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율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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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耶律斜軫, ?~999
요나라의 명장. 야율휴가와 함께 북송군을 격파했으며 북송의 명장 양업을 생포했다.
2. 생애[편집]
2.1. 소년 시절[편집]
야율사진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생계를 잘 관리하지 못하였다. 969년 추밀사 소사온이 조정에 야율사진을 천거하여 나라를 다스릴 재간이 있다고 하자, 요 경종 야율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사온이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그것도 알고 있지만, 그가 방탕하여 어찌 몸을 굽혀 통제를 받겠느냐?
그래서 요 경종은 야율사진을 불러 군국의 대정을 물었고, 야율사진의 대답은 사리에 부합하여 요 경종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황후 소작의 조카 소씨를 아내로 맞아들여 서남쪽 군대를 통제하고 북한군을 도우라는 명을 받았다. 남원대왕으로 자리를 옮기고 서남면 초토사로 임명되었다. 979년 6월에는 북원대왕으로 임명된다.그는 겉보기에는 방탕해 보이지만 재주는 무한합니다.
2.2. 북송군 격파[편집]
979년 북송은 다시 북한으로 진격했고, 야율사진은 야율사를 따라 백마령(지금의 산시 우현 동북)에서 송군을 만났는데, 야율사 등은 전투에서 패배했고, 야율사진은 군대를 이끌고 출격하여 부하들에게 만 발의 화살을 일제히 쏘라고 명령했고, 송군은 위세에 눌려 용기를 잃고 물러났다. 같은 해 가을, 송군은 하동을 점령하고 승승장구하여 연지를 공격했고, 북원왕 야율해저는 소토구와 맞섰고, 요군은 패배하여 청하 이북으로 퇴각했다. 야율사진은 승리하는 입구에서 야율해저 등을 내세워 송군을 유혹했고, 송군 역시 그리로 달려갔다. 야율사진이 뒤에서 출병하여 송군을 격파했고, 이어 수수강 전투에서 야율휴가와 함께 좌우로 협공하여 송군을 대파했다.
982년 4월, 요 경종은 직접 북송을 통군하여 만성에 도착하여 송군과 교전하다가 패하였고, 수태위 야율해와리는 화살을 맞고 사망하였습니다. 통군사 야율선보는 송군의 복병에게 포위되었고, 당시 추밀사였던 야율선보가 이를 구원하러 달려가 위기를 면했다. 요 경종은 방비를 소홀히 한 죄로 야율선보에게 벌을 내리라고 명한다.
2.3. 여진 전선에서[편집]
982년 9월, 요 경종이 죽고 요 경종의 장남 야율문수노가 즉위하였고 예지황후 소작이 황태후로 섭정하였다. [1] 야율사진은 더욱 신임을 받아 북원추밀사를 맡게 되었다.
986년 정월 7일, 야율사진과 임아근덕 등은 여진이 사로잡은 포로 10여만 명, 말 20여만 필과 각종 물품을 징발했고 이후 정월 13일에는 임아근덕, 모로고, 안길 등과 함께 여진족을 공략했다. 회군한 뒤 성종은 그의 무공을 표창하고 또 술과 포를 주어 그들을 위로했다.
2.4. 양업 생포[편집]
986년 3월, 북송은 조빈, 미신, 양업을 필두로 하여 요를 공격했다. 태후 소작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구원하여 야율사진을 산서로 병마도통으로 파견했다. 양업이 산시성의 여러 군을 함락시키고 각각 군대를 파견하여 스스로 대주에 주둔시켰다. 야율사진은 정안[2] 에 도착하여 송나라 장수 하령도군을 만나 격파하고 오대까지 추격하여 수만 명을 참수했습니다.다음날 울주[3] 에 도착하여 송군이 감히 출전하지 못하자, 야율사진은 견백으로 하여금 편지를 써서 성으로 쏘아 보내, 초무의 뜻을 수비에게 알리고, 북송의 원군이 온 것을 은밀히 탐지하여, 밤에 사람을 보내어 험한 곳에 매복시키고, 송군의 병사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송군 수비대는 구원군이 오는 것을 보고 포위를 뚫고 나왔고, 야율사진이 뒤에서 출격하여 송군이 모두 패하자 비호까지 추격하여 2만여 급을 참수하고 울주를 빼앗았다.
하령도와 반미가 다시 군대를 보내 야율사진이 비호를 맞아 격파했고, 이에 혼원과 응주에 주둔하고 있던 송군은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야율사진은 양업이 공격하러 온 것을 알고 소달름[4] 에게 길가에 매복하라고 명령한 다음날 양업의 군대가 도착하여 야율사진이 군사를 이끌고 진을 쳤다. 양업이 깃발을 흔들며 전진하자 야율사진은 뒤로 물러나는 척했다. 복병이 출격하고 야율사진도 다시 공격하여 양업이 패주하고 낭아촌에 도착했을 때 북송의 모든 병사들이 궤멸하게 되었으며 양업은 화살을 쏘다가 야율사진에게 생포된다. 야율사진은 그를 꾸짖었다.
양업은 오직 죽을 죄를 계속 말할 뿐이었고, 체포된 지 사흘 만에 단식 끝에 죽는다.너는 우리와 30여 년 동안 겨루어 왔는데, 오늘 무슨 낯으로 나를 만나러 왔는가?
2.5. 왕에 봉해지고 세상을 떠나다[편집]
야율사진은 조정으로 돌아온 후 공로로 수태보로 승진하여 위왕에 봉해졌다. 999년 태후 소작을 따라 북송을 토벌할 때 군에서 죽었다. 태후 소작은 직접 가서 애도하고, 매장할 관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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