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스 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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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경주마. 간토의 명기수 마토바 히토시의 가장 특별한 친구. 별칭은 "간토의 자객", 혹은 "오니".
25전 6승으로 통산 전적은 뛰어나진 않지만, G1을 3회 우승하고, 킷카상과 천황상 봄에서 신기록을 경신하는 등 다크호스로 주목받았다. 당대 최강이던 미호노 부르봉의 무패 3관을 저지하고, 사상 최초의 기록을 노리던 메지로 맥퀸의 천황상(봄) 3연패를 저지한 발군의 명마다. 그러나 부르봉과 맥퀸을 응원하던 팬들이 관심 밖이던 라이스 샤워의 우승에 반발하여 악당 이미지를 씌우는 바람에 '간토의 자객', '오니'라는 악담이나 마찬가지인 별칭을 얻기도 했다. 그렇게 응원은 커녕 야유를 받으며 활동하다 부르봉과 맥퀸이 은퇴하고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르려 할 때,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비운의 명마이다.
또한 '일본 경마 최후의 스테이어'라는 평가답게, 3000m 이상의 장거리 G1에서만 3전 3승을 거둔 경주마이기도 하다.
모마 라일락 포인트는 39전 4승을 기록했고 모계 3대모 쿠리노 호시는 1952년 사츠키상, 도쿄 우준에서 우승한 2관마 쿠리노 하나(クリノハナ)의 전형제 여동생이다.
이름 '라이스 샤워'는 서양의 그리스도교식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가 버진 로드 퇴장을 마친 뒤 교회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두 사람의 가정에 축복하는 의미로 하객들이 쌀알을 뿌리는 의식을 의미한다. 힌두교식 결혼에서도 신부에게 쌀알을 뿌리는 의식이 있는데, 같은 표현을 쓴다.[2]
마루젠스키의 외손자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장거리 적성과 마루젠스키 특유의 스피드와 스퍼트 능력을 이어받고 산지가 많은 목장에서 자란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범상치 않은 주행 능력을 보였다고 한다. 산지의 경사에서 뛰놀던 경험은 훗날 교토 경기장의 고저차 4m의 언덕을 오르내릴 때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마루젠스키가 일찍 은퇴해야 했던 원인이 된 약한 다리 또한 물려받았는데, 이는 후술할 비극적인 최후의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출처) 3세마 시절 나카야마 후요 스테이크스에서 이 부위에 처음 골절을 일으킨 이래로, 습관성 골절로 이어져 라이스 샤워의 마생 내내 따라다녔다. 5세마 때 천황상 봄을 앞두고 같은 부위가 또 한번 골절되어 마생에서 가장 빛나야 할 5세마 시절을 통째로 날려먹게 만들었고, 오랜 재활 끝에 완치된 듯 보였다. 그러나 결국 생애 마지막 경기에서 심각한 개방 골절로 이어져 마생을 끝장내버리기에 이른다.
장거리 G1마 답지 않게 처음엔 중앙에서 단거리 신마전을 이기면서 통과를 하였다. 원래 라이스 샤워는 스프린터를 목표로 정하고 있었으나 이후 단거리 중상에서 11착으로 침몰하면서 이후 거리를 점점 늘어가며 성적이 나아진 모습을 보였다. 1,600m OP에서 1착을 한 뒤 사츠키상에서 8착으로 침몰을 하였다. 물론 11번 인기였기 때문에 기대주는 절대 아니었다.
일본 더비(도쿄 유슌)에서 기대가 떨어지며 16번 인기라는 기대도 안됐던 대회에서 무려 2착이라는 이변을 일으키며 정배를 걸었던 사람들의 뒷통수를 완전히 깨트려버리는 뜬금없이 나타난 기대주로 부상한다. 이후 레거시 월드에 밀려 2착을 한번 더 하고 킷카상의 전초전이라고 할수 있는 교토신문배에서도 2착을 하였다. 이때부터 급부상하여 드디어 미호노 부르봉에 이어 2번 인기를 가져갔다.[3]
킷카상에서는 심볼리 루돌프 이래 첫 무패 클래식 삼관 달성을 노리던, 라이스 샤워의 커리어에서 G2 진출 이래로 단 두 번을 빼고는 항상 우승을 가져가던[4] 미호노 부르봉을 저지하고 승리했다. 이 때 당시의 어그로는 쿄에이 보우건이 주로 가져갔는데, 도주 위치에서 부르봉과 경합을 벌이느라 3000m는 처음이었던 부르봉의 페이스를 흔들었다는 비난을 들었기 때문이다.[5]
부르봉을 꺾었을 당시는 쿄에이 보우건이 어그로를 대신 가져가서 단순한 다크 호스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맥퀸을 자신의 힘으로 꺾은 뒤로는 맥퀸 팬들의 비난을 고스란히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부르봉을 상대로 이긴 것까지 안 좋은 의미로 재조명되어 버렸다. 간사이(릿토) 소속의 위대한 두 경주마를 상대로 그들의 홈그라운드인 요도(교토 경마장)에서 두 차례나 잔치상에 초를 친 간토(미호) 소속의 말이라, 간사이 지역의 경마 팬들에게는 실로 악역 그 자체였다.
이외에도 나이스 네이처의 아리마 기념에서 4년 연속 3착 입상 기록 경신을 저지한 것도 라이스 샤워. 사실 이 때 나이스 네이처는 5착을 기록했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라이스 샤워가 없었더라도 4착으로 기록 경신에 실패했겠지만, 절묘하게도 라이스 샤워가 3착을 해버리는 바람에 라이스 샤워의 레코드 브레이커 전설(?)이 유명해지는 데 큰 기여를 한 일화 중 하나가 되었다.
우마무스메 애니메이션 2기에서 차용된 이 CM에서도 라이스 샤워의 몸에 오니가 깃들었다거나 악역, 악몽이 언급되고 안광까지 서려있는 등 여전히 이미지가 남아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천황상 승리 후 부진과 부상이 겹치며 이기지 못하는 나날이 거듭되었다. 올커머 3착-천황상 가을 6착-재팬 컵 14착-아리마 기념 8착.
1994년에는 교토기념 5착-닛케이상 2착. 이후 천황상(봄) 연패를 위해 조교하던 중 3세때 골절된 부위에 다시 부상을 입었다. 이 땐 은퇴를 고려했을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어서 그대로 종마로의 길을 모색했으나, G1 2승이라는 경력이 있음에도 교배 의뢰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좋은 군마를 낳을 종마를 선별하는 것이 경마계의 주된 목표였던 과거와 달리 90년대의 경마계는 더 이상 천황상 봄을 우승했다고 해서 편하게 은퇴를 시켜주지도 않았고, 군마를 고르던 경험에서 비롯된 스테이어에 대한 수요도 없어져서[11][12][13] 외면받게 된 것이다.
결국 종마로의 전환은 취소되었고, 생각보다 부상 회복이 빨라서 10월 말에 복귀했다. 그러나 복귀 후에도 연말 아리마 기념 3착-1995년 교토기념 6착-닛케이상 6착 등 부진한 성적이 계속되었다.
2년간의 부진의 원인으로 가장 큰 이유는 천황상 당시 지나치게 혹독한 조교의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고, 추가로 미호노 부르봉, 메지로 파머에게 패배한 후 맹렬한 투지를 보여줬다는 일화가 있는데 부진의 원인중 하나로 이들을 꺾은 후의 목표로 삼아야 할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다 1995년 천황상 봄에서 2년, 10전만에 첫 승리를 거두며 부활했다. 평소보다 페이스를 빨리 올려 4코너 직전에서 이미 선두를 차지하는 모습에 관계자들은 마크할 말 없이 잘 달릴 수 있을지, 폭주한 것은 아닌지 걱정하였으나, 마토바 기수와 라이스는 홀로 선두에 서는 승부수를 띄워서 마신 차이를 벌린 후 물을 머금은 중(重)마장을 뚫고 마지막 펄롱을 버텨내며, 더 이상 남을 마크하는 것에만 의존하지 않고[14] 스스로의 힘만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사진 판정 끝에 달성한 10cm 차이의 신승이었다. 승리하던 당시 4번 인기였으며 1~3번 인기와 그렇게 배당률이 차이는 많이 안났고(3.5-5.4-5.5-5.8) 라이스 샤워도 사실상 정배였으나 3번 인기 이하였기에 역배가 이겼다는 반응이 많다.
