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여요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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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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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次 麗遼戰爭

1. 개요
2. 배경
2.1. 고려의 대송 관계
2.2. 전쟁 직전 상황
3. 전개
3.1. 10월 말, 거란 40만 대군의 침공
3.2. 11월 초, 흥화진을 지킨 양규
3.3. 11월 말, 통주에서 무너진 강조
3.4. 12월 초, 곽주와 서경의 공방전
3.5. 12월 말, 고려 현종의 피난
3.6. 1월 말, 퇴각군을 타격한 양규
4. 결과
4.1. 거란과의 일시적인 화평
5. 대중매체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거란고려를 침공한 세 차례의 대규모 침공 중 두번째에 해당하는 전쟁으로 1010년에 일어났다.


2. 배경[편집]



2.1. 고려의 대송 관계[편집]


994년, 고려 성종은 즉각 북송과 국교를 끊었다.[1] 하지만 같은 해 6월, 송나라에 '고려는 진심으로는 송을 따르고 있으며 거란을 증오한다'는 국서를 비밀리에 보냈다.

997년, 목종도 이부시랑 주인소를 송에 파견하여 '고려가 중화를 사모하고 있으나 오랑캐 거란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국서를 비밀리에 보냈다.


2.2. 전쟁 직전 상황[편집]


1009년 봄,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이 폐위되고 현종이 즉위했다. 현종/강조는 요에 사신을 여러 차례 파견했으나, 요 성종은 갑작스런 즉위의 이유를 캐물었다. 한편 강조에게 협력했던 하공진이 동료 유종과 함께 북방 양계에 주둔하게 되었다.

1010년 봄, 하공진조정의 명 없이 무단으로 동여진 부락을 공격했다가 패전했다.[2] 이에 당시 화주를 맡고 있던 유종이 앙심을 품고, 고려 조정에 조회하려고 화주에 들어와 있던 여진 추장과 그 수행원 95명을 모조리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학살로 고려에 깊은 원한을 품게 된 여진은 거란에 강조의 정변을 알리며 대신 원한을 갚아줄 것을 호소했다.

여진의 돌변에 고려는 두 차례나 사신을 파견하고, 전쟁 직전 달인 1010년 9월에 요(거란)의 수도 동경의 유수에게도 특사를 보냈으나 거란의 강경한 태도가 변하지 않았다. 요 성종은 고려에게 목종 시해의 이유를 정식으로 묻고, 정변을 이유로 고려 정벌의 군령을 내리는 등 전쟁의 분위기를 보였다.


3. 전개[편집]



3.1. 10월 말, 거란 40만 대군의 침공[편집]


  • 이전 침공과 달리 거란이 사신을 보내어 미리 출병 사실을 알리는 선전포고를 하며, 보병·기병(步騎) 40만을 의군천병(義軍天兵)이라고 칭했다. 이는 단순한 요식 행위가 아니라 명분과 군세로 고려 조정 내 주전파와 주화파의 분열을 유도한 전술적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 요 성종이 친정에 나섰다. 하지만 실제 군세를 주도, 지휘하는 도통(都統)에는 대송 전쟁에서 탁월한 지휘력을 선보였던 소배압을 임명했다.
  • 고려 현종은 실권자인 참지정사 강조를 행영도통사에 임명해 전쟁의 전권을 맡겼다.[3][4]
  • 고려 강조는 귀양간 하공진유종을 복직시키고, 고려 전역의 병력을 있는대로 긁어모아 30만[5] 대군을 꾸려 통주[6]에 진을 쳤다.


3.2. 11월 초, 흥화진을 지킨 양규[편집]


  • 흥화진 전투
    • 11월 10일, 거란군은 기존에 알려진 진군로를 따라 내원성[7] 부근에서 압록강을 건넜다.
    • 11월 16일, 요 성종은 흥화진이 항복하지 않자 1주일 이상 공략했으나 서북면 도순검사 양규, 진사 정성 등이 이끄는 방어군의 거센 저항으로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 단 3천명으로, 성도 아닌 진이, 40만의 대군을 1주일이나 붙들어 둔 것이다.
    • 이에 요 성종이 20만이나 흥화진 앞 무로대에 수비군으로 남기고, 20만만 남진을 결정했다.[8]


