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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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대
법왕
무왕
의자왕
추존
태조 도모왕







백제 왕조
百濟王朝

기원전 18년 ~ 660년
국성
부여씨
창건자
온조왕 (기원전 18년 ~ 28년)
마지막 군주
의자왕 (641년 ~ 660년)
국호
십제 (기원전 18년)
백제 (기원전 18년 ~ 660년)
군주 직함
대왕(어라하, 건길지) (기원전 18년 ~ 660년)
통치 국가
백제 (기원전 18년 ~ 660년)

1. 개요
2. 불행한 왕사
3. 가계도
3.1. 근초고왕 이전
3.2. 초고왕계
3.3. 개루왕계
4. 연표
5. 번외
5.1. 백제의 제후왕 및 후작
5.2. 웅진도독 대방군왕
6. 《신찬성씨록》의 백제계 성씨
7. 기타
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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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 출판사 한국 생활사 박물관 '백제' 편에서 나오는 백제 군주와 왕후의 복식.

백제에는 677년 동안 31명의 군주들이 있었으며, 평균 재위기간은 21년이다.

백제에서 군주들을 생전의 이름이 아니라 시호로 부르는 용례는 24대 동성왕 때부터 공식적으로 도입되었으며, 그 전의 군주들은 모두 '이름+왕'의 형태로 불렸다. 동성왕 때 시법이 온전히 정착된 것도 아니어서, 27대 위덕왕을 '창왕'이라고 부른 금석문도 발견되었다.

성씨는 '부여씨'인데, 줄여서 '여씨'라고도 했다. 이는 동명성왕 추모와 온조왕부여의 왕족에게서 갈라져 나온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 중 하나라는 말이 있다. 백제 부여씨 왕족의 후손은 부여 서씨[1]와 의령 여씨[2]라고 한다.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군주는 8대 군주인 고이왕으로 52년, 참칭 등을 제외하고 가장 짧게 재위한 군주는, 고이왕의 바로 선대왕이자 고이왕에게 왕위를 빼앗겨서 재위 1년도 못 채운 사반왕이다.

군주들의 재위기간이 고구려나 신라에 비교해 굉장히 짧은 편이다. 13대 근초고왕부터 31대 의자왕까지 314년 동안 재위했으나, 국내 사서 기준 근초고왕부터 의자왕까지 총 17세대이기 때문에 한 세대당 평균 재위 기간은 겨우 18.47년. 달리 말하면 한 군주가 태자를 낳는 나이가 평균 18.47살이라는 뜻이다. 《일본서기》 기준으로는 개로왕-문주왕이 같은 항렬, 동성왕-무령왕이 같은 항렬, 위덕왕-헌왕이 같은 항렬로 배열되어 총 14세대가 되므로 평균 22.43년이라는 좀더 현실적인 결과가 나오긴 한다. 구이신왕-비유왕과 법왕-무왕의 세대수는 정확히 서술되지 않았으므로 제외.


2. 불행한 왕사[편집]


한국사의 역대 왕사 중 가장 불행하고 피비린내 나는 왕사를 가지고 있다. 백제 역사가 제대로 파악되는 근초고왕 이후부터의 군주들은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양대에 걸친 최전성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전쟁이나 반란에 휘말려 시해당했다. 게다가 대부분 군주들의 생년도 불확실하다. 무령왕은 웅진백제에서 즉위한 백제 군주 가운데 유일하게 시해되지 않은 군주로, 중흥에 성공한 무령왕 이후에야 그나마 군주들이 비명에 가는 현상이 줄어들었다.

31명의 군주들 가운데 13명이 단명하거나 암살(추정 포함)되었고[3], 3명은 전쟁 중 전사했으며[4], 1명(의자왕)은 당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다. 기록이 불분명한 것을 감안하면 실제 숫자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해당하거나 시해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군주는 초기 6명을 제외한 중반기에 몰려 있는데, 중반기에서도 고이왕 - 비류왕 - 근초고왕, 근구수왕 - 전지왕 - 무령왕, 무왕 - 의자왕의 8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군주들이 이에 해당된다.