세월이 흘러 맥퀸도, 부르봉도 현역에서 은퇴했던 시절이라, 2년 전에는 대놓고 부르봉과 맥퀸을 편들던 중계도[15] 부르봉과 맥퀸이 응원하고 있을 것이라며 격려한 뒤 라이스가 우승하자 부르봉과 맥퀸도 기뻐할 것이라며 축하했고[16][17] , 야유를 퍼붓던 간사이 팬들조차 꿋꿋하게 버티며 부활한 과거의 악역에게 찬사를 보냈다.[18] , 이는 데뷔 이래로 모두에게 멸시를 받으며 악역이어야만 했던 라이스 샤워가 그의 마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영웅으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19]
이후 타카라즈카 기념이 고베 대지진의 여파로 한신 경마장에서 항상 실적이 좋았던 교토 경마장으로 이전 개최되자 좋지 않은 컨디션임에도 불구하고 출전을 강행했다. 강행 출전한 이유는 단순히 삼관마 나리타 브라이언의 부상과 교토 경마장과 상성이 좋아서만은 아니었다. 1995년 타카라즈카 기념에서 라이스 샤워는 팬 투표 득표수 105,779표로 1위로 출마권을 얻었는데, 미호노 부르봉의 훈련 기법이 알려진 후 칸사이 소속 말이 초강세였던 시기에 보기 드문 칸토 소속 G1마인 라이스에게 큰 기대가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팬들이 있음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프로 스포츠이고 선수이니만큼 출전에는 팬 서비스 목적도 있었다. 더군다나 출마를 결정한 시점은 후술할 JRA의 지원 약속이 있기 이전이었는데, 그 때까지의 라이스 샤워는 초장거리에서만 빛을 보는 스테이어 형질로 인해 상술하듯 두각을 드러낼 수 있는 경기의 숫자가 매우 한정되어있던 탓에 종마로서의 선호도가 바닥을 기었고[20] , 따라서 은퇴 후의 미래가 매우 불안정했다. 이런 상황에서 라이스 샤워는 살아남기 위해 중거리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야만 했다.[21] 그리고 직전 우승한 천황상(봄)과 비교해 주행 거리를 제외하고는 조건이 유사했기에 정상적으로 주행만 해준다면 우승까지는 못하더라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다는 기대를 가졌던 측면이 있었다. 그래서 진영에서는 라이스 샤워가 경기 전까지 컨디션이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 만 더 주행을 해주길 바라는 마음에 출전을 강행한 것이었다.
4코너 직전에 오른앞다리에 개방 골절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일반 골절도 말에게는 치명적인데 뼈가 피부를 찢고 튀어나올 정도의 심각한 부상이라 이송조차 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안락사되었다. 워낙 참담했던 최후였기에 그 이후로 지금까지 여러 관련 매체들은 라이스 샤워의 끔찍한 최후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고 있다.[22][23]
향간에는 라이스 샤워의 기수는 은퇴전인데다 라이스 샤워의 컨디션이 완벽하지 않으니 천천히 몰았는데 라이스 샤워가 갑자기 흥분하여 급발진하는 바람에 그런 사고가 발생하였다는 말이 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거짓이다.
이 경기는 이전까지의 이미지였던 다른 도전자들을 가로막는 장벽이자 악역, 또는 그저 승리가 유력한 주자로써의 인식과는 달리 타카라즈카 기념 팬 투표 1위에도 나타나듯이 칸토 지역 팬들의 기대를 짊어지는, 승패와 무관하게 모든 대중에게 인정과 응원을 받는, 주인공으로서 참전한 처음이자 마지막 경기였다. 또한 종마에서 선택받지 못해 현역으로 돌아오긴 했으나 JRA가 라이스 샤워의 희귀한 스테이어 형질의 보존가치에 다시금 주목하면서 종마 생활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기로 약속했었다.[26][27] 다시말해 경기 결과와 상관없이 이 경기를 무탈하게만 마무리 짓는다면 평온하고 행복한 마생이 보장되어 있었다.
당시 라이스 샤워의 기수였던 마토바 히토시는 낙마 당시 큰 부상을 입진 않았지만[28] 한동안 정신을 잃었던 탓에 라이스 샤워가 죽는 모습을 보지 못했고, 이후 정신을 차리고 뒤늦게 소식을 들었을 때는 "라이스가 죽었을 리가 없다, 내가 직접 가서 확인하겠다."며 한동안 라이스 샤워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결국 안락사 후 차에 실려 경기를 떠나는 라이스 샤워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걸로 파트너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고 한다.
고베 대지진과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으로 인한 어수선한 시국 가운데[29] 교토에서 열린 이 제36회 타카라즈카 기념은 라이스 샤워의 죽음 뿐만 아니라 우승마 단츠 시애틀[30] , 12착 초카이 캐롤, 16착 나리타 타이신이 부상으로 이 대회를 끝으로 은퇴하고 3착 에어 더블린[31] 또한 계인대염 부상으로 무려 2년간의 장기 휴양에 들어가는 등 전체적으로 이 경마 대회 자체에 마가 낀 듯한, 비극적인 대회로 평가받고 있다.
현역 시절 대부분을 악역으로 매도당하기 일쑤였지만 죽은 뒤에는 언론이 태도를 바꿔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는 식으로 보도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언론이 그냥 남들처럼 달렸을 뿐인 말을 악역으로 만들어 죽음으로 내몰고서는 뻔뻔하게 입을 씻는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32] 마토바 히토시 기수는 이후 그래스 원더의 기수가 되어 당대 최고의 인기였던 스페셜 위크를 이기며 언론으로부터 히트맨이라는 찬사를 받았는데 라이스 샤워의 비극을 겪은 이후 이런 언론의 행태에 학을 떼며 그 별명을 질색했다.
언론도, 팬들도 죽기 전까지 실컷 욕해놓곤 비극적으로 죽으니까 영웅 취급하며 띄워주는 꼬라지가 역겹다며 경마를 보지 않겠다는 사람까지 나올 정도로 당시 라이스 샤워의 죽음이 가져온 파장은 굉장했다. 일단 언론도 나름 반성을 했는지, 라이스 샤워의 죽음 이후로 매스컴에서 특정 경주마를 공공연히 악역으로 모는 관행은 찾기 힘들어졌다.[33] 드라마틱한 마생과 동시대의 라이벌들, 그리고 G1 승리 레이스의 조건 편중 경향이 뒤섞여서 사람마다 평가가 바뀌는 기묘한 경주마이기도 하다.
악역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서러브레드 중에서는 드물게도 극히 온화하고 사람과 어울리기 좋아하며 지시에 완벽하게 순응하는 영리하고 착한 말이었다고 한다. 두번째 천황상 봄 제패 후 팬과 기자들이 찾아왔을 때 먼저 관심을 보이고 잘 어울려주었다고 하며, 심볼리 루돌프처럼 사진기가 어떤 물건인지 잘 알고 있어서 사진 찍기 좋은 포즈를 알아서 잡아줬다고 한다. 자기 사진을 보여주면 알아보고 기뻐했다고 한다. 다만 좀 어린애같은 성격도 있어서, 경기에 지고 오면 마방 구석에서 축 쳐져 있다거나, 반대로 칭찬하면 우쭐해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일반적인 말은 싫어하는 것이 보통인 게이트 입장도 문제 없이 해서 게이트 테스트를 한번에 통과하였고, 악벽도 없었으며[34] 훈련에도 충실하게 임하는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오히려 이런 성격 때문에 무리한 훈련을 다 받아들이느라 몸이 망가져서 약 2년 동안 부진을 겪고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는 의견도 있다. 그야말로 아이러니.[35]
간토 말이지만 3번의 G1 승리는 모두 교토 경마장에서 거둔 것도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우승마의 마체중 킷카상 최저기록(438kg)과 천황상(봄) 최저기록(430kg-93년)을 가지고 있다. 1995년 천황상(봄) 우승 시는 4위(442kg)기록이다.
