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서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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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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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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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서노
비류
온조
* 『수서』 에 언급 됨.





소서노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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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태의 부인
주몽의 부인
비류의 모친
온조의 모친
召西奴 | 소서노

파일:소서노그림.jpg

소서노 상상화.
출생
기원전 66년
부여
사망
기원전 6년 2월 (향년 60세)
백제 위례성
재위기간
고구려의 왕후
기원전 37년 ~ 기원전 18년 (19년)
백제의 태후
기원전 18년 ~ 기원전 6년 2월 (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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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연(延)(?)[1]

소서노(召西奴)
부친
연타발(延陀勃)
남편
우태, 동명성왕
양자
유리
친자
비류, 온조


1. 개요
2. 생애
2.1. 출신과 초기 일생
2.2. 동명성왕과 혼인하다
2.3. 백제를 건국하다
2.4. 죽음과 사후
3. 관련 기록
3.1. 기록의 문제점
3.2. 죽음
4. 대중매체에서
4.2. 소설



1. 개요[편집]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아내이자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어머니.

보통 대중매체에서는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건국하는 데 공헌하여 한국 고대사에 큰 영향을 남긴 여성으로 묘사되고 실제 후술되어있듯 그렇게 유추할만한 기록도 없는건 아니지만, 삼국사기를 비롯한 실제 역사서에서의 언급 분량은 오늘날 인지도에 비하면 매우 적은 인물로, 내용도 두서가 안맞는 부분이 좀 있어 2천년 이상이 지난 오늘날 실질적인 소서노의 삶을 명확히 알긴 어려운 측면이 있다.


2. 생애[편집]



2.1. 출신과 초기 일생[편집]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온조왕-조에 따르면 추모(동명성왕)가 처음 부여에서 도망쳐 나와 졸본에 이르러 졸본왕의 왕녀 3명 중 차녀와 결혼했다가 졸본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고, 그 사이에 온조와 비류를 낳았다. 여기서는 소서노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온조왕-조에 실린 다른 기록에 따르면 소서노는 졸본 사람인 연타발(延陀勃)[1]의 딸로 추모성왕과 혼인하기 이전에 북부여의 왕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와 혼인했다고 한다. 우태와의 사이에서 소서노는 두 아들인 온조와 비류를 얻었으나 남편 우태가 일찍 죽는 바람에 과부가 된 소서노는 졸본으로 돌아와 살았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온조와 비류는 원래 동명성왕의 친아들이 아닌 의붓아들인 셈이다. 무엇보다 이 경우에 백제의 시조는 비류왕이다. 백제 건국의 주체 자체가 다른 것이다.

또 다른 기록에는 추모가 홀본에 이르러 건너편 홀본군의 여자를 아내로 삼아 두 아들을 얻었다고도 하였는데 무엇이 사실인지는 알기 힘들다.

그리고 《삼국사기》 3번째 건국설[2]에 따르면 대방의 옛 땅에서 구태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과 결혼하여 백제를 건국했다고 전한다. 본래 백제는 동명성왕시조신으로 모셔 제사지냈으나 후기로 넘어가면서 시조신을 '구태'(仇台)로 바꾸었는데 일각에선 이 구태를 우태와 동일 인물로 추측하기도 한다. 문제는 제3의 건국자가 다른 사서에서는 부여왕 위구태(尉仇台)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 백제가 제26대 성왕 시대 남부여를 자칭하면서 부여와의 연결고리를 강조한 결과물로 추정되거나 혹은 중시조인 고이왕(제8대)을 강조한 것으로 보는데 이러면 소서노와 결혼한 우태의 정체가 분명해지지만 소서노의 의의가 이상해진다는 문제가 생긴다. 중국 쪽 사서의 인용이라는 점에서도 잘못 전래되었을 가능성 등이 있어 이쪽 건국설에 대한 연구는 빈약한 편이다.


2.2. 동명성왕과 혼인하다[편집]


이후 부여에서 대소왕의 위협에서 도망쳐 나온 동명성왕이 기원전 37년 2월에 졸본 남쪽에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를 건국하자 졸본의 소서노는 동명성왕과 혼인하게 되었다.

소서노는 동명성왕이 처음 고구려를 건국하고 창업의 기반을 열 때 내조하며 이를 도왔다. 같은 기록에서 온조와 비류가 나눈 대화에 따르면 소서노의 집안에는 많은 재물이 있었는데 이를 이용해 고구려의 건국에 크게 공헌한 듯하다. 이 때문에 동명성왕은 소서노를 극진히 아끼며 후하게 대접하였고 소서노가 데리고 온 두 아들인 비류와 온조 또한 친자식처럼 아꼈다.


