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평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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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내용
3. 오해:성악설=악의 평범성
3.1. 상세:모든 이의 내면엔 거대한 악이 있다?
4. 여담



1. 개요[편집]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은 한나 아렌트아돌프 아이히만의 양심사[1]를 추적하고 분석하면서 제시한 개념이다. 해당 용어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결말부에 나오는데, 아이히만의 '악'은 '악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무사유(thoughtlessness)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하여 수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훗날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는데, 이 말이 '악의 평범성'을 잘 설명해준다. "아이히만은 전형적인 공무원입니다. 그런데 한 명의 공무원, 그가 정말로 다름 아닌 한 명의 공무원일 때, 그는 정말로 위험한 사람입니다." [2] 즉, 타인의 현실에 대한 생각 없이 그저 시키는대로 행동할 때 악이 나타난다는 것, 그래서 그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것은 상부의 명령에 따른 것일 뿐이라고 항변해봤자 무죄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2. 내용[편집]


그의 마지막 말의 기괴한 어리석음보다도 이 점을 더 납득이 가게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는 자기가 기독교인이 아니며 죽음 이후의 삶을 믿지 않는다는 점을 일반적인 나치스 식으로 표현하기 위해 '신을 믿는 자'[3]

라고 힘주어 말하면서 진술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그는 계속해서 "잠시 후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장례 연설에서나 사용되는 상투어를 찾아냈다. 교수대 아래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는 '의기양양'해져서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사악함에 대한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마치 저 마지막 순간에 그가 요약하고 있는 듯 했다. 무시무시한 교훈, 즉 말과 사고를 불가능하게 하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4]

아이히만은 당시 유대인 6백만명을 학살하는 데 결정적인 관여를 한 나치 실무자였지만, 훗날 법정에서 자신은 그저 명령받은 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도의상 잘못은 했으나 법적으로는 무죄라고 항변했다.[5] 그러나 아렌트가 보기에 아이히만은 나치의 명령이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모르는 듯 보였다. 아이히만은 종종 현실을 파악하지 못했고, 더 나아가 현실을 마주보아야 된다는 그런 생각 자체가 없는 것 같았다. 심지어 그는 사형선고를 받은 후에도 상투어(Klischee)를 사용하여 자기 자신을 위로함으로써, 자신의 죽음마저 잊어버리고는 곧 의기양양해질 수 있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더구나 교수대 아래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이 생전에 장례식장에서 들었던 것 외에 생각해 낼 수 없었다는 것은, 그리고 이러한 '고상한 말'이 자기 자신의 죽음이라는 현실을 완전히 모호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은, 엉뚱할 뿐만 아니라 단적으로 우습게 보이기까지 한다. 거기에는 어떠한 심오한 의미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지적으로 어리석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상투어가 아니고서는 단 한 구절도 말할 능력이 정말 없었을 뿐이다.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speak)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think),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길 꺼리는 단순한 그의 심리 앞에서는 그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상투어(Klischee)와 관용어(Redensart)라는 튼튼한 벽 뒤에 숨어서 다른 사람들의 현존(the presence of others)에 대한 현실 자체(reality as such)를 깊게 생각해볼 의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타인의 현실적인 입장에 대한 그의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는 그 자신을 그 시대의 가장 끔찍한 범죄자 중 한명으로 만들어 놓았다.[6] [7] [8]


3. 오해:성악설=악의 평범성[편집]