라이스 샤워의 시신은 그가 태어난 홋카이도 노보리베츠시의 유토피아 목장에 안장되었고, 묘비도 그곳에 있다. 라이스 샤워의 묘비는 2개인데, 두번째 묘비는 참배객을 맞이하는 용도로 안내되며, 경마꾼이 죽은 경주마의 묘비에서 돌을 떼어가 부적으로 삼는 등 묘비를 훼손할 가능성을 고려하여 일부러 모서리를 울퉁불퉁하게 만들었다. 라이스 샤워가 실제로 묻혀있는 첫번째 묘비는 팬들에게 거의 공개되지 않으며 묘비의 크기도 작고 형태도 일반적이다.[36] 참조 글 2023년 재단장을 발표했다.
라이스 샤워의 어미 라일락 포인트는 라이스 샤워가 죽은 뒤에도 번식암말 생활을 계속하다가 1997년 막내이자 라이스의 전형제 여동생인 에버 스마일(エバースマイル)을 낳았다. 에버 스마일이 번식암말이 된 뒤 낳은 자식들인 라이스의 조카들은 외삼촌의 성적만큼도 내지 못한 채 경주마에서 은퇴하여 승용마 등으로 여생을 보내고 있다.[37]
라이스 샤워의 승부복은 40년대에 활동했던 명마 쿠리후지와 승부복이 동일하다. 라이스 샤워의 마주인 쿠리바야시 히데오는 쿠리후지의 마주인 쿠리바야시 토모지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어느 말딸갤러가 정리한 라이스 샤워의 일대기. 무려 9편이나 이어지는 장문이지만 뛰어난 필력으로 한 마리의 말이 태어나고부터 죽기까지를 극적으로 묘사하여 많은 추천을 받았다. 라이스 샤워의 마생을 보다 상세히 알고 싶다면 참고할만 하다. 1 2 3 4 5 6 7 8 9.
일본의 대표 경마 시뮬레이션 게인 위닝 포스트 9 2022의 1998년 황금세대 시나리오를 선택하게 되면 신규 설정에서 1998년 전에 사망했거나 은퇴한 말 중 씨수마 생활을 은퇴한 말 일부를 10필 선택해 특별 종마로 등장시킬 수 있는데 거기에 라이스 샤워가 포함되어 있다.[38] 게임 시작 후, 지속적으로 라이스 샤워의 산구를 생산하면서 2005년까지 계속 유지할 경우, 2002년 즈음에 실제 라이스 샤워의 주전 기수였던 마토바 히토시가 은퇴하고 조교사로 등장하게 되는데 이 때, 라이스 샤워의 산구를 그의 마굿간에 맡기게되면 등장하는 이벤트가 있다. 평상시에 게임에서 말을 조교사에게 맡길 경우, "나로 좋다면 맡겠습니다."나 "대단할 것 같은 말이군요, 꼭 맡게 해주세요." 등의 말을 하는데 거기서 라이스 샤워의 산구를 맡길 경우, 어떤 말이든 능력치에 상관없이 특수 대화가 나온다. 내용은 "대단한 말이네요. 게다가 라이스 샤워는 기수 시절 저와 함께한 추억이 깊은 말입니다. 반드시 맡게 해주세요."라고 한다. 실제 기수인 마토바 히토시가 라이스 샤워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떠올려 보면 의미가 깊은 대사. 그리고 이렇게 라이스 샤워의 자마를 2년동안 지속적으로 맡길 경우, 일반적인 상황보다 유구의 능력치가 비약적으로 상승한다.[39] 즉, 실제 경주마 라이스 샤워의 비극적인 죽음을 아쉬워하는 팬으로서는 게임으로나마 자마를 통해 그 비운을 풀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는 셈이다.
[각주]
1. 개요[편집]
너의 장소, 너의 순간
자신의 강점을
무엇보다도 살릴 수 있는 것은
이곳이라 믿고 있는
무대에 선 그대여
타도해야 할 상대는 누구인가
똑바로 쳐다보며
승리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마음속에 그린 그대여
그 장소에서 피어라
그 한순간에 걸어라
JRA 명마의 초상
93년, 천황상 봄.
극한까지 깎아낸 몸에, 귀신이 깃든다.
왕자 메지로 맥퀸의 3연패를 저지한, 칠흑의 스테이어.
힐(악역)인가, 히어로(영웅)인가.
악몽인가, 기적인가.
그 말의 이름은...
라이스 샤워.
다음 전설을 보아라.
2012년 천황상 봄 CM
일본의 경주마. 간토의 명기수 마토바 히토시의 가장 특별한 친구. 별칭은 "간토의 자객", 혹은 "오니".
25전 6승으로 통산 전적은 뛰어나진 않지만, G1을 3회 우승하고, 킷카상과 천황상 봄에서 신기록을 경신하는 등 다크호스로 주목받았다. 당대 최강이던 미호노 부르봉의 무패 3관을 저지하고, 사상 최초의 기록을 노리던 메지로 맥퀸의 천황상(봄) 3연패를 저지한 발군의 명마다. 그러나 부르봉과 맥퀸을 응원하던 팬들이 관심 밖이던 라이스 샤워의 우승에 반발하여 악당 이미지를 씌우는 바람에 '간토의 자객', '오니'라는 악담이나 마찬가지인 별칭을 얻기도 했다. 그렇게 응원은 커녕 야유를 받으며 활동하다 부르봉과 맥퀸이 은퇴하고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르려 할 때,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비운의 명마이다.
또한 '일본 경마 최후의 스테이어'라는 평가답게, 3000m 이상의 장거리 G1에서만 3전 3승을 거둔 경주마이기도 하다.
2. 혈통[편집]
노던 테이스트의 종마 대성공 이후 샤다이는 노던 테이스트-노던 댄서계의 짝으로 붙여줄 새로운 혈통을 물색했다. 그리고 노던 테이스트계에게선 부족한 강인한 힘을 지닌 헤일 투 리즌 - 로베트로계가 좋겠다는 생각으로 구입한 망아지가 라이스 샤워의 아비 리얼 샤다이다. 리얼 샤다이는 프랑스에서 8전 2승을 기록했으나 프랑스 더비 2착, 생클루 대상 3착, 개선문상 5착 등 괜찮은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후 일본에서 씨수말 활동을 시작. 93년 리딩 사이어를 기록할 정도로 성공했다. 이후 선데이 사일런스나 브라이언즈 타임 같은 헤일 투 리즌계 신규 종마와 그래스 원더나 타이키 셔틀 같은 다른 헤일 투 리즌계 외산마의 득세로 빠르게 힘을 잃긴 했지만, 이 두 말의 수입과 성공의 기반엔 헤일 투 리즌계의 선배인 리얼 샤다이의 활약이 있었다.
모마 라일락 포인트는 39전 4승을 기록했고 모계 3대모 쿠리노 호시는 1952년 사츠키상, 도쿄 우준에서 우승한 2관마 쿠리노 하나(クリノハナ)의 전형제 여동생이다.
