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숙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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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여요전쟁 공신
김숙흥
金叔興

출생
생년 미상
사망
1011년 3월 11일[1]
(음력 1월 28일)
공훈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

1. 개요
2. 장렬한 최후
3. 사후
4. 대중매체



1. 개요[편집]


고려시대 여요전쟁 때 활약한 장군.


2. 장렬한 최후[편집]


2차 여요전쟁 당시 요나라성종이 개경에서 퇴각할 때, 귀주별장으로서 중랑장 보량과 함께 습격하여 거란군 1만 명을 죽였다. 1011년 음력 1월 28일, 김숙흥은 양규와 함께 애전(艾田)[2]에 거란군 한 부대가 접근한다는 정보를 받고 애전에서 이 부대를 요격해 1천여명의 목을 벤다. 그런데 이 애전에 성종이 직접 이끄는 거란군 본대가 나타난다. 거란 황제의 친위군이었던만큼 꽤 많은 병력이 양규 부대를 포위했다.

김숙흥은 양규와 함께 성종의 친위군을 맞아 화살이 떨어지고 병사들이 다 쓰러질 때까지 처절하게 싸웠고, 마침내 힘이 다해 김숙흥과 양규는 휘하 고려군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고 만다. 양규와 김숙흥의 최후 분전은 철수하는 거란군에게 최대한 타격을 입히려고 한 것도 있었을 것이고 구출한 고려 백성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싸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 전투는 양규와 김숙흥의 엄청난 전공인데, 사람의 노동력이 가장 중요하던 시기에 양규와 김숙흥은 그야말로 고려가 나중에 3차 침입에 대비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 잡혀갔다가 풀려난 백성들이 나중에 군사나 전쟁 시에 일어날 군량미 등을 보충해 줄 수 있으며 고려는 양규와 김숙흥 덕분에 외교를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더불어 요 성종에게 정신적으로 큰 굴욕감을 주었다. 황제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왔는데 항복을 받아내기는커녕 양규와 김숙흥의 게릴라 전술에 계속 털리면서 품위 유지가 불가능할 정도로 모욕을 당한 것.

명색이 황제인 요 성종의 군대는 양규와 김숙흥의 죽음의 뒷치기와 저항으로 돌아가는 길이 말이 아니었다. 무기가 녹슬거나 말이나 낙타들도 죽는 등 귀국길이 영 좋지 않았으며 거기다 압록강을 건너려던 순간에 양규의 임지였던 흥화진의 정성이 뛰쳐나와 그들의 배후를 찔렀다. 정성의 게릴라 전술도 양규와 김숙흥의 활약 덕분에 가능했던 것인데, 그간 거란의 위세에 밀려 숨죽이고 있던 고려 병사들이 용기를 "지금이 기회다!"라면서 복수전을 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양규와 김숙흥은 백성들의 구출 뿐만 아니라 군사들에게도 요나라에 대한 저항 의식까지 심어준 것으로 보인다.


3. 사후[편집]


사후 김숙흥은 그 대활약에 걸맞게 국가유공자의 대우를 받았다. 현종은 김숙흥을 장군직으로 추증했고, 그 어머니 이씨에게 매년 쌀 50섬을 지급하도록 했다.

여요전쟁이 완전히 끝난 현종 10년(1019년)에 현종은 양규와 김숙흥을 공신으로 삼았고 1024년에는 삼한후벽상공신이라는 공신호를 추증했다. '삼한벽상공신'은 태조 왕건이 건국공신들에게 내려준 공신호이니 건국공신과 다름없는 공신이라는 의미인 셈. 뒷날 문종은 두 사람의 초상화를 공신각에 봉안하게 했다.


4. 대중매체[편집]


KBS천추태후》가 이 시기를 다뤘던 만큼 등장했다. 배우는 홍성호.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그야말로 인간흉기이며 용장의 면모를 보여줬다. 세계관 최강자인 양규, 강조에 한끝 모자라는 정도이며 사실상 세계관 최강자의 모습이다.[3] 거란군의 에이스 장군인 야율적렬을 베는 모습도 보여줬다. 2차 여요전쟁때 양규와 함께 화살을 맞고 선 채로 죽는 최후의 순간에도 도망가는 거란군을 노려본다.

KBS고려거란전쟁》에서도 2차 여요전쟁 시기와 흥화진 전투가 지나가면서 등장하며 배우는 주연우. 1화에선 국경을 넘어왔다가 고려군에게 발각당해 추격을 당한 거란의 척후병이 국경을 넘어가자, 철수하란 명령에도 불구하고 척후병을 죽이겠다며 홀로 국경을 넘어갔다가 포로로 잡힌다. 이 후 포로교환으로 넘어온 김숙흥은 군령을 어겼음에도 자숙을 겸해 감옥에 가뒀으나, 거란에 대한 복수심을 드러내며 감옥에서도 깽판을 부리는 모습을 보였다. 자숙기간이 끝나며 귀주로 발령보내는데, 김숙흥 본인은 더이상 거란하고 싸우지 못하도록 벌을 내리는 것이라 생각해 격분하나, 거란의 군대와 귀주쪽에서도 싸울 일이 있을거라는 설명에 납득하여 명령에 따르게 된다. 위에서는 대충 통제하기 힘든 와일드 카드 정도의 취급인 듯.
보통의 한국 사극에서 표현하는 장수들과 다르게 원거리 무기로 활이 아닌 쇠뇌를 사용한다.

고려사를 다루는 학습 만화에서는 양규와 같이 결의를 다짐하는 장면이 많이 나와 가히 무협지를 뺨치게 한다. 요 성종이 올라오자 양규와 함께 칼을 들고 "저승에서 뵙겠습니다, 장군!"이라고 말하자 양규도 고개를 끄덕여 함께 싸우고, 결국에는 화살이 많이 박혀 임종이 다하기 전 "장군, 먼저 쉬겠소."라고 하며 쓰러지자 양규도 "수고하셨소."라는 말과 함께 전사하는 장면은 가슴이 찡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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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율리우스력 3월 5일.[2] 공교롭게도 지명이 쑥 애(艾)밭 전(田)이라서 쑥밭이라는 의미가 된다. 오늘날의 위치는 정확하지 않지만 실향민 출신 전원곤 씨의 말에 의하면 고향인 평안북도 선천군 태산면 길성동 전촌(전씨 집성촌) 부락 근방에 양규가 전사한 고개가 있었고 거란군과의 전투 이후 마을이 페허가 되어 인적이 끊긴 이후로 쑥만 무성한 쑥밭이 되어서 애전현으로 불렀다고 한다. 거란 군사들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쑥대밭으로 만든 것은 맞다.[3] 사실 양규와 무예 대회 결승에서 졌을 때도 수십합을 주고 받은 다음에 진거여서 일방적으로 졌다고 보기에도 뭣하다. 이 정도면 거란군에서 양규, 강조는 말할 것도 없고 김숙흥을 이길 자도 없을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