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타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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純陀太子
(? ~ 음력 513년 8월 26일)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백제의 왕족. 웅진백제의 중흥 군주인 제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와 《속일본기》에만 등장한다.


2. 생애[편집]


(七年) 夏四月 百濟王遣斯我君進調 別表曰 前進調使麻那者 非百濟國主之骨族也 故謹遣斯我 奉事於朝 遂有子 曰法師君 是倭君之先也

(7년, 505) 여름 4월 백제왕이 사아군(斯我君)[1]

을 보내어 조(調)를 바쳤다. 따로 표를 올려 “전에 조(調)를 바친 사신 마나(麻那)는 백제국주(百濟國主)의 골족(骨族)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삼가 사아(斯我)를 보내어 조정을 섬깁니다”라 하였다. 드디어 아들이 있어 법사군(法師君)이라 하였는데 곧 야마토노 키미(왜군, 倭君)의 선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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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권16 부레쓰 덴노#

야마토노 키미(왜군, 倭君)의 뜻을 그대로 해석하면 왜국(야마토)의 국왕, 즉 후의 천황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지만 '키미'는 반드시 군주의 의미로만 쓰인 건 아니고 존칭으로도 쓰였다. 예를 들어 《겐지모노가타리》의 겐지노 키미(원씨군, 源氏君)라는 칭호가 나오며, 사아군(斯我君)의 경우도 왕족인 부여사아를 존칭으로 부른 것이다. 법사군(法師君)의 경우는 출가를 해서 법사라 불린 건지 불교 지식에 해박해서 존칭으로 법사라 불린 건지 아니면 아예 본명이 불교식에서 따와 법사였던 건지 알 수 없다. 현대 한국어로는 '법사님' 정도의 존칭이 된다.

게다가 천황의 경우는 그냥 키미가 아니라 아예 '오오키미(대왕, 大王/대군, 大君)'라는 고유 호칭으로 불렸다. 즉 야마토노 키미(倭君)는 야마토씨를 존칭으로 부른 건데 여기서는 간무 덴노의 생모인 타카노노 니이가사를 가리킨다. 니이가사의 이전 성씨가 '야마토(화, 和)씨'였기 때문이다. 한자 표기인 '倭(왜)'와 '和(화)'가 다른 것은 아직 정형화된 표기가 정착하기 전인 고대에는 훈독이 같으면 대충 혼용되어 쓰였기 때문에 이상할 건 없다.

秋八月癸未朔戊申 百濟太子淳陀薨

가을 8월 계미삭 무신일(26일), 백제 태자 순타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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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권 17 게이타이 덴노 7년(513)#


사실상 위 기록이 기록의 전부. 사망에 대한 기록밖에 없어 그가 어떤 인물인지 전혀 알 수 없다.

25대 무령왕의 뒤를 이은 26대 성왕은 장자 또는 원자라는 표현이 없는 걸 보면 순타태자는 성왕의 형제라는 사실 정도만 간추려 볼 수 있다.

이후 《속일본기》에 따르면 그의 후손은 일본에 뿌리내렸고, 후에 코닌 덴노의 후궁인 타카노노 니이가사를 배출했다. 계보 조작의 가능성도 있지만 후손들의 정황이나 도일 기록이 전혀 없다. 무령왕 대에 사신으로 파견된 왕족인 부여사아가 그와 동일 인물인 것으로 추정된다. 부여사아는 《일본서기》에서, 순타태자는 《속일본기》에서 니이가사의 조상으로 나온다.

그러므로 순타태자는 일본에서 태어나서 생을 마감했거나 백제에서 일본에 질자로 보내져 체류 중 그대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순타태자의 후손들은 무령왕이 개로왕의 아들이라고 했다. 즉, 무령왕은 부여곤지의 아들이라는 《일본서기》와 배치되는 《삼국사기》의 가계를 따른 것이었다.


3. 여담[편집]


순타(純陀/淳陀)는 석가모니에게 버섯을 공양한 인물의 이름이었다. 독버섯인 줄도 모르고 석가모니에게 공양해서 석가의 병을 더 악화시켰다. 따라서 순타는 법왕 부여선의 사례처럼 불교식 시호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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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훈은 '시가 키시'. '키시'는 건길지와 관련있는 단어다.