3. 생애[편집]
이름 '라이스 샤워'는 서양의 그리스도교식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가 버진 로드 퇴장을 마친 뒤 교회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두 사람의 가정에 축복하는 의미로 하객들이 쌀알을 뿌리는 의식을 의미한다. 힌두교식 결혼에서도 신부에게 쌀알을 뿌리는 의식이 있는데, 같은 표현을 쓴다.[2]
마루젠스키의 외손자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장거리 적성과 마루젠스키 특유의 스피드와 스퍼트 능력을 이어받고 산지가 많은 목장에서 자란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범상치 않은 주행 능력을 보였다고 한다. 산지의 경사에서 뛰놀던 경험은 훗날 교토 경기장의 고저차 4m의 언덕을 오르내릴 때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마루젠스키가 일찍 은퇴해야 했던 원인이 된 약한 다리 또한 물려받았는데, 이는 후술할 비극적인 최후의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출처) 3세마 시절 나카야마 후요 스테이크스에서 이 부위에 처음 골절을 일으킨 이래로, 습관성 골절로 이어져 라이스 샤워의 마생 내내 따라다녔다. 5세마 때 천황상 봄을 앞두고 같은 부위가 또 한번 골절되어 마생에서 가장 빛나야 할 5세마 시절을 통째로 날려먹게 만들었고, 오랜 재활 끝에 완치된 듯 보였다. 그러나 결국 생애 마지막 경기에서 심각한 개방 골절로 이어져 마생을 끝장내버리기에 이른다.
3.1. 1992년[편집]
장거리 G1마 답지 않게 처음엔 중앙에서 단거리 신마전을 이기면서 통과를 하였다. 원래 라이스 샤워는 스프린터를 목표로 정하고 있었으나 이후 단거리 중상에서 11착으로 침몰하면서 이후 거리를 점점 늘어가며 성적이 나아진 모습을 보였다. 1,600m OP에서 1착을 한 뒤 사츠키상에서 8착으로 침몰을 하였다. 물론 11번 인기였기 때문에 기대주는 절대 아니었다.
일본 더비(도쿄 유슌)에서 기대가 떨어지며 16번 인기라는 기대도 안됐던 대회에서 무려 2착이라는 이변을 일으키며 정배를 걸었던 사람들의 뒷통수를 완전히 깨트려버리는 뜬금없이 나타난 기대주로 부상한다. 이후 레거시 월드에 밀려 2착을 한번 더 하고 킷카상의 전초전이라고 할수 있는 교토신문배에서도 2착을 하였다. 이때부터 급부상하여 드디어 미호노 부르봉에 이어 2번 인기를 가져갔다.[3]
킷카상에서는 심볼리 루돌프 이래 첫 무패 클래식 삼관 달성을 노리던, 라이스 샤워의 커리어에서 G2 진출 이래로 단 두 번을 빼고는 항상 우승을 가져가던[4] 미호노 부르봉을 저지하고 승리했다. 이 때 당시의 어그로는 쿄에이 보우건이 주로 가져갔는데, 도주 위치에서 부르봉과 경합을 벌이느라 3000m는 처음이었던 부르봉의 페이스를 흔들었다는 비난을 들었기 때문이다.[5]
라이스 샤워에게 첫 G2 출전이자 우승 기회였던 스프링 스테이크스에서 4착을 할 때, 첫 G1 출전인 사츠키상에서 8착을 할 때, 1992년 일본 더비-세인트 라이트 기념-교토신문배 3연전에서 모두 부진할 때 이 중 일본 더비와 교토신문배에서 승리를 가져간 말이 바로 미호노 부르봉이었다.
3.2. 1993년[편집]
그리고 이듬 해 천황상 봄에서 일본 경마 역사상 최초 동일 G1 3연패에 도전하던 메지로 맥퀸을 상대로 무리하게 훈련해서 다른 조련사에게 말이 망가질거란 소리를 듣게 되었지만 이 정도까지 하지 않으면 맥퀸은 이길수 없다는 말과 함께 한계까지 몰아붙여 단련하였고 이러한 훈련으로 끝에 마지막 직선에서 치고 올라가며 맥퀸을 물리치고 무려 트랙 레코드를 달성하며 승리해 맥퀸의 3연패는 이렇게 좌절되었다.[6] 이후 언론에 의해 '간토에서 온 자객'이니 '검은 헬멧'[7][8][9] 이니 '레코드 브레이커'니 하는 식으로 묘사되었다. 우마무스메에서 입고 있는 검은색 승부복과 스킬이 발동되었을 때의 모습도 이 자객의 이미지에서 착안된 것이다.[10]"관동의 자객, 라이스 샤워.
천황상(봄)에도 압도적인 인기였던 메지로 맥퀸을 깨트려버렸습니다""関東の刺客、ライスシャワー。
天皇賞でも圧倒的な人気のメジロマックイーンを破りました"
-스기모토 키요시 아나운서, 1993년 천황상(봄) 우승 콜
부르봉을 꺾었을 당시는 쿄에이 보우건이 어그로를 대신 가져가서 단순한 다크 호스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맥퀸을 자신의 힘으로 꺾은 뒤로는 맥퀸 팬들의 비난을 고스란히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부르봉을 상대로 이긴 것까지 안 좋은 의미로 재조명되어 버렸다. 간사이(릿토) 소속의 위대한 두 경주마를 상대로 그들의 홈그라운드인 요도(교토 경마장)에서 두 차례나 잔치상에 초를 친 간토(미호) 소속의 말이라, 간사이 지역의 경마 팬들에게는 실로 악역 그 자체였다.
이외에도 나이스 네이처의 아리마 기념에서 4년 연속 3착 입상 기록 경신을 저지한 것도 라이스 샤워. 사실 이 때 나이스 네이처는 5착을 기록했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라이스 샤워가 없었더라도 4착으로 기록 경신에 실패했겠지만, 절묘하게도 라이스 샤워가 3착을 해버리는 바람에 라이스 샤워의 레코드 브레이커 전설(?)이 유명해지는 데 큰 기여를 한 일화 중 하나가 되었다.
우마무스메 애니메이션 2기에서 차용된 이 CM에서도 라이스 샤워의 몸에 오니가 깃들었다거나 악역, 악몽이 언급되고 안광까지 서려있는 등 여전히 이미지가 남아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천황상 승리 후 부진과 부상이 겹치며 이기지 못하는 나날이 거듭되었다. 올커머 3착-천황상 가을 6착-재팬 컵 14착-아리마 기념 8착.
3.3. 1994년[편집]
1994년에는 교토기념 5착-닛케이상 2착. 이후 천황상(봄) 연패를 위해 조교하던 중 3세때 골절된 부위에 다시 부상을 입었다. 이 땐 은퇴를 고려했을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어서 그대로 종마로의 길을 모색했으나, G1 2승이라는 경력이 있음에도 교배 의뢰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좋은 군마를 낳을 종마를 선별하는 것이 경마계의 주된 목표였던 과거와 달리 90년대의 경마계는 더 이상 천황상 봄을 우승했다고 해서 편하게 은퇴를 시켜주지도 않았고, 군마를 고르던 경험에서 비롯된 스테이어에 대한 수요도 없어져서[11][12][13] 외면받게 된 것이다.
결국 종마로의 전환은 취소되었고, 생각보다 부상 회복이 빨라서 10월 말에 복귀했다. 그러나 복귀 후에도 연말 아리마 기념 3착-1995년 교토기념 6착-닛케이상 6착 등 부진한 성적이 계속되었다.
2년간의 부진의 원인으로 가장 큰 이유는 천황상 당시 지나치게 혹독한 조교의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고, 추가로 미호노 부르봉, 메지로 파머에게 패배한 후 맹렬한 투지를 보여줬다는 일화가 있는데 부진의 원인중 하나로 이들을 꺾은 후의 목표로 삼아야 할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으로 추정되고 있다.
3.4. 1995년 [편집]
3.4.1. 천황상 (봄)[편집]
그러다 1995년 천황상 봄에서 2년, 10전만에 첫 승리를 거두며 부활했다. 평소보다 페이스를 빨리 올려 4코너 직전에서 이미 선두를 차지하는 모습에 관계자들은 마크할 말 없이 잘 달릴 수 있을지, 폭주한 것은 아닌지 걱정하였으나, 마토바 기수와 라이스는 홀로 선두에 서는 승부수를 띄워서 마신 차이를 벌린 후 물을 머금은 중(重)마장을 뚫고 마지막 펄롱을 버텨내며, 더 이상 남을 마크하는 것에만 의존하지 않고[14] 스스로의 힘만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사진 판정 끝에 달성한 10cm 차이의 신승이었다. 승리하던 당시 4번 인기였으며 1~3번 인기와 그렇게 배당률이 차이는 많이 안났고(3.5-5.4-5.5-5.8) 라이스 샤워도 사실상 정배였으나 3번 인기 이하였기에 역배가 이겼다는 반응이 많다.
