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遼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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康默記
(? ~ ?)
요나라의 인물. 본명은 강조(康照)이다.
강묵기는 본래 한인으로써 계주아교(薊州衙校)를 지냈는데
태조(太祖)가 계주를 침공하였을때 그 재주를 아끼어 휘하에 삼았다. 태조는 그에게 번(蕃)과 한(漢)인 사이의 모든 일을 절충하도록 하였는데 모든 처리가 황제의 뜻에 부합했다. 또 여러 부족들이 새로 귀부해오자 그들이 법률을 갖추지 않음을 보고 법률의 뜻을 추론하고 분석하여 경중에 따라 판결을 내렸는데 털 끝 하나 어긋나지 않았고 법에 걸린 사람들도 모두 스스로 억울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 무렵 그는 좌상서(左尚書)에 이르렀다.
신책(神冊) 3년, 도읍을 세우는 일을 감독하였는데 능히 백 일 안에 해내었다. 그 후 태조가
거용관(居庸關)으로 출병하자 따라 나서 많은 적들을 포로로 잡았다.
천찬(天贊) 4년, 태조가
발해(渤海)를 친정하자 한지고(韓知古)와 함께 종군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후에
대인선(大諲譔)이 다시 배반하자 동문을 맡아 가장 먼저 성 위에 올랐다. 그리고
한연휘(韓延徽)와 함께 장령부(長嶺府)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 냈다. 군대가 회군하자 항복했던 많은 성들이 다시 배반하였는데 소아고지(蕭阿古只)와 함께 평정하였다. 이윽고 회발성(回跋城)을 무너뜨리고 돌아와 태조의 능을 조영하고 죽었다.
좌명공신(佐命功臣) 중 한명이였다.
손자 강연수(康延壽)는
경종 대에 천우위대장군(千牛衛大將軍)을 지내고 남경(南京)을 공격한 송나라군을 궤멸시킨 공으로 대군절도사(大軍節度使)를 지내다 건형(乾亨) 3년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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