 경비 초소 정도만이 남게 되었다.


2.5. 문화[편집]


  • 프롤로그 후에 나오는 개경의 거리를 자세히 보면 외국인이 있다. 벽란도에서 외국과 활발하게 무역하면서 외국 상인들이 고려와 교류한 것을 반영한 것이다.

  • 궁궐 연회에서 동화 청자인 '청자 동화 연화문 표주박모양 주전자'와 동화 청자 술잔을 사용하는데, 동화 청자는 고려 중기인 12세기에 출현한 것이라 드라마의 배경인 11세기 초기에 사용하기에는 적절치 않다. 이는 연출이 단조로워지는 점을 개선하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동화 청자도 연대상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고려 시대의 유물이기에 큰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 강감찬과 소배압이 마주 앉아 문답을 주고 받을 때에 흑유 자기를 쓴다. 도자기하면 백자나 청자만을 떠올리는 일이 많지만, 철 함유량이 높은 유약을 쓴 흑유(黑釉) 자기도 꽤 제작했다. 송대에는 정복 왕조와의 교류가 많았던 화북 지역을 중심으로, 오대와 송의 도자기 문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요 왕조에서도 흑유 자기를 제작했다. 따라서 소배압이 강감찬에게 흑유 잔을 내어주고 흑유 주전자로 술을 따라주는 것은 적절한 시대 재현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원대 중기부터 본격적으로 생산하는 청화 백자를 장식품으로 배치한 것은 재현성 측면에서 부적절하다. 전쟁이 일어나던 시기에는 송 · 요 양국에서 백자를 생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재현성 측면에서는 순백자를 배치하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 1회 흥화진에 나오는 쌍계 머리를 한 아동들 역시 당대의 생활상을 반영한 모습이다.

  • 양규의 아들 양대춘이 두건 뒤로 머리를 빼서 늘어트린 모습은 고려도경에서 고려의 미혼 남성을 묘사한 모습에서 가져왔다.

  • 등장인물이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지 않을 때 종종 상투를 그대로 또는 가죽띠로만 두르고 드러낸 모습으로 나온다. 그러나 당시에는 상투를 남에게 드러내는 일을 수치스러워 했기 때문에 적절한 묘사는 아니다. 특히 양규최사위가 아무런 쓰개 없이 현종 앞에 서는 장면은 예절에 어긋난 묘사라고 할 수 있다. 이현운은 갑옷을 입고도 문라건을 쓰고 나온 것과 비교된다.[33]

  • 거란 변발은 기존 한국 사극의 레게 머리 비슷한 애매한 상투에서 벗어나 거란 특유의 정수리가 휑한 변발을 보여준다.

  • 사실 작중 등장하는 병력의 숫자들은 고려나 거란이나 대부분 호왈로 쳐서 보는게 좋다. 예컨데 연의의 백만대군 물량으로 유명한 중국 삼국시대는 사실 정사로 따지면 중국에서는 비교적 합리적인 병력 숫자가 운용된 시기임에도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적군을 쳐부순 공식 문서에는 하나를 열로 계산하는 구습이 있었으나, 국연은 싸움터에서 베어 노획한 적군의 목을 상주할 때, 그 실제적인 숫자와 똑같게 했다. 태조가 그 까닭을 묻자, 국연이 말했다.

"대체로 경계 밖의 도적을 정벌하고 참수하거나 포로로 잡은 숫자를 실제보다 많게 보고하는 것은 무공(武功)을 크게 하여 백성들의 귀에 과시하려는 것입니다. 하간은 봉토 구역 이내인데도 전은 등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비록 우리가 크게 이겨 공을 세웠더라도 저는 마음속으로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태조는 크게 기뻐하며, 국연을 위군태수(魏郡太守)로 옮겼다.

이처럼 동아시아에서 병력에 '호왈 몇십만' 운운하는 건 자릿수에 0 하나 더 붙은 거라고 생각하는게 거진 진담처럼 여겨지는 면이 있다. 실제로 수십만 대군을 한번에 보급할 수 있게 된 것은 근대의 일로, 불과 200년전 나폴레옹 전쟁 때만 해도 보급선이 형편없어서 수십만 대군을 정말로 운영했다가는 러시아 원정처럼 병력만 잔뜩 낭비하는 참사가 나기 쉬웠다. 제대로 된 철도나 도로가 없었던 시절에는 수만 명의 보급만으로도 실상 벅찬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사실 사료상이나 드라마 상으로 거란이 입은 손해나 고려가 입은 손해나 작중 양국의 국력으로는 숫자상으로만 보면 감당 못할 숫자인데도, 나중에 보면 몇년만에 또 다시 양국간 수만~수십만 대군을 동원하는 말도 안 되는 장면이 연출되는데,[34] 이걸 바로 동아시아 혹은 고대 군대 특유의 숫자 과장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농담이 아니라 근대 시기에 동아시아 군대끼리 맞붙으면 수십만명 씩 싸우는데 외부의 관측자인 서양인들이 관측하니까 갑자기 장부상 호왈 병력의 1/10 밖에 안 되더란 얘기도 많다. 즉 본작에서 칭하는 병력의 숫자는 실제로는 원래 병력에서 최대 1/10까지는 가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동아시아 사료의 병력 기록 중 비교적 신뢰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것은 한자릿수까지 정확히 표기한 기록이다. 이는 당시 실제 행정 문서를 기반으로 작성된 사료일 가능성이 높다. 여진 정벌 기사를 보면 동원 수나 사상자 수가 거란전쟁 기사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다.

2.6. 언어[편집]


  • 거란(요나라)을 두고 '대제국'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데, 제국이라는 용어는 19세기 초부터 사용된 번역-혼성어다(심지어 1897년에 성립한 대한제국도 공식명칭은 대한국이었다). 당대에는 그냥 '대국' 혹은 '천조'를 사용했다. 대국에 사대할 경우 '상국(上國)'이라고 칭했다.[35] 고려의 경우, 대거란 문서에서 상국이나 '황조(皇朝)'라고 지칭하고 송나라 또한 상국이라고 했는데, 내부적으로는 거란과 송 모두 '북요(北遼)'나 "북조(北朝)' 및 '서송(西宋)'이나 '서국(西國)'으로 지칭하기도 했다. 방위 사용은 이들 나라들이 대등한 입장이었음을 말해주는 측면이 있다.[36] 이는 고려 전기에는 대국과의 관계 성립과 존속을 전제하는 규약으로서 군신 의례를 이행한 것이기 때문에, 원 복속 이전까지 황제(천자)의 신하라는 위상이 고려 국내에서는 관철되지 못한 데서 연원한다. 5회에서 고려 신료가 거란 사신에게 ‘상국’에 대한 신의를 내세우는 부분 등에서는 당대상이 재현되고 있다. 9-10화에서도 거란 성종이 자신을 “대거란 제국의 황제”라고 칭하는데, 이 또한 고증 오류라고 볼 수 있다. ‘대거란의 황제’ 정도로 자칭했을 것이다.

  • 원 간섭기 이전의 고려측의 기록[42][43]을 토대로 극 중 고려의 군주는 '왕'이나 '황제'라는 말보다 공식 호칭인 '성상' 또는 '성상 폐하'로 더 자주 불린다.[44] 아울러, 선대 군주에게는 일관되게 대왕호를 붙여 '태조대왕', '성종대왕' 식으로 호칭한다. 현재 집권 중인 군주에게는 황제라고 호칭하면서 선대 군주를 대왕이라고 호칭하는 것은 고려 전기를 다룬 전작 사극들과의 차이점이다. 이전 고려 전기 사극들에서 대왕호와 황제호를 병용한 경우는 없었으며 선대왕과 현왕 모두 일관되게 황제라고만 호칭하였다.[45][46] 본 드라마에서 대왕호와 황제호를 병용한 이유를 추측해보자면 단지 고려국왕들이 사후 받은 정식 시호가 대왕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용어가 통일되지 않은 고려 전기의 국체를 고증하려 했을 가능성도 있다.[47][48] 가장 간명한 이유는 이미 고구려금석문에 '대왕 폐하'라는 표현이 나타나기 때문이며, 따라서 고려 전기까지의 지적 환경에서 ‘대왕’호와 ‘황제’호가 등급이 구분되는 표현이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49][50]
    • 내부적 쓰임과 별개로 외교적으로는 대왕은 단순히 왕에 대한 미칭이었다. 이후의 일이지만, 금나라 사신의 경우에도 고려 의종에게 '대왕'이라고 호칭하였으며, 고려 내정에 지배력을 행사한 몽골의 경우에도 원종이나 충렬왕, 충선왕에게 '대왕'으로 호칭한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 있다. 한편 중국 사신들이 면전에서 고려국왕에게 아뢸 때 왕호의 뒤에 어떤 경칭을 붙였는지는 기록이 없어 불분명하다. 다만 중국 황제들이 고려국왕을 자국의 친왕급으로 대우한 것을 볼 때, 사신 또한 고려국왕을 친왕급으로 대우하여 '대왕 전하', '고려왕 전하', '고려국왕 전하'라고 호칭했을 가능성이 있다. 애초에 중화제국은 황태후[37]와 황제를 제외한 황후,[38][39][40] 황태자, 친왕 등의 황실 일원에게 모두 '전하'로, 고위 신하들에게는 '각하'로 호칭했고 이는 고려도 마찬가지였다. '저하' 경칭은 고려와 조선에서만 전하의 하위 호칭으로 쓰인 희귀한 경우이다.[41]

  • 이전의 고려시대 드라마에서는 '태후 마마'라는 호칭이 줄곧 사용되었으며, 본작은 무인시대처럼 '태후 폐하' 호칭이 사용되었다. 원작자 길승수는 '태후 폐하'라는 호칭에 대해 기본적으로는 '전하'가 맞는 호칭이라고 말하였고, 대량원군을 '전하'라고 부르는 부분도 '영공'이나 '저하'가 더 적합할 것이라고 하였다.# 11세기의 고려에서 '태후'에게 전하라는 경칭을 썼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물론 당시 중원에서 태후에게 '폐하'를 경칭으로 사용한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이규보가 작성했던 『동문선』 제37권의 「사태후표(謝太后表)」 및 『동국이상국집』 전집 등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최소한 13세기 초의 고려에서는 태후를 '왕태후 전하'로 불렀다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52]
    • 11세기 초에는 고려의 오등봉작제가 완성되기 이전이라 종친에게는 '원군', '낭군', '궁군', '대군', '군' 등의 호칭을 붙였고 이것이 나중에 왕족에게 주어지는 공후백 3등작으로 나누어지게 되므로 당시 대량원군에게 '영공' 호칭을 붙이는 것은 오히려 고증에 맞지 않다. 또한 대량원군 같은 경우에는 종친이기에 이성 제후에게 쓰는 '저하' 경칭은 맞지 않다. 대량원군은 당시 생사가 확인된 유일한 용손이자 목종과 촌수가 가까운, 유력한 왕위계승자였기 때문에 태자나 친왕급의 예우를 해주어 '전하'라고 호칭하여야 하며 이 부분은 제작진의 재현이 맞다.[51]

  • 원정황후가 상궁과 원화황후에게 '황후 전하'라는 경칭으로 불리는데[53] 실제로 고려의 왕후에게는 '전하' 경칭이 사용되었다. 아울러 이복동생인 원화황후에게는 '형님'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실제로 과거에는 남성과 여성을 가리지 않고 손위형제 또는 자매에게는 '형'으로 칭했으며[54] 손아래형제 또는 자매에게는 '아우'로 칭했다.

  • 현종은 평상시 자신을 묘사할 때 '짐'보다는 '나'라는 자칭을 많이 쓴다.[55] 본 드라마의 원작자인 길승수 작가는 당시 고려의 외왕내제를 고려하여 작중 현종이 '짐'이라는 지칭을 더 많이 썼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다만 원래 군주들 가운데는 신하를 허물없이 대하는 자리에서는 짐이나 과인이라는 표현보다 나라는 표현을 많이 쓴 군주들도 많다. 사실 후대로 갈수록 동아시아의 군주들은 평소에는 짐 같은 거창한 표현보단 '나'를, 정확히는 여(), 아(), 고()를 많이 썼다. 중국 사극에서는 이를 반영하여 제후왕들이 스스로를 낮출때만 과인이라 칭하고 평소에는 고(孤)를 많이 쓴다. 비슷하게 청나라 황제들도 일상적으로는 짐보다는 현대 일반인의 중국어와 같이 나(我)라고 말했는데 강희제 역시 평범하게 말할 때는 나라는 표현을 썼다. 한국 역시 공식적인 장소에서는 짐 또는 과인이라고 했지만 일상적으로 기록할 때는 일반인과 같이 평범하게 '나'를 의미하는 '여(余)'를 사용했다고 한다. 신라 경명왕이 직접 작성한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의 비문에서도 '내가 지었다(余製)'라고 쓰여 있고[56] 조선왕조실록 상에서도 왕이 내리는 명령서인 교지 등에서조차 평범하게 '나'를 의미하는 '여(余)'를 많이 사용했다.[57]

  • 만세 삼창은 황제만이 받을 수 있는 하례지만, 고려도 군주에게 만세를 불렀다. 예종~인종 대에 만세를 부른 기록이 존재하며, 원종 또한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며 백관들의 만세를 받은 바 있다. 고려사 지(志)를 보면 각종 의례에서 신하들이 군주에게 만세를 부르는 절차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만세삼호(萬歲三呼)는 충렬왕 대부터 원의 개입으로 한 등급 낮은 천세로 격하된다.[59] 조선에서는 천세와 만세를 혼용하다 고종 대에 완전하게 만세로 변경되었다.
    • 흥화진 전투가 끝난 후 고려 백성들이 “양규 장군 만세”를 외치거나 서경성에 들어온 동북면 군대에게 서경 주민들이 만세를 외친다. 본래 만세는 임금에게 올리는 하례이며 일개 신하에게는 올리지 않는다. 따라서 드라마에서는 전형적인 현대어투로 사용된 것이다. 고려라는 대상 자체에 만세를 불렀다는 설정일 수도 있으나 전근대에는 국가를 대상으로는 만세든 천세든 부르는 경우는 없다.[58]

  • 현종이나 신하들이 고려의 수도를 있는 그대로 '개경'이라고 부르며 이전 작품들처럼 '황도'라고 부르지 않는다. 사실 개경은 광종 대에 잠깐 황도로 불렸다가 성종 대에 다시 개경으로 명칭이 바뀌었는데, 그 이후에도 민간에서는 계속 황도라는 별칭으로 불렸고 전작인 태조 왕건, 제국의 아침, 무인시대, 천추태후에서는 그런 점을 반영하여 개경을 일관되게 '황도'라고 표현하였는데 본작은 그런 점과 대비된다. 다만 11회에서 개경 정궁을 언급할 때 '황성'이라는 단어를 쓰긴 한다.

  • 드라마에서 목종의 후계자의 칭호로 태자가 사용되었다. 고려 초기에는 태자 칭호가 난립해서 6대 성종까지는 별도로 정윤(正胤)이라는 칭호를 받아 즉위했다. 그런데 성종은 7대 목종을 별도로 정윤이라 칭하지 않고 자신의 종친 시절 작위인 개령군으로 봉하는 방식으로 사실상 후계자로 지명했다.[60] 이처럼 정윤 칭호의 사용이 끊겼기 때문에 현종이 후계자로 지명되었을 때 의도된 칭호가 무엇이었는지는 불명이다. 한편 현종은 부계로는 목종보다 한 항렬 높고 모계로는 형제뻘이며,[61] 김치양의 아들도 굳이 따지자면 목종에게 형제뻘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인식으로는 양쪽 다 태자라는 칭호가 적절하지 않다. 무신정권 이전의 고려 임금의 형제 상속에서도 후계자로서의 별도의 칭호는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극 중 목종의 후계자를 태자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시청자의 편의를 위해 후계자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황제국 용어를 임의로 차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 고려 조정에서 거란의 황제를 '거란주'라고 지칭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당시 거란과의 조공책봉관계에도 불구하고, 고려 국왕이 거란 황제의 제후라는 외적 위상은 고려 내정에 관철되지 않았다. 즉, 고려 내부적으로는 자국이 거란의 제후국이라는 인식이 희미하였으며, 거란의 침공으로 인해 양국의 관계가 파탄난 시점에서 굳이 거란 황제라고 불러줄 필요성조차 상실된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62]

  • 거란 배역 대사의 외국어 혼용 처리에 몽골어가 사용되었다.[63] 거란 민족이 몽골인과 한인에게 동화되어 거란어가 사멸했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 몽골어를 부분적으로 채용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거란인과 몽골인들은 같은 동호계 민족이었으며 요나라 시기에는 서로 통역 없이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을 정도로 언어 유사성이 높았다. 현대에 거란어를 연구하면서도 몽골어를 참고하는 실정이다. 몇몇 인터넷 커뮤니티와 역사 동호인들을 중심으로 다우르어를 사용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지만, 이 설이 지지를 받는다는 점과는 별개로 현실적으로 다우르어는 고대 몽골어와 가까운 고어(古語)로 취급받고 있는 실정이라 몽골어를 사용하는 게 타당하다. 결정적으로 유전자 검사를 진행한 결과 다우르인들은 몽골어족의 직계 후손은 맞으나[64] 거란의 직계 후손이라고 부르는 건 완전히 불가능할 정도로 유전자가 일치하지 않았다.[65]


2.7. 거란[편집]


  • 강감찬이 현종에게 요군의 병력 동원 방식에 대해 설명한다. 강감찬 말대로 말 먹일 풀이 없어지는 겨울에 전쟁에 나서는 것은 맞지만, 유목민들이라고 해서 겨울만 되면 약탈에 나서는 것은 아니며, 요 조정에서 유목민들을 통제했기 때문에 아주 정확한 말은 아니다. 그리고 강감찬의 예시에 맞는 병력은 부족군으로서 정규군이긴 하지만, 요군의 주력 부대는 아니었다.
    • 요군의 주력은 황제의 직할령인 알로타에 속한 부족에서 선별한 어장친군과 궁위기군으로서 어장친군은 상비군이며 궁위기군은 황명이 내려지면 소집하는 병력이었다. 이들은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으며,[66] 부족민들 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정예병이었다. 또한 요군은 거란인들이 주력이긴 하지만 한인, 발해인, 해인, 돌궐인, 여진인, 위구르인 등이 소속된 다민족 혼성군이었다. 드라마에서는 이러한 구분을 현실적으로 구현하기 어려웠는지 복장을 통일하고 모두 거란인으로 구성했다.
    • 고려 역시 발해유민들 외에, 지배하의 여진족들을 동원했을 가능성이 높다. 발해유민[67]과 여진족의 경우 고려측과 요측 양쪽에서 동족상잔을 벌이는 전쟁이었을 것이다.

  • 드라마에서는 상경 임황부를 요나라의 수도로 설명했지만, 성종 대의 수도는 상경임황부, 동경요양부, 중경대정부, 남경석진부의 4개였다.[68] 오랜 수도로서 위상이 높았던 상경을 진정한 제1수도로 볼 수도 있겠지만, 드라마의 배경 시점에서는 중경의 위상이 높아져 상경은 점점 영향력을 잃고 있었고, 종국에는 중경에게 수도로서의 역할을 내주게 된다.
    • CG로 구현한 상경성의 모습도 평지성인 원래의 상경성과는 다르고, 겨울이어서 눈으로 뒤덮여야 할 곳이 신록으로 무성한 상태이다. 그렇지만 상경임황부는 제대로 된 복원도도 없는 형국이라 제작진의 상상력을 충분히 적용할 수 있고, 드라마 제작 시점도 여름이었기 때문에 날씨까지 재현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다. CG의 특성상, 실제 지표면과 그래픽 사이에 가장 큰 이질감이 생기는 석축부를 나무로 덮어버리는 것 역시 필연적이었다.

  • 요나라의 황제들은 사시날발이라 부르는 순행 제도를 운영하여 5경은 보조적인 역할이고 계절마다 이동하는 황제의 행궁이 정치의 중심이었다. 황제들은 행궁에서 정사를 돌보고 군대를 훈련시켰으며 속국과 속부들을 통제했다. 6회에서는 성종이 정확하게 '날발'이란 단어를 사용했으며 그가 언급한 대로 요의 황제들은 순행 때마다 대규모 사냥을 하여 기마 군단의 훈련 상태를 점검하고 상벌을 내렸다.
    • 요의 황제들에게 있어 사냥은 유목민의 기풍을 유지하는 중요한 문화로서 단순한 유희가 아니었다.[69] 특히 성종이 원정에 나선 겨울 날발 때는 중요한 군국기무를 처리하고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는 한편, 다른 계절 때보다 군사를 동원한 사냥을 더 많이 하고 무예 연마에 힘썼다.

  • 소배압이 척후병을 내보내 고려 본군의 위치 파악을 지시하는데, 요군은 척후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해서 원탐난자라고 부르는 정찰병들을 보내 적군의 위치를 파악하고 그 사정을 상세히 살피게 했다.

  • 요군의 물자 보충 방법인 타초곡에 대해 묘사했다. 약탈이라 할 수 있는 타초곡은 물자와 재화도 빼앗았지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약탈품은 사람이었다. 영토가 넓지만, 인구가 적고 송과 고려에 비해 농경 지식이 부족한 요는 농경 지식이 풍부하고 선진 문물을 전수해 줄 수 있는 정주민들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래서 전쟁을 벌일 때마다 현지 주민들을 납치해 끌고 갔으며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여요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끌려간 인민들은 발해인들처럼 노비가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새로운 터전을 제공받아 그곳을 개척하며 살아갔으며 성종대에는 노예 해방 정책을 실시해 포로 출신으로 노비나 천민이 된 이들을 해방시켰다. 요나라는 특이한 취향이 있어서 잡아온 주민들의 정착지에는 이들이 원래 살던 지역의 명칭을 붙여주었다. 만약 흥화진이 함락당해 주민들이 끌려 갔다면 아마 흥화주나 흥화현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에서 살아갔을 것이다.

  • 다민족 혼성군으로서 공성 부대와 보병을 운용한 요군이 약탈만으로 필요한 물자를 보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애초에 타초곡은 적성국뿐만 아니라 자국민을 약탈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주민의 지위가 낮고 전쟁 수행 물자가 부족하던 초창기의 요나라는 전쟁 물자 마련을 위해 자국의 정주민들로부터 물자를 강제 징발하고 각지에 은패천사를 파견해 부호들의 재산을 강탈했으며 황족과 귀족, 관료들로부터 '헌납'을 받기도 했다. 이 타초곡은 정주민과 한인 세력가의 불만을 크게 일으켜 계속 문제가 되다가 성종대에 자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타초곡을 금지했다.
    • 상식적으로 전쟁을 준비한답시고 자국민의 재산까지 강탈하는 나라가 물자를 최소화한 채로 출발해 적대 국가에서 약탈을 벌이는 방식만으로 물자를 충당한다는 게 말이 안된다. 현지 징발은 보급 방법 중 하나이지, 보급을 완전하게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칭기즈 칸의 군대조차 약탈이 아닌 제대로 된 병참을 통해 보급을 확보했다. 게다가 요나라는 기병 1명당 4명의 정주민 봉족을 할당했고 군역을 맡은 이들은 자비로 군비를 조달해야 해서 부담이 상당했으며 전쟁에서 재화를 얻지 못해 파산하는 이들도 있었다. 약탈이 보급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시들이다.[71]
      • 다만, 약탈은 주로 권한이 없는 지역에서 반대급부를 주는 일 없이 물자와 인력을 끌어 쓰는 행위를 나타내는 의미다. 오늘날에도 순수한 보급체계로 본국에서의 조달이 쉽지 않다. 역사적으로 병참 혹은 보급은 반대급부를 주거나 주권이 확립된 지역에서 일종의 특별세 형식으로 징발하는 것으로 충당했다. 즉, 약탈을 안한다고 근처 지역이 무탈한게 아니다. 괜히 손자병법에서 최고의 장수는 출발할 때의 식량만 가지고 가서 적의 식량을 뺏는 장수로 서술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 적의 식량을 털어 쓰는 것은 약탈 외에 점령지에서의 공출이 들어간다. 어쩌면 약탈과 공출을 포함한 정당한 보급은 침략자와 주권을 행사한 자의 차이[70]에 불과하다. 이를 보면 전쟁 중에 교전지역 혹은 인근지역에서 왜 반란까지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약탈이건 보급을 위한 징발이건 당하는 주민들에게서 거두어 가는 것이다. 이를 모르면 오늘날 선진국에서나 가능한, 본국에서의 비축물자를 통한 보급으로 주둔지는 피해 없는 상황을 생각하는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

  • 요는 태조 야율아보기의 치세부터 약탈이 아닌 정복과 통치를 위한 목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단순한 약탈을 위해서였다면, 그렇게 무리를 하면서까지 하북과 발해, 몽골 초원으로 진출하고 고려를 침공할 이유가 없다. 요 왕조의 진정한 전쟁 목표는 고려의 완전한 복속이나 강동 6주의 병탄이었으며 약탈은 정복 전쟁을 치르면서 얻는 부수적인 이득으로 여겼을 뿐이다. 요군이 굳이 약탈을 위해 벌이는 전쟁이 있다면, 주기적으로 일부 병력을 국경 밖으로 보내 외부의 농지와 목초지를 불사르고 위험이 될만한 세력을 미리 공격하는 예방 전쟁일 것이다.