세월이 흘러 맥퀸도, 부르봉도 현역에서 은퇴했던 시절이라, 2년 전에는 대놓고 부르봉과 맥퀸을 편들던 중계도[15] 부르봉과 맥퀸이 응원하고 있을 것이라며 격려한 뒤 라이스가 우승하자 부르봉과 맥퀸도 기뻐할 것이라며 축하했고[16][17] , 야유를 퍼붓던 간사이 팬들조차 꿋꿋하게 버티며 부활한 과거의 악역에게 찬사를 보냈다.[18] , 이는 데뷔 이래로 모두에게 멸시를 받으며 악역이어야만 했던 라이스 샤워가 그의 마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영웅으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3.4.2. 타카라즈카 기념[편집]
[19]
이후 타카라즈카 기념이 고베 대지진의 여파로 한신 경마장에서 항상 실적이 좋았던 교토 경마장으로 이전 개최되자 좋지 않은 컨디션임에도 불구하고 출전을 강행했다. 강행 출전한 이유는 단순히 삼관마 나리타 브라이언의 부상과 교토 경마장과 상성이 좋아서만은 아니었다. 1995년 타카라즈카 기념에서 라이스 샤워는 팬 투표 득표수 105,779표로 1위로 출마권을 얻었는데, 미호노 부르봉의 훈련 기법이 알려진 후 칸사이 소속 말이 초강세였던 시기에 보기 드문 칸토 소속 G1마인 라이스에게 큰 기대가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팬들이 있음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프로 스포츠이고 선수이니만큼 출전에는 팬 서비스 목적도 있었다. 더군다나 출마를 결정한 시점은 후술할 JRA의 지원 약속이 있기 이전이었는데, 그 때까지의 라이스 샤워는 초장거리에서만 빛을 보는 스테이어 형질로 인해 상술하듯 두각을 드러낼 수 있는 경기의 숫자가 매우 한정되어있던 탓에 종마로서의 선호도가 바닥을 기었고[20] , 따라서 은퇴 후의 미래가 매우 불안정했다. 이런 상황에서 라이스 샤워는 살아남기 위해 중거리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야만 했다.[21] 그리고 직전 우승한 천황상(봄)과 비교해 주행 거리를 제외하고는 조건이 유사했기에 정상적으로 주행만 해준다면 우승까지는 못하더라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다는 기대를 가졌던 측면이 있었다. 그래서 진영에서는 라이스 샤워가 경기 전까지 컨디션이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 만 더 주행을 해주길 바라는 마음에 출전을 강행한 것이었다.
(분할화면 위쪽에서 라이스 샤워가 쓰러지면서 관중들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ライスシャワー落馬! ライスシャワー落馬であります! 大波乱!大波乱!
라이스 샤워 낙마! 라이스 샤워 낙마했습니다! 대파란! 대파란!
스기모토 키요시 아나운서의 라이스 샤워 낙마 당시 중계멘트.
4코너 직전에 오른앞다리에 개방 골절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일반 골절도 말에게는 치명적인데 뼈가 피부를 찢고 튀어나올 정도의 심각한 부상이라 이송조차 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안락사되었다. 워낙 참담했던 최후였기에 그 이후로 지금까지 여러 관련 매체들은 라이스 샤워의 끔찍한 최후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고 있다.[22][23]
향간에는 라이스 샤워의 기수는 은퇴전인데다 라이스 샤워의 컨디션이 완벽하지 않으니 천천히 몰았는데 라이스 샤워가 갑자기 흥분하여 급발진하는 바람에 그런 사고가 발생하였다는 말이 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거짓이다.
- 컨디션이 완벽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고, 기수도 이를 인지하고 있었다. 실제 1995년 타카라즈카 기념 경기를 보면 라이스 샤워는 개방골절 발생 시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지는데 이는 이전 천황상(봄)에서의 혈투로 약해진 다리의 극심한 피로로 인해 골절이 발생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 그러나 이 때문에 천천히 몰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경마는 관중의 마권과 돈이 걸려있는 경기이고, 타카라즈카 기념은 상반기 그랑프리 레이스로 인기마들이 집결하는 무대인데 이런 무대에서 팬 투표 1위를 받고 3번 인기를 받아 출주한 말이 상태가 좋지 않다고 의도적으로 천천히 달리게 하면 돈을 잃게 된 사람들의 극심한 비난으로 이어진다. 그다지 기대받지 않는 저인기의 말이면서 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24] 나 정말로 경기 중 이상이 발생한 경우[25] 가 아니면 일부러 천천히 달리게 하기가 어렵다. 마토바 기수 또한 경기 당일까지 라이스에게서 예상했던 수준의 컨디션 저하를 제외하면 경기를 뛰면 안된다는 징조를 느끼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 흥분하여 급발진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마토바 히토시 기수는 중후반을 달리다 3~4코너 부근에서 이전 천황상(봄)처럼 스퍼트를 걸었는데 라이스 샤워는 이에 반응하려다 부상이 발생한 것 같다고 다큐멘터리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라이스 샤워는 천황상(봄)에서 스스로의 판단으로 기수가 스퍼트를 걸 것이란 걸 깨닫고 치고 나갔었고 그와 동시에 기수 또한 스퍼트 신호를 내 선두로 나갔었는데 타카라즈카 기념의 급발진 이야기는 앞선 천황상에서의 사례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라이스 샤워와 관련된 여러 매체 보도에서도 급발진에 대한 관계자의 언급은 전혀 없었다.
- 라이스 샤워는 해당 경기를 은퇴전이라고 공표한 적이 없다. 진영에서는 은퇴를 시킬 시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일단 말이 달리고 싶어하는 한은 최대한 달리게 하고 싶어했으며 타카라즈카 기념에서의 성적에 따라(즉 무리없이 호성적을 거둔다면 다음 경기도 내보내고 그렇지 않고 상태가 더 악화된다면 은퇴하는 식으로) 추후의 거취를 결정할 생각이었다. 또한 위에서도 언급했듯 경마는 관중의 마권과 돈이 걸려 있는 만큼, 말의 상태가 이유가 되어 은퇴 경기를 하게 될 경우 앞서 언급한 오스미 샤다이의 예처럼 매체나 발표등을 통해 외부에 대응하여 최대한 사람들이 손해를 보지 않도록 하는데 1995년 타카라즈카 기념에서 라이스 샤워는 이런 절차가 전혀 없었다. 이는 라이스 샤워의 진영에서 정상적으로 경기를 할 것이라고 표명한 것이다. 또한 이 경기가 라이스 샤워의 라스트 런이 맞다면 이에 대해 중계진 쪽에서도 언급을 했을텐테 JRA 공식 중계에서도, TV 중계에서도 전혀 관련 발언은 없었다.
이 경기는 이전까지의 이미지였던 다른 도전자들을 가로막는 장벽이자 악역, 또는 그저 승리가 유력한 주자로써의 인식과는 달리 타카라즈카 기념 팬 투표 1위에도 나타나듯이 칸토 지역 팬들의 기대를 짊어지는, 승패와 무관하게 모든 대중에게 인정과 응원을 받는, 주인공으로서 참전한 처음이자 마지막 경기였다. 또한 종마에서 선택받지 못해 현역으로 돌아오긴 했으나 JRA가 라이스 샤워의 희귀한 스테이어 형질의 보존가치에 다시금 주목하면서 종마 생활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기로 약속했었다.[26][27] 다시말해 경기 결과와 상관없이 이 경기를 무탈하게만 마무리 짓는다면 평온하고 행복한 마생이 보장되어 있었다.