2.3. 백제를 건국하다[편집]


기원전 19년 4월에 부여에서 아내 예씨가 낳은 친아들 유리가 찾아오자 동명성왕의 태도가 급변하여 유리를 후계자로 정하려 하였다.

하루아침에 차기 왕위를 굴러온 돌에게 빼앗기고 언제 버림받을지 모를 신세가 된 비류와 온조는 절망에 빠졌다. 게다가 그 해에 동명성왕이 죽으니 소서노, 비류, 온조 등은 더이상 고구려에서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힘들게 되었다.

비류와 온조는 결국 어머니 소서노를 모시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후 형인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동생인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을 정해 나라를 세운다. 처음에는 십제(十濟)였다.

여기서 남하 과정이 조금 이상한 점이 있다. 소서노, 비류, 온조 등이 남하할 때는 이를 추종하는 지지 세력들도 함께 했을 것이다. 그런데 졸본에서 미추홀과 위례성이 있는 한강 유역까지 가려면 낙랑군 등의 한사군 지역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하지만 기록 중에는 소서노 세력과 한사군 세력이 충돌하거나 하다못해 어떤 식으로든 접촉했다는 등의 내용이 없다. 《삼국사기》 -온조왕-조에서도 그냥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라고만 나오고 경로에 대한 설명은 없다. 《삼국사기》 자체의 기록 미비의 한계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3]


2.4. 죽음과 사후[편집]


어떻게 남하하여 자리를 잡았는지도 알기 어려운 마당에 이후의 소서노 행적도 당연히 알 수 없다. 《삼국사기》 -온조왕-조에 따르면 기원전 6년(온조왕 13년) 2월에 호랑이 다섯 마리가 도성 안으로 들어오더니 왕의 어머니가 61세의 나이로 죽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군주의 어머니가 소서노라면 기원전 6년에 죽은 셈이다.

기원전 6년 5월에 온조왕은 백제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족이 있어 늘 강토를 침략하므로 편안한 날이 없고 최근에 요망한 징조가 여러 번 나타나며 국모(國母)가 돌아가시는 등 정세가 불안하다며 도읍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기원전 2년 4월에 온조왕은 묘사(廟社)를 세우고 국모를 제사지냈다.


3. 관련 기록[편집]


혹 이르기를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는데, 왕이 아들이 없어 주몽을 보고는 보통사람이 아님을 알고 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이 죽자 주몽이 자리를 계승하였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은 그 아버지는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하였다. 북부여(北扶餘)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沸流)라 하였고, 둘째 아들은 온조(溫祚)라 하였다. 혹은 주몽이 졸본에 도착하여 건너편 고을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이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띠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강 남쪽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서기전 18)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어서 위례(慰禮)에 돌아와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하였다.

후에 내려 올 때에 백성들이 즐겨 따랐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그 계통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扶餘)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扶餘)를 성씨로 삼았다.

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조 비류왕(沸流王)은 그 아버지는 우태(優台)로 북부여왕(北夫餘王)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이었고,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로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었다.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큰 아들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뒤에 주몽이 부여(扶餘)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고 하였으며,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그녀가 나라를 창업하는 데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고,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였다. “처음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내주어 나라의 기초를 세우는 위업을 도와주었으니, 어머니의 조력과 공로가 많았다. 그러나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나라가 유류에게 돌아갔다. 우리가 공연히 여기에 있으면서 쓸모없는 사람같이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어머님을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살 곳을 선택하여 별도로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라 하고, 마침내 그의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고 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기로기》(耆老記)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은 고구려 여자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아, 이름을 피류(避流)와 은조(恩祖)라 하였다. 두 사람은 뜻을 같이하여 남쪽으로 가서 한산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해동고승전》 제1권 <석마라난타>



3.1. 기록의 문제점[편집]


<고구려본기>는 말할 것도 없고, <백제본기>의 본문도 비류, 온조 형제의 어머니에 대한 언급은 간략하다. '소서노'라는 이름이 등장하고 소서노에 대한 기록이 그나마 가장 자세한 것은 상기된 <백제본기>에 "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一云]"로 인용되는 묘한 문서다. 백제본기에서 온조왕으로 시작되는 기록을 '본문', 비류왕으로 시작되는 기록을 '일운'으로 나타내면, 이 두 기록은 다음과 같은 차이점을 보인다.