  • 요의 장기인 기동전을 묘사했다. 흥화진 인근의 고을에 요군이 압록을 건넜다는 전령의 소식이 전해진지 하루밖에 안된 상황에서 일부 병력을 동원해 해당 지역들을 휩쓸어 버렸다. 파상 공세를 거듭해도 흥화진이 함락되지 않자, 요 성종은 조공(助攻)으로 흥화진을 포위한 후, 자신이 직접 주력을 맡아 통주의 강조와 싸워 이기고 개경까지 진격했다. 이는 1004년에 송을 상대로 한 남정에서 보여준 모습과 유사한데, 1004년에는 이 작전이 성공했지만, 1010년에는 고려의 항복이나 강동 6주를 얻는다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퇴각해야 했다.

  • 6회 마지막 장면에서 요군이 사로잡은 고려인들을 화살받이로 내세운 것은 요군의 전술 중 하나로 요 - 후진 전쟁 때도 활용한 바가 있다. 꽤나 잔혹한 짓이지만, 이 방법을 통해 후진의 성을 공략한 적도 있을 정도로 유효한 전술이었다. 요군뿐만 아니라 후대의 몽골군도 중동 정복 전쟁 때 활용했다.

  • 보주에 대한 묘사를 누락했다. 요 왕조는 압록강을 넘어와 검동도에 내원성을, 강변에는 보주(保州)성을 쌓아 전초 기지로 삼았다. 고려의 북쪽 경계는 압록강 남쪽에 위치한 흥화진이었고 압록강을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강동 6주는 처음부터 육지 방면에서의 공격을 염두에 두고 구축한 방어 체계였다. 당연히 강을 이용한 방어나 지연 전술을 구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강을 경계로 국경을 설정하는 것이 직관적이기 때문에 이렇게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보주는 오늘날의 평안북도 의주군~신의주시 일대다.


  • 성종이 항하의 모래(恒河沙)를 언급하거나 행궁에 만(卍)의 깃발을 세워두어 불교 국가인 요 왕조의 모습을 묘사했다. 성종은 불자로서 불교 교리에 대해 조예가 깊었고 거란식 이름도 문수보살의 종이란 뜻인 문수노(文殊奴)였다. 당대 요 왕조는 부모가 아이들에게 보살이나 부처의 종이란 이름을 붙여주는 등 불교 국가로서의 정체성이 상당히 강했다. 또한 극중에서 성종이 서경 인근의 사찰에서 주둔하며 예불을 드리다 암살당할 뻔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굳이 제작진의 연출 방식을 무시하고 핍진성을 따져 분석하자면, 승려란 자가 독송을 제대로 마치지도 않고 갑자기 침묵해버리니, 불교 교리에 정통한 성종이 낌새를 눈치채고 재빠르게 대응한 것일 수도 있다.

  • 강조가 야만인이라 일갈하자, 분노한 성종이 무자비하게 도끼를 휘두르는 장면이 나왔다. 성종과 같은 정복 왕조의 군주에게 '야만' 운운하는 것은 죽여달라 애원하는 수준의 모욕으로 역린을 건드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3. 회차별[편집]



3.1. 1회[편집]


  • 귀주 대첩 (프롤로그)
    • 역사서에서는 소배압이 10만 정예 기병을 이끌었다고 하나, 프롤로그에 나오는 거란군 대다수는 보병이다. 이는 제작 환경상 충분한 수의 말을 구하기 쉽지 않은 것도 있지만, 검차가 기병 방어 병기였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검차에 맞서 말에서 내려 싸웠다고 볼 수 있다.[72] 그리고 동양 역사서에서 군대 편제를 기록한 대목은 상세한 편제와 군령이 남아있지 않다면 어지간해서는 걸러듣는 것이 좋다. 전쟁을 치를 때 보병 없이 기병만 10만을 동원한다면 거점 유지도 작전도 불가능하고 오직 죽이는 것만 가능한, 전술적 가치는 높지만 전략적 가치가 전무한 허울뿐인 군대가 된다.[73]
    • 거란군이 출세를 외치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들이 보통 병사들이 아닌 것을 드러낸다. 실제로 소배압의 10만 군사 중에는 황제 직속 최정예 부대인 우피실군, 천운군 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전공을 세울 경우 실제로 출세가 보장되는 직업군인이었다.
    • 통주 전투(7화)의 경험을 살려, 양 군이 진화한 모습이 개연성 있게 그려졌다. 고려 측은 검차의 칼날이 더 증가했다. 거란 측은 통나무를 굴려 검차를 무력화하고, 수레 아래로 침투하며, 판자로 성벽을 넘듯 넘는다. 이에 고려 측은 물풀매, 쇠도리깨, 장창 무엇 하나 써 보지 못하고 바로 단병접전에 이르려 하자, 제1검차진은 사각방진으로 움츠려 생존만을 모색하게 된다. 이에 소배압은 제2검차진까지 돌격을 명한다.
    • 김종현의 중갑기병 부대가 거란군의 후미의 구릉에서 나타난다. 구릉에선 넓게 귀주 평원을 내려보듯 포진할 수 있으나, 타 영화들처럼 구릉에서 내려오듯 돌진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달리며 하천을 건널 수 있는 귀주성 동북쪽의 다리는 좁아서, 거란군이 다리를 막기 전에 말 2-3마리의 좁은 폭의 길로 기병대가 신속히 하천을 먼저 건너려는 모습을 재현하였다. 함께 불어닥친 소나기까진 재현되지 않았다.

  • 목종의 동성애 관련 내용이 일부 장면은 로맨스에 가깝울 정도로 과감하게 연출된다. <천추태후>에서도 목종과 유행간이 키스하기 직전까지 나왔기에 새삼스럽지는 않다. 그 외에 드라마에서 남색을 하는 인물은 왼쪽 귀걸이만 하고 있는데, 고대에 남성이 귀걸이를 착용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 경우는 고증에 따른 것은 아니고 현대 시청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장치이다.

  • 목종이 신하들을 나무라면서 "이런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그대들을 뽑았다"고 한다. 목종은 재위 12년 동안 꽤나 많은 신하들을 등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종조에 큰 공을 세운 인물들 역시 대부분 목종조에 등용되었다. 그렇다고 관료 조직이 제대로 관리되고 있던 것은 아니라서 상위 재상인 문하시중이나 평장사가 없고 참지정사수상#首相 노릇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인사 발령이 어느 시점에서 멈춰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강조는 집권 후 곧바로 재상단의 공석을 메꿔버렸다.

  • 1회 초반부에 흥화진에서 양규가 포로를 교환하고 난 직후 원종석김훈·최질이 말다툼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원종석은 제2차 여요전쟁서경을 거란에 바치려고 했던 반역자이고, 김훈과 최질은 2차 여요전쟁이 끝난 뒤 문관직을 얻지 못한 것과 더불어 무장들의 토지를 빼앗아 국가 재정을 확보하거나 문관에게 지급하는 것에 반대해서 결국 무신정변의 선구인 김훈·최질의 난을 일으키는 인물들이다.[74]

  • 절간에서 뒹구는 고양이가 나온다. 동문선에 실린 김부식(1075~1151)의 '아계부(啞鷄賦)'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고양이에 대한 문자 기록이라 고양이의 한반도 전래 시점 상한은 고려 시대로 추정된다. 5~6세기 경 제작된 가야 집모양토기 중에는 집 안에 있던 두 마리의 쥐가 지붕 위에 있는 고양이를 보고 놀라는 모습이 표현된 유물이 있지만, 이 '고양이'가 현재의 집고양이(Felis 속)인지 아니면 (Prionailurus 속)인지는 학계의 논쟁 중이다.

  • 즉위하기 전 현종을 부르던 호칭 중에는 천추태후에 의해 신혈사로 쫓겨나면서 임금의 서자이자 승려가 된 자를 부르는 호칭으로 붙은 '신혈소군'이라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민간에서 자연스레 붙은 호칭이라서 극 중 주요 인물들이 대량원군을 신혈소군이라 부를 이유는 없다.

  • 김치양의 아들이 이름만 '현'으로 나오지만, 사서에서 이름이 없기 때문에 순전히 창작이다. 드라마 천추태후에서는 김치양의 아들에게 '김진'이라는 명확한 성명과 함께 '황주소군'이라는 그럴듯한 칭호도 붙였으나 역시 창작이었다. 이처럼 본명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에게 가상의 이름을 임의로 붙이는 경우는 사극에서 흔하다.[75] 다른 나라 사극에서도 흔하게 쓰는 방식이다.[76]

  • 목종이 김치양을 진작에 숙청하지 못한 이유가 단순히 태후의 뜻을 거스르는 것을 두려워 했을 뿐이었다는 것은 실제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대목이다. 드라마에서는 목종이 천추태후에게 약한 이유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지나친 가족애 때문으로 나온다.[77]


3.2. 2회[편집]


  • 천추태후의 궁인들이 신혈사에 있던 현종에게 찾아와 독이 든 음식을 먹여 독살하려고 했다는 것은 실제 사실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현종(당시 대량원군)이 독약을 넣은 술과 음식을 의심하다 까마귀와 참새를 향해 던지는데, 그걸 먹은 새들이 독이 온몸에 퍼져서 다 죽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78] 드라마에서는 희생물이 까마귀와 참새에서 고양이로 바뀌었다.

  • 프롤로그를 제외하면 강감찬은 드라마에서 충주 판관으로 처음 등장하는데, 정사에 따르면 강감찬은 고려사에서 과거 급제 이후 예부시랑이 되기까지의 행적이 없다. 때문에 강감찬이 그 기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는 순전히 창작의 영역이다. 다만 기록에도 강감찬이 청렴한 관리이며 자기 재산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고 하므로 아내에게 바가지를 긁히는 장면은 이런 면을 반영한 각색이다. 『용재총화』, 『동국여지승람』, 『해동이적』 등의 조선시대 야사집, 지리지에는 주로 지방 수령을 전전하며 백성들의 고통을 해소하는 만능 해결사에 기지가 넘치는 인물로 나오므로 지방직을 지내고 있었다는 설정은 여기에서 가져왔을 가능성이 높다.

  • 충주 판관으로 재직하는 강감찬이 1차 여요전쟁에서 거란에 끌려갔다 돌아온 백성의 이야기를 들어주는데 해당 대화에는 '당시 수만의 고려 백성이 거란에 포로로 끌려갔다'는 내용이 나온다. 다만 국지전에 가까웠으며 기간 또한 짧았던 1차 여요전쟁에서 그렇게 큰 포로 피해가 발생했는지는 미지수이며 실제 기록에도 1차 여요전쟁과 관련된 포로의 수치는 명확히 나와있지 않다. 원작자인 길승수 작가 또한 이 부분은 드라마에서 고증을 잘못한 것 같다고 지적하였다. #

  • 목종이 즉위 초기에 정사를 열심히 돌봤다는 묘사가 있는데 이건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의 전반적인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천추태후>에서는 목종이 억지로 왕위에 올라 처음부터 정치에 손을 놓은 것처럼 묘사했는데 실제 목종은 많은 신하들을 등용하고 정사를 살피는 등 정치에 무관심한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천추태후의 제멋대로의 섭정,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관계 등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며 동성애에 눈을 뜬 것으로 보인다.

  • 전작 <천추태후>에서 목종이 아닌 천추태후가 강감찬을 통해 현종을 보호하는 것처럼 묘사했으나, 본작에서는 기록에 따라 진관사의 승려와 목종이 보호하며 강감찬은 현종 즉위 전까지는 접점이 없다.

  • 주로 '소태후'로 잘 알려져 있는 거란 성종의 모후 승천태후가 전장에서 군을 이끌었다는 것이 언급된다. 송나라의 북벌군을 맞이해 직접 군을 이끌고 송태종과 맞서 싸웠으며, 1004년에는 전주까지 진군해 송나라를 진동시켰다. 비록 개봉을 포위하지 못하고 화친을 맺었지만, 여기서 체결한 전연의 맹을 통해 거란의 국익을 극대화하는 계기를 마련한 대단한 인물이다.
    • 다만 드라마에서 언급되듯 '늘 맨 앞에서 말을 달려 수많은 영토를 정복'하지는 않았다. 성종 대의 영토 확장 당시 군대를 직접 지휘한 사령관은 승천태후 본인이 아니었고, 그녀가 전장에 나선 것은 방어전에 국한됐다. 실질적인 지휘는 야율휴가, 소달람 같은 숙장들이 맡았고 황태후, 황제가 친정한 1004년 남정이 동력을 잃은 것도 실질적인 총사령관인 소달람의 급사가 큰 영향을 미쳤다. 애초에 권력 투쟁이 극심한 나라에서 황제가 어리고 황태후가 섭정 하는 상황인데, 섭정이 수도를 비우고 원정을 나선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 소태후의 업적을 상세하게 묘사할 시간이 있었다면 영토 확장보다는 구체적으로 송의 북벌군을 2번이나 깨버리고 전주까지 진격한 일을 거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드라마의 초점이 소태후의 업적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전근대 동아시아에서는 군주가 최전선에 서지 않더라도 정복전쟁의 주체로 여겨졌다. 일례로 정복군주로 유명한 신라의 진흥왕은 최전선에 나갔다는 기록이 없지만, 진흥왕순수비를 통해 지역 주민들로 하여금 친정을 한 것처럼 여기게 했다.

  • 강조의 정변이 일어난 1009년 1월에 요 성종은 중경에 행차해 공무를 살피고 요하에 낚시를 하러 갔었다.[79] 드라마에서는 성종이 상경에서 병환 중인 모후를 보살피는 것으로 묘사했다. 요나라의 수도로서 상경이 갖는 위상을 강조하고 고려 궁궐과 대비되는 연출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 목종이 백성들에게 베푼 연회는 목종이 친히 구정(毬庭)에 나아가 남녀 백성들 중 나이 팔순 이상 고령자 및 위독한 병자와 장애인 635명을 모아 놓고 잔치를 베풀고 직접 술과 음식, 베와 비단, 차와 약을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는 『고려사』 목종 10년 음력 7월 기록에서 나온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목종 12년에 있었던 천추전 화재와 하나로 합쳐 백성들에게 연회를 베푸는 도중에 불이 난 것으로 각색했다.


3.3. 3회[편집]


  • 연회에서의 화재 이후 조정에서 논쟁이 오갈 때, 화재를 일으킨 진범인 김치양과 그 일파 이주정은 연회장에 연등을 단 것을 가지고 꼬투리를 잡아 '성종대왕이 폐지한 연등회를 다시 열어 화재를 유발했으므로 목종에게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재상들은 연등회와 상관 없는 단순한 잔치였을 뿐이라고 반박한다. 이 대목은 성종이 팔관회, 연등회 등의 행사를 줄이고 폐지한 것에서 기인한다. 이 행사들은 현종 이후 부활했고 목종 때는 거의 열리지 않았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알음알음 기념하는 행사가 있었던 흔적이 있으나 왕실이 나서서 행하지는 않았다. 고려 역사를 통틀어 연회 중에 불이 난 적도 없다.

  • 본래 강조의 정변 당시 강조의 행보는 조금 복잡했다. 고려사에 의하면 김치양은 애초에 군사 작전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단지 강조는 목종이 그러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김치양 일파로 밝혀진 측근 이주정을 외지로 보내고 그 자리를 본인으로 교체하기 위한 인사 발령에 따라 개경을 향해 홀로 출발했다가, 이것이 김치양이 명령을 위조하여 유인하려는 책략이라는 위종정과 최창의 거짓말에 속아 돌아가서 병력을 이끌고 다시 개경으로 향했다. 도중에 아버지까지 목종이 죽었다는 편지를 보내와서 이를 믿었으나 결국 목종의 생존 사실을 알고 망설였다고 한다. 드라마에서는 효율적인 분량과 명확한 대립 구도를 위해 사료를 과감하게 각색했다. 우선 김치양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설정에 따라 목종의 명령이 처음부터 강조에게 군대를 이끌고 내려오라는 것으로 변경되었고, 그것이 김치양에게 가로막혀 서경에서는 아예 개경 소식을 듣지 못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체적인 판단에만 의존하여 움직인다. 또한 정변 동기를 유발한 목종 사망 유언비어가 김치양이 직접 퍼뜨린 것으로 각색되었다. 목종의 생존 사실을 알고 망설이긴 하나, 주저하는 강조를 부하들이 떠밀어 이를 따랐다는 사료의 서술과 달리, 드라마에서는 이현운이 김치양만 잡으면 끝난다는 원론적인 의견을 제시했지만 평소 목종에게 쌓여 있었던 불만과 문제 의식이 폭발하여 강조 스스로 반역을 결심하는 것으로 그려졌다.[80]

  • 강조가 유행간을 참살한 뒤 재상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어전에 들어갈 때 강조를 막아서는 유충정을 이현운이 베어버리는데, 실제 유충정은 강조의 난 당시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다. 후일 1031년 경 발해부흥운동에서 한자까지 모두 같은 동명이인이 흥료국의 행영도부서(行營都部署) 유충정(劉忠正)이라는 이름으로 영주자사(寧州刺史) 대경한(大慶翰)을 현종에게 보내어 표문을 가지고 와서 구원을 청하였다는 기록이 등장하는데, 유충정은 원래 발해 유민 출신이었기에 동일 인물로 추정되기도 한다. 애초에 유충정은 김치양 토벌 명분을 가져오고 대량원군 구출도 거든데다, 유행간과 쌍으로 취급되던 유명 인물임에도 당시 7명의 사형자 명단 중 존재가 알려진 유행간, 김치양, 김치양의 아들과 달리 이름이 나오지 않아서 단순히 유배 무리에 끼어 추방되는 전개도 가능했다. 하지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같은 곳에서는 '『고려사』, 『고려사절요』의 기록에서 유충정이 죽었다'고 쓰고 있기에 드라마 제작진들이 이런 레퍼런스를 참고해서 유충정이 죽었다고 묘사했을 수도 있다. 반면 분명하게 유배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이주정은 4회에서 유배되며 퇴장했다. 드라마에서는 김치양이 손쓸 틈도 없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설정이라 활약을 할 여지가 없었고, 유행간과 세트로 묶이는 것 외에는 특별한 캐릭터가 없다 보니 오히려 유충정만 살아남는 것이 개연성이 떨어진다.

  • 목종이 죽는 시점이 압축되었다. 목종은 개경을 나오고 얼마 안 되어 파주에서 살해되었는데, 폐위된 목종은 양국공(讓國公)이라는 칭호를 받고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 부암(傅巖) 등에 의해 감시를 받게 되었다. 천추태후와 함께 충주로 향했는데 목종이 최항을 통해 강조에게 말을 요청했으나, 한 필밖에 안 보내서 민가에서 한 필을 더 구했다. 목종 일행이 적성현[81]에 이르자 강조가 상약직장(尙藥直長) 김광보(金光甫)를 보내 독약을 올렸고, 목종은 마시기를 거부했다. 이에 김광보가 폐주를 호위하는 중금(中禁) 안패(安覇) 등에게 "강조가 (목종이) 약을 거부하면 군사들을 시켜 죽이라고 명령했다. 따르지 않으면 우리가 멸족을 당하게 된다." 라고 협박하여 안패는 강조의 명령대로 그날 밤 목종을 시해한 후, 폐주가 자결했다고 거짓으로 보고했다. 여기서는 이런 실랑이를 묘사할 시간이 없었는지 유배를 가는 길에 목종이 "다 소자의 잘못이다. 소자가 직접 땅을 일구면서 어머니를 모시겠다. 영원토록 어머니 곁을 지키겠다"라고 천추태후에게 약조하는 순간에 기습적으로 목종을 칼로 베어 살해한다. 시점도 밤이 아니라 대낮이다. 한편으로는 목종이 천추태후의 말 고삐를 쥐고 걷는 모습이 등장하는데 기록을 보면 강조한테 쫓겨나서 충주로 가는 길에 천추태후가 말을 타면 목종이 직접 말 고삐를 쥐고, 식사를 하면 직접 식사 시중을 들었다 한다. 태후 때문에 쫒겨나긴 했지만, 목종은 기본적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효심이 지극한 인물었다고 한다.

  • 개경에 들어온 강조에게 최항이 유일하게 언성을 높인다. 실제로도 최항은 강조의 정변 당시 "이전에 이런 일이 있었는가"라며 강조의 면전에서 유일하게 항변했다. 강조는 조정 내에서는 중추사로 최항과 대등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말하자면 직설적인 말을 내뱉을 수 있는 동료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사료에서는 강조가 내내 당당하지 못했고 최항의 비난에도 반박하지 못했으나, 드라마에서는 마음을 굳힌 강조가 자기 주장을 분명히 한다.[82] 병사들이 강조를 새 황제로 생각하고 만세를 부르자 당황하여 저지하는 모습 대신 직접 용상에 오르는 선택지도 있다는 이현운의 말을 대량원군이 오고 있다는 한 마디로 간단히 물리친다.

  •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황궁으로 들어갈 때 광화문(廣化門)이 열리자 그 뒤로 열을 맞춰 궁궐의 내문들이 늘어서 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목종 일행은 정전에 몰린 상태였기 때문에 유방이 강조에게 문을 열어주는 장면을 묘사하고자 했다면 건축 문단에 상술된 것처럼 광화문이 아니라 그 안의 문들 중 하나를 열어주어야 맞다.


3.4. 4회[편집]


  • 김치양 일파로 2회에서 목종에게 대량원군의 위기를 은폐한 이주정이 기록에 따라 다른 김치양 일파와 함께 유배 가며 퇴장했다. 비슷한 시기를 다룬 전작 천추태후에서는 유행간과 함께 사형되는 것으로 나온 것과 비교된다.