악의 평범성은 평범한 이가 별생각없이 자연스럽게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는 점에서 고전적인 의미의 성악설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아래 상세 단락에서 한나 아렌트 본인이 인터뷰를 통해 반박한 대로 이 두가지는 서로 다른 개념이다. 이는 고전적인 성악설과 악의 평범성은 인간 본성과 악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법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개인의 영역을 넘어 교육과 사회 그 자체가 악행을 방조하거나 강요하는 상황에 처했는데 이 두가지 개념을 분간해서 보지 않으면,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들 중 그 누구에게도 재대로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윤리적 혼란 상태에 빠지고 만다. 뒤틀린 체제의 첫 시발점을 끊은 당대 고위층 & 실컷 그 체제를 이용해 악행을 저질러 놓곤 개인의 책임과 당대 사회적 환경에 숨어버린 비윤리적 인간 & 그냥 아무 생각없이 체제에 순응해 악행을 반복했던 침묵하는 다수 & 뒤틀린 체제에 살았지만 운 좋게 악행은 하지 않았던 일반인들이 모두 똑같은 회색지대에 뒤섞여 버린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악행을 적극적으로 조장하거나 방치한 체제에 적극 협조한 이들도 '시대가 그랬다'&'명령에 충실했을 뿐이다' 등의 사유로 자신의 악행을 대대손손 집요하게 회피하거나, 한 공동체가 저지른 범죄 행각을 일부 이단마냥 몇몇 개인의 악행으로 꼬리 자르기 식으로 희석시키려던 시도가 반복되었다. 이런 개인과 사회를 둘러싼 윤리적 회색지대를 둘러싼 혼란스러운 상황에선 단순히 악행의 원인을 이해하는 시도조차 정치적 논쟁거리가 되었고, 차후 악행을 예방하긴 커녕 그 대응책 조차 개개인의 도덕성(=망가질 수 있는 사회적 압력) 함양이 집중하는 등의 잘못된 방식이 되거나, 윤리적 공백에 격노한 피해자나 제 3자가 아예 특정 공동체나 구성원 심지어 그와 관련된 개념까지 악마화하는 악순환에 빠지기 십상이었다. 그 대표적 예시가 대량학살을 일으켰음에도 나치의 신념을 상투적으로 반복하며 공개재판과 사형대 앞에서도 이를 회피한 아이히만였던 것.

즉 성악설에선 악의 근원을 개인의 도덕적 선택과 내재된 본성에서 찾는 반면, 악의 평범성에선 악이 체제적, 사회적 조건과 비판적 사고의 결여에서 비롯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3.1. 상세:모든 이의 내면엔 거대한 악이 있다?[편집]


Hannah Arendt: Nun, ein Missverständnis ist das Folgende: Man hat geglaubt, was banal ist, ist auch all-täglich. Nun, ich glaubte ... Ich habe es so nicht gemeint. Ich habe keineswegs gemeint: der Eichmann sitzt in uns, jeder von uns hat den Eichmann und weiß der Deibel was. Nichts dergleichen! Ich kann mir sehr gut vorstellen, dass ich mit jemandem rede, und [der] mir etwas sagt, was ich noch nie gehört habe, was keineswegs alltäglich ist. Und ich sage: "Das ist äußerst banal." Oder ich sage: "Das ist minderwertig." In diesem Sinne habe ich es gemeint.

한나 아렌트: 자, 오해 중 하나는 이거예요. 사람들은 '평범(banal)'이라는 것이 일상적인 것이라고도 생각해왔어요. 하지만 내가 생각한 것은 ... 내가 말하려던 바는 그게 아니었어요. 나는 우리 안에 아이히만이 있어서, 우리 각자는 아이히만과 같은 측면을 갖고 있고 악마적인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말을 하려던 게 절대 아니에요. 그런 건 없어요! 나는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고 어떤 것을 얘기할 때 그 사람이 내가 들어본 적도 없는,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말을 하는 것을 무척 잘 생각해 볼 수 있어요. 그러면 나는 "그건 너무 평범해(banal[9]

)"라고 말해요. 아니면 "그건 저급해(minderwertig)"라고 말하거나요. 내 말은 그런 의미로 한 거예요.

요아힘 페스트와의 인터뷰(1964)[10]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은, 평범하게 보이는 사람이 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긴 하지만[11], 그렇다고 모든 평범한 사람의 내면에 악이 내재해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아렌트는 훗날 인터뷰에서 자신의 개념이 '모든 사람의 내면에 거대한 악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면서 돼지 사료를 먹어치우는 굶주린 러시아인 포로들과 그걸 보고 러시아인은 동물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 독일인 소작농의 예를 들었다. 이 이야기에서 소작농은 굶주린 사람은 누구라도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소작농의 지적 수준은 그리 낮지도 않은데도 말이다. 타인의 현실적인 입장을 모르는 이러한 멍청함에는 정말로 터무니없는 게 있다. 그리고 아렌트는 이것이 바로 자신이 뜻하려던 것이라고 말했다.

