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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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실존 인물
2.1. 동아시아사
2.1.1. 한국사
2.1.2. 중국사
2.1.3. 몽골사
2.2. 동남아시아사
2.3. 인도사
2.4. 중앙아시아사
2.5. 중동사
2.6. 유럽사
3. 가공 인물



1. 개요[편집]


정복왕( / o Conquistador)는 매우 넓은 영토를 정복한 군주를 높여 부르는 일종의 찬사이다.


2. 실존 인물[편집]



2.1. 동아시아사[편집]



2.1.1. 한국사[편집]


  • 위만조선 - 위만[1]
  • 고구려 - 동명성왕[2], 태조대왕[3], 미천왕[4], 광개토대왕[5], 장수왕[6], 문자명왕[7], 영양왕[8]
  • 백제 - 온조왕[9], 고이왕[10], 근초고왕[11], 무령왕[12], 무왕[13]
  • 신라 - 탈해 이사금[14], 파사 이사금[15], 아달라 이사금[16], 벌휴 이사금[17], 조분 이사금[18], 지증왕[19], 법흥왕[20], 진흥왕[21], 태종 무열왕[22], 문무왕[23]
  • 발해 - 무왕[24], 문왕[25], 선왕[26]
  • 고려 - 태조[27], 공민왕[28]
  • 조선 - 세종[29]


2.1.2. 중국사[편집]


  • 진나라 - 시황제[30]
  • 한나라 - 무제[31]
  • 수나라 - 문제[32]
  • 당나라 - 태종[33], 고종[34]
  • 송나라 - 태조[35], 태종[36]
  • 요나라 - 태조[37]
  • 금나라 - 태조[38]
  • 원나라 - 쿠빌라이 칸[39]
  • 명나라 - 홍무제[40], 영락제[41]
  • 청나라 - 천명제[42], 숭덕제[43], 순치제[44], 강희제[45], 건륭제[46]


2.1.3. 몽골사[편집]


  • 몽골 제국 - 칭기즈 칸[47], 오고타이 칸[48], 몽케 칸[49]
  • 돌궐 - 목간가한


2.2. 동남아시아사[편집]




2.3. 인도사[편집]


  • 마우리아 제국 -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아소카 대왕[50]
  • 촐라 제국 - 라젠드라 1세[51]
  • 델리 술탄 왕조 - 무함마드 빈 투글라크[52]
  • 무굴 제국 - 악바르 대제, 아우랑제브[53]
  • 마라타 동맹 - 바지라오 1세[54]
  • 시크 제국 - 마하라자 란지트 싱


2.4. 중앙아시아사[편집]


  • 훈 제국 - 아틸라
  • 티무르 제국 - 티무르[55]
  • 아프샤르 왕조 - 나디르 샤[56]


2.5. 중동사[편집]


  • 아카드 제국 - 사르곤 대왕, 나람신
  • 아시리아 -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 아슈르바니팔
  • 바빌로니아 - 함무라비, 네부카드네자르 2세
  • 이집트 신왕국 - 투트모세 1세, 투트모세 3세
  • 페르시아 제국 - 키루스 2세[57], 다리우스 1세
  • 오스만 제국 - 무라트 1세[58], 바예지트 1세[59], 무라트 2세[60], 메흐메트 2세[61], 셀림 1세[62], 쉴레이만 1세[63]


2.6. 유럽사[편집]


  • 마케도니아 제국 - 알렉산드로스 대왕[64]
  • 대영제국 - 빅토리아 여왕[65]
  • 영국 - 윌리엄 1세[66]
  • 덴마크 - 크누트 대왕
  • 포르투갈 왕국 - 아폰수 1세[67]
  • 프랑스 제국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프랑크 왕국 - 카롤루스 대제
  • 로마 제국 - 율리우스 카이사르[68], 아우구스투스[69], 트라야누스[70], 바실리오스 2세[71]


