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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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천 전투
一利川 戰鬪

시기
936년 9월
장소




일리천[1]
원인
왕건후백제 정벌
교전국
후백제
(수비)


고려
(공격)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백제 군기.svg 견신검 (후백제 2대 국왕)
파일:백제 군기.svg 견양검
파일:백제 군기.svg 견용검
지휘관

파일:고려 의장기.svg 왕건 (고려 태조)
파일:고려 의장기.svg 왕무 (고려 혜종)
파일:고려 의장기.svg 견훤 (후백제 초대 국왕)
참가자}}}
파일:백제 군기.svg 능환
파일:백제 군기.svg 애술
파일:백제 군기.svg 명길
파일:백제 군기.svg 효봉
파일:백제 군기.svg 덕술
파일:백제 군기.svg 부달
파일:백제 군기.svg 흔강
파일:백제 군기.svg 견달
파일:백제 군기.svg 은술
파일:백제 군기.svg 금식
파일:백제 군기.svg 김총
참가자}}}
파일:고려 의장기.svg 박술희
파일:고려 의장기.svg 유금필
파일:고려 의장기.svg 왕순식
파일:고려 의장기.svg 강공훤
파일:고려 의장기.svg 이능필
파일:고려 의장기.svg 긍준
파일:고려 의장기.svg 견권
파일:고려 의장기.svg 황보금산
파일:고려 의장기.svg 왕겸
파일:고려 의장기.svg 홍유
파일:고려 의장기.svg 길강충
파일:고려 의장기.svg 김부 (낙랑왕)
병력
병력: 약 65,000명 (추정)
마군(馬軍) : 40,000명
보병 : 23,000명
기병 : 9,800명
군사 : 14,700명 이상[2]
피해
전사자 : 5,700여 명
포로 : 3,200여 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고려의 대승, 후백제의 멸망
영향
후삼국 통일 및 고려 시대 개막

1. 개요
2. 배경
3. 군대 편제
3.1. 병력 규모에 대한 논란
3.1.1. 과장설
3.1.2. 반론
4. 전개
5. 결과
6.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후삼국시대의 마지막 서기 936년 고려왕건후백제신검이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일대인 일리천에서 맞붙은 전투이며, 후삼국시대를 종결짓는 최후의 전투. 흔히 태조 왕건 때문에 황산벌에서 벌어진 복수전으로 아는 경우가 있는데, 황산은 신검이 패전 후 수도 전주로 철군하다가 더 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함을 깨닫고 항복한 곳이다. 일리천과 황산은 직선거리만 100km 이상 떨어진 곳이다.

특이 사항으로 조선 이전까지 편제가 가장 확실하게 기록된 전투이기도 하다.[3] 그리고 6.25 전쟁 이전 동학 농민 혁명을 제외하고 사서에 기록된 내전 기준으로 한국사 최대 규모의 전투이기도 하다. 사서에 기록된 고려의 10만 병력에 대해서는, 일리천 전투 이전까지의 후삼국 전투 기록들에서 고려도 주로 1만명 남짓을 동원한게 대부분이라 학계 일부에선 과장설을 제기하기도 하지만[4] 임용한을 비롯한 주요 논자들은 대체로 긍정하고 있다.[5] 그 이전의 교전 기록들에 비해 이때 유난히 고려의 동원 병력이 많은 것은, 견훤이 항복해 온 좋은 기회를 잡아서 전쟁을 확실히 끝내야겠다는 판단으로 무리해서 총동원했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의 삼한통일과는 두 가지 차이점이 있는데, 먼저 신라의 통일은 당나라라는 외세의 힘을 빌린 반면 고려는 자신들의 힘만으로 자주적인 통일을 이룩했다. 대신 고려는 지방 세력가들을 유화책으로 어르고 달래면서 통일부터 서둘렀기에 혜종, 정종 시절에 왕권이 불안하다가 광종 대 이르러서야 겨우 국가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던 반면, 신라는 외세의 힘을 빌리기는 했을지언정 국가의 기틀이 이미 충분히 다져져 있었기에 문무왕에 이어 신문왕, 성덕왕 등 명군들이 잇따라 왕위를 계승하면서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


2. 배경[편집]


930년 고창 전투, 934년 운주성 전투를 계기로 후삼국의 주도권은 고려로 넘어가게 된다. 이후 고려는 전방향에서 후백제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고 이로 인해 후백제의 판도는 급격히 축소된다. 또한 934년, 멸망한 발해의 세자 대광현이 무리를 이끌고 고려에 귀순해왔다. 그리고 935년 오랜 전란을 더이상 버티지 못한 신라도 마침내 고려에게 항복한다. 이리하여 고려는 후삼국의 2/3를 아우르는 영토들을 모두 평정하였고 이제 남은 것은 후백제 하나 뿐인 상황이 된다.
하지만 비록 늙었다고는 하나 견훤은 후삼국 최강의 무장이었고 비옥한 한반도 남부 곡창지대를 근거지로 한 후백제의 군사력 역시 탄탄했다.[6] 이렇듯 후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서는 무언가 절호의 기회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한 와중에 왕건에게 하늘이 내린 기회가 찾아온다. 후백제의 후계자 다툼 끝에 맏아들 신검이 이복 동생 견금강을 죽이고 아버지 견훤을 유폐한 후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 견훤은 금산사에 유폐되지만 틈을 봐서 탈출, 고려로 귀부하게 된다. 왕건은 평생 동안 싸워왔던 이 희대의 라이벌을 상보(尙父)[7]라고 부르며 극진히 대접한다. 견훤은 자신을 배반한 아들을 벌할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며 왕건에 대한 적극 협조를 약속한다.
이윽고 936년, 마침내 왕건은 전군을 동원해서 후백제를 침공한다. 견훤은 아들을 벌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세운 나라를 자신이 멸망시키기 위해 왕건에게 간곡히 요청해서 함께 출진한다. 왕건이 동원한 군세는 《삼국사기》에는 총 107,500명, 《고려사》에는 87,50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에 따른 고려군의 총 병력 구성은 앞을 섰던 견훤과 박술희와 더불어 기병 10,000명, 제2군은 보병 10,000명, 홍유와 박수문이 거느린 제3군은 기병 10,000명, 명주에서 올라온 왕순식의 기병 2만 명, 유금필이 끌고 온 북방 유목민족인 흑수말갈, 달고, 철륵 등의 군사 9,500명, 그리고 왕건의 본군을 합쳐 총 동원 병력은 80,000~90,000에 달해 후삼국 시대 최대 규모였다. 그것도 기병이 47,500명에 보병이 약 40,000명으로 기병이 더 많았다.