즉, '아이히만의 사유'는 (나쁜 의미에서) 단순했다. 그것은 1차원적이었고, 피상적이었고, 깊이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단순한 생각에 그치는 곳에서 '타인의 현실적인 입장을 상상할 수 없는 무능력'이 발견된다. 그런데 아렌트에 의하면 이는 인간에게 있어서 일상적으로 당연한 일은 아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ㅡ그것이 인간의 조건이므로ㅡ, 타인의 현실적인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는 '선한 마음'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이히만과 수많은 독일인들은 어떻게 해서 '선한 마음'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것일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아이히만은 자신이 쓰는 상투적이고 관용적인 '말'(the words)에 안주하므로써, '말'과 '현실' 사이의 모순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선한 마음'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 아렌트의 주장이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행동이 타인의 현존에 어떤 고통을 주고 있는지도 깨닫지 못하는, '인간으로서'는 참으로 우스꽝스럽고도 한심한 상황 속에서 저질러진 범죄였다는 것이 아렌트의 분석이었다.[12] [13]


4. 여담[편집]


  • 상투어가 문제라는 얘기는 너무나 당연한 얘기가 아니냐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의문이 들었다면 아렌트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아렌트는 '상투어' 자체가 일으키는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14] '상투어'를 핑게로 타인의 현실에 대해 아예 생각하기를 꺼리는 사람들의 단순한 심리에서 '악'이 생긴다고 말하며, 그런 '악'에서부터 철학을 전개해 나간다는 점에서 기존 도덕철학과 차별되는 중요성이 있기 때문이다.[15] [16]

  •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은, 모든 사람이 타인의 입장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선'에 강한 매력을 느끼지만, 그런 것을 좀 더 깊게 생각해 보지 못하고 1차원적으로만 생각하게 될 때 '악'이 나타나게 된다는 뜻이다. 즉, '악'은 좀 더 깊게 생각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한심한 현상이라는 게 아렌트의 주장이다. (이는 '악은 선의 부재'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다.[17] 특히, 악이 매력적인 것이 아니라 선이 매력적인 것이라는 주장, 즉 악 보다 선이 더 유혹적이고 근본적이라는 주장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볼 수 있다.)