3.3. 11월 말, 통주에서 무너진 강조[편집]


  • 흥화진과 통주에서 전투가 벌어진 시기에 통군사였던 최사위가 이끄는 군대가 귀주 북쪽의 육돈, 탕정, 서성 세 방면에서 벌인 거란과의 전투에서 패한다.
  • 통주 전투
    • 11월 25일~, 고려는 지휘관 강조를 포함해 3만이 죽는 큰 패배를 하게 된다.
    • 잔존 고려군은 완항령에서 매복하여 전열을 수습한 뒤, 통주성을 1주일 넘게 지켜내었다. 그러자 거란군은 이번에도 통주성을 패스하고 남하하기로 한다.
    • 요 성종은 흥화진의 양규에게 강조가 패하고 투항한 것처럼 거짓 편지를 보냈으나, 양규는 "임금의 명을 받고 왔지, 의 명은 받지 않는다(我受王命而來, 非受兆命)"는 패기 넘치는 답변으로 사신을 돌려 보냈다.


3.4. 12월 초, 곽주와 서경의 공방전[편집]


  • 곽주 1차 전투 - 요 성종은 무로대의 예비군도 끌어 와, 통주성 인근의 곽주성[9] 공략에 성공한다. 이는 2차 여요전쟁에서 유일하게 거란이 고려의 성을 무너뜨린 것이다. 요 성종은 무로대 대신 이 곽주성을 새 후방 거점으로 삼는다.[10]

  • 이어 요 성종에 의해 안북주, 숙주도 떨어졌다.

  • 서경 전투
    • 12월 10일, 요 성종은 앞서 성들처럼 서경성에 먼저 항복을 권유한다. 그런데 성들 중 처음으로 서경은 항복 분위기가 강했고, 백성과 제장들의 분위기에 따라 서경부 유수 원종석은 항복을 결정한다.
    • 앞서 고려 현종은 통주전투로 서북면 군사가 소멸하자, 동북면 도순검사 탁사정과 거란군 침략 직후 현종의 명으로 화주(지금의 함경남도 금야군 영흥)에 주둔하여 동북면을 수비하고 있던 중랑장 지채문에게 서경으로 가라고 급파한 상태였다. 먼저 도착한 지채문이 서경성에 들어가려 하자, 항복 분위기의 서경 사람들이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지채문의 부하 최창이 서경 내의 조자기와 연락해 문을 열긴 했으나, 이미 항복문서가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채문은 즉각 항복사절을 추격해 죽이고 항복문서를 불태웠고, 서경 사람들은 "지채문 때문에 우리가 다 죽게 생겼다"며 민심이 흉흉해져 지채문 군대를 서경성 밖으로 내쫓았다.
    • 한편 이 순간, 거란군 진영에, 고려 현종의 시간 끌기용 항복문이 도달했다. 요 성종은 기뻐하며 약탈을 금지하면서 우선 서경 유수와 부유수를 임명하여 서경성으로 보냈다. 그런데 때마침 탁사정의 동북면군 주력도 서경성에 당도했다. 지채문에게 상황을 전해듣고, 투항파인 유수 원종석을 참수하고, 다음날 아무 것도 모른채 서경성에 들어온 거란군[11]도 전멸시킨다.[12] 이에 요 성종은 크게 분노하여 총공격 명령을 내린다.
    • 동북면 군대(탁사정 본대, 지채문 부대, 이원 부대, 승려 법언의 승병부대, 청천강 방어선에서 패퇴했던 발해의 왕손 대도수 부대 등)는 성 북쪽 30리 자혜사 근처 임원역[13]에서 거란군 3천을 죽이는 대승을 했으나, 적진에 너무 깊이 들어가 역시 수천명이 죽고 서경성에 돌아와 농성전에 돌입한다.
    • 서경성이 위태롭자, 탁사정은 지채문에게 개경으로 향하게 내보낸다. 또한 탁사정은 대도수에게 동문으로 공격해 거란군의 주의를 끌도록 하고, 자기가 이끄는 주력이 서문에서 출격해 거란군을 기습하자는 작전을 내놓았다. 그런데 탁사정은 서문을 나오자마자 거란군을 공격하기는커녕 남쪽으로 도망을 치고 말았다. 이로써 그는 기껏 패전을 막은 영웅에서 하루 아침에 졸장으로 돌변했다.[14][15] 배신당한 대도수는 결국 분전 끝에 패배하여 거란에 항복했다.[16]
    • 지휘부와 주력군이 하룻밤 새에 증발하는 황당한 사태에 직면한 서경은 잠시 혼란에 빠지지만, 중간급 간부던 통군 녹사 조원과 애수진장 강민첨의 활약으로 서경을 지켜낼 수 있었다. 이 때 두각을 나타낸 강민첨은 후일 3차 여요전쟁에서 강감찬에 다음가는 부원수의 자리에 이른다.