3. 군대 편제[편집]


다음은 고려사 태조 세가를 바탕으로 만든 고려군 및 후백제군의 표다.

고려의 남정 선봉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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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정윤(正胤) 왕무
부지휘관
장군(將軍) 박술희
총 병력
보병 & 기마병 10,000명


고려의 남정 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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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지휘관
고려대왕(高麗大王) 왕건
부지휘관
정윤(正胤) 왕무 & 상보(尙父) 견훤
좌강(左綱)
중군(中軍)
우강(右綱)
보병 3,000명
기마병 10,000명

보병 10,000명
기마병 20,000명
이민족 기마병 9,500명

보병 10,000명
기마병 10,000명

삼군원병(三軍援兵)
기마병 300명
호족 사병 14,700명



고려의 남정 본대 지휘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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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강(左綱) 지휘관
중군(中軍) 지휘관
우강(右綱) 지휘관
상보(尙父)
견훤

명주대광(溟州大匡)
왕순식
대상(大相)
김철
대상(大相)
박술희
대상(大相)
긍준
대상(大相)
홍유
대상(大相)
견권
대상(大相)
왕겸
대상(大相)
박수경
대상(大相)
황보금산
대상(大相)
왕예
원보(元甫)
연주
원윤(元尹)
강유영
원보(元甫)
인일
원윤(元尹)
훤랑
지천군(支天軍) 대장군
원윤(元尹)
능달
대상(大相)
유금필
보천군(輔天軍) 대장군
원윤(元尹)
삼순
원윤(元尹)
기언
원윤(元尹)
관무
원윤(元尹)
준랑
원윤(元尹)
한순명
원윤(元尹)
관헌
정조(正朝)
영유
원윤(元尹)
흔악
우천군(祐天軍) 대장군
원윤(元尹)
정순
정조(正朝)
길강충
정조(正朝)
영직
정조(正朝)
애진
정조(正朝)
흔계
정조(正朝)
광세
천무군(天武軍) 대장군
원윤(元尹)
종희




간천군(杆天軍) 대장군
김극종




원보(元甫)
조간


삼군원병(三軍援兵) 지휘관
장군(將軍)
왕함필
대장군(大將軍)
대상(大相)
강공훤
원윤(元尹)
이능필


고려는 백제 정벌을 위해 뽑을 수 있는 모든 군사를 동원하였다. 먼저 태자 왕무가 박술희와 함께 고려 본대가 올 자리를 만들었고, 왕건은 군대를 네 부대[8]로 나누어 전진했다. 왕건 직할 부대와 고려 소속 호족의 사병들이 주를 이뤘으며 기타 성주의 사병들과 흑수말갈, 철륵, 달고적 등 유목민의 기병까지 모조리 참전했다.

이뿐만 아니라 왕건 휘하엔 왕무, 견훤, 홍유, 박술희, 왕순식, 유금필, 박수경 등 모든 후삼국의 호걸들이 후삼국 시대의 대미를 장식할 결전을 위해 집결했다.

상보 견훤은 전 백제국왕으로써 태자 왕무 이상의 대우를 받았다. 최고 사령관인 왕건과 함께 같은 자리서 군대를 사열할 자격을 받았고 좌군 일만 기마병의 사령관이 되었다.

백제의 북벌 본대 지휘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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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지휘관
백제국왕(百濟國王) 견신검
휘하 지휘관
청주성주(菁州城主) 견양검
광주성주(光州城主) 견용검
능환


좌장군(左將軍) 효봉
좌장군(左將軍) 덕술
좌장군(左將軍) 애술
좌장군(左將軍) 명길
부달
장군(將軍) 흔강
장군(將軍) 견달
장군(將軍) 은술
장군(將軍) 금식
장군(將軍) 우봉


3.1. 병력 규모에 대한 논란[편집]


학계 일부에서는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제시된 고려군의 병력 규모(87,500명 ~ 10만 7,500명)에 대해서 적잖은 과장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

3.1.1. 과장설[편집]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신편 한국사》의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 구조》 중 군사 조직 편에서 해당 파트의 집필자인 조인성 교수는 일리천 전투에 참가했다는 고려군의 병력 기록이 실제보다 훨씬 부풀려진 것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당시 고려군 총 병력 수 87,500명[9] 중 '삼군의 원병(援兵)'이라 칭해진 호족군 15,000명과, '제번(諸蕃)의 경기(勁騎: 날랜 기병)'라 칭해진 이민족 기병 9,500명을 빼면 63,000명이 남는데, 이 병력은 고려 정부의 직속 군대로 생각된다.[10] 결론적으로 조인성 교수 주장의 주요 논점은 이 정부군, 이른바 '경군'의 병력 수 문제다.

