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遼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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耶律世良
(? ~ 1016)
거란(
요나라)의 최전성기였던 제6대
성종 때의 장수로, 어릴 때의 자는 알(斡)이었다.
육원부 사람으로 거란의 역사와 계보에 정통했고, 재주가 있었다. 집안의 아우인 야율적렬과 적•서의 구별을 두고 다투면서
성종 야율문수노(야율융서)가 야율세량을 알게 되었다.
한덕양이 병에 걸리자, 성종이 병문안하면서 물었다.
"누가 당신을 대신할 수 있겠소?"
한덕양이 답했다.
"야율세량이 가능합니다."
북원대왕 야율실로가 다시 북원추밀사에 선발할 사람을 물어보니, 한덕양이 답했다.
"야율세량을 따를 자가 없습니다."
통화 연간 말기에 북원대왕이 되었고,
1012년에는 검교태위 겸 문하평장사가 되었으며, 당시 국경에서 명령을 거부하자 야율화가에게 군사를 보내고 야율세량을 도감으로 삼아 수도를 지키도록 했는데,
1013년에 야율화가가 군사를 철수시키려 하자 야율세량은 부대가 늙고 식량이 부족해 적이 이미 떠났으니 어찌 오래 버틸 수 있겠냐면서 군대가 돌아가면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성종이 즉시
야율화가에게 군사를 모아 야율세량과 함께 추격하도록 하자 안진하에 이르러 그들을 격파했다. 이에 국경이 평온해졌으며, 이 공로로 야율세량은 북원추밀사가 되었다.
1014년에 오고부를 위해 낙타를 선발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적렬부 사람들이 추장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켜 이웃 부족들이 모두 호응하면서 거모의 고성을 함락시켰다. 이에 야율세량이 군대를 이끌고 국경으로 가 병사들을 모집한 후, 여러 부족을 항복시키고 옛 땅으로 돌려보냈다.
1015년에는 유신행을 도통으로, 야율세량을 부도통으로 임명하여
고려로 진격시켰는데, 유신행이 변방까지 가족을 데리고 가는 바람에 군대가 모이기로 한 날짜에 늦자 수도로 돌아가도록 하면서 야율세량이 군대를 진격시켰으며,
1016년에 곽주에서 고려군을 대파했지만 군영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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