  • 강조가 기존의 비서 기관인 중추원과 은대(銀臺) 등을 통폐합하여 중대성(中臺省)으로 개칭하고 그 장관인 중대사(中臺使)에 올라 조정의 목줄을 틀어쥐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고려는 내사성, 문하성, 상서성 총 3성이 존재했기에 일시적으로 4성이 존재하게 된 셈이었다. 비록 의도가 순수하지 않고 구조 또한 기형적이기는 했지만 강조 사후 중대성이 폐지되고 중추원이 복구될 때에도 은대는 복구되지 않아서 결국 이름만 빼면 비서 기관의 통폐합이라는 구상 자체는 받아들여졌다. 그러다 보니 드라마에서 강조가 폐지가 아니라 통폐합이라고 설명했음에도, 강조의 의도가 순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반대해야 했던 상황을 고려해야 하겠지만 강감찬이 무작정 중추원과 은대의 폐지에만 초점을 맞춘 것은 다소 머쓱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83]

  • 성종의 딸들인 원정황후원화황후 자매가 현종의 배필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극 중 이들 자매를 '황후'로 표기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고려의 외왕내제 체제를 반영한 듯하며,[86] 또한 사촌지간끼리 혼인을 올린 것[87]은 고려 왕실의 근친혼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88]
    • 원정황후-원화황후 자매가 현종에게 '남은 용손은 우리가 전부'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엄밀히 따지면 극의 설정과 배치된다. 드라마 내에서 용손은 부계와 모계가 모두 태조 왕건의 후손임을 전제로 하는데 원정황후와 원화황후의 어머니는 둘 다 왕실과는 무관한 지방 호족의 딸이므로 드라마 내 용손의 정의에는 부합하지 않는다.[84] 오히려 훗날 현종의 5비로 들어오게 되는 원용황후가 드라마 내 용손의 범주에는 더 부합한다. 차라리 용손이 아닌 왕손이라는 대사를 집어넣는 것이 나았을 듯하다.[85]

  • 현종과 원정황후의 합방 장면이 등장하고 얼마 안 되어 회임하는데, 원정황후는 현종이 몽진하던 시점에 회임 중이었기 때문에 이 시점 쯤에 임신하는 게 맞다.

  • 예부시랑이 된 강감찬이 거란 황제에게 보내기 위한 2차 표문을 작성하고 현종을 알현하여 검토를 요청하는 장면에서 현종이 '나도 천자이고 황제인데 왜 거란 황제의 책봉을 받느냐?'고 강감찬에게 반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강감찬은 1차 여요전쟁 이후 고려가 거란에 사대하게 된 역사를 소개하며, 그러한 조공 책봉 관계는 단지 거란과의 대외관계에서 존재하는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부분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 야율융서가 승천태후의 죽음을 전령을 통해 전달받는다. 승천태후는 실제로는 야율융서와 함께 행궁에 있다 사망했으나, 드라마에서는 야율융서가 승천태후가 있던 상경임황부가 아닌 초원의 게르에서 공무를 보고 있던 것으로 나온다.


3.5. 5회[편집]


  • 현종이 거란 침공의 원인으로 지목된 강조를 궁궐로 불러들여 내관을 통해 제거하려다 실패하는 장면은 실제 기록은 아니고 먼 훗날 벌어진 희종최충헌 제거 시도를 모티브로 하여 창작한 듯하다.[89]

  • 거란의 침공을 알리러 온 사신이 현종을 시종일관 '대량원군 전하'라고만 부른다. 이는 드라마에서 거란이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책봉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고려나 거란 입장에서 쓰인 사료나 공문서가 남아있지 않고 대량원군은 거란에서 책봉한 작위가 아니라서 선전포고 당시 거란 측에서 현종을 실제로 어떻게 불렀는지는 불명이다. 드라마에 나오는 책봉과 관련된 외교 갈등은 창작이고, 외교 용어에서 객관적 사실로서의 고려 임금을 가리키는 '고려왕'과 책봉 군주로서의 '고려국왕'은 쓰임새가 다르기 때문에 그저 '고려왕'이라고만 대사를 처리해도 특별한 문제는 없다.[90] 그러나 드라마의 대사로는 '고려왕'과 '고려국왕' 용어의 차이를 드러내기 어려운 데다 드라마에서 책봉 문제를 주요 쟁점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흐름의 일관성을 고려하여 거란 사신의 강경한 태도를 묘사한 것이다. 실제로 요 성종은 형식적으로는 외교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여전히 상국을 자처하는 태도를 내세우며 내정 개입을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충분히 개연성 있는 각색이다.

  • 강조가 반역자 처단을 명분으로 선전포고를 알린 거란의 사신에게 지금이라도 자신의 신병을 거란에서 맡으라며 당당한 태도로 나와 침공 명분이 핑계에 불과함을 폭로하고, 이를 전해 들은 거란의 성종은 강조에게 미리 깊은 인상을 받는 각색이 나온다.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는 강조의 정변을 침공 명분으로 삼았으므로 나중에 성종이 강조를 포로로 잡았을 때 항복을 권유한 것은 명분과 실질의 괴리를 감안하더라도 사실로서도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이다. 따라서 이를 감안한 빌드업이다.[91]

  • 현종이 출전하는 강조에게 부월을 하사한다. 부월은 동아시아사에서 총사령관의 전통적인 상징으로 군주로부터 지휘권과 생사여탈권을 위임받았다는 막중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현종이 강조에게 하사한 금으로 장식된 도끼는 천자가 외적을 정벌할 때 쓴다는 황월(黃鉞)이다.[92] 이는 고려의 황제국 양식을 보여준다. 고려시대에는 대표적으로 윤관오연총여진정벌에 앞서 예종으로부터 부월을 받았으며,[93] 김부식 또한 묘청의 난 토벌 전 인종에게 부월을 받았다.[94]
    • 드라마에 나오는 황룡이 도끼날을 물고 있는 모습의 부월은 부월 문서에도 나오는 세종실록 133권에 수록된 월(鉞)이나 기타 유물들에서 보이듯 한국사에서 전형적인 형태이다.

  • 공주 절도사 김은부의 딸로 나중에 원성황후가 되는 김씨 소녀가 '현재의 황제는 아무것도 모르고 어리다'며 '성종대왕 폐하는 직접 전장에 나가셨다'고 언급한다. 고려 성종이 제1차 여요전쟁 당시 직접 갑옷을 입고 전장에 나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최전방인 서경에서 지휘한 것은 사실이며 이는 <천추태후>에서도 묘사됐다.

  • 전반적인 등장인물들의 발언을 통해 1차 여요전쟁 때 고려가 큰 위기를 겪은 것처럼 보이나 실제 1차 여요전쟁은 국경지대에서 방어에 성공했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의 이러한 반응은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 봉산에서 윤서안이 패했으나 안융진에서 대도수유방이 소손녕을 격퇴한 국지전의 성과로 서희의 회담이 이루어지며 전쟁이 끝났기에 성종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고 외교 교섭 과정에서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서경에 주둔한 정도였다.

  • 거란군의 투석기들이 흥화진에 던진 수많은 화염구를 양규가 바라보는 장면으로 회차가 마무리된다. 이는 여요전쟁 당시의 기록이 아니지만, 드라마 장면과 비슷한 일화는 약 220년 뒤 귀주성 전투에서 김경손이 몽골군의 포탄으로 주변이 아수라장이 되는데도 끝내 자리를 지켰다는 내용으로 『고려사』 김경손 열전에 남아 있다.
몽고는 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밤낮으로 공격하였다. 수레에 초목을 싣고 굴리며 공격하자 김경손은 포차(砲車)로 끓는 쇳물을 쏟아 쌓여 있는 풀을 태우니 몽고 군사가 퇴각하였다. (몽고군이) 다시 공격하자 김경손은 호상(胡床)에 앉아 독전하였는데 포탄이 김경손의 머리 위를 지나 뒤에 있던 아졸(衙卒)에 적중하여 (그의) 몸과 머리가 산산조각이 났다. 좌우에서 호상을 옮길 것을 청하니 김경손은 말하기를, “불가하다! 내가 움직이면 군사들의 마음이 모두 흔들린다.”라고 하며 신색(神色)을 태연자약하게 하자 끝내 옮기지 못하였다.


3.6. 6회[편집]


  • 평화전쟁 1019에서 묘사된 흥화진의 성벽 구조가 생략되었다.[95]

  • 강감찬이 현종에게 전장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거란이 보급을 적에게서 취하는 풍습(타초곡)이 있으며 특히, 포로를 가장 중요시한다는 언급이 나온다. 고대 전쟁에서는 비효율성과 시대적 한계로 인해, 현대처럼 '선'으로 유지되는 보급은 안정적으로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원정지의 군대는 자신들이 직접 들고 간 보급품(치중)으로 초기 보급품을 감당했고, 이동할 때마다 숙영지 인근 지역에서 적극적으로 보급을 충당했다.[97]
    • 손자병법의 내용 중 상당수가 보급의 곤란함과 보급품이 떨어진 상황에서의 대응 방식일 정도로 고대로부터 약탈을 통한 보급은 어느 원정군이나 다 했던 것이며, 꼭 거란만의 행동 양식은 아니기는 하지만, 정주민에 대한 약탈로 경제의 상당 부분을 돌리는 것이 유목민의 방식인 것은 사실이다. 이런 주변 지역을 약탈해서 얻는 보급은 근세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도 나폴레옹의 장기였을 정도로[96] 보급을 충당하는데 필수적인 양식이었다. 작중 거란군이 고려인 취락을 약탈하고 백성들과 물자들을 마구 갈취하는 장면도, 본작에서 약간의 과장이 있는 것과는 별개로 실제로 수십만의 대군을 운용하려먼 사실 필수적인 작업이었던 것이기에 전근대 전쟁이 잔혹한 일이었던 것이다. 거란이 약탈에서 특이한 점은 기병 1명당 타초곡병 1명을 배정해서 전문적인 약탈부대를 운영했다는 부분일 것이다.

  • 귀주성이 거란군의 신속한 기동에 부득이 청야 전술에 실패하는 각색이 나온다. 드라마에서는 이것이 실책으로 묘사되는데, 실제로는 청야는 수비 측에도 상당한 부담이라 일반적인 선택지는 아니었다. 애초에 청야를 선택해야 할 정도가 되면 인력과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여유롭게 무언가를 옮길 상황이 아니어서 그 지역의 건물, 저축물과 토지를 대부분 불태워야 했다. 따라서 적뿐만 아니라 수비군의 보급과 지역의 생존까지 위태롭게 만드는 위험천만한 전략이라 수비 입장에서도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야만 택할 수 있는 도박수였기에 드라마처럼 청야를 할 수 없는 상황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98]

  • 개경에 거주하는 출전 지휘관들의 가족이 단체로 사찰에서 불공을 드리다가 현종과 만나는 장면에서 양규 처와 아들 양대춘이 등장한다. 양대춘은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훗날 아버지의 공적으로 등용되어 고관에 올랐다. 왕과 신하들의 신뢰가 두터웠다지만 양대춘이 경력을 쌓을 무렵에는 고려도 평화기에 접어들어서 장수로서 활약할 기회는 없었다고 한다.

  • 강감찬 처가 강감찬이 삼한벽상공신의 자손이기 때문에 처신만 똑바로 했어도 금방 재상이 되었을 것이라고 타박한다. 하지만 삼한벽상공신 가문은 건국 초부터 이어진 중앙 정부와 호족 사이, 그리고 호족끼리의 갈등이 빚어낸 정국의 격랑 속에서 상당수가 살아남지 못했다. 심지어 후대에 천역에 종사하던 경우가 발견되어 삼한공신 후예로서 천역이나 잡직에 종사한 경우에 대한 규정이 따로 생길 정도였기 때문에 강감찬처럼 나중에라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이어간 것만으로도 다행인 수준이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재상단도 삼한벽상공신을 조상으로 두지는 않았다. 당장 유방 역시 삼한벽상공신으로 태조 배향공신이었던 유금필의 후손이라지만 1차 여요전쟁에서는 안융진의 낭장에 불과했고, 목종 당시에도 친종장군으로 높다고 하기는 어려운 상태였다.

  • 강감찬 처가 고려가 병농일치, 즉 부병제 사회였음을 언급하면서 거란이 1차 전쟁 때 동원한 병력이 10만 명이라고 하는데, 이는 1차 침공 당시 소손녕의 '호왈 80만'을 오늘날의 정설에 가능한 비슷하게 조정한 것이다.

  • 작 중 거란군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소배압이 비교적 신중하게 공성을 진행하려는 반면, 야율융서가 처음에는 여유를 부리다가 불과 일주일 만에 대군이 작은 성 하나를 함락시키지 못하는 것에 초조해하며 하루 안에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면 선봉장 야율분노를 처형하겠다고 날뛰자 소배압이 당황한다. 이는 단독으로는 처음 친정에 나선 요 성종의 미숙함을 보여준다.[99] 물론 본인의 미숙함 외에 대군의 보급 문제 등으로 조급해 할만한 이유는 있지만, 본래 중세의 공성전은 쉬운 일이 아니라서 일주일 가량 지연된 정도로 초조해 할 이유는 없다.[100]

  • 강조가 고려의 병기인 검차의 중요성을 거듭 언급한다. 강감찬 처의 언급처럼 고려군의 대부분은 농민병으로 숙련도가 떨어져 드라마에서는 최전방까지 와서도 개별 지역에 대한 작전을 수행하지 못하고 한데 뭉쳐 훈련을 받는 실정[104]이고, 거란의 주력이 기병인만큼 평야 지대로 적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험준한 지형을 믿고 검차 같은 전투수레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105] 실제로 이러한 수준의 병력조차 거란의 숙련병과 회전에서 대등하게 맞설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에 검차는 강조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한 셈이었다.
    • 한반도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보병의 백병전 능력을 활 등 투사병기를 이용한 산성전으로 보완해온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101] 회전을 피하고 수성전을 펼치자는 의견도 충분히 일리는 있지만 애초에 두 전략은 병행되는 것이지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실제로 통주 전투에서 주력군이 격파되어 지휘부가 붕괴되었지만 인명 피해 자체는 전체 동원 병력 기준에서는 엄청난 수준이 아니었고 주요 거점들도 대부분 지켜냈으나, 각지로 병력이 분산되어 회전을 포기하면서 결국 개경 함락을 막지 못했다.[102] 따라서 드라마에서 강조가 검차에 거는 기대는 별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실낱같은 희망과도 같은 것이었다.
    • 동양에서 마륭, 서양에서 얀 지슈카 정도 빼고는 이런 전투마차로 대승을 거둔 사례[103]가 별로 없고, 강조도 검차 덕분에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지만 결국 허를 찔려 패배하게 되므로 결국 사망 플래그가 되는 셈이다. 드라마에서도 강동 6주의 험준한 지형을 벗어나면 평야 지대에서 적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도 인정하며, 프롤로그의 귀주 대첩 시퀀스에서도 검차가 마냥 만능은 아니라는 것은 이미 보여준 바 있었다.

  • 현종이 개경의 시전 상인들과 백성을 만나 민심을 청취하는 장면 이후, 원정황후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간하면서 "그런 일은 신하들이 하면 되고, 황제는 백성들 앞에선 통치자로서 위엄을 차려야 하며, 황제는 만인 위에 군림하는 자이기에 백성들에게 만만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 그럼 그들도 군주를 우습게 여기게 된다."라는 의견을 제시한다.[106]
    • 이는 어린 시절부터 민초들과 섞여서 왕족으로 대우받지 못했던 현종과 태어날 때부터 지배 계급의 금지옥엽이었던 원정황후의 입장 차이를 보이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민주사회를 사는 현대인 입장에서 작중 현종의 태도가 더 마음에 들 수야 있겠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원정황후의 발언은 태생부터 푸른 피를 지닌 지배층 입장에선 당연한 마인드로 제시할만한 이야기로 전근대 지배층들은 백성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존재일지언정, 오늘날 민주주의 정치인들처럼 최소한의 친근감을 제시하는 존재들이 아니라 군림하는 자였던 것은 사실이다. 이건 단순히 지배층의 위엄 문제가 아니다. 군주가 무계획적으로 이사람 저사람 만나서 약속을 남발하게 되면 일이 잘못 되었을때 모든 화살이 결국 군주에게 간다. 이것이 일반적인 한국 사극에서 자주 묘사되는 민중들과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는 군주에 대한 묘사인지, 아니면 반대로 미숙한 군주 현종을 묘사하기 위함인지는 불명이다.
    • 다만 현종이 몽진할 때 수난을 당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갑작스럽게 왕이 되었는데 바로 그 다음해에 전쟁이 터졌다는 고충과, 중앙집권제가 자리잡지 못하고 지방 호족의 입김이 강해 왕실의 통제력이 모든 곳에 미치지 못했던 문제였지, 현종 본인이 (지배층의 시점에서) 본작의 원정황후가 지적한 것처럼 '백성들에게 만만하게 보이고 다녀서'는 아니다.

  • 거란군과 고려군 양쪽에서 포탄을 집중 사격하면서 "일점사"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당대의 표현이 아닌데다 현대 기준으로도 사격 용어로서의 뜻이 아니라 FPS, RTS 등 게임에서 유명해진 뜻으로 사용되었다.

  • 화염 투석으로 인해 양측의 투석기나 가옥들이 터져나가는데, 이 시기의 투석기들은 현대의 야포와 달라서 일반적인 포탄으로는 저 정도의 위력을 낼 수 없었다. 다만 서양의 사극에서도 투석기의 위력을 과장하는 일이 많아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며 제작진은 파괴되는 구조물들을 목조 구조물로만 한정하고 석조 성벽은 큰 타격을 입지 않는 것으로 묘사했다.[110][111]
    • 드라마에서는 양쪽 군대가 발화용 포탄인 맹화유를 사용한다. 동아시아에서 오대십국시대부터 사용한 맹화유라면 목조 구조물에 강하고 성벽에는 약한 드라마 내의 투석기의 특징을 설명할 수 있고 재현 오류라고 하기도 어렵다. 진짜 문제는 고려에 석유 산지가 없다는 것으로, 본초강목 같은 서적에 고려에 맹화유가 난다는 내용이 있긴 한데 검증된 적은 없는 허구의 내용들이다.# 그러나 약 100년 후인 묘청의 난 때 김부식의 고려 진압군이 서경성을 공략하며 송나라에 다녀온 기술자 조언헌(趙彦獻)이 만든 화구(火毬)라는 불덩이 무기를 투석기로 던져 큰 성과를 내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석유를 수입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군의 주력 무기인 각궁의 주 재료인 물소뿔 역시 수입품이었으므로 해외 교역이 더 활발했던 고려시대에 화기 원료가 충원 불가능한 물자는 아니었다.[107]
    • 맹화유를 투석기에 사용하는 것은 평화전쟁 1019의 묘사를 가져온 것이다.[108] 맹화유와 함마갱 외에 드라마에 나오지 않은 다큐멘터리의 흥화진 방어전 관련 묘사는 흥화진 전투(1010년) 문서에 반영되어 있다.
    • 투석기를 날려서 조금씩 사거리를 조정하는 거란과 불화살의 위치에 정확히 포탄을 날리는 고려군 간의 정확도 차이는 수비 측의 이점에 따른 것이다. 무기의 사거리를 처음부터 측정해야 하는 공격 측과 달리, 현지에 주둔하는 수비군은 훈련이나 지형지물을 숙지해 거리를 미리 숙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109]

  • 회차 말미에 거란이 고려 포로들을 인간 방패막이로 삼아 흥화진 북문으로 돌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1차 흥화진 전투가 시작할 때, 거란군이 고려의 아이들과 노인들을 성 앞에서 참살해 고려군의 기세를 꺾으려 들었던 일화[113]를 반영한 것이며, 이후 흥화진에서 함께 요군의 후방을 유린할 김숙흥에겐 요군이 아버지를 죽인 원수였다는 서사가 있지만 양규에겐 별도의 서사가 없었단 점을 보완한 에피소드로 보인다.[114]
    • 이런 식으로 점령지의 민간인 포로들을 이용해서 적의 사기를 꺾으려는 심리전은 실제 역사에서 거란뿐만이 아니라 여러 세력들이 주로 사용한 방법인데, 현대전에서도 비정규 무장집단에 의해 사용되곤 한다.[112]

  • 장연우황보유의의 친분이 강조된다. 이 둘은 제2차 여요전쟁 이후 군인들의 영업전을 관리의 녹봉으로 돌리는 정책으로 김훈·최질의 난을 유발한다. 그러나 이는 전쟁 이후 관리들이 녹봉을 제때 받지 못할 정도로 과도하게 늘어난 군비를 줄이자는 차원의 임시 방편이었다.[115] 다만 생계의 근간인 토지를 건드리자 전쟁 이후에도 출세하지 못해 경제적 대가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던 무신들의 불만을 자극하게 되었고, 결국 이들이 반란을 일으켜 둘은 죽기 직전까지 폭행당하고 유배되었다가 난을 일으킨 무신들이 숙청되고 나서야 복귀할 수 있었다.

  • 갑옷의 방어력도 표현된다. 장교로 보이는 군인이 화살에 맞아 잠시 혼절했다가 별 타격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화살을 뽑고 나서 활을 다시 쏘는 모습을 보여준다. 보통 한국 사극에선 갑옷을 입어도 화살을 맞고 곧바로 죽는 장면이 많은데 천으로 만든 누비갑옷만 입어도 화살에 의한 치명상은 막을 수 있었다.

  • 극 초반에 나온 노병이 6회에선 보이지 않는데, 체력의 한계가 오는 궁병[116]보다 더 많은 화살을 일정한 속도로 쏠 수 있었다.[117]

  • 양규가 병사들을 재우고 혼자 경계하다가 조는 장면에서 전장 정리가 안된 부분이 나온다. 거란군이 걸어놓은 사다리 두어 개가 그대로 남은 장면. 공성전에서 기습은 흔한데 실전이었다면 적에게 통로를 준 장면이다. 정석적으로 보자면 수비군은 공격군의 사다리나 갈고리를 단 밧줄이 성벽에 걸치지 않게 제거하고, 성 내 민간인이라도 동원해서 보초를 세워야 하는 것이 맞다. 연출로 이해하는 의견도 있을 수 있으나, 실제 전쟁사에서 경계 실패로 패배한 전투는 널렸다. 당장 고려사에 기록된 강조부터가 경계 실패로 목이 날아갔다. 오히려 비장한 연출과는 거리가 먼 정석적인 지휘관이었기에 양규는 당대 최강의 요군에게 온갖 굴욕을 안겼다고 보는 것이 옳다.


3.7. 7회[편집]


  • 식솔을 개경 밖으로 피신시키려는 유진, 최항, 채충순 등의 조정 신료들에게 쓴소리를 한 강감찬이 아내에게 잔소리를 듣는 장면이 나온다. 아울러 현종 또한 원정황후에게 꾸준히 간언을 듣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특별히 고려시대 여성의 인권을 의식했다기 보다는 단순한 공처가 묘사에 가깝다. 공처가는 동서고금의 사회상을 막론하고 항상 존재했으며, 고대 로마의 대 카토가 "지중해를 지배하는 것은 로마고, 우리 원로원은 로마를 지배하는 패권자다. 하지만 우리 위에는 마누라라는 또 하나의 패권자가 있다."고 언급했는가 하면 유교가 자리잡은 조선시대에도 현종이 왕비가 무서워 후궁을 들이지 못했다고 한 사례도 있었다. 고려 현종 역시 출신의 한계 때문에 제왕학을 배우지 못한 데다가 벼락치기로 제위에 올랐으니 정치적 동지이자 친족인 원정황후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남존여비 사회로 여겨지는 전근대 시대지만 과거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강지처로 대표되는 정처, 정실부인의 가정 내 권한이 의외로 큰 편이어서 가장이라도 정처를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었다.

  • 고려 3대 정종 때 창설된 고려의 준군사조직인 총 30만의 광군이 언급된다. 본래 광군은 예비군 병력으로 평시에는 공사 등을 담당했기에 즉시 전력감이 아니나, 전쟁 발발로 인해 본군에 편입시켜 삼수채에 주둔하게 했다는 것이 언급된다.