  • 곽주 2차 전투 - 한참 서경 전투가 있던 12월 16일, 흥화진을 지켜오던 양규는 정예 기병 700기를 뽑아 출격, 통주성에 갇혀 있던 군사들과 통주 전투의 패잔병 등 1천여명을 더 합류하여, 요군이 후방 거점으로 삼았던 곽주성을 탈환해 6천명을 전멸시키고, 성 주민 7천명은 통주성으로 데려가는 쾌거를 거둔다.[17]


3.5. 12월 말, 고려 현종의 피난[편집]



파일:현종의 피난길.png

고려 현종(고려)의 피난길

  • 요 성종은 흥화진, 곽주, 통주, 서경이란 후방 거점 요충지들을 모두 상실했다는 이 소식에, 후퇴가 아니라 현종이 있는 개경으로 진격하는 승부수를 건다. 400km의 고립을 감수하는 요 성종의 무척 대담한 결단에 고려 조정은 경악했지만, 결국 강감찬 등의 주장으로 항전의 뜻을 굳히고, 고려 현종 역시 대담하게 몽진을 결단했다.
    • 몽진은 지방 호족들에게 푸대접을 넘어 신변 위협까지 받아야 하는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나중에 똑같이 몽진하던 선조와 크게 대조된다.[18] 이는 당시 고려는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완성시켰던 조선과 달리 아직 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막강했었기 때문이다.[19][20]

  • 12월 29일~31일, 적성현(積城縣)창화현(昌化縣)에서의 봉변 [24]
    • 행렬이 적성현(積城縣) 단조역(丹棗驛)에 이르렀다. 무졸(武卒)인 견영(堅英)이 역인(驛人)들과 함께 활시위를 당겨 장차 행궁을 범하려고 하니, 지채문이 말을 몰면서 활을 쏘았다. 적도가 달아나 흩어졌다가 다시 서남쪽의 산으로부터 갑자기 튀어나와 길을 막자 지채문은 또다시 활을 쏘아 그들을 물리쳤다.
    • 날이 저물어야 행렬이 창화현(昌化縣)에 이르자, 아전이 적도들을 이끌고 와 말하기를 "왕께선 저의 이름과 얼굴을 아십니까?" 하였다. 왕이 못 들은 척 하자, 아전은 성을 냈다.[21] 지채문이 무슨 연유로 왔는가 묻자 "하공진의 군이 채충순과 김응인의 무리를 잡으러 왔다"고 했다. 이에 밤중 시종하던 신료·환관·빈첩들이 모두 도망가 숨어버리고 오로지 두 왕후와 시녀 2인, 승지 양협과 충필 등만이 남았다.[22][23] 지채문은 두 왕후를 먼저 북문을 통해 빠져나가게 하고, 자신은 어마의 고삐를 잡고, 채충순이 뒤따라 오게 하여 도봉사(道峯寺)에 연이어 합류했다.
    • 다음날 아침, 지채문은 "지난밤 적은 하공진의 군이 아닐 것으로 의심되어, 뒤를 쫓아보겠습니다" 했다. 고려 현종이 그마저 도망갈 것을 두려워 해 허락하지 않자, 지채문은 "신이 만약 군주를 배반하여 말과 실상이 어긋난다면 하늘이 반드시 저를 주살할 것입니다"라고 하기에 허락하였다. 지채문은 창화현으로 돌아가는 길에 국근을 만났다. 국근은 "옷과 행장을 적도들에게 뺏겼다" 하였고, 지채문은 "넌 신하로서 충성을 바치지 못 했으니 머리를 보전한 것으로 충분하다" 하였다.
    • 때마침 하공진과 유종의 일행이 행재소(왕의 거처)로 향하기에, 지채문과 국근이 그들의 앞에 목숨 걸고 등장해 지난밤 왕을 죽이려던 것이 그대들의 소행이었냐 묻자 과연 그들의 소행이 아니었다. 하공진은 오던 도중에 고영기의 패전한 군대 20여인 남짓이 남쪽으로 달아나던 것을 잡아 왕에게 합류하던 것이었다. 이들 일행은 창화현의 적도들을 함께 급습하고, 말 15필과 안장 10부를 획득해 왕에게 돌아왔다.

