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배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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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蕭排押 / 蕭巴雅爾[1]
(? ~ 1023)
요나라의 장군. 여요전쟁 때 고려를 침공했다가 강감찬 장군에게 귀주 대첩에서 격전 끝에 패배한 걸로 알려진 군인 출신 장군이다. 한국사의 전쟁사에서는 그냥 단순히 개인의 정복야욕으로 고려를 정복하기 위해 고려를 침략했다가 전쟁 끝에 패배하여 퇴각한 적장 정도로만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용병술은 물론 정치에서도 상당한 재능을 발휘했던 꽤나 영리했던 문무겸비의 베테랑 장군이었다. 북송 제국에서도 송군을 상당히 고전시킨 공포의 명장이었고, 고려정복전에서 강감찬 장군과의 전투에서 비록 패배하였지만 강조의 군대도 완파한 거란군 최강의 명장 중 하나였다.
자는 한은(韓隠).[2] 거란의 1차 침략 때 군 사령관이자 서희에게 낚인 것으로 유명한 소손녕은 바로 소배압의 동생이었다.
2. 생애[편집]
소배압은 《요사》에 따르면 소부방의 후손으로 기사술(기마 궁술)에 뛰어났으며 요 황제 성종이 즉위했을 때(983년) 황제의 친위군인 피실군의 장군인 좌피실 상온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조복(몽골 초원의 케레이트부로 추정) 원정에서 강력한 전공을 세워 황제의 신임을 얻었고, 986년에는 조빈 장군의 북송군과 망과 전투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이 군공으로 또 승진하여 많은 부대를 이끌게 원정을 다니게 되었고 야율사진과 함께 북송이 점령했던 산서 지역의 영토들까지 탈환하는 위업을 달성한다. 그해 겨울에는 북송 공격의 선봉장으로 남경통군사까지 되었다. 이렇게 북송과의 전쟁에서 많은 전쟁 경력을 쌓았고, 위국공주[3] 야율 가를 아내로 들여 부마가 되었으며 고위 관직에 임명되었다. 군사적 전공뿐만 아니라 나름 정치적인 수완도 출중했는데 995년에는 요 황제 성종에게 정치의 이해나 부역법과 관련한 의견을 상서하면서 피력하는 등 정치적이거나 외교적인 감각이 꽤나 천재적이어서 이에 황제 성종이 그의 정치적 의견을 수렴하였다는 기록도 있고, 1004년 다시 북송을 침공했을 때는 또 일군을 통솔하여 북송 위부(魏府)의 관리들을 전쟁포로로 생포했다. 이 전쟁에서 남경통군사('통군'은 총사령관 정도의 직위) 소달름(蕭撻凜)이 전사하자 남면의 행정을 전담했고, 전연의 맹이 체결된 후에는 북부 재상(北府宰相)으로 등극하였다. 《요사》 <소배압전>에 의하면 이 당시 '소배압 장군의 통치는 온후하고 관대해서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010년 요 황제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할 때 소배압은 통군이 되어 고려군을 연전연파하는 등 전선에서 맹활약했다. 그러나 이때 고려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고 고려 역사상 최강의 성군이라는 현종 역시 나주로 피신하여 고려 군왕도 생포하지 못했던 데다 계속해서 소모전을 일으켰던 양규 장군 등의 맹활약으로 거란의 원정군도 점점 피로가 극에 달하던 탓에 별 소득없이 철군하게 되었다. 그래도 이때의 전공을 인정받았는지 귀국 후에 난릉군왕(蘭陵郡王)에 봉해졌고, 1013년에는 재상직을 겸직하면서 서남면초토사(西南面招討使)의 직위에 임명되었으며 1016년에는 다시 동평왕(東平王)에 봉해졌다.