  1. 비류, 온조 형제의 혈통
    • 본문: 비류와 온조가 모두 주몽의 아들이다.
    • 일운: 비류와 온조가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의 아들이며, 주몽은 양아버지일 뿐이다.
  2. 백제의 시조
    • 본문: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이다.
    • 일운: 백제의 시조는 비류왕이다.
  3. 오간, 마려 등 10명의 신하
    • 본문: 도읍을 정하는 데 이들의 발언이 기록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 일운: 남하를 주도하는 것은 비류로 되어 있으며, 10명의 신하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4. 소서노
    • 본문: 소서노의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온조의 어머니는 단순히 졸본부여 왕의 딸로, 그로부터 추모로 왕위를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만 하고, 심지어 남하할 때 동행했는지조차 직접 언급되지 않는다.
    • 일운: 소서노가 자신의 재산을 이용해 주몽이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왔다고 하여 중요한 소임을 맡은 인물임을 강조한다. 이뿐만 아니라 형제가 어머니인 소서노를 모시고 남하했다고 적시한다.
  5. 형제의 남하 시점
    • 본문: 아직 추모가 왕이고, 유류가 태자가 되자 스스로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 일운: 추모가 죽고 유류가 왕위를 계승하자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가 기록될 고려시대 중엽에는 백제 초기에 상당한 견해 차이가 있는 두 종류의 문헌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전반적으로 전자의 문헌은 온조와 10명의 신하가 맡은 소임을 강조하며, 후자의 문헌은 비류와 소서노가 맡은 소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시조 설화의 차이에 근거하여 일부 사학자들은 백제의 건국집단을 두 개 이상으로 가정하기도 하며, 아예 비류를 시조로 하는 다른 나라(비류백제라고 가칭됨)가 있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비류국의 마지막 왕인 송양왕과, 비류국에서 이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소노부(=비류나부)를 소서노, 비류와 연관짓는 자도 있다. 일단 '비류'라는 이름부터가 한자까지 동일하고, '소서노'와 '소노'의 발음이 비슷하며, 소노부가 상당 기간 왕비족이었다는 점 등을 고려한 것이다.

간과하고 넘어갈지도 모르지만 삼국시대 시조모들 중에서 유일하게 신으로 추존되지 않고 인간으로 남은 사람이다. 그녀의 아들 온조가 삼국시대 건국자 중 유일하게 난생설화가 없는 것처럼 신화적 관점이 아니라 역사적 관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3.2. 죽음[편집]


관련한 추론 유튜버 영상.

13년 봄 2월 서울에서 한 늙은 할미가 남자로 변하였고,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나이 61세였다.

여름 5월에 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그들이 변경을 침공하여 편안한 날이 없다. 하물며 요즈음에는 요사스러운 징조가 자주 보이고,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셨으며, 나라의 형세가 불안하다.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하는 중에 한수(漢水)의 남쪽을 보니, 토양이 비옥하였다. 따라서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영원히 평안할 계획을 세워야겠다.”[4]

일각에서는 "늙은 할멈이 남자로 변하였다."를 '늙은 할멈=왕의 어머니=소서노'로, '남자로 변하였다=남자의 영역(왕위)을 차지했다'[5]로 해석한 다음 이것이 소서노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또는, "범 다섯 마리가 성안으로 들어왔다."를 호랑이를 토템으로 하는 토착민족을 업고 일으킨 정변을 빗대어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여, 온조왕 측과 대립하던 소서노가 온조왕 세력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옛날 사서에서는 반란이나 정변 같은 일은 불경스러운 일이라 여겨 대놓고 반란이 일어났다는 식으로 서술하지 않고 큰 변고가 일어났다는 식으로 에둘러 말하거나 빗대어 표현하기도 하였으니 말이다.

한편으론 호랑이의 경우 오히려 소서노를 죽인 세력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상기된 백제본기를 보면 온조왕 대목에선 10명의 신하들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들은 미추홀로 가자는 비류 대신 온조왕을 추대했고 결국 비류만 따로 이탈하게 되는데[6], 이 과정에서 10명의 신하들이 비류를 쫓아냈다고 생각한 소서노랑 갈등하다 결국 5명이 그녀를 죽인거 아니냐는 것. 그리고 이 경우라면 시조 비류와 시조 온조왕의 문제도 이해할 여지가 있는게, 처음엔 비류와 소서노 중심으로 건국이 되었으나, 이것이 온조계에 의해서 정권이 넘어가면서 시조 교체가 이뤄졌다는 식이다.

