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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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
天子 | Son of 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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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가 들어서고 자금성이 완성된 1420년부터 중화민국이 수립된 1912년까지 약 500년간 동아시아 세계에서 최고의 권력자였던 중국의 임금인 '황제', 즉 '천자'의 자리인 자금성 태화전의 옥좌.[1]

1. 개요
2. 타국에 전파
3. 천자인 인물
4. 각종 매체에서 천자인 인물
5. 같이보기



1. 개요[편집]


천자()는 '천제(天帝)의 아들', 즉 '하늘의 뜻을 받아 하늘을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한자문화권 천자국의 최고통치자를 이르는 말이다.

중국 고대 전설 때부터 있어온, 중국 왕조의 주권자라 할 수 있는 칭호를 말한다. 천자의 뜻풀이는 말 그대로 하늘의 주인인 '옥황상제(玉皇上帝)의 아들'인 천자(天子)로,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는 특권을 가진, 봉선(封禪)을 거행할 수 있는 신분을 말한다.

'천자(天子)'란 말은 본래 주나라(西周)때 만들어진 말로 주(周)가 상(商)을 이기고 자신들의 정통성을 위해 만든 말이다.

황제와 동격의 호칭이고 황제가 곧 천자로 간주되는 기간이 가장 길었으나 황제는 기원전 221년 시황제가 새로 만든 지위고 천자라는 지위는 그 전 주나라, 춘추전국시대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단지 이 때는 진시황 이후와 달리 황제가 아닌 ''이 천자의 칭호였다. 물론 왕이 천자의 칭호였던 시기는 주나라의 건국시기인 기원전 11세기부터 시황제의 중원 통일인 기원전 221년까지 약 800년 정도지만, 황제가 천자의 칭호인 시기는 시황제가 중원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부터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1912년까지 무려 2133년이나 되니 황제가 곧 천자로 간주되는것은 당연했다.

시황제 이전에는 (王)이 본래 천자의 칭호였으며 오직 주나라 천자만이 왕이었고, 나머지 제후들은 (公), (侯) 등을 칭했다. 춘추시대춘추오패가 그 예시. 그러나 중국 기준 이민족이던 초나라초무왕이 먼저 주나라와 동일하게 왕을 자칭한 이후로 수많은 제후가 왕을 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나라 왕 외의 열국의 왕들을 천자라고 부르진 않는다. 결국 전국시대에 들어서는 주나라 천자의 권위가 약해지면서 제후들이 너도나도 칭왕하면서 왕이란 칭호가 너무 흔해져버렸고 고조선 같은 주변국 지도자들까지 왕을 칭했다. 이에 전국시대를 통일한 시황제가 차별화되는 칭호를 새로 만들어낸 것이 황제였다. 춘추전국 때보다 한 단계씩 칭호 인플레이션이 일어난 격이다.

황제가 정치적인 절대자라는 뉘앙스가 강한 데 비해 천자는 종교적 뉘앙스가 더 강한 호칭이다. 도교식 사고방식으로 천자의 아버지는 천황(天皇)으로 상제(옥황상제 하나가 아니다)를 의미한다. 상제는 하늘의 천황뿐만 아니라 지황(地皇)과 인황(人皇) 등을 총괄하는 전지전능한 신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일반적인 고대 중국의 사상으로는 의인화되어 신격화된 하늘(天) 그 자체의 아들이란 뜻이다.

옛날 농민들은 가까운 주변의 사직이나 조상에 제례를 지냈지만 감히 '하늘'에 직접 말을 걸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것은 일반인의 역량이 아니고 수장인 이 담당해야 할 역할이었다. 고대 중국인의 의식에서 하늘은 대자연의 질서 조절자이고 변화무쌍한 날씨의 주재자이며 시간의 창조자다. 하늘이 창조한 시간은 순수한 세월의 흐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연적 사실의 연속이다. 하늘은 또 역(歷, 자연의 주기적 현상)이라는 질서의 거룩한 투영이며 그 실현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늘은 자연을 주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 대한 제례는 하늘과 같은 권위를 갖춘 사람이 집행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중국의 군주제가 붕괴하는 신해혁명까지 수천년간 유지됐다. 이로 인하여 조선명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 달력을 받아왔다. 하지만 중국을 기준으로 만든 달력은 조선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기에 세종이 한양을 기준으로 하는 칠정산을 만들게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고대 중국에서는 하늘과 소통하며 하늘과 대화할 수 있는 왕, 즉, 인간의 몸을 받아 하늘로부터 태어난 하늘의 아들인 천자만이 자연의 은혜를 백성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천자만이 하늘에 무언가 빌 자격이 있다고 여겼다.