조인성 교수는 이 경군의 규모가 크게 과장되었다는 근거로,

  • 당시 개경 인구를 감안하면 경군이 60,000명에 달했다는 기록은 믿을 수 없다는 점[11]
  • 기병 병력도 신뢰하기 어려운 40,000기라는 숫자가 기록되어 있다는 점[12]
  • 당시 총 병력이 일렬종대로 행군했을 경우 (병사들 사이의 정확한 간격 설정까지는 알 수 없지만) 행렬의 길이가 행군로의 길이보다 더 길어진다는 모순이 생긴다는 점[13]
  • 일리천 전역에 출동했다는 병력수가 그 이전의 통상적인 출전 병력수에 비해 갑자기 열 배 정도로 늘어났다는 점[14]
  • 일리천 전장에서의 태조군 부대편성에 관한 《고려사》의 기사내용은 비교적 상세한 편이지만 그럼에도 전장에서의 병력수에 관한 기록은 보다 옛날의 기록이라 해서, 혹은 그 내용이 상세하다고 해서 무비판적으로 믿어버릴 것은 아니다라는 점[16]

등을 들었다.

“내가 신라 말에 후백제를 세운 지 여러 해가 되었다. 군사는 북쪽의 고려 군사보다 갑절이나 많으면서 오히려 이기지 못하니 필경 하늘이 고려를 돕는 것 같다. 어찌 북쪽 고려왕에게 귀순해서 생명을 보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

三國遺事 권 제2 제2 기이(紀異第二)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그외 당대 견훤의 발언 또한 해당 과장설의 주된 근거들 중 하나인데 위의 발언은 일리천 전투로 부터 불과 반년 전인 936년 음력 1월에 견훤이 직접 말한 내용이다. 이 발언을 보면 당대 고려의 병력수가 후백제의 병력 규모에 비해 겨우 절반 정도였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17]

이상 위의 주장들과 일리천 전투 당시 후백제군의 피해 규모 등을 근거로 해당 파트의 필자인 조인성 교수가 추정한 고려 경군의 최대 규모는 6,000명 이하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이론적 추정치는 《고려사》가 전하는 태조측 군대의 통상적인 출전병력 규모가 넉넉잡아 5,000명 정도였다는 사실과 엇비슷하며 이 경우 일리천 전투 당시의 고려군의 실제 총 병력 숫자는 경군의 숫자가 6만 3,000명에서 6,000명으로 57,000명 가량 폭감하므로 총 87,500명이 아니라 30,500명이 된다.

조인성 교수는 이와 같은 사실과 추정을 근거로, 일리천 전투의 병력 기록을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 이전의 전쟁사에 흔히 나타나는 병력 과장 사례[18]의 하나로 보았다. 그 외 조인성에 앞서 정경현 등이 비슷한 주장을 한 바 있다.[19][20]

그 외에 당대 고려의 인구 규모상으로 가능한 병력 동원력인지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당시 고려인구가 전성기인 12세기 기준으로 (논란은 있지만) 최대 300만이라 전제한다면링크 일리천 전투(최대 8만 7,500명(고려사) ~ 10만 7,500명(삼국사기))에서의 고려측의 병력 동원력과 위의 견훤의 발언을 토대로한 후백제측의 최대 병력 동원력은 고려의 경우 초기 인구를 중기와 똑같은 300만으로 여유있게 계산하여도 대외원정에 전 인구의 최소 약 3%에서 최대 약 3.6% 가량이 동원되었다는 황당한 계산이 나오며 당연하지만 후백제의 인구도 똑같이 300만이라고 넉넉하게 계산하여도 전 인구의 최소 약 6%에서 최대 약 7.2%를 동원 할 수 있었다는 무시무시한 계산이 성립된다. 그 유명한 수 양제의 113만 대군이 수나라 전체 인구[21]의 약 2% 남짓이엇음을 감안하면 고려가 동원했다는 병력은 상당히 비현실적인 수치라 할 수 있겠다.

3.1.2. 반론[편집]


역사학자 류영철은 자신의 저서[22]에서 위와 같은 과장설에 다음과 같이 반론한다.