3. 가공 인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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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나라의 변경을 지켜준다는 명목으로 한의 지원을 받아서, 이웃의 작은 마을과 진번, 임둔을 공격하여 영토를 수천리로 늘렸다.[2] 비류국을 흡수했다.[3] 초기 고구려의 대표적 정복군주로 그의 치세에서 고구려란 국가의 기틀이 닦였다해도 과장이 아니다.[4] 고구려가 동북아 패자로 성장할 수 있는 밑바탕을 깔아준 군주. 낙랑과 대방을 정복하여 한반도 서북부를 장악했는데 이를 통해 영토 확장은 물론이고 이전 중국 직할지였던 한사군을 합병함으로써 고구려가 고급 인력을 확보하고 중원 문화를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배경을 마련해주었다.[5] 이름부터가 정복군주. 고구려의 체급을 완성한 태왕으로 이러한 체급을 바탕으로 고구려는 삼국 중 압도적인 전력을 구가하게 되었고 수비전에서나마 중국 통일왕조 , 과도 대등한 전쟁을 할 수 있었다. 요동, 부여, 한반도 중부 등의 알짜배기 땅들이 모조리 이 시기 확보되었다.[6] 선대인 광개토대왕의 적극적인 북진정책을 지켜보았으나 당시에 남부 2국의 움직임을 불안하게 생각하였다. 더이상의 북진은 국경이 너무 넓어서 진군 중에는 무조건 국군을 대부분 데려가야 했기 때문에 광개토대왕이 승하한 이후 즉위하자마자 남진 정책으로 시선을 돌린다. 이후, 적극적인 남진정책으로 백제와 신라를 몰아붙였으며 백제의 수도 한성을 차지하고 경상북도까지 영토를 넓혔다.[7] 북부여를 흡수했다.[8] 수나라와의 전쟁으로 유명하지만 정복 행보도 보였는데 그의 치세 때 고구려가 한강에 상당히 근접하는 수준으로 영토를 얻었음이 드러났으며 이는 이후 연개소문의 활약으로 이어진다.[9] 마한을 흡수했다. 다만 논란이 있다.[10] 서울과 인천에 국한되었던 백제 초기 강역을 수 배 확장했고 이 시기 백제는 한강 중하류 전역을 장악하게 된다.[11] 서울과 경기도 한강 유역 일대에 한정된 백제의 영역을 북으로는 황해도, 남으로는 충청도 거의 전역과 전라북도 북부 정도까지 크게 확장시켜 백제가 마한의 맹주를 넘어 삼국의 일원이 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왜국에 사신을 파견하고 칠지도를 선물함으로써 한일관계의 역사를 열기도 했다.[12] 마한을 멸망시켜 전라도 전 지역을 모두 정복했다. 흔히 전라도(특히 전남)는 백제 영역이었던 시기가 짧다고 얘기들 하는데 이 시기부터 660년 백제가 멸망할때까지 140여년간 호남 거의 전역(가야 문화권에 속한 낙동강 서안의 극동부 지역 일부 제외)은 확고한 백제의 영토였다. 참고로 무령왕이 경기도 남부와 한강 유역 부근까지 재진출했다는 견해도 존재했는데 무령왕기 백제의 북쪽 영토 경계선에 대해서는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충주 고구려비가 장수왕이 아닌 광개토대왕의 비석으로 밝혀져 광개토대왕시기 고구려 영역에 대한 재논의가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무령왕 시기 한강 유역까지 백제가 다시 치고 들어갔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기존의 역사를 다시 수정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13] 위덕왕 시기부터 시작된 재정비와 개혁을 기반으로 신라를 향한 대대적인 집단공세에 나섰다. 대규모 토목공사를 단행하고 금마저, 현 익산으로 수도를 옮기려 하기도 하였으며 전쟁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무왕기 백제의 전방위 대공세로 신라는 옛 가야땅과 40여개의 성을 손실하는 등 다시 크게 위축되며 당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였다.[14] 거칠산국우시산국을 흡수했다.[15] 신라 전기의 대표적인 정복 군주로 경주시와 그 인근 일대 정도에만 국한된 신라의 영역을 현재의 경북 거의 전역으로 확장해 신라를 진한 최대 맹주로 성장시켰다.[16] 계립령과 죽령을 흡수했다.[17] 소문국을 흡수했다.[18] 감문국골벌국을 흡수했다.[19] 우산국을 흡수했다.[20] 탁기탄탁순국금관가야를 흡수했다.