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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扶餘孝
생몰연대 미상

1. 개요
2. 생애
3. 가족관계



1. 개요[편집]


의자왕의 아들이자 의자왕 말년 시점의 태자.


2. 생애[편집]


본래 의자왕의 태자이자 다음 후계자로 내정된 왕자는 부여융이었다. 그런데 백제 멸망 당시의 기록에는 태자가 '부여효'로 바뀌어 있고, 부여융은 태자가 아닌 단지 왕자로 칭하고 있다. 일단 기록상 부여융과 부여효는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 명확히 기록돼 있기 때문에 동일인물의 다른 이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몇 가지 설이 있지만 이는 아무래도 655년 정월에 일어났던 의자왕의 친위 쿠데타의 결과로 보인다. 부여효는 부여융의 배다른 형제로 추측되는데, 백제 말기에 전횡을 일삼았다는 의자왕의 대부인이 왕의 친위 쿠데타를 도와 권세를 잡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대부인 소생인 부여효가 부여융을 몰아내고 태자위를 빼앗아갔다는 설이 유력하다. 한편 이 의자왕의 대부인이 은고부인이라는 설도 있으나 아닐 가능성도 높다.

다만 그러면 또 의문이 있는데 이후 중국의 기록에 의하면 당나라에서 태자급 대우를 받은 것은 부여융으로 보이며 함께 끌려가서 살았을 부여효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심지어 당나라에 가장 반항적이었던 고구려의 권신 연남건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는데도 말이다. 의자왕은 태자와 함께 현 충청남도 공주시에 위치한 웅진성으로 도망쳤다가 북방령 겸 웅진성주 예식진의 배신에 의해 거기서 잡혔다고 하는데 공주시에 있는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인 신원사(사찰)(新元寺)의 부속암자인 고왕암(古王庵)에는 태자 부여융이 거기 있는 '융피굴'에서 잡혔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이에 따르면 정사인 《삼국사기》의 부여융이 사비성에 있었다는 기록과 배치된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멸망 직전인 659~660년에 여러가지 불길한 징조가 일어났다고 기록돼 있는데 그 중 659년 여름 4월, 태자궁에서 암탉이 참새와 교미했다는 기록을 그 태자궁의 주인인 백제 말기의 태자 즉 부여효가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것을 돌려 표현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물론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기보다는 백제가 멸망한 후에 그 원흉 중 하나로 지목돼 부정적인 소문이 돌았을 가능성도 있다.

660년, 나당연합군이 대대적으로 백제를 공격했고, 웅진강 입구의 전투에서 당군에게,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군에게 패배해 수도 사비성 공격이 눈앞에 다가오자 의자왕은 태자 부여효와 함께 사비성을 탈출하여 북쪽 웅진성으로 피난했다. 웅진성으로 떠난 이유는 웅진성이 지리적으로 수비하기 좋은 지형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나당연합군은 부여태가 지키는 사비성을 먼저 함락한 후 웅진성으로 밀려들었고, 예식진의 배신으로 부여효는 의자왕과 함께 포박당했다. 이후 의자왕과 같이 당으로 포로로 끌려갔고 이후의 생애는 알 수 없다.


3. 가족관계[편집]


  • 아버지 의자왕
  • 아들 부여문사 - 삼국사기의 백제멸망전 기록에서 등장. 여기서 효를 태자, 융은 왕자로 기록했고 문사는 태자의 아들이므로 효의 아들로 보인다. 그런데 효를 따라 웅진성으로 떠나지 않고 사비성에 잠시 남았다가 부여융과 함께 뒤늦게 밧줄을 타고 탈출한다. 융과 효의 사이가 좋았을 이유가 없어 의아한 대목인데 그만큼 백제멸망전 당시 상황이 긴박했다는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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