  • 허위라고 보기엔 군사 편제 상 병력 수가 백 단위까지 세밀하게 기술되어 있다.
  • 후백제 멸망이라는, 고려로서는 필생의 목적을 위해 전례 없이 (이 부분까지 허위 과장으로 보지 않는다면) 타지 원군이 1만 4천 7백 명, 이민족 군대만 무려 9천 5백 명이나 동원되었다. 당시 고려가 용병으로 끌어들인 흑수, 달고, 철륵 등의 말갈계 집단은 고려와 같은 농경 사회가 아니었기에, 조인성이 고려 중앙군에 적용한 것과 같은 잣대를 적용해서 추정 인구에 비해 기록된 병력 규모가 과다하므로 신뢰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를 부정할 수 있는 근거는 중앙군 병력이 실제로는 훨씬 적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용병 숫자가 그렇게 많았을 리는 없으니 과장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식의, 가정에 가정을 거듭한 뜬구름 잡기와 같은 논리밖에 없게 된다.[23] 그만한 경군의 병력 규모가 과다하다고 할 수 없다.[24]
  • 후백제의 좌장군 효봉, 덕술, 애술, 명길 4인이 고려군의 성세를 보고 싸우지도 않고 항복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고려군의 규모가 후백제군보다 비할 수 없이 거대했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 사료에 기록된 주요 일선 지휘관만 38명에 달하며 그 중에는 황실 종친이나 개국공신당시 고려의 핵심 인물들이 총망라되어있다. 이는 1만 5천-2만 정도 규모 병력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전체 병력 수가 '전례 없이' 많았다는 점도, 발해 유민의 유입과 신라의 항복으로 인적 자원이 대폭 늘어난 상황에서, 결정적으로 견훤까지 고려에 귀부하며 승부의 추가 고려 쪽으로 완전히 기울게 되자, 그때까지 관망하던 남은 호족들도 대거 고려 쪽으로 넘어왔다고 보는 것[25]으로 얼마든지 설명이 된다. 애초에 수천 명씩 동원했던 것은 전세가 팽팽하던 시절에, 그것도 전선 중 한 지역에서 일어난 일인 반면 일리천 전투는 견훤의 귀부로 승기를 잡은 고려가 후백제 병합을 위해 한방 병력을 모아 대대적으로 공격한 것에 가깝다.

한편 역사학자 신성재는 2011년 발표한 논문[26]을 통해, 기록을 그대로 긍정할 경우 고려군이 개경을 출발한 시점이 늦어도 9월 초임을 감안할 때 9월 8일에 일리천에 도착하기에는 행군 속도가 너무 빠르거나 행렬의 길이가 지나치게 길어지는 모순이 생기므로 당시 고려 정부군의 실제 병력 규모는 최대 1만 5천 정도였을 거라는 견해에 대해서, "가을 9월에 태조가 3군을 거느리고 천안에 이르렀다"는 기록에서 9월(초)란 시점은 개경을 출발한 때가 아닌 천안에 도착한 때로 보이기 때문에 그의 같은 견해가 타당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애초에 그만한 거대 병력이 분산 이동 없이 단일 대오로 움직이고, 또 행군 시에 모든 구간에서 일렬로만 걸었을 것이라는 것부터 상식적이지 않은 가정이다.

신성재는 같은 논문[27]에서 "이후의 연구는 전투에 참가한 병력 수치를 인정하는 분위기 속에서 고려군이 일선군으로 우회기동한 이유에 대해 논자들마다 약간씩 견해를 달리하였다"고 하여 과장설을 수용하지 않고 일리천 전역 고려군의 병력 편제와 규모에 대한 기록을 신뢰하는 견해가 현재 학계에서 통설에 가까운 것임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리고 고구려-수 전쟁과의 비교도 적절치 않은데, 수나라가 전쟁 후유증에 시달린 것은 인구의 2%를 동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113만 명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즉 동원병의 비율보다는 절대량이 너무 커서 무리가 갔던 것이지 2%를 동원하기만 하면 전부 국가에 무리가 가는 것은 아니다.[28] 실제로 고구려는 고구려-당 전쟁에서 전투 한 번에 15만 명[29]을 동원했고, 결정적으로 고려 역시 30만 명, 20만 명, 17만 명 등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적이 있다. 따라서 일리천 전투에서 동원한 병력이 주구장창 복무하는 군대가 아니라 일회성으로 모은 세력임을 감안하면 충분히 실제로 그만한 병력이 원정에 참여했다고 볼 수 있게 된다.

4. 전개[편집]


결전장은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일대인 일리천.[30] 신검 역시 후백제의 모든 전력을 총동원해서 맞선다.[31] 왕건은 전군을 좌군 우군 중군 후군으로 편성했고, 신검 역시 유사한 진형으로 맞선다.

양측 모두 막대한 군사를 동원했지만, 고려군의 좌군에는 견훤이 있었다. 자신들의 건국 군주이자 상왕이 적진의 장수로 서 있는 모습을 일리천 건너편에서 본 후백제군 병사들은 사기를 잃어, 선봉 애술, 효봉, 덕술, 명길 등의 장수들이 그대로 무릎을 꿇고 고려군에 투항해 버렸으며, 효봉은 총사령관 견신검이 중군에 있다는 정보까지 일러바친다. 또한 후백제군 우군을 이끌던 견훤의 사위 박영규는 전투가 벌어지면 배반하기로 고려군과 이미 약속을 해놓은 상태였다. 전투의 승패는 싸우기 전에 이미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중군끼리는 나름대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당시 고려 중군의 선봉이 다름아닌 고려의 결전병기 유금필과 그가 이끌던 말갈, 돌궐 기병 10,000명이었던 만큼 후백제군이 전사자만 6천에 사로잡히거나 도망친 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대패했다.[32] 후백제군 좌군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우익과 중앙이 박살난 상태에서 제대로 된 전투를 할 수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후백제군의 사상자가 10,000명에 가까워진[33] 전투 막바지에는 후백제군이 자기들끼리 싸웠다고 한다.[34]


5. 결과[편집]