당시 라이스 샤워의 기수였던 마토바 히토시는 낙마 당시 큰 부상을 입진 않았지만[28] 한동안 정신을 잃었던 탓에 라이스 샤워가 죽는 모습을 보지 못했고, 이후 정신을 차리고 뒤늦게 소식을 들었을 때는 "라이스가 죽었을 리가 없다, 내가 직접 가서 확인하겠다."며 한동안 라이스 샤워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결국 안락사 후 차에 실려 경기를 떠나는 라이스 샤워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걸로 파트너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고 한다.
고베 대지진과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으로 인한 어수선한 시국 가운데[29] 교토에서 열린 이 제36회 타카라즈카 기념은 라이스 샤워의 죽음 뿐만 아니라 우승마 단츠 시애틀[30] , 12착 초카이 캐롤, 16착 나리타 타이신이 부상으로 이 대회를 끝으로 은퇴하고 3착 에어 더블린[31] 또한 계인대염 부상으로 무려 2년간의 장기 휴양에 들어가는 등 전체적으로 이 경마 대회 자체에 마가 낀 듯한, 비극적인 대회로 평가받고 있다.
4. 평가[편집]
현역 시절 대부분을 악역으로 매도당하기 일쑤였지만 죽은 뒤에는 언론이 태도를 바꿔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는 식으로 보도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언론이 그냥 남들처럼 달렸을 뿐인 말을 악역으로 만들어 죽음으로 내몰고서는 뻔뻔하게 입을 씻는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32] 마토바 히토시 기수는 이후 그래스 원더의 기수가 되어 당대 최고의 인기였던 스페셜 위크를 이기며 언론으로부터 히트맨이라는 찬사를 받았는데 라이스 샤워의 비극을 겪은 이후 이런 언론의 행태에 학을 떼며 그 별명을 질색했다.
언론도, 팬들도 죽기 전까지 실컷 욕해놓곤 비극적으로 죽으니까 영웅 취급하며 띄워주는 꼬라지가 역겹다며 경마를 보지 않겠다는 사람까지 나올 정도로 당시 라이스 샤워의 죽음이 가져온 파장은 굉장했다. 일단 언론도 나름 반성을 했는지, 라이스 샤워의 죽음 이후로 매스컴에서 특정 경주마를 공공연히 악역으로 모는 관행은 찾기 힘들어졌다.[33] 드라마틱한 마생과 동시대의 라이벌들, 그리고 G1 승리 레이스의 조건 편중 경향이 뒤섞여서 사람마다 평가가 바뀌는 기묘한 경주마이기도 하다.
5. 여담[편집]
악역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서러브레드 중에서는 드물게도 극히 온화하고 사람과 어울리기 좋아하며 지시에 완벽하게 순응하는 영리하고 착한 말이었다고 한다. 두번째 천황상 봄 제패 후 팬과 기자들이 찾아왔을 때 먼저 관심을 보이고 잘 어울려주었다고 하며, 심볼리 루돌프처럼 사진기가 어떤 물건인지 잘 알고 있어서 사진 찍기 좋은 포즈를 알아서 잡아줬다고 한다. 자기 사진을 보여주면 알아보고 기뻐했다고 한다. 다만 좀 어린애같은 성격도 있어서, 경기에 지고 오면 마방 구석에서 축 쳐져 있다거나, 반대로 칭찬하면 우쭐해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일반적인 말은 싫어하는 것이 보통인 게이트 입장도 문제 없이 해서 게이트 테스트를 한번에 통과하였고, 악벽도 없었으며[34] 훈련에도 충실하게 임하는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오히려 이런 성격 때문에 무리한 훈련을 다 받아들이느라 몸이 망가져서 약 2년 동안 부진을 겪고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는 의견도 있다. 그야말로 아이러니.[35]
간토 말이지만 3번의 G1 승리는 모두 교토 경마장에서 거둔 것도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우승마의 마체중 킷카상 최저기록(438kg)과 천황상(봄) 최저기록(430kg-93년)을 가지고 있다. 1995년 천황상(봄) 우승 시는 4위(442kg)기록이다.
라이스 샤워의 시신은 그가 태어난 홋카이도 노보리베츠시의 유토피아 목장에 안장되었고, 묘비도 그곳에 있다. 라이스 샤워의 묘비는 2개인데, 두번째 묘비는 참배객을 맞이하는 용도로 안내되며, 경마꾼이 죽은 경주마의 묘비에서 돌을 떼어가 부적으로 삼는 등 묘비를 훼손할 가능성을 고려하여 일부러 모서리를 울퉁불퉁하게 만들었다. 라이스 샤워가 실제로 묻혀있는 첫번째 묘비는 팬들에게 거의 공개되지 않으며 묘비의 크기도 작고 형태도 일반적이다.[36] 참조 글 2023년 재단장을 발표했다.
라이스 샤워의 어미 라일락 포인트는 라이스 샤워가 죽은 뒤에도 번식암말 생활을 계속하다가 1997년 막내이자 라이스의 전형제 여동생인 에버 스마일(エバースマイル)을 낳았다. 에버 스마일이 번식암말이 된 뒤 낳은 자식들인 라이스의 조카들은 외삼촌의 성적만큼도 내지 못한 채 경주마에서 은퇴하여 승용마 등으로 여생을 보내고 있다.[37]
라이스 샤워의 승부복은 40년대에 활동했던 명마 쿠리후지와 승부복이 동일하다. 라이스 샤워의 마주인 쿠리바야시 히데오는 쿠리후지의 마주인 쿠리바야시 토모지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어느 말딸갤러가 정리한 라이스 샤워의 일대기. 무려 9편이나 이어지는 장문이지만 뛰어난 필력으로 한 마리의 말이 태어나고부터 죽기까지를 극적으로 묘사하여 많은 추천을 받았다. 라이스 샤워의 마생을 보다 상세히 알고 싶다면 참고할만 하다. 1 2 3 4 5 6 7 8 9.
일본의 대표 경마 시뮬레이션 게인 위닝 포스트 9 2022의 1998년 황금세대 시나리오를 선택하게 되면 신규 설정에서 1998년 전에 사망했거나 은퇴한 말 중 씨수마 생활을 은퇴한 말 일부를 10필 선택해 특별 종마로 등장시킬 수 있는데 거기에 라이스 샤워가 포함되어 있다.[38] 게임 시작 후, 지속적으로 라이스 샤워의 산구를 생산하면서 2005년까지 계속 유지할 경우, 2002년 즈음에 실제 라이스 샤워의 주전 기수였던 마토바 히토시가 은퇴하고 조교사로 등장하게 되는데 이 때, 라이스 샤워의 산구를 그의 마굿간에 맡기게되면 등장하는 이벤트가 있다. 평상시에 게임에서 말을 조교사에게 맡길 경우, "나로 좋다면 맡겠습니다."나 "대단할 것 같은 말이군요, 꼭 맡게 해주세요." 등의 말을 하는데 거기서 라이스 샤워의 산구를 맡길 경우, 어떤 말이든 능력치에 상관없이 특수 대화가 나온다. 내용은 "대단한 말이네요. 게다가 라이스 샤워는 기수 시절 저와 함께한 추억이 깊은 말입니다. 반드시 맡게 해주세요."라고 한다. 실제 기수인 마토바 히토시가 라이스 샤워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떠올려 보면 의미가 깊은 대사. 그리고 이렇게 라이스 샤워의 자마를 2년동안 지속적으로 맡길 경우, 일반적인 상황보다 유구의 능력치가 비약적으로 상승한다.[39] 즉, 실제 경주마 라이스 샤워의 비극적인 죽음을 아쉬워하는 팬으로서는 게임으로나마 자마를 통해 그 비운을 풀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는 셈이다.