1018년 고려 정복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재침략했는데 흥화진에서 강감찬의 전술에 의해 공격을 받으면서도 '상남자'답게 이에 굴하지 않고 질풍같이 남하해 완전히 고려의 수도를 점령해서 고려를 정복하고자 진격해 들어갔다. 이 정도 피해면 당연히 물러날 것이라고 예상했던 고려군 역시 당연히 이러한 소배압의 맹렬한 진격에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에 추격군을 따로 급파했으나 이미 소배압의 진격군은 개경 앞 40리 금교역까지 진격하던 상황이었다. 수많은 정복전쟁과 침략, 원정 등을 성공시키는 등 전쟁기계였던 소배압의 전적으로 볼 때 아마 고려 병력이 모두 강감찬이 있는 북쪽에 모두 배치될 가능성이 높다고 여기고 개경으로 쏜살같이 진격해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거기다 저번 2차 침공 때처럼 군왕이 피신을 하게 될 경우 마침 개경 근처에 다다른 상황이므로 곧바로 쫓아가서 생포하면 되었기에 강감찬과 고려군이 아무리 기를 쓰고 추격해온다 한들 그에게는 현종만 생포하면 미션 클리어였다.[4] 하지만 나주까지 피했던 2차 전쟁과 달리 현종은 개경에 남아 성 밖에 청야전술까지 쓰면서 군인들을 집결시켜 거세게 공성전을 준비했고[5] 소배압 휘하의 군단 역시 개경까지 맹렬하게 진격하는 도중 뒤쫓아오는 고려군의 맹추격으로 지속적으로 소모전을 했었던지라 결국 개경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철군하게 된다. 그러나 작전상 철군하는 도중에 귀주에서 고려군 주력과 전쟁하는 상황까지 발생했고 그 결과는 모두가 잘 아는 귀주 대첩. 이 대전투에서 소배압의 거란군은 치열한 전투 끝에 패배했고, 소배압은 겨우 목숨만 건진 채 거란으로 퇴각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어쩐 일인지 이 1018년의 공격도 아우인 소손녕이 이끈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무술일에 거란의 부마 소손녕(蕭遜寧)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침략하면서 군사 10만 명이라고 소리쳤다. 왕은 평장사 강감찬을 상원수(上元帥)로,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군사 20만 8천 3백 명을 거느리고 영주(寧州[6]
)에 주둔하게 하였다.
《고려사절요》 현종 원문대왕 무오 9년(1018년)
그러나 이 시점에서 소손녕은 이미 불미스러운 일을 저지른 것으로 인해 처형된 후였고, 거란 쪽 사료인 《요사》와 《거란국지》에는 분명히 소배압이 사령관이었다고 적고 있는데 아무래도 편집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던 듯하다. 《요사》에서는 이 때의 소배압의 출정에 대해 군사들이 다타이하(茶陀二河)를 도하할 즈음에 추격하는 고려군이 쫓아왔는데 여러 장군들이 모두 고려군으로 하여금 두 거대한 강을 건너게 한 다음 공격하려고 했다. 그런데 당시 소배압 군대의 도감으로 참전한 야율팔가가 "적군들이 만약 두 강물을 건너게 되면 고려군이 배수진을 친 형국이라 결사적으로 싸울 테니 이는 위태로운 방법이므로 두 강물 사이에서 치는 것만 못하다."고 진언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소배압이 그 의견에 따라 두 강물 사이에서 싸웠는데 적군이 양쪽에서 화살을 쏘아 대자 거란군은 패배하고 소배압이 무기를 버리며 퇴각했다고 적고 있다. '다타이하의 전투'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귀주 대첩이다.
“다타이하를 건널 적에 적이 협공해서 활을 쏘자, 소배압이 갑옷과 병장을 버리고 달려왔던 바 이로 인하여 파면되었다.”