결국 전투는 고려군의 대승으로 끝나고, 신검은 추풍령을 넘고 탄령[35]을 넘어 수도 완산주(전주시)로 퇴각하려 했으나, 고려군은 전주 코앞의 황산군[36]까지 쫓아왔고 신검은 마성[37]에 고립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항복한다. 반란에 참여한 백제의 장수들 대부분이 처형당하고, 양검과 용검은 귀양을 간 뒤 얼마 후에 역시 처형당하지만, 신검 본인은 왕건의 용서를 받고 살아난다. 그리고 그걸 본 견훤은 울화통이 터져서 결국 얼마 못가 병사하고 만다. 이미 얼마 전부터 등창으로 크게 고생했던만큼 언제 사망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신검은 이후 기록이 없어서 행적을 알 수 없으나 결국 처형당했으리라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이로써 왕건은 50년 가까이 지속된 후삼국시대의 종지부를 찍고 후삼국을 통일하였고, 마침내 통일 왕조로서의 고려의 역사가 시작하게 된다.

6. 대중매체에서[편집]


  • 드라마 제국의 아침에서는 전작의 태조 왕건에서의 묘사와 달리 혜종이 병약해진 이유를 설명하려고 일리천 전투인 암시를 나타내는 장면을 내보낸다. [38] 이후의 상황을 보았을 때, 마지막 전투에서 백제 병사들을 많이 죽이다가 트라우마가 걸린 것으로 묘사되었다. 태조 왕건 드라마에서는 후반부 견훤의 등장으로 당황해 별 전투 없이 고려가 승리한것으로 되어있지만 이는 드라마에 극적인 연출을 위한 것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설령 저런 일이 벌어졌다해도 이는 견훤을 직접 마주했던 부대들에 한정된 얘기일 가능성이 높다[39]. 앞서 언급했듯 전근대시대 한반도에서 벌어진 내전 중 최대규모였기에 전선 또한 여러곳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로 견훤이 등장해 상황을 모두 정리했다면 고려군도 그렇게까지 많은 병력을 투입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고려와 후백제가 후삼국의 주인 자리를 두고 일합을 겨뤘던 전투였던만큼 전사자가 속출했을 가능성이 상당하다. 사실 작중에도 견훤에 의해 대다수가 전의를 상실하여 항복하거나 도망쳤지만 일단 끝까지 싸워보다 전사하는 백제군 장졸들도 나왔다.

  • 게임 태조 왕건 : 제국의 아침에서는 왕건, 견훤 캠페인의 마지막 미션으로 구현되었고 서로 다른 맵을 사용한다. 왕건 캠페인에서는 고려로 투항하는 견훤을 데려온 뒤 신검, 양검, 용검, 능환을 처치하고 후백제군을 전멸시켜야 한다. 견훤 캠페인에서는 견훤이 신검의 반란을 진압했다는 IF설정이 붙었으며 미션에서 고려군을 전멸시키면 된다.

  • 게임 천년의 신화의 대고려 건국 캠페인에서도 마지막 미션으로 나왔다. 이름은 '천하 통일'.

6.1. 태조 왕건[편집]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도 이 전투가 199~200화인 극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양측의 전력은 거의 비등한 편이었다. 나레이션이 199회에서 언급하듯 견훤이 '우리 군도 숫자가 적지 않은데 왜 자꾸 밀리냐.'고 푸념한 점과 후백제 영토가 물자가 풍부한 편인 경상남도, 전라도 쪽에 속해있다보니 후백제군도 결코 병력이 적지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를 한다.. 신검을 위시한 수뇌부의 의기도 드높았고 병력 차이도 얼마 없으니 해볼만한 싸움이었으나[40] 정작 전투는 시작 후 너무나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다. 하필이면 고려군 선봉이 견훤이었기 때문.

원래 왕건은 노령인데다 등창까지 난 견훤을 전장터에 데려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 자신이 세운 후백제를 거두고 패륜 아들을 처벌하려는 견훤이 전장에 자신을 데리고 가달라고 계속 간청[41]하여 견훤 역시 일리천 전투에 참전한다. 선봉을 정할 때 견훤은 자신을 선봉으로 세워달라고 요청하는데 당연히 직접 싸우겠다는건 아니고, 후백제인들의 견훤에 대한 이미지를 이용해 단체 모랄빵을 유도하겠다는 견훤의 계책이었다. 이 때 배현경이 "아니 대체 그 몸으로 어찌하시겠다는 것이옵니까??"라고 묻기도 했다. 이전에 견훤이 호령하자 상귀의 병사들이 명령을 듣지 않은 것을 본 유금필과 윤신달은 견훤의 요청을 지지했고 왕건도 그 요청을 받아들인다. 고령에 선봉에 선 견훤을 배려해 왕건은 견훤의 부장들로 유금필, 홍유, 배현경, 박술희 등 고려의 간판급 장수들을 붙여 견훤을 보좌하게 했다.