  • 2001년에 베티아 스탕네트는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아이히만은 재판정에서 사형을 받지 않기 위해 가면을 쓰고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를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비록 그 연기가 실패해 아이히만은 죽음을 피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 연기는 아렌트를 속여서 '아이히만의 악은 평범하다'고 생각하게끔 만들었다는 것이다. 1990년대가 지나서야 온전히 공개된 자센과의 인터뷰를 근거로, 스탕네트는 전쟁 수행 중 아이히만이 단지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에 불과했다거나 전후에는 원래의 순진한 모습으로 지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혔다. 이에 따르면, 그는 철저한 이데올로기적 광신도였다. 그래서 스탕네트는 '아이히만의 악이 평범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 [18]
[1] 양심사란 '양심의 역사'를 말한다. 아렌트는 각 시기별 아이히만의 양심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저술했다.[2] 원문은 "Er war der typische Funktionär. Und ein Funktionär, wenn er wirklich nichts anderes ist als ein Funktionär, ist wirklich ein sehr gefährlicher Herr." 요아힘 페스트와의 라디오 인터뷰에서 한 말.[3] '신을 믿는 자'(Gottgläubiger)는 신을 믿지만 기독교와 결별한 사람을 지칭하는 나치스의 관용어이다.[4] Nothing could have demonstrated this more convincingly than the grotesque silliness of his last words. He began by stating emphatically that he was a Gottgläubiger, to express in common Nazi fashion that he was no Christian and did not believe in life after death. He then proceeded: "After a short while, gentlemen, we shall all meet again. Such is the fate of all men. Long live Germany, long live Argentina, long live Austria. I shall not forget them." In the face of death, he had found the cliché used in funeral oratory. Under the gallows, his memory played him the last trick; he was "elated" and he forgot that this was his own funeral. It was as though in those last minutes he was summing up the lesson that this long course in human wickedness had taught us - the lesson of the fearsome, word-and-thought-defying banality of evil. (Hannah Arendt, Eichmann in Jerusalem)[5] 아이히만은 죄책감을 느꼈었고 자신이 잘못을 했다는 것도 인정했지만, 법만으로 따진다면 자신의 행동은 무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은 (나치의) 법에 따라서 행동했을 뿐이고 법을 수행하는 것은 공무원의 당연한 의무이라는 논리였다.[6]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평범한' 것이고 심지어 우스꽝스런 것이라면, 만일 이 세상의 최고의 의지를 가지고서도 아이히만에게서 어떠한 극악무도하고 악마적인 심연을 끄집어내지 못한다면, 이는 그것이 일반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것과 아직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더구나 교수대 아래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이 생전에 장례식장에서 들었던 것 외에 생각해 낼 수 없었다는 것은, 그리고 이러한 '고상한 말'이 자기 자신의 죽음이라는 현실을 완전히 모호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은 분명코 아주 일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처럼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교훈이지 현상에 대한 설명도 아니고 그에 대한 이론도 아니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옮김, 한길사, 2006, p.391~392)[7] 자, 오해 중 하나는 이거예요. 사람들은 평범한 것은 아주 흔하다고도 생각해요. 하지만 내가 생각한 것은 ... 내가 말하려던 바는 그게 아니었어요. 나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아이히만이 있고, 우리 각자는 아이히만과 같은 측면을 갖고 있다는 말을 하려던 게 절대 아니에요. 내가 하려던 말은 오히려 그 반대예요! 나는 내가 누군가와 얘기할 때 그들이 내가 들어본 적도 없는, 전혀 흔하지 않은 말을 하는 모습을 완벽하게 상상할 수 있어요. 그리고 저는 "너무 평범해(banal)"라고 말해요. 아니면 "별로 안 좋아"라고 말하거나요. 그게 내가 말하려던 뜻이에요. 평범성(banality)은 정말로 간과할 수 없는 현상이었어요. 그 현상은 우리가 듣고 또 들었던, 솔직하게 말해서 믿기 힘든 상투어와 관용어들에서 저절로 모습을 드러냈어요. 평범성으로 뜻하려던 바를 설명해줄 이야기를 해드리죠. 예루살렘에서 나는 에른스트 윙거가 언젠가 들려주었지만 한동안 잊고 있던 이야기를 떠올렸어요. 전쟁 중에 에른스트 윙거는 포메라니아 아니면 메클렌부르크 ㅡ 아니, 포메라니아였다고 생각해요 ㅡ 소작농 몇 명을 우연히 만났어요. 그런데 그 소작농 중 한 명은 러시아인 전쟁 포로들을 포로수용소로부터 넘겨받아 자기 집에 거둔 사람이었어요. 당연히 그 포로들은 쫄쫄 굶고 있었죠. 러시아인 전쟁 포로들이 이 나라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는 당신도 알 것예요. 소작농은 윙거에게 말했어요. "글쎄, 그놈들은 인간 이하입디다. 소하고 다를 바가 없단 말이오! 그건 쉽게 알 수 있어요. 그놈들은 돼지 먹이를 먹어치우니까요." 윙거는 이 이야기에 이런 코멘트를 했어요. "독일인들은 때때로 악마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표현은 뭔가 '악마적'인 것을 뜻한 게 아니었어요. 봐요, 이 이야기에는 뭔가 터무니 없이 멍청한 게 있어요. 멍청한 이야기라는 말이에요. 그 소작농은 굶주린 사람은 누구나 그런 짓을 하리라는 걸 알지 못해요. 그 입장에서는 누구라도 그런 식으로 행동할 텐데요. 이 멍청함에는 정말로 터무니없는 게 있어요. ... 아이히만은 완벽하게 지적이었지만 이 측면에서는 멍청했어요. 너무도 터무니없이 멍청한 사람이었어요. 내가 평범성이라는 말로 뜻하려던 게 바로 그거예요. 그 사람들 행동에 심오한 의미는 하나도 없어요. 악마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고요!