《요사》 권88 <열전> 18 소배압고
요 황제 성종은 수많은 정복전쟁과 침략전쟁에서 승리했던 용장 소배압 장군의 충격적인 고려 정복실패 소식을 듣고, 목숨만 겨우 건진 채 돌아온 소배압한테 크게 분노하며 "네가 적지에 너무 깊이 들어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무슨 낯짝으로 짐을 보겠느냐, 너의 얼굴 가죽을 벗겨 죽이고 싶다!"고 극딜을 퍼붓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황족의 부마이자 사적으로는 외사촌이라 함부로 처벌할 수 없었던 듯.[7] 그러나 워낙에 참패로 많은 군인들이 죽었던 만큼 죽이지 못했어도 대참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모든 관직을 추탈당하고 말았다. 1023년 빈왕(豳王)에 봉해져 다시 재기하나 싶었지만 그해에 사망했다.[8] 이때 소배압의 도감이었던 야율팔가 역시 소배압과 함께 출병했을 때는 재상직에 있었으나 판단 실수의 책임[9] 을 지고 강등당해 서북로 도감으로 있다가 사망했다.
80년대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귀주대첩을 간추려 싣은 바 있는데, 소배압을 무능한 적장으로 묘사한 바 있다. 그저, 개경으로 닥돌하면 된다라고만 나온 것.
3. 행정공무원과 전투를 했던 소배압?[편집]
소배압은 수많은 정복, 침략전쟁들과 원정들에서 승리하면서 승승장구하던 베테랑격의 무시 못할 엘리트 장군이었지만 고생만 하고 소수의 병력으로 전투에 처음 입문한 20대 청년 군주와 전쟁에 처음 출병한 것이나 다름없는 장군[10] 에게 당한 단 1번의 치명적 전쟁패배 때문에 몰락했다.
사실 고려는 중세 봉건제에 가까운 호족 연합 정권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기에 조정에 문관으로 출사한 인물들이 거의 모두 각자 따로 사병들과 지방 영지를 갖고 있던 지방 영주들이었고, 특히 휘하에 강력한 사병들까지 두고 있었다. 즉 자신이 직접 휘하 사병들을 통솔하면서 전쟁들을 해왔기 때문에, 아예 사병도 없었던 조선시대 문관들보다는 군대나 전쟁 실력이 훨씬 우수했다.[11] 이들은 고려의 최상위 계층이었기에 전시에도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내정되었다. 무관들은 관직말고도 신분상 대개 그들의 밑이었기에 당시 시대상 총사령관 같은 지위를 맡기는 힘들었고 대부분 선봉장의 임무를 수행했었기 때문이다. 다만 문관 출신들은 군대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경우라도 대개 전문적인 무관보다는 못했으며 실전에서도 이들의 보좌를 받아야 했다. 즉 문관들이 대국적인 면에서 큰 방향을 지시하거나 전쟁을 지휘하면 밑의 무관들이 선봉장에 서서 직접 전투를 담당했던 것이다. 총사령관인 강감찬 같은 이들의 역할은 전쟁터를 진두지휘하거나 목표를 제시하면서 자신들이 필요하다 싶은 영역에서 나서는 것이었고,[12] 무관들은 이를 등에 업고 군 병력을 지휘 목표를 완수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렇게 뒷받침을 해줘도 그마저도 못해내는 문관들도 많았고 이게 일반적이며 이로 인해 병크가 많았다. 오죽하면 조방장인 무관이 지휘관인 문관에게 칼을 들이밀며 퇴각하지 말라고 위협했을까. 애시당초 그쪽 계열은 그들 전문이 아니긴 했지만 말이다.
반면 강감찬과 달리 척준경의 행보는 전형적인 무관 아니 그 이상 전쟁기계급의 행보였다. 당장 추밀원만 하더라도 고려 때 군기(軍機)·왕명의 출납·궁중의 숙위(宿衛) 등을 수행하던 관청이었으며 별가(別駕)도 향리(鄕吏)의 후계자 중에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사람들에게 주는 이름뿐인 직위였었다. 또한 고려에서 문관과 무관은 둘 다 문산계에 속해있었으며, 무산계는 군병들 말고는 무관하고는 상관없는 지방 향리와 그 자손, 대장장이 같은 장인, 탐라 왕족 같은 이들이 받는 말만 무산계인 루트였다. 나중에야 문관 관직을 맡았지만 무관 관직은 정3품이 끝이었기에 더 출세하려면 당연히 전직을 거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관들이 군사 지휘도 다했다는 식의 서술을 하는 건 역사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그들 말대로라면 이성계도 나중에는 수문하시중에 문하시중까지 문관 관직을 맡았으며 이순신도 정읍 현감을 맡은 적이 있으니 문관이라고 우기는 꼴이다.
