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초고왕 (r5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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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1. 개요[편집]
백제의 제13대 군주이자 어라하. 태어난 해는 미상[3] 이고 346년에 즉위해 375년에 사망했다. 백제의 최전성기를 이끈 정복왕으로 평가받는다.近肖古王 比流王第二子也 體貌奇偉 有遠識
근초고왕은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체격이 크고 용모가 기이하였으며, 식견이 넓었다.[2]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조 첫 문장.
《삼국사기》에는 재위 2년부터 21년 사이의 기록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가 그동안 나라를 어떻게 다스렸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오히려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에 남아있는 왜곡된 기록을 이주갑인상과 주체 교체론[4] 등으로 재구성하는 방법으로 그의 업적이 드러난다. 현존하는 백제의 기록이 얼마나 부실한지 알 수 있는 사례.[5] 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명군임에도 재위 기간의 2/3에 가까운 시기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백제 멸망 이후 수백 년 이후인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의 한계를 볼 수 있다.
2. 명칭[편집]
동성왕 이전까지 백제의 왕 대다수가 이름을 왕호로 사용한 점으로 미루어 이름은 초고 / 조고 / 속고로 추정된다. 셋은 의미상 동일한 단어의 다른 표기인데, 고대 한국어에서 같은 파찰음인 ㅊ, ㅈ, ㅅ 음가의 상호 호환성은 옆나라 신라의 김흠순(純)과 김흠춘(春), 용수(樹)와 용춘(春), 관창(昌)과 관장(壯)과 같은 이표기 사례들을 참고하면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백제 왕실의 국성이 부여씨(扶餘氏)라는 점에 미루어 《진서》에 기록된 '여구'라는 이름은 성을 '여', 이름을 '구'로 축약 표기한 것으로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이런 축약 표기의 사례는 다른 기록들에서도 흔하게 나타난다. 고가 구가 된 것은 고대인의 인명 표기시 방언이나 필사자의 모어, 습관 등의 이유로 모음의 전이가 일어난 것으로 역시 비슷한 사례가 자주 관찰된다. 근초고왕의 경우는 이표기가 많이 남아서 더욱 쉽게 알 수 있다.
백제의 왕계를 살펴보면 위와 같은 대응이 이루어지므로, '근초고왕'의 가까울 근(近)이 이전의 왕과 구분짓기 위해 부기된, 서양의 '2세'와 비슷한 의미의 글자로 추정되기도 하고 한국어 '큰'을 나타낸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고구려에서도 궁(宮)과 이를 따온 위궁(位宮)이 있었다.
이러한 점에 착안한 다른 일설에는 고이왕계인 계왕을 물리치고 초고왕계 왕통을 복구해서 왕명이 근초고왕이 된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근개루왕의 용례와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았을 때, 단순한 동명이인이라는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이 있어 함부로 결론짓기는 애매한 상황이다.
3. 생애[편집]
자세한 내용은 근초고왕/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평가[편집]
백제의 최전성기를 이끈 백제사 최고의 명군이자 삼국시대의 정복군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사실 오늘날 근초고왕이 대한민국에서 평가받는 모습은 한국 고대사가 평가받는 것처럼 때로는 과장, 때로는 축소로 얼룩져 있다. 처음부터 근초고왕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고 있다는 것. 가장 큰 문제는 사료의 부족이겠지만 대한민국 사회가 색안경을 끼고 본 탓도 크다. 흔히 알려진 업적은 고구려와 싸워서 평양성까지 치고 올라갔고 싸우던 와중에 고구려 고국원왕이 백제군의 화살을 맞아 사망한 정도인데 그의 치적은 그것 뿐만이 아니다. 바로 그 직전까지 무수한 정복 활동을 진행한 것으로 추정되며[6] 중국에 기록상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국가로서 인정받고 일본과도 외교 관계를 최초로 여는 등 외교적으로도 백제라는 이름을 각인시켜 백제를 고구려와 맞서는 한 축으로 당당히 성장시켰다.
백제의 전성기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신라의 진흥왕과 비견될 만하지만 광개토대왕은 18세에 즉위하자마자 백제 10성을 점령하는 등 치세를 전쟁과 정복으로 보낸 진정한 정복 군주이며 진흥왕도 10대 후반~20대의 나이 때 영토를 즉위 시점의 2배~3배로 확장시켰다. 하지만 근초고왕은 약 20년 동안이나 힘을 축적하고 이를 바탕으로 재위 후반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복에 나섰다는 점이 다르다. 광개토대왕과 진흥왕이 젊은 패기와 뛰어난 군사적 식견으로 전장을 휩쓰는 패왕 유형의 군주였다면 근초고왕은 약 20년 동안이나 힘을 비축하며 가만히 기다리다가 치밀한 국제 정세의 분석과 조정을 통해 최소한의 전력 소모로 단번에 패권을 휘어잡는 것을 보면 대단히 치밀하고 경제적인 성격의 군주가 아니었을까 한다.[7]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를 보면 근초고왕은 신라, 가야, 일본과 부형자제(父兄子弟)의 관계를 맺으면서 한반도 중남부의 독자적인 패권을 구축했다. 이것은 이후 광개토대왕의 간접적인 복속 정책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정되며 지역적 연맹 국가에서 국제적 패권 국가로 다시 통일적 영토 국가로 발전하는 시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삼국통일로 나아가는 포문을 열었다.
하지만 근초고왕은 말년에 백제 중심의 한반도 남부 질서가 이미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죽었다는 점은 불행이다. 373년에 독산성 성주가 주민들과 함께 신라에 투항했을 때 대응하지 못했고 375년에는 수곡성을 고구려 소수림왕의 침공으로 빼앗겼음에도 보복하지 못했다.