아니면 아예 시각을 비틀어서, 이 문제를 구 비류파와 소서노 사이의 갈등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소서노는 처음 온조 말고 비류랑 같이 비류국에 갔고, 비류가 죽은 이후 온조가 그리웠기에 다른 지역에서 다시 시작해도 되는 비류파 세력들을 설득해 온조한테 돌아왔다는 것. 허나 이미 한번 갈라졌던 구 비류파와 온조파 사이에선 갈등이 이어졌는데, 소서노 입장에선 본인이 실질적인 구 비류파 수장이라 하더라도 온조 역시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이었기에 구 비류파들의 불만을 억눌렀지만, 결국엔 강성파들을 제어하지 못해 남성 인물에게 리더 자리를 뺏겼다는 식으로 늙은 할미가 남자로 변했다는 문구를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 소서노가 반란을 일으켰다면 어떤 식으로든 표현이 남았어야 정상인데, 저 기록들을 봐도 딱히 소서노가 잘못했다는 뉘앙스는 없으며 온조 역시 소서노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있다. 결국 온조가 이 과정에서 어머니를 잃으면서 충격을 받아 황급히 도읍을 옮겼다는 식으로도 추정이 가능하다.

소서노 여왕설도 있는데, 애초에 소서노가 비류와 온조보다 먼저 왕을 했고, 기록대로 죽은 이후 할미가 남자(비류나 온조)로 변하면서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듯 비류파와 온조파가 헤어졌다는 것이다. 백제본기 온조왕 대목에서 나오는 도읍 위례성이 한수(漢水) 남쪽이라는 표현과 본 문단 삼국사기 내용에 기록된 온조가 한수(漢水) 남쪽으로 천도하겠다는 말이 시기상 상충되다보니 나오는 주장.[7] 이 설을 따른다면 다섯 마리 호랑이란 왕권이 교체되는 혼란기에 낙랑, 말갈 등 외적들이 심심하면 쳐들어오고 내부 갈등도 있다는 표현으로 추정할 여지가 있다.

다만 이런 설들도 어디까지나 상상의 영역일 뿐이라,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런 난장판 해석 없이 진짜 기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소서노가 사망할 시기 진짜 어떤 할머니 한명이 남자로 변장하는 웃긴 사건도 있었고, 진짜 호랑이 5마리가 성 안에 들어와 소동이 일기도 했는데가죽 득템, 그쯤 소서노는 그냥 나이가 들어 자연사했다고 볼 수도 있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여러 역사 소설에서는 막강한 재력을 갖춰서 고구려 건국에 막대한 공을 세웠다고 설정하는 경우가 많다. 《삼국사기》에서 비류가 "우리 어머니께서 재산을 기울여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라고 말한 것에 바탕을 둔 행보로 보이는데, 상기했듯 인물 기록이 별로 없어 나머진 거의 창작 수준이긴 하다. 그래서 더 인물상을 자유롭게 쓰고 싶은 작가들에게 인기가 있는건지도 모르겠다만.. 다만 이게 과해서 이따금 고주몽은 바지사장일 뿐이고 실제로는 소서노가 여왕이었다고 주장하는 경우까지도 볼 수 있다. 또 소서노를 대인배처럼 묘사한 일부 작가들은 결국 그 소서노가 고구려를 떠나는 이유를 설명해야 하니 동명성왕이나 유리명왕의 비중을 깎아내리고 때로는 특히 유리명왕을 거의 악당급으로 묘사하기도 하는데, 당연히 실제 역사는 알 수 없는 소설을 전개하기 위한 뇌피셜의 영역으로 보자. 어찌됐든 소서노 세력이 고구려와 백제를 건국하는데 참여했다는건 기록에도 나오기 때문인지, 대중매체에선 여장부, 톰보이 기질이 강한 활달한 투희로 묘사하는 경우도 많은 편이다.[8]


4.1. 드라마[편집]


  • 2005년 EBS 드라마 <점프2>에서 역사 속 인물로 출연하였는데 수염을 붙이고 다니고 노예로 끌려가는 등 온갖 고생을 하였다. 여기에서 묘사된 싸움 실력은 그대로라서 전투 상황에서는 일방적인 학살을 한다.