천자의 밑에서는 각각의 수장이 신분과 재력에 걸맞은 의식을 실시한다. 대국의 제후는 자기 나라의 사직(산과 강)에 제례 지내고 부족장은 그 영토내의 사직에 제례 지낸다.

천자는 하늘에 제례 지내지만, 그 하늘은 천자에게 있어서는 조상이기도 했다. 일반인들도 조상을 기리며 제사를 지냈지만, 천자에게는 조상과의 관계를 재확인하는 것이 일반인보다 훨씬 중요한 의식이었다. 천자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신적 존재나 전설적 인물로 이어진다. 그런 인물들은 또 직접 천자에 이어진다. 바로 그렇기에 왕은 큰 권력을 부여받아 민중의 안녕과 국가의 번영에 좋은 영향을 주는 존재라고 믿었다.

천자는 하늘에 제례 지내지만 제례의 대상은 천자의 조상이며 동시에 아버지로서의 하늘이어서, 말하자면 하늘은 조상과 한 몸인 영적 존재다. 고대 중국에서는 제례마다 천자가 하늘에 말을 걸기 위한 멋진 제단을 만들어 거기에 가장 훌륭한 제물을 올린다. 경우에 따라서는 산 제물을 바치기도 했다.

이런 상징성 때문에, 천자의 제례는 반드시 격조 높고 훌륭하게 집행되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제례의식을 담당할 사람이 필요했다. 사회체제나 관례는 이렇게 생겨 예(禮)라는 형태로 정리되었다. 마침내 생산력의 발달에 따라 도시국가가 출현하고 제례는 시절마다 빈번히, 그것도 대대적으로 행해지게 되었다.

그라네는 고대 중국의 노래를 기초로 도시국가 출현 후의 중국인 신앙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 옛날 마을 중심은 왕과 가신들의 주거였다. 왕이 사는 곳에 가신이 모이고, 왕의 궁궐을 만들고, 가신들도 신분에 맞는 생활을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지키고 귀족적인 생활을 지키기 위해 왕의 주변을 튼튼히 했고, 겨우 먹고 살 정도의 생활을 하는 민중을 깔보며 왕의 권위를 방패 삼아 자신들의 신분을 지키려 했다. 거기서 정치가 시작된다. 그것을 '덕'(德)이라고 말했다.


덕(정치적 의미)은 도시에 뚜렷이 나타난다. 도시는 한 사람의 '조상'이 건설한 것으로 되어있다. 왕은 우선 산이나 언덕에 올라 정상에서 햇볕이 닿는 산허리와 응달이 지는 산허리(즉 나라의 음과 양)를 확인하고, 강의 흐름이나 산의 위치를 관찰한다. 마을을 정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왕도 일반적으로 높은 곳을 골라 나라 전체를 본다. 이어 햇볕과 그림자를 관찰해 도시의 바른 방향을 정한다. 겨울 초입에 길흉을 점친 뒤 "정"(定)의 뜻을 가진 별자리가 저녁 무렵 자오선에 달했을 때 성벽 공사에 착수한다. 성벽은 왕과 마을의 격(格)에 따라 진흙이나 돌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동서남북에 하나씩 문을 설치하고 사각형으로 성벽을 쌓았다. 이어 사당과 궁궐과 집이 세워졌다.

많은 사람이 한 곳에 모여 살면서 잉여물을 비축하는 시설을 만든다거나, 거주 이외의 목적(제례용)으로 건물을 짓고 문자를 만들었다. 마을 중심에 사는 가신(귀족)은 당연히 성벽의 중앙에 거처를 정한 주군에게 생활을 의존한다. 이 공동체는 농촌공동체와는 다른 조직이었지만, 농민의 집과 마찬가지로 연대를 중시하고 조화를 중하게 여겼다. 주군의 권위는 절대적이었고 주군은 가신들의 모든 것을 뜻대로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여 가신들은 질서 있는 집단이 되었다. 그 가운데 분명한 계급이 있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대지와 인간이 조화를 추구하며 서로 부딪히는 가운데 집단이나 개인의 행위에 방향을 세우고, 이를 조정하는 현자가 두각을 나타낸다. 그 중에는 점술 등의 재능을 인정받은 자도 나온다. 이렇게 서서히 특별할 재능을 가진 인물이 수장으로 인정되어 그 가운데에서 왕이 생겼다. 왕은 인간에게 은혜를 베푸는 대지를 주재하는 '하늘의 주권자'가 된다. 부족장의 위에 선 왕이다. 이런 왕은 '천자'라 불린다.