강민첨 역시 2차 거란전쟁 때부터 활약한 경력이 있었다. 강민첨의 기록인 "본래 서생이었기에 무술은 그의 장기가 아니었다"라는 문구에서 나오듯이 무술이 개인 소양인 무관과는 거리가 있는 문관이었으나 거란의 2차 침략 때 서경을 방어하면서 이름을 날렸고 3차 침략 전엔 여진족의 침략도 막아냈다. 후대의 권율과 같은 케이스.
그러나 무관처럼 말타는 실력이 뛰어나고 검을 능수능란하게 쓰고 활을 자유자재로 쏘며 평생을 전투와 지휘, 통솔같은 군무만 하는 군인들에 비하면 문관들이 전문도와 숙련도가 떨어지는 건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는 당연한 것이 문관들은 태어날 때부터 정도는 달라도 중세 유럽의 영주들과 마찬가지인 지배자들인 지방 호족들이 조정에 출사하여 문관으로 등용되는 것이었고, 무관들은 일종의 전문직 계층이었다.
따라서 소배압은 행정공무원과 전투를 벌인 것은 맞는데 그 행정공무원이 그냥 문관이 아니라 전쟁과 전술에 대해서 어느 정도 잘 알고 있는 행정공무원이었고, 그가 결정을 내리면 알아서 일처리를 해주는 직업군인들이 보좌하는 총리급 행정공무원과 전투를 했던 것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군무원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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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름인 '배압'은 거란어로는 '바야르'(Bayar)로 읽는다. 바야르는 몽골어족 계통 언어에서 '기쁨'이라는 뜻이다.[2] 당시 거란 황제 성종의 가신이자 장군이었던 야율사진(耶律斜軫)의 자와 같다. 한자도 똑같다.[3] 위국공주는 경종과 승천황태후 사이의 공주였다.[4] 근세시대에 그런 식으로 성공한 전쟁이 병자호란.[5] 개경은 수도이지만 엄연히 평야에 세워진 평지성이라 전시에 공성하기에는 매우 힘들다. 전쟁기계이자 군사강국이었던 고구려도 국내성이 평소에 수도였지만 전쟁 때는 산성인 환도성을 수도로 이용하는 전술을 자주 썼다.[6] 현재 평안남도 안주시[7] 소배압 장군은 요 황제 성종의 모후인 예지황후의 조카였다.[8] 요 황제 성종은 소배압의 명예는 회복시키되 완전히 용서하지는 않았던 듯 하다.[9] 사실상 다타이하(茶陀二河)의 전투, 즉 귀주 대첩에서 패배한 결정적인 원인은 야율팔가가 잘못된 전술을 제의했기 때문이었으니 어찌보면 야율팔가가 전쟁패배의 원흉이었다.[10] 강감찬은 84년 평생동안 무기와 갑옷을 착용했지만 직접 전투를 치른 기간은 귀주 대첩 때의 단 3개월뿐이라고 한다. 문벌귀족 출신이어서 그렇지, 군복을 착용한 기간만으로 따지면 실상 이등병 정도의 경력에 불과한 수준.[11] 사실 조선의 문관들도 알고보면 고려의 문벌귀족들처럼 초기에는 영지와 사병을 가진 지방 영주들이었다. 그러나 1차, 2차 왕자의 난과 조사의의 난을 겪으면서 태종이 사병의 위험성을 알고는 사병 혁파를 하고 철저하게 사병을 금지하면서 사병이 없어진것이다.[12] 당장 진군로 상의 지방 유력자 같이 중앙군의 명령을 들어야 하는 입장에선 전문직 계층보다는 중앙의 높은 귀족의 한마디가 더 위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