  • 1월 1일~3일, 요나라와의 화친 협상
    • 1월 1일, 요 성종의 거란 군대가 개경에 들어와서 태묘, 궁궐, 민가를 불태웠다.[25] 이 시점에 고려 현종 일행은 광주(廣州)에 이르렀고, 지채문이 두 황후를 요탄역(饒呑驛)에서 데려왔다.[26]
    • 1월 2일, 하공진과 고영기와 요 성종에게 화친을 요구할 사신이 되어 출발했다. 그런데 창화현 관아에 닿기도 전에 거란군 선봉을 만났다. 즉 이 3일 간이 고려사에서 최고로 긴박한 순간이었다. 거란군은 몰랐지만 거란군과 현종 일행의 거리는 반나절도 되지 않았던 것. 이 때 붙잡혔다면 삼전도의 굴욕을 수백년 일찍 경험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공진은 요 성종을 만나 고려의 남방은 수천리에 달하며, 고려 왕은 이미 그 밖까지 도주했다고 속였다. 요 성종은 이미 퇴로가 위험하므로 고려 왕의 친조(직접 요 황제를 알현)를 조건으로, 하공진을 인질삼고 퇴각한다. (전쟁 이후 요나라는 하공진을 회유하러 무던히도 노력했으나 하공진이 끝내 회유되지 않자 결국 죽인 후 심장과 간을 꺼내 먹었다.)
    • 1월 3일, (사신으로 간) 하공진이 인질로 잡혀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신하들, 병사들, 노비들 일부가 또 뿔뿔히 도망쳤다.[27] 채충순이 어가를 호종하고, 남쪽으로 몽진을 계속하기로 했다.

  • 1월 4일, 유종의 고향이기도 한 양성(陽城)에 이르렀다. 밤에 유종과 김응인은 왕명을 조작해 어마의 안장을 고을 사람들에게 팔아치웠다.

  • 1월 5일, 유종과 김응인은 두 왕후(원정왕후, 원화왕후)는 각자의 고향에 보내고 호위 병졸도 해산해 피난행렬을 가볍게 빠르게 하자고 청했다. 이에 현종이 지채문에게 자문을 구하자 지채문이 대성통곡하며 "피난길에 인의에 따라 인심을 수습해야 하는데 왕후를 버리고 살기를 구하는 짓을 차마 할 수 있습니까" 하여 왕이 "그 말이 옳다" 했다.[28]

  • 1월 6일
    • 행렬이 사산현(蛇山縣)을 지날 때, 지채문이 기러기를 활로 맞춰 왕에게 진상하며 "이런 신하가 있는데 어찌 도적을 염려하십니까" 하며 위로했다.
    • 행렬이 천안부(天安府)을 지날 때, 유종과 김응인이 "신들이 먼저 석파역(石坡驛)에 가서 음식을 마련한 뒤 영접하겠습니다"하고 마침내 도망쳤다.

