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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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
2. 기타
3.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文殊菩薩

불교의 대승보살(大乘菩薩) 가운데 하나. 줄여서 문수(文殊)라고도 하며, 대승 불교에서 최고의 지혜를 상징한다.

문수는 문수사리(文殊師利) 또는 문수시리(文殊尸利)의 준말이고, 문수사리는 범어로는 만주슈리(Manjushri)를 한자로 음차한 것이다. '만주'[1]는 달다(甘), 묘하다, 훌륭하다는 뜻이고, '슈리'는 복덕(福德)이 많다, 길상(吉祥)하다는 뜻이다. 합하여 '훌륭한 복덕을 지녔다.'는 명칭이 된다.

문수보살은 부처님이 열반한 뒤 인도에서 태어나 반야(般若)의 도리를 선양한 이로서, 반야지혜의 권화(權化)로서 표현되었고 지혜를 취급한 ≪반야경≫을 결집•편찬했다고 한다. 또한 석가모니불의 교화를 돕기 위해 일시적으로 보살의 지위에 있지만 이미 예전에 성불하였고, 미래에 성불하여 보견여래(普見如來)가 될 보살이라고 한다. 문수보살은 다른 보살 1만 명과 함께 중국 산서성 오대산(五臺山)[2]에 상주한다고 한다.

재가신자의 자세와 태도를 설법하는 유마경에서는 주인공인 유마거사를 문병하러 가서[3] 진정한 깨달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유마거사와 함께 토론을 벌인다.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중국 오대산 (우타이산)은 7세기 신라 자장율사와도 관계가 깊다. 자장율사는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했는데, 문수보살로부터 '너희 나라(신라)의 동북방에도 내가 머무는 곳이 있으니 찾아보라.' 하는 말과 함께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자장율사가 귀국하여 찾아낸 산이 오늘날 강원도 오대산이다. 중국 오대산에 대응하는 또다른 오대산이란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과거 한반도에서 문수신앙이 인기 있던 시절에는 오대산도 문수신앙의 중요한 거점 역할을 하였다.

대승불교에서 굉장히 위상이 큰 보살이거니와 한반도 국가에서 문수신앙이 크게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한국불교에서는 민중에게 인기가 별로 없다. 민중들이 보기에 당장 지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아서인 듯하다. 보살들 중에서도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의 인기와 비교하면 형편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일본이나 티베트 불교에서는 한국보다 휠씬 인기가 많고, 특히 티베트 불교에서는 대중적으로도 중요한 보살로 여겨 문수보살 진언을 흔히 외우곤 한다.

권속으로 문수팔대동자(文殊八大童子) 또는 팔지존(八智尊)이라고 부르는 동자 8명이 있다. 이들은 팔자문수(八字文殊)의 공덕을 상징하고 표시한다. 팔자문수는 옴 아미라 훔 카자락(唵阿尾囉吽佉左洛)이라는 여덟 글자[4]를 진언으로 하는 문수보살로 중대팔엽원(中台八葉院)에 배치하여 천변이나 병난 따위를 물리치고 연명하기 위하여 본존으로 삼는다. 팔대동자는 방위를 표시할 때는 동북방에 계설니(計設尼, Keśīnī), 동남방에 오바계설니(烏婆計設尼, Upakeśīnī), 동방에 가다라(駕多羅, Citrā), 서남방에 지혜(地慧, Vasumati), 북방에 청소(請召, Ākarṣaṇī), 남방에 광망(光網), 서방에 무구광(無垢光), 서북방에 부사의혜(不思議慧)를 배치한다. 이들은 본존을 중심으로 사주(四周)에 둘러선다.

2. 기타[편집]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과 관련된 전설이 전한다.