  • 흥화진의 건재를 알리기 위해 봉화를 올리는 장면에서 불을 붙일 때 사극에서 잘 보여주지 않던 부싯돌을 사용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 봉화의 연조가 4개인 봉화대는 후대인 고려 의종때 정비된 체계로, 그 이전에는 정확히 알려진 게 없다. 조선시대에는 흔히 알려진대로 5개로 늘어난다.

  • 야율융서가 흥화진 전투의 패장들을 참하려다 소배압이 만류하여 다시 기회를 준다. 드라마에서는 드러나지 않으나 소배압은 야율융서의 외척으로 당시 유일하게 황제에게 간언할 수 있는 위치였다. 소배압은 거란 5대 경종승천황태후 사이의 딸이자 야율융서의 누이 위국공주 야율씨와 결혼했다. 아울러 소배압 본인이 승천태후의 누이의 아들, 즉 조카이기도 했으며 소배압의 장녀가 야율융서의 후궁으로 들어갔다. 즉 소배압에게 있어 야율융서는 처남이자 이종사촌, 장인이었다. 이 쪽도 고려만큼이나 족내혼이 복잡한 셈이다.

  • 장연우가 탈영하려는 병사들을 눈감아준다. 황보유의는 칼을 빼어 즉결처분하려고 하나 장연우가 덮어주고 본진으로 돌려보낸다. 실제로 당시 삼수채의 고려군 대부분은 6위의 직업군인이 아닌 예비군인 광군 또는 징집병이었기 때문에 사기가 낮았을 가능성이 높아서 드라마처럼 흥화진 소식이 알려지지 않아 탈영병이 속출했으리라는 각색은 개연성이 있다.

  • 강민첨이 활을 불에 쪼여 말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각궁 관리 디테일을 살린 묘사이다. 전통적인 국궁각궁은 수분이 침투하거나 열을 받으면 활에 쓰이는 접착제인 아교(민어부레로 만든 풀) 특성상 즉시 풀리기 때문에 습기 관리가 필수적이었다. 이 문제는 당연히 당시에도 인지해서 이성계위화도 회군을 할 때 이 점을 구실로 삼기도 했다.[118] 드라마에서는 딱히 활을 보관하여 건조시킬 장소가 군영 중에 마땅치 않으므로 습기를 말리려는 의미로 불을 쪼이는 묘사가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119]

  • 드라마에서는 고려군이 숙련도 문제 때문에 한 데 뭉쳐 훈련에 급급한 것으로 나오므로, 통주 전투 이전에 최사위가 귀주 북쪽의 육돈(恧頓)·탕정(湯井)·서성(曙星)에서 패한 일이 생략되었다.

  • 거란의 철갑기병이 묘사된다. 보병 위주인 고려군에 비해 전투력이 강하지만 검차에 격퇴된다. 다만 폭력성 완화를 위한 것인지 말이 검차를 보고 놀라서 날뛰는 바람에 기수가 낙마하는 식으로 묘사되었다.
    • 드라마에서 철갑기병으로 불리는 거란의 중장기병은 벽화에는 마갑을 착용한 것으로 나오나, 이 전투에서는 말의 컨디션 및 예산 문제인지 제대로 구현되지는 않았다. 가죽 찰갑을 씌운 것 같은데 감싸는 부위가 적고 두께도 얇아 얼핏 보면 마갑이라기 보다 안장 장식에 가까워 보인다. <태종 이방원> 때 말 학대 사건이 해당 재현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120] 다만 거란의 기록에도 철제 마갑은 가장 좋은 말만이 버텨낼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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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군사서적 『풍천유향』에 등장하는 검차와, 그 검차로 짜는 전차진의 개념도.
조선 후기의 병법서라 궁노수 대신 총수가 원거리 투사무기 운용병을 대신했다.출처링크

  • 고려의 검차진을 보고 거란군이 사각방진이라고 한다. 병서 풍천유향의 조선시대 검차 진형에 대한 묘사를 그대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려군이 검차 뒤에서 다양한 장병기와 투석병으로 거란 기병을 무찌르는데 전근대 동아시아 전투 마차는 전통적으로는 뒤의 손잡이를 병사들이 밀면서 전진하고, 방패 뒤에서 궁노수들이 화살을 쏘는 경우가 많았으나 그 점은 재현되지 않았다.

  • 고려군이 호각으로 지휘하는 묘사가 나온다. <남한산성>에서 장수들이 지휘를 위해 호각을 쓴 장면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호루라기의 경우 십자군 전쟁 동안 영국군장궁수들에게 명령하기 위해서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전에서 쓰였다는 기록이 있어 실제로 과거 군대에서 쓰이기도 했으나[121] 사실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지휘 도구는 고취(鼓吹, 피리, 혹은 나발)로 대표되는 군악대깃발 등으로 이루어졌다. 군악대는 현대에는 주로 행진, 열병식 등 행사에서 활동하지만 본디 전투 목적으로 탄생했다. 전자 통신수단이 발달하기 전 시대에 지휘관의 명령을 하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나팔이나 북을 사용해 명령을 전달하고 박자를 맞춤으로써 진형을 유지, 변경하거나 부대 간격 등을 능동적으로 조정하는 등의 역할로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고취는 곧 지휘권을 의미했기에 이를 두고 장수들 간에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122] 또한 과거의 전쟁에서는 깃발, 즉 군기가 병력 그 자체를 의미했으며 기수 없는 백 명보다 기수가 있는 열 명의 부대가 더 강하다고 할 만큼 중요한 도구였다. 음성 증폭 장치가 없던 시절에 수만 명이 뒤엉켜 싸우는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그나마 눈에 띄는 것은 깃발 정도였으므로 부대를 결집하여 생명과도 같은 대형을 유지하고 사기를 진작시키는 표식으로 중요한 신호 수단이었다.

  • 고려군의 투석병이 나와 투석구를 이용해서 윈드밀 피칭으로 돌을 날려보내는 것까지 구현했다. 투석병은 그 동안 한국 사극에서 묘사되지 않았다. 중국사에서는 별 기록이 없으나 한국과 일본은 투석을 많이 사용했다. 일본이야 전국시대를 다루는 각종 매체에서 아주 많이 보일 정도로 잘 써먹었고,[123] 한국 역시 고대로부터 석전이라는 전통놀이까지 있을 정도로 투석을 중요시했다. 이는 산악 방어전이 많아 고지대에서 저지대로의 투석이 막강했던 한민족 국가의 전쟁 양상에 기인한다. 고려군에서 투석병과는 정규 편제였다.[124]

  • 강조와 이현운이 군사에 대해 논하며 원작 소설의 묘사대로 바둑을 두는 장면이 나온다. 고려사 강조열전에 따르면 이는 탄기(彈棋 또는 彈棊)로 나오는데, 탄기라는 게임에 대해 대한민국이나 중국, 일본의 오래된 문헌들을 보면 당시 즐겨 했던 게임으로 전해진다. 구체적인 돌의 배치나 규칙 설명은 현대의 알까기와는 다르긴 하며, 아이들 장난 같은 놀이로 취급되는 현대의 알까기와 달리 중국에서는 사대부들이나 황제도 즐겨 하던 군자의 놀이로 취급되는 고상한 놀이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고려사 강조 열전의 탄기 묘사는 강조가 애들 장난 같은 짓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 아니라 당대 고려의 높으신 분들의 여유와 방심을 보여주는 묘사이다. 또한 탄기의 뜻이 바둑을 두는 행위로 나오는 사전도 있다.

  • 통주 전투의 패배 과정 묘사가 사료와 다르다. 사료에서는 통주 서쪽에 진영을 만들었고, 그 중 강조는 삼수채(三水砦)에 주둔하며 거란군의 공격을 몇 번 격퇴하다 보니 방심하여 탄기를 하다 거란의 선봉장 야율분노가 상온(詳穩) 야율적로를 거느리고 세 강의 합류 지점에 있었던 고려 본군 진영을 정면으로 돌파하자 더 들어오게 두라며 여유를 부리다 패배하고 강조는 담요에 싸여 포획된다.[126] 반면 드라마에서는 정체가 불분명한 탄기 대신 바둑을 두는 것은 비슷하나, 단순히 방심한 것이 아니라 첫 번째 전투를 치른 뒤 이현운과 다음 전략을 논의하는 장면으로 나온다. 게다가 거란군의 기습 소식을 들었을 때도 "대군이 올 만한 길목은 모두 막아두었으니 규모가 크지 않을 것이다"는 나름 합리적 판단을 내린다.[127] 게다가 바둑 도중 강조가 언급한 거란군의 다음 전술은 소배압의 계획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것이었다. 그러나 야율분노의 독단적인 기습이 변수가 되어 거란군은 군량미를 공격하여 본진의 병력을 바깥으로 유인하고 그 사이에 본진에 남은 강조를 포획한 뒤 높은 곳에 걸어두고 불을 밝혀 사령관 포획 소식을 선전하여 고려군 전열을 무너뜨렸다는 각색이다. 사료와 드라마를 비교하면 고려군 전열 돌파와 강조 포획의 선후관계가 다르다. 또 강조가 방심했다는 묘사를 지우는 과정에서 몇 차례에 걸친 고려군의 승리가 누락되었다.[128][129]
    • 강조와 이현운이 거란군의 전술을 논하는 장면은 다큐멘터리 평화전쟁 1019 자문으로 참여했던 학자들이 지적한 부분과 비슷하다. 이 다큐에서 드라마 자문이기도 한 길승수 작가의 의견에 따르면 통주 전투 패배의 원인으로 강조의 방심보단 실전 경험이 많은 군대와 그렇지 않은 군대의 차이 때문이라고 본다. 통주 전투에서 사용된 거란군의 전술은 일단 소규모 기병부대를 보내 탐색전을 진행하고 약점을 파악한 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그 중에서도 약한 부위를 집중적으로 공격함과 동시에 별동대로 후방의 퇴로를 차단해버린 것이라고 한다.
    • 강조가 '적의 공격을 받아내며 계속 들어오게 하라'는 고려사에도 기록된 발언을 한다.[125] 물론 방심한 강조는 야율분노의 병력에 기습당해 거란군에 잡힌다. 다만 발언의 뉘앙스는 좀 다른데, 고려사에서는 방심을 상징하는 뉘앙스지만 본작에서는 음식 드립은 치지 않고 "거듭 방어하며 적의 마음이 조급해지길 기다린 다음 역공한다"라는 전략적인 차원에서의 발언이다. 전략으로서 얼마나 유효한지는 둘째치고 발언의 뉘앙스는 상당히 다르다.

  • 드라마에서는 정면 돌파와 강조 포획의 순서가 바뀌어서 화면으로 드러나지는 않으나, 실은 강조 포획 과정에서도 고려군의 피해가 매우 컸다. 거란군은 고려군 지휘부 중 강조, 이현운과 도관원외랑 노전(盧戩), 감찰어사 노의(盧顗), 양경(楊景), 이성좌(李成佐) 등은 사로잡고 노정(盧頲)과 사재승 서숭(徐崧), 주부 노제(盧濟) 등을 죽였다. 거란이 본진을 격파하고 강조를 말아 싣고 가버리면서 고려군이 큰 혼란에 빠지니 드라마에도 나오는 것처럼 거란 병사들이 승기를 타고 수십 리를 추격하여 일제히 공격해 30,000여 급의 머리를 베었고, 버려진 식량·갑옷·무기들은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였다 한다.

  • 통주 전투의 대패 직후이자 거란군에 잡혀가기 직전 패배에 망연자실한 강조 앞에 죽은 목종의 혼령이 나타나 꾸짖고 강조가 이에 혼비백산하여 잘못했다고 빌었다는 고려사의 서술은 묘사되지 않았다. 사실 이 부분은 고려사 강조 열전 내에서도 너무 설화적인 요소가 강한 부분이라 뺀 듯 하다.[130] 또 고려사에서는 살을 발라내는 고문을 당하다 마지막에 참수된 것을 약간 비틀어서 도끼로 여러 차례 난도질 당해 죽는 것으로 바뀌었다.


3.8. 8회[편집]


  • 야율분노가 야밤 중 소수 특작부대의 기습으로 강조를 사로잡은 것을 보고하자 하루 정도 더 기다려서 고려군 전체에 대한 섬멸전을 노리던 소배압이 자신의 빅 픽처를 물거품으로 만들어놓은 것에 분노하여 야율분노를 걷어차고 일갈을 날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 역사에서는 야율분노가 고려군과 거란군의 회전 중 정당하게(?) 강조의 본진을 들이쳐서 회전으로 이들을 대파하고 고려군을 박살냈기 때문에 그가 소배압에게 이런 대접을 받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는 2차 침입 이후로는 볼 일이 없는 야율분노와는 달리 소배압은 마지막 하이라이트를 장식할 귀주 대첩에서 강감찬의 맞수로 등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소배압을 판 전체를 읽을 줄 아는 지장으로 만들어서 입지를 강화시켜 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131] 다만 치열한 전면전을 벌이는 도중 지휘관의 오만함과 방심으로 인해 지휘부가 돌파당하여 참패한 실제 역사와는 달리 본작에서는 '강조가 기습당했기 때문에[132] 고려군이 제대로 된 회전도 해보지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패했다'는 식으로 통주 전투 참패가 윤색되는 감도 있다.

  • 강조가 사로잡혀 지휘부가 붕괴된 고려군이 각지로 흩어져 무작정 남쪽으로 도망가거나 인근 성으로 대피하여 방어 체계를 정비한다. 드라마에서는 김훈이 적을 막는 동안 최사위가 흩어진 패잔병들을 수습해 각각 곽주와 서경으로 배치하여 패잔병들을 수습하고 개경에 전투 결과를 보고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최사위의 개입 말고는 실제 사실을 반영한 각색이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곽주 방면으로 도주하던 고려군은 거란군에 추격당하다 완항령에서 매복한 좌우기군장군 김훈과 김계부, 이원, 신영한 등이 거란군의 추격을 막아 병력을 보존한 채 퇴각할 수 있었다. 완항령 전투는 통주 전투 패배로 인한 고려군의 추가적 피해를 틀어 막은 꽤 의미 있는 전투인데, 드라마에서는 김훈의 대사로만 언급되고 묘사되진 않았다.

  • 강조가 잡힌 뒤 통군사인 최사위가 퇴각 명령을 내릴 때 고려의 장수들에게 마저 어디로 도망쳐야 하는지 구체적인 명령을 내리지 않고 떠밀리듯이 퇴각 의사만 밝힌 명령을 내려 고려군이 장수와 군사 가릴 수 없이 아무렇게나 퇴각하며 뿔뿔히 흩어지게 되어 사실상 30만 고려군을 방치한 무능한 지휘관으로 묘사되었다.[133] 물론 실제 역사에서도 패전 기록이 있고 군사적인 역량이 부족하다고 평가받긴 하지만, 9년 뒤에 현종에게 공신으로 임명되는 만큼 그가 극 중 묘사처럼 큰 잘못을 범할만큼 무능하다고 보기 어렵다. 그나마 극 중 현종이 강조가 잡혔기에 고려군이 진즉에 와해되었다는 것을 이해하였고, 최사위가 군사들을 다시 수습하고 있다는 것도 언급되었다.

  • 장연우와 황보유의가 죽은 척 개그를 하면서 영주로 도주하는데, 사실 장연우와 황보유의는 이 때 어디로 도주했는지 기록에 없어서 각색으로 보인다. 이현운이 거란 군영에서 보고하길 곽주성의 방어사와 영주성의 안북도호부사는 심약한 자들 이라서 공격을 시작하면 알아서 도망갈 것이라 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장연우 일행이 영주성에 도착할때 장교들이 말을 타고 성 밖으로 도망치고 도호부사가 성을 버렸다는 병사의 외침과 함께 아비규환이 펼쳐지는 묘사가 나온다. 이름이 나오진 않았지만 당시 영주성 책임자는 안북도호부사 공부시랑 박섬으로 훗날 현종의 몽진 행렬에 합류해 전주절도사 조용겸의 포위에 대항하는 공을 세우기도 해서 면책되었다.

  • 반면에 곽주 방어사가 싸우지도 않고 도주한 것은 사실인데, 음력 1010년 12월 거란군이 곽주(郭州)를 침입하자 방어사 호부원외랑 조성유(趙成裕)가 밤에 도망쳤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곽주에 있던 이들이 모두 도주한 것은 아니었고 통주 전투에서 흩어진 지휘부도 합류했기 때문에 우습유(右拾遺) 승이인(乘里仁)과 대장군(大將軍) 대회덕(大懷德)·신영한(申寧漢), 공부낭중(工部郞中) 이용지(李用之), 예부낭중(禮部郞中) 간영언(簡英彥) 등이 남아 싸웠으나 모두 전사하였다. 드라마에서는 단순히 약점을 공략 당해 함락되는 걸로 간단하게 묘사 되었다.

  • 강조와 이현운을 포함해 노전, 노의 등 총 6명의 장수가 사로잡힌 것이 나오고, 이들은 과거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거란의 한기와 재회한다. 실제 한기가 제2차 여요전쟁에 종군한 건 사실이지만, 이들이 통주 전투 이후에 만났다는 기록은 없기 때문에 드라마의 각색이다.

  • 야율융서가 강조와 이현운 등에게 자신의 신하가 될 것이냐고 묻자 이현운은 고려사 강조 열전에 나온 대사[134]를 그대로 말하며 앞으로 야율융서를 섬기겠다고 한다. 이현운은 분기탱천한 강조에게 발길질을 당하는데, 이 역시 고려사 강조 열전에 실제로 나오는 기록이다. 다만 네놈도 고려사람인데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고 강조가 꾸짖는 말은 생략되었다. 원래 역사에서 강조는 끝까지 야율융서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했으며, 이 때문에 살을 발라내는 고문을 당하다가 처형되지만, 당연히 지상파 심의상 그런 잔인한 부분을 대놓고 내보낼 수는 없고 전개 속도 문제도 있으니 여기서는 강조가 야만인이라고 막말을 하자 극대노한 야율융서가 친히 강조를 부월로 여러 차례 찍어 참살하고 목을 베어 군영에 효수한다. 이후 강조의 시신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거란이 강조를 반역자로 칭했으므로 본작과 비슷한 결과를 맞았으리라고 볼 여지는 있다.

  • 이현운이 거란에 전향하여 고려군의 약점을 드러내고 곽주(평안북도 곽산군)와 영주 함락에 기여한다. 여기서 이현운이 곽주성의 약점으로 북쪽 문을 언급하는데 실제 곽주성은 겉으로 보기에는 동, 서, 남 세곳에 성문이 있지만, 특이한 점으로 북쪽에 비밀통로인 암문(暗門)이 있다고 한다. 이 비밀통로가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의문이나, 만약 고려시대에 개축했을 당시에도 존재했다면, 후일 양규와 고려군이 이곳을 탈환했을때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 사실 거란에 항복한 이후의 이현운의 행적은 어느 사료에도 없다. 이 때 사로잡힌 고려 장수들 중 일부가 고려의 성에 항복을 종용하러 다니지만 이현운의 모습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데, 드라마에서는 원작 소설을 반영하여 매국노가 된 그가 항복을 종용하는 사신으로 갔다가 분노한 고려군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워 한기에게 청탁한 것으로 나온다. 이후 소설에서 이현운은 결국 흥화진에 사신으로 갔다가 양규에 의해 죽기에 그의 최후 역시 이렇게 그려질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있다.

  • 강조가 패하여 잡혀간 이후 현종이 강조의 부인을 불러 사실을 알리고 위로하는 장면이 있다. 사실 강조는 하필 고려의 기록이 대거 소실된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고 반역자로 기억되어서 제대로 된 가족관계조차도 찾기 힘든 인물이다. 다만 강조가 신천 강씨라는 추측은 있다. 강조(고려) 문서 참조.

  • 최질이 항복을 종용하러 온 배반자 노전과 요의 합문사 마수를 감금하고 항전을 결의한 것은 사실이다. 『고려사절요』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이 통주에 이르러 항복을 권유하도록 하니, 성 안이 모두 두려워하였는데, 중랑장 최질과 홍숙이 소매를 떨치며 일어나 노전과 마수를 붙잡고, 이내 방어사(防禦使) 이원구(李元龜), 부사(副使) 최탁(崔卓), 대장군(大將軍) 채온겸(蔡溫謙), 판관(判官) 시거운(柴巨雲)과 더불어 성 문을 닫아걸고 굳게 지키자 사람들의 마음이 곧 하나가 되었다고 적혀있다. 그런데 노전 같은 경우 고려 덕종 때까지 고위직에 오른 기록이 있고, 먼 훗날인 충선왕의 즉위년에는 노전과 더불어 서희, 양규, 하공진의 손자와 현손에게 관직을 주라는 내용의 교서를 충선왕이 내린 기록이 기재돼 있는지라 항복을 권유하러 온 것은 본인의 의지가 전혀 아니었으며, 오히려 여요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다른 세 명처럼 다시 고려군에 종군하여 공을 세웠던 것이 아닌가라는 얘기가 있다. 따라서 이후의 전개를 좀 더 지켜볼 여지는 있다.[135]

  • 드라마에선 정당문학 최항의 대사를 통해 야율융서가 고려를 침공한 진짜 목적은 어머니 승천황태후의 그늘에서 벗어나 본인의 권위를 확립하고 진정한 거란의 황제로 거듭나기 위해 고려를 침략하여 복속시키는 성과를 거두려 한 것으로 나온다. 다만 이 시기에 최항이 실제 항복을 주청하지는 않았으며, 이 시기에 최항은 그저 열전 등에 현종에게 팔관회 부활을 청했던 기록밖에는 없다. 또한 실제 거란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고려 목종의 역신 강조를 잡고 고려를 복속시키는 것이라는 표면적인 목적 외에는 딱히 나온 바가 없다.[136]

  • 송이 거란과 맺은 '전연의 맹'을 채충순이 언급한다. 다만 북송과 고려는 상황이 전혀 달랐으며, 오히려 북송의 경우가 여요 전쟁 이상으로 선전하여 수도와 국체를 온전히 지키는데 성공한 사례이다. 1004년의 송은 국경의 영주와 정주가 완강하게 버티고 있었고, 요 성종과 예지황후가 친정을 나온 거란에 맞서 황제가 친정하여 전주에서 반격을 가했다. 여기서 전주의 방어군은 요의 원정군 총사령관 소달람까지 저격해 요군의 예봉을 꺾은 상황이었다. 여기서 송군은 수도 코앞에 있는 수십 만의 기병 군단이 부담스러웠고, 요군은 송의 금군이 앞을 가로막고 뒤에서는 영주, 정주의 수비군을 중심으로 하북의 송군이 퇴로를 막고 있어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처럼 양측 모두의 이해가 맞아 떨어지자, 송 · 요 양국은 화친을 맺고 전쟁을 끝냈다.
    • 고려와 송의 상황을 서로 비교하자면, 요군이 국경의 요새를 우회해 깊숙히 진격해온 것은 양국이 모두 맞닥뜨린 사실이지만, 송은 금군을 중심으로 완강하게 버텨낸 반면에 고려는 통주 전투로 주력군이 붕괴해 버렸다. 전연의 맹을 맺은 후, 송은 세폐를 보내는 조건으로 오랜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반대로 고려는 2차 여요전쟁에서 수도 개경이 결국엔 함락되었고 요군을 격퇴한 뒤에도 다시 요의 침공을 여러 차례 받아내야 했으며 요의 침공 의지를 1019년, 귀주 대첩에서 완전히 꺾은 후에야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 7회와 8회에 걸쳐서 현종이 자주 백성들을 만나면서 "전투는 고려군이 이기고 있으며 거란군을 물리칠 것이니 백성 여러분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시오!"라는 무책임한 말을 날리는 오리지널 각색이 있는데, 당연히 실제 현종은 이런 무책임한 행위를 실제 역사에서 하고 다니진 않았다.[137] 이 때 현종은 1년(1010년) 음력 11월에 거란이 침입이 통보한 후 팔관회를 부활시키고 왕이 위봉루(威鳳樓)에 임어하여 연악(宴樂)을 관람하였다고 나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애초에 저 시대에 군주가 저렇게 수시로 궁밖에 나가서 백성들을 무작위로 만나는 것 자체가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군주는 함부로 자기 의견을 아무한테나 표출하고 다닐 수 없다. 왕의 모든 의사표명은 관련 기구를 거쳐서 나온다.