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길 꺼리는 단순한 심리만 있을 뿐이예요. 그렇지 않아요?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의 말』 윤철희 옮김, 마음산책, 2016, p.82~85) (이 번역은 원래 독일어 인터뷰를 영문으로 번역하고 이를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것으로서 정확한 번역이 아니다. 어떤 맥락인지 참조만 할 것. 정확한 번역은 아래에 독일어 원문을 직역해 놓았다.)[8] 1960년 5월 29일부터 1961년 1월 17일까지 행해진 경찰심문 녹음의 독일어 번역본의 각 페이지마다 아이히만이 교정한 후 승인했는데, 이는 심리학자에게는 말 그대로 금광을 이룬다. 끔찍한 일이 엉뚱할 뿐만 아니라 단적으로 우스울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할 만큼 심리학자가 현명하다면 말이다. 이 희극의 일부분은 영어로 표현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 부분은 아이히만이 독일어를 위해 영웅적인 전투를 수행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은 이 싸움에서 항상 패배했다. 그가 사실은 관용적인 표현(Redensarten)이나 선전문구(Schagworte)를 사용하려고 의도했지만 그 대신 도처에서 '날개 달린 말들'(geflügelte Worte, 고전에서 인용한 유명한 구절을 사용하는 독일어의 일상어법)을 사용한 일은 우스꽝스러웠다. 재판장에 의해 독일어로 진행되던 자센 문서에 대한 심문에서 자신의 얘기를 더 활기 있게 하려는 자센의 노력에 저항한 사실을 가리키면서 'kontra geben'(이걸 주고 저걸 받다)이란 관용구를 사용한 것은 우스꽝스러웠다. 카드놀이 방법을 몰랐음이 분명한 랜다우 판사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아이히만은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학교에 다닐 때부터 그를 분명히 괴롭혔을 결점(경미한 실어증 증세)을 희미하게 깨닥고 있던 그는 사과하면서, "관청용어(Amtssprache)만이 나의 언어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관청용어가 그의 언어가 된 것은 상투어가 아니고서는 단 한 구절도 말할 능력이 정말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분명 재판관들이 피고에게 그가 말한 모든 것이 '공허한 말'뿐이라고 드디어 말한 것은 옳았다. 다만 그들은 이 공허함이 가장된 것이며, 피고가 공허하지 않은 끔찍한 다른 생각들을 감추려고 그런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이 반박될 수 있는 것은, 아이히만은 기억력이 상당히 나쁨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중요한 일이나 사건에 대해 동일한 선전문구와 자기가 만든 상투어를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일관성 있게 반복한 점 때문이다. 아르헨티나나 예루살렘에서 회고록을 쓸 때나 검찰에게 또는 법정에서 말할 때 그의 말은 언제나 동일했고, 똑같은 단어로 표현되었다.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speak)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think),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the words)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the presence of others)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reality as such)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옮김, 한길사, 2006, p.104~106)[9] 아렌트가 말한 정확한 단어는 banal 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악의 진부함(悪の陳腐さ)'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그런데 책을 한글번역한 김선욱 교수는 이를 '악의 평범함'으로 번역하였다. 그 이유는 아렌트가 오해를 직접 설명하는 인터뷰가 여러 있는데, 그 내용은 '진부하다'는 말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터무니없는', '평소에 들어본 적도 없는', '일상적이지 않는' 말에 대해서 banal 하다는 말을 쓴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그래서 다시 용어 문제로 돌아가본다면, '터무니없고 일상적이지 않는 것'에 '진부하다', '뻔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평범하다'는 표현도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긴 하나, 여기서 평범하다는 것은 '터무니없고 일상적이지 않는 것'이 평범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걸 말하는 사람의 수준이 평범하다는 뜻이다. 물론 이 번역어도 굳이 말하자면 헷갈릴만한 표현이다. 그래서 가장 적절한 표현은 (그 말과 생각의 깊이가) '단순하다', '피상적이다'는 뜻이 가장 정확하고, 아렌트도 인터뷰와 여러 편지에서 이를 계속해서 말한 바 있다. 따라서 굳이 따지자면 '악의 단순성', '악의 피상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banal 이라는 단어 자체에 그러한 의미가 없으므로 번역어로서는 애매해지긴 한다. 애초에 아렌트의 단어 선택에 문제가 있었던 것. 그래서 사람들이 많은 오해를 했고, 이에 아렌트가 그런 오해를 풀기 위해 수많은 설명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10] Hannah Arendt im Gespräch mit Joachim Fest, Eine Rundfunksendung aus dem Jahr 1964 #[11] 아이히만의 경우 성가신 점은 바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다는 점,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이 도착적이지도 가학적이지도 않다는 점, 즉 그들은 아주 그리고 무서울 만큼 정상적이었고 또 지금도 여전히 정상적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법률 기관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과 판결에 대한 우리의 도덕 기준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정상적인 모습은 잔혹한 일들을 모두 모아놓는 것보다도 더 끔찍한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상 인류의 적인 이러한 새로운 유형의 범죄자는 자기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거나 느끼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상황에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옮김, 한길사, 2006, p.379)[12] 악이 결코 '근본적(radical)'이지 않으며 단지 극단적(extreme)이라는 점, 그것이 깊이나 어떤 악마적 차원을 지니지 않는다는 점은, 이제 정말로 나의 의견입니다. 