  • 1월 7일
    • 행렬이 공주(公州)에 이르렀다. 절도사(節度使) 김은부(金殷傅)가 예를 갖추어 교외에서 맞이했다. "어찌 성상께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서리와 눈을 맞아가며 이러한 극한 상황에 이르시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겠습니까" 하며 의복, 허리띠, 토산물을 올리니, 왕은 기뻐하며 옷을 갈아입고 토산물을 호종하던 관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29] 이 때 자신의 몽진길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대접해주었던 공주 절도사 김은부의 두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고 추후에 또 한 명을 왕비로 맞했다.
    • 날이 저물어 파산역(巴山驛)에 이르렀다. 역리(驛吏)들이 모두 도망가고 남겨진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음에도 김은부가 본인 식량을 나눠 차렸다. 이를 보고 왕은 앞서 지채문의 뜻을 꺾고 "원정왕후가 임신한 상태라 멀리 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본관인 선주(善州)가 멀지 않으니 그곳으로 보내는 것이 좋겠다"하며 왕후를 본가에 보냈다.[30]
    • 늦은 밤 행렬이 여양현(礪陽縣)에 이르자, 장수와 병졸들이 배반할 마음을 품었다. 이에 지채문이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상을 내려야 한다 급히 간언했고, 왕이 현안지 등 병졸 16인을 중윤(中尹, 9품16관계 중 막내벼슬)으로 삼았다.

  • 1월 8일
    • 행렬이 삼례역(參禮驛)에 이르자, 전주절도사(全州節度使) 조용겸(趙容謙)이 야복(野服)을 입고 어가를 맞이하러 나왔다. 그런데 행렬 중 박섬(朴暹)이 아뢰기를, "전주는 옛 백제 땅이라 행차하지 않기를 청합니다" 하여 왕이 이를 옳게 여겨, 맞이행렬을 피해 곧장 장곡역(長谷驛)으로 향해 숙소를 잡았다.
    • 이 날 저녁 과연 조용겸이 왕을 옆에 끼고 위세를 부리고자 이재, 최즙, 유승건과 더불어 흰 깃을 관모에 꼽고 북을 치며 떠들썩하게 숙소를 에워싸자, 지채문이 문을 닫아걸고 굳게 지켜 적도들이 감히 들어오지 못 했다. 지채문이 지붕에 올라 "너희들은 어째서 이 같이 어가를 억류하려 하는가" 꾸짖었다. 지채문이 유승건을 콕 집어 어가로 부르자, 유승건은 울며 아뢰기를 "오늘 일은 조용겸이 한 짓입니다. 신은 알지 못합니다. 조용겸을 불러올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였다. 하지만 왕이 이를 허락하자 유승건은 도망쳤다. 왕이 양협에게 명해 조용겸과 이재를 불러오게 했는데, 조용겸의 무리가 양협을 죽이려 했다. 지채문은 조용겸의 무리를 꾸짖어 그만두게 했다.[31]


3.6. 1월 말, 퇴각군을 타격한 양규[편집]


  • 1월 11일, 고려 현종을 잡는 데 끝내 실패한 요 성종은 개경에서 퇴각을 시작한다. 그러자 후방에 건재했던 서경, 곽주, 통주, 흥화진은 모두 눈엣가시로 곱게 보낼 생각 없이 퇴각을 방해하며 막아서기 시작한다.[32]

  • 1월 17일, 귀주의 별장 김숙흥이 중랑장 보량과 함께 거란군을 습격해 머리 1만개를 베었다.

  • 1월 18일, 흥화진의 도순검사 양규가 무로대에서 거란군을 습격해 머리 2천개를 베고 포로 3천명을 구출했다.

  • 1월 19일, 양규가 이수에서 싸워 석령까지 추격하여 머리 2500개를 베고 포로 1천명을 구출했다.

  • 1월 22일, 양규가 여리참에서 세 차례 싸워 머리 1000개를 베고 포로 1천명을 구출했다.[33]

  • 1월 28일, 양규가 애전에서 머리 1000개를 베고 3만의 포로를 구했다. 그런데 후속으로 하필 요 성종의 거란군 본대가 도착했다. 양규와 김숙흥의 군대는 종일토록, 일곱 차례나, 칼과 활이 다 떨어지도록 악귀처럼 싸웠다.[34] 결국 양규를 비롯한 장수들과 병사들이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이 날 귀주 남쪽 준곡령에 큰 비가 내렸고, 거란은 말, 낙타, 갑옷, 병기를 많이 내버리고 압록강을 건너기로 한다.[35]