  • 강감찬이 현종에게, 거란 측에 고려의 군주가 친조할 것이라는 거짓 표문을 올리고 그 사이 동북면의 군사를 서경으로 이동시켜 거란에 대항하자고 고한다. 또한 강감찬은, 만약 현종이 정말로 거란 황제에게 친조한다면 "자주적인 황제의 나라가 아니라 거란의 속국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하며[139] 바꾸어야 했고 친조 약속은 언제까지나 시간 벌이용 계책임을 언급하고, 이어 본인이 거짓 표문을 지어 직접 사신으로 가겠다고 고한다.
    • 고려가 동북면 군사를 동원해 서경을 방어한 것이나 거란 상대로 친조 약속이라는 사기를 치며 시간을 끈 것은 사실이다. 다만 통주 전투 패배 소식을 받아든 조정이 소환한 동북면 군대가 서경에 도착한 시점과 친조 사절이 거란 진영에 도착한 시점은 거의 비슷했으며, 친조 블러핑을 주도한 것이 강감찬이라는 것은 드라마의 각색이다.[138] 동북면 군대의 신속한 기동 덕분에 친조 사절은 불과 하루 정도 시간을 벌어준 셈이 되었다.
    • 서경 공방전 당시 사절로 간 인물은 누군지 불명이고, 몽진 이후 사절로 가 시간을 끌었던 사람은 하공진이므로 강감찬의 사신행은 드라마의 오리지널 각색이다. 강감찬이 당시 외교를 담당하는 예부시랑이기도 했고 후일의 한조처럼 예부시랑 직을 맡아 외국에 사신으로 간 사람들도 있고 하니 납득 불가능한 각색은 아니다. 강감찬은 동북면 군대 패배 이후 현종에게 몽진을 주청한 것 외엔 딱히 행적이 없는데도 그것만으로도 큰 공으로 인정받고 우대받은 데다 드라마 주역의 하나이므로 그러한 우대를 납득 가능한 오리지널 플롯이 주어질 것으로 보인다.

  • 곽주와 영주 함락과 친조 사절 도착 타임라인은 『고려사절요』를 따라갔다. 『요사』의 타임라인을 바탕으로 실제로는 통주 전투 패배 6일 후인 음력 11월 30일에 현종의 친조 사신이 도착했고 시간 끌기에 속아서 열받은 요 성종이 곽주를 음력 12월 6일에 함락시켰다는 추정도 있다. 그러나 『고려사절요』는 친조 사절 도착을 음력 12월 10일 기사에 실었다. 음력 12월 11일에 서경성 북문에 도착한 한기의 기병 200명이 이동하는 데 11일이나 걸릴 이유가 없기 때문에 고려사절요의 시간 순서가 더 합리적이다.


3.9. 9회[편집]


9회 방영분은 상당수가 강감찬의 본작 오리지널 행적을 집어 넣었기에 창작 요소가 많다.[140] 다만 이 와중에서도 2차 여요전쟁의 전개 과정을 상당히 집어 넣었으므로 우선 통주 전투 후 고려의 상황을 제2차 여요전쟁 문서의 내용을 빌어 시간순으로 설명하도록 한다.

  • 강감찬이 야율융서를 만나 현종의 거짓 친조 표문을 전한다. 강감찬은 현종을 가리켜 '성상', '군주'라고만 표하고 '고려국 황제'라고 칭하지는 않으며 최대한 야율융서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는 야율융서의 면전에서 현종을 황제라 칭하고 각종 자극적인 말을 내뱉어 죽음에 이른 강조와 대비되는 부분이고 고려를 비롯해 한반도 조정이 중원 왕조나 유목 왕조를 자극하지 않고 외왕내제의 양식을 준수하려 했던 사실을 재현한 것이다.

  • 원래 역사에서 현종은 통주 전투로 서북면의 주력군이 소멸한 소식을 듣자, 동북면 도순검사 탁사정과 중랑장 지채문[141]에게 급히 서경으로 갈 것을 명했다. 드라마에서는 탁사정과 지채문 중 9회까지 지채문만 보이는데 이들이 이끄는 동북면 군사들이 통주 전투 후 서경으로 움직였다.[142] 거란군은 통주 전투 승리 후 곽주를 점령할 때까지 강동 6주에서 또 열흘 가량 발이 묶였는데 그걸 감안하더라도 동북면 군대의 기동은 매우 신속했다. 한편 요 성종은 침공 초기에 여러 성들에 항복을 권했는데, 여기에 서경이 응답했다. 서경부유수 원종석을 비롯한 서경 수뇌부는 통주 전투 이후 항복을 결정했고 이것은 실제 사실에 부합한다.

  • 현종이 조근[143]하겠다는 시간끌기용 사신이 성종의 거란군 본대에 도착했다. 8회 문단에서도 설명했지만 이 때 사신이 누구인지는 밝혀진 바는 없는데 드라마에서는 이를 강감찬으로 설정했다.

  • 야율융서가 강감찬의 친조 약속을 받고 타초곡을 금하라 명하는데 성종이 고려의 항복을 기뻐하며 약탈을 금지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개경유수[144]로 정사사인 마보우(馬保佑)를 임명하여 태자태사 을름(乙凜)의 기병 1,000명의 호위를 받아 개경으로 부임하게 하고, 그 길에 합문인진사 한기(韓杞)[145]의 기병 200명을 서경으로 향하도록 했다.[146] 드라마에서는 자체적인 타임라인상 한기 파견이 친조 사절 도착과 개경유수 파견 전이라 마보우나 을름은 나오지 않았다.

  • 극적인 긴장감을 위해서인지, 서경과 관련된 행보가 역사와 상당히 다르다. 원래 역사에서는 지채문이 서경성에 먼저 도착했으나 원종석이 성문을 닫은 상태였다. 지채문 휘하의 최창이 대신 서경 내의 조자기와 연락해 성에 들어가 궁궐 남쪽에 머무르며 원종석을 말렸으나 듣지 않자 지채문은 즉각 항복 사절을 추격해 죽이고 항복 문서를 불태웠다. 음력 12월 11일, 아무것도 모른 채 서경의 북문 앞까지 온 한기의 군사를 탁사정과 지채문 휘하의 동북면 군사들이 습격하여 전멸시키고, 나아가 을름과 마보우의 거란군도 패퇴시켰다. 즉 원래 역사에선 지채문의 군대가 서경과 접촉한 것이 먼저고 한기가 죽은 것이 그 다음이며 한기는 드라마와 달리 원종석과 접촉하기도 전에 지채문에게 살해당했다. 반면 드라마에서는 한기가 원종석과 접촉한 후에 원종석의 배신으로 고려의 기만책을 알게 되고, 강감찬을 끌고 거란 진영으로 돌아가다 지채문의 선발대와 마주쳐서 강감찬이 겨우 구출되는 등 실제 역사를 적당히 비틀어서 긴박감을 연출했다.
    • 강감찬이 서경 부유수의 배신으로 포박되어 한기 등에 의해 거란 진영으로 가던 도중 지채문에게 구출되고 이후 시간을 벌기 위해 다시 거란 군영으로 가는 것 역시 픽션이다.
    • 서경의 행정 기관은 중앙의 조정을 모방한 형태로서 크게 민정, 군사, 사법 세 부분으로 나뉘어 다른 지방과 체계가 달랐다. 사법을 담당하는 분대어사 조자기가 민정을 담당하는 부유수 원종석의 뜻과 달리 자체적으로 지채문과 접촉하여 아무 문제 없이 성문을 열 수 있었던 것은 독립적인 권한과 동원 가능한 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147] 그럼에도 드라마에서 조자기가 원종석의 명령대로만 움직이는 묘사가 추가된 것은 악의 평범성을 보여주기 위한 각색이다. 명령을 따랐을 뿐 문서 참조.

  • 소배압이 강감찬에게 자신의 동생 소손녕과 서희의 담판을 언급한다.[148] 다만 소배압과 강감찬이 이때 만났다는 건 당연히 픽션이다.[149] 고려에는 신하도 많을 텐데 당신 같은 나이 많은 신하가 항복 사신으로 왔느냐고 말하는 소배압에게 강감찬이 그러는 거란도 당신 같은 노장이 참전하지 않느냐고 맞서는데 강감찬은 948년 생으로 2차 여요전쟁때 이미 환갑이 넘었고 소배압은 요 성종 야율융서가 즉위한 983년에 이미 황제의 친위군인 피실군의 장군인 좌피실 상온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조복(몽골) 원정에서 큰 전공을 세워 성종의 신임을 얻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2차 여요전쟁 당시 최소한 군문에 있은지 30여년은 넘었다고 볼 수 있기에 충분히 노장이라고 할 만했다. 본작은 이런 기록들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 원정황후가 거란이 서경까지 함락시키면 땅을 떼어줘서라도 황실을 지키라고 한다. 당장 원정황후의 아버지 성종 대에도 할지론을 통해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려고 했으나, 서희가 담판을 벌인 덕에 보전할 수 있었으며 강동 6주까지 추가로 획득할 수 있었다. 이 당시 고려는 거란군과의 몇차례 교전에서 승리했기에 할지론을 잠재우고 서희의 담판을 이끌 수 있었다.

  • 김은부의 말을 통해 당시 지방에서는 호장의 힘이 상당히 셌다는 것이 언급된다. 고려의 지방 행정 제도는 주현의 읍사에서 계수관이 지방 행정의 실무를 담당하는 향리들을 감독하는 체제였다. 지방 향리들의 힘은 막강하여 신라의 상대등을 모방한 당대등, 대등이란 직책을 썼고 병부(兵部)와 창부(倉部)를 거느려 군권과 징세권까지 보유했다. 고려 조정은 성종 2년에 와서야 향리 조직을 개편해 이들의 직책을 호장과 부호장으로 개칭하는 것으로 통제권을 강화하고 향리들의 권위를 꺾었다. 그리고 3차 여요 전쟁을 1년 앞둔 1018년에 지역 별로 향리의 정원을 정하고 공복도 제정했다. 조정에서는 이미 광종대에 공복이 제정되고 조직 개편도 착실히 이뤄졌지만, 지방 향리들의 공복 제정과 조직 개편은 그보다 한참 뒤에 이뤄졌던 것을 보면 고려의 지방 통제력이 미약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호장들의 아들들을 병(군)역에서 편법으로 면제해주는 부정을 목격한 절도사 김은부의 딸이 명색이 절도사가 되어 마치 허수아비처럼 호장들의 비위나 맞추셨던 거냐고 따지는 대목이 나온다. 원성왕후의 결기가 돋보이는 대목이지만 사실 이 때만 해도 각 지방의 독립성이 강해 호족들은 영주나 마찬가지였다. 고려, 조선 양대 왕조에서 천년 가까이 지방 통제력을 강화해서 오늘날처럼 중앙이 강하고 지방이 약한 한국 - 북한의 행정 체제가 완성된 것이다. 이런 지방 세력의 불만은 고려 황제가 주는 것도 없이 갈취하기만 한다며 고려 제일의 도적이라고 비판하는 충주 호족 박진의 행적에서 계속 묘사된다.

  • 상서좌복야 유진이 고려가 일단 항복해야 발해국처럼 멸망의 길을 걷지 않는다고 한다. 항복하면 세폐를 바치고 서북면의 영토를 떼어줘야 함을 언급하기도 한다. 전반적으로는 거란의 막강함을 재설명하고 드라마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요 성종이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했던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발해의 멸망과 전연의 맹을 시청자들에게 상기시킨 것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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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 10회[편집]


  • 9회에서도 언급한 것이지만 강감찬 관련 이 부근 묘사는 전부 드라마의 창작이다. 강감찬과 만난 장연우황보유의의 묘사도 마찬가지. 다만 이들이 통주 전투 패배 후 개경으로 돌아가 조정에 합류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장연우가 계속 폼 잡으며 밤하늘의 별이 잘 보인다고 자꾸 시를 지으려다가 황보유의에게 타박을 받는 장면이 있는데 단순한 개그 장면일 수도 있으나 별이 많고 밝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양규의 곽주 전투 당시 곽주에 유성이 떨어진 것의 복선일지도 모른다.

  • 장연우가 밤하늘의 별을 보며 갑자기 시를 짓는 개그 장면을 찍는데, 실제로 장연우는 문학에 대한 소양을 인정받아 향찰로 전해지던 고려가요를 바탕으로 그가 지은 한시 〈한송정곡(寒松亭曲)〉이 『동문선』에 실렸다. #

  • 원래는 서경에 지채문이 도착한 후 지채문 휘하의 최창이 서경 내의 조자기와 연락해 닫힌 문을 열고 성에 들어가 궁궐 남쪽에 머물며 거란 사절을 억류하라고 원종석과 실랑이를 벌였으나 듣지 않자 지채문과 모의하여 거란 사절을 추격해 죽이고 항복 문서를 불태웠다. 그런데 막상 서경의 민심이 뒤숭숭하다보니 지채문은 성 밖 남쪽으로 나가서 주둔하다 탁사정의 주력군이 서경성에 도착하고 나서야 다시 성에 들어갈 수 있었다. 드라마에서는 이런 실랑이를 모두 날리고 조자기가 문을 열어주면서 지채문이 낭아봉으로 원종석을 곧바로 쳐 죽이고 효수하는 것으로 내용을 축소했다. 한편 원종석 살해 자체는 사료에는 없는 추정이다. 지채문이 거란 사절을 추격하여 죽였을 때나 탁사정이 합류하고 한기와 마보우, 을름의 기병을 격퇴했을 때 원종석까지 휘말려 죽은 것으로 추정 또는 오인된 것 같다.

  • 채충순서희를 언급할 때 염윤(廉允)이라고 부르고 여기에 자막으로 서희의 (字)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고려사』 서희 열전에 따르면, 염윤은 서희의 자가 아니라 소자(小字), 즉 아명이다. 그리고 설령 자라고 해도 서희는 목종 때까지 조정에 있던 선배이고, 채충순은 목종 대부터 관직이 확인되는 후배라 저렇게 다짜고짜 자를 부르는 건 예절이 아니었다. 굳이 자를 불러야 한다면 성씨라도 붙이는 것이 맞다.

  • 친조 표문을 짓는 과정에서 패싱당한 유진이 사직을 요청하고 현종은 그것을 윤허하고 다시 복귀를 청하는데 원래 역사엔 그런 기록은 없고 각색이다. 사실 당시 고려 조정에 항복파와 주전파가 얼마나 되었는지, 현종이 친조를 청하면서 요 성종을 속이는 거짓말을 할 때 얼마나 그 의견에 동의했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는 없다. 다만 현종이 몽진할 때 현종을 버리고 간 신하들을 보건데 내심 항복하기를 원하거나 싸우고 싶지 않았던 신료들이 드라마에서처럼 많았음은 짐작할 수 있다.

  • 서경에서 거란과 싸운 승려 법언과 승병들이 언급되는데, 이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실제 법언은 탁사정과 함께 함께 군사 9천을 이끌고 1011년 1월 24일(음력 1010년 12월 12일), 임원역(林原驛, 오늘날의 평안남도 대동군 부산면) 남쪽에서 거란군 3천여 명을 살해하는 전공을 거두고 전사했고, 이에 현종은 그를 수좌(首座)로 추증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실 10회의 서경성 전투는 예산이 없는것인지 시간이 없는 것인지 원 역사 서경성 전투보다 묘사가 많이 축소된 편이다.[150]

  • 법언의 승리 다음날 지채문의 마탄(馬灘, 말여울, 평양시 승호구역 봉도리) 전투도 많이 축소된 편이다. 본작에서는 지채문이 그냥 거란군을 추격하다가 거란의 매복 궁수대에 당한 걸로 나오는데, 원래는 지채문이 나가 싸우자 거란군이 패배해 달아났다. 이에 서경성의 군사를 더 이끌고 나와 추격했으나, 거란군이 군대를 돌려 고려군을 격파했다. 즉 유인작전이었다. 이후 지채문 휘하 군대의 기록이 없어지고, 음력 12월 27일에 개경에 도착한다. 따라서 지채문 군대는 4일 가량 포위되어 고립되어 있다가, 음력 12월 17일 거란의 성종이 서경 포위를 풀고 이동할 때 겨우 개경으로 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51]

  • 양규가 흥화진에서 군사 700, 통주에서 1,000명을 동원하여 곽주 탈환전에 나선다. 역사에서 곽주 탈환전에 동원된 병력이 700에 1,000을 더한 것인지, 700에서 1,000이 된 것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나 일단은 평화전쟁 1019의 전례를 따라 전자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 야율융서가 사찰에 머물며 불공을 드리다가 고려 승려에게 암살될 뻔한 장면은 사료에는 없고 『고려사』 지채문 열전에 나오는 거란주가 성 서쪽의 사찰에 머물렀다(契丹主次城西佛寺)는 기록을 바탕으로 한 각색이다. 거란군은 서경의 중흥사 탑을 불태웠지만 절 전체를 태우지는 않았다. 지채문 역시 자혜사라는 또 다른 절에 주둔하기도 했기 때문에 서경 주변에 군대를 주둔시킬만한 규모의 절이 여럿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대도수가 사찰에 머무는 야율융서를 습격하려다가 포로가 되었고, 동북면 도순검사 탁사정은 대도수를 돕기로 했으나 약속을 깨고 서경성에서 나와 도망치는데 이는 원래 역사에서 지채문이 패하고 서경성이 위태롭자 탁사정이 대도수에게 동문으로 나가 거란군의 주의를 끌도록 하고, 서북면의 주력은 서문으로 나가 거란군을 기습하겠다는 작전을 내놓아 공격을 개시했는데 탁사정이 서문을 나오자마자 거란군을 공격하기는커녕 남쪽으로 도망쳤던 것을 각색한 것이다.


3.11. 11회[편집]


  • 이전 회 후반부와 겹치면서 서경을 지키던 동북면 군대가 와해되자 전령이 조정에 서경성에 지휘관이 없다고 보고한다. 실제로 서경에 남은 하급 관리와 장교들은 점까지 쳐가며 우왕좌왕하다 결국 강조 행영에서 통군사 최사위 휘하에 있었던 통군녹사 조원을 자기들끼리 지휘관으로 추대해야 했다. 과거에 급제한 지 3년 6개월 정도 된 햇병아리 관리가 지휘관이 되어야 했던 상황에서 서경이 처했을 혼란을 짐작할 수 있으며, 무관이 부족해 현지임관을 지시하는 묘사를 통해 상급은커녕 하급 무관마저 부족할 정도로 지휘계통이 무너진 상황에서도 항전을 이어가고 있는 서경을 그려냈다. 다만 고려사 등에 기록된, 서경의 장군들이 점을 쳐서 보니 길조가 나와서 고려군이 서경을 지킬수 있었다거나 고려 태조 왕건의 사당에서부터 돌풍이 불어 거란군의 진공이 하루 지체 된 것 같은 천재지변, 괴력난신의 일화들은 생략되었다.

  • 야율융서가 사로잡은 대도수를 당장 죽이지 않은 것은 대도수의 이후 기록이 없는 것과 거란이 발해인 군대를 운용하고 마을을 통치한 데서 나온 창작이다.

  • 거란군이 서경을 우회하여 개경으로 직공한다. 거란군은 이 전쟁에서 공성을 일주일 넘게 유지한 적이 없었다. 서경 포위도 5일만에 끝났다. 그러나 드라마에서처럼 신속하게 움직인 것은 아니고 야율융서의 본대가 개경에 입성할 때까지 14일이 걸렸다. 서경 전투나 개경 진격과 관련된 배역의 개입은 모두 창작이다. 이 때 소배압이 다른 거점없이 곽주 하나에만 의지한 위태로운 보급선을 걱정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역사에서는 양규의 곽주성 함락이 먼저이고 요 성종이 개경 직공을 통해 고려 현종을 사로잡기로 결심한 것이 그 다음에 있었던 일이다. 즉 원래 역사에서는 아예 거란군의 뒤가 끊긴 상황에서 요 성종이 고려 현종만 잡으면 전쟁이 끝난다고 위험한 도박을 감행했던 것이다.

  • 몽진을 주청하면서 '서서히 이길 방도를 찾아야 한다'는 강감찬의 대사는 고려사 강감찬 열전에 기재된 강감찬의 발언 "오늘의 일은 그 죄가 강조에게 있으니 근심할 일이 아닙니다. 다만 중과부적이기 때문에, 그 예봉을 피했다가 서서히 이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今日之事, 罪在康兆, 非所恤也. 但衆寡不敵, 當避其鋒, 徐圖興復耳)"을 그대로 따 온 것이다. 다만 고려사 원문에는 "오늘의 죄는 강조에게 있다"고 강조를 탓하는 표현을 하는데, 이 표현은 야율융서를 기만하면서 비슷한 발언을 하는 것으로 각색해서 현종의 면전에서는 강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 현종이 개경 수호 의지를 다지고 방어 태세를 갖춘 것은 사료에서 거란군의 서경 포위 해제와 현종의 몽진 결정 사이에 떠있는 11일의 간극을 메꾸기 위한 드라마의 창작이다. 통주 전투서경 전투처럼 큰 전투를 치를 때마다 거란군의 진격이 열흘 가량 붕 뜨는 경우가 있는데, 대개 주변 거점 공략이나 현지 보급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개경 쪽에서는 서경의 상황을 지채문이 도착하고 나서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고, 지채문 도착 바로 다음날 몽진을 떠났기 때문에 드라마에서처럼 절령에서 방어 태세를 갖출 여유는 없었다.
    • 『요사』 성종 본기 기록을 보면 요 성종이 소배압과 야율분노를 보내 개경을 공격하게 하여 고려병을 만나 패배시켰고, 현종이 성을 버리고 도망가 마침내 개경을 불태우고 청강(淸江)까지 갔다가 돌아왔다고 되어 있어 거란군이 개경에서 고려군을 마주쳤음이 확인된다.[152][153] 그러나 『고려사』 기록과 비교하면 이들이 마주친 고려군은 현종 몽진 이후 자체적으로 조직된 군대였고, 그마저도 지휘관이 무단으로 높은 관직을 자칭하고 함부로 사람을 모아 적에게 내몰려다가 막상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와해되는 바람에 전쟁이 끝나고 처벌받았음을 알 수 있다.

  • 현종이 부족한 지휘관을 충당하려고 유배된 장수들을 복직시키려는 장면은 이전에 유배됐던 하공진을 염두에 둔 것이다.