  • ||<:> 파일:소서노(한혜진).jpg ||
2006년 MBC 드라마 <주몽>에서는 배우 한혜진이 연기했다. 주몽과의 로맨스를 부각시키기 위함인지 이 드라마에서의 소서노는 '역사상의 소서노+추모의 원 부인인 예씨 부인'의 포지션도 일부 겸하고 있다.[9]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이자 군장이었던 연타발 밑에서 어려서부터 상인으로서나 군사로서나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자랐다. 추모와의 첫 만남은 썩 좋지 못했는데 대소와 영포의 간계로 늪에 빠져 죽을 뻔했던 추모를 구해주는 것으로 인연이 시작하지만 한심하게도 자신이 왕자라며 거들먹거리는 추모에게 소서노는 "한심한 놈"이라며 비웃는다.[10] 이후 추모가 연타발 상단에 들어와 상인들과 함께 지내면서 소서노와도 가까워졌고 소서노 역시 추모가 부여궁 내에서 영향력을 갖고 자립할 수 있도록 여러가지로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서 서로간에 사랑이 싹트게 된다. 그러나 금와가 이끄는 부여한나라의 전면전 이후 부여는 대소가 실권을 장악하고 추모는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작중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오래 전부터 소서노를 노렸던 대소가 주몽이 사라진 이후에도 계속 구애를 했는지 그의 구혼을 거절하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호위무사 우태와 혼인한다. 한편 추모는 돌아온 이후 예소야(예씨 부인)와 혼인해 대소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며 산다는 말을 듣고 본인도 내심 실망한 것으로 보이나 실상은 백성들을 데리고 부여를 떠나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함이었다는 것이[11] 밝혀지면서 다시금 추모를 도와주게 된다. 이후 추모가 이끄는 다물군과 소서노가 이끄는 계루가 졸본 전체를 통합하고 홀본의 지도자를 정하기 위한 논쟁이 일어나는데 부하들은 서로 자기 주군 덕분에 강해졌다며[12] 자기 주인이 군주가 되기를 원하지만 정작 추모와 소서노는 오히려 위 각주의 이유를 대며 서로에게 임금의 자리를 권하기만 한다. 그렇게 진척도 없이 분열만 지속되어 가다 연타발이 "이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혼인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의견을 낸다. 예소야와 유리를 잃은[13] 슬픔에 잠겨 있음을 아는 소서노는 말도 안 된다며 반대했고, 추모 역시 모팔모의 끈질긴 설득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으나 원행을 떠나겠다 밝힌 소서노에게 추모가 직접 청혼하여 두 사람은 마침내 혼인해 나라의 이름을 고구려라 정하고 추모는 고구려의 태왕, 소서노는 고구려의 태황후로서 즉위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죽은 줄 알았던 유리와 예소야가 돌아오자 고구려 조정에서는 태자 책봉 문제로 인해 또다시 많은 혼란을 야기했고, 자신이 사랑한 남편과 함께 세운 고구려가 건국 초기부터 분란으로 인해[14] 흔들리는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소서노는 결국 스스로 태황후 자리에서 물러나 추모에게 이별을 고한 뒤 졸본 토착 세력을 이끌고 남쪽으로 떠나는데 추모는 이를 안타깝게 지켜보는 것으로 끝난다.

  • ||<:> 파일:소서노.jpg ||
떠나지요. 고구려를 당신께 온전히 드리지요. 이 소서노. 사랑하는 내 고구려를 떠나고, 내 졸본을 떠나고, 내 고향 소노를 떠나고, 내 백성을 떠나드리지요. 하지만!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보십시오. 이 소서노가 아들들을 데리고 뭘 하는지. 유리 너 또한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보아라! 내 아들 비류, 온조가 너의 고구려를 어찌 넘어서는지. 천 대가 지나도, 만 대가 지나도, 이 소서노의 후손들이 반드시 너의 고구려를 밟고 일어설 것이다.
2010년 KBS 드라마 <근초고왕>에서는 수백 년 전의 일인만큼 본편에서는 등장이 없고 1화 회상 및 특별출연으로만 언급되는데 배우 정애리가 연기했다. 고구려 건국 초기까지만 해도 주몽과 소서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리부여에서 귀환하자 후계자 문제로 대립한다. 주몽(이덕화 분)이 유리를 태자로 삼으려 하는 찰나 책봉식장에 난입해 주몽이 유리에게 건네준 을 빼앗아 바닥에 던져 버리고 유리의 웃옷을 벗기더니, 비류온조의 웃옷도 벗겨 상처 하나 없는 유리와 대비되는 전장에서 얻은 흉터들을 보라며 주몽에게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삼으라고 요구하지만, 추모는 오히려 소서노에게 파혼을 선언하며 혼인 예물을 바닥에 던져 박살을 낸다. 이에 질세라 소서노도 주몽이 자신에게 준 혼인 예물을 내팽개쳐 버리고 추모와 유리에게 자신의 후손들이 반드시 당신들의 고구려를 밟고 일어설 것이라고 차갑게 내뱉고는 자신이 거느린 소노부의 신하들과 백성들을 데리고 남하하여 백제를 세운다. 여러모로 MBC 주몽의 소서노와 대조되는 모습인데, 주몽에서는 추모와 소서노의 사랑 이야기를 부각시키기 위해 소서노가 스스로 물러난 것처럼 묘사했지만, 권력 투쟁 측면에선 근초고왕에서 묘사한 소서노가 더 그럴듯할 수도 있다. 물론 2천년도 더 전의 일이라 당시 실제 내부 상황이 어땠을지는 미지수.