더구나 고이왕 앞의 군주들은 사실상 기록이 분명치 않기에 고이왕이 사실상의 건국자로 거론되는 판이며, 의자왕 때 나라가 멸망한 걸 생각하면 정말 제대로 천수를 누린 군주는 31명 고작 8명에 불과하다. 특히 웅진시절이 심한데,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까지 총 4명 중 천수를 누린 왕은 무령왕 단 1명 뿐이다. 마지막 군주인 의자왕은 참칭왕 부여태, 부흥군왕 부여풍을 비롯한 백제 왕실 및 대부분의 귀족들과 함께 포로로 잡혀가 당나라에서 생을 마쳤다.

3. 가계도[편집]


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에 따른 가계도로, 일부는 《일본서기》의 계보를 기입했다. 비록 《일본서기》는 그 진위에 대한 논란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지만 《삼국사기》 편찬 당시에 존재하는 백제 관련 기록이 적었기 때문에 〈백제본기〉가 부실하고, 《구삼국사》를 인용한 《삼국유사》에서도 백제 관련 기록이 가장 적으며, 현전하는 백제의 금석문도 고구려신라에 비하면 그리 많지 않다.[5] 반면 《일본서기》는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 《일본세기》 등 도래인들이 쓴 사서를 직접 인용했기에 백제 왕력에 한해서는 일반적으로 《일본서기》 쪽이 더 신뢰도가 높다고 평가받는다. 무령왕릉 발굴로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이 밝혀진 이후에는 더더욱 그렇다.


3.1. 근초고왕 이전[편집]



흔히 동명왕은 곧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으로 알려져 있지만 중국의 사서에서는 북방의 고리국에서 나와 부여의 시조가 된 동명이라는 인물이 있다. 즉 부여의 계승을 강조했던 백제는 고구려 주몽 신화가 아닌 부여 동명 신화를 강조해서 백제 시조 도모왕(都慕王)이 고구려가 아닌 부여의 동명왕일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백제 역대 군주가 배알한 태조 동명왕이라는 존재가 초대 군주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다만 백제 관련 기록에서 직접적으로 동명(東明)이 언급된 것은 《삼국사기》이고 《일본서기》에서는 도모왕(都慕王)이라는 인물이 언급된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귀수왕은 백제의 제16대 군주로 태조 도모대왕(都慕大王)의 10세손이었다. 《삼국사기》에서 14대 군주라고 한 것과 차이가 있는데 2명의 군주가 누락된 셈이다. 일본의 《신찬성씨록》 또한 2명의 군주가 누락되었음을 암시하다. 해당 기록에서는 문주왕을 도모대왕의 24세손, 혜왕을 30세손으로 적고 있는데, 각각 '도모대왕을 기점으로 24대 군주, 30대 군주'로 취급한다면 《삼국사기》와 일치한다. 이는 당시에 구 백제인들이 온조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인 도모왕을 백제의 태조로, 온조가 주몽의 친자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비류가 주몽의 친자인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온조가 주몽의 친아들이 아니라면 백제가 주몽을 태조로 모실 이유가 없다.

또한 《제왕운기》는 백제의 군주가 678년간 총 34명이 있었다고 말해, 《삼국사기》의 31명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속일본기》 및 《동사강목》과 달리 동명왕부여풍을 군주로 인정하고 있지 않은데, 《제왕운기》는 온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형인 은조가 5개월 동안 재위하다가 죽고, 온조가 왕위를 물려받았다고 말한다.[6] 온조왕~의자왕 사이 677년에 1년이 추가되어 있으므로 적어도 《제왕운기》는 비류를 국왕으로 본 것이 맞는 듯하다. 여기에 《토요타씨 족보》에 나오는 진이왕과 섭정인 부여훈해 또는 참칭왕인 부여설례부여태 등 2명을 추가적으로 헤아려 총 34명으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학계에는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건국부터 3세기까지)을 두고 긍정론, 부정론, 수정론이 존재한다. 긍정론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연대와 인물이 모두 실제와 일치한다는 시각이고, 부정론은 이를 아예 허구로 취급한다. 수정론은 기록의 사건 자체는 사실이되 후대의 일을 과거로 소급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초기 기록 3종류 중에서도 고구려쪽의 초기 기록은 태조대왕 시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비정상적인 수명을 제외하면 대체로 학계에서 사실로 신뢰받는 분위기이지만, 백제(온조, 다루, 기루, 개루)와 신라(혁거세, 남해, 유리, 기림, 흘해)의 기록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특히 백제의 경우, 근초고왕 때 고흥이 《서기》를 편찬했는데, 그 이전엔 문자로 기록하는 일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제대로 된 역사서가 없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때까지의 과거 역사는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었으리라는 추측이 유력하다.