견훤의 예상대로 후백제 병사들은 견훤을 보자마자 동요하기 시작하였고, 견훤은 공세를 펼치지 않고 후백제군의 내부 분열을 유도하는데 이때 견훤은 부적절한 때에 공격하면 오히려 후백제군이 결집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대놓고 깃발에 대고려국 황제 상보 견훤이라고 적혀있기 까지 했으니 백제군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이끌었던 영웅과 마주하게 된 셈. 분명 낮에 공격 명령을 내렸건만, 밤이 될 때까지 후백제 병사들은 진격도 후퇴도 하지않고 우물쭈물하며, 오죽하면 최초 공격 명령을 내렸을 때도 애술 혼자서만 달려나갈 뿐 아무도 달려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애술은 부장 몇명을 처단하고 억지로 군대를 전진시키는데, 후백제군의 사기가 완전히 떨어졌음을 파악한 견훤은 "나의 군사들이여! 백성들이여! 어서 오라! 두려워 말고 오라! 어서 오라! 무기를 버리는 자는 모두 살려줄 것이다. 버려라! 다 버려! 버려!"라고 외쳤고, 동시에 고려군은 공세에 나서기 시작한다. 벌써부터 견훤의 외침에 동요되어 후백제군의 탈영병이 기하급수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했고,[42] 지리멸렬한 싸움 끝에 상애는 배현경, 상귀는 유금필에게 참살당하며, 애술김총이 각각 박술희홍유한테 포로로 잡히고 만다.[43] 그 사이 고려군은 백제 군사들한테 무기를 버리라고 하고, 백제군은 자기네 군사들한테 싸우라고 재촉한다. 오죽하면 양검이 아버지가 아니라 원수라 절규할 정도. 견훤의 동생 능애도 백제를 고려에 갖다 바친다며 한탄했다. #



신검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황산에 재집결하고자 했으나,[44] 후퇴하던 중 또다시 다수의 탈영병이 발생하여(양검이 2만 가량이 이탈했다고 언급한다.) 황산에 도착할 때 쯤엔 10만의 대군 중에서 겨우 3만도 남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항복한 애술과 김총이 왕건에게 후백제군의 이동 계획을 토설하여 고려군은 미리 기병 5만을 보내 총 10만의 대군이[45] 황산을 포위했고, 결국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신검은 능환의 제안에 따라 결국 고려에 항복한다. 능애, 능환, 파달 등 쿠테타 주역들은 그렇게 모조리 처형 당했다.[46]

