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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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왕족
호칭
발해왕제(渤海王弟)
발해왕(渤海王)?[1]
직위
미상
성씨
대(大)
이름
미상
생몰연도
미상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의문점
5. 관련 기록



1. 개요[편집]


발해 말기의 왕족, 부흥운동가. 구오대사, 송사, 책부원구, 오대회요에서 언급되는 인물로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발해왕제는 발해왕의 동생이라는 뜻인데, 구오대사에서 '지금 발해왕의 동생(今渤海王弟)'으로 기록된 점으로 보아 마지막 국왕인 대인선의 아우로 추정된다.

대씨족보에는 해당 인물이 대권으로 나와있지만 후대의 기록이기에 실제 이름이었을 가능성은 적다.


2. 생애[편집]


926년 음력 7월 야율아보기가 죽은 후인 부여성을 포위해 공격하였다고 한다. 공격 이후의 기록은 없으나, 송사 외국열전에서 이길 수 없었다(不能克)고 적은 걸 보면 발해왕제의 부여성 공격은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오대회요에 의하면 부여성 전투 이후 무리를 보존하여 퇴각하였다고 하나,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3. 기타[편집]


  • 2005년 영화 무영검에 등장하는 발해 왕족 대정현은 이 인물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 대인선의 조카인 대원겸, 대원양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이 발해왕제의 아들인지는 불명.
  • 조선 후기 학자인 정약용은 고려로 망명한 세자 대광현이 발해 멸망 후 임의로 왕위에 오른 발해왕제(대인선의 아우)의 아들로 보기도 했다.

4. 의문점[편집]


구오대사, 송사, 책부원귀에서는 926년 음력 11월 발해왕제의 부여성 공격기사를 실고 있으나 직접 맞붙은 거란 측의 기록인 요사거란국지에서는 926년 음력 7월 ~ 음력 11월 사이 발해왕제의 부여성 공격이 기록되지 않았다.

다만 같은해 8월 발해 15부 중 부여부와 인접한 장령부(長嶺府)가 거란에 저항하자 강묵기(康黙記), 한연휘(韓延徽) 등의 거란군이 장령부를 공격[2]해 회발성(回跋城)을 함락한 기록[3]이 남아있다. 장령부는 부여부와 인접한 지역이므로 왕제 세력은 장령부 지역에서 저항했을 가능성이 있고, 후당 측에 보고된 내용에 오류가 있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5. 관련 기록[편집]


十一月戊午, … 靑州奏, 得登州狀申, 契丹先攻逼渤海國, 自阿保機身死, 雖已抽退, 尙留兵馬在渤海扶餘城, 今渤海王弟領兵馬攻圍扶餘城內契丹次. 【案, 契丹次, 蓋言契丹方卽次也. 薛史前後如攻城次·鎭州次, 多單用次字, 疑卽當時案牘之文, 今仍其舊, 附識于此. 舊五代史考異】

11월 무오일, (...) 청주(靑州)에서 아뢰기를, “등주(登州)의 보고에 따르면 거란이 먼저 발해국을 공격하였는데 아보기(阿保機)가 죽자 이미 퇴각하였으면서도 오히려 군대를 발해 부여성(扶餘城)에 머물게 하여, 지금 발해왕의 아우[今渤海王弟]가 군대를 거느리고 부여성(扶餘城) 안의 거란군을 포위하여 공격한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거란차(契丹次)’는 거란이 바야흐로 머물었음을 말한다. 『구오대사[薛史]』의 앞뒤에 ‘공성차(攻城次)’, ‘진주차(鎭州次)’와 같이 단지 ‘차(次)’자만을 쓴 것이 많아 당시 문서의 문구가 아닌가 한다. 지금 옛 것을 그대로 하여 여기에 붙여 알린다. 『구오대사고이(舊五代史考異)』】

-『구오대사(舊五代史)』권37卷37 당서(唐書)13 명종(明宗)3 天成 元年 11月 戊午-


阿保機死, 渤海王復攻扶餘,不能克.

아보기가 죽자, 발해왕(渤海王)이 부여(扶餘)를 침공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송사(宋史)』외국열전 발해(渤海)-


明宗天成元年(926) 十一月, 靑州霍彦威奏:「得登州狀申, 契丹先發諸部, 攻逼渤海國. 自阿保機身死, 雖已抽退, 尙留兵馬, 在渤海扶餘城, 今渤海王弟部領兵士, 攻圍扶餘城契丹.」.

명종(후당) 천성(天成) 원년 11월, 청주(靑州)의 곽언위(霍彦威)가 아뢰길, "등주(登州)의 보고에 따르면 거란은 제부(諸部)를 먼저 출동시켜 발해를 공격하였습니다. 아보기(阿保機)가 죽었으나 이미 퇴각하였으나 상당 수의 병사와 말들이, 발해 부여성에 있고, 지금 발해왕의 동생이 부의 병사를 이끌고 부여성에서 거란(契丹)을 포위해 공격하였습니다."

-『책부원구(册府元龜)』권195 외신부-


(중략) 未幾, 阿保機死, 渤海王命其弟率兵攻扶餘城, 不能克, 保衆而退.

(중략) 얼마되지 않아 아보기(阿保機)가 죽고, 발해왕(渤海王)은 그 동생(弟)에게 명하여 병사를 인솔시키고 부여성(扶餘城)을 공격하게 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무리를 보존하여 퇴각하였다.

-『오대회요(五代會要)』 권30(卷三十) 발해(渤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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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송사의 기록. 대인선이 거란으로 끌려간 상황이라 칭왕했을 가능성도 있으나 '渤海王弟'의 오기로 보인다.[2] 요사 강묵기, 한연휘 열전 참조.[3] 요사 소아고지 열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