신채호의 학설에 따르면 백제의 창업 군주는 온조가 아닌 온조비류의 어머니인 소서노였다.

고이왕계는 사실 왕성이 '우씨(優氏)'로 초고왕계의 '부여씨(扶餘氏)'와는 다른 왕가였을 거라는 가설도 있다. 백제에서 우씨(優氏)로 보이는 인물들은 고이왕 대의 내법좌평 우두(優豆), 고이왕의 동생 우수(優壽), 비류왕 대 군주의 동생이자 반역자인 우복(優福), 개로왕 대대의 건무장군 우서(于西), 무령왕 대의 달솔(達率) 우영(優永) 등으로 주로 고이왕계에게 세력이 있었을 때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3.2. 초고왕계[편집]


?



13.초고
14.구수
15.침류
17.아화
18.전지
19.구이신
20.비유
신제

훈해
설례

16.진사
진손
태아랑
해양
오정
미사
진이
나패고
선왕후
마려
우지


3.3. 개루왕계[편집]


20.비유
21.경사
22.문주
23.삼근
곤지
25.사마
사아
법사
26.명농
27.
아좌
28.
29.
24.모대
?[7]
?
30.
31.의자



32.
선광

구이신왕까지는 근초고왕의 직계 후손임이 확실하지만, 다음 군주인 비유왕구이신왕과의 관계가 애매하다. 우선 《삼국사기》에서는 비유왕구이신왕의 아들이라고 써놓았지만 일운으로 전지왕의 서자라고도 했고, 《송서》에서는 비유왕전지왕을, 《일본서기》에서는 개로왕구이신왕을 계승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무령왕동명성왕의 18세손이라고 하는데, 일본 측 기록에서는 비유왕-부여곤지-무령왕의 계보를 인정하고 있으므로 비유왕동명성왕의 16세손이 되는데 이 경우 《삼국사기》에서 아버지 또는 형인 구이신왕(14세손)과 2세대의 차이가 나게 된다[8]. 따라서 《신찬성씨록》을 신뢰한다면 구이신왕비유왕은 항렬상 형제, 부자뻘이 아니라 조손뻘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럴 경우, 같은 시대에 활동한 위덕왕진이왕의 세대차가 무려 5세대 이상으로 벌어지기에, 저 18세손이라는 기록이 정말 직계로 18세손을 의미하는지는 불명이다. 《일본서기》에서 즉위 당시 연소하여 대놓고 섭정인 어머니가 간통까지 할 정도였던 사람이 8년 사이에 손자까지 봤을 가능성은 낮고 일단 《신찬성씨록》 기록상 비류왕비유왕이 직계로 이어진 것은 확실한데 정작 근초고왕비류왕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설도 꽤 있다. 위덕왕진이왕이 동시기에 활동한 것을 고려하면 전지왕비유왕이 동세대 정도 되었을 것이다.

오우치(大內) 가문은 쇼토쿠 태자의 스승인 아좌태자와 동일인물로 추정되는 임성태자가 일본으로 망명해 창설한 가문이었다. 족보에 따르면 임성태자는 성왕 또는 위덕왕의 아들이라고 하여 아좌태자와의 공통점이 보인다. 참고로 이 족보에는 법왕과 무왕 사이에 즉위한 진이왕의 존재가 언급된다.

한편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의자왕의 아들 부여선광(扶餘禪廣)이 일본의 지토 덴노로부터 '쿠다라노 코니키시(百濟王)씨'라는 성을 하사받았다.


4. 연표[편집]


잘 보면 한성을 도읍으로 삼은 기간이 압도적으로 길다.