신검 삼형제의 경우 양검과 용검은 귀양보냈다가 신검은 벼슬을 줬다가 나중에 죽였다는 식으로 묘사했다. 단, 기본적으로 반란의 주역이고 왕자에 불과했던 양검, 용검과 달리 신검은 어쨌건 후백제의 군주였고 동정여론도 상당했기 때문에 대놓고 죽이고 기록을 남기면 구 백제 주민들을 자극할 게 뻔히 보인다. 그래서 극중 최지몽도 항복한 군주를 당장 죽인 일은 없다며 일단은 살려주자고 의견을 내비쳤다. 이후 후백제 민심이 완전히 고려와 동화되면 그 후 살려둘 필요가 없는 신검을 죽였다는 극중 후반부 묘사와 이어지게 된다. 짧게 스쳐지나가는 신검이 들판에서 홀로 참형을 당해 죽는 장면도 나오는데,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이게 태조 왕건 마지막 촬영 장면이라 촬영 종료 후 출연진과 제작진이 쫑파티를 하는 모습까지 나온다. 그야말로 후삼국시대의 막을 내리는 전투답게 태조 왕건의 마지막 촬영까지 책임졌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작중 내 나레이션으로는 백제 군사들의 규모가 고려군에 딱히 뒤지지 않았을 걸로 보인다 라고 나오며 그리하여 이번엔 백제도 고창/운주 전투 때와는 달리 대등하게 맞서 싸울수 있었음에도 그냥 견훤 딱 한명이 고려군에 있었다는 이유 딱 하나만으로 너무나 억울하고 어이없이 마지막 최후의 패배를 한데 반해 고려군은 견훤 하나 덕분에 그냥 가만히 놀고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자동적으로 거져 승리한것 처럼 나오지만, 백제는 후반부 고창/운주 전투 등으로 완전히 재대로 멸망테크를 타기 시작하여 안 그래도 점점 끝없이 내리막길을 걷고있던 마당에 견훤의 후계자 문제로 인해 내부 분열 국란으로 인해 더 이상 재기가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는데다 고려군보다 장수들이 숫자 또한 확연히 딸리고 최승우,종훈 같이 브레인 역할을 할 책사까지 차례로 없어졌는데 아직도 고려와 여전히 완전 대등하게 맞설 전력이었다는 것에는 상당히 의문이 든다. 또 한편 고려는 연이은 승리로 기세가 하늘을 찌를듯 한데다 발해의 왕자인 대광현이 데리고 귀부한 수만명의 발해인, 전 백제왕에 이어 신라까지 항복하여 신라군들까지 전부 흡수 하였겠다, 거기에 덤으로 북방의 말갈,돌궐의 지원군까지 있었으니 명장들의 숫자로나 장수들의 힘 스펙으로나 그냥 완전히 백제를 갖고 놀수있는 전력을 지니게 되었는데 두말할 필요없이 멸망직전에 이른 백제군보다 훨씬 더 우세한 것은 물론 승산이 몇배는 더 압도적으로 높지 않았을리가 없다. 때문에 투항해온 적국의 왕 견훤을 굳이 앞세우지 않았다 하더라도 고려군의 승리는 이미 따놓은 당상이었을 것이라는게 거의 분명하며 백제군 또한 견훤 때문에 모든 병사들이 전의를 상실하지 않았다 해도 사실상 과거 황산벌 전투 만큼이나 대패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 해평면이나 고아읍이라는 설도 있다.[2] 87,500명 《고려사》 기록 또는, 107,500명 《삼국사기》 기록[3] 단 후백제 편제는 제외.[4] 조인성, 《신편 한국사》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 구조》 군사 조직, 정경현, 高麗 太祖의 一利川 戰域, 《한국사연구》, 1988.[5] 고려 초기 군제사나 후삼국 통일 전쟁사와 같은 주제에 천착한 이기백(주요 관련 논저: 《高麗兵制史硏究》, 일조각, 1968), 임용한(주요 관련 논저: 《전쟁과 역사 1》, 혜안, 2001), 김갑동(주요 관련 논저: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 후백제》, 서경문화사, 2010), 김명진(주요 관련 논저: 《고려 태조 왕건의 통일전쟁 연구》, 혜안, 2014), 이도학(주요 관련 논저: 《후삼국시대 전쟁 연구》, 주류성, 2015), 등 주요 연구자들은 저와 같은 사료상의 수치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신편 한국사》에서도 다른 필자(박용운)가 집필한 후삼국의 통일 파트에서는 해당 사서(《고려사》)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6] 후백제를 오늘날의 전라도만 차지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데, 실제론 경상도도 대부분 지배하고 있었고 충남 일부까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농업생산량은 고려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창 전투 이후 계속 밀리던 와중에도 견훤은 신하들에게 우리 백제의 군사력이 고려의 두배인데 왜 자꾸 밀리는거냐고 한탄한다.[7] 이 때의 父는 부가 아닌 보라고 읽는다. 웃어른이라는 의미.[8] 좌우중 삼군 + 지원부대.[9] 《고려사》 기준[10] 洪承基,<高麗初期 中央軍의 組織과 役割-京軍의 性格->(≪高麗軍制史≫, 陸軍本部, 1983), 30쪽. 鄭景鉉,≪高麗前期 2軍 6衛制 硏究≫(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2), 21∼23쪽.[11] 고려시대 개경 일원의 인구가 남녀노소 다 합쳐 90,000명 이하였다고 《고려사》에 직접적으로 기록된 점이 주요 근거이다.[12] 40,000필의 전마가 있었다는 것은 그 어미말과 새끼말, 그리고 다른 종류의 말들까지 합쳐 당시 십수 만 마리의 말들이 있었음을 전제한 주장이다. 하지만 사실상 한반도는 풍토적으로 말 사육에는 부적합한 지역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러한 전제는 현실성이 극히 떨어진다.[13] 《고려사》의 기록대로라면 태조는 그의 정부군 63,000명과 북방 유목 종족의 기병 95,00명을 이끌고 천안에서 계립령을 거쳐 선산의 낙동강(일리천)까지 대략 180km를 행군해 간 것이다. 그런데 후삼국시대의 지방 및 산간의 도로사정이 매우 황폐되어 있었음을 감안해 볼 때, 그 병력은 일렬 종대의 대형으로 행군해 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약 50,000명의 기병과 20,000여 명의 보병이 일렬 종대로 행군할 경우 그 대열의 총 길이는 무려 200km 정도에 이르게 된다.[14] 일리천 전역 이전,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는 여러 차례의 전투가 있었고 그 중에는 태조(왕건)와 견훤(甄萱)이 직접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출전하여 격돌한 경우들도 있었다. 그러나 《고려사》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이들 전투에 출동한 양측의 병력 규모는 대부분 5천 명 미만이었고 만 명의 병력이 출전한 경우는 단 한 번 뿐이었다.(鄭景鉉,<高麗太祖의 一利川 戰役>(≪韓國史硏究≫68, 1990), 32쪽.) 물론 이같은 대략적인 병력수들은 그것이 다소 과장된 것임을 암시하지만, 여하튼 그러한 통상적 출전병력수에 비추어 볼 때 일리칠 전역에서의 63,000명은 너무나 비약적으로 증강된 병력수인 것이다.[15] ≪三國史記≫권 50, 列傳 10, 甄萱.