악은 겉보기에는 곰팡이와 같이 확산되기 때문에 정확히 전 세계를 뒤덮고 황폐화시킬 수 있습니다. 제가 말했듯이, 사유는 뿌리로 가기 위해 어느 정도 깊이에 도달하려고 하기 때문에 악은 "사유가 불가능(thoughtdefying)"한데, 사유가 악에 관여하는 순간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으므로 좌절됩니다. 그게 악의 "평범성"입니다. 오직 선만이 깊이를 가지며 근본적일 수 있습니다. ㅡ 아이히만 논쟁: 게르숌 숄렘에게 보낸 편지. (It is indeed my opinion now that evil is never "radical," that it is only extreme, and that it possesses neither depth nor any demonic dimension. It can overgrow and lay waste the whole world precisely because it spreads like a fungus on the surface. It is "thoughtdefying," as I said, because thought tries to reach some depth, to go to the roots, and the moment it concerns itself with evil, it is frustrated because there is nothing. That is its "banality." Only the good has depth and can be radical. ㅡ THE EICHMANN CONTROVERSY A Letter to Gershom Scholem)[13]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집필한 의도 중 하나는 악이 위대하다는 통설을, 악마 같은 세력이 위대하다는 통설을 깨뜨리고, 사람들이 리처드 3세 같은 엄청난 악인들에게 품고 있는 존경심을 사람들에게서 걷어내는 것이었어요. 브레히트에게서 이런 문장을 찾아냈어요. "거물 정치범들은 사람들 앞에, 특히 폭소 앞에 노출시켜야 한다. 그들은 거물 정치범들이 아니라 거대한 정치적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로, 이 둘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히틀러가 벌인 일들이 실패했다는 게 그가 멍청이였음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자, 히틀러가 멍청이라는 것은 물론 모든 사람이 가진ㅡ히틀러의 정권 장악 이전에 히틀러를 반대했던 모든 사람이 가진ㅡ편견이에요. 따라서 대단히 많은 책이 히틀러를 옹호하면서 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려고 애썼어요. 그래서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했죠. "히틀러가 실패했다는 게 그가 멍청이였다는 것을 보여주지도 않았고, 그가 벌인 일의 규모가 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어주지도 않았다." 즉, 멍청이도 위대한 인물도 아니란 얘기죠. 이 모든 범주의 위대함에는 마땅히 적용할 대상이 없어요. 브레히트는 말하죠. "조무래기 사기꾼이 위대한 사기꾼이 되는 걸 지배계급이 허용한다면, 그는 우리의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특권적 위치에 설 자격이 없다. 즉, 그가 위대한 사기꾼이 됐다는 사실과 그가 한 일이 엄청난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이 그의 위상에 덧붙지는 않는다." 그(브레히트)는 그러고는 다음과 같은 갑작스러운 말을 했어요. "비극은 인류가 겪는 고통을 희극이 그러는 것보다 덜 진지한 방식으로 다룬다고 할 수 있다." 이건 물론 충격적인 발언이에요. 동시에 나는 전적으로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정말로 필요한 것은ㅡ당신이 이러한 상황에서도 진실성을 유지하고 싶다면ㅡ그러한 상황들을 살피던 오랜 방식들을 기억해내고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무슨 일을 하건, 설령 그가 1000만명을 죽였더라도 그는 여전히 어릿광대다.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의 말』 윤철희 옮김, 마음산책, 2016, p.190~193)[14] 아렌트는 상투어 자체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긴 하지만, 이 책에서 자신이 그걸 말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후기」에 나옴)[15] 이데올로기(상투어)의 논리나 단어가 현실과 모순되어도 그 단어가 자신을 위로해줄 수만 있다면 아이히만은 상관없었던 것처럼, 악의 평범성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데올로기적 단어의 문제라기보다, 그 단어를 방패삼아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현실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지 않으려고 할 때 악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강조점이 후자에 있음)[16]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책임 소재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악의 평범성에서 관건은, 이데올로기적 논리가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그 악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에 만족하여 생각 없이 시키는대로 행동할 때 악이 나타난다는 것, 그래서 범죄를 저질러 놓고 이데올로기 탓을 해봤자 무죄는 될 수 없으며, 그 끔찍한 범죄를 명령에 따라 실행할 때 그것에 대해 좀 더 깊게 생각해보지 못한 그 사람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이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악이 이데올로기의 문제라고 주장한 것과 정반대의 주장이라고 할 수 있고, 아렌트는 숄렘과의 편지에서 이에 대해 그렇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17] 아렌트는 실제로 아우구스티누스 전문가였다. 박사 학위 논문도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제였다.[18] 단,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자센과의 인터뷰에서 보여줬던 광신도적 모습을 허영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았으므로, 아렌트의 주장이 완파당했다고 보기에는 힘든 면이 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광신적인 모습 자체가 아예 없었던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그런 광신도적 모습이 그의 실제 모습이 아닌 허영이라고 보았던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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