왕호

재위 기간
비고
《한성백제 시대》 BC 18년 ~ AD 475년 (492년)[9]
1대
온조왕(溫祚王)
온조
BC 18년 ∼ AD 28년
파일:attachment/images_26.jpg
시조
2대
다루왕(多婁王)
다루
28년 ∼ 77년

3대
기루왕(己婁王)
기루
77년 ~ 128년

4대
개루왕(蓋婁王)
개루
128년 ~ 166년

5대
초고왕(肖古王)
초고
166년 ~ 214년
소고(素古), 초고(肖故)
6대
구수왕(仇首王)
구수
214년 ~ 234년
귀수(貴須)
7대
사반왕(沙伴王)
사반
234년
사비(沙沸), 사이(沙伊)
/ 살해 추정
8대
고이왕(古爾王)
고이
234년 ~ 286년
고모(古慕), 구이(久爾), 구이(仇爾)
9대
책계왕(責稽王)
책계
286년 ~ 298년
청계(靑稽), 청체(靑替)[10]
/ 전사
10대
분서왕(汾西王)
분서
298년 ~ 304년
암살
11대
비류왕(比流王)
비류
304년 ~ 344년

12대
계왕(契王)

344년 ~ 346년
요절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346년 ~ 375년
초고(肖古), 속고(速古), 배고(背古), 조고(照古)
14대
근구수왕(近仇首王)

375년 ~ 384년
구수(仇首), 귀류(貴流), 구소(久素), 귀수(貴首), 귀수(貴須)
15대
침류왕(枕流王)
침류
384년 ~ 385년
단명[11]
16대
진사왕(辰斯王)
진사
385년 ~ 392년
중국측 정통성 없음
횡사[12]
17대
아신왕(阿莘王)
아신
392년 ~ 405년
아방(阿芳), 아화(阿花), 아미(阿美), 휘(暉)(?)[13]
/ 횡사[14]
섭정
-
훈해
405년
섭정
찬탈
-
설례
405년
찬탈(비정통)
18대
전지왕(腆支王)
전지
405년 ~ 420년
직지(直支), 영(映), 진지(眞攴)
19대
구이신왕(久爾辛王)
구이신
420년 ~ 427년
중국측 정통성 없음
20대
비유왕(毗有王)
비유
427년 ~ 455년
일본측 정통성 없음
살해 추정
21대
개로왕(蓋鹵王)
경사
455년 ~ 475년
개로(蓋鹵), 개루(蓋婁), 개로(盖盧), 경(慶), 가수리(加須利)
/ 근개루왕(近蓋婁王)
/ 패전 후 살해
《웅진백제 시대》[15] 475년 ~ 538년 (63년)
22대
문주왕(文周王)
문주
475년 ~ 477년
문주(汶洲), 문명(文明), 모도(牟都)(?)[16], 도(都)(?)[17]
/ 암살
23대
삼근왕(三斤王)
삼근
477년 ~ 479년
임걸(壬乞), 삼걸(三乞), 문근(文斤)
/ 살해 추정
24대
동성왕(東城王)
모대
479년 ~ 501년
마모(摩牟), 대(大), 마제(麻帝), 모도(牟都)(?)[18], 도(都)(?)[19], 말다(末多)
/ 모대왕(牟大王)
/ 암살
25대
무령왕(武寧王)
사마
501년 ~ 523년
파일:무령왕 표준영정.jpg
사마(斯摩), 융(隆), 세마(嶋)
/ 사마왕(斯麻王)
《사비백제 시대》[20] 538년 ~ 639년 (101년)
26대
성왕(聖王)
명농
523년 ~ 554년
파일:attachment/hrtemplebudda.jpg
명(明)
/ 성명왕(聖明王), 명왕(明王)
/ 패전 후 살해
27대
위덕왕(威德王)

554년 ~ 598년[21]
창왕(昌王)
암살 추정
28대
혜왕(惠王)

598년 ~ 599년
헌왕(獻王)
암살 혹은 단명 추정
29대
법왕(法王)

599년 ~ 600년
효순(孝順)
/ 암살 혹은 단명 추정
불명
-
진이
?~?
진이(辰爾)
/ 진손왕 현손
《사비-금마저백제 시대》[22] 639년 ~ 660년 (21년)
30대
무왕(武王)

600년 ~ 641년
파일:무왕 표준영정.jpg
무강왕(武康王)
31대
의자왕(義慈王)
의자
641년 ~ 660년
마지막 군주. 당나라로 압송, 병사
백제부흥운동 시기》 660년 ~ 663년 (3년)
참칭
-

660년
참칭
정식 군주로 보지 않음. 당나라로 압송.
32대
풍왕(豊王)

660년 ~ 663년
풍장(豊璋), 규해(糺解)
/ 풍장왕(豊障王)
/ 부흥운동 옹립. 고구려로 도피.