  • 1월 29일, 갑옷과 병기도 버린 거란군들이 압록강을 반쯤 건넜을 때 흥화진사 정성이 이를 공격하자, 도망치다가 익사한 거란군이 매우 많게 되었다.[36]


4. 결과[편집]



4.1. 거란과의 일시적인 화평[편집]


거란군이 철수한 이후 고려에서는 사신을 거란에 보내어 회군한 것에 감사를 표하고 동지사, 생신사를 파견하여 양국 간의 화평 유지에 노력하였다. 거란군은 명목상 고려 왕의 친조를 약속받았을 뿐 그 이상의 이익은 얻지 못하였으나 고려와 송의 군사적 연합을 저지하는 것에는 성공하였다. 고려는 거란에 대한 친조를 다시 한 번 약속하였으나, 끝내 친조하지는 않았다.

고려는 수도가 함락되고 서북 지방이 초토화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거란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장족(귀족)과 병졸, 수레도 돌아간 것이 드물었다. 관속들 태반이 전몰하면서 조금이라도 글을 아는 자를 뽑아 결원을 보충해야 하는 나라가 되었다.[37]

또한 거란과 고려 사이에서 수많은 여진 난민이 발생하였다. 고려는 이들을 내지에 집단 이주시키고, 수공업 등에 종사하게 하였는데 기록을 보면 직역상 천민으로 된 것 같다.[38]

고려 현종은 정치적 부담이던 강조가 없어졌고, 피난 행렬을 함께 한 것으로 충성이 입증된 신하들도 얻게 되었다. 어가를 끝까지 호종한 채충순에겐 식읍 300호를 주었다.[39] 1등 공신 지채문에게는 토지 30결을 하사하며 교서로 "호종하던 신료들 모두 도망가 흩어지지 않은 자가 없었는데, 오직 지채문만이 바람과 서리를 무릅쓰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며 말고삐를 잡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끝까지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절개를 지켰다. 특출한 공로를 생각하면 어찌 남다른 은전(恩典)을 아끼겠는가" 하였다.[40]


5. 대중매체[편집]




2017년 9월 28일, 토크멘터리 전쟁사의 요약

  • 1973년에 방영한 드라마 강감찬에서 64화부터 74화까지 다루었다고 하지만, 필름이 소실되어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 2009년, KBS 드라마 <천추태후>에서 73화부터 78화(후속 과정 포함)까지 다루었고 드라마의 특성상 각색이 많이 되었다. 전체적으로 실망적인 묘사였지만, 양규와 김숙흥에 대해서는 그들의 최후 전투라 볼 수 있는 애전 전투에서의 비장함은 잘 살렸다.
  • 2019년, JTBC 창사 특집 다큐멘터리 <평화전쟁 1019>에서는 역사학자들의 자문을 얻어 1부와 2부 전반부에 다루었다.
  • 2023년 11월 11일 첫 방송하는 <고려거란전쟁>이 2차, 3차 여요전쟁 부분을 다룰 것이다.


6. 관련 문서[편집]