그러하기에 사람들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조화시키려면 자연의 주재자이며 절대적인 힘을 가진 하늘과 통하는 인물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따라서 천자가 될 인물은 늘 하늘과 한 몸이 되어 하늘을 대변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했다. 해서 혈통을 하늘과 이을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 가계도 신화가 창조된다.[2] 혈통을 중시한 것은 왕뿐만 아니라 멀리 공자 이전부터의 전통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상나라주나라 시절 제정분리가 이루어지지 않을 시기에 해당하고, 이후에는 글자 그대로 '하늘의 아들'이라기보다는 '천명을 받아 천하를 올바르게 통치하는 자'라는 뜻이 된다.

기원전 221년 중원이 통일되고 통일 제국이 된 진나라 시황제 때부터 황제(皇帝) 칭호와 같이 쓰이게 되었다.

상나라(商), 주나라(周) 시대까지는 천자의 정치적 호칭은 이었으나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부용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들이 왕을 자칭함에 따라 시황제가 지난 육국과 같은 호칭에 불쾌하여 삼황의 황과 오제의 제를 붙여 황제를 칭하면서 진시황 이후부터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하고 공화국이 되기전까지 천자는 왕이 아닌 황제를 지칭하는 말로 바뀌었다.

천자의 상징은 본디 아홉 개의 가마솥 구정(九鼎)이었다. 정鼎이란 다리가 셋 달린 솥으로, 일상용이 아닌 제례용의 솥을 말한다. 아홉이라는 숫자는 9주(옛 하나라에서 다스렸다는 9개 지역. 넓은 의미에서는 중국 전체)를 상징한다.

그러다 시황제에 이르면서 전국옥새(傳國玉璽)로 바뀌었다. 기록에 따르면 주나라가 멸망했을 때 구정의 소유권은 진소양왕으로 넘어왔지만, 갑자기 증발이라도 한듯 사라졌다고 한다. 정확히 얘기 하자면 함양으로 운송 도중에 사수(泗水)에 빠졌다고 하고 그 이후로 사라졌다. 진시황도 구정을 찾기 위해 목욕재계를 하고 굿판을 벌이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 대신이라긴 뭐하지만, 진시황은 열두 제후국의 무기를 모두 거두어 12개 금속상을 만들었다. 옹중(翁仲)이라 하는데, 옹중은 이후 한나라까지 황궁 앞을 지켰다고 한다.


2. 타국에 전파[편집]


천자라는 명칭은 위에 설명하다시피 중국 왕조종교적 색채가 강한 명칭이었다. 중국의 왕조들이 주변 국가들과 교류를 하면서 그 문화가 전파되었고, 타국에서 천자라는 명칭은 자국의 임금을 칭하는 단어가 된다. 물론 중국 왕조가 알게 되면 불경하다는 이유를 들어 마찰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중국에는 제후라고 자처하고, 본국 내에서 천자가 되는 외왕내제 체제가 형성되었다.

대표적으로 조선(갑오개혁~대한제국 선포 이전)과 베트남(레 왕조, 쩐 왕조, 응우옌 왕조 등)에서 이러한 외왕내제 형태가 나타났다.

일본에서는 천황이 중국에서 떨어진 일본의 지정학적 특징과 그로 인한 일본인만의 독특한 세계관에 의해 중화질서와 이질적인 황제국 문화를 형성했다.


3. 천자인 인물[편집]


  • 일부 한국사 왕조의 군주들
    • 고구려의 군주[3][4]
    • 신라의 군주[5]
    • 전기 고려의 군주[6]
    • 대한제국의 황제[7][8]