5. 번외[편집]


  • 일본서기, 속일본기에서는 백제 왕족인 부여선광[23]이 '선광왕(禪廣王)'으로 나오는데 백제부흥운동 실패 후 부여선광이 일본에 있던 백제 유민들의 대표로 내세워졌거나, 혹은 오기로 추정된다.


5.1. 백제의 제후왕 및 후작[편집]


왕명
인물
임명시기
비고
서하태수(西河太守)
풍야부
450년

우현왕(右賢王)
부여기
457년
백제 왕족.
좌현왕(左賢王)
부여곤지
457년
개로왕의 동생. 동성왕의 아버지.
불사후(弗斯侯)
부여례
미상[24]
개로왕의 사위.
대방태수(帶方太守)
장무(張茂)
미상

면중왕(面中王) > 도한왕(都漢王)
저근
미상
490년
대성팔족 진씨(眞氏)로 추정됨. 항목 참조.
팔중후(八中侯) > 아착왕(阿錯王)
부여고(扶餘古)
미상
490년
백제 왕족.
매로왕(邁盧王)
부여력(扶餘歷)
490년
백제 왕족.
불사후(弗斯侯)
부여고(扶餘固)
490년
백제 왕족.
광양태수(廣陽太守) > 대방태수(帶方太守)
고달(高達)
490년

조선태수(朝鮮太守) > 광릉태수(廣陵太守)
양무(楊茂)
490년

청하태수(清河太守)
회매(會邁)
490년

매라왕(邁羅王)
사법명
490년
대성팔족 사씨.
벽중왕(辟中王)
찬수류
490년
대성팔족 진씨로 추정. 그러나 표기가 정립된 백제 후기에도 진씨와 따로 찬씨가 등장하기에 확실하진 않다.
불중후(弗中侯)
해예곤
490년
대성팔족 해씨.
면중후(面中侯)
목간나
490년
대성팔족 목씨.
낙랑태수(樂浪太守)
모견(慕遺)
490년

성양태수(城陽太守)
왕무(王茂)
490년

조선태수(朝鮮太守)
장새(張塞)
490년


백제의 제후왕은 5세기 중반 ~ 후반인 개로왕, 동성왕 시기에 책봉된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왕족 부여씨이다. 다만 5세기 후반 동성왕의 제후왕 책봉을 끝으로 백제의 제후왕은 등장하지 않는다. 백제의 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지방제도가 자리잡으면서 제후왕 제도가 폐기된 것인지, 기록이 소실된 것인지는 불명이다.

제후왕의 아들이 백제 군주가 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부여곤지의 아들인 동성왕무령왕[25]은 각각 삼근왕과 동성왕이 사망한 뒤 왕위에 올랐다. 개로왕계와 문주왕계가 각각 한성 함락, 삼근왕의 요절로 단절되면서 당시 살아있었던 곤지왕의 아들들(동성왕, 무령왕)이 왕위에 옹립된 것이다.


5.2. 웅진도독 대방군왕[편집]


대수
명칭

재위기간
비고
1대
대방군왕(帶方郡王) 부여융
융(隆)
677년 ~ 682년
숭(崇)[26]/
광록대부태상원외경(光祿大夫太常員外卿)에 임명됨. 사후 당나라 장안에 묻힘.
2대
대방군왕(帶方郡王) 부여경
경(敬)
690년 ~ ?
부여융의 손자. 측천무후에 의해 임명됨.
?대
백제대방왕(百濟 帶方王)
불명
미상
724년 12월 당나라의 내신(內臣)으로 봉선제 참여.
부여경과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음.

나당전쟁에서 웅진도독부는 신라에게 축출당해 요동의 건안성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677년 당나라는 건안성으로 백제 유민들을 모으는 한편 부여융을 대방군왕으로 책봉하고 백제로 다시 보내려했으나, 부여융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682년에 사망하게 된다. 부여융이 사망한 뒤 측천무후는 그의 손자 부여경을 대방군왕으로 책봉해 왕위를 잇게 했지만 이후 단절된 것으로 보인다.

구당서》의 기록에 의하면 724년 12월, 봉선제를 지낸 기록에 참여한 인물 중 '백제 대방왕(百濟 帶方王)'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적어도 8세기 초반까지는 대방군왕 직위를 가진 인물이 존재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인명이 적혀 있지 않아서 부여경과 동일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 부여경이 장수해서 725년 무렵까지 살아있었거나, 부여경 이후에 대방군왕으로 책봉된 인물이 있었을 수도 있다.