근초고왕 사후 아들인 근구수왕이 어떻게든 백제의 전성기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약화되던 백제 중심의 국제 질서는 382년 왜국 장군 카츠라기노 소츠히코의 팀킬과 396년 광개토대왕, 이후 장수왕의 추가 남정으로 거의 완전히 붕괴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는 딱히 근초고왕의 실책이라거나 백제 자체의 국력 쇠퇴에서 기인한 문제라고만은 볼 수 없다. 백제 자체가 옛 마한 거수국들을 차례차례 공납-간접 지배-직접 지배로 전환하는 큰 흐름은 이 시기에도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 백제는 근초고왕 이후에도 무령왕 시기까지 마한 지역을 직접 지배 방식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지속했기에 백제의 절대적인 국력 자체는 이후에도 차근차근 성장해나가고 있었다고 봄이 옳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생긴 것은 애초에 고구려 자체의 국력이 이미 고국원왕의 선왕들인 미천왕 시절부터 백제를 압도하고 있었던데다 정치 체계 발전도 앞서 있었고 하필 근초고왕이 재위하던 시기에 신라 또한 진한 일대에서의 패권을 움켜쥐며 이전에 비해 비약적으로 강해진데 있다. 백제가 약해졌다기보다는 고구려가 전연에게 당한 패배로 일시 상실한 원래의 잠재력을 회복한데다 신라 역시 비약적으로 강해져 백제를 따라잡기 시작했다는 말. 백제가 경기도 일대를 어떻게든 지켜내면서도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를 모두 직접 지배지로 편성했다면 얘기는 달라졌을 수도 있었겠지만 475년 개로왕 사망과 위례성 함락 사건 이래로 그런 일은 끝내 일어나지 않게 된다.
5. 기타[편집]
- 이도학이 주장한 '만주의 백제가 남하하여 한강 유역의 백제를 정복했다는 설'이 사실이라면 만주 한가운데 있었던 백제 세력이 남하하여 한강 유역의 백제국을 정복한 다음 마한과 가야를 평정하는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백제 건국 시조 중 1명은 부여의 위구태왕이다. 한성백제의 도성 풍납토성의 건축 시점이 아무리 빨라야 제8대 왕인 고이왕 때부터인 점도 의아한 부분.
- 서울특별시의 석촌동 고분군은 백제의 유적인데 이 중 가장 큰 석촌동 제3호분은 4세기 ~ 5세기 백제 왕릉으로 보이며 학계에서는 근초고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물론 그냥 추정이고 확실한 것은 아무도 모른다.
- 2009년경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레알 마드리드 이적 뉴스에 "(호날두의 저 이적료는) 연봉 1억 받는 사람이 근초고왕 때부터 벌어야 벌 수 있는 돈"이라고 했던 글이 여기저기 공유되면서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이 드립은 한참 뒤에도 빌 게이츠 재산을 표현하는 데에도 쓰이는 등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좀 있다.# 아무튼 아주 옛날부터 벌어야 된다는 과장을 위해 근초고왕을 끌어온 것이다.
6. 대중매체에서[편집]
자세한 내용은 근초고왕/대중매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삼국사기》 기록[편집]
《삼국사기》 <근초고왕 본기>
一年 근초고왕이 즉위하다.
二年一月 천지신명에 제사지내다.
[8]
二十一年春三月 신라에 사신을 보내다.
二十三年春三月 일식이 일어나다
二十三年 신라에 사신을 보내다.
二十四年秋九月 치양에서 고구려군을 무찌르다.
二十四年冬十一月 한수 남쪽에서 군사를 사열하다.
二十六年 패하에서 고구려군을 무찌르다.
二十六年冬十月 평양성에서 고국원왕을 죽이다.
二十六年 수도를 한산으로 옮기다.
二十八年春二月 진에 사신을 보내다.
二十八年秋七月 청목령에 성을 쌓다.
二十八年 독산성의 성주가 신라로 도망치다.
三十年秋七月 고구려가 침입해 수곡성을 빼앗다.
三十年冬十一月 근초고왕이 죽다.
고구려와 관련된 것을 빼면 반도 안 남는다.
8. 《일본서기》 기록[편집]
일본 중심으로 쓰인 사서이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 봐서 해석하면 몹시 곤란하다.
9. 둘러보기[편집]
[1] 비류왕의 아들이 아닐 가능성이 큰 이상, 아들 근구수왕의 추측된 탄생년으로 역산한 것이다. 즉, 추측의 추측을 한 것.[2] '몸 생김새가 기이하고 컸으며 원대한 식견이 있었다.'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3] 아들인 근구수왕과 증손자인 아신왕의 연혁을 이용하여 계산해보면 300년대쯤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4] 간단히 말하면 《일본서기》 해당 기록에서 '일본이 했다'는 부분을 '백제가 했다'로 주체를 교체하면 아귀가 맞는 내용이 많다는 것이다.[5] 꼭 백제만의 문제가 아니라 삼국 모두 상당수 왕들의 기록이 많이 비어 있다.[6] 그러나 상당 부분에서 신뢰도 문제가 있다.[7] 《삼국사기》에서도 근초고왕의 성격을 원대한 식견이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8] 재위 2년부터 21년 사이의 기록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9] 뒤에 붙인 연도는 이주갑인상으로 왜곡된 연도를 다시 고친 것이다.[10] 당시 백제의 장수 막고해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11] 백제기에는 직마나나가비궤(職麻那那加比跪)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12] 이 대목에 주의가 필요한데, 대부분 학자들은 연대를 120년 뒤로 늦추고 정벌의 주체를 진구 황후가 아닌 근초고왕으로 바꾸어서 근초고왕의 정복으로 해석한다. 백제계 도래인들이 가져간 백제의 사료들을 《일본서기》 편찬에서 여러 변조를 거쳐 이용했다고 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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