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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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納哈出(납합출)
ᠨᠠᠭᠠᠴᠦ(Naγaču)
(? ~ 1388년)

원나라 출신 인물로 북원의 장군. 한글로는 '나가추'라고 표기하기도 한다.[1] 한자 독음이 아니라 중세 몽골어 발음을 표기한 것이다.


2. 생애[편집]





몽골 제국명장이자 칭기즈 칸이 총애했던 사준사구 중 한 명인 잘라이르 무칼리의 후손으로 그의 집안은 요동 지방에서의 군사적 실권을 가지고 대대로 그 지역에 대한 책임을 맡아 왔다. 원나라가 멸망하고 막북(漠北)[2]으로 후퇴하여 북원이 된 시점에서 선양을 근거지로 삼아 스스로 행성승상(行省丞相)이라 칭하며 만주 지방에서 세력을 뻗쳤다. 그는 북원소종 아유르시리다라 칸과 함께 협력하여 명나라를 압박하는가 한편 만주 지방을 비롯해 한반도 북부 전역까지 손아귀에 넣으려는 야심을 드러냈는데, 1362년 2월엔 제4대 쌍성 총관이었던 조소생 및 탁도경의 잔당과 함께 수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동북면 쌍성[3]을 침공해왔다.

고려 조정에서는 도지휘사 정휘(鄭暉)를 보냈으나 나하추에게 연달아 대패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했다.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은 함흥 평야의 대회전에서 대승을 거두며 조소생, 탁도경의 잔당을 완벽히 뿌리뽑았고, 나하추의 한반도 진출 역시 좌절시켰다.[4] 이때 나하추는 이성계의 전략에 감명받았는지 공민왕과 이성계에게 예물을 보내며 화친을 맺고, 고려에서도 그에게 정1품 벼슬인 삼중대광사도를 하사했다. 정1품 벼슬 하사는 이례적인 경우로 고려에서도 나하추와의 관계에 신경을 많이 썼고, 명나라 홍무제 주원장 역시 고려와 나하추가 연합하는 상황을 우려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성계가 (나하추의) 말을 쫓아 추격하니 “이 만호(李萬戶)여! 두 장수끼리 어찌 이리 핍박하는 것이오?”라고 했고, 또 나하추가 말하기를 “지난 날 원 조정에서 이자춘과 마주쳤는데 이자춘이 나에게는 재주 있는 아들이 있다더니 과연 거짓이 아니었네.”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환경이 척박해 인구가 적은 요동에서 여진족은 중요한 군사 자원이기도 했는데, 명 태조 주원장과 나하추 그리고 이성계 가문은 여진족 쟁탈전을 벌이기도 했다. 즉, 나하추와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나하추는 고려에 대한 군사적 공세를 포기하고, 방향을 바꿔 요하를 엿보면서 세력 확장을 꾀하였으나 중원에서 새롭게 발흥한 명나라주원장은 1387년 정로대장군 풍승(馮勝)[5]의 지휘 아래 좌부장군 부우덕,[6] 우부장군 남옥[7]의 20만 대군을 요동으로 출병시켜 나하추의 근거지인 금산을 점령하도록 했다. 주원장은 20만 대군과 함께 은밀히 과거 나하추의 부하였던 자를 나하추에게 보내 협상을 시도했다. 사실상 항복 권유였다. 부우덕의 군대와 남옥의 군대는 실질적인 명나라 주력군으로 최정예였지만, 이는 반대로 만일 심각한 손실이라도 발생한다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초래될 수도 있으니 주원장 입장에서도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최선이었다. 이때 나하추는 하늘을 보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하늘이 나에게 이 무리를 거느리지 못하게 하는구나”라고 하였다. 결국 명군에 항복했고, 그가 항복하자 약 20만 명의 대군 역시 그를 따라 투항했다.[8] 나하추의 투항으로 천원제 토구스테무르 칸의 북원은 심각한 위기를 맞았고,[9] 끝내 천원제가 살해당하면서 쿠빌라이계 북원의 명맥은 끊어지게 되었다.[10]

이후 해서후(海西侯)에 봉해졌고, 명군 장수로서 몽골과 토착계 잔당들이 남아있는 운남 정벌에 나섰다가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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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나가추'라고 나왔다.[2] 고비사막의 이북지역[3] 지금의 함경남도 홍원 지방.[4] 1362년(공민왕11) 2월 나하추는 쌍성(雙城 : 현재 함남 永興)을 치고자 수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으나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 이성계에게 참패하고 달아났다. 이 이야기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제35, 36, 38장)와 《납씨가》(納氏歌)에 잘 나타나 있다.[5] 송국공(宋國公) 풍승. 명(明) 왕조 1등 개국공신에 해당하는 6명의 공작(公爵)들 중 한 명. 주원장은 태자가 급사하자 손자에게 황위를 물려주려 했는데 풍승이 위협이 된다고 느꼈는지 훗날 주원장에게 처형당했다.[6] 남옥과 함께 주원장이 총애하던 장수였으며, 며느리가 주원장이 가장 아끼던 딸 수춘(壽春) 공주였다. 남옥이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왕필과 함께 출로를 모색했다는 고변이 주원장에게 들어갔다. 어느 날 주원장이 부우덕에게 그의 두 아들을 데려오라 했으니, 누군가 이르기를 이는 두 아들을 죽여서 데려오라는 뜻이라고 했다. 부우덕은 피가 떨어지는 두 아들의 목을 가지고 주원장에게 갔다. 그리고 주원장에게 저주를 퍼붓고는 자결했다.[7] 주원장은 남옥을 일컬어 "나의 중경(仲卿)이며, 약사(藥師)다"고 할만큼 주원장이 아끼던 명장이었다. 중경(仲卿)은 전한 무제때의 명장 위청, 약사(藥師)는 당나라 태종때의 명장 이정을 말한다. 1388년 남옥은 총사령관으로서 15만 대군을 이끌고 북원 정벌에 나섰다. 부이르 호수에서 북원 군대를 대파하고, 마침내 쿠빌라이계 북원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훗날 주원장에게 처형당했는데, '남옥지옥'(藍玉之獄)으로 불리는 이 대옥사로 인해 남옥과 연루되어 처형당한 자가 20,000명이었다.[8] 《太祖實錄》 卷182 洪武 20년 6월 丁未條 “得其各愛馬所部二十餘萬人”[9] 나하추가 버티고 있어 명나라가 북원을 직접 공격하지 못했는데, 나하추가 항복함으로써 북원을 직접 공격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10] 다만 몽골은 이후에도 이어졌고, 종종 후대의 대칸들이 북원을 칭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