6. 《신찬성씨록》의 백제계 성씨[편집]


분가가 있는 경우 본가에 볼드체.
성씨명
시조
和朝臣
동명성왕 18세손 무령왕
和連
오소리키왕(雄蘇利紀王). 국주(国主)로 나와있다.
高野造
좌평 여자신
百済朝臣
동명성왕 30세손 혜왕
百済公
동명성왕 24세손 문주왕
酒王
因鬼神感和之義、命氏謂鬼室。폐제 덴표호지 3년에 고쳐 백제공(百済公) 성을 하사받았다.
六人部連
刑部
酒王
水海連
努理使主
誉田天皇[謚[[오진 덴노|応神]]。]御世、帰化。孫阿久太男弥和、次賀夜、次麻利弥和。弘計天皇[謚[[켄조 덴노|顕宗]]。]御世、蚕織献絁絹之様。仍賜調首姓
調連
民首
調曰佐
伊部造
乃里使主
林連
木貴
直支王[古記云[[문주왕|周王]]。][27]

大石林
林史
大原史
漢人木姓阿留素、西姓令貴
香山連
달솔 형원상(荊員常)
高槻連
달솔 명진(名進)
広田連
辛臣君
石野連
近速王[28]孫憶頼福留
神前連
人正六位上賈受君
沙田史
오보니왕(意保尼王). 정식 군주가 아니라 그냥 국인(国人)이다.
大丘造
速古王十二世孫恩率高難延子
小高使主
毛甲姓加須流気
飛鳥部
国本木吉志
百済王
義慈王
菅野朝臣
都慕王十世孫貴首王
塩君男(大阿郎王三世孫)味散君[29]/智仁君[30]/麻侶君[31]/孫宇志[32]
葛井宿祢
宮原宿祢
津宿祢
中科宿祢
船連
岡原連
辰斯王知宗
三善宿祢
速古大王
錦部連
鴈高宿祢
貴首王
安勅連
魯王
城篠連
達率支母未恵遠
市往公
明王
目図王男安貴
岡連
広井連[33]
避流王
河内連
동명성왕의 아들 음태구수왕(陰太貴首王)
百済伎
동명성왕의 손자 토사왕(徳佐王)
広津連
근구수왕
清道連
은솔 納比旦止
広海連
韓王信之後須敬
不破連
동명성왕의 후손 비유왕
麻田連
朝鮮王
春野連
速古王比流王/汶休奚[34]
面氏
己汶氏
汶斯氏
大県史
와토(和徳)
道祖史
挨許里公[35]
苑部首
知豆神
園人首
飛鳥戸造
비유왕의 아들 부여곤지
동성왕
御池造
扶餘卓斤国主施比王
中野造
간솔 答他斯智
真野造
肖古王
枌谷造
堅祖州耳
坂田村主
頭貴村主
上勝
多利須須

不破勝
渟武止等
漢人
多夜加
賈氏
賈義持
半毗氏
사반왕
大石椅立
庭姓蚊尓
末使主
津留牙使主
木曰佐
岡屋公
비류왕
縵連

宇奴首
弥奈曽富意弥[36]
宇努造
波多造
佐布利智使主
薦口造
抜田白城君
為奈部首
中津波手
牟古首
ウ汜吉志
原首
福徳王[37]
三野造
布須真乃古意弥
佐良々連
久米都彦
依羅連
素祢(志)夜麻美乃君
山河連
呉服造
阿漏史
古市村主
虎王
上曰佐
久尓能古使主
信太首
百千
取石造
아마오미(阿麻意弥)
葦屋村主
意宝荷羅支王
大根使主[38]
村主
衣縫
露命[39]


7. 기타[편집]