울산 문수산에 있다는 문수보살에게 신라를 살릴 지혜를 구하러 왕이 행차하였다. 태화강을 건너 현재의 삼호교 부근에서 어린 동자승이 왕을 마중나왔는데, 동자승은 "스승 문수보살은 출타해 만날 수 없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왕은 그제서야 동자승이 문수보살이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찾았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 전설은 아직도 인근 지명에 남아있는데, 동자승이 간 곳 없이 사라진 곳이 무거(無去)동, 애타게 세 번 부른 곳이 삼호(三呼→三湖)동, 자취를 못 찾아 멍하니 바라본 곳이 망성(望聖)리, 쫓아가다가 주저앉은 곳이 허고개, "헐 수 없다." 탄식하며 물을 마신 우물이 헐수정(공원)이다.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에는 세조와 관련된 전설이 전한다. 세조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자, 어느날 꿈에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나타나 저주하며 등에 침을 뱉었다.[5] 세조가 잠에서 깨니, 꿈에서 등에 침이 맞은 부위마다 종기가 생겼다. 종기를 낫게 하려 하였으나 효험이 없자, 상원사에 찾아가 기도하려고 했다. 문뜩 상원사 앞 계곡 물에서 혼자 몸을 씻으려 하는데 웬 동자승이 지나가므로 불러 등을 씻겨 달라고 하였다. 다 씻은 뒤 세조가 동자승에게 "너는 어디 가서 왕의 옥체를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 하고 이르니, 동자승도 "왕께서도 어디 가서 문수보살을 만났다고 말하지 마십시오."라고 대답하고 사라졌으며, 종기도 씻은 듯이 없어졌다. 그 후 세조가 명을 내려 상원사에 문수보살상을 만들어 봉안하였다고 하는데, 이 문수상은 국보 221호로 지정되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세조가 실제로 종기로 죽었기 때문에 현덕왕후의 저주는 세조의 병으로 인해 자연스레 생긴 민중의 전설인데 비해, 문수보살이 씻어줬다는 얘기는 실제로 낫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위 전설을 무마하려고 지배층에서 퍼뜨린 프로파간다에 가깝다는 의견을 펴기도 한다.[6]

일본에는 '세 사람이 모이면 문수보살의 지혜(三人寄れば文殊の知恵)'라는 속담이 있다. 우매한 사람이라도 여럿이 모여 논의하면 올바른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7] 물론 조별과제는 예외다.

위에 나온 것처럼 건주여진이 특히 숭배했다.

사자를 타고다니는 모습도 많이 표현되어 있다.

일본의 고속증식로 몬주도 문수보살에서 따왔다.


3.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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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명 만주가 바로 문수보살 '만주슈리'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설도 있다. 해당 항목 참조.[2] 청량산(淸凉山)이라고도 하고, '오대산'을 중국식 발음으로 읽어 '우타이샨'이라고도 한다.[3] 유마거사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에 석가모니가 자신의 제자들과 다른 보살들을 향해 유마거사를 문병하러 가라고 명하지만 이들은 저마다 한 번씩 유마거사에게 일침을 당한 적이 있음을 들어 가려 하지 않고, 심지어 관음보살과 미륵보살마저도 유마거사에게 문병 가기가 버겁다며 사양하는데, 문수보살이 나서서 가겠다고 했다.[4] 산스크리트어로는 Oṁ āḥ dhīra hūṁ khacaraḥ인데, 『대방광보살장문수사리근본의궤경』 4권에 근거한다.[5] 덤으로 자신의 아들인 의경세자 역시 현덕왕후의 저주로 인해 시름시름 앓다 20세(만 19세)에 요절했다는 야사가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야사로 의경세자는 단종보다 일찍 사망했다.[6] 사실 실록에도 나오지 않는 이정도 전설은 그나마 양반이다. 실록에 따르면 세조가 왕자였을 시절 중국에 갔는데 한 문을 코끼리가 막고 있어서 사람들이 골치를 삭히던 중 세조가 나타나자 코끼리들이 놀라며 자리를 비켰다고 하고 또 공자를 모시는 사원을 지나가는데 관리들이 세조와 공자를 비교하며 본지 몇초밖에 안된 사람에게 공자에게 비견될 만큼 대단한 사람이라고(...) 서로 속삭이질 않나 여진족들이 쳐들어오자 세조가 전세를 보기 위해 전장에 갔는데 여진족들이 부처님이 현신하셨다고 한다느니... 대체 이걸 믿으라고 쓴건지 모를 정도로 프로파간다가 많다. 더 웃긴건 이걸 조선왕조실록에 똑똑히 젹혀있다는 거(...)[7] 부처 모에화 게임인 나무아미타불: 연대 UTENA에서 문수보살이 이 속담을 직접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제 계산으론 세 사람 정도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지만..." 여담으로 본작에서 성우는 키지마 류이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