[1] 송이 원병을 보내주지 않은 것도 한몫 했다는 시각도 있다. 이후에도 송과 고려는 서로에게 군사적 지원 요청을 꾸준하게 보냈고, 동시에 서로의 군사적 지원 요청을 꾸준히 무시했다.[2] 고려의 여진 정벌은 고려 성종이 거란에게서 강동 6주를 받은 대신 한 약조였다. 하지만 성종-목종은 거란-북송 사이 균형외교를 하기 위해 실제 실행은 유예해왔다. 강조의 정변 이후 현종이나 조정은 국경 일선에 명을 내릴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하공진은 거란이 강조의 정변을 명분으로 침공하지 않도록, 거란이 원해왔고 고려가 약조했던 여진 정벌을 실행하려던 것일 수 있다.[3] 현종이 명했다고는 하지만, 엄밀히 이는 요식행위였고 실권자인 강조 본인이 출전했다는 해석이 더 가능성 높다.[4] 강조는 출전하기 싫었다고 가정해도 어차피 출전을 꼭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쿠데타 직후라서 아직 권력 기반이 불안정해 30만에 달하는 대 병력을 총 지휘할 사람도 없었다. 게다가 거란의 침공 명분도 강조 본인의 쿠데타였으므로 이 명분을 지워내기 위해서라도 강조 본인이 직접 출전해야 했다. 그리고 아래 언급할 강조의 장렬한 최후와 연계해 보면, 강조 본인도 정말로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스스로 출전했을 가능성이 높다.[5] 역사학자 임용한 박사는 자신의 저서인 <전쟁과 역사2 / (113p)>에서 고려군 병력이 중앙 및 지방의 상비군과 각 성의 지역민으로 구성된 주현군까지 합쳐 40만을 상회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반대로 30만조차 과장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6] 지금의 평북 선천, 정확히는 평북 동림이다. 북한의 행정 구역 개편으로 선천에서 동림이 떨어져나왔는데 강조가 주둔한 통주성 일대는 현 동림군 지역에 해당한다.[7] 오늘날 북한 의주읍. 신의주 시가지의 북쪽에 있다.[8] 기록을 긍정하는 측은 고려 침공의 중간보급기지 겸 흥화진의 군을 묶어둘 견제군으로 둔 예비군으로 본다. 기록을 부정하는 측은 북송과의 전쟁에도 20만이 넘은 적이 없으므로 애초에 남진한 20만만 실제 병력일 것으로 본다.[9] 오늘날 북한 평안북도 곽산군.[10] 후술하듯 흥화진의 양규 포위진영을 푼 것은 후에 거란에게 독이 된다.[11] 한기(韓杞)가 이끄는 기병 200기, 을름(乙凜)의 기병 1,000기 등. 한기(韓杞)는 요사에 기록된 탁사정한테 죽었다는 사신 한희손(韓喜孫)이 한기와 같은 일행이었거나 동일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2] 즉 탁사정이 하루만 늦었어도 서경은 함락되었을 것이다![13] 현 북한 평안북도 대동군 부산면[14] 후일 탁사정은 이 때의 일이 들키지 않았는지는 몰라도 잠시 어사중승, 우간대의부 등을 역임하며 잘 나갔지만 몇 달 뒤 강조의 일당이 논책될 때 휘말려 유배된다. 시간상 이 사건에서 겨우 8개월 후의 이야기다.[15] 탁사정에 대해서는 승려 법언(法言)과 함께 군사 9,000여 명을 거느리고 임원역(林原驛) 남쪽에서 3,000여 명의 적을 살해하는 전과를 거두었으나, 결국 법언은 전사하고 도주하고 말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탁사정이 처벌을 받지 않은 건 도주가 들키지 않았기 때문만이라기엔 석연찮은 점이 있고 뭔가 계획이 심각하게 꼬였기에 참작되어서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 요사에 따르면 요나라의 주력군은 서경성의 서쪽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만약 동문으로 나간 대도수의 군대가 요나라군의 주의를 끄는 데 실패했다면 서문으로 나간 탁사정의 군대는 주력군을 그대로 맞이했을 것이고, 중과부적으로 싸우다 도주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16] 요사에 따르면 요군은 서경성의 서쪽 절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예부낭중(禮部郞中) 발해타실(渤海陀失)이 항복했다고 짤막하게 써놨다. 그런데 한국 사서에 저런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데, 이는 요나라측의 기록이므로 대도수의 이름을 거란어로 대충 음차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성씨도 대씨이므로 그냥 발해 출신이란 뜻으로 발해를 성씨로 붙여놨을 가능성이 높다.[17] JTBC 창사특집 평화전쟁 1019는 "당시 거란군은 서경을 포위공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곽주가 탈환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입니다. 