  • 백제는 다른 국가에 비해 유독 재위기간이 짧은 군주들이 여럿 있다. 가장 짧은 재위를 한 군주는 사반왕으로 1년도 채 재위하지 못했다. 그 덕에 《삼국사기》에도 항목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 뒤로 1년간 왕위에 있었던 혜왕(598년 음력 2월 ~ 599년), 2년간 재위한 계왕(344년 음력 10월 ~ 346년 음력 9월), 법왕(599년 ~ 600년 음력 5월)[40], 침류왕(384년 음력 4월 ~ 385년 음력 11월)이 뒤를 따른다.
  • 재위기간이 짧고 왕권이 불안정했던 것과 별개로 백제 군주들의 평균 수명은 상당히 긴 편이었다. 물론 출생연도가 전해진 군주들은 삼근왕, 무령왕, 위덕왕 3명뿐이라[41] 정확한 수명을 알긴 힘들지만 그래도 대략적으로 추정했을 때 무령왕 이후 의자왕 시기까지 만 60세를 못 넘긴 군주는 성왕, 법왕 정도밖에 없다.[42] 이는 40대 초반 수명의 통일신라, 42세의 고려, 47세의 조선과 대비된다. 이건 고구려도 마찬가지로, 평균적으로 5~60년 이상 산 사람이 많으며 장수왕의 97세는 시호에서 보듯 과장이 아니라 진짜였다. 부여의 대소왕도 그렇고 부여-고구려-백제 왕조는 장수 유전자를 소유하고 있었던 걸로 추정된다.
  • 삼국 중 유일하게 군주로 추존된 인물이 없다.[43][44] 대신 삼국 중 유일하게 제후왕 작위를 받은 인물들이 있다.


8.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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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성왕





























비류국
비류왕
































덕좌왕























































부여질







































































































장남



13대
근초고왕




12대
계왕
























14대
근구수왕






















































섭정
훈해왕



찬탈
설례왕

























부여신제

























19대
구이신왕





























부여주












































































































순타태자




26대
성왕



(?)





















부여법사




28대
혜왕



(?)