  • 현종이 거란군이 밀려와도 자신은 궁에 남을 것이라고 하며 전란이 수습되거든 다른 용손에게 보위를 전하라는 조서를 남기는 장면이 나온다. 이를 포함하여 몽진 당시의 갈등은 항복 건의를 제외하면 전부 드라마의 창작이긴 하지만, 일단 강조의 종친 강화 정책에 의해 현종을 제외하고도 광종 당시 폐서인된 효은태자(동양군)의 자식들이 종친으로 복권된 상태였으므로 드라마에서 언급된 다른 용손의 존재는 있었다.[154]

  • 몽진 당시 기록이 없는 강감찬의 행적을 개경에 남아 거란군과 마주한다는 설정으로 창작했다. 현종은 2차 여요전쟁 이후 전시에 맡은 자리에서 임무를 철저히 수행한 자들과 그러하지 않고 도망한 자들에 대해 신상필벌을 확실히 했다. 몽진 당시 강감찬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전후 강감찬이 승진을 거듭하여 3차 여요전쟁까지 이끌게 된 것으로 보아 도망간 것이 확실시되는 조정의 몇몇 관리들과는 달리 무엇인가 역할을 수행하였거나 내부적으로 공을 세운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 김숙흥이 일종의 트로이 목마로 일부러 사로잡힌 후 곽주성 내부에서 몰래 호응하려는 작전을 펼치는데 사실 실제 어떻게 소수의 병력으로 양규와 김숙흥이 다수의 거란군을 상대로 공성을 펼쳐 이를 물리쳤는지는 고려사나 요사 양측의 기록이 없어서 자세히 알 수는 없다. 이 때문에 우스갯소리로 고려사에 기록된 당시 곽주에 떨어진 큰 유성으로 거란군이 큰 혼란을 겪은 틈을 노린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존재하는데, 드라마에서는 유성은 묘사되지 않았다.


3.12. 12회[편집]


  • 현종의 명에 따라 유진과 최항은 몽진 도중 헤어지는데 이유는 재상단이 한 번에 잡힐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러한 위험 요소를 없애려 한 것이라고 나온다. 다만 사서에 나온 대로 채충순은 현종의 몽진을 호종한다. 사실 원래 역사에서는 현종을 버리고 채충순 등 소수 신하 말고는 다 도주하거나 소식이 끊기는데, 본작에서는 고려 조정을 미화한 감이 있다. 이때 현종은 후비, 채충순을 비롯한 관료들, 금군 50명 등과 함께 밤중에 개경을 나섰다. 주전론을 외치던 문관과 무관들, 심지어 항전을 주장해 온 강감찬의 기록도 현종의 몽진 시기에는 사라진다. 고려사 등의 기록에 의하면 도망갔던 신하들이 모두 처벌되었는데 전쟁 전이나 후에도 기록이 보이는 신료들이 꽤 있어서, 본작과 같은 이유로 현종과 다른 길로 피신한 신하들이 있을 수도 있다. 당장 본작에서도 나오는 유진과 최항의 경우에도 전후 승진한 것으로 보아 자의로 도망간 것은 아닌 듯하며, 몽진 당시의 기록이 없기에 일부러 왕명에 따라 흩어졌다는 각색을 넣은 것으로 보인다. 강감찬은 따로 처벌을 받은 기록이 없다는 걸 감안하면 임무를 띄고 파견을 나갔을 가능성이 높다.

  • 11회 말미에서 나온 곽주성 함락이 그대로 재현되는데 양규가 야밤중에 야습해 고려군 1,700명으로 6,000명의 거란군을 상대로 공성을 펼쳐 이들을 모두 죽이고 무찌른 것은 사실이다. 다만 앞서 언급했듯이 곽주성 공략에 실제로 나선 병력들이 700명인가 1,700명인가는 좀 애매한데, 본작은 1,700명 설을 택했다. 또 본작에서는 곽주성에 있는 주민들을 통주로 옮기고 성을 불태우라고 하는데 양규 열전에서는 성 안에 있던 남녀 7,000여 명을 통주로 옮겼다고만 나온다. '곽주성에 유성이 떨어졌다.'는 『고려사』의 기록은 자칫 '양규가 곽주성을 치니 하늘이 도와 유성이 떨어져 거란군을 공격했다'는 식으로 삼국지연의 등에 묘사되는 괴력난신 전술처럼 보일 소지가 있어서 스토리라인이 망가지니 묘사 자체를 안 한 거 같고[155], 구체적으로 어떻게 재탈환했는지 남은 기록이 없는데다가 워낙 양규의 전공기록 자체가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수성군을 무찔렀다는 초인적인 기록이라 제작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양규 장군이 실제로 했을 법한 전략전술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 본작에서는 병력의 열세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불을 끈 상태서 성의 성문들을 에워싼 후 활로 성벽 위의 거란군을 저격만 하는 전술로 공격했고, 거란군이 대군이 포위했다는 착각 속에 전 병력을 성벽 위로 배치한 틈을 타 일부러 포로로 잡힌 김숙흥 및 예하 병력들이 감시병을 죽이고 포로들을 규합하여 성문을 열고 안팏에서 치는 양동작전으로 재탈환에 성공했다는 묘사를 했다. 다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재탈환했는지 남은 기록이 없어서 드라마에서의 각색이 실제로 얼마나 정확한지는 확인할 수 없으며, 곽주성 전투 과정에서 최충이 참여하는데, 실제 『고려사』 양규 열전이나 『고려사』 최충 열전에는 없는 본작의 각색이다. 다만 제작진이 최충이 단순 문신이 아니라 무장으로써 전쟁에 참여한 참전 용사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어서 최충의 곽주성 전투 참여 묘사를 넣은 듯하다.

  • 거란군에 의한 개경 약탈전이 재현되었다. 11회 부분에서도 언급되었지만 개경은 현종이 몽진한 후 남아있던 오합지졸의 급조 병력이 지키고 있다가 함락되는데, 이 점은 묘사되지 않았다. 원래 성이 이렇게 '명예롭게'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다가 함락 되는 경우에는 공격 측이 자비를 배풀어야 할 이유도 의무도 없었으며, 약탈은 지극히 당연한 권리로 여겨지는 강제조항도 넣었다. 최후까지 항복을 거부했다면, 전투 패배 후 본작 묘사처럼 성 내는 무자비하게 약탈당하고 거주민은 살해당하는 게 일반적이다. 보통, 공성추가 성문을 처음 때린 시점부터 방어측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권리가 박탈된다고 보았다. 작중 거란군이 개경을 약탈, 학살하거나 부녀자들을 약취하는 걸 진행하는데, 거란군 장군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다. 전근대 시절 저항하던 성을 함락하여 도성(屠城)하고 병사들의 욕망을 채우는 행위는 적군, 아군 모두 인정하는 승자의 권리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 거란군은 곽주가 함락됨으로써 보급선이 끊겨서 병사들을 진정시키고 물자를 끌어오기 위해 약탈을 진행한 면도 있었을 것이다. 이때 개경이 불타 고려의 본궐인 만월대도 불에 타는데, 본작에서는 아무래도 세트장에 불을 지를 수는 없었는지 개경에서의 방화 행위는 묘사되지 않았다. 『고려사』 양규 열전에 따르면 거란이 퇴각할 때 불을 질렀다고 하므로 그 때 묘사할 수도 있다.
    • 이 장면에서 풀과 나무가 우거진 장면들이 나오는데, 현종의 몽진과 거란군의 개경 함락은 1010년 음력 12월[156]로 겨울철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옥의 티'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이후 현종의 피난 행렬에서도 낙엽과 단풍, 갈대밭이 펼쳐진 점으로 볼 때 위의 약탈 장면과 마찬가지로 여름~가을철에 사전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 개경의 고려 본궐에 주둔 중이던 요 성종과 거란 신료들이 곽주 함락 소식을 듣고 동요하는데, 11회 부분에서도 나왔지만 오히려 곽주가 함락되었기에 다급해진 요 성종이 개경으로 직공을 간 것이라서 선후관계가 뒤바뀌었다. 다만 소배압과 거란 신료들이 "우리는 고려 땅이 남쪽으로 어디까지인지도 모르고 고립된 상황에서 언제까지 진격해야 하느냐, 너무 위험하니 이제라도 후퇴해야 한다."라고 진언하고 요 성종이 이를 거부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건 실제 거란군이 당시 맞닥들였던 상황을 잘 묘사한 것이다. 이후 하공진의 블러핑이 먹혔던 것도 거란이 고려의 지리를 잘 몰라 고립된 상황에서 언제까지 진격해야 하는지 알 수 없고 현종이 어디까지 도망갔는지 파악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 실제로 이로부터 수백년 전 당 태종 이세민이 요동성을 함락하고 주필산 전투에서 승전한 후 고구려의 약한 거점인 오골성을 함락하고 고구려의 도읍 평양으로 직공을 가는 안건이 제시된 적이 있었는데 당 태종의 오른팔과 같았던 장손무기가 나서서 "천자께서 직접 하시는 정벌인데 함부로 움직여선 안 됩니다. 지금 안시성을 포기하고 오골성으로 돌리면 분명 적군이 우리 뒤를 칠 것입니다. 안시성과 건안성을 먼저 함락시켜야 합니다."라고 마치 본작의 소배압처럼 만류하여 이세민이 이를 따른바가 있다. 이렇듯 원 역사에서 요 성종 야율융서의 개경 직공 자체도 비록 통주 전투에서 승전했다고는 하나 본작에서 묘사되는 바와 같이 대국 천자의 친정치고는 너무 위험했고 자칫 본인의 신상도 위태로울 수 있는 경솔한 행동이 맞았다. 때문에 거란이 마치 장손무기가 지적한 상황처럼 위태로운 보급선과 적의 후방병력을 뒤에 둔 걸 생각하지 않고 진격한 탓에 거란의 주요 적국인 송나라가 특별히 '고려의 대승'이라 기록할 정도로 후퇴할 때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 이 회차에서 강감찬이 보여준 활약(현종의 옷으로 갈아입고 도주, 유배에서 풀려나온 하공진과의 만남, 서경으로 향하는 거란의 사신을 발견하고 뒤쫓아 진실을 밝히는 장면 등)들은 모두 본작의 오리지널 각색이다. 2차 여요전쟁 당시 강감찬의 행적이 워낙 없다보니 자꾸 창작된 내용이 들어가는 감이 있다.

  • 몽진 일행이 단체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지채문이 자신이 절령을 지키지 못해서 폐하를 위험에 빠뜨렸다며 밥을 먹지 않는다. 지채문은 극중 누구보다도 강한 근왕 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대대로 이어져 증손자인 지녹연 또한 이자겸의 난 당시 인종을 끝까지 지키려 한 바 있다.

  • 충주호장 박진이 현종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며 회차 후반에 암살단을 꾸려 현종 일행을 죽이려 한다. 이것은 '박진' 문서에서도 설명되었지만, 현종이 피난길에서 만난 적도들과 중앙 정부에 적개심을 보이던 지방 호족들, 아전들의 행적을 단 한 명에게 몰아넣은 것이 박진이기 때문이다. 이때, 현종이 충주 쪽으로 몽진을 가는데 원래 역사에서는 행렬이 적성현(積城縣) 단조역(丹棗驛)에 먼저 이르렀다가 그날 저녁, 날이 저물었을 때 행렬이 창화현(昌化縣)에 이르렀던 과정에서 연이어 습격을 받은 것이다. 원 역사대로라면 충주 쪽으로는 가지도 않았다. 또 작중에서 현종 일행이 습격을 받자 호종하던 인원들이 상당수 현종을 버리고 살기 위해 도망치는데,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지만 드라마에서는 거란군이 뒤쫓는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도망쳤다. 원래는 이렇게 각지에서 고려 호족들의 습격을 먼저 받는 와중에 거란군 추격대가 쫒아와 지채문 등이 이런 고려 지방세력의 공격을 막아낸 후 추격하는 거란군을 요격하는 것이라 이것도 선후 관계가 좀 바뀌었다.

  • 거란 사신이 서경성에 현종이 죽었다는 거짓 소식을 전하며 '고려국왕이 훙서했다'고 말한다. 당시 거란 입장에서 고려는 제후국이었으므로 고려 국왕의 죽음을 가리켜 제후국의 용어인 '훙서'를 사용한 듯하다. 참고로 천자가 승하하면 이를 붕어(崩)했다라고 하고 제후가 승하하면 훙서(薨)했다고 적는다. 다만, 여기서 양규가 현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급히 서경으로 제장들을 소집해 대책을 논의하다가 거란의 사신을 맞이하고 이어서 강감찬과 만나는 장면은 본작의 오리지널 각색이다. 『고려사』 양규 열전에 따르면 양규는 곽주성을 함락시키고 백성들을 통주로 옮긴 다음 곧바로 거란군을 무로대에서 습격하여 2,000여 급을 베었으며, 포로가 되었던 남녀 3,000여 명을 되찾았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3.13. 13회[편집]




3.14. 14회[편집]



3.15. 15회[편집]



3.16. 16회[편집]



3.17. 17회[편집]



3.18. 18회[편집]



3.19. 19회[편집]



3.20. 20회[편집]