4.2. 소설[편집]


박창화의 창작으로 추정되는 《남당유고》에서는 3번 결혼한 인물로 그려진다. 물론 <왕후 우씨 일화>로 고구려에 형사취수가 있는 건 사실이긴 하지만 소설은 소설이니 크게 의미 부여를 할 필요가 없다.

  • 아버지: 연타발(延陀勃)
  • 어머니: 을류(乙旒)
    • 동생: 관패(貫貝, BCE 57~)
  • 첫째 남편: 우태(優台, BCE 70?~BCE 41)
    • 아들: 비류(沸流, BCE 47~CE 1)
    • 아들: 두절(斗切)→온조(溫祚, BCE 44~CE 28)
    • 딸: 아이阿爾(BCE 41~BCE 7)
  • 둘째 남편: 추모(芻牟, BCE 58~BCE 19)
    • 온溫(BCE 36~)
    • 마馬(BCE 29~)
    • 익翊(BCE 26~)
    • 당棠(BCE 24~)
    • 환歡(BCE 21~)
  • 셋째 남편: 유리(琉璃)
    • 진珍(BCE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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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타취발'이라고도 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근거는 없다. 사료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문헌에서는 '연타취발'로 등장하는 경우가 전혀 없고, '연타취발'이 쓰인 책이 하나가 있는데 바로 위서 《환단고기》이다. 설명이 필요없다.[2]수서》와 《북사》를 인용한 것으로 기록된다.[3] 다만 고대엔 영토에 비해 인구가 적어 밀도가 널널해 간접 통치 지역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이동 과정서 접촉이 없거나 적을 수 있다.[4] 실제 삼국사기 기록상으론 이 발언 2개월 이후부터 도읍을 옮기기 시작한다.[5] 걍 전투 복장으로 환복했다 정도로 보기도 한다. 중심 맥락에선 큰 차이는 없으나, 온조도 자신의 아들인 마당에 굳이 무리해서 왕위 찬탈할 당위성이 떨어지기에 나오는 주장. 후술된 신하들과의 갈등설과도 연관이 있다.[6] 이후 비류국이 망하면서 온조 백제로 합류한다.[7] 부정하는 쪽에선 기록이 약간 잘못됐거나 나침반도 없던 시절이니 착각한거고, 처음엔 한강 북쪽인 하북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다가 이후 한강 남쪽 하남 위례성으로 천도했다고 주장한다.[8] 그에 맞춰 유리의 친모이자 동명성왕의 첫째부인인 예씨는 청순가련 요조숙녀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9] 작중 초반에 대소가 소서노에게 "네가 마음에 든다"며 작업을 걸었는데 이는 역사상에서 대소가 예씨 부인에게 작업을 걸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10] 덕분에 스페셜에서 밝혀진 드라마 내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명대사가 "한심한 놈"이었다. 다만 그 유명세에 불을 지핀 것은 소서노 대사가 아니라 대소가 동생 영포에게 '한심한 놈'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부터였다.[11] 대표적인 예가 조선 유민들의 색출. 한때 추모가 데려왔던 조선 유민들을 모두 잡아들이라는 대소의 명이 있었지만 추모 입장에서는 오히려 유민들을 데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울 가장 큰 기회가 굴러들어온 셈이었다.[12] 홀본은 추모가 자립할 수 있었던 기반이 홀본이기 때문에, 다물군은 홀본이 강성해질 수 있었던 것은 추모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였다.[13] 정확히는 잃은 줄 알고 있던.[14] 쿠데타를 입에 담는 세력들이 공공연히 생기는 판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