아좌태자


29대
법왕




























30대
무왕





























부여교기

























32대
풍왕


부여선광


















부여문사

부여문선

부여덕장


부여사


부여창성



























[범례]
실재 혈통 기준
세로선(│) 부자, 부녀, 사위관계
가로선(─) 형제, 자매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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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고종이 백제의 왕자 부여융에게 서씨라는 성을 하사했다고 한다.[2] 부여풍의 후손으로 중국에 살던 중 송나라 때 고려로 환국한 간관 여선재(余善才)를 중시조로 삼고 있다.[3] 사반왕, 분서왕, 계왕, 침류왕, 진사왕, 아신왕, 비유왕,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위덕왕, 혜왕, 법왕.[4] 책계왕, 개로왕, 성왕.[5] 《삼국사기》를 보면 알겠지만 고구려 관련 기록에서 《수서》를 그대로 복사 붙여넣기한 〈을지문덕 열전〉에서 어떻게든 좋은 수식어를 넣어 띄워주려는 서술이나, "당태종을 막아낸 영웅의 이름을 모른다는게 너무 아쉽다.", "연남생은 당나라 입장에선 영웅일지 모르나, 우리가 보기엔 매국노일 뿐이다." 같은 사론이 포함된 것만 보더라도 신라 이외의 국가에 대해 깎아내리려고 일부러 악의적인 서술을 했다는 것은 사실과 아주 다르다. 자세한 내용은 《삼국사기》 항목을 참조.[6] 《제왕운기》 〈백제기〉 주석: 與母兄殷祚南奔立國殷祚立五月而卒.[7]일본서기》에 따르면 동성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사람으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 등이 있었다.[8] 《신찬성씨록》에서 근구수왕동명성왕의 10세손으로 나오고, 《일본서기》에서 근구수왕-침류왕-아신왕-전지왕-구이신왕의 계보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9] 서기 0년이 없으므로 493-1=492년[10] 청체는 출전이 《삼국유사》지만 《삼국유사》에서도 오기라 하였다.[11] 정쟁으로 죽었다는 설이 있다.[12]삼국사기》에서는 사인 없이 그냥 사냥 중 머물던 행궁에서 죽었다고만 기록되어 있지만 《일본서기》에서는 시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3]진서》에서 386년 백제 왕태자 여휘를 '사지절도독 진동장군 백제왕'으로 삼았다는 기사가 있다. 386년은 진사왕 2년이지만 진사왕은 침류왕의 동생이었지 아들이 아니었고, 임명 전 관등이 군주가 아닌 왕태자였다는 점 때문에 여기 등장하는 부여휘는 침류왕의 아들인 아신왕이라는 가설이 있다.[14] 분사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역시 정쟁에 휘말려 죽었다는 설이 있다. 이후 왕실 내에 갈등이 벌어져 전지왕 즉위전까지 섭정을 맡았던 부여훈혜가 부여설례에게 죽었다. 부여설례는 군주를 칭한 뒤 아신왕의 태자 부여전지까지 죽이려고 했으나 여론이 동조하지 않아 귀족들에게 살해당했다.[15] 문주왕 즉위와 동시에 웅진 천도.[16] 이병도는 모도는 동성왕의 이름인 모대의 다른 표기이며 문주왕과 혼동된 것이라 하였다.[17] 모도의 축약 표기.[18] 이병도는 모도는 동성왕의 이름인 모대의 다른 표기이며 문주왕과 혼동된 것이라 하였다.[19] 모도의 축약 표기.[20] 성왕 16년(538년) 사비 천도.[21] 재위 44년. 향년 73세. 연도 추정과 생몰년이 확실한 백제 군주 가운데는 가장 장수했다.[22] 무왕 40년(639년) 금마저 천도. 단, 완전한 천도는 아니고 대신라전쟁을 위한 별도 조성, 왕권 강화를 위한 대규모 토목공사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왕, 왕궁리 유적 문서 참고[23] 구당서에 나온 부여풍의 형제 부여용과 동일인으로 추정된다.[24] 부여고가 490년 불사후가 된 점을 보면 490년에 후작에서 밀려났거나 사망한 것으로 보여진다.[25] 다만 무령왕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개로왕이란 설도 존재한다. 항목 참조.[26] 《당회요》 〈백제전〉에서 부여숭으로 등장. 이는 당 현종 이융기의 이름과 겹쳐서 피휘되었기 때문이다.[27] 林連의 일부 기록에서 등장하는 서술.[28] 근초고왕과 이름이 유사하지만 여기서는 어째서인지 국인(国人)으로 되어있다.[29] 장남. 葛井宿祢[30] 차남. 船連, 宮原宿祢[31] 3남. 津宿祢[32] 中科宿祢. 津連에서 파생되었으므로 마려군(麻侶君)의 아들로 추정된다.[33] 황별씨족 편에서도 등장하는데 시조가 사가 덴노의 아들 미나모토노 마코토이다. 사가 덴노는 어머니가 무령왕의 후손인 간무 덴노의 아들이므로, 避流王은 무령왕의 직계 조상인 비류왕을 뜻함을 알 수 있다.[34] 己汶氏. 일본측 기록에서 奚는 존칭 표기로 자주 쓰였으므로 이름은 그냥 문휴(汶休)일수도 있다.[35] 일단 국주(国主)라고 하여 군주로 나와있다.[36] 弥那子富意弥라고도 쓴다. 국군의 아들(国君男)이라고 한다.[37] 본가인 真神宿祢는 중국계로 분류되어 있고, 분가인 原首는 백제계로 분류되어 있다.[38] 村主[39] 백제의 신(神)이라고 적혀있다. 이 신에 대한 존칭을 나타내므로 이름에 해당하는 부분은 露이다.[40] 5~6개월 정도 즉위하여 기록이 애매한 사반왕을 빼면 실질적으로 가장 짧게 재위한 백제 군주.[41] 삼근왕: 465년, 무령왕: 461년 혹은 462년, 위덕왕: 525년. 《일본서기》나 〈무령왕릉 지석〉의 무령왕의 연령기록을 참고해보면, 무령왕은 461년에 태어나 523년에 62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한다. 백제에서는 세는 나이가 아닌 연 나이로 나이 계산을 했음도 추정해 볼 수 있으나 연 나이로 나이를 계산했다는 기록이 없다.[42] 무령왕 60~61세, 성왕 40~50대, 위덕왕 73세, 혜왕 60~70대 추정, 법왕 30~50대 추정, 무왕 60대 이상(유골 감정 결과), 의자왕 60대 추정. 그나마도 성왕은 전사했고, 의자왕은 화병으로 일찍 죽은 걸 감안하면 정상적으로 생존했을 시 더 오래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43] 신라는 상대에 갈문왕이 존재했고, 중대~하대에는 추존 군주가 존재했다. 고구려는 보장왕의 부친인 고대양을 태왕으로 추존했다.[44] 《일본서기》에서 부여곤지를 '곤지왕(昆支王)'으로 기록하긴 했지만 곤지가 군주로 추존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