[1] 베트남 外王內帝 체제와의 비교를 통해 본 고려전기 이중 체제의 양상 (최종석, 진단학보, 2015, vol., no.125, pp. 1-38 (38 pages))[2] 최종석(2015), "베트남 外王內帝 체제와의 비교를 통해 본 고려전기 이중 체제의 양상", 《진단학보》 125; 손성욱(2021), "‘우리’의 동아시아사 깊이 읽기 - 『동아시아사 입문』 (동북아역사재단, 2020)", 《동북아역사논총》 73, pp.187~188.[3] 고려 신료들이 고려 군주를 ‘황제(천자)’임과 동시에 ‘대왕’으로 호칭하는 혼용상에 대해서는 언어 문단을 참조. 이 때문에 고려/외왕내제 여부에 관한 논쟁이 있다.[4] 소식은 송나라에 조공하러 온 고려 사신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난했는데, 그는 송-고려 관계가 트집거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점 외에 돈이 너무 많이 들어 백성들이 힘들고, 고려가 받아간 문물들을 거란에게 넘기며 말로는 송을 받든다면서 정작 실리만 챙겨가는데다가 심지어 송의 허점을 탐구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반대파로부터 그건 서하나 요나라도 다 하고 있는 것이며, 저 국가들과는 달리 그래도 아우를 자처한 고려와 관계를 끊으면 요나라가 만약 침범하려 들 때에 도움을 받을 수도 없고,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그들을 막을 방법이 없다고 하자 이러한 맹렬한 반박을 이기지 못하여 황제에게 사죄한 후 고려 사신들의 접대를 직접 하게 되었다.[5] 고려사 우왕 편에 수록된,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고려에 전한 칙서 중 하나에는 역대 중화제국이 한반도를 침공한 기록들이 나와 있다. 그 중 '요나라는 고려를 총 4차례 정벌하였으며 그 중 하나는 강조의 반역을 치죄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여요전쟁은 총 3차례지만, 중국 내부에서는 2차 여요전쟁과 3차 여요전쟁 사이의 국지전들 또는 3차 여요전쟁 이후 있었던 소규모 침공을 거란이 정식으로 수행한 고려와의 전쟁 중 하나로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요사에 의거하면, 1016년 북원추밀사 야율세량이 요 성종의 명을 받아 곽주를 크게 친 적이 있었는데 중국 내부에서는 보통 이 전투를 거란이 정식으로 수행한 고려 침공 중 하나로 기록해온 듯하다.[6] 고려는 만부교 사건 때부터 적대 관계였고 북부 지역에는 요나라에 대한 원한이 깊은 발해 유민들이 많았기 때문에 요 왕조에 완전하게 신종(臣從)하는 것은 수용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고려는 요나라에 대한 사대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기회를 보아 송과 전통적인 사대 관계를 회복해 거란을 견제하려 했다.[7] 고려·거란 ‘30년 전쟁’과 동아시아 국제질서 (육정임, 동북아역사논총, 2011, vol., no.34, pp. 11-52 (42 pages))[8] 거란 성종의 고려 친정(親征) 배경에 대한 새로운 관점- 거란의 정세 분석을 중심으로 (권용철, 동방학지, 2021, vol., no.197, pp. 1-25 (25 pages))[9] 매복 공격 장면에서 주로 등장하는데, 공중에 불화살이 올라오면서 들리는 뭔가 요란한 소리가 바로 효시를 묘사한 것이다.[10] 사극/시대극 팬 및 국궁 동호인들은 주연 배우부터 단역까지 죄다 엉망인 사법(射法)에 대해선 오히려 '활이란, 단기간에 배우기 어려운 기예'임을 고려해 관대하다. 연출/편집권을 지닌 쪽에 대한 아쉬움인 셈.[11] 투석기는 지렛대의 원리로 작동하는 "무게추식 투석기"와 "인력식 투석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중세부터 이용된 무게추식 트레뷰셋(counterweight trebuchet)이 대표적이고, 후자는 주로 동양에서 활용한 '포(砲)' 계열의 투석기들이 대표적이다. 인력식 포(砲)는 규모에 따라 5명 ~ 50명 이상의 인원이 동시에 발사 팔에 연결된 줄을 잡아당기는 것으로 돌을 던졌다. 무경총요에 따르면, 중국에서 사용된 가장 강력한 인력식 투석기(traction trebuchet, mangonel)는 57~63kg의 돌을 75미터 떨어진 곳까지 날려보낼 수 있었다. 『구당서』에 따르면, 고당 전쟁 때, 요동성을 함락시킬 때 당군이 사용한 투석기는 300근의 돌을 1리(약 390미터)나 날렸다고 한다. 한편 유럽과 중동에서 등장한 무게추식 투석기(counterweight trebuchet)는 250kg의 돌을 160미터까지 날려 보낼 수 있었다.[12] 사실 도검 패용은 조선 시대에도 활이나 조총을 쓸 때는 허리춤에 아무렇게나 꽂아 두기도 했고, 따로 다른 무기를 소지하지 않으면 손으로 들고 다녔기에 고리를 쓰지 않는 것 자체는 문제점이 아니다. 다만, 무장한 군인들 상당수가 손으로 드는 것이 어색한 것.[13] 대표적으로 6회에서 양규가 활을 쏘던 중 시위가 끊겨 활에 시위를 다시 거는 장면이 있다.[14] 고려군이 절박해서 수레라도 끌고왔나 보다는 식으로 언급한다.[15] 『육도삼략』 호도 군용편[16] 19분 39초부터.[17] 실제로 검차는 운용의 유연성이 떨어져서 잘 쓰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즈모드 제대로 자리잡아서 이론상의 장점을 뽑아내는데만 성공하면 검차는 기병에게 지옥을 선사할 수 있다.[18] 조선은 특성상 색 차이는 없으나 대왕 세종에서도 태종의 곤룡포에는 무늬가 있는 반면, 세종은 무늬 없는 곤룡포를 입었고, 문종은 다시 무늬 있는 곤룡포를 입는 것으로 보아 대를 걸러 복장을 교체하는 것은 나름 관행에 가까운 방식이다.[19] 고려도경의 원화가 모두 소실된 지금에는 상색이 어느 정도로 엷은 노란색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당나라 태종 이세민과 송나라 태조 조광윤의 어진을 보면 상당히 엷은 계열의 노란색 단령을 착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고려가 복제 또한 당 · 송의 제도를 따랐다고 가정한다면 당 태종이나 송 태조의 단령과 같은 상포를 입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20] 특히 상포에 착용하는 허리띠인 '자라늑건', 즉 자주색 옥대는 당 태종 이세민의 어진에 나온 옥대와 매우 흡사하게 재현하였다. 태종(당) 문서 참조.[21] 고려 문종이 '임금의 의복 색에 다른 사례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신하들이 '의례에 있어서는 황색, 홍색, 진홍색, 작은 모임에서는 편의대로이니, 지금 입는 황색과 홍색 이외에는 제시되어 있지 않다.'고 답한 적이 있다. 때문에 해당 색깔 범주 내에서 만들어 착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22] 고려 의복을 다루는 옛 문헌에는 절상건이라는 용어가 나오지 않는다. 당시에는 절상건이 그저 복두의 다른 말이라서 오늘날처럼 뿔이 위로 뻗은 복두를 한정하여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 오늘날 그러한 복두를 따로 절상건이라고 하는 것은 순전히 현대인의 편의에 의한 것이다.[23] 극중의 절상건은 뿔이 U자로 휘어진 국각(곡각)복두 형식을 따르면서도 위로 쭉 뻗어있는 조천복두의 형식 또한 따르고 있다.[24] 이 소품은 MBC 고려시대 사극인 신돈(드라마)에서 처음으로 등장하여 같은 방송사의 고려시대 사극인 직지, 무신(드라마)에 나왔다. KBS 대하드라마에서는 정도전, 태종 이방원에 나왔고, 제국의 아침, 천추태후 같은 이전 작에서는 형태는 같은데 테두리가 아니라 모체에 금색 무늬를 그린 소품이 나왔다.[25] 다만 외왕내제를 고수하던 고려가 중원으로부터 받은 면류관복의 양식을 내부적으로 철저하게 지켰는지는 의문이다. 의종 대 만들어진 상정고금예문에 의하면, 면류관의 류(줄)의 개수는 제후국 복제에 따라 앞뒤 각 9류로 하되 각 류마다 달린 구슬의 개수는 천자국 복제에 따라 12개씩 한다는 기록이 적혀 있어 천자국과 제후국의 복제 양식을 적절히 혼용한 것으로 보인다.[26] 지방의 무관은 뿔이 없는 무각복두를 쓴다고 하나 드라마 상황상 갑주를 착용한 모습 밖에 나오지 않는다.[27] 드라마 배역 기준으로는 정전에 백관과 나란히 입시할 정도의 지위를 가진 군인이라면 전각복두를 착용했다고 봐도 좋다.[28] "투구와 갑옷(鎧甲)은 아래위가 붙어 있는데 그 제도는 봉액(逢掖)과 같아서 형상이 궤이(詭異)하다"라고 적혀져 있는데, 이는 갑옷의 상하의가 붙어 있는 포형 갑옷이며 옆구리가 붙어 있지 않고 트여 있는 형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말선초부터 임진왜란까지 조선에서 사용된 찰갑의 구조 역시 이 설명에 부합한다. 서긍이 자신이 본 고려군의 갑옷을 두고 특별히 찰갑이라고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당대 동아시아 갑옷의 주류가 찰갑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되려 특별히 재질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점에서 찰갑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29] 개심사지 오층석탑 부조는 불교 예술품이기에 양식적인 묘사에 가깝다는 한계가 있으나, 현종이 집권하고 있던 당대에 만들어진 작품이기에 고증에 참고할 만하다. 몽고습래회사는 드라마 속 배경이 되는 여요전쟁보다 한참 뒤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워낙 시각 자료가 부족한 고려시대의 특성상 고려 무기를 고증하는 데에 있어서 핵심 자료 중 하나이다.[30] 물론 고증에 맞게 하려면 요나라 황제가 공석에서는 중국식 복식으로 나오고 사석에서는 유목민의 복식으로 나오는 게 좀 더 나을 것이다.[31] 사실 문경시 문경새재 세트장은 2000년대 초반 KBS에서 고려사 시리즈를 위해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꾸민 것이지만, <무인시대> 이후 조선시대 배경 사극 촬영을 위해 싹 바뀌었다.[32] 본 드라마뿐 아니라 옷소매 붉은 끝동, 금혼령, 조선 혼인 금지령 등 제작처를 가리지 않고 최근의 사극에서 많이 보이는 부분이다.[33] <대왕의 꿈>에서는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지 않을 때면 반드시 두건을 착용하고, 투구를 쓸 때도 먼저 두건을 착용하는 묘사가 나왔으나 이러한 묘사는 계승되지 않았다.[34] 당장 귀주 대첩의 패전 이후에도 거란 황제가 다음해에 50만 대군을 이끌고 서하 원정을 갔다는 기록이 있다.[35] 물론 이는 등장인물의 대사가 아니라 나레이션이며,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부러 이런 단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36] 허인욱(2018), "君主號로 본 고려 전기의 대외인식", 《한국중세사연구》 55, p.371.[37] 다만 황태후 또한 왕조에 따라 폐하와 전하 경칭을 혼용한 바 있다.[38] 황후에게 폐하 경칭이 쓰이게 된 것은 일부일처제가 확립된 비교적 근대의 일이다. 고대~중세에는 황제 1명에 복수의 후/비가 존재하는 경우가 잦았으므로 황후에게 폐하 경칭을 쓴다면 경칭이 남발될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극의 주인공의 현종만 해도 7명의 왕후와 3명의 귀비를 정식 배필로 두었는데, 유일하게 생전에 '왕후' 칭호를 받은 원정왕후를 제외하면 특별히 누구도 독점적인 지위를 갖지는 못했다. 때문에 황제보다 명백히 항렬이 위이자 각 1명씩만 존재할 가능성이 큰 태상황제, 태황태후(+황태후)와 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현직 황제의 후/비에게는 전하 경칭을 쓰는 것이 원칙이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직접 쓴 황명조훈에도 '황후 전하'라는 호칭이 규정되어 있다.[39] 단 조선왕조의 경우에는 국왕과 왕후의 경칭을 '전하'로 통일하였다. 왕 1명에 정실 왕후가 여러 명이 존재할 수 있었던 일부다처의 고려왕조와는 달리, 조선왕조는 왕이 오직 1명의 정실 왕후를 둘 수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후궁으로 간주하는, 즉 일부일처제에 축첩제가 가미된 방식이었기 때문에 왕후 또한 국왕과 동일한 경칭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조선 또한 왕이 정실 왕후를 여러 명 둘 수 있었다면 왕후에게는 전하보다 한 단계 낮은 '저하' 경칭을 붙이는 것이 예법상 옳았을 것이다.[40] 실제로 조선은 주상(국왕)과 중궁(왕후), 왕대비, 대왕대비에게 모두 '전하' 경칭을 붙였으며 동시에 5명의 '전하'가 존재한 적이 있었다. 그때가 바로 조선 성종 대와 고종 대인데, 성종 대에는 성종(주상), 왕후 한씨(중궁), 대왕대비 정희왕후(세조비), 왕대비 소혜왕후(의경세자빈), 왕대비 안순왕후(예종비) 이렇게 5명이 동시에 전하로 불렸고, 고종 대에는 고종(주상), 왕후 민씨(중궁), 대왕대비 신정왕후(효명세자빈), 왕대비 효정왕후(헌종비), 왕대비 철인왕후(철종비) 이렇게 5명이 동시에 전하로 불린 바 있다.[41] 고려는 '폐하', '전하', '저하', '각하'의 경칭이 존재하였으며 조선은 '전하', '저하', '각하', '합하'의 경칭이 존재하였다. 본디 '저하'는 고려 전기 공작이나 후작위에 있는 이성 제후에 대한 경칭이었으며 최충헌 등이 '영공 저하'로 불렸다. 다만 원 간섭기를 거쳐 제후국제로 전환, 폐하라는 경칭이 사라졌으며, 경칭의 등급 또한 기존보다 한 단계씩 격하되어 기존에 왕후, 태자 등의 고위 왕족을 호칭할 때 쓰던 전하 경칭은 대비, 왕, 왕비에 대한 경칭으로 자리잡았으며, 공작 또는 후작위에 있는 이성 제후에 대한 저하 경칭은 세자를 비롯한 차등급 정도 되는 왕실 일원에 대한 경칭으로 자리잡게 된다.[42]고려사』 및 『고려사절요』에는 태조 대부터 고려의 군주를 '성상' 또는 '주상'으로 불렀고, 군주 또한 태조 대부터 원종 대까지 자기 자신을 '짐'으로 칭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사』의 제신 열전에서는 문종, 예종, 그리고 인종을 '폐하', 예종 9년의 기록에서 예종을 '성상 폐하'로 불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사』에 의하면 무신정권 당시의 임금 중 의종, 명종, 그리고 고종은 '폐하'로 불렸다는 점을 볼 수 있다.[43] 아울러 김부식의 「진삼국사기표」나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전집 등의 다른 기록에서도 고려의 군주를 가리켜 '성상 폐하'로 쓴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44] 하지만, 고려사고려사절요 같은 사서들에서 확인되는 호칭 사용 건수를 보자면 '왕'이 압도적으로 더 많이 쓰였으며 개서 가능성이 없는 고려시대 당대의 금석문들에서조차도 '왕'이라는 호칭이 훨씬 더 많이 쓰였다고 한다. 다만, 사서들에 한정해서는 개서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실제로 조선 전기 고려사 편찬 과정에서 고려의 '황제', '천자'라는 용어가 들어간 자료는 가능하면 선택하지 않고, 불가피하게 선택될 경우 해당 용어를 '왕'으로 개서하거나 부분 삭제했으며, 이러한 개서 과정 자체를 언급하는 것을 금기시했다는 연구도 어느 정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45] 고려 전기를 다룬 KBS 대하드라마 중에서는 태조 왕건, 제국의 아침, 무인시대, 천추태후(드라마)가 '황제 폐하' 호칭을 사용하였으며 타 방송사의 고려사 드라마 중에서는 무신(드라마), 빛나거나 미치거나(드라마),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가 '황제 폐하' 호칭을 사용하였다. 열거한 드라마들에서는 재위 중인 고려 국왕뿐만 아니라 선대 고려 국왕들 또한 일관되게 황제로 호칭하였다.[46] 단, 무인시대에 한해서는 '황상 폐하'라는 호칭이 '황제 폐하' 호칭보다 더 많이 사용되었다. 다만 이것은 무인시대를 집필한 유동윤 작가 개인의 설정이며 그 의미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태후 폐하'라는 호칭을 처음 시도한 작가 또한 무인시대의 유동윤 작가이다.[47] 극내에서 김치양은 고려 성종을 언급하며 '성종대왕' 호칭을 쓰기도 하고 '선제'라는 호칭을 쓰기도 한다. 동일인의 대사에서도 선대 군주에 대한 호칭이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용어가 통일되지 않은 고려 전기의 국체를 고증하려고 한 제작진의 의도를 알 수 있다.[48] 조선 사관들에 의한 개서의 여지가 없는 금석문이나 비문 같은 경우에도 고려가 일관성 있게 황제국적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와 있다.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1025)의 비문을 보면 '광종대왕이 황위에 올랐다' 식의 사용례가 나오는데 이렇게 대왕호와 황제호를 혼용한 사실을 통해 당시 고려 왕실이 사용한 용어 자체가 썩 일관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49] 대내 방면으로 ‘대왕’과 황제적 용어 사이에서, 현란함과 별개로 급의 차이가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삼국시대의 '태왕'호를 대왕호의 상위라고 보긴 하지만, 원래 태()와 대()는 별개의 글자가 아니라 대(大)가 특정 상황에서 태()로 읽히는 경우를 표시하기 위해 표점을 찍은 것이 그대로 별개의 한자로 분리된 경우로 한국사에서는 조선시대 전까지 혼용되었다. 로마자다이어크리틱이나 키릴 문자Ё 용례와 비슷하다. 문제는 당시 사람이 아니면 문자적으로 나타나는 大의 의도된 발음이 대 또는 태인지, 그것이 정확히 어떤 의도에서 사용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일반적으로는 금석문의 신뢰성이 서지류보다 높다고 보지만 太와 大는 마멸되면 오히려 구분이 어려워져서 한 금석문 안에서도 분명 고유 명사로서 같은 발음과 용법인 게 분명한데 어느 부분은 太로, 어느 부분은 大로 판독되는 경우도 있다. 고려시대 자료에는 삼사, 태위 같은 관직이나 태자의 태(太)를 대(大)로 쓴 것이 많고, 고려사에는 반대로 추존 대종의 시호에 태왕이라고 되어 있어 혼용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50] 동덕여대 최종석 교수는 일련의 연구 끝에, 고려 전기 황제국 용어들은 어디까지나 군주를 높이는 존군 차원에서의 미칭이며 중국과의 대등의식이나 외왕내제적 목적의식 또는 황제 제도↔제후 제도의 이항대립 없이 사용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또한 고려전기 외왕내제의 이중 체제를 전론으로 다룬 연구가 그 동안 전무했으며, 고려전기 국제에서 ‘황제 제도가 위주가 되고 있었다’라는 우리 시대의 언설은 고려전기의 국제를 황제국 체제로 보는 연구에서 암묵적으로 전제 되었을 따름이어서, 이러한 전제가 성립·기능하였음을 구체적으로 규명한 연구 성과는 아직 이루어진 바 없다라는 지적을 하였다. 하지만 서울대 노명호 명예교수나 서울시립대 이익주 교수 등의 선행 연구처럼, 당시 고려 왕실이 외왕내제라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황제국 용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은 여전히 통설로 여겨진다. 본 드라마에서는 통설에 따라 고려를 '자주적인 황제의 나라'로 설정하고 있다. 관련한 내용은 고려/외왕내제 여부 문서를 참조.[51] 후계자의 위상은 중국사에서는 명나라, 한국사에서는 조선 이전까지 아무리 높아봤자 결국 종친의 하나로 신하의 분수에 국한되었고 다른 종친과도 구분한 역사는 그렇게 길지 않다.[52] 중화제국의 경우 일관되게 '전하' 경칭을 받은 황후와 달리, 태후의 경우에는 왕조에 따라 '폐하'와 '전하' 경칭을 혼용한 것으로 나온다. 한나라와 후한, 서진, 동진의 경우 '태후 폐하', 당나라의 경우는 '태후 전하'라고 불렀고, 그 뒤를 이은 송나라는 '태후 폐하'라고 불렀으며, 이민족 국가인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의 경우 '태후 전하'라고 불렀다. 훗날 등장한 명나라의 경우에는 '태후 폐하'라고 불렀고, 중원의 마지막 왕조이자 이민족 국가인 청나라에서는 '태후 전하'로 부르는 등, 황실의 큰어른인 태후에 대해서는 왕조에 따라 경칭의 차이가 있었다. 이유는 태후 또한 황제의 신하 중 한 명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황제와 동등하거나 상위의 위치라고 보아야 할 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였기 때문이다. 중화권 왕조와는 동떨어진 일본의 경우에는, 태후와 황후에게는 전하로 호칭하고 오로지 천황에게만 폐하로 호칭하다가 메이지유신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셋의 경칭을 폐하로 통일하였다.[53] 고려전기 사극 중, 고증에 맞추어 황후(왕후)에게 '전하' 경칭을 사용한 것은 본작이 최초이다. 이전 고려전기 사극들에서는 대부분 황후에게 '마마'로 호칭했으며, 전작 중 고증이 잘 되었다고 평가받는 무인시대 또한 황후에게 '폐하'로 호칭하는 오류를 범했다. 태후의 경우 한자문화권 국가의 왕조에 따라 '폐하'와 '전하' 경칭을 혼용하였지만 황후(왕후)는 중국이나 한반도, 일본 모두 일관되게 '전하'로 호칭하였다. 동아시아에서 황후가 '폐하' 경칭을 받게 된 것은 무려 19세기 후반의 일이다.[54] 이는 상록수 같은 근대 문학이나 기록은 물론 서울, 1964년 겨울 같은 현대작에서도 찾을 수 있다.[55] 물론 정식 공문서인 조서에서는 짐이라는 자칭을 사용한다.[56] 보통 신라/고려의 다른 여러 고승비는 최치원, 최언위한문 문장을 잘 쓰는 신하에게 쓰라고 시켜서 '신하된 누구누구가 왕명을 받아 썼다'라는 식으로 시작하는 반면 이 비문은 임금이 직접 지어서 더 설명할 필요가 없으므로 내가 지었다고만 썼다.[57] 조선 정조가 작성하기 시작한 국정일기인 일성록은 왕의 일기답게 왕을 1인칭으로 기재하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과인'이 아닌 '나(予)'를 1인칭 대명사로 썼다.[58] 국가와 군주를 분리해서 보는 방식 자체는 당대에도 있던 것이라 국가에 만세를 바치는 것이 군주에 대한 것과 동일시될 수는 없다.[59] 원사에 따르면, 강화에 머무를 때는 만세를 불렀는데 자신의 시대에는 천세를 부른다는 충렬왕의 말이 나온다.[60] 이와 같은 방법은 고려 말기 공민왕이 우왕에게 강릉대군(강령대군) 작위를 세습하는 것으로 되풀이된다. 공민왕의 강릉대군 작위 또한 부왕인 충숙왕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61] 이 때문에 요나라는 현종을 목종의 친척 형뻘로 인식했다.[62] 이 주(主)라고 하는 표현은 오늘날 군주 용어의 쓰임과 같은 것으로, 대표적으로는 중국 삼국시대촉한 군주를 한주(漢主)라고 지칭하는 것이 있다.[63] 외국인 배역이 외국어만 사용하고 통역을 배치하는 연출은 대개 극의 전개상 외국인 배역의 비중이나 중요도가 낮은 경우에 사용되어 왔다. <징비록>에서는 조선과 일본 배역의 비중이 엇비슷해서 일본 배역의 대사가 한국어로 처리됐다. 본작 역시 거란 배역 비중이 크기에 외국어 처리를 별도로 하지 않고 드문드문 사용한다.[64] 언어 외에도 몽골의 전통 창법인 흐미를 거란측 OST에 사용하고 있는 것 또한 이를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65] 김인희(2020), 『움직이는 국가, 거란』[66] 뛰어난 전투력으로 오스만 제국, 폴란드, 러시아를 상대로 혁혁한 전과를 올렸고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 때 주역이 되었지만 대규모 회전과 같은 정규전에서는 쥐약이었던 유목집단 카자크와 같이 아무리 삶이 전쟁인 유목민이라도 제대로 된 훈련이 없으면 정규전의 군대로서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67] 요측에는 발해상온 고청명이 3차 여요전쟁에서 전사했고, 고려측에는 대도수가 2차 여요전쟁 당시 실종되었다.[68] 서경대동부는 성종 다음 황제인 흥종대에 승격되었다.[69] 고려 이후 조선에서도 '강무'라고 하여 사냥 겸 군사 훈련을 진행하기도 했다.[70] 여기에 방어군 측은 자국에서 부여한 권한을 넘어선 물자 조달이 약탈로 간주될 수 있다[71] 다만 본작에서는 타초곡을 설명하면서 "사람"을 강조하고 그 참혹함에 현종이 경악하는 묘사에 초점이 맞춰진다. 이로 미루어 보면 세세한 고증보다 직관적인 잔혹함과 전쟁의 비극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일 수도 있다.[72] 유목민이기 때문에 이동할 때는 말을 타고 이동하고 싸울 때만 말에서 내려 싸우는 승마보병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73] 기병으로 유명했던 몽골 제국도 보병은 운용했다.[74] 비슷한 시대를 다룬 천추태후에서도 이 두 사람이 언급되었지만, 반란과 관련해서는 통편집되었다.[75] 가장 대표적인 것이 23년 전 방영된 태조 왕건에서 궁예의 부인이던 강비와 왕건의 부인이던 신의왕후, 장화왕후, 신명왕후의 이름을 극중 창작으로 정했다고 나레이션으로 밝혔다.[76] 예를 들어 삼국지에 등장하는 손부인의 본명이 알려지지 않았기에 손상향이나 손인같은 이름을 임의로 붙인 사례나, 여씨에게 여령기여금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 등등.[77] 일반적으로 유약하고 무력한 군주로 인식되는 고려 목종이나 조선 순조는 멀쩡한 왕권을 누렸다. 전제군주정 체제 하에서 왕권이 약한 군주는 사치스럽거나 방탕한 생활을 할 수 없다. 가만히 있는 것이 군주의 업무이고 존재의의라서 명예적으로 돈을 퍼 주는 입헌군주국과 달리 전제군주정에서 군주가 사치하고 방탕할 수 있는 재력은 결국 군주 본인이 쥔 권력에서 나온다. 때문에 왕권이 약한 군주, 일례로 고려의 공양왕이나 조선의 철종은 성실하다고 보긴 어렵더라도 방탕함과는 거리가 먼 조용한 삶을 살았다.[78] 야사에는 당시 신혈사 주지였던 진관스님이 던졌다는 이야기도 있다.[79] 요사 성종 본기 5권. 통화 26년(1008년) 겨울 10월 1일. 중경에 행차하셨다(冬十月戊子朔, 幸中京) 통화 27년 봄 1월, 요하에서 낚시를 했다(二十七年春正月, 鉤魚土河)[80] 실제 역사에서는 명령없이 군사를 이끌고 왔고, 예상과 달리 개경이 평온하여 반역죄로 여겨질 수 있다는 점이 강조가 목종을 폐위하게 된 원인이 되었지만, 극 중 상황이라면 강조가 반역자로 여겨질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81] 오늘날의 파주시 적성면이다. 파주가 개성 바로 옆동네인걸 생각하면 정말로 개경을 나오자마자 살해된 것이다.[82] 강조는 반역 열전에 이름이 올라간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사료에서는 망설였다는 기록이 제법 있다. 물론 현종을 옹립한 인물인 만큼 의도적으로 그에게 어느 정도 좋은 이미지를 주려고 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반면 본작의 강조는 능동적으로 반역의 의지를 굳힌 후로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면모가 강하다.[83] 중추원, 은대 '등'이라 하여 뭉뚱그린 이유는, 중대성으로 통합된 3관을 고려사에서는 '중추원과 은대남북원', 고려사절요에서는 '은대중추남북원'이라고 하는 문구의 해석을 두고 말이 많았기 때문이다. 