[21] 가야를 멸망시키고 고구려, 백제의 영토를 빼앗아 낙동강 이동의 경상북도 대부분과 경상남도 동부 일부 정도에 한정되던 기존 신라 영토를 몇 배로 늘렸고, 이후 삼국시대 최후의 승자가 되는 기반을 닦았다.[22] 백제를 멸망시켰다.[23]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백제 지역을 온전히 흡수하는데 성공했으며 한반도를 완전히 지배하려는 당나라의 침공을 물리치는데 성공하여 신라의 자주성을 지켰다.[24] 그의 치세 때 2번에 걸친 당나라 원정이 있었으며 고구려의 고토를 대부분 수복했다.[25] 용흥강 주변을 흡수했다.[26] 교과서에 나오는 해동성국 발해 영역은 선왕 때 완성되었다.[27] 남으로는 후백제와 신라를 복속시키고, 북으로는 평안남도와 함흥 일대를 확보했다.[28] 쌍성총관부 수복으로 대표되는 동북지역 영토 수복과 함께 요동 정벌을 지시해 일시적으로나마 점령에 성공하며 발해시기 이후 400여년만에 한민족이 요동에 진출한 사례로 남았다.[29] 여진을 정벌하고 4군 6진을 설치했다.[30] 전국시대를 끝냈다. 이것으로 요약이 가능하다.[31] 흉노를 무릎 꿇렸으며 푸젠성 저장성을 중국의 영토로 만들고 남월도 정복했다. 한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도 그에게 정복되었다.[32] 팔왕의 난부터 시작해서 5호 16국 시대로 대표되는 분열기를 끝낸 장본인이다.[33] 동돌궐과 고창국을 정복했다.[34] 아버지가 북방과 서방을 정복했다면 이쪽은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리며 동방 정복에서 두각을 드러냈다.(물론 동방만 신경쓴 건 아니고 다시 흥기하려던 돌궐을 밟아놓기도 하고 토번과 충돌하는 등 북방과 서방도 나름 신경쓰긴 했다.) 문제는 이후 백제 지역은 신라가 빼앗아가고 고구려 지역에선 발해가 흥기하는 등 고종의 정복은 아무 실적도 없었다는 것. 그래서 고종은 태종과 달리 암군이라 자주 불린다.[35] 당나라 멸망 이후 벌어진 5대 10국 중 북한과 남쪽에 위치한 오월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을 흡수했다.[36] 당나라 멸망 이후 벌어진 5대 10국 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재통일했다.[37] 거란을 통일하고 돌궐, 탕구트, 발해를 정복했다.[38] 사실상 요나라 정복. 금나라와 송나라의 공격 이후 요나라는 껍데기만 남았고, 금 태조가 사망한지 고작 2년 뒤에 멸망한다.[39] 원나라=몽골 제국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미 끝난다. 몽골 제국이라는 요인을 뺀다면 고려 복속, 남송 정복 등이 눈여겨 볼만한 정복 행보.[40] 원나라를 다시 북으로 몰아내고 중원 전역을 다시금 정복했다.[41] 몽골 지역에 대해 자주 친정을 벌였으며 베트남을 정복했다.[42] 후금의 창업군주로서 분열되어 있던 여진 세력을 다시금 통일했으며 사르후 전투로 요동 지역을 정복했다.[43] 조선을 복속하고 내몽골 지역을 정복했으며 명에 대한 공세를 이어가 산해관 이북은 확실히 정복했으며 나머지 지역도 약탈 원정은 제대로 수행했다.[44] 그의 치세에 명나라가 정복되긴 했지만 정확히 말한다면 이는 섭정인 도르곤의 업적이다. 그걸 뺀다면 남명의 영토였던 윈난성을 정복해 명의 잔당을 미얀마로 몰아낸 정도가 있다.[45] 정씨 왕조가 지배하던 대만을 정복하고 준가르를 격파해 외몽골의 패권을 장악했으며 티베트 또한 정복한다.[46] 준가르를 멸망시켜 신강 지역을 정복, 청나라의 최대 판도를 이룩한다.[47] 사실상 정복군주의 대명사인 인물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정복군주.[48] 금나라동유럽 등을 정벌해 몽골 제국은 오고타이의 시대에 가장 서쪽 끝까지 넓어졌다.[49] 몽케의 시대에 동생 훌라구를 주축으로 중동을 정복했다.[50] 마우리아 제국의 최대 판도를 이룩했으며 이때가 아우랑제브 시기와 함께 인도 통일에 가장 근접했던 시기이다.[51] 영토를 오디샤와 스리랑카까지 넓혔으며 벵골은 물론 강력한 해군력으로 동남아시아인 스리위자야 제국까지 제압해서 촐라 제국의 전성기를 열었다.[52] 남인도까지의 영토 확장을 노리고, 수도도 델리에서 다울라타바드로 옮겨가며 정복 사업에 열중한 술탄이다. 투글루크 왕조를 시작으로 중남부 인도 데칸 지역에도 이슬람교가 본격적으로 전해진다.