6. 경주 성적[편집]
[1] 당시 일본 JRA 나이 역산법으로는 7세.[2] 헌데 여담이지만 재미있게도 한국에는 실제로 말을 쌀로 씻겼던 전승이 내려오는 지역이 있다.물론 진짜 위생 목적으로 씻긴것이 아니라 임진왜란때 물이 부족한 걸 속이려고 쌀로 말을 씼기며 기만책을 썼었던 것이지만.1호선 세마역과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는 당시의 전승이 이름으로 남은 곳들이다.레알 라이스 샤워[3] 2400미터 조차 짧다는 평가를 들었던 라이스 샤워가 더비에서 2착을 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92년도 클래식 세대는 장거리와 단거리는 강하지만 중거리는 약했던 세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4] 라이스 샤워는 킷카상 전까지 미호노 부르봉과 4번의 대결에서 모두 완패했지만, 그 격차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5] 물론 어디까지나 당시의 무패 3관이 좌절됨에 따른 분노와 라이스 샤워에게 스테이어라는 인식이 없던 때이기에 생긴 감정적인 여론일 뿐이다. 쿄에이 보우건의 도주로 페이스가 어지럽혀진것은 미호노 부르봉 뿐만이 아니라 다른 말들도 마찬가지였다.[6] 2021년 현재까지 일본 경마의 주요 코스인 잔디에서 동일 G1 3연패를 달성한 말은 아직 없다. 훗날 맥퀸의 외손자인 골드 쉽이 G2인 한신대상전을 3연패 했고, G1 그랑프리인 타카라즈카 기념 3연패를 달성할 뻔 했지만 (자세한 내용은 골드 쉽 문서 참조.) 다만 더트와 장애물은 이미 G1(Jpn1) 3연패를 달성한 말이 나왔다.[7] 그냥 단순히 순번이 2번조여서 기수의 헬멧이 검은 것일 뿐인데도, 스기모토 해설의 언급처럼 맥퀸의 흰색 마체와 대비시키며 기수에게까지 어둡다는 이미지를 덮어 씌운 것이다. 이는 관동, 관서의 지역 감정도 영향을 끼쳤고 마토바 기수도 항의 할 정도로 빌런 이미지가 강했다.[8] 우연찮게도 라이스의 기수였던 마토바 히토시는 여러 레이스에서 유력한 후보들을 제치고 우승한 전적이 다수 있어(라이스 샤워 포함) '히트맨'이라는 별명이 붙었다.[9] 참고로 라이스 샤워와 함께 1998년 황금세대의 대표 경주마 중 하나인 그래스 원더 또한 마토바 히토시 가 기승했으며 1993년 천황상 (봄) 당시 메지로 맥퀸에 기승했던 타케 유타카는 이후 스페셜 위크 에도 기승하게 된다. 1999년 타카라즈카 기념의 전황을 봤을 때, 마토바 히토시가 라이스 샤워에 기승했을 때 사용했던 마크 전법을 1999년 타카라즈카 기념 당시 타케 유타카가 기승했던 스페셜 워크에게 똑같이 시전했고 결국 그 전략이 먹혀서 그래스 원더가 승리했다. 타케 유타카의 입장으로서는 1993년 천황상 (봄)에서 맞붙었던 상대 기수에게 같은 방법으로 패배한 셈.[10] 사실 우마무스메와 실제의 라이스 샤워의 취급은 조금 다르다. 그 당시를 기억하는 일본의 경마팬에 따르면 실제로는 우마무스메에 묘사된 수준은 절대 아니었으며 라이스 샤워가 맥퀸을 이길때 평범하게 환호하던 사람도 매우 많았다고 한다. 사실 천황상 봄 당시 2번인기였기에 역배라고 하기는 어렵다.[11] 천황상에서 우승한 말이 당대 최고로 인정받아 다음 천황상에 출주할 수 없는 전통이 없어진 것은 이미 십수년 전인 81년, 천황상 가을이 3200m에서 2000m로 거리가 변경된 것은 83년이었다. 장거리 경마의 흥행 침체는 일본 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현재진행형이다.[12] 참고로 영국의 경우 클래식 삼관 경주인 2000기니 스테이크스와 더비 스테이크스를 승리하여 2관마가 되더라도 마지막 경주인 세인트 레저 스테이크스는 장거리니까 출주하지 않는게 당연한 것일 정도다. 참고로 1970년에 삼관을 달성한 현시점 영국의 마지막 삼관마인 니진스키 이후 2관마가 세인트 레저에 출주한 경우는 2022년 기준 단 한 번(몬쥬의 자마 카멜롯. 결과는 2착. '부르봉'당했다) 뿐이다. [13] 사실 니진스키조차도 그 당시에 세인트 레저 출주를 선언하자 로테이션으로 관련으로 말이 많았다고 한다.[14] 2착으로 들어온 스테이지 챔프는 바깥으로 멀리 돌아서 들어온 것을 볼 수 있는데, 근거리에서 경합 도중 라이스 샤워 특유의 경쟁심이 발동되는 상황을 피하려는 전술이었다. 공교롭게도 2착을 차지한 스테이지 챔프 또한 부마가 같은 리얼 샤다이다.[15] 위의 천황상 경기만 봐도 스기모토 중계는 경기 시작전부터 마지막 직선까지 대놓고 맥퀸을 응원하는 멘트를 했고, 라이스에게는 무시무시한(こわい), 엄습합니다(襲い掛かります)라는 표현까지 쓰면서 악역으로 매도했으며, 레코드 타임까지 깨며 우승했을 때도 그다지 좋은 말을 해주지 않았다.[16] 팬의 입장에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말을 꺾은 말은 그만큼 강하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납득이 간다는 이유이다. 이는 슈퍼 크릭 진영이 자신들의 연도대표마 기회를 희생하고 타케 유타카에게 오구리 캡에 기승하라고 권한 이유와 동일하다.[17] 중계진이었던 스기모토 아나운서는 1993년 천황상 (봄) 경기때와는 반대로 라이스 샤워와 스테이지 챔프의 1착 사진 판정이 진행되는 동안 라이스 샤워가 패배하지 않을지 우려하는 티가 역력했고 포스트 통과 당시 비디오 스틸로도 판정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우열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중계진에서는 라이스 샤워가 유리한걸로 보였다며 라이스 샤워를 응원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결국 라이스 샤워의 우승이 확정됐을 때 다행히 라이스 샤워가 우승했다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18] 마토바 히토시 기수는 1995년 천황상 (봄)을 우승했어도 1993년 당시의 경기 후 반응에 대한 트라우마가 남아있어서 당연히 그 악역이었던 라이스 샤워가 메지로 맥퀸의 3연패를 저지한 그 대회를 다시 우승했기에 관서의 관중들이 또 다시 라이스 샤워를 향해 비난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래서 골 이후에도 기쁜 내색 없이 무표정으로 일괄하고 빠르게 퇴장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2년 전과는 달리, 관중들의 비난이 아닌 환호가 이어지고 심지어 일부 관중석의 관중들이 경기를 마친 뒤 마토바 기수와 라이스 샤워를 향해 마토바 콜을 외치자 그제서야 긴장을 풀며 미소를 보였다. 위 영상에서 마토바 콜을 가장 크게 외친 관중은 라이스 샤워가 3코너를 지나는 시점에서부터 목이 터져라 응원하고 있었는데, 이런 열성팬이 생겼다는 점에서 라이스 샤워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19] 정식 경기 영상은 아니고 당시 기수이자 현재는 조교사인 마토바 히토시의 다큐멘터리에 삽입된 당시 1995년 타카라즈카 기념 경기이다. 이 영상에서는 당시 경주 영상과 함께 라이스 샤워와 영원한 이별을 하며 느꼈던 감정과 그로 인한 회한의 눈물을 쏟는 마토바의 모습이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20] 이는 라이스 샤워의 체구가 작은 것도 한몫 거들었다. 마체가 작은 종마는 그 작은 체구를 자손들에게 물려줄 가능성이 있는데, 작은 체구는 장거리 경주에서는 스태미나 관리가 용이해 유리한 형질이지만 일본 경마의 중심인 중거리 경주에서는 몸싸움과 가속력 면에서 불리한 형질이기 때문이다.