  • 중국사의 군주 대부분
    • 중국의 군주라도 천자는 아니었던 항우, 이정기, 오월, 그리고 동녕 왕국 같은 예외가 간간이 있긴 하다. 항우는 본래 초의제의 신하라는 명분을 내세워서 통치한데다 의제 시해 이후에도 당장 칭제하기엔 대내외적인 여건이 안 좋았고, 이정기와 오월은 특정 지방의 할거 정권에 불과해서 칭제하기엔 명분도 실리도 없었으며, 정성공 가문은 남명이 없어진 뒤에도 주씨 명나라의 부흥을 내걸었기에 일부러 천자에 오르지 않았다.
    • 일반적으로 한(漢)족을 제외하고, (元)/(淸)과 같은 정복 왕조와 요(遼),서하(西夏), 그리고 한족화를 추진했던 북위(北魏) 등의 비(非)한족 왕조가 천자국의 위상 그 이상이 되거나 스스로 황제가 되어 천자국을 선포하는 경우가 있었으므로, 오늘날 '중국'이라는 이름으로 묶는 개념으로 받아들이기는 애매하다.
    • 기본적으로 중국황제들은 대부분 천자라고 불렸고, 중국 본국과 대한민국과 일본에서 표문에 중국 황제를 높임말인 '덕이 높은 천자'라는 뜻으로 성천자(聖天子)라고도 불렀다.
    • 천자도 추서가 있었다. 삼국시대에서도 손견, 조등, 사마의 등이 천자로 추서되었다.
    • 태평천국을 세운 홍수전천왕을 칭하며 천자로 군림했는데, 전통적인 중원 왕조의 천자들과 달리 야훼의 아들이자 예수의 동생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기존 천자국인 청나라는 물론이고 정통 기독교 교리를 따르는 서구 열강들도 이를 인정할 리가 없었기에, 그의 왕조는 청나라와 서구 열강에게 동시에 처맞다가 2대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 일본 천황
    • 수양제에게 '해지는 나라의 천자에게 해뜨는 나라의 천자가 보내노라.'로 시작하는 국서를 보낸 사건이 유명하며, 일본에서는 일본의 자주성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본다. 훗날 명나라와의 관계에서 명나라 황제로부터 아시카가 요시미츠나 천황이 아닌 황족이 일본 국왕으로 책봉되었음을 생각하면, 일본은 동아시아의 천자국 개념과는 동떨어졌고 호칭에 관해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웠음을 알 수 있다.
    • 천황을 아예 천자라고 직접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 제국의 문학자인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마음에서 주인공의 아버지가 메이지 천황을 시종일관 천자님(天子さま)이라고 부르며 존경한다.[9] NHK 대하드라마 신센구미! 초반 미부낭인대가 결성될 때를 보면 천황을 천자님이라고 하는 것을 볼수 있다.
  • 남월 이후 베트남 군주 대부분[11]
    • 조타는 본래 진시황의 신하였으나, 베트남 북부에 위치한 어우락을 정복하여 남월을 세운 후 베트남 최초로 칭제하고 천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이 멸망한 이후 중원을 재패한 한나라의 눈치를 보느라 당당하게 천자를 칭할 수는 없어서 국내에서만 몰래 쓰는 수준이었고, 2대 군주부터는 왕을 칭하며 제후로서 통치했다.
    • 남월이 한무제에 의해 멸망한 후 베트남은 일시적으로 독립한 시기[10]를 제외하면 지속적으로 중국 왕조의 지배를 받다가, 10세기 오대십국시대의 혼란을 틈타 독립 왕조인 응오 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응오 왕조는 칭제하지 않고 왕을 칭하며 천자가 아닌 제후로서 통치했다,
    • 980년 딘 왕조대구월이라는 국호를 채택하면서, 베트남 군주들은 본격적으로 천자 칭호를 사용했는데, 11세기 리 왕조가 국호를 대월로 변경한 이후부터 19세기떠이선 왕조까지의 베트남 군주들은 국내에서는 대월 황제를 칭하며 천자로 군림하고, 대외적으로는 안남 국왕을 칭하며 중국 천자로부터 책봉을 받았다.
    • 떠이선 왕조를 멸한 응우옌 왕조는 대월 대신 '비엣남(베트남)'이라는 새로운 국호를 채택하고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에 칭신하여 책봉을 받았으나, 국내에서는 계속 황제를 칭하며 천자로서 통치했다. 이후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긴 했으나, 프랑스인들은 동아시아식 황제 칭호에 대한 관심 자체가 없었던데다,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명목상의 천자국 체제를 존속시켰다. 이후 베트남의 천자국 체제는 일제의 괴뢰국 시기를 거쳐 마지막 베트남 황제베트민폐위당하면서 종식되었다.