[16] 일리천 전장에서의 태조군의 부대편성에 관한 기록은 이미 고려 인종대에 편찬된 ≪三國史記≫에도 ≪高麗史≫와 같은 정도로 상세하게 전해지고 있는데 거기에 기록된 태조측의 총 병력수는 무여 총 10만7천5백 명이었다.[15] 이같이 ≪高麗史≫나 ≪三國史記≫의 병력수 기록들이 모두 과장되어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것은 각각의 근거 자료가 전설적인 것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고려 태조대에서 목종대까지의 實錄 원본은 현종 초 거란군이 개경을 함락했을 때 모두 불타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현종은 黃周亮으로 하여금 각지를 방문하고 자료를 수집케 하여, 태조대에서 목종대까지의 역사를 다시 편찬하였기 때문이다.(≪高麗史≫권 95, 列傳 8, 黃周亮).[17] 만약 이 발언과 고려측의 병력 규모가 전부 다 사실이라면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려군의 숫자가 최대 10만 7,500명이었으므로 후백제군이 동원 할 수 있는 병력 수는 최대 20만 명이 넘었다는 황당한 결론이 나오게 된다.[18] H. Delbrück, History of the Art of the War within the Political Framework, Vol. 1:Antiquity, trans. W.J. Renfroe, Jr. (London:Greenwood Press, 1975), 30쪽 이후 참조.[19] 정경현, 高麗 太祖의 一利川 戰域, 《한국사연구》, 1988.[20] 단, 정경현이 제시한 논거는 주로 행군 속도와 행렬의 길이에 관한 것으로 "전례가 없었다"는 정도만 빼면 조인성과는 별로 겹치는 부분이 없다. 또한 정경현의 경우 조인성이 경군이라고 표현한 고려 정부군의 병력을 20,000명 미만, 아마도 15,000명 이하로 보았다.[21] 수 문제가 재위 중이던 606년 수나라 초기의 전체 인구가 약 890만 7,000여 호(약 4,600만 명으로 추정)였다.[22] 류영철, 《高麗의 後三國 統一 過程 硏究》, 경인문화사, 2005[23] 이는 '원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제성군(諸城軍: 여러 성의 군대)'에서 '제성'의 범위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병력의 과다를 단정지어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과장설을 주장하는 논저들은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정밀한 논증 없이 얼렁뚱땅 넘기고 있다.[24] 이민족을 1만 가까이 동원했으므로,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고려군도 그보다 훨씬 많이 출전했어야 할 것이다.[25] 임용한, 《전쟁과 역사 1》, 혜안, 2001, p. 362[26] 신성재, 일리천전투와 고려태조 왕건의 전략전술, 《한국고대사연구》, 2011[27] 일리천전투와 고려태조 왕건의 전략전술, 《한국고대사연구》, 2011[28] 고대 지중해 세계의 경우 농한기에 상당수의 시민들을 군대로 동원했고, 그러면서도 잘만 존속했다. 수십만의 인구로 수만 대군을 운용했던 고대 아테네의 사례가 대표적.[29]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고구려 인구는 300만 내외라는 것이 통설이다. 15만 명이면 5%나 된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신성, 안시성 등 전방에 따로 군대가 주둔 중이었다.[30] 그래서 선산과 구미 일대에는 일리천 전투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져 오는데, '일리천'이 정확히 어떤 물줄기를 칭하는 것인지까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낙동강이라는 설도 있고 현재 선산읍을 관류하는 낙동강 지류라는 설도 있다.[31] 당시 고려의 영토는 통일 신라 9주 중 한주, 삭주, 명주, 상주, 양주, 웅주의 반으로 5.5주, 후백제는 나머지 3.5주였다. 하지만 삭주나 명주 등은 곡식과 인구가 부족했으며, (물론 한주가 그만큼 커버했겠으나) 후백제의 영토가 지금의 전라, 경남, 충남을 아우르는 곡창 지대였고 인구도 많았으며, 후백제군은 보병 중심 편제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적어도 6~7만명정도는 되거나 그 이상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다만 대개 해 볼 만한 병력을 동원했지만 총 병력으론 고려군보다는 적을 것이거나 비슷한 범주로 보는 게 많다.[32] 유금필은 북방의 말갈족을 토벌하고 그들에게 대추장이라는 칭호를 받은 바 있다.[33] 후백제군 3,200인을 사로잡고 5,700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34] 아마 견훤도 상대국에 있는 데다 승기까지 기울어진 걸 깨달은 일부가 멋대로 적전도주를 하거나 반기를 들었고, 이를 막느라 서로 싸웠을 가능성이 있다.[35] 탄현이라고도 하며 대전 동구와 충북 옥천군 군서면의 경계의 식장산에 있는 고개로 추정된다.[36] 과거 백제가 멸망할 때 계백과 결사대가 전멸했던 바로 그 황산벌이었다.[37] 한자로는 馬城으로 논산군 황산벌로 유명한 논산군 연산면 또는 익산 미륵산성.[38] 물론 성벽 근처로 무대여서 일리천인가 싶기도 하지만.[39] 당시 견훤의 나이등을 감안하면 전선 곧곧을 누비는건 거의 불가능 했다.[40] 고려와의 일전을 대비해 군사들을 철저히 훈련하여 강군이 됐다며 자화자찬하고 있었다.[41] 무릎을 꿇겠다고도 하고, 그래도 왕건이 주저하자 아예 빌겠다고까지 하면서 겨우 얻어낸 출전권이었다.[42] 왕건도 견훤의 이런 전술에 놀라는 묘사가 있다.[43] 참고로 포로로 잡힌 둘은 신검의 난이 일어날 때 신검에게 가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둘은 신검이 정변을 일으킬 때 구금돼 있었다. 때문에 이 둘은 잡혀서 왕건과 견훤앞에 대령할 때 견훤이 먼저 왕건에게 이 둘은 용서해 달라고 요청한다. 왕건은 "이래서 인심이 무서운 것이오!" 라는 명대사를 남겼다.[44] 황산벌이라는 말이 나오자 후백제 군막에서는 신검의 언급대로 '하필 계백이 전사한 그곳이냐.'며 자신들이 곧 완전히 패망하게 될 것을 직감한다.[45] 기병 5만 + 보군 5만을 더한 총 대군.[46] 대본상에는 신덕도 처형당하는데 신덕을 연기한 배우 임병기(당시 임진일)이 낙마 사고 때문에 항복 후 처형 때까지를 촬영하지 못해 파달이 신덕 몫의 대사까지 하였다. 본래 파달의 대사는 자기를 처형하러 끌고가는 병사들을 뿌리친 후 '놔라 이놈들아! 내 발로 가겠다.'까지의 우직한 대사였지만 '죽는 건 억울하지 않소이다. 그저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하니 억울할 따름이오.'라는 신덕의 대사도 같이 해 퇴장하고 신덕은 조용히 사라진 걸로 처리 되었다. 다만 파달은 견훤을 금산사에 감시하는 나쁜 일을 해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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