[53] 무굴 제국의 최대 판도를 이룩했으며, 그의 치세 때 인도는 통일에 가장 근접했었다. 그의 말년과 사후에 말아먹어서 문제였지...[54] 엄밀히 따지면 국왕은 아니다. '차트라파티'라는 왕위가 있어도 지역 군주에게 상당한 자치권이 있었고, 그 지역의 연합체가 마라타였다. 바지라오는 재상인 '페슈와'였고, 마라타 동맹의 실질적인 통치자였으며 마라타의 영토를 10배나 넓힌 인도 역사에 손에 꼽히는 정복자였다.[55] 동쪽으론 인도 델리, 서쪽으론 아나톨리아의 끝부분인 스미르나까지, 북쪽으론 킵차크 칸국을 제압했다.[56] 티무르 이후 나온 페르시아 지방의 정복자로 무굴 제국을 사실상 무너뜨린 장본인이다.[57] 정복왕의 원조라고 부를 수 있는 왕이다.[58] 동로마 제국을 봉신화시키고 불가리아 제국을 멸망 직전까지 몰았으며 세르비아 제국을 몰락시켰다.[59] 불가리아 제국을 멸망시켰고 뒤이은 니코폴리스 십자군 격퇴 및 동서부 아나톨리아 일대의 튀르크계 공국들 정복과 아나톨리아 최후의 동로마령인 필라델피아를 정복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나 티무르에 의해 이 모든 걸 잃고 몰락하며 이후 오스만은 공위기라는 첫번째 시련을 겪게 된다.[60] 테살로니카를 정복하고 카라만을 제외한 모든 튀르크계 공국들을 정복했으며 바르나 십자군을 격파하며 발칸 지역에 대한 패권을 장악했다.[61] 이쪽은 2천년 역사의 로마 제국을 자신의 손으로 끝장냈다. 이후로도 세르비아, 보스니아, 알바니아, 트라페준타 제국, 크림 칸국, 테오도로 공국, 이피로스 친왕국을 모두 무너뜨렸으며 베네치아를 에게 해에서 몰아내어 동부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고 심지어 이탈리아 남부의 오트란토를 일시 점령하기도 했다. 그 결과 얻은 칭호가 el-Fātiḥ (الفاتح, 엘 파티흐). 역시 '정복자'라는 의미다.[62] 이쪽은 당대 이슬람 최강국으로 인식되던 맘루크 술탄국을 쓰러트려 이집트를 정복했으며 사파비 왕조에게도 승리를 거두어 동부 아나톨리아와 북부 메소포타미아도 정복했다.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가 오스만의 치하에 들어온 것도 그의 치세때의 일.[63] 헝가리와 로도스 섬, 아라비아 반도를 정복해 오스만의 최대 판도를 사실상 만들어낸 장본인이다.[64] 칭기즈 칸과 함께 정복 군주의 대명사로 불리는 인물. 그의 치세때 페르시아 제국이 정복되었으며 인더스 강 지역까지 원정이 진행되었다.[65] 정복을 진두 지휘했다기 보단 국가가 활발히 정복한 시기의 군주라 일반적인 정복왕과 다르다.[66] 별명이 William the Conqueror(정복왕 윌리엄). 이곳에 기재된 정복왕들과 차별되는 점이라면 윌리엄은 출신자체가 영국 왕족 출신인 것이 아니라 프랑스 국왕의 신하 신분으로서 노르망디의 영주로 있다가 기존에 이미 존재하던 국가인 잉글랜드에서 왕위다툼이 벌어지자 바다건너 쳐들어가서 왕위를 차지한 왕이라는점이다. 참고로 그렇다고해서 윌리엄은 그냥 프랑스 영주지위도 갖고 별도로 잉글랜드 왕도 하게된 것이지 잉글랜드가 프랑스의 신하국인것으로 이해하면 안된다.[67] 포르투갈 백작 엔히크 드 보르고냐의 아들로, 1139년 포르투갈의 국왕으로 대관식을 치루면서 포르투갈을 건국했다. 별명으로는 o Conquistador(정복왕), o Fundador(창업왕) o Grande(대왕)[68] 그 평생 왕과 같은 지도자는 아니었지만 갈리아 정복, 브리타니아, 게르마니아 원정 등 외부 원정을 상당히 수행했다.[69] 내치 업적이 넘사벽이어서 그렇지 이쪽도 상당한 정복군주였는데 이집트와 이베리아, 팔레스타인, 아나톨리아의 구 폰토스령 등이 그의 치세에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었고 달마티아, 게르마니아 원정도 수행했다.[70] 다키아 전쟁을 통해 다키아를 로마의 속주로 편입했으며 나바테아 왕국을 멸망시키고 파르티아를 공격해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정복해 제국의 최대 판도를 이룩했다.[71] 불가리아 제1제국을 멸망시켜 불가리아 테마를 재건했다.[72] 노말, 하드 스토리에서 니벨룽겐 대삼림과 플로렌스를 정복했다.[73] 정복 전쟁을 벌여 동부 대륙을 통일하였다. 물론 아발론 동맹군과 저항군 세력들의 반격으로 오래가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