[21] 이후 세대의 같은 사례로, 2004년 킷카상과 호주의 국민적 축제인 멜버른 컵을 일본조교마 사상 최초로 우승한 델타 블루스는 씨수말이 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은퇴했으며, 라이스 샤워 이상의 끔찍한 유리몸에도 불구하고 사상 네번째 킷카상+천황상 2연패를 달성한 피에르망은 G1 우승수가 더 딸리는(하지만 중거리인 아리마 기념을 이긴) 사토노 다이아몬드가 1군격인 샤다이 스탤리온 스테이션에 입성한 것과는 달리 씨수말 2군격인 브리더스 SS에서 씨수말 생활을 시작한 예가 있다.[22] 사후 촬영된 한 다큐멘터리에선 낙마 장면을 보여주지 않고 나레이션으로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비명으로 바뀌었다는 식으로만 간접적으로 언급하며, 위의 다큐멘터리 동영상에서는 견학을 온 아이들에게 말과 함께하는 일의 무거운 책임감을 알려주기 위해 1:20~1:50에서 쓰러지는 장면을 보여주었다.[23] 경마 관련 인기 컨텐츠 중 가장 최근에 등장한 우마무스메조차 라이스 샤워의 마지막 경기를 묘사하지 않았다. 이는 침묵의 일요일 사건을 최대한 재현하거나 반대로 스스로 극복해버리는 IF 스토리로 꽉 채운 사일런스 스즈카의 서사와 많이 대비되는 면이다. 그래서 게임판 라이스 샤워의 현역 행보는 라이스가 영웅이 된 1995년 천황상 (봄)을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끝마치며 그 이후에 벌어졌을 비극을 생략한 상태이다.[24] 1991년 아리마 기념에서 꼴지로 들어온 오스미 샤다이가 이런 사례이다. 오스미 샤다이는 당해 타카라즈카 기념 후 부상으로 인해 은퇴를 선언하고 종마를 준비하던 중 아리마 기념을 회피하는 말들이 많아지자 경주 후 은퇴식을 조건으로 출주하게 된 케이스이다. 이러한 제반 상황이 있었던 만큼 몸 상태는 엉망이었고, 따라서 기수는 우승이 아닌 완주를 목표로 오스미 샤다이를 의도적으로 최후방으로 빼 천천히 달리게 해서 마지막 착순으로 골인했다. 경마 팬들은 이미 매체를 통해서 오스미 샤다이의 근황 및 출주 과정에 대해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마권을 구입하지 않아 인기 순위도 꼴찌였고, 당시 비출혈로 인해 완전히 퍼져버린 트윈 터보보다 더 늦은 최하위로 들어왔음에도 관중들의 비난과 반발을 받지 않았다. [25] 예시로 2021년 5월 빅토리아 마일에서 노스힐즈 소속의 이베리스라는 말이 경기 중 갑자기 속도가 떨어지며 최하위로 쳐졌는데, 기승했던 사카이 마나부 기수는 거의 속보 정도까지 속도를 늦춰 결승점을 통과했고, 경기 후 진단에서 심방세동이 판명되었다.[26] JRA는 중소형 목장에서도 교배료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는 종마를 제공하는 일종의 공공사업을 수행하고 있는데, 경주마 거리 적성의 다양성을 보존한다는 명분으로 JRA 소속 종마로 들이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27] 간혹 라이스 샤워의 타카라즈카 기념 출주가 JRA의 요구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있는데 JRA의 종마 지원 약속은 마주의 타카라즈카 기념 출주 선언 이후였다.[28] 보통 말이 개방골절을 일으킬 때 앞으로 고꾸라져서 넘어지기 때문에, 말은 물론이고 기수 역시 큰 부상을 입는 경우가 많고 심한 경우 기수 역시 목숨을 잃기도 한다. 타케 유타카도 2010년에 더 타이키가 개방골절을 일으켜 낙마하면서 큰 부상을 입어 지금까지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고, JRA 소속 기수 중 19명이 낙마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라이스 샤워는 넘어질 때 앞으로 넘어지지 않고 비스듬하게 뒤로 쓰러졌고 부상이 일어날 당시 라이스 샤워는 어떻게든 버텨보려다 결국 넘어지는데 이 때 실속하면서 말이 다 지나감과 동시에 완전히 쓰러진 탓에 다행히 마토바 기수는 큰 부상을 피할 수 있었다. [29] 한국 역시 그 전 해부터 김일성 사망, 성수대교 붕괴 사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를 연달아 겪으면서 시국이 상당히 어수선했다.[30] 해당 경주에서 2, 3등마와 코 차이 수준의 접전 끝에 비와 하야히데의 기록을 깨뜨리며 새로 레코드 갱신을 했음에도 라이스 샤워의 비극에 묻혀 주목 받지 못했다.[31] 1997년 이후 은퇴한 뒤 종마 생활을 하다가 2003년 한국으로 건너와 씨수말이 되었으나, 뚜렷한 성과는 남기지 못하고 2016년 죽었다.[32] 그러나 이런 여론이 의외로 순기능이 된 적도 있었는데 바로 1992년 킷카상 때 미호노 부르봉의 3관을 좌절시키는데 한 축을 담당했던 말 쿄에이 보우건이 은퇴 후 도축의 위기에서 벗어나 편안한 여생을 보내는데에 일조했다는 점이다. 경주 성적도 좋지않고 혈통도 미미해 은퇴 후 도축될 위기에서 해당 말의 팬이었던 주부 마츠모토 카오리가 이를 막기위해 자비를 털어 쿄에이 보우건을 구입했으나 이후의 말 생활 자금을 대는 데 어려움을 겪고있는 와중 1995년 타카라즈카 기념에서 라이스 샤워의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자 1992년 킷카상 때 미호노 부르봉을 응원했던 팬들 일부는 당시 라이스 샤워가 미호노 부르봉을 이겼던 건 실력이었는데 애꿏은 라이스 샤워와 쿄에이 보우건을 욕해서 미안하다며 기부금을 쾌척했었다. 이로 인해 쿄에이 보우건은 걱정없이 편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게 된다.[33] 공식적으론 그렇긴 한데, 경기 외적 혹은 내적인 이유로 인해 팬들 혹은 관계자에게 빌런 취급당하는 말은 라이스 샤워 이후로도 적잖이 나온다.[34] 이케조에 켄이치의 사례를 보면 악벽이 있는 말을 다룰 때 기수를 비롯한 관계자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를 볼 수 있다.[35] 공교롭게도 이와 같이 지극히 온순하고 착한 성격이었다는 점은 당대 라이벌이었던 미호노 부르봉도 마찬가지였고, 그로 인해 무리한 훈련을 전부 받아들인 나머지 몸이 망가졌다는 점도 동일하다. 그나마 부르봉의 경우 은퇴가 빨랐지만 안락사까지 갈 정도의 치명상은 아니었고 은퇴 후에도 비교적 장수했으니 다행인 부분이다.[36] 유명 경주마의 묘는 경마꾼이 관심을 갖지 않도록 일부러 작고 단촐하게 조성하는 경향이 있다. 미스터 시비, 마루젠스키의 묘가 이런 단촐한 형태이다.[37] 에버 스마일의 자식들 중 번식암말이 된 것도 아그네스 디지털의 딸인 해피 라일락(ハッピーライラック)뿐이었고, 해피 라일락은 아들 골드 수츠(ゴールドスーツ) 한 마리만 낳고 죽었다. 골드 수츠는 지방경마에서 뛰다가 2020년 은퇴하고 그 직후 장염전으로 죽어 현역인 라일락 포인트의 후손은 없다.[38] 사망하지는 않았지만 일찍 씨수말을 은퇴했던 1991년 아리마 기념의 우승마 다이유우사쿠도 다시 특수 종마로 선택할 수 있다.[39] 단, 2년이 지나거나 라이스 샤워가 리딩샤이어가 될 경우에는 해당 특수이벤트와 능력치 상승 기능이 소멸되고 마토바 히토시 또한 라이스 샤워를 일반 말취급 한다.[40] 1995년을 마지막으로 폐지, 1996년부터 마일 GI인 NHK 마일 컵으로 대체[레코드] A B [41] 부상으로 인한 경주 중단. 中으로도 표기한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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