고려사절요의 국역에는 '중추남북원'을 중추남원, 중추북원이라고 해석했으나 고려사에서는 '은대남북원'이라는 문구 앞에 중추원이 별개로 떨어져 있어서 둘의 내용이 다르므로 중추원이나 은대 중 하나가 남북으로 나뉜 형태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중국의 궁궐 업무 보조 기구 중에는 선휘원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형식적으로 남북원으로 나뉘어 있었고, 7대 목종 전시과에는 선휘 계열 관직의 녹봉이 규정되어 있는 반면 비서 기구 통합 이후의 11대 문종 전시과에는 사라져 있기 때문에 대체로 남북원은 선휘원의 다른 이름이라고 보는 편이다. 그러나 고려사 백관지에 선휘원 또는 남북원에 대한 내용이 없고, 목종과 문종 사이의 9대 덕종 때의 예법 규정에는 선휘사라는 관직에 대한 내용이 있어 연원과 운영 형태 및 존폐 여부가 분명하지 않으므로 일반적인 경우에는 언급 자체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한편, 고려와 마찬가지로 거란 또한 송나라 제도를 따와 추밀원을 설치하였으나 유목과 정주 이원 통치 체제에 따른 북·남면관 구분의 영향으로 북추밀원과 남추밀원으로 나뉘었고 기능도 고려와 달리 최고 정무 기관이었다. 요나라/행정 제도 문서 참조.[84] 원정황후의 어머니인 문화황후는 김원숭와 왕씨부인의 딸이며 원화황후의 어머니인 연창궁부인은 최행언과 김씨부인의 딸로, 고려 왕실과는 무관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문화황후의 경우 어머니 화의군대부인이 왕씨로 기록되어 있어 모계 쪽은 왕가일 가능성도 존재하지만, 국초의 왕가 여인들은 왕씨가 아닌 외가의 성을 따르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왕씨로 기록된 화의군대부인은 왕가 여인이 아닌 왕씨 성을 하사받은 공신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85] 목종 사후 남은 태조의 후손은 천추태후와 현종, 원정황후-원화황후 자매, 원용황후, 효은태자의 아들들이 전부였다. 다만 효은태자의 아들 2명은 거의 족보에서 파인 수준이었으며 천추태후 또한 황주로 유배가게 되어 제대로 된 왕족 대접을 받는 태조의 후손은 현종, 원정황후-원화황후 자매, 원용황후 이렇게 4명밖에 없었다. 물론 실제 역사에서 강조가 효은태자의 아들들도 모두 찾아 종실에 복권시켜주며, 천추태후 또한 현종 말년에 개경 숭덕궁으로 돌아와 왕족 대우를 받으며 말년을 보냈다.[86] 실제로 이자겸이 자신의 딸이자 예종의 두 번째 왕후인 문경태후를 황후로 칭한 부분이 『고려사』에 그대로 남아 있으며(관련 내용), 최계방 묘지명에 최계방의 이종사촌 누이이자 숙종의 왕후인 명의태후를 황후로 칭한 부분(관련 내용)이 있다. 아울러 야사 성향이 강한 『삼국유사』에 경순왕 김부의 딸이자 경종의 첫 번째 왕후인 헌승왕후를 황후로 칭한 부분(관련 내용) 또한 있다. 이에 대해서는 조선시대 사관들이 고려의 황제국 칭호 사용례를 개서하려고 했으나 미처 개서하지 못한 흔적들이 남아 있다는 주장 또한 존재하나, 실제 조선시대 개서가 이루어지지 않은 고려시대 금석문 자료들에서도 '황후'라고 지칭된 경우는 1건(최계방 묘지명)에 불과할 정도로 애초에 비공식적인 표현이었다는 주장 또한 존재한다.[87] 선대 황제인 목종의 어머니인 헌애황후(천추태후)와 현종의 어머니인 헌정황후, 그리고 원정황후-원화황후 자매의 아버지인 성종은 친남매지간이다.[88] 현종은 조부인 태조 왕건 다음으로 많은 황후와 후궁들을 두었으며, 정식 황후만 정확히 7명이다. 그 중 황후 2명이 성종의 딸, 다른 황후 1명(원용황후)는 성종의 조카이며, 나머지 안산 김씨 황후 3명은 5회부터 등장하는 김은부의 딸들이며 이천 서씨 황후 1명은 서희의 손녀이다. 심지어 현종의 5비이자 성종의 조카인 원용황후는 그 부모 또한 고려 왕족끼리 혼인한 용손이었다.[89] 해당 장면은 무인시대 후반부에 나온다.[90] 후대에는 조선 건국 이후 조선 태조가 명나라 홍무제에게 조선국왕으로의 책봉을 요구했으나 명나라는 책봉은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조선국왕이라고 부른 사례가 있었다.[91] 이후 작중에서도 포로로 잡힌 강조에게 한기가 살고 싶으면 성종에게 대답을 잘 하라며, 성종은 역신 강조를 처단하기 위해 고려에 왔음을 상기시키기도 했다.[92] 삼국지로 치면 유선제갈량이 북벌할 때와 이릉대전석정 전투에서 손권육손에게 마찬가지로 황월을 전해주는 장면을 생각하면 되며, 본 드라마 이후의 고려시대를 다룬 정도전에서 최영공민왕에게 수여받은 부월(황월)을 손에 쥐고 새로 등극한 우왕을 접견하는 장면이 있다.[93] 후에 여진정벌 실패의 책임으로 귀환 도중에 부월을 회수당하고 근신한다.[94] 이런 군 지휘관에 대한 부월 하사는 조선 왕조에서도 이어져서 선조서산대사에게 부월을 내린적이 있고 인조도 부월을 내렸다는 기록이 인조실록에 있다.[95] 고구려 성들이 를 두르고, 신라 삼년산성성문들이 각양각색의 구조를 가진 것에 비해 효율적이고 단순한 구조이다.[96] 나폴레옹의 보급은 현지인에게 언제까지 물품 가격을 치루겠다는 증명서를 주고 보급품을 가져가는 일종의 징발이었지만, 현지인 입장에서는 총칼을 들이민 뒤 같잖은 종이 쪼가리 하나 던져주고 빼앗다시피 하는 그냥 약탈이나 다름없었다. 반면 나폴레옹의 라이벌인 영국군은 넘쳐나는 돈으로 현지인에게 보급품을 구매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97] 철도가 일반화되어 아주 낮은 운송비로 전선까지 물자를 전달할 수 있게 되기까지, 민간 취락의 약탈이나 징발, (좀 온건한 사령관이나 상태가 비교적 좋은 군대, 지역의 경우) 지역 상업망을 통한 구매나 '좋은 말로 달래어 현지의 협조를 얻는 것'까지를 포괄한 '현지 보급'은 군대의 보급품 수급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손자병법』에서는 '적의 식량 한 승(10섬)을 먹는 것은 보급으로 식량 스무 승(200섬)을 먹는 것과 같다.'고 평했고, 『사기』 '주보언 열전'에서는 본국에서 192곡을 보내야 1석이 도달하는 현실에 대해 강변했다. 보급에 나선 말이나 소, 사람도 밥을 먹어야 움직일 수 있는 존재이므로, 아무리 많은 식량을 준비한들 전쟁터에 도달하는 식량의 양은 대단히 적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98] 최악의 경우엔 강제적인 청야에 불만을 품은 지역들이 침공군에 협조할 가능성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조조가 전쟁에서 적의 공세를 막기 위해 했던 필살기 중의 하나 현지 조달을 취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미에서 접경지역을 청야로 초토화하고 해당 지역의 인구를 모조리 소개하는 청야전술이었다. 관도대전에서부터 원소를 막기 위해 대규모 청야를 실시한 조조는 남부의 위협적인 적인 손권유비의 공세를 상대하기 위해서도 각각 적벽대전한중 공방전의 패배 이후 회남한중 일대에서 대규모 청야와 소개를 진행한 바가 있다. 이는 합비에서 손권을, 옹양주에서 제갈량을 좌절시킨 원인이기도 했지만, 이에 불만을 품은 회수 이남의 수십만 백성들이 조조에게 등을 돌리고 손권에게 귀부하여 회남은 회남대로 황폐해지고 손권 좋은 일만 시켰던 적도 있었다.[99] 고려와의 전쟁 이전에 요 성종은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몇 번 친정한 적이 있지만 이때는 승천태후가 최고 결정권자였다.[100] 손자병법에서도 성을 공격하려면 최소한 3개월의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고 할 정도로 공격자의 입장에서 많은 부담을 안는 전투가 바로 공성전이다. 더군다나 작중 묘사되는 흥화진은 한국 특유의 산성으로 묘사되는데, 이러면 평지 성보다 더 공략이 어렵다. 소배압이 무리해서 성을 공략하기보단 압도적인 물량을 이용해 고려군에게 먼저 피로를 가중시키라고 조언한 것도 이런 이유인 것이며, 양규를 비롯한 고려군은 요군의 파상 공세 때문에 일주일 만에 극심한 피로에 빠지게 된다.[101] 조선의 경우만 해도 건국 초기 정도전 등이 주도한 진법훈련 체제가 이미 태종이나 세종 무렵부터 와해되기 시작해서 정예보병인 팽배수가 점점 약화되었고, 이 때문에 조선 세조궁기병 위주의 체제로 군사체제를 재정비한 바가 있다. 세조가 궁기병이나 궁시만 중시했다고 오늘날 욕을 많이 먹긴 하지만 세조 나름대로는 평화시대에 돌입하면서 점점 약화되는 조선의 군사력을 유지하려는 고육지책인 면도 있었던 것이다.[102] 제3차 여요전쟁에서 거란군이 고려 주력군을 격파하지 못해 결국 개경 코앞까지 와서 돌아가야 했던 상황과 대비된다.[103] 이들이 이런 전투마차의 약점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부연 설명을 좀 하자면 마륭의 경우엔 진무제 사마염이 내려준 풍부한 군자금을 사용하여 강한 정예병을 뽑아 조련하고 튼튼하고 강력한 무기, 특히 강노같은 강력한 투사무기를 많이 동원하고 물자 보급을 풍부히 하는 것으로 해결했고 얀 지슈카의 경우엔 병력의 질은 훨씬 떨어졌지만 기존 투사무기보다 사용이 그나마 쉬운 화약무기, 핸드캐논 등 강력한 투사병기를 보유하여 사용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긴 했다. 즉 이런 종류의 전투마차를 사용하려면 최소한 아군의 투사무기가 매우 강력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작중 등장하는 고려군은 기초적인 방진 훈련부터 전쟁중에 해야 할 만큼 숙련도가 몹시 떨어지는 걸로 묘사되는데 이 정도라면 투사무기 같은 무기술의 사용에서도 문제가 생길 확률이 높다. 고대부터 중세까지의 궁수는 대부분 숙련병이며 활 자체가 숙련하기 어려워 장기적으로 육성해야 하거나 생업으로 활을 사용하는 사냥꾼을 차출해서 운용하는 병종이었기 때문이다.[104] 이걸 작중에서 시청자들에게 강조할 필요가 있었는지 중간에 '흥화진이 최대한 버텨주면서 징집병들은 그 사이에 훈련하고 교전준비 마치게끔 시간을 끌어주기만 해도 대성공'이라고 현종에게 조정 신료들이 브리핑 하는 장면도 나온다.[105] 고대로부터 전투수레는 기병이 부족하거나 보병의 방진 훈련이 엉망인 군대가 사용하는 미봉책에 가까운 것이었다. 모루가 될 수 있는 보병의 숙련도가 떨어지고 적 기병을 견제할 기병도 별로 없어서 이동형 차폐물을 만들어 적 기병의 접근을 막고 투사병기로 원거리에서 적을 요격하는 방식이다. 이 경우 상대의 공격 방식에 따라 방어 전략을 짜야 하므로 전투의 주도권은 적에게 넘겨주게 되며, 크고 무거운 수레를 사용하기에 진형을 짜고 바꾸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서 유연성이 부족하다. 때문에 상대가 변칙적인 공격을 하는 경우에는 대처하기 힘들고, 포위되거나, 대포처럼 더 먼 거리에서 강력한 피해를 줄 수 있는 투사병기의 과녁이 될 위험도 있었다.[106] 이 발언과 관련해 마키아벨리군주론에서 한 말들과 유사하다는 의견이 있다.[107] 1회에서 서역 상인들이 저잣거리에 보이는 등 교역이 활발하다는 묘사가 있다.[108] 원작자인 길승수 작가도 다큐멘터리와 드라마 제작에 관여하였으므로 해당 묘사가 나왔다.[109] 이는 1일차에 보병대가 성벽에 접근하다 미리 설치해 놓은 함마갱에 걸려 양규에게 발각된 장면으로 다시금 강조되며, 현대전에서도 경계나 수색, 매복시 유용하게 사용된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는 공성전이 낮에 벌어지는데다 성 밖은 특별한 지형지물이 없는 개활지라 이를 응용할 방도가 없기 때문에 채색한 돌을 기준 거리마다 배치하여 사거리와 무기를 조정하는 묘사가 나왔다.[110] 고대, 중세의 공성전과 달리 근대의 공성전의 난이도가 상대적으로 내려간 것도 투석기보다 압도적으로 강력한 화력의 화포가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화포에 대항하기 위해 성형 요새가 등장하기도 했다.[111] 민가를 박살내는 장면에서는 엄청난 파괴력을 보여주어 그 위력에 질린 백성들이 공포에 질려가는 모습을 묘사했고, 양규와 흥화진 수비군은 대조적으로 요군의 포탄 공세에 침착히 버티는 의연함을 보여주었다.[112] 이전 작품인 정도전에서는 남원을 침공했던 왜구가 이성계를 도발하기 위해서 비슷한 방법을 사용한 것으로 연출했다. 후대의 몽골 제국군 또한 수성군의 사기를 꺾기 위해 잔혹한 짓을 하거나 포로를 화살받이로 썼고, 시체를 회회포로 상대 진영에 날려 보냈다. 특히 후자의 방식은 유럽 원정 도중 몽골군 내에서 흑사병이 돌자 흑사병에 걸려 죽은 시체들을 시신 처리도 할 겸해서 날려 보낸 것이 유럽 전역에 흑사병이 퍼지게 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고 알려지기도 했다.[113]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다큐멘터리 평화전쟁 1019에 관련 묘사가 있다.[114] 비슷한 시기를 다룬 평화전쟁 1019에서는 다큐멘터리라서 역사를 그대로 반영해 거란군이 고려군 앞에서 백성들을 무참히 학살하자 양규가 차마 이를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리는 장면이 있다.[115] 비유를 하자면 전쟁으로 군비가 확장되며 국가직 공무원들의 월급이 밀려버린 것으로 국무를 보는 이들에게 월급을 못 준다는 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전문 인력들이 돈 못받는다고 아예 자리를 박차고 나가거나 최소 태업만 해도 국정이 제대로 돌아가는게 불가능해지기 때문.[116] 공성전에서 공격 측은 노병보다는 궁병이 낫다. 노병은 장전까지 혼자할 경우 궁병보다 연사속도가 느리고 더 지치기 쉽다. 그걸 보완하기 위해 보조 인원을 붙이면 가뜩이나 자리를 차지하면서 수비 측보다 사거리나 위력은 짧다. 차라리 혼자 지칠 때까지 쏠 궁병이나, 말의 운동에너지로 사거리와 위력을 더할 궁기병의 엄호가 성벽을 오를 근접병과에게 더 낫다.[117] 노병은 시위를 당기는 제1장전수 1인, 화살을 매기는 제2장전수 1인, 사수 1인의 3인 1조로 연사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물론, 수성전에서는 사수를 제외한 장전수 역할을 민간인들이 맡을 수 있다. 같은 주제를 다룬 JTBC다큐멘터리에서 흥화진 전투의 묘사에 다양한 노병이 등장하기도 한다.[118] 이성계는 2차 요동정벌을 반대하면서 그 이유로 사불가론을 주장했는데 그중 네번째가 '때가 장마철이니 활의 아교가 녹고 군대에 역병이 퍼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 시대에는 활에 옻칠을 하면서 최대한 습기에 대한 대비를 하고, 아예 장마를 대비해 습기에 강한 다른 종류의 예비 활도 구비했다고 한다. 현대처럼 자동으로 온도와 습도를 조절할 수 있는 기계가 없던 과거에는 건조한 온돌방에서 활을 보관했다고 한다. 여기서 "마누라는 윗목에서 재워도 활은 아랫목에서 재운다"라는 속담도 생겨났을 정도다.[119] 다만, 장력이 매우 약한 30파운드 안팎의 활을 준비한 것인지 성인 남성인 배우가 시위를 빠르게 여러 번 당겨대는 모습이 조금 방정맞게 보이는 문제는 있다. 물론 안전상의 이유 등으로 흔한 5~60파운드 활로 촬영하기는 어려웠을 듯.[120] 그 망작 드라마라는 옛날 연개소문에서도 마갑 부분은 그럴듯하게 구현된 적이 있는데, 이걸 고려하면 아쉬운 부분이다. #[121] 이 때문인지 HBO 드라마 ROME에서도 로마군의 지휘체계에 호루라기가 쓰이는 묘사가 있다.[122] 삼국지에서도 유봉맹달이 고취, 즉 군악대를 두고 갈등을 빚는 장면이 나온다.[123] 일본의 투석병을 '츠부테'라고 하는데, 센고쿠 시대의 기록을 보면 한 전투에서 사상자의 과반수가 츠부테 투석병에 의해 난 경우도 더러 있다. 이들은 센고쿠 시대가 끝나는 무렵인 16세기 말을 기점으로 쇠퇴하여 에도 막부 시대에 걸쳐 없어지는데, 조총의 대량 보급과 전투가 없어짐이 대표적인 이유다.[124] 조선 시대에는 일종의 민방위 편제에서 항시 고려되는데, 삼포왜란 때 안동의 유명한 석전 프로들이 용병으로 고용되어 막대한 전공을 올린 기록이 있고, 임진왜란 전반에도 일본군을 상대로 활약했다. 행주 대첩에서도 전투 후반에 화살이 떨어지자 투석을 시행하였고, 진주대첩으로 유명한 진주시에는 돌팔매꾼 조씨 전설도 구전되고 있다. 이후 조선에 조총이 들어오자 군에서의 투석 사용은 쇠퇴하고, 민간에서만 전해지다 일제강점기에 사멸한다.[125] 실제로는 '입 안의 음식물처럼 적으면 만족스럽지 않으니 적이 계속 들어오게 하라'는 발언이다. 물론 작중에서는 음식물 이야기는 빼고 보다 완화한 대사로 표현하였다.[126] 고려사의 설명은 간단한 편이지만 이때 고려군이 입은 피해 묘사로 보면 거의 삼국지에서 장료손권의 진영을 돌파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127] 실제로 드라마에서는 야율분노가 소배압 몰래 길목을 찾아 별동대를 운용하여 기습한 것이므로 규모가 크진 않았을 것이다.[128] 원작인 고려거란전쟁 소설에서는 통주-삼수채 전투를 비롯한 주요 전투들은 고려군과 거란군 장수들이 치열하게 머리싸움을 하는 장면이다.원작 묘사[129] 현실적인 부분을 고려한 각색으로 생각되는데, 기병대가 방진을 부수는 장면을 영상으로 묘사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며, 특히 검차와 같이 마차로 구현하는 경우 더욱 그렇다. 또한 사료에 묘사된 대로 강조의 방심을 표현하려면 여러번 전투가 있어야 하며, 또한 초반부터 잡힌 강조의 캐릭터성을 희생해야 했다. 이를 설득력있게 표현하려면 상당한 예산과 시간이 들어갈 터인데, 드라마 대조영에서 초반 안시성 전투에서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예산부족으로 중요한 천문령 전투를 제대로 묘사할 수 없었던 일이 있었던 KBS로는 패배한 통주전투에 많은 예산과 시간을 할당하기 부담스러웠을 것이다.[130] 사실 목종 역의 백성현을 두고 이미 제작진 측에서 특별출연한 해당 배우에게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넣은 적이 있어 목종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긴 했다. 또한 실제 역사에서는 본인이 반역죄로 죽지 않기 위해서 반역을 일으킨 강조와 다르게, 해당 작품에서는 강조가 자신의 의지로 반역한 것으로 나와 목종에 대한 죄책감도 실제 역사보다 적었을 것이므로 이 장면을 넣기에 어색하긴 한다.[131] 소배압이 '적이 알아서 성 밖에 다 나와 있는 상황에서 대회전으로 일거에 적을 전멸시키지 못하고 다 쫓아 버렸으니 이제 도망친 고려군이 죄다 성에 틀어박힐 것이 뻔한데, 조그마한 흥화진 하나 뚫지 못하면서 앞으로 공성전을 어찌할 것이냐'고 분노하자 강조를 잡지 않았냐는 야율분노의 항변에 황제 폐하께서 40만 대군을 이끌고 이제 강조를 잡았으니까 그럼 그냥 복귀하라는 소리냐며 식견을 보이는 장면은 2차 여요전쟁에서 거란군이 이제부터 겪게 될 고난에 대한 복선이기도 하다.[132] 고려사의 기록대로 강조가 바둑을 두다가 잡히기는 하나, 이때도 전략 회의를 하면서 바둑을 두던 도중 정말 예상치 못하게 의표를 찔리면서 잡혔다는 식으로 연출되고 있다. 방심한 나머지 오만하게 굴다가 허무하게 잡혔다는 식의 연출은 아니다.[133] 다만 그가 퇴각 명령을 내리지 않았어도 이미 수많은 고려군이 지시도 없이 진영을 이탈했기에 전세가 기운 상황에서 마지못해 한 말에 가깝다.[134] "두 눈이 이미 새 일월을 보았는데 한 마음이 어찌 옛 산천을 생각하겠습니까?"[135] 극중 노전 본인은 거란 황제에게 일단 충성은 맹세했지만 과연 이게 과연 옳은 것인지 고뇌하고, 학대 당하는 어린 고려인 포로들을 보며 마음 아파하기도 한다. 만일 역사의 기록을 따라간다면, 노전은 최질에게 심하게 얻어맞은 것을 계기로 다시 고려군에 종군함으로써 당시 거란 황제에 대한 충성 맹세와 고려에 대한 항복 권유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어쩔 수 없는 행위였음을 증명하려 할 것으로 보인다.[136] 다만 본 문서의 외교 문단에 적혀 있듯이 실제로 이런 이유가 작용하였으리라는 시각은 있다. 그 점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137] 물론 전장에서의 승전 소식을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공표했을 때는 실제 고려군이 흥화진에서 승리했기에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고려군이 통주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현종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백성들에게 알리고자 하나 강감찬의 간언을 받아들여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방향으로 가기로 하여 고려군이 연전연승하고 있다고 거짓으로 공표하게 된다.[138] 현종이 삼군(三軍)이 패배하고 주군(州郡)이 모두 함락되었기 때문에 저항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요 성종에게 표문을 올려 조회할 것을 청하자, 요 성종은 이를 허락하여 마침내 노략질을 금지한 뒤 마보우(馬保佑)를 개경유수(開京留守), 왕팔(王八)을 부유수로 삼아 을름(乙凛)이 이끄는 기병 1,000명을 데리고 개경에 부임하게 했다. 물론 현종은 이런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요 성종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모르쇠로 일관하고, 총독으로 오던 마보우와 왕팔도 서경의 고려군에게 몰살을 당해 부임하지 못하게 된다.[139] 강감찬의 대사를 통해, 작중 고려적 국체는 외왕내제론에 따른 황제국으로 설정되어 있음이 보다 명백해졌다. 그리고 실제로 훗날 몽골과의 전쟁 가운데, 원종이 왕실 보위를 위해 몽골 조정에 친조한 것을 계기로 고려는 300년 넘게 유지하던 그들의 황제국 체제를 모두 제후국의 체제에 맞게 격하해야 했다.[140] 강감찬 역할(배역)을 맡은 최수종의 열연 덕분에 순간(분당) 최고시청률이 10.1%를 기록하여 처음으로 10%대를 돌파하는 기염을 토해냈다.(출처 : 한국일보)[141] 거란군의 침략 직후 현종의 명령으로 화주(지금의 함경남도 영흥군)에 주둔하여 동북면을 수비하고 있었다.[142] 출처: 『고려사』 지채문 열전 #[143] 朝覲, 제후로서 황제를 뵈러 감.[144] 삼국통일전쟁 때 당이 신라에게 명목상 설치했던 계림대도독부 비슷하게 생각하면 된다.[145] 『요사』에 기록된 탁사정한테 죽었다는 사신 한희손(韓喜孫)이 한기와 같은 일행이었거나, 동일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46] 출처: 『요사』 #[147] 유수는 이 모든 행정망을 아우를 수 있는 지위였지만 임용한 교수가 유튜브에서 지적한 대로 당시 서경유수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는다. 임용한은 유수가 궐석이었거나 감금당했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아니면 관행 중 하나로서 재상이 개경에 머물면서 겸직했을 수도 있다. 서경유수는 경우에 따라 현지에 부임해서 임기를 채우는 경우도 있었고, 개경에 머무르더라도 원격으로 업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유수 부재 시에도 부유수가 유수를 대체하지는 않았다. 부유수의 공문 등급은 경우에 따라 원래 부유수급에게 적용되어야 할 등급보다 한 단계 더 깎일 정도로 유수와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공문 서식상으로는 부유수보다 낮은 도순검사였던 강조를 거란 측에서는 유수로 오인한 것을 볼 때 당시에는 두 나라의 유수 권한이 달랐을 수도 있다. 어쨌든 원종석은 유수 명의 또는 권한을 획득 내지 탈취한다든가, 유수관 속관을 제외하면 서경 내의 모든 행정망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148] 2차 여요전쟁 당시 소손녕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소손녕은 승천태후의 조카이자 부마였는데, 병석에 있던 소손녕을 위해 승천태후가 보낸 궁녀와 소손녕이 간통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진노한 승천태후는 소손녕에게 사약을 보내 사사한다.[149] 상술했다시피 강감찬이 이때 사신으로 간 것 자체가 픽션이므로 사신으로 가서 일어난 모든 일이 따지고 보면 픽션이기는 하나, 그것과 별개로 사료에 기록된 이름 없는 사신이 소배압과 신경전을 벌였다는 기록 자체가 없다.[150] 축소라기보다도 슬로우 모션으로 지채문 포함 몇 명이 싸우는 걸 꼴랑 몇 초 보여주고 나머진 전부 전령의 대사로 때워서 전투라고 할 만한 게 거의 나오지도 않았다.[151] 드라마에서도 설정상으론 실제 역사와 비슷한 흐름일 가능성이 있다. 직전에 지채문의 모습을 보면 마치 한창 이기고 있다는 듯 기세 좋은 태도로 전진하고 옆에서 "너무 깊이 들어간다"며 걱정하는 대목이 있다. 즉 드라마에서도 한 번 승리하여 적을 추격하는 상황이었으나 너무 깊게 들어갔고, 매복한 궁수대에게 당했다고 볼 수 있다.[152] 『요사』 기록은 대체로 여러 날짜에 걸쳐 일어난 일을 한 기사에 뭉뚱그리는 경향과 함께 선후나 인과 관계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한 날짜에 여러 날짜의 기록을 넣는 것은 『고려사절요』도 마찬가지지만 『고려사절요』는 간지와 시간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서 구분하는 경우가 많고 사건이 자세하다. 그러나 『요사』는 사건이 자세하지 않다. 요사에서 제2차 여요전쟁과 관련해 기간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서경 포위 5일 뿐이다. 이 기사에서 확인되는 것은 1) 소배압과 야율분노의 거란군이 개경에서 고려군을 마주치고 패퇴시켰다. 2) 현종이 몽진했다. 3) 개경을 함락했다. 이 3가지 팩트의 단순 나열인데 1)과 2)는 해석에 따라 끊거나 이어 읽을 수 있다. 3)의 경우 본기 기록 특성상 문장에서 성종의 행위를 가리킬 경우 주어가 없을 수도 있다. 따라서 『고려사』 기록과 비교하여 시점과 주어를 찾아야 한다. 3)의 경우 『고려사』 기록에서 확인되는 야율융서의 개경 진입 이전에 창화현까지 넘어온 거란 선봉이 소배압과 야율분노의 군대가 개경의 군대를 깨고 그대로 지나쳐 온 것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153]요사』는 거란 멸망 수백년 후에 원나라가 편찬했고 같이 편찬된 『금사』나 『송사』와 달리 원전 사료가 다른 두 나라 보다 더 없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겼다. 사실 거란은 정사서를 지은 원나라에게 망한 게 아니라 원나라가 세워지기 백여년 전에 금나라송나라에게 망했는데 이들은 거란이 망한 이후 거란의 정사서를 쓰지 않았다. 이러다보니 원나라가 들어설때까지 수백년간 정사서가 쓰이기 않아 원전 사료가 산일되어서 원나라가 직접 멸망시키고 원전 사료를 획득한 다른 두 나라보다 사료가 부족하고 불명확해진 것이다. 이런 사료문제에 더하여 고작 1년안에 날림으로 편집하여 편찬하는 바람에 요사는 중국전통역사서인 24사 중에서도 가장 오탈자 많고 내용의 앞뒤가 맞지 않는 등 문제가 많아 최악의 역사서로 꼽힌다.[154] 효은태자의 장남 왕림은 현종 재위기에 유진의 뒤를 이어 상서좌복야를 지냈으며 아비의 동양군 봉호 또한 물려받는다. 차남인 왕정 또한 동시기에 조정에서 일하며 왕경수라는 이름의 아들까지 두었고, 이 왕경수의 후손들이 현재 개성 왕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동양군파로 이어지고 있다.[155] 사실 이전부터 서경의 장군들이 점을 쳐서 보니 길조가 나와서 고려군이 서경을 지킬수 있었다거나 고려 태조 왕건의 사당에서부터 돌풍이 불어 거란군의 진공이 하루 지체 된 일도 묘사되지 않아 아무래도 천재지변은 개연성을 위해 삭제한 듯 하다.[156] 양력으로 환산하면 1011년 2월 9일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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