거란 지휘부에서는 난리가 났죠. 이건 어떻게 표현할 수 있냐면, 마치 서경이라는 가시를 안고 있는 상황에서 뒤에서 창이 겨누고 있는 형국이었습니다."로 비유했다.[18] 선조의 경우 도중에 백성들이 여기를 지키긴 할 거냐고 항의를 하는 일이 벌어졌지만 선조가 나서서 지킬 거라고 말을 하자 모두 순순히 돌아갔고, 그나마 평양에서 백성들이 폭발해서 왕의 행렬에 있는 사람들을 구타하긴 했지만 이 역시 주동자 몇 명을 잡아죽이자 해결되었다.[19] 물론 고려도 여요전쟁이란 위기를 넘기고 중기에 들어서면 유력 호족들의 중앙귀족화가 완료되고 중앙집권이 강해진다.[20] 임용한 박사는 토크멘터리 전쟁사 67부에서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난갈 때만 봐도, (조선과 고려) 백성들의 이데올로기가 달라요. 왕에 대한 개념 말이에요. 선조가 피난갔을 땐 주위의 백성들과 관리들이 왕에게 인사를 했어요. (중략) 근데 고려는 중세 유럽과 비교하면 봉건제와 같아요. 왕이 궁 밖을 나가는 순간, 나를 미워하는 모두의 라이벌 속으로 뛰어 드는 거에요."라고 비유했다.[21] 이런 게 가능했던 이유는 고려 시절의 아전은 조선의 하급 공무원인 아전과 다르게 지방 호족으로 사실상 지방 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지배계층이었으며, 중세 유럽으로 치면 중앙의 왕조와 사이가 좋지 않은 지방 영주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흔히 아는 아전 = 이방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22] 주전론을 외치던 문관과 무관들, 심지어 항전을 주장해 온 강감찬의 기록도 현종의 몽진 시기에는 사라진다. 도망갔던 신하들이 모두 처벌되었는데 강감찬은 따로 처벌받은 기록이 없다는 걸 감안하면 임무를 띄고 파견을 갔을 가능성이 높다.[23] 채충순과 김응인은 현종의 최측근이었으며, 하공진은 강조파였으며, 이번 전쟁의 원인에도 관여한 사람이라 무슨 짓을 저지를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겁에 질린 김응인은 시랑 이정충, 낭장 국근 등과 함께 달아나버렸다.[24] 출처: 고려사절요 1010년 12월 29일(음) 계유(癸酉) #[25] 이 때 대량의 고서적, 특히 사서(史書)들이 불타 없어졌다. 역대 고려 왕조의 실록들도 소실되어서 이후 이를 복구하라는 현종의 명으로 만들어진 것이 7대 실록이다. 7대 실록의 완성은 덕종 때 이루어졌다.[26] 출처: 고려사절요 현종 2년 1월 1일(음) 을해(乙亥) #[27] 출처: 고려사 현종 2년 1월 3일(음) 정축(丁丑)[28] 출처: 고려사절요 현종 2년 1월 5일(음) 기묘(己卯) #[29] 출처: 고려사절요 현종 1011년 1월 7일(음) 신사(辛巳) #[30] 원정왕후는 소생이 없다. 즉 이 때의 고생으로 임신이 유산한 것으로 보인다.[31] 출처: 고려사절요 현종 1011년 1월 8일(음) 임오(壬午) #[32] 두세주만 퇴각을 묶어두면 압록강이 녹으며 거란군이 오히려 고려에 갇혀 항복해야 할 판이 되기 때문이다.[33] JTBC의 평화전쟁 1019에서 정명섭은 "전력이 계속 갉아먹히고, 정체불명의 군대는 계속 뒤에서, 동에서, 서에서 번쩍하고, 병력 수가 얼마인지는 모르겠고, (이런 상황에서) 거란군은 황제부터 말단 병사들까지 어마어마한 공포감을 느꼈을 거예요. 어디에서도 이런 군대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 비유했다.[34] 이들이 퇴각하지 않고 전멸할 때까지 싸운 이유는 구출한 포로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라는 견해도 있다.[35] 출처: 요사 성종 본기 통화 29년 정월.[36] 출처: 고려사 현종조 원년[37] 출처: 속자치통감장편 74권 대중상부 1010년 11월.[38] 이들이 이후에 양수척(=화척), 진척, 재인 등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양인이지만 호적에 등재되지 못하고 차별을 받던 이들은 이후 몽골이 침입할 때 길잡이 노릇을 하는 등 몽골군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게 된다.[39] 출처: 고려사 93권 열전 6권 제신 채충순. #[40] 출처: 고려사절요 현종 2년 2월 미상(음) http://db.history.go.kr/id/kj_003r_0010_0030_0020_0030, 고려사 94권 열전 7권 제신(諸臣) 지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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