4. 각종 매체에서 천자인 인물[편집]




5. 같이보기[편집]



[1] 뒤 편액에 우횡서로 쓰인 글자는 "建極綏猷(건극수유)"다. 황제는 법도를 세우고 백성이 이를 편안히 여기게 해야 한다는 의미.[2] 공자 같은 사람도 가계도를 위조했다는 의심을 산다.[3] “주몽이 … 추격해오는 병사들이 닥칠까 두려워 물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外孫)이다. …” # “천제지자 혹은 황천지자(皇天之子)라는 어구(語句)는 건국신화 속 주몽에 대한 고구려인의 인식이 강렬히 투영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 신화 속 주몽은 천제지자(天帝之子)로 기억되고 추앙받았다. 천제지자 관념은 「비문」에 처음 등장하여 이후 국내사서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고구려가 신묘(神廟)를 두어 주몽과 하백녀에 대한 추앙을 이어갔음을 말하는 북사의 기록은 이러한 왕실의 시조인식이 주몽신화에 바탕하여 「비문」의 성립 이후로도 계속적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승호(2011), "「광개토왕비문」에 보이는 천제지자(天帝之子) 관념 형성의 사적(史的) 배경", 《역사와 현실》 81, p. 100, 132.[4] “고구려 국왕은 스스로를 天孫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는 고구려인의 인식 속에서 天은 자연 현상이나 理法 등 관념적 존재가 아니라 인격신인 天帝로서, 왕은 그의 현신이며 후손으로서 신성한 천손이라는 고구려의 전통적 인식이 반영된 것이다. 이러한 전통적 관념을 바탕으로 형성된 고구려식 천하관은 중국식 화이관과 달리 상술한 단계적 천하관의 형태로 구현되었다고 본 것이다.” 조영광(2015), "광개토왕비에 보이는 대외 관계와 고구려 천하관에 대한 연구 현황과 과제", 동북아역사논총 49, pp.71~72.[5] “건국 초부터 신라 국왕은 천자적 존재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같다. 일찍이 소지마립간과 진지왕은 萬乘의 지위와 위엄이 있는 존재, 즉 天子的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리고 신라에서는 자국중심의 천하관이 확인된다. 우선 ≪삼국유사≫ 권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 서는 혁거세의 탄생을 “지금 천자가 이미 내려왔다(今天子已降)”로, 또 제2대 남해왕조에서는 “此王乃三皇之第二”라 하여 南海·弩禮·脫 解 3王을 “三皇”으로 표현하였다. 즉 박혁거세는 천자였으며, 남해·노례·탈해는 중국의 三皇과 같은 신성한 존재였던 것이다.” 김창겸(2004), "新羅 國王의 皇帝的 地位", 《신라사학보》 2, p.212.[6] 일반적으로 고려는 하나의 황제국을 자처하는, ‘외왕내제’로 볼 수 있는 이중 체제를 가졌었다고 이해되며, 이러한 ‘황제국 체제’가 몽골의 지배를 받으면서 완전히 와해되었다고 보고 있다. 한편 최종석(동덕여대)은 ‘외왕내제’론의 해석 방향성을 비판하며 몽골 지배 이전 고려에는 ‘황제국 체제(외왕내제)’라는 목적지향성이 부재하다고 주장했다. <조일수(2022), "몽골 제국의 유산으로서의 조명관계(朝明關係)와 중화주의 문제 재고(再考)", 《역사학보》 256, p.141.>[7] 1897년 고종이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개정했는데, 대송, 대원, 대명, 대청 등의 중화질서에 따라 한 글자 국호 앞에 大 자를 붙인 형태였다. 또한 환구단을 짓고 천자만이 할 수 있는 의식인 하늘에 대한 제사를 지내면서 황제국임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였으며, 광무라는 연호와 폐하라는 경칭을 사용하고, 친왕을 책봉했다. 아울러 한청통상조약을 체결하여 한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중화제국과 평등한 외교 관계를 맺었다.[8]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약소국으로 전락한 상태였기에, 10년도 못 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국가의 독립(한일의정서)이 빠진 채 황실의 존립만 보장받았을 뿐이었다. 보호국으로 전락한 이후에는 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는 굴욕을 겪었고, 마지막 황제실권 없는 허수아비로 연명하다가 1910년 한국이 병합되면서 13년의 짧은 황제국 체제를 마감하고 황제는 왕으로, 황실은 왕공족으로 전락했다.[9] 주인공은 그냥 폐하(陛下)라고 부른다.[10] 쯩 자매, 전 리 왕조 등[11] 베트남은 지리적으론 동남아